▒ 월남이상재 ▒ 183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이회영 선생 일가의 집단 망명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 명이 한 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

기독교인 월남 이상재선생은 제사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제사문제를 둘러싼 대표적 논쟁 사례는 1920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양주삼 목사와 월남 이상재 선생의 논쟁이다. 당시 외국 선교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속에 양 목사는 제사를 우상숭배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에 대해 이상재 선생은 1920년 9월16일 신..

월남 이상재 선생을 배출한 목은 이색선생의 묘는 보조국사가 잡아준 명당이다

목은(牧隱)이색의 문헌서원에서 태조 이성계는 꺽이지 않는 절개에 사육신과 함께 참수를 하진 않은 이유가 그의 높은 학문을 매우 아꼈고 아들 방원의 이름을 작명을 해줄만큼 친햇던 그여서 죽임 만은 면해주려 했으나 끝내 곧은 선비정신은 여주현감이 내린 어사주를 마시고 죽임을 당하고 한산이..

'월남 이상재선생은 1887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고 미국으로 향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농촌 운동 보이스카우트 운동 등 민족운동을 벌였던 '월남 이상재'는 1887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가 38세 되던 해로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된 '박정양'을 보필하는 일등서기관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청국은 대표 일행이 미국에 도착..

세브란스의 에비슨 교장은 월남 이상재선생을 한국의 거인이라 불렀다.

좌우통합 리더십 그에게서 배워라” ‘한민족의 등불’ 月南 이상재 선생 학술세미나 열려 조선일보 사장·신간회 회장 등 역임 17일 충남 서천서…논문집도 발간 ▲ 이상재/언론인·사회운동가 “세브란스의 에비슨 교장은 그를 ‘한국의 거인(巨人)’이라고 불렀다. 과연 그는 거인이었다. 서양서 ..

이승만 대통령의 월남 이상재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 추도사

1949년 3월 29일, 해방 후 처음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 추도회가 열렸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이렇게 추도사를 읽어 나갔다. "나는 해방이 되고 얼마 후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일본의 동경을 경유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동경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을 때 그곳은 그야..

한국 현대사의 가장 존경할 만한 민족의 지도자 월남 이상재 선생

문화관광부(장관 : 남궁 진)는 3월의 문화인물로 독립운동가이자 시민운동가로 YMCA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제치하 고도의 해학과 기지로 우리 겨레에게 희망을 주어 후련한 마음을 가지게 한 이상재 선생을 선정하고,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거리캠페인(3.9), 역사학자와 함께 하는 독립운..

월남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걸쳐 한국 개신교가 배출한 가장 대중적인 민족인사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걸쳐 한국 개신교가 배출한 가장 대중적인 민족인사였다. 그는 일찍이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견학했으며 1887년에는 초대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미국문화를 직접 목격했다. 그후 한국에 돌아와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

일본 정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문>도 월남 이상재선생의 장례식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그는 '민중의 진정한 벗이였다고...'

월남 이상재(1850-1927) 나라를 위해서는 불굴의 정신으로 민족을 위해서는 위대한 지도력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투철한 신앙인으로 이 땅이 젊은이들에게 생명력과 비젼을 심어준 겨레의 등불 이상재 충신의 가문에서 태어남 이상재 선생은 1850년 10월 26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아버지 이..

월남 이상재를 비롯한 민족지도자 91명은 1920년 6월 23일 조선교육회를 창립

이상재를 비롯한 민족지도자 91명은 1920년 6월 23일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으로 民立대학을 세우기로 결정,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 운동이 국내외로 번져나가자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이 운동을 탄압하였고 民立대학 설립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

신간회 정신은 통합과 포용… 사회갈등 푸는 나침반”

신간회 정신은 통합과 포용… 사회갈등 푸는 나침반” 신간회(新幹會).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국사 교과서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던, 일제 때 민간 단체 중 하나로 기억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우리 근현대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좌우합작(左右合作)의 소중한 실현 사례였다. 1927..

신간회(新幹會) 창립 80주년 행사가 신문로와 태평로에서 각각 따로따로 열렸다

▲ 항일독립운동가단체협의회 주최로 15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신간회 창립 80주년 기념식 및 민족공동체상 시상식'이 열렸다. ⓒ2007 오마이뉴스 조호진 일제에 투쟁하기 위해 좌우가 연합해 만든 신간회(新幹會) 창립 80주년 행사가 신문로와 태평로에서 각각 따..

월남 이상재 선생을 초대 회장으로 출범한 신간회는 ....

▲ 신간회 창립행사 장면. ⓒ2007 민족문제연구소 80년 전 오늘인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서울 한복판 YMCA 회관에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조직과 단체들이 명멸했지만 신간회만큼 당시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계는 물론 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