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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만세시위 주도한 경재 김인전선생

천하한량 2007. 3. 21. 03:50
전주만세시위주도  김인전
김인전  연보
▲ 1876년 충남 서천 출생
▲ 1906년 한영학교 교장
▲ 1914년 전주서문교회 목사
▲ 1916 전북노회 회장
▲ 1919년 상해 망명
▲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부의장(1920)
▲ 임시정부 의정원 전북대표위원(1921)
▲ 임시정부 국무원 학무총장 대리 겸 학무차장(1921)
▲ 임시정부 제4대 의정원 의장(1922)
▲ 상해 인성학교 교장(1922~1923년1월)
▲ 1923년 상해동인병원서 작고
4월13일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꼭 80년이 되는 날. 일부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이 갖는 중요성과 의미는 우리 헌법에서 대한민국이 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선언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임시정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많은 인사들이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사람 모두가 광복의 기쁨을 누리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임시정부 제4대 의정원 의장을 지낸 김인전(金仁全) 선생. 임시정부에서 동고동락했던 「동지」들이 국민적 환호를 받으며 고국에 돌아왔을 때 이미 고인이 된 경재(經齋) 김인전 선생은 차가운 이역만리에 쓸쓸히 묻혀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졌지만 한동안 그는 유공자 반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광복 이후 35년이 지난 80년에서야 정부로부터 공식 유공자(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에 추서)로 인정받았다.
그는 지난 93년 8월 임정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등 4명의 다른 임정 인사와 함께 유해로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 5인 임정 요인의 영결식 겸 유해 안장식은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국민장급의 국민제전으로 치러졌다. 뒤늦게나마 정부와 국민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지난해 김인전 선생은 국가보훈처의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다시 한번 그의 업적이 기려졌다.

◇ 교육자로서 김인전
김인전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졌지만 상해로 가기전까지 국내에서 활동은 주로 교육과 목회자 생활이었다. 교육자와 목회자로서 전주에서의 활동은 지금까지도 뚜렷한 족적으로 남아있다.
충남 서천의 양반집 가정에서 자란 경재는 오랫 동안 한문학에 정진해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한학에 대한 깊은 조예는 당시 유림사회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 서예가인 효산 이광렬 선생의 회고다. 자주 전주 향교를 찾아 향교 유림들과 한학으로 담론을 벌였는 데 담론에 막힘이 없어 유림들도 경재를 선생으로 불렀다 한다. 임정에서 함께 활동했던 해공 신익희 선생도 『선생에게서 한학을 다시 배웠고 그 분의 학덕에 감복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사촌 동생으로 현재 전주 서문교회 장로로 있는 김대전씨(78)는 『당시만해도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던 전주의 보수적 양반사회에 경재의 활동이 유림들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 목회자로서 새출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목회자로의 변신에는 부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남포현감과 수원부사까지 지낸 경재의 부친 김규배씨는 개화기 선각자였다. 한영학교를 설립한 뒤 장남인 경재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기독교 학교인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경재는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를 숙부에게 맡기고 34세의 늦은 나이에 평양신학교에 들어간다.
1914년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전주서문밧교회(현 서문교회) 초빙 목사로 부임했다. 전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게 된 계기가 여기서부터였다. 한국인 출신의 두번째 서문교회 목사로 부임한 경재는 상해로 망명할 때까지 목회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 민족교육에 열성
활발한 목회 활동과 함께 경재는 민족교육에도 열성을 쏟았다. 교회 청년들과 기독교계 학교인 전주신흥중학교, 기전중학교 학생들을 지도했다. 당시 기전중학교에서 경재의 지도를 받은 중앙대 설립자이며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씨는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 경재가 자신의 신앙사상과 애국사상을 교육시켜준 스승으로 기록했다.
신앙과 애국심을 동시에 실천하고 가르쳐온 경재에게 3·1 운동은 독립운동가의 길만을 걷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경재는 신흥·기전학교 학생들과 기독교 신도들이 천도교 교도들과 합세해 일어난 전주 만세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한 배후 인물로 일경의 지목을 받았다. 전주 3·1 운동 당시 시위 대열을 이끈 최종삼씨를 비롯,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윤건중씨 등 만세운동 주도층들이 경재와 연결돼 있었다. 결국 그는 미국인 선교사 에베솔의 도움으로 상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 임정 역할 확대
상해에 발을 디딘 경재는 망명 이듬해인 1920년부터 임시정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학무총장 권한 대행에 이어 1922년에 제4대 의정원 의장(입법부 수장)에 올랐다.
경재가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짧은 기간 급부상한 데는 무엇보다 계파를 초월한 화합정신이 폭넓은 지지를 받아냈을 것으로 분석하는 견해가 많다. 실제 그는 복잡한 구도의 임정내에서 「화해의 사도」로 불릴 만큼 계파에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임정의 역할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김구, 여운형 선생등과 함께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해 군인양성의 기초를 닦았는가 하면 국제 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임정의 외교활동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1922년 한 한·중간 유대 강화를 위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회의 우리측 대표로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참가했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조직을 발기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 김원용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