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전 목사의 목회
김인전 목사는 1914년 10월 16일 전주로 부임하여 18일(주일)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김인전 목사의 취임으로 교인들은 단합하여 새로운 기상으로 교회를 섬겼다. 김 목사 역시 교회 갱신을 위하여 그의 지력을 힘써 발휘하였다. 먼저 강설에 더욱 충실히 힘썼다. 그는 원래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에 유교(儒敎)와 불교(佛敎), 심지어 도교(道敎)의 경전들을 섭렵하였던 만큼 다른 종교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목회와 강설, 성경교육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힘있게 밝히고 깨우쳤다. 교인들은 이 강설을 듣고 기쁨에 넘쳤으며 그는 교인 전체의 성경교육에 열성을 기울였다. 전임자 시무 시기에 교세가 발전하지 못했음을 가장 마음 아프게 느낀 것 중 하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인원이 점점 줄어드는 일이었다. 교회에 모이는 추세가 1910년대 초에는 시국 관계로 매주일 500명 내외가 참석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체념하고 긴장이 풀리면서 교회 출석인원 수가 차츰 줄어들었던 것이다. | |
![]() 김인전 목사와 성경학교 학생들 | |
교인 전체에 대한 성경공부로는 월보공부 이외에 사경회(大·中·小사경회)와 단기 성경학원이 있었다. 김 목사 자신은 모든 사경회와 단기 성경학원의 강사로 나가 열심히 가르치기에 힘썼다. 때때로 신흥·기전학교의 초청을 받아 나가서 강설하였고 특히 민족주의적 기독교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많은 교사와 지각 있는 학생들이 김 목사의 사랑방(객인 접대실)에 찾아와 담론을 나누었다. 또 주일에는 교사와 많은 학생들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2) 예배당사랑 설치 김인전 목사는 본래 조부의 유산으로 가정형편이 유족하였으며 금전문제는 청렴하고 개결하면서도 후한 인심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그는 전주에 오기 전 출생지 충청도에서 큰 가대를 이루고 살았는데 사랑방에 여러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 사저(私邸)에서 중학교를 경영하면서 어려운 농촌 청소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그런 관습은 목사가 되어 전주에 이사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서원 너머에 사가(私家)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살게 하고 예배당 구내의 목사 주택에서는 목사 내외만 거주하며 방 한 칸을 사랑방으로 완전히 개방하고 찾아오는 식객을 유숙하게 하였고 제직회와 당회도 이곳에서 모였다. 당시 제직회록이나 당회록에 회의장소가 대개 ‘예배당 사랑’으로 기재되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방 식객 중에는 총각 조사도 있었지만 당시 전주의 이름난 괴짜인물
(3) 교회 직원 보충 1914년 8월 9일 최광진 피택장로가 시무사임서를 제출하여 수리되고, 20일 후 김병롱 목사가 또한 결연하게 목사 시무사임서를 제출하여 교회와 노회는 이를 수리하였다. 이에 1914년 12월 14일 이눌서 목사의 인도로 신임 김인전 목사의 교회 담임 취임식을 거행한 교회는 이어서 김 목사 인도로 공동의회를 열고 장로 1인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선거 결과 최광진 씨가 다시 피택되었다. 이에 1915년 6월 25일 전주시찰위원회는 본교회 예배당 사랑에서 모여 최광진 씨에 대하여 장로 시취(試取) 문답을 실시하였다. 또 같은 해 7월 4일에는 다시 공동의회를 열고 김건표(金建杓) 씨를 장립 집사로 선출하고 이돈수(李敦壽)·한우성(韓佑聲) 씨를 서리집사로 선임하였다. 7월 11일에는 최광진 피택장로와 김건표 집사의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교회는 1915년 8월 22일 최의덕 목사의 인도로 공동의회를 열고 김인전 목사를 임시목사에서 위임목사로 하는 문제에 대해 회의한 결과 전원 가(可)하다고 결의하였다. 따라서 같은 해 10월 3일에 전주지방시찰위원회가 모여 1년 동안 본교회 이눌서 목사와 임시동사목사로 시무하였던 김인전 목사를 본교회 위임목사로 할 것을 공포하였다. 1915년 11월 21일에 교회는 공동의회를 열고 장로 1인을 가택(加擇)하니 정인수(鄭寅秀) 씨가 선택되었는데 이 분은 전주 정석모(鄭碩謨) 진사의 부친이었다. 동시에 교회는 김진상(金鎭相)·양경현(梁敬鉉)을 서리집사로 세웠다. 1916년 4월 4일에 전주지방 시찰위원회가 본교회 예배당 사랑에 모여서 피택장로 정인수를 장로 시취문답하고 4월 16일 강운림 목사 인도로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1916년 8월 13일 교회는 다시 공동의회에서 장립 집사 2인을 투표로 선출하니, 김진상·이돈수 씨가 피택되었고 8월 20일 주일에 이눌서 목사의 인도와 권면, 김인전 목사의 안수기도로 집사장립식을 거행하였다. 1918년 4월 14일 주일에는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공동의회로 모여 장로 2인을 가택하기 위하여 투표한 바 김진상·이돈수 씨가 장로로 피택되었다. 교회는 서리집사로 오공여(吳公汝)·이명수(李明洙)·이순서(李舜瑞)·강규찬(姜圭贊) 씨를 선임하였다. 1918년 8월에 김진상·이돈수 씨가 전주지방시찰위원회에서 실시한 장로 시취 문답을 마쳤고 이어서 이들에 대한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서문밖교회의 당회원은 김인전 목사와 이승두·최광진·정인수·김진상·이돈수 장로로 구성되었고 교회의 직원도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4) 교회 발전에 타격을 받음 김인전 목사의 목회는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15년 11월에는 서문밖교회 초창기부터 약 10년간 교회의 모든 일에 빠짐없이 심혈을 기울여 열심히 봉사하던 전영칠 씨가 교회의 전도인으로 또 장립 집사로 목사를 받들어 왔는데 그는 신앙생활상 괴로운 일이 있다 하여 자진 사면서를 제출하였다. 당회가 그냥 수리하려다가 그 내면사유를 살펴보니 그가 제7계명을 범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치리당회를 열고 구체적으로 조사하였고 결국 그를 출교처분하기로 결정한 후 권징의 법도를 세우고자 하여 11월 7일 주일 김인전 목사는 눈물을 머금고 교회 앞에 출교처분을 광고하였다. 교인들은 숙연하였다. 더욱이 그의 부인도 범행 사실을 숨겼다 하여 수찬정지의 책벌을 받았다. 김인전 목사는 열심히 교정을 도왔던 그를 생각할 때 마음이 오래도록 무거웠던 차에 1916년초 군산의 두 교회(군산교회와 구암교회)가 연합하여 김인전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 교섭하자 마음속으로 편집(編執)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시무 교회를 옮겨 보리라며 추이를 기다렸다. 이눌서 목사가 임시 회장으로 1916년 1월 16일 주일 공동의회를 열고 교인들에게 군산·구암교회의 김 목사 청빙 청원건을 물어보니 교인 전원이 만장일치로 부결하였다. 또한 이 문제를 가지고 1916년 1월 31일 전라노회에서도 군산·구암교회의 간절한 청빙 청원건을 표결에 부치니 김 목사의 군산 이전 건은 부결되었다. 이로써 김 목사는 마음을 정하고 힘있게 전주서문밖교회의 목회에 전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1917년 8월 24일부터 열린 제7회 전라노회에 보고된 전주지방 시찰위원(위원장 김인전 목사)의 보고에는 서문밖교회의 정황이 나타나 있다. 1년 중 다른 교회로 나간 자, 출교처분된 자, 이사한 자, 별세한 자 등이 약 70명이라고 하였다. 이들 중에는 1908년 4월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제직회가 발족될 당시 전도인으로 전영칠 씨와 더불어 교회를 섬겼던 전병직(全秉直) 집사 가족 5명이 다른 세 가정과 함께 다른 교파 교회(조합교회)로 나갔는데 당회는 이들 15명을 교인 명부에서 제명 처리하였다. 이와 같은 타격을 받았지만 1918년 8월 26일부터 열린 제3회 전북노회에 보고된 전주서북지방 시찰위원의 서문밖교회 관계 보고는 일반 교인 중 나간 자도 있고 들어온 자도 있어 교세는 그대로였다고 하였다. 특별히 주일 오후의 성경연구회와 주일학교, 소아회(小兒會)가 왕성했다는 것으로 보아 교회가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인전 목사의 성경 강설 능력이 명망이 있어 삼례교회에서는 김 목사가 한 달에 두 차례씩 설교강단을 맡아줄 것을 결의하여 서문밖교회와 노회에 정식으로 청빙 청원을 하였다. 서면청원을 받은 서문밖교회는 1918년 8월 22일 사일기도회(목요일)를 마치고 임시제직회를 소집하여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그 결과 김 목사로 하여금 한 달에 한 주일과 기도회 하루를 삼례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결의하고 삼례교회에 서면으로 이를 회답하였다. 서문밖교회가 이 안건을 허락함에 따라 1918년 8월 26일에 모인 제3회 전북노회에서도 앞으로 1년간 삼례교회의 당회권리를 맡은 마로덕 목사와 함께 동사목사로 김인전 목사가 겸임할 것을 허락하였다. |
'▒ 경재김인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주서문교회의 탄생과 제2대 목사 김인전 (0) | 2007.03.15 |
---|---|
경재 김인전 선생님 사진 (0) | 2007.03.15 |
독립운동가 김인전 선생 추모비… 우리가 세운다 (0) | 2007.03.15 |
경재 김인전 목사와 3·1운동 (0) | 2007.03.14 |
서문교회 김인전 목사(제2대), 공덕을 기리기 위해 다가공원에 기념비를 건립 (0) | 2007.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