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자료실 ▒

칠대조(七代祖) 정랑공(正郞公) 행장 - 이남규-

천하한량 2007. 2. 28. 23:43

칠대조(七代祖) 정랑공(正郞公) 행장

 

 

                                                     이남규(李南珪)
 

내가 일찍이 여러 부형(父兄)과 장로(長老)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에 선조(先祖) 지현공(知縣公)이 평소 집에 계실 때 아들들을 불러놓고 말씀하기를, “우리 선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문효(文孝 이곡(李穀))와 문정(文靖 이색(李穡)) 두 분에 이르러서 비로소 고려에서 현달(顯達)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양경(良景 이종선(李種善))과 문열(文烈 이계전(李季甸)) 두 분 어른께서 능히 그 서업(緖業 전통 가업)을 이었으며, 명종과 선조 및 인조조에 와서 성암(省庵 이지번(李之蕃))이 세상을 은둔하여 높은 절조가 있었고, 또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와 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께서 문장과 학문으로 저명하였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 이르러 불행하게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그만 중간에 그 가업(家業)이 희미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화려한 명성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만 나의 대에 이르러 내가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므로 견문이 없는데다가 자란 뒤에도 처지가 기박(奇薄)하여 결국 여기에 그치고 말았으니, 실로 명운(命運)이라 하겠다. 그러나 다행히 내가 지금 한을 품지 않고 죽을 수 있는 것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지금 이와 같은 나의 뜻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셨다.
또 말씀하기를, “한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서 그 쓰러져 가는 가문을 붙들고 그 허약한 형세를 유지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자가 만약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분발하지 않는다면, 성공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얼굴에 두어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이에 공의 맏아들 덕운(德運)이 무릎을 꿇고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비록 불민하기는 합니다만, 감히 이와 같은 아버님의 말씀을 받들어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아버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물러나와서 동생인 귀주(龜洲) 복운(復運)과 함께 각고 면려(刻苦勉勵)하여 옛 사람의 글을 읽었다.
그 뒤 지현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너무나 애통하여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그러고는 부르짖기를, “하늘이시여, 이 하잘것없는 소자(小子)가 어떻게 하면 선인(先人)의 명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 상기(喪期)가 끝나자 개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배우지 않는다면, 선인이 명하신 말씀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는, 곧 밖으로 나가서 어진 스승과 벗을 좇아서 배웠는데, 공부가 날로 진보하자 성망(聲望)이 자자해졌다. 이윽고 과거에 뽑혀 사관(史館)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때 두려운 듯이 말씀하기를, “어쩌면 선인의 명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나. 그런데 하늘은 어째서 선인의 수명을 좀 더 늘리어서 내가 이처럼 성취하는 것을 보실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다. 그 뒤 공이 취향을 달리하는 자의 배척을 받아서 낮은 지위에 영락(零落)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답답하신 듯이 말씀하기를, “내가 아마도 선인의 명을 마무리하지 못할 것 같구나.”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또 위연(?然)히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선인께서 명하신 바는 자신을 수양하고 그것을 다시 남에게 베풀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기를 굽혀서 남을 따르는 일은 선인께서 명하신 바가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세속에 관한 일들을 모두 떨쳐 버리고 문을 닫은 채 들어앉아서 지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아, 공의 그 뜻은 참으로 슬퍼할 만하다. 그러나 그 이름이나 행실로 말한다면 참으로 한 점의 티도 없었다고 하겠으니, 그렇다면 결코 선인의 명을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은 자가 태이(泰爾)이다. 아버지는 휘가 운근(雲根)인데 곧 지현공(知縣公)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인데 대군 사부(大君師傅) 휘 심(◇)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휘가 상빈(尙賓)인데 진사를 했으며, 증조 휘 구(久)는 검열을 지냈다.
공은 순문왕(純文王 현종(顯宗)) 신축년(1661, 현종2) 6월 17일에 태어났다. 일찍이 하계(霞溪) 권 상서(權尙書 권유(權愈))에게 글을 배웠으며, 다시 정우담(丁愚潭 정시한(丁時翰)) 선생을 사사(師事)하면서 위기(爲己)의 학문에 관한 방법을 알게 되었다. 31세에 신미년(1691)의 증광(增廣)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치되었다가 한림에 천거되었으며, 임신년에 기거주(起居注 사관(史官))로 들어갔다가 갑술년(1694)에 삭직(削職)을 당하였다. 그 뒤 기묘년(1699)에 다시 성현 승(省峴丞)에 서용되고, 계미년(1703)에 성균관 전적에 승부(陞付)되었으며, 갑신년에 기성랑(騎省郞 병조의 낭관(郞官))에 제수되었다가 곧 춘관랑(春官郞 예조의 낭관)에 전보되었다. 그러다가 을유년(1705)에 병조를 거쳐 관남(關南 남관(南關), 함경남도 지방)의 아사(亞使)로 나갔으며, 경인년(1710)에 문천군(文川郡)의 지군(知郡 군수)으로 나가서 경차관(敬差官)을 겸하였다가 갑오년(1714, 숙종40)에 사임하고 돌아왔다.
공은 일찍이 단양(丹陽)의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이 곳에 집을 짓고 여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만년에 알 수 없는 병을 얻어서 다시 오산(烏山)의 선려(先廬)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현의왕(顯義王 숙종(肅宗)) 기해년(1719, 숙종45) 9월 7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59세였다. 담양 구담(龜潭)의 경향(庚向)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선조(先兆)를 따른 것이다.
공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마치 어른처럼 거상(居喪)을 하였다. 그리고 계모 정 숙인(鄭淑人)은 성품이 까다로워서 뜻을 맞추기가 어려웠으나 그럼에도 한결같이 그 뜻을 따라서 거스르는 일이 없었고, 심지어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서도 거취를 반드시 어머니께 여쭈어서 결정하고 감히 스스로 전단(專斷)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병환을 구완할 때에는 밤에도 옷끈을 풀지 않았다.
공은 토지와 노복들을 모조리 여러 동생과 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동생과 누이들이 다들 가난한데다 딸들이 많았는데, 공은 매번 녹봉(祿俸)을 털어서 혼수를 장만하여 이들을 출가시켰다. 그러나 자신은 거친 나물밥조차도 떨어졌으며, 병이 나서 치료를 하고자 하여도 약을 살 돈이 없었다. 이에 동생들이 걱정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약 쓸 필요 없다. 그런 대로 견딜 만하다.” 하였다.
그리고 고을에 나가 있을 때에는 절조가 빙벽(氷蘗)과 같았다. 돌아올 때에 다른 짐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사기(史記)》한 질만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말하기를, “손자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하였다.
일가 친척들과 정이 돈독하여 혹시 상을 당하거나 병을 앓는다는 소식이라도 들리면 곧장 달려갔으며,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춥거나 덥다고 하여 이를 피하는 법이 없었다. 또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옛 친구가 있었는데, 공이 양식을 싸고 회(灰)를 구워 가지고 몰아치는 풍설(風雪) 속에 수백 리 길을 달려가서 묻어 주었다.
공은 성품이 청고(淸高)하여 구차하게 세속과 어울리지 않았으니, 더불어 교유하는 자는 겨우 중표(中表) 형제와 인아(姻?) 친척들인 박천(博泉) 이공(李公 이옥(李沃)) 형제와 희암(希庵) 채공(蔡公 채팽윤(蔡彭胤)) 형제 및 고심재(古心齋) 박공(朴公 박이문(朴履文)) 등 몇 사람뿐이었다.
시문(詩文)을 짓는 데에는 방일하고 호건(豪健)하여 꾸미고 다듬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대를 가슴아파하고 풍속을 안타까워하여 감분(感憤)하고 고민한 글들을 보면 가끔 굴원(屈原)의 천문(天門)이나 복거(卜居)와 같은 의취(意趣)가 있었다.
일찍이 우사(右史)를 섭행(攝行)하면서 임금을 모신 적이 있었다. 이 때 상(上)이 영상 권대운(權大運)에게 이르기를, “당후(堂后 주서(注書))의 직책은 대부분 이를 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도 저 이(李) 아무개는 이를 전혀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으니, 나는 그것이 무척 가상하다.” 하였다. 그래서 권공이 공의 근신(勤愼)함에 대하여 크게 칭찬하여 대답하였다. 그 뒤에 북쪽 고을의 차사(差使)로 나갔다가 이를 사임하였다. 그런데 이 때 목사나 군수로서 사임을 한 자가 많이 있었는데, 상이 특별히 공을 앞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군수 자리를 하찮게 생각하지 말고 가서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으며, 공이 사조(辭朝)의 예를 마치고 물러나올 때에는 공을 목송(目送)하여 보내었다. 그리고는 상이 안으로 들어가서 중궁전을 보고 말하기를, “문관(文官)은 빨리 늙는 모양이오. 저 이 문천(李文川)이 벌써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세었습디다.” 하였다. 공은 중궁전의 외속(外屬)이었는데, 평소에 깊이 자신을 닦으면서 근칙(謹飭)하는 바가 있었는데도 노년에 이르도록 항상 하읍(下邑)만을 배회하고 있었으므로, 상이 이를 대견스럽게 여기는 한편 딱하게 여겼던 것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귀주공(龜洲公 공의 동생 복운(復運))이 글을 지어서 공을 제사하기를,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롭고, 집안간에 후덕하고, 친구간에 시종(始終)이 언제나 한결같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군신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서로 잘 만나지 못했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얻은 지위는 낮고 괴이한 병에 걸렸으며, 그 연세 또한 60을 채우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른바 ‘선한 자가 복을 받는다’는 말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하였다.
아, 공에 대한 평은 이미 여기서 모든 것을 다 말하였으니, 내가 이제 다시 무슨 말을 감히 한단 말인가. 그러나 장차 세상의 군자(君子)들로서 공의 포부를 안타깝게 여기고 공의 명성과 행적을 높이 보아서 한 마디 말하기를 아끼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바라건대 세월이 오래 되어서 상고할 길이 없다고 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배위(配位)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판윤 신후재(申厚載)의 딸인데, 온유(溫柔)하고 은혜로워서 시부모를 받들고 부군(夫君)을 섬김에 있어 그 뜻을 거스름이 없었다. 공보다 1년이 빠른 경자년에 태어나서 임자년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예산(禮山) 대지동(大枝洞)의 갑자원(甲子原)에 장사를 지냈으니, 거리가 너무 멀어서 공과 함께 부장(?葬)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성(宬)이다. 성은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나 현달하지 못하였으며, 좌윤 채성윤(蔡成胤)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휘가 수일(秀逸)이다. 수일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성(宬)의 계취(繼娶)는 사인(士人) 조우한(趙宇翰)의 딸인데, 여기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 맏이는 수걸(秀傑)이고, 다음은 수발(秀發)인데 진사시에 급제하고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딸은 평강(平康)의 채응려(蔡膺呂)에게 출가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