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재김인전 ▒ 37

1998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鏡齋 김인전(金仁全)선생

1998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鏡齋 김인전(金仁全) 선생 (1876. 10. 7∼1923. 5. 12)   1919. 3·1독립운동 전북지방 주도 1920. 상해 임시의정원 부의장 및 정무조사 특별위원 역임 1922. 시사책진회 조직 제4대 임시의정원 의장 한국노병회 조직, 이사 역임 민족의 수난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뿐이다. ..

1919년 3월 1일 전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경재 김인전(金仁全)

김규배의 맏아들, 김인전 선생은 화양 와초에 있던 중등교육 기관인 한영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재직시 평양신학을 나와 1914년에는 전주 서문밖 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후 1919년 3월 1일 전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경에 쫓겨 상해로 망명해서 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

경재 김인전 선생이 화양면 와초리에 세운 한영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아버지의 스승, 김인전 화양면 와초리에 사는 임종석씨는 요즈음 마음이 다급하기만 하다. 75세의 고령이지만 세상을 뜨기 전에 꼭 할 일이 있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러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지난 8월 14일에는 열린 군수실에 찾..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김인전 선생은 누구인가.

1923년 서천에서 김인전 선생 추도 행사가 열렸다. 조선일보 1923년 5월 23일자에 김인전씨를 추도하는 행사가 열렸다는 기사가 있다. 즉 “고 김인전씨가 상해에서 세상을 리별하얏다 함은 이미 보도 하엿거니와 이 소식을 들은 충남 서천군 완포리 예수교회당에서는 남녀 수백명이 모이여 지난 십오일 ..

경재 김인전선생의 부음을 접하고도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못한 부인 박관애씨는 이후 47년 사망할 때까지 남편의 묘소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독립운동가의 대부분 후손들처럼 김인전 선생의 주변 가족들도 선생이 상해로 망명한 이후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경재의 부음을 접하고도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못한 부인 박관애씨는 이후 47년 사망할 때까지 남편의 묘소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언니 마저 48년 떠나보낸 뒤 남은 유..

상해로 건너간지 5년이 채 안된 1923년5월3일 김인전 선생은 상해의 한 여관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상해로 건너간지 5년이 채 안된 1923년5월3일 김인전 선생은 상해의 한 여관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상해동인병원에 옮겨졌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5월12일 서거했다. 왕성하게 일할 나이인 향년 48세로 생을 마친 데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상해 거주 많은 교민들..

3·1운동이후 김인전 목사가 상해로 망명한 후에 교회의 상황은 점차 수습되어 갔다.

전주서문외교회의 성장과정과 민족운동 안대희(연세대 박사과정) I. 서 론 : 문제제기 호남지방에 개신교가 유입된 것은 1893년이었다. 따라서 1993년 이후 여러 개별교회에서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 개교회사나 자료집을 편찬하고 있다. 이러한 편찬사업을 통하여 각 지방에서 개신교의 초기 전파과정..

경재 김인전 선생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 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 ] 서기로 임명되어 자금조달에 전념

1921년 8월 상하이[上海(상해)]에서 한국 독립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외교활동후훤회. 원명은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이다. 같은 해 11월 태평양 및 극동문제 등의 토의를 위해 워싱턴에 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의 국권회복운 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관할 아래 상하..

김인전 목사는 교회 청년 김가전, 이수현, 김종곤, 윤건중, 최종삼, 신일용 등과 함께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 5,000매와 태극기를 제작했다

전주 3.1운동 기독인 교사 학생등 ‘앞장’ 전북인권선교협의회 3.1절 기념 세미나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전북인권선교협의회(회장 김대선목사)는 지난 28일 신흥학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제 87주년 삼일절 기념행사를 갖고 삼일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

경재 김인전 선생은 망명 이듬해인 1920년부터 임시정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상해에 발을 디딘 경재는 망명 이듬해인 1920년부터 임시정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학무총장 권한 대행에 이어 1922년에 제4대 의정원 의장(입법부 수장)에 올랐다. 경재가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짧은 기간 급부상한 데는 무엇보다 계파를 초월한 화합정신..

중앙대 설립자이며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씨는 경재 김인전 선생이 자신의 신앙사상과 애국사상을 교육시켜준 스승으로 기록했다.

민족교육에 열성 활발한 목회 활동과 함께 경재는 민족교육에도 열성을 쏟았다. 교회 청년들과 기독교계 학교인 전주신흥중학교, 기전중학교 학생들을 지도했다. 당시 기전중학교에서 경재의 지도를 받은 중앙대 설립자이며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씨는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 경재가 자신의 ..

교육자로서 경재 김인전 선생,임정에서 함께 활동했던 해공 신익희 선생도 『선생에게서 한학을 다시 배웠고 그 분의 학덕에 감복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교육자로서 김인전 김인전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졌지만 상해로 가기전까지 국내에서 활동은 주로 교육과 목회자 생활이었다. 교육자와 목회자로서 전주에서의 활동은 지금까지도 뚜렷한 족적으로 남아있다. 충남 서천의 양반집 가정에서 자란 경재는 오랫 동안 한문학에 정진해 한문학에 조..

임시정부 제4대 의정원 의장을 지낸 김인전(金仁全) 선생,고인이 된 경재(經齋) 김인전 선생은 차가운 이역만리에 쓸쓸히 묻혀 있었다.

4월13일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꼭 80년이 되는 날. 일부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이 갖는 중요성과 의미는 우리 헌법에서 대한민국이 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선언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임시정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많은 인사들이 조..

경재 김인전 선생의 부친 김규배 선생의 신앙생활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

연봉교회의 김규배, 완포교회의 김인전, 지방동교회의 류기택, 종지교회의 유성열 그리고 금산읍교회의 이경필 영수가 그들이다. 김규배의 관직은 비록 감역에 머물고 있지만, 그는 신앙과 신학문의 선각자였다. 그의 입교는 동향이었던 월남 이상재의 영향으로 이뤄졌다. 이창규는 이렇게 술회하고 ..

충남 한산 장로교의 전래, 수용과 경재 김인전 선생의 활동

충남지방 장로교의 전래와 수용 송 현 강* 1. 머리말 2. 19세기말 충청남도 향촌사회 의 동향 3. 충남의 선교 지역 분할 4. 충남의 장로교회 형성 과정 5. 충남지방 장로교인들의 입교동기와 교회 생활 6. 맺음말 1. 머리말 충남지방은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각광받던 곳이 아니었다. 복음의 수용과 관련하여..

김인전 선생 기억하세요? 무서운 양반이었어. 안경을 쓰고 항상 검정 양복 입고 말을 타고 다니셔서..

한영학교 김인전 선생은 1911년 한산군 남하면 와초리 지사울(지금의 화양면 와초리)에 세워진 한영학교(韓英學校)에 재직하면서 인재 육성에 열정을 쏟으신 분이다. 알다시피 1910년 일제는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열게 하여 한일합방을 의결케 하고 8월 29일 합방조약을 공포하였다. 그후 일제가 교육방..

서문밖교회 김병롱 목사의 사면과 김인전 목사의 청빙

(1) 김병롱 목사의 시무 활동 서문밖교회가 처음으로 당회를 조직한 것은 김필수 씨를 장로로 세운 1908년 8월이었는데 이는 김병롱 목사가 위임목사로 교회에 부임하기 전이다. 김병롱 목사 부임 전 서문밖교회는 담임 이눌서 목사와 김필수 장로 두 사람으로 당회를 구성했었다. 이눌서 목사는 당회에..

경재 김인전 선생,김구, 조상섭, 이유필, 여운형 등과 한국노병회(勞兵會)를 발기 이사에 선임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조직 경재 김인전선생 1922년 10월에는 김구 조상섭(趙尙燮) 이유필(李裕弼) 여운형(呂運亨) 등과 한국노병회(勞兵會)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하였는데 그는 노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4월에는 경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노병회는 1932년..

김인전 목사는 1914년 10월 16일 전주로 부임하여 18일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김인전 목사의 목회 김인전 목사는 1914년 10월 16일 전주로 부임하여 18일(주일)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김인전 목사의 취임으로 교인들은 단합하여 새로운 기상으로 교회를 섬겼다. 김 목사 역시 교회 갱신을 위하여 그의 지력을 힘써 발휘하였다. 먼저 강설에 더욱 충실히 힘썼다. 그는 원래 기독교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