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농촌 운동 보이스카우트 운동 등 민족운동을 벌였던 '월남 이상재'는 1887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가 38세 되던 해로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된 '박정양'을 보필하는 일등서기관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청국은 대표 일행이 미국에 도착하자 공공연히 방해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공사가 신임장을 받는 자리에 청나라 공사가 반드시 배석해야 하며,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조선 공사는 청나라 공사에게 일일이 보고를 해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요구까지 해 왔다. 그것은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청국의 처사였다. '박정양'은 그러한 요구가 말도 안 되는 것을 알았지만 강성한 청국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는 없는지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 '이상재'는 청나라 공사관의 서기관을 찾아가 기개와 배짱으로 설득해 조선공사 단독으로 신임장을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청나라의 압력으로 다음해 주미공사관 일행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재'가 미국에서 돌아와 '고종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고종황제'는 그를 반갑게 맞으며 공사관 일행의 업적을 치하했다. 그리고는 '고종'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해 호의를 품고 있던가?” 그는 엎드려 대답했다. “폐하께서 선정을 베푸시면 미국이 호의를 가질 모양이오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가졌던 호의마저 없어질 듯 하였습니다.” 공연히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미국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나라와 백성을 더 잘 보살폈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뼈있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물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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