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李生)에게 답하는 글
보내온 서한에 불후(不朽)의 대업(大業)을 물었으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오. 그러나 나의 천박하고 비루한 식견으로 어떻게 만에 하나나마 반론할 수 있겠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대의 질문이 선진(先秦)과 한당(漢唐)의 일컫는 바 대가(大家) 작자(作者)에게 미치지 않고 유독 우리나라에 대하여 자상스럽게 물었으니 이 어찌 비론(卑論)을 편 것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 나라 이상의 문헌(文獻)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 문덕(乙支文德)과 진덕 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 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고운(崔孤雲 고운은 최치원(崔致遠)의 호)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ㆍ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 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班]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 가운데 농려(?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ㆍ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ㆍ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호)ㆍ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계승하였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호)ㆍ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호)ㆍ척약재(?若齋 김구용(金九容)의 호)가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국조(國朝)의 초엽에 이르러서는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호)ㆍ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호)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문정(文靖 이색의 시호)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 문간(金文簡 문간은 김종직(金宗直)의 시호)이 포은(圃隱)ㆍ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호)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호)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姜)ㆍ이(李) 두 사람에게 내린다 하리오.
당세의 글 하는 이는 이때를 당하여 문(文)은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입(崔?)의 호)를 추대하고 시(詩)는 이익지(李益之 익지는 이달(李達)의 자)를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여장(汝章 권필(權?)의 자)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밖에는 알 수가 없소.
문장(文章)이란 비록 소기(小技)라고들 하지만 학력(學力)이 없고, 식견(識見)이 없으며, 공정(功程)이 없다면 그 극치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 이른 바가 비록 크고 작음ㆍ높고 낮음이 있더라도 그 오묘한 데 있어서는 한가지라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 글을 널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학력이 없으며, 스승에게 배우러 나가지 않기 때문에 식견(識見)이 없고, 배운 것을 계속 익히지 않기 때문에 공정(功程)이 없소. 이 세 가지가 없으면서 망령스럽게 자신이 옛사람을 뛰어넘고 이름을 후세에 남기겠다고 표방하고 있으니 나는 감히 믿지 못하오.
나는 열두 살 때에 엄친을 여의었으므로 어머니나 형님들은 나를 예삐 여기고 사랑만 하여 독책(督責)을 더해주지 않았지요. 좀더 자라서는 과거 공부 익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고 따라서 본받아 마침내 속히 이루고 싶은 마음만 있어 육경(六經)과 제사(諸史)를 두루 읽어 이미 대의(大義)는 알았으며, 몸소 실천하고 침잠하는 일에는 즐기지 않았지요. 호탕한 마음과 망령된 기로 하루에 수만 자를 외워 입가에서 글이 줄줄 나오니, 사람들은 총명하고 민첩하기가 무리에 뛰어났다고 여겼으며, 나도 역시 스스로 자랑할 뿐 자못 학문과 문장이 당초에 기람(記覽)의 풍부한 데만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었다오.
중형(仲兄 허성(許筬))이 적소(謫所)로부터 돌아와서 비로소 고문(古文)을 가르쳐 주셨으며, 뒤에 문장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호) 정승에게서 배웠고, 시는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호)에게서 배우고야 바야흐로 문장의 길이란 여기에 있지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차츰 입문(入門)하고자 했으나 시속에 끌린 바 되어 세상에 나가 이미 장원(壯元)에 뽑혔다오. 그러나 소탈하고 검속(檢束)이 부족하다 하여 세상에서 배척 받아 마침내 문을 닫고 학업에 충실한 적이 지금 16년째지요.
그 동안 성취된 것은 내 감히 알지 못하오. 비록 청려(淸?)하고 심굴(深?)하여 독조(獨造)를 종(宗)으로 삼는 것은 연배들에게 조금 손색된다 하더라도, 포함(包函)하고 온축(蘊蓄)하여 손가는 대로 뽑아내어 당연히 갈 데에 가고 당연히 그칠 데에 그치며, 넘실넘실 흐르는 큰 강물이 하늘에 닿아 패궁(貝宮)과 신궐(蜃闕)에 혹은 호산(?山)과 만옥(鰻屋)이 끼인 것 같아서 역시 그 큰 것을 폐하지 않는 것은 저 여러 사람들에 견주어 자못 한 치[寸]의 장점이 있다 하겠지요. 그러나 모르겠소. 식자(識者)들이 허락을 해줄는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사우(師友)ㆍ연원(淵源)의 전해줌이 없었다면 또 어떻게 이럴 수 있었겠소.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나왔는데 선친이 젊어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호)에게 배웠고 모재의 스승은 허백(虛白) 성현(成俔)인데 그 형 간(侃) 및 괴애(乖崖) 김 수온(金守溫)에게서 배웠으며, 이 두 분은 모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제자요, 유공(柳公)은 바로 문정공(文靖公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의 마음에 들었던 문인(門人)이었지요.
문정공은 중국에 유학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드날렸으며, 오랫동안 우도원(虞道園)ㆍ구양 규재(歐陽圭齋)의 문하(門下)에 있어서 그들의 칭찬을 받아 심지어 의발(衣鉢)이 바다 밖으로 전해졌다는 글귀까지 있었지요.
구양규재(歐陽圭齋)는 강서(江西) 사람이어서 몸소 문(文)ㆍ사(謝) 등 여러분을 섬겼으니, 석호(石湖)ㆍ성재(誠齋)의 유훈(遺訓)을 익숙하게 들었으며 더욱이 임천(臨川)ㆍ남풍(南?)ㆍ육일(六一)ㆍ산곡(山谷) 등 네 노인의 업적이 오히려 찬란하였는바, 이로써 업을 배워서 목은(牧隱)에게 전수(傳授)하였지요. 우리나라에서 글 짓는 일의 시말(始末)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목은이 중국에서 돌아옴으로 말미암았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소.
여장(汝章 권필(權?)의 자)의 선친은 낙봉(駱峯 신광한(申光漢)의 호)에게 배웠고, 낙봉은 용재(容齋)의 추장(推?)을 받던 사람이며 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은 또 용재의 증손자였으니, 역시 가학(家學)으로 발신(發身)한 사람이지요. 낙봉과 용재 두 분은 모두 점필(?畢 김종직(金宗直)의 호)이 남긴 학문을 얻었으며 점필의 부친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호)을 스승으로 삼았고, 야은은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호)형제에게 사사하였으며, 목은 역시 그 스승이었으니 그렇다면 모두 다 목은에게서 나온 것이지요.
무릇 시나 글을 짓는 사람으로 이를 떠나 따로 문호(門戶)를 세운다면 망령이 아니라면 참람이지요.
보내준 글에서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을 말했는데, 두 분은 당(唐) 나라에 있더라도 역시 명가(名家)라고 할 수 있겠으나 지경이 좁았던 것이 한이지요. 말한 아계(鵝溪)ㆍ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호)에 있어서는 내가 아직 그들의 전집(全集)을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감히 입을 열겠소. 마침 추관(秋官 형조(刑曹)의 관리)의 헌의(獻議)에 참석하게 되어 문에 당해 불러 재촉하므로 대강 답장으로 써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오. 다시 만나서 충분히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갖추지 않습니다.
[주D-001]우도원(虞道園)·구양 규재(歐陽圭齋) : 도원은 우집(虞集)의 호이다. 원(元) 나라 초기의 문학자이고, 벼슬은 규장각 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까지 지냈다. 규재는 구양현(歐陽玄)의 호이다. 역시 원 나라의 학자로서 성리학의 정통파 대학자였다. 벼슬은 한림학사와 승지(承旨)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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