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자료실 ▒ 47

고려판 정신대 “공녀” 제도폐지시킨 이곡선생의 항소문과 찔레꽃 노래 사

고려판 정신대 “공녀” 제도폐지 시킨 가정이곡의 항소문 ㅡ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ㅡ 이 노래는 고려 여인들이 “공녀”란 이름으로, 원나라에 끌려가면서, 비통함을 노래한 가사로 “찔레꽃”이다..

영웅은 이미 갔으나 산하는 남아 있으며 -이맹균(李孟畇) -

해동잡록 3 본조(本朝) 이맹균(李孟畇) ○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지밀직사(知密直事) 종덕(鍾德)의 아들이다. 고려의 신우(辛?) 때에 나이 15세로 등제하였으며 문명(文名)이 있었다. 특히 시를 잘하였다. 이조에 들어와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가 죄에 연좌되어 유배되어 죽었다. 시호는 문..

시내 서쪽에 새로 마련한 집의 상량문 -이식(李植)-

상량문(上樑文) 택풍당(澤風堂)의 상량문은 택풍지(澤風志)에 보임 시내 서쪽에 새로 마련한 집의 상량문 사방을 둘러보아도 달려갈 곳도 없이, 그저 오래도록 떠돌이 생활에 지쳤는지라, 하나의 가지를 옮겨서 둥지를 틀 생각을 억지로 내어, 여기에다 터를 잡고 집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

연복사(演福寺)에 종을 만들어 이곡(李穀)이 기문(記文)을 지었으며...

부 간본 아정유고 제3권 기(記) 계사년 봄 유람기(遊覽記) 계사년(영조 49, 1773) 윤삼월(閏三月)에, 나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호)ㆍ영재(?齋 유득공(柳得恭)의 호)와 함께 평양(平壤)을 유람하기 위해 25일 파주(坡州)에서 잤다. 홍제원(弘濟院)으로부터 녹반현(綠礬峴)에 이르니 길이 훤히 트여 넓..

이곡(李穀)의 문인이요 사위였든 박상충 묘갈명(墓碣銘) -김육(金堉)-

《고려사》 권112 열전(列傳)25에 실려 있다. 박상충(1332 ~ 1375)은 이곡(李穀)의 문인이요 사위였으며, 신진 성리학자이자 친명파(親明派)로 활약하다가 반대파에게 암살되었다. ****************** 묘갈명(墓碣銘)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박공(朴公)의 묘갈명 예로부터 현인 군자가 시대를 만나지 ..

이곡(李穀) 등을 뽑았는데, 왕이 인재 얻은 것을 가상히 여겨-이제현(李齊賢)-

충렬왕(忠烈王)..ㆍ이곡(李穀) 등을 뽑았는데, 왕이 인재 얻은 것을 가상히 여겨 은병(銀甁) 50개와 쌀 1백 석(石)을 주어 학사연(學士宴)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 전(箋)을 올려 서연강설(書筵講說)의 직(職) 면하여 주기를 빌면서, 찬성사(贊成事) 안축(安軸)ㆍ밀직부사(密直副使) 이곡(李..

유항 선생(柳巷先生) 한 문경공 수(韓文敬公脩)의 문집의 서 -권근(權近)-

유항 선생(柳巷先生) 한 문경공 수(韓文敬公脩)의 문집의 서 근세의 명경(名卿)으로는, 유항(柳巷) 한 문경공이 지행(志行)이 높고 견식(見識)이 밝아 한 시대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고, 필법(筆法)이 뛰어나 온 세상이 중시하는 바 되었었다. 현릉(玄陵 공민왕)에게 신임을 받아 오래 후설(喉舌)의 자리..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문집의 서 -권근(權近)-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문집의 서 문자가 천지간에 존재(存在)하여 도(道)와 성쇠를 같이하는 것이니, 도가 위에서 행해지면 글이 예악(禮樂)과 정교(政敎) 사이에 나타나고, 도가 아래에서 밝아지면 글은 간편(簡編)의 필삭(筆削) 가운데 의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ㆍ모ㆍ서ㆍ명(典謨誓命)의 글이..

춘풍가(春風歌). 연경(燕京)에 가는 명중(明仲)을 보내다-서거정(徐居正)-

춘풍가(春風歌). 연경(燕京)에 가는 명중(明仲)을 보내다. 춘풍가 / 春風歌 봄바람은 장안의 꽃들을 두루 다 피우고 / 春風開遍長安花 봄 강물은 포돗빛 푸른 물결이 벌창하는데 / 春江綠漲葡萄波 봄바람이 나를 등지고 돌아가려고 하니 / 春風背我欲歸去 가는 봄 보내는 나의 시름을 그 어이하랴 / 我送..

이곡〈李穀〉)이 36세 적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 제1명(第一名)에 합격하고 -송와잡설- |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36세 적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 제1명(第一名)에 합격하고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드디어 제과(制科)에 뽑혔다. 이에 앞서 본국 사람으로서 비록 제과에 합격하였으나 죄다 하열(下列)이었는데, 공이 지은 대책(對策)은 독권관(讀券官)이 크게 칭찬하여 제2갑(第二..

이곡〈李穀〉)께서 36세 때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에 이갑(二甲)으로 등과하였다-송와잡설-

가정(稼亭 이곡〈李穀〉)께서 36세 때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制科 천자가 친히 시험 보이는 과거)에 이갑(二甲)으로 등과하였다. 가정 이전에는 동국(東國) 사람으로서 이갑으로 등과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27세 때에 제과에..

의풍루가 또 불타 버려서 선유(先儒) 가정(稼亭) 이선생(李先生)의 기(記)도 따라 없어졌으니,(경상도 경주)

참봉(參奉) 2인.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신전(神殿)은 엄숙하고 깊은데, 새벽 햇빛 밝게 오르네. 요지(瑤池)에 채장(綵仗)이 벌여 있고, 비단 문턱에 향연(香煙)이 둘렀구나. 궁관(宮官)이 창합(?闔 궁궐의 정문) 여니, 푸른 무늬 놓은 문이 깊고도 그윽하네. 소신(小臣)이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곡(李穀)이 젊어서 영해(寧海)에 놀았을 때,-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 김택(金澤) ... 이곡(李穀)이 젊어서 영해(寧海)에 놀았을 때, 택이 향교의 대현(大賢)으로서 곡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을 알고, 자기 딸을 곡의 아내로 주어 낳은 아들이 색(穡)이다. 대현은 생도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일컬음이다. 김요(金饒) 택의 아들인데, 과거에 올라 벼슬이 중대광 함녕군(..

한산(韓山)에 이르니, 그 시조 이자성(李自成), 가정(稼亭)......-윤국형-

문소만록(聞韶漫錄) 판서 윤국형(尹國馨) 저 ○ 나는 태어난 지 겨우 반 달 만에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유씨(柳氏)와 외증조모 이씨(李氏)가 길러 주었다. 유모(乳母)를 얻으면 젖이 이내 끊어지고 나오지 않아서 여러 번 유모를 바꾸게 되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여섯 달을 이렇게 하였다. ..

춘정월 찬성사 이곡(李穀)이 졸하니 향년이 54였다.

신묘년 충정왕 3년(원 순제 지정 11, 1351) 춘정월 찬성사 이곡(李穀)이 졸하였다. 곡(穀)은 일찍이 강릉군을 왕으로 세우자고 청하였는데, 왕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였다. 원에서 행성좌우사 낭중(行省左右司郞中)을 제수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졸하니 향..

이곡 어사대(御史臺)에 동녀를 구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청하고 소(疏)를 지어 올리기를,

○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환자(宦者)와 동녀(童女)를 구하였다. 이때 전의 부령(典儀副令) 이곡(李?)이 원에 있었는데, 어사대(御史臺)에 동녀를 구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청하고 대신 소(疏)를 지어 올리기를, “옛날 성왕(聖王)께서 천하를 다스릴 적에 피아(彼我)의 구별없이 똑같이 사랑하여, 비록 천..

이곡(李穀)이 원에 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안정복-

○ 전 검열(檢閱) 이곡(李穀)이 원에 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 당대(唐代) 이래로 공사(貢士)로 제과(制科)에 합격하는 자는 으레 병과(丙科)의 끝으로 쳤는데, 이때 와서 곡의 대책(對策)이 크게 독권관(讀券官)의 칭찬을 받아 제이갑(第二甲)에 발탁되었으니,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원에서 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