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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화지(觀華誌) 서문-이남규-

천하한량 2007. 2. 28. 23:41

관화지(觀華誌) 서문
   

                       이남규(李南珪)

                                             

대국(大國)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선발이다. 그간에 대관(大官)으로서 사신 가서 굉대(宏大)하고 장려(壯麗)한 글로 울연(蔚然)히 그 곳 사람들을 경동(驚動)시킨 자들이 서로 이어서 많이 나왔으나, 그 산천의 험준하고 평탄함이나 정후(亭?)의 멀고 가까움, 그리고 그 전부(田賦)와 군비(軍備) 및 민물(民物)과 요속(謠俗) 등의 저작에 이르러서는 더러 이에 미치지 못한 자들이 있다. 그리고 세미(世美 가문의 아름다운 전통)를 잇는 것은 성업(?業 훌륭한 가업(家業))이다. 아들이 능히 그 아버지를 잇고 손자가 능히 그 할아버지를 이은 사례는 한두 사람 들어 보았지만, 그 가문을 일으킨 조상으로부터 세대가 차츰 멀어지고 유풍(遺風)이 자꾸만 성기어졌는데도 그 가업(家業)을 능히 계승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런 일이 있다는 말을 나는 아직 들어 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사신의 일과 가문의 일 두 가지 중에서는 한 가지를 갖추는 것도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이를 겸하는 일이겠는가.
우리 가문의 종장(宗丈)이신 삼은 상서(三隱尙書)는 일찍이 대행인(大行人 대국(大國)에 가는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는데, 돌아와서《관화지(觀華誌)》라는 책을 지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졌는데, 시(詩)와 녹(錄)과 기(記)가 그것이다. 이 때 내가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인하여 그 책을 얻어 와서 읽어 보았다. 그러다가 그 시에 이르러 감탄하기를, “아름답구나, 그 한아(閒雅)하고 광활(曠闊)함이여. 여행을 기록하는 글의 체재는 응당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다시 그 녹과 기에 이르러는 더욱 정신이 번쩍 들어서 말하기를, “광대하구나, 그 폭 넓은 기록이여. 앞에서 말한 산천의 험준과 평탄, 정후의 멀고 가까움, 전부와 군비 그리고 민물과 요속 등이 일목요연하게 마치 눈앞에 전개된 듯하니, 대관(大官)으로서 나라의 중요한 임무에 선발되어 외국에 사신 가는 자는 응당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공의 자서(自敍)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공의 이번 길이 바로 선상국(先相國) 문간공(文簡公)이 사신 가셨을 때와 그 연치(年齒)와 벼슬이 용하게도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나는 옷깃을 여미고 탄식하기를, “바로 이것이로구나, 그 아름다움을 계승함이여!” 하였다.
그리고 또 이를 인하여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분 선생 부자분께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서로 이어서 중국에 가서 그 명성을 떨치셨으니, 그로부터 계산하면 이제 이미 5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세대가 차츰 멀어지고 유풍(遺風)이 자꾸만 성기어져서 두 분 할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지 못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대현(大賢)에게 그 후손이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게 하지나 않을까 하여 항상 걱정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공의 부자는 그 사적(事蹟)이 또한 두 분 할아버지의 그것과 서로 부합하니, 아아, 참으로 훌륭하구나. 나라에 대하여는 그 직분을 다하고 가문에 있어서는 그 조업(祖業)을 잘 계승하여, 이처럼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하면서 이를 또한 겸하였으니, 이 글을 어찌 단순히 중국을 구경한 기록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우리 두 분 할아버지를 송모(誦慕)하는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두 분 할아버지께서 이처럼 그 후손을 두었다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이는 단지 공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우리 두 분 할아버지의 자손된 자들 또한 함께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에 이와 같이 서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