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 운동시에는 기독교계 군산 영명학교를 진원지로 하여 신흥학교와 기
전여학교 학생들이 전주지방 3.1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 독립운동을 지휘한 사람이 당시 서문안 예배당의 목사였던 김인전
(1876-1923)이었다.
김인전 목사는 그 무렵의 전주 사람들에게 훌륭한 인격
자로, 해박한 지식자로, 또 탁월한 청년지도자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김인전 목사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촌마을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나
평양 신학교를 39세때 졸업하고 서문교회 2대 목사로 취임하여 전주를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모든 생활의 발판을 옮겼다.
김인전 목사가 단순히 목사로서 만이 아니라 민족적 지도자로서
많은 추앙을 받았던 것은 원대한 민족적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경륜과
사상이 누구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인전의 신앙은 기독교가 표방하는 궁극적 이념인 하나님의 복음이 교회
예배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만인에 있음을 들었고,
이른바 교회의 현실주의를 표방했기에 틈나는 대로 전주바닥을 누비며
서민들과 담소하기를 즐겨했고,
때로는 누구나 기피하는 시정잡배들과도 어울리기를 꺼려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더욱이 김인전 목사의 해박한 한문지식은 그 무렵 자주 드나들던 향교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나 유림들에게도 경탄의 대상이었다.
해박한 지식과 학문으로 교인들은 물론 일반 시중인들까지도
목사 김인전에 대한 존경의 폭을 넓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인전 목사는 전주 3.1 운동의 지휘자라는 이유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상
해로 망명하였다.
상해망명에 성공한 김인전은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김구, 이시영, 조
소앙, 이동휘, 이동령 등과 같이 피선, 최초의 임정 의정단상에 올랐다.
이어서 임정의 정무차장 재무비서 공채관리국장 등을 역임하고 의정과 실무행
정 등의 요직을 맡아 실질적인 임정의 요인으로서 막중한 역량을 유감 없이
발휘하게 되었다.
더욱이 1921년 임정의 학무총장으로 있으면서 태평양회의
외교위원회를 조직하여 외교총장으로 있는 김규식의 해외활동비 조달에 앞
장섰고 임시정부의 기관지 주간선전을 편집하여 해외동포들에게 발송하였
다.
또 노병회를 조직하여 우리의 군인양성과 본토수복의 군사비를 마련하
는 등 실로 1인 3역의 어려운 중책을 다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능란한 외교와 재치 있는 화술로 조정과 무마의 명수이기도 했다는 김인
전은 나중에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한때 파벌과 지방색으로 인한 임
시정부의 갈등을 수습한 솜씨로 그 후 임정요인들로부터도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렇듯 탁월한 재주와 훌륭한 인격을 지닌 김인전 목사는 애석하
게도 1923년 우연한 병고로 인해 47세를 일기로 낯선 이국 땅에서 타계하였
다.
김인전 목사는 그 후 70여년의 세월을 타국의 상해 외인묘지에 묻혀 있
다가 지난 1994년 임시정부요인 유해환국 때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