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재김인전 ▒

3·1운동이후 김인전 목사가 상해로 망명한 후에 교회의 상황은 점차 수습되어 갔다.

천하한량 2007. 3. 20. 19:35

전주서문외교회의 성장과정과 민족운동


 

안대희(연세대 박사과정)

I. 서 론 : 문제제기


 

호남지방에 개신교가 유입된 것은 1893년이었다. 따라서 1993 이후 여러 개별교회에서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 개교회사나 자료집을 편찬하고 있다. 이러한 편찬사업을 통하여 지방에서 개신교의 초기 전파과정과 개교회의 성장과정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한국교회사 연구뿐만 아니라 호남지방교회사는 한말·일제하에 유입된 개신교가 격변기였던 한국근·현대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가 한국에 수용된 이후 교회공동체로서 지방사회에서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으며,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가 없는 실정이다.

위와 같은 문제점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첫번째로 교회사를 연구하는 정립된 방법론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호남지방 개별교회사나 교회사연구 논저들은 교회사를 단순히 종교사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다.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 방법론에 대해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신교회가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역할에 대해 충분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기독교 복음의 유입과정이나 교회의 성장과정은 서술되고 있으나 그렇게 성장할 있었던 배경으로서의 지방사회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별교회사나 호남지방 전체 개신교사는 호남지방의 상황보다는 한국사회 전체의 상황을 배경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 같은 서술은 지방사회에서의 개별교회의 다양한 활동 모습을 없게 한다.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연구대상 지방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을 종합해서 보다 틀에서 지방의 특성을 분석하고, 그것이 전체 한국역사와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독특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세번째로는 객관적 입장보다는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사를 저술한 저자들이 교회의 교인들이거나 신학자들로서 교회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여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사가 교인들이나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져서는 된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는 교회역사와 관련하여 일반역사학자들이 놓치기 쉬운 점을 정확하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교론적 입장은 교회사의 객관적 서술을 가로막는 장애가 있다. 네번째로는 선교사들에 의해 작성된 사료나 논저들을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宣敎史'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지방사회에서 개신교에 입교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기술들은 너무 빈약하다. 한국교회사는 선교사 중심의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신도 중심의 '한국교회사'가 되어야 한다. 다섯번째로는 기존의 연구들은 개신교인의 민족운동이나 사회운동을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사를 교회사로만 당시 개신교인들의 사회 참여,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살필 없게 한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호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로서의 전주서문외교회의 사례를 통해서 전주 지방사회에 있어서 개신교회의 성장과정과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서문외교회는 고대로부터 호남지방의 중심지였던 전주에 1893년에 세워졌다. 전주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였다. 조선시대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여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다. 또한 전라도 감영이 있었던 행정도시였고, 조선후기에는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주지방에 서양종교인 개신교가 들어와 어떻게 자리잡고 성장했으며, 서문외교회를 어떤 성격을 지닌 계층이 이끌어 갔는지 살펴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서문외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민족운동에 참여했는지도 살펴 것이다.

Ⅱ. 한말·일제하 전주지방의 사회적 동향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양반중심의 유교적 보수성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한말에는 전주지방의 양반사회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다. 1891 천주교의 보두네 신부가 본당을 전주남문밖 구례영 주인의 집을 사서 이전하였다. 이때부터 전주의 유력 양반층의 입교가 이루어져 전주사람들이 천주교를 존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주읍내의 향리층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 신부였던 보두네는 1889년에 전주 읍내에서 명의 아전들이 천주교 교리서를 읽는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천주교 탄압시기에 지방사회에서 지방관과 함께 천주교민을 탄압하였던 아전들이 이시기에 와서는 교회 세력에 의지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방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존속시키기 위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전주 지방사회의 양반과 향리집단이 서양 기독교 세력에 입교하거나 관심을 가지게 것은 이전과는 다른 변화였다. 이는 전주의 유교적 보수성이 점점 무너지고, 서양의 기독교 세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작용했음을 짐작할 있다.

이와 함께 전주는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이중환의《택리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택리지》에 의하면 전주는 여러 골짜기의 물이 들어와 관개함으로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였다. 또한 화물을 실은 배가 만경강을 왕래하여 추천(楸川)이나 어은골까지 닿았다. 그래서 전주는 경성과 다를 바가 없이 도시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전주가 물산이 풍부하고, 관개수로가 발달하여 상업활동이 활발하였던 것을 보여 준다.

한말·일제하 전주에서는 이러한 상업활동이 더욱더 번성하였다. 1899 군산항이 개항되고, 1910년에 전라북도청이 전주에 설치됨으로 전주는 더욱더 활발하게 근대서구문물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근대 도시로의 발전과 식민지화 과정에서 일본인들과 외국인들의 유입으로 전주의 인구는 증가하고, 도심지의 확장과 상업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된다.

이상과 같이 유교적 보수성이 강한 전주지방은 1890 이후에 양반과 향리층이 서양천주교세력에 입교 내지는 관심을 갖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전주는 한말·일제시기에 전통적인 행정·상업도시에서 근대적인 도시, 식민지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양의 종교인 개신교가 전주에 유입되어 조선사람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인다.

Ⅲ. 서문외교회의 성장과정

1. 개신교의 유입과 서문외교회의 설립(18931906)

전주의 개신교 선교는 1893 9 미국 남장로회 소속인 전킨과 테이트가 전주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선교를 철저히 준비하기 위해 레이놀즈의 어학 선생이면서 자신들의 일을 돕고 있던 정해원을 먼저 전주로 보내어 선교에 필요한 땅과 집을 구입하게 하였다. 이때 정해원은 전주성 서문밖 전주천 건너편의 은송리에 선교거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894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전주지방의 개신교 선교는 중단되었다. 동학농민봉기가 진정된 1896 전주지방의 선교는 재개되었고, 11월에 선교사연례회의에서 테이트와 매티테이트, 해리슨은 전주선교부에서 전도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1897 3월에는 정식으로 전주선교부가 은송리에 설치되었다.

전주에 선교기지가 설치되자 선교사들은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897 7 15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기반으로 전주서문외교회의 전신인 '전주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전주서문외교회는 초기의 천민거주지였던 은송리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1897년에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였던 전주서문밖에 교회를 옮기게 된다. 이는 초기의 선교활동이 천민이나 평민들을 대상으로 전개되다가 교회를 이전하면서 상인들도 전도대상자로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초기 서문외교회의 교인들은 평민·천민들과 상인들이 주축이었음을 있다. 선교기지의 변경과 전주교회의 서문 옆으로 이전은 서문외교회가 기틀을 확고히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2. 교회조직의 내실화와 자립교회로의 발전(19071920)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주서문외교회는 초기 교회신도들과 선교사들의 열성적인 활동에 힘입어 점차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개종자들은 장터나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개인전도활동과 더불어 서문외교회는 전교인이 중심이 되어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계기를 만든 것이 1907 1월부터 일어난 '대부흥운동'이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100 구령운동'이 벌어진다. 서문외교회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개인 전도운동을 계획적으로 벌였다. 당시의 교회 부흥운동은 월보강론회나 사경회와 같은 성경교육을 통해 일어났다. '100 구령운동'과 관련하여 전주서문외교회에서는 '부중(府中) 사람 건지기'를 힘쓰기로 제직회에서 결정하였다. 그래서 기도회와 부흥회를 시작하기로 하였으며, 부중 동네에 차례로 다니면서 전도활동을 폈다.

이와 함께 특별강사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1910 6 20일부터 30일까지 평양의 길선주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설교를 듣고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35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907 '대부흥운동'과 1910년의 '100 구령운동'으로 교세가 급격히 성장한 서문외교회는 성경교육과 함께 학교사업도 추진한다. 1909 6 28일에 서문외교회는 남·여 소학교 설립도 추진한다. 남학생 교육은 가까운 곳에 전주신흥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중단하고 여학생만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교회에서 가까운 서문안 당성동에 있는 선교회 건물을 빌려서 '서문안여학교'라는 이름으로 경영했다.

서문외교회는 1908년에 김필수 장로를 초대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했다. 또한 1908 4 13일에 테이트 선교사의 사택에서 교회의 주요한 일꾼들이 회집하여 제직회를 구성하였다. 서문외교회는 평북 의주지방의 김병롱 목사를 청빙하였다. 김병롱 목사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서문외교회에서 시무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1912 11 24일에서 1914 5월까지 1 6개월간 시무하다가 교회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자 자진해서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김병롱 목사의 사임으로 서문외교회는 후임목사로 김인전 목사를 청빙한다.

 

 

 

 

 

 

 

 

 

 

 

 

3. 교세의 확장과 교회의 분립(19211936)

 

3·1운동이후 김인전 목사가 상해로 망명한 후에 교회의 상황은 점차 수습되어 갔다. 그래서 1921 7월에 김인전 목사의 후임으로 배은희 목사가 부임한다. 배은희 목사는 먼저 어린이 교육과 전도 운동을 목표로 하여 유치원을 경영하고자 했으나 재정의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그는 전주의 대지주인 인창환(印昌桓) 도움으로 유치원을 신축하였다. 유치원은 호남지방에서도 최초였고, 명칭은 '전주유치원'이라 하였다.

서문외교회는 복음의 전파 사역과 교육사업에 발맞추어 신문화운동의 선구자 역할도 담당하였다. 당시 신흥학교 보통과 교사였던 이경혁(李卿赫)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경혁은 서문외교회에서 주일학교 연령이 지난 여러 소녀들을 모아 '단심가극단'(丹心歌劇團) 조직하였다. 이들이 공연한 가극은「단심가」,「무궁화 동산」,「열세집」등이 있었다. 극단은 기독교의 복음과 애국사상이 담긴 노래, 율동, 연극 등을 교회 혹은 교계 모임에 발표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인「열세집」을 전주극장에서 발표하였다. 이경혁이 1923 2월에 갑자기 세상을 1924 신흥학교 영어와 음악교사로 부임한 현제명이 친구였던 이건직과 뜻을 모아 교회 주일학교 소녀 12명을 선발하여 '전주서문외교회 소녀 가극회'를 조직하여 문화운동의 선두 구실을 하였다.

신문화운동과 함께 당시 농촌의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여 서문외교회는 배은희 목사를 주축으로 '독신전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당시는 1 세계대전이 끝나 경제공황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1925 미국 또한 경제 공황에 처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농촌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배은희 목사는 교회 내의 의사 신현창(申鉉彰), 은행원 유상백(劉尙伯) 이리교회의 의사 김병수(金炳洙), 삼례농촌 청년 강봉의(姜鳳儀) 등과 협의하여 '독신전도단'을 조직하였다. 독신전도단은 그대로 남녀 기독청년 독신자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킨 농촌에 투입하여 선교하는 농촌선교 단체였다.

 


 

4. 서문외교회 주도층의 성향

이상과 같이 서문외교회는 전도·교육·신문화운동·독신전도단과 같은 선교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활동을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물론 전체 교인들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하겠지만 자료상의 문제로 장에서는 목사·장로·집사들을 주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교회의 핵심 조직인 당회와 제직회를 구성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당시 그들의 활동을 분석함으로써 서문외교회를 이끌어 갔던 사람들이 누구였으며,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었는지 당시 그들의 활동을 분석함으로써 추론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당시 서문외교회가 전주 지방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 있을 같다.

이들의 거주지와 신분, 행적 등을 정리한 것이다. 표에 나타난 당시 서문외교회의 주요인물들의 성향과 거주지를 통해 당시 서문외교회 주요계층의 역학관계를 살펴 있다.

신분상으로는 양반, 상인, 평민들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양반출신은 김인전, 김필수, 정인수, 김가전이 있다. 특히 정인수는 일제하 전주유림의 거두였던 정석모(鄭碩謨) 아버지로서 김인전 목사의 전도로 입교하게 인물이었다. 상인출신으로는 이돈수, 양경현, 전영칠 등이 있다. 또한 평민으로는 배은희, 최광진, 김진상, 장용삼, 장경식, 김진선, 안백선, 최종삼, 오공여로 파악된다. 이는 당시 서문외교회가 위치한 서문밖은 상인, 평민들이 거주하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파악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상인이나 평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직업을 파악할 있는 이들을 살펴보면 상당수가 신흥 기전학교의 교사들인 것을 있다. 김진상은 신흥학교의 역사·지리교사, 김건표는 신흥학교의 일어·습자·작문교사, 김가전은 신흥학교 교목 교사였다. 그밖에 김진선, 배보석, 이경혁, 최약실, 김교문 등이 있다.

거주지별로는 화산리 거주자가 많음을 있다. 화산리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로 장로에 이승두, 김진상, 김가전, 장경식, 서정현, 김진선, 엄태섭이 있고, 집사에는 이경혁, 최약실, 김진태, 김형술이 있다. 완산동거주자로는 정인수, 장용삼, 배보석, 이영한, 양윤복 등이 있고, 사정리 거주자로는 김건표, 최종삼, 오공여가 있다. 이밖에도 은송리와 빙고리, 고사동에 거주하고 있음을 있다.

이들 중요한 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문외교회에 시무했던 목사들은 평양장로회 신학교 출신들이다. 김인전은 기독교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배은희는 기독교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김인전은 양반출신으로 충남 한산에서 한영학교(韓英學校) 세워 교육을 통한 애국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당시 국가의 장래가 위태롭게 되자 자신의 재산을 소진하여 교육을 통한 민중계몽과 내적 실력양성에 진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문외교회에서 시무하다가 3·1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는 교회와 신흥 기전학교의 만세운동이 성사되도록 적극적으로 지도, 협력한 배후인물이었다. 3·1운동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1922 4월에서 6월까지 임시정부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표】서문외교회 목사 장로·집사 분석

목사 장로

시무기간

거주지

(출생년)

김병롱

19121914

다가정

평북의주 출생. 1912 평양장로회신학교졸업. 서문외교회 사임후 철산구 차련관교회와 만주 안동현교회 시무, 3 1운동에 가담.

김인전

19141919

다가정

충남 한산출생. 양반. 1914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 신흥 기전학생들에게 기독교진리와 민족주의, 애국사상, 국제정세등을 가르침. 전주의 3 1운동주도. 중국상해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참여. 1923 별세.

배은희

19211936

다가정

경북 경산. 농민. 1920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 유치원, 무산아동성경학교, 야학회등을 세워 민중교육. 신간회 전주지부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의장, 미소공동회의 반대민족대표 의장. 대한민국 정부 초대 고시위원장. 2 국회의원역임.

김세열

19361950

다가정

전남 옥과출생. 1936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

김필수

19081909

(1872)

경기도 안성출생. 양반. 한학지식이 뛰어남. 신흥학교 교사. 1908 8월까지 서문외교회 조사로 활동. 1909 평양장로교신학교 졸업하여 목사가 . 1909 6 진안, 장수, 무주에서 목회. 1911 9 군산에서 목회. 1915 조선예수교장로회 4 총회장역임(조선인으로서는 처음). 기독신보주필. YMCA활동. 1948 10 별세.

이승두

19111918

화산리

(1866)

레이놀즈목사를 도와 구약성경을 번역함. 초기서문외교회의 인도인. 주일학교교장. 서문안여학교 교장. 1920 12 19일에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취입. 1929 6 1 별세.

최광진

1912.1914. 1915.

은송리

(1874)

평민출신. 1912 9 29일에 피택되었다가 1914 8 9 사임. 다시 1915 7 11일에 장립. 최중진목사의 동생. 목수.

정인수

1916.

완산동

(1851)

양반. 전주유림의 거두 정석모의 .

이돈수

19181925

빙고리

(1863)

상업. 장년주일학교부장. 장년주일학교교사. 26 화산정권찰. 완산정교회로 이명.

김진상

19181920

화산리

(1878)

1908년부터 신흥학교 역사 지리교사. 김인전목사 따라 상해로 망명

김건표

19201922

사정리

(1882)

1918년부터 신흥학교 일어 습자 작문교사. 서문안여학교 교감. 장년주일학교부교장. 예산편성위원. 청년부장활동.

양경현

19221936

은송리

(1888)

상업. 서문외주일학교 부장. 장년주일학교부장. 예산편성위원. 완산교회로 이명

김가전

19221930

화산리

양반. 유년주일학교교장, 유년부장, 예산편성위원, 유치원장, 야학회장, 서문외유년주일학교부장, 평양신학교졸업후 신흥학교 교목 교사. 3 1운동참가. 전주기독청년회활동. 전북도지사. 김인전목사의 동생. 신간회활동. 1951. 10. 5.별세.

장용삼

19241925

완산동

평민. 완산정권찰. 인봉리주일학교부장. 주일학교교사. 완산정교회로 이명.

김형규

19271928

신흥리

예산편성위원. 야학회회장. 완산정권찰. 광주로 이사.

장경식

19271936

화산리

평민. 주일학교부장. 장년주일학교교사. 서문외예배당부장. 무산아동성경학교회장역임.

최재륜

1930-1953

본정

안경방경영. 장년주일학교교사. 장년주일학교남자부 부장. 성광교회로 이명.

서정현

1930-1943

화산리

1919년부터 기전여학교 조선어 수신 지리교사. 서문외야학교 교사. 장년주일학교남자부 부장. 48년이후로는 장로명단에서 빠져있음.

김진선

1936. 12. 13.-1963.

화산리

(1888)

평민. 1908년부터 신흥학교교사. 주일학교교사. 여자야학회학감. 유년주일학교교장. 사정리권찰. 63년까지 확인.

최종삼

1936-1953

사정리

煙草각직. 3 1운동참가. 검암리주일학교부장. 장년주일학교교사. 화산제2구역 권찰. 인후리권찰. 유년주일학교부장. 성광교회로 이명.

안백선

1937-1943

중산리

평민, 서문외교회 지방전도인. 서문외장년주일학교 교사. 1948년이후 장로명단에서 빠짐.

오공여

1941-1948

사정리

(1878)

평민. 사정말권찰. 화산정 1구역권찰. 1948년이후로는 장로명단에서 빠짐.

배보석

1941-1953

완산동

신흥학교교사. 배은희목사의 아들. 의사. 성광교회로 이명

엄태섭

1943-1948

화산리

중산교회개척. 48년이후에는 장로명단에서 빠짐.

양동조

1943-1948

고사동

48년이후에는 장로명단에서 빠짐.

배은희는 1908년에 자인교회를 세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고, 숭덕학교(崇德學校) 세워 소년들을 교육하는데 진력하였다. 이후 평양신학교를 나와 서문외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그는 항일교육의 방법으로 전주유치원, 전주여자야학회, 숭덕학교와 같은 교육사업에 전념한다. 또한 '독신전도단'을 조직하여 한국 농촌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구제하려는 열망으로 농촌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운동에 참여하여 전주신간회 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해방이후에도 정치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그는 19101920년대 일본의 기독교사회주의자 가가와[賀川豊彦] 영향을 받은 기독교사회주의적인 성향의 인물이었다. 무산아동을 위해 숭덕학교를 세우고 독신전도단 활동들을 참고해 보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있다.

김필수는 한인으로서 최초로 장로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09 평양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진안·장수·무주, 군산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기독신보의 주필로 활동하게 된다. 또한 그는 YMCA활동에 참가하여 창립이사로 선출된다.

이승두는 레이놀즈 선교사를 도와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이다. 1920년에 새문안교회로 옮겨 장로로 취임한다. 김진상은 신흥학교의 역사·지리교사로서 김인전 목사를 따라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김가전과 최종삼은 교회의 활동뿐만 아니라 3·1운동, 신간회운동, 청년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이경혁은 신흥학교 교사로 서문외교회를 중심으로 신문화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며, 최약실은 기전학교 교사로 민족사상이 투철하여 학생들에게 반일 감정을 고취시켜 주기도 하였다.

Ⅳ. 서문외교회의 민족운동 참여

이상과 같이 김인전, 배은희 목사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이 강한 집단이 1910년대부터 1936년까지 존속하였음을 살펴볼 있다. 서문외교회는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고 생각된다. 다음 장에서는 그들이 활동했던 민족운동을 살펴볼 것이다.

3·1운동 관련자

성 명

거주지

직 업

주 요 활 동

김인전

다가정

목사

서문외교회 목사. 한학뛰어남. 평양신학교졸업. 3 1운동주도후 상해임시정부활동.

김가전

화산리

교사

유년주일학교교장. 유치원장. 야학회장. 평양신학교 졸업후 신흥학교 교목 교사. 전주기독청년회활동. 김인전목사의 동생. 신간회활동. 전북도지사

최종삼

화산리

연초각직

서문외교회 청년. 3 1운동참가하여 징역 6월.

김종곤


서문외교회 청년. 3 1운동이후 기전여학교교사.

이수현


조사


윤건중



서문외교회 청년. 3 1운동이후 상해임정활동. 독일유학. 초대농림부장관.

신일용


의사

서문외교회 청년.

김인애

(최기물)

충청도 서천군 한산면

성서학교 생도

3 1운동참가하여 징역6월. 대구복심공소기각. 김인전목사의 동생.

최애경

화산리

기전여학교생도

3 1운동참가하여 징역 6월. 대구복심공소기각.

김공순

화산리

무직

3 1운동참가하여 징역 6월. 대구복심공소기각. 김진상장로의 딸.

최금수

화산리

기전여학교생도

3 1운동참가하여 징역 6월. 대구복심공소기각.

함연춘

추동리

기전여학교생도

3 1운동참가하여 징역 6월. 대구복심공소기각.

강정순

완산정

무직

기전여학교 졸업. 3 1운동참가하여 징역 6월. 대구복심공소기각.

임영신

금산군 금산면 상옥리

무직

기전여학교 졸업. 서문외교회출석. 징역 6월. 대구복심공소기각.

청년운동에 참여한 서문외교회 교인들

성 명

직 업

직 책

주 요 활 동

배은희

목사

면려청년회 고문

서문외교회 목사.

이경혁

신흥학교교사

면려청년회 회장

서문외교회 집사. 만주신흥무관학교교사. 신흥학교교사.

백창기


면려청년회 서기

서문외교회집사. 유년주일학교부장. 완산교회로 이명.

전주기독청년회소년부장

이영한

예수병원직원

면려청년회 회계

서문외교회 집사. 예수병원직원.

김운영


전주여자청년회

기전여학교졸업. 김인전목사의 딸.

강정숙


전주여자청년회

기전여학교졸업.

이숙정


전주여자청년회

서문외교회 집사

김가전

교사

전주기독청년회 회장

유년주일학교교장. 평양신학교졸업.

3 1운동참가.

박정근

신흥학교교장

전주기독청년회 총무

동경제대출신. 동아일보전주지국장.

신흥학교교사 교장.

현제명

신흥학교음악교사

전주기독청년회체육부장

서문외교회를 중심으로 신문화운동주도. 수양동우회활동.

유상백

은행원

전주기독청년회사회부장

독신전도단활동.

신동기

기전여학교교감

전주기독청년회 총무

북해도농대출신. 기전여학교교감.

신간회, 근우회 관련자

성 명

직 업

직 책

주 요 활 동

배은희

목사

신간회전주지회장

평양신학교졸업. 독신전도단. 전주야학회회장. 숭덕학교교장.

신현창

의사

신간회조사연구부

총무간사

배은희 목사와 독신전도단활동.

김가전

신흥학교교목

교사

신간회조사연구부

총무간사

유년주일학교교장. 평양신학교졸업. 3 1운동참가.

기독청년회활동.

백정목

신흥학교교사

신간회조사연구부

상무간사

서문외교회집사, 아동성경학교교감.

유보경


근우회

전주서문외교회 최초세례교인 김성희의 딸.

기전여학교졸업.

김운영


근우회

김인전목사의 딸. 기전여학교졸업.

양신선


근우회

양경현장로의 딸. 기전여학교졸업.

현제명과 결혼.

강정숙


근우회, 정치연구부

서문외교회 유년주일학교교사. 기전여학교졸업.

김은애


근우회

서문외교회 유년주일학교교사.

이인철


근우회 의사부

서문외교회 유년주일학교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