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중수기(杏亭重修記) 이남규(李南珪)
모든 사물의 존재에 있어, 그 유(有)는 무(無)로 끝나지만 무는 다시 유로 돌아와서 마치 서로 순환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이수(理數)인 것이다. 이수란 곧 사물이 드러나고 가려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기틀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 어떤 사물이 있어서 그것이 이 기틀과 관련하여 끝내 가려지고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천지와 귀신이 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겠는가.
고려 말엽에 행정(杏亭) 진공(秦公)이란 분이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났었다. 그런데 그는 일찍이 풍기(?基)의 주치(州治)인 봉성(鳳城) 밑에다 정자를 짓고 은행나무를 심어서 이를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뒤 세월이 오래 되어 정자가 허물어지고 은행나무 또한 누구의 손엔가 베어져 버렸으며, 이리하여 공의 자취가 사라져서 상고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가끔 고을의 고로(故老)들이 더러 이 은행나무 정자의 유지(遺趾)를 말하기는 했지만, 역시 그 장소를 분명히 지적해 내지는 못하였다.
이럭저럭 5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은행나무의 뿌리가 밭갈이를 하던 중에 드러났는데, 그 크기가 무려 열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창연(蒼然)한 색깔이 마치 호랑이가 웅크린 듯 용이 서린 듯하였다. 그래서 공의 자손들이 모여서 이를 보고는 다들 기뻐서 손뼉을 치면서 서로들 의논하여 말하기를, “저 우람한 밑둥이 우리 선조께서 심으신 그 은행나무의 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선조께서 지으신 정자의 터가 바로 이 곳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곧 우리가 늘 찾고자 하였지만 찾지 못했던 바로 그 곳이다. 그런데 지금 다행히 이를 찾았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자리에 터를 닦아서 새로 정자를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정자의 현액(懸額)을 걸었다. 그러고는 사람을 서울로 보내어 나에게 그 정기(亭記)를 청하여 왔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우리 선조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은 공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고 나 또한 공의 외손이 되니, 정의(情誼)로 보아 이를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다.
은행나무는 하나의 식물이다. 그러므로 사람과는 동등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유(有)에서 무(無)로 돌아가고 무로부터 다시 유로 돌아와서 그 드러나고 가려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기틀은 가히 예견할 수 있다 하겠으니, 그렇다면 공의 자취가 이제부터 장차 드러나려는 것인가. 공의 자취가 드러난다면 공의 자손들 또한 이로부터 장차 일어나지 않겠는가.
사물 중에 나무뿌리처럼 잘 썩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 은행나무의 뿌리는 몇백 년이 지나도록 다른 물건들을 따라 썩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원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공의 자손들로 하여금 이에 근거하여 옛 정자의 터를 찾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저 기틀에 관계되는 것은 끝내 이를 헐어서 폐기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천지와 귀신이 보호해서 지켜 준 그것이 아니겠는가.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 하였다. 그러니 공의 자손들 또한 응당 이를 공경할 줄을 알 것이며, 따라서 그 공경할 바를 안다면 드러나고 일어나는 것은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만일 후일에 언젠가 영남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봉성 밑에 정자가 우뚝이 서 있는데, 그 정자 옆에 심은 은행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그늘이 울창하더라.” 하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뿌리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 것이다.
'▒ 가정자료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에 으뜸이었네. -김자수(金子粹)- (0) | 2007.03.01 |
---|---|
칠대조(七代祖) 정랑공(正郞公) 행장 - 이남규- (0) | 2007.02.28 |
관화지(觀華誌) 서문-이남규- (0) | 2007.02.28 |
가정과 목은의 빛이 일월처럼 밝은데 -송시열- (0) | 2007.02.28 |
성소부부고-허균(許筠)- (0) | 2007.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