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지방 장로교의 전래와 수용 송 현 강*
1. 머리말
충남지방은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각광받던 곳이 아니었다. 복음의 수용과 관련하여 한국 북부 지역의 신흥 상공인층과 같이 자신들의 변화된 처지에 걸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서울처럼 신지식층의 학생들과 개화파 관료들이 우글거리던 곳도 아니었다. 공식적인 선교의 시작도 역시 선점 지역에 비해 10년 이상 늦게 이뤄졌다. 이 지방은 오히려 19세기 한국 향촌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고, 선교사들이 발을 디딜 때까지 농업 경제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의 방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또 충청지역의 기독교 전래 양상은 복잡하기가 강원도를 능가하여 당시의 대도시나 경기도에 버금간다. 즉 충청지역은 미감리회(충북 북부 지역과 충남)와 북장로교(충북 남부) 선교사들의 활동이 많은 곳이었지만, 그 외에 남장로교(서천-부여-보령-금산-논산 일부)와 침례교 계통(공주-강경-임천 칠산·용안·각개), 그리고 성결교(부여 규암-은산-홍산) 역시 이 지역의 개신교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충청의 기독교사 연구는 특정한 교파나 선교부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것은 '한국에 수용된 개신교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과 이 지역의 특성을 다른 지역의 그것과 식별할 수 있는 '지역에 대한 이해'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의 개신교 역사는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아직까지 충남이나 충청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교회사 연구서가 나오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은 충청지역의 개신교 수용 과정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먼저 충남 지역의 장로교 전래와 수용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즉 이 지역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 행위의 결과로 형성된 장로교회의 수립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1907년 남장로교와 미감리회 선교부 사이에 맺어진 선교 구역 분할 협정으로 당시 충청남도의 총 37개 군 가운데 8개 군과 안면도를 제외한 나머지 29개 군은 감리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그 후 30년 이상 누적되었다. 그 결과 이곳은 사람들에게 마땅히 감리교의 선교 구역으로 인정되었다. 한국 기독교사 개설서들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선교지역 분할도'에는 충남의 대부분이 감리교 지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충남의 장로교 지역은 호남의 남장로교 영역의 북단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32년 통계에 의하면 그 해 충남의 기독교인 가운데 장로교인은 1403명으로, 같은 해 충남의 감리교인 2,837명의 절반에 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의 초기 장로교인들은 한국 남부지역 교회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왕의 호남교회사 연구서들은 현재의 행정구역의 경계를 연구의 범위로 한정하여 충남의 장로교를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특히 원래는 남장로교의 선교구역이었으나 1963년 전북에서 충남으로 편입된 금산군 전체와 논산군 일부 지역의 교회들, 그리고 1945년 이후 충남노회로 그 소속을 변경한 조치원읍의 경우는 지역교회사 연구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2002년 현재 충청남도의 공식 행정구역 안에 있으면서 1900년 이후 1923년까지 세워진 장로교회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수립 과정을 사회사와 지방사의 틀을 가지고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19세기 말 충청남도 향촌사회의 동향
최소한 19세기 말 20세기 초 충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교적 전통이 두드러지게 강하거나 양반의 고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28년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충남은 인구 대비 유생의 비율이 0.45%로 전남(1.45%), 경북(1.45%), 경기(0.74%), 경남(0.55%)의 뒤를 잇고 있다. 충남의 뒤에는 전북(0.39%)과 충북(0.36%)이 있을 뿐이다. 물론 유생의 수가 한 지역의 유교적 전통의 계승 정도를 완벽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통계는 당시 충청남도 재지사족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쇠락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조선후기에 왕성하게 형성되었던 동족마을 역시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해체되고 있었는데, 1930년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나타난 충남의 전체 마을 대비 동족부락의 비율은 28.36%로 경남(67.83%), 전남(64.17%)등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면서 조사대상 7개 도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 또한 당시 충남의 향촌사회가 다른 지역보다 더욱 전통적이라거나 사족지배체제가 비교적 견고했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러한 현상은 단지 일제시대의 상황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장기적으로 진행된 결과였다. 즉 충남지역은 조선후기 이래의 사회변동 과정에서 재지사족들이 몰락하고 한양에 거주하던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의 영향을 세게 받던 지역이었다. 16세기 이후 충남의 재지사족으로서 이 지역의 향권을 장악했던 호서사림(湖西士林)들은 18세기 중엽 이후 이미 향촌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상실했고, 그들을 대신해 수령 및 신향(新鄕)들과 아울러 중앙의 척신(戚臣)들과 결탁한 토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이후 지속된 수령과 토호들의 수탈과 농민들의 저항은 이 지역 향촌사회의 유교적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더욱 약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토호들은 향촌사회에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로 존재했을 뿐 이전의 재지사족들이 지니고 있었던 향촌교화의 사명감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향약을 조직하거나 운영하는 것과도 무관했다. 토호들과 길항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수령들 역시 향촌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향촌사회의 공공성을 해체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남의 장로교 신앙 수용의 당사자들은 대개 두 개의 집단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하나는 전직관료나 몰락양반층이고, 다른 하나는 소농민층이다. 부민층이나 서민지주들의 입교는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다. 이 지역에도 요호부민층은 분명하고 또 광범위하게 존재했지만, 당시 특히 충청우도에 집중된 요호층에 대한 과중한 수탈로 말미암아 그들의 사회 경제적 처지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그러므로 충남의 초기 장로교인들은 바로 이 두 계층에서 집중적으로 배출되었다. 양자는 구시대의 질서를 대표하는 중앙의 경화사족이나 향촌의 수령·토호들과 정서적으로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은 이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통합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향촌사회의 내부에는 모든 계층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리더십이 무너진 지 오래였다. 이 지역의 전직관료·몰락양반들은 기본적인 학식과 귀족적인 교양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관직을 통해 출세할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관직 진출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소농민들은 집중적인 수탈의 결과 현실에 대한 낙담과 아울러 새로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신속한 개종의 배경에는 자신들의 불우하거나 불안정한 처지를 만회하려는 신분 상승과 안전에 대한 욕구가 서려 있다. 이들에게 있어 유교적 가치는 개인의 도덕성을 유지하는 기능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대한제국의 시기를 거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입신을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수용할 수도 있고 또 서양 문물과 타협할 수도 있다는 사고 방식, 과도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소외 세력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서울에서 '문명개화론'이라고 하는 매우 세련된 사유 방식이 충남에 전해졌다. 서울에 내왕하고 있던 인사들을 통해서 전달된 이 새로운 사고 방식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거부해서는 안될 그 무엇이었다. 문명개화론은 먼저 충남의 전직 관리와 일부 양반층에 수용되었고, 충남의 향촌사회는 그들의 변화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충남의 초창기 장로교 지도자들이 1900년대 초 서울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향리에 교회를 세워 가는 과정은 당시 이 지역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3. 충남의 선교 지역 분할 충청도에 대한 선교 지역 분할은 1893년 1월 장로교선교부공의회에서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부 사이에 이뤄졌다. 이때 남장로교는 한반도 서남 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활동은 전라도에 집중되었다. 선교사업의 시작을 위해 선교사들이 염두에 둔 도시는 전주였으며, 그 다음 해(1894년)에 본격적인 선교지 답사에 나섰던 레이놀즈의 지방 순회도 제물포에서 군산 전주를 거쳐 전남을 관통하고 있다. 또 전주(1894년)와 군산(1896년)에 연달아 스테이션을 개설하여 이미 전북 지역에서의 선교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충남 지역의 선교에 관심을 보였다는 징후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1895년부터 입국을 시작한 침례교 계통의 '엘라딩기념선교회'의 선교사들은, 1896년 강경과 공주에 도착하여 충남지역에서 선교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남감리교와 침례교 선교사들이 입국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들의 선교지가 남쪽 전라도에 고정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또 그 다음해(1898년)의 실행위 보고서에는 "……우리 선교부는 증원의 부족으로 인해 양도(전라·충청) 중에서 충청도를 사실상 침례교 형제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전라도의 남쪽 절반마저 내줘야 되는가? 그 대답은 성도들의 물질적 지원과 헌신된 젊은 형제 자매들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적고 있다. 남장로교 선교부와 엘라딩기념선교회 사이에는 선교 지역을 둘러싼 협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로는 당시 남장로교 선교부는 충청도까지 선교 사업을 펼칠 충분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92년부터 이미 수원·공주 구역을 자신들의 선교 지역으로 예정하고 있었던 미감리회는 아직 다른 선교부와 지역 분할 협정을 맺기 전이었으므로, 엘라딩기념선교회의 충남 선교가 시작된 1896년에 스크랜튼(W. C. Scranton)을, 그리고 1898년에는 스웨어러(W. C. Swearer, 서원보) 선교사를 연달아 이 구역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미감리회의 선교사들은 이 기간에 계속해서 공주를 언급하고 있지만, 엘라딩기념선교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그러므로 미감리회는 남장로교 선교부가 엘라딩기념선교회에 충남 지역을 양보한 것과는 무관하였다. 그러나 미감리회의 충남 선교는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결국 엘라딩기념선교회의 마지막 주재 선교사 스테드맨(F. W. Steadman)의 철수 이후 본격화되었다. 엘라딩기념선교회의 충남에서의 활동은 이미 후원자였던 고든(A. J. Gorden : 미국 보스턴 클라렌돈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목사로서 엘라eld기념선교회 조직) 목사의 갑작스런 죽음과 재정 지원의 중단으로 1899년부터 선교사들이 잇달아 철수하면서 위기를 맞고 있었다. 1900년부터 스테드맨은 감리교 선교부와 자신의 철수를 염두에 두고 미감리회의 선교사들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4월 스테드맨의 귀국은 충남의 개신교 상황에 일대 변화를 몰고 왔다. 1901년 이후 충청도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896년부터 이곳과 인접한 경기도 남부 지역을 선교 구역으로 하고 있던 미감리회의 선교사들과, 역시 경기도 남부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북장로교 선교사 밀러(Frederick Scheiblin Miller, 閔老雅)의 활동이 차령산맥을 넘어 충청도까지 연장되고 있었다. 스테드맨의 철수 이후 충청 지역은 사실상 각 교파 선교부들의 선교지역 분할에서 어정쩡하게 누락된 무주공산의 상태였다. 곧 북장로교와 미감리회 선교부간에 이 지역을 둘러싼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쉽게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충청도에서의 선교 사업은 각 교단 선교부의 결정에 맡겨졌다. 미감리회의 공주 스테이션 설치(1903년)와 북장로교 민노아 선교사의 청주 이주(1905년)는 비슷한 시기에 해당 교파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 민노아 선교사의 활동은 충남의 홍주(홍성)와 조치원에서도 진행되었다. 1903년 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 F. Bull)은 금강을 건너 이미 자신들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충남의 서천과 한산의 신자 집단을 방문하고 있다. 또 1904년 남장로교 선교부는 그 해 9월에 열린 연례회의에서 충남의 선교와 관련된 스테드맨 그리고 또는 (미국의) 북침례교회와 협상할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으로 부위렴과 하위렴 그리고 전위렴(W. M. Junkin) 선교사를 지명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남장로교의 선교가 충남으로 확대되고 있었으며, 또 스테드맨 철수 이후 그의 지도를 받고 있었던 칠산(침례)교회의 구성원들이 부위렴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해 온데 따른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그리고 드디어 부위렴은 1905년 7월에 칠산(침례)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던 왕골(초왕, 현 부여군 양화면 오량리)의 교인 51명에게 세례를 주면서, 이들을 남장로교 선교부의 새로운 모임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무렵 남장로교 선교부 역시 충남 지역으로의 진출을 공식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충남은 미감리회와 북장로교 그리고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이 동시에 활동하는 지역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으로 충청지역에는 스테이션(station)이 세워진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미감리회는 공주와 청주·홍주·천안·충주 지역 등 충청도의 많은 지역에서 발빠르게 움직였다. 북장로교 역시 청주를 중심으로 보은·괴산·영동·조치원·옥산에서 자신들의 세(勢)를 확산시켜 나갔다.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의 발길은 금강을 출발하여 멀리 안면도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당연히 선교 지역이 중복되었다. 한 도시에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나란히 세워졌다. 특히 충북지역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거의 혼재되어 있었다. 남장로교와 미감리회의 경우도 강경-부여-임천-남포를 경계로 충남의 서남부 지역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북장로교와 평안도와 황해도에 대한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마친 미감리회는 1907년 남장로교 선교부와도 분할 협정을 체결했다. 1907년 9월 5일 열린 남장로교선교부연례회의에서는 선교지 분할과 관련하여 서원보(미감리회)와 전위렴(남장로교)이 동의한 연합공의회 실행위원회 회의록(Minutes of the Executive Committee of the General Council)이 낭독되었다. 그 내용은 군산과 공주 사이의 오천, 보령, 남포, 홍산, 비인, 서천, 한산, 임천 그리고 안면도는 남장로교가 맡고, 그 이북 지역 모두는 미감리회가 담당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미남장로교의 충남 선교는 스테드맨의 철수 이후 이 지역의 주도적인 선교부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금강을 따라 진출한 군산스테이션의 활동이 누적된 결과, 결국 이곳이 그들의 선교 지역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감리회 역시 충남 서남부 지역에 대한 남장로교 선교부의 기득권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당한 진통을 겪었던 충북 지역의 분할 협정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1907년 현재 이 지역에는 총 16개의 신자 집단이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의 목회적 관심을 받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1907년의 협정으로 형성된 충남 장로교회의 지형은 1936년 선교지 경계가 철폐될 때까지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4. 충남의 장로교회 형성 과정 (1) 서천·부여·보령 1902∼1923 1894년 전주 스테이션을 개설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896년 군산에도 스테이션을 설치하여 의료선교사인 유대모(A. D. Drew)와 전위렴을 상주케 했다. 특히 군산 스테이션의 유대모 선교사는 금강과 만경강을 오르내리면서 충청도의 남부 지역과 전북 북서부 지역의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금강은 행정적으로 전북과 충남을 나누는 경계였지만, 금강 하류 연안의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배를 타고 서로를 왕래하고 있었다. 군산에서 강경에 이르는 금강 양쪽의 마주 보는 지역은 실제적으로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그러므로 충남의 장로교회가 남장로교 군산선교부 선교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03년 봄 부위렴 선교사는 금강을 건너 서천을 방문하는 중 뜻밖의 장면과 마주쳤다. 그곳에는 예배를 위해 50여 명의 회중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 모임은 예전에 군산 스테이션에서 설립한 만자산 교회의 회원이었던 사람(백정의 신분)이 그곳으로 이사가서 살며 복음을 전한 결과로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시 부위렴 일행은 서천으로부터 20리 떨어진 한산으로 가서 역시 15∼30명이 회집하고 있는 모임에 참석했다. 이 그룹의 기원은 군산의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구암(궁말)교회에서 기독교를 소개받은 주민들이 건강을 회복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마을에 교회를 세운 데서 비롯되었는데, 바로 이 교회가 충남의 첫 장로교회인 화산(수출 또는 문화골)교회(현재는 기산교회, 1902년경 설립 추정)이다. 이곳의 신자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단체로 구암교회에 가기도 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예배당에 신자들이 꽉 찼다고 부위렴은 증언하고 있다. 또 군산의 바로 맞은 편 쪽에는 신아포가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한 가족과 또 다른 4명이 구암교회의 회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신아포를 갓 출발했을 때 의관을 정비한 중년 남자가 따라와 세례를 요청했다. 그는 거기서 60리 떨어진 칠산침례교회의 회원이었다. 부위렴과 스테드맨 이후의 침례교인들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04년경 화산교회는 평균 50명이 모이는 교회로 자라고 있었다. 멤버들의 교체가 있었지만 벌판의 언덕에 크고 좋은 예배당을 지었고, 25명이 학습을, 남자 2명과 젊은 과부가 세례를 받아 선교사들을 흡족하게 했다. 그때쯤 부위렴은 스테드맨이 두고 간 침례교인들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상당수가 이교(heathenism)로 갔고 나머지도 몇 개의 분파로 쪼개져 있었다. 그들은 계속 부위렴에게 방문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부위렴은 일단 그들에게 스테드맨의 귀환을 기다리며 인내할 것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선교부를 통해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결국 1905년 7월 부위렴은 칠산의 교회에서 기원한 왕골(초왕)의 신자 집단을 방문해 무려 51명에게 세례를 줌으로서 이들을 자신의 구역 안에 포함시켰다. 미남장로교 군산 스테이션의 충남 선교가 급진전된 것은 1905년과 1906년의 일이다. 부위렴은 1906년 7월 현재 충남에는 모두 18개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는 그 8개월 전인 1905년 9월의 6개 그룹이 있었던 것과 크게 비교되는 것이다. 부위렴은 1905년 11월 한달 간 자신의 요리사까지 대동하고 군산에서 당진까지 충남 서해안을 순회 여행했다. 그리고 부위렴 일행은 이전과 달리 그들을 보고 몰려오는 구도자들로 인해 북새통을 치르면서도 새삼 놀라고 있다. 그들은 다 자려고 누운 늦은 밤에도 와서 선교사를 찾았다. 또 그 중에는 양반관료들도 끼어 있었다. 더욱이 불신자이면서도 이미 YMCA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충남의 선교 환경은 선교사들이 모르는 사이 바뀌고 있었다. 1906년 봄 화산교회에서 연봉(다리목)교회가 나누어진 과정은 당시 교회 설립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같은 해 왕골교회에서 청포교회(현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가 나오게 되었다. 이외에도 당시 새롭게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들은 신설 : 종지·홍연·홍양·반교·홍산(좌홍)·평라(자라실), 왕골에서 분립 : 옥곡(옥실)·지석(괸돌)·오덕(수침), 화산에서 분립 : 연봉, 북산(석촌), 송내 등이다. 그리고 이어서 1907년부터는 안식년으로 귀국한 부위렴을 대신하여, 1904년 11월부터 군산선교부에 합류하여 1906년경부터 전북 옥구에서 선교하며 부위렴의 충남 선교를 도왔던 어아력(魚亞力, Alexander M. Earle) 선교사가 이곳의 교회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지역 교회의 숫자는 계속 늘어, 어아력은 1908년 충남 지역에 15개의 새로운 그룹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1908년부터는 충남지역을 둘로 나누어 안식년 휴가에서 돌아온 부위렴이 한산·임천·홍산군을, 어아력은 비인·서천·남포군을 맡게 되었다. 이 두 선교사는 1909년에는 각자의 지역(교회)에 대한 '당회권리'도 맡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세워진 교회들을 추정해보면 먼저 왕골교회에서 나눠진 장산(성산)교회가 있고, 또 서천의 장구리교회(군사리교회에서)·금당교회(화산교회에서) 그리고 구동교회와 지호교회(연봉교회에서)가 각각 분립되었다. 남포군의 도화담교회와 유곡교회도 이때 신설되었다고 본다.
충남의 교회들은 1909년 3월 6일 선교사 최의덕(L. B. Tate)의 집에서 열렸던 전북대리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날 대리회는 "충남 한산의 다리목(연봉)교회에 장로 1명을 택하기로 가결"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다시 대리회에서 다리목교회의 '당회권리'를 맡고 있었던 부위렴은 "김규배 씨로 장로 택함을 보고"하고 있다. 화산교회에서의 분립 다음해인 1907년 새 예배당을 헌당한 연봉교회는 김규배를 장로로 장립하였다. 김규배는 1910년 9월부터 전북대리회에 장로회원으로 참석하기 시작하여 1912년 새문안교회로 이명해 갈 때까지 전북대리회의 서기와 (독)노회보고위원 그리고 전라노회의 부서기로 꽤 주목을 받던 한국인 장로였다. 1910년 전북대리회는 충남 한산 지서울(지새울)의 김인전(34세, 세례 2년)을 원입목사문답을 한데 이어, 1912년의 전라노회는 왕길교회에 장로 피택을 허락하였다. 그는 이미 부친의 영향으로 지호교회 설립 이전에 입신한 것으로 보이며, 와초리에서 한영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그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드디어 1913년 그 노회의 장로회원으로 김인전이 참석하고 있다. 김인전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장로로 데뷔한 첫 노회에서 그는 서기, 학무위원, 군산지방시찰위원, 총회총대에 피선되었다. 다음해 전라노회는 금산읍교회의 이원필 장로와 함께 김인전 장로를 목사로 장립했다. 김인전은 그 후 전주서문밖교회의 목사로 청빙받아 1919년 상해로 망명할 때까지 5년 간 시무하면서 전북노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다시 종동교회에서 장로 1명이 나왔다. 1913년 노회는 부위렴의 요청으로 "명년 봄에 장로 1인 택할 것을 허락"했다. 유성열 장로는 1915년 노회에 그 모습을 나타내어 이눌서 지방의 당회록 검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 후 유성열은 계속해서 장로 총대로 노회에 참가하면서 여러 위원회를 두루 섭렵하고 1918년에는 총회의 총대로 선출되었다. 1918년 유성열이 노회에 보고한 종동교회의 상황은 "조사 1명, 장로 1명, 장립집사 1명, 서리집사 3명, 주일학교 교사 2명, 주일학생 40명, 세례교인 40명, 학습교인 19명, 원입인 27명, 제일 많이 모인 수 60명, (직영)소학교 학생 30명, 재정 157원"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같은 해 금산군의 조직교회였던 금산읍교회(제일 많이 모인 수 69명)나 지방동교회(80명)와 비슷한 규모이다. 김규배와 김인전을 이어 충남 서남부 지역 교회를 대표하던 그는 1919년 3월 29일 한산 마산의 새장터 만세운동의 주동자로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복역한 이 지역의 3·1운동 지도자였다.
1918년 제3회 전북노회에서 군산지방시찰위원회는 매요한 씨 지방 중 서천 구동교회와 화산교회에 장로 1인씩 택할 것을 청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틀 후 임사위원회는 구동교회와 화산교회에 장로 피택을 허락하고 있다. 그리고 1921년 8월 노회록에 구동교회 한백희 장로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이어서 1922년 부여 옥곡교회의 김경조 장로가 총대로 노회에 참석하고 있다. 1923년 현재 서천·보령·부여지역에는 33개의 교회에서 두 명의 선교사 그리고 한 명의 한국인 목사, 세 명의 장로, 12명 이상의 영수, 그리고 5명 이상의 조사가 활동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지역의 다수의 교회는 아직 당회를 조직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또 청포리교회가 유일하게 목사를 청빙했을 뿐, 장로를 배출한 교회마저도 전담 사역자없이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또 서천 동쪽 지역의 7 교회는 조사 1명이 순회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총 교인수는 1921년 현재 1059명 이상(매요한 지방+종동+구동, 부여의 5개 교회가 통계 누락됨)이며, 주일학교 학생 1,150명 이상이 있었다. (2) 금산 1905∼1923 금산의 장로교 전래 역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하여 한때 전주를 떠났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895년부터 다시 돌아와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금산군 지역에 대한 관심은 1902년 이후 시작되고 있다. 1903년의 연례보고에서 하위렴은 1903년에 자신은 두 번의 순회 여행을 했는데, 첫 번째는 전북 북부의 5개 군(고산, 여산, 용안, 함열, 임피)을 열흘 간, 두 번째는 전북 동부의 5개 군(진안, 용담, 무주, 금산, 진산)을 두 주일간 방문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여행은 기존의 어떤 그룹을 표적으로 삼아서 방문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전도와 책 판매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즉 이 지역은 아직 선교사들에 의해 수립된 신자 집단이 존재하지 않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하위렴은 그 문장의 말미에 특별히 전주에서 175리 떨어진 금산을 언급하면서 경부선에 인접해 있으면서 큰 시장을 갖고 있는 이 지역에 대하여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1904년 9월 하위렴은 연례회의에서 자신의 조사 김필수가 일년동안 고산·여산·익산·함열 지역을 특별히 돌보는 한편 용담·무주·금산과 그 인근 지역을 두루 여행했으며, 이 지역에는 지금 복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어 전망이 좋다고 밝히고 있다. 1903년에 비해 한층 진전된 내용이다. 그리고 이곳에 마로덕이 나타났다. 그는 그 해 진안·장수의 마을을 포함하여 6주일 동안 4번의 지방 순회여행을 했는데, 그 중 한번은 자신의 어학교사(이원필)·조사(최대진)와 같이 했노라고 밝히고 있다. 1905년 9월 마로덕과 조사 최대진은 전주동북구역의 7개 군을 2∼3개월간 순회 전도했으며, 주일마다 5개의 작은 소그룹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마로덕은 이 회의에서 전주동북지역의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6년 6월 마로덕은 지난 연례회의(1905. 9) 이후 진안 3, 무주 7, 금산 1, 진산 1, 고산 2, 익산, 2, 전주에 2개 등 모두 18개의 새로운 모임이 생겨났으며, 여기에 작년의 6개(원래는 5개로 보고)를 더하면 현재 총 10개 군(진안, 장수, 무주, 용담, 금산, 진산, 연산, 고산, 여산, 익산) 가운데 8개 군에 총 24개의 모임이 있다고 알리고 있다. 1921년에 쓰여진 진산 지방동교회의〈교회사기〉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同年(1906년) 二月中에 全州美順會 助事 崔大珍氏가 傳道次로 來訪하ꏡ 適者 主日을 當한지라 禮拜를 갓치 볼꿡 비로소 敎의 大旨를 聞한지라 漸次 主의 眞理가 暗黑界의 明照폑을 러 同年 四月에 至폁야는 禮拜보鏅 사람이 三十餘人의 至한지라.……"
금산의 첫 교회인 지방동교회는 이 지역의 남인 가문의 후예였던 진주류씨 류기택의 사랑에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또 1905년 금산읍의 이경필은 다른 7명과 함께 마로덕에게 학습을 받고, 1906년 세례교인이 됨으로서 금산읍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이경필은 그 해부터 금산읍교회의 영수로 일하게 되는데 1907년 금산읍교회는 "벌써 회개한 형제가 40∼50명을 헤아리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금산읍교회의 처음 장로는 이원필이었다. 그는 1909년 10월 장로 장립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장로와 조사의 직분을 병행하면서 또한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김인전과 함께 전라노회에서 목사로 장립받았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조사 → 장로 → 목사의 코스를 밟은 셈이다. 지방동교회의 류기택이 장로가 된 것은 1910년 봄으로 미루어볼 수 있다. 1909년 8월 전북대리회는 "……봉상 보산리교회와 진산 디방동교회에 장로 1인식 택하기(를) 마로덕 씨(가) 청원하매……"라고 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류기택은 1908년부터 1919년 8월까지 여러 지역을 다니며 활동한 권서인(매서인)이었다. 1910년 가을의 전북대리회에는 장로회원으로 충남의 이원필·류기택 그리고 김규배가 나란히 참석하고 있다. 1909년 이경필은 금산읍교회를 떠나 마로덕의 조사로서 용담에 널려 있는 소규모의 모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1년 이원필보다 한해 늦게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신학교 입학 후 다시 금산지방의 조사로 일했다. 그 사이 이원필과 류기택은 장로회원으로서 계속 노회에 참석하여 꽤 비중있는 역할들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이원필은 1913년, 류기택은 1915년 각각 총회 총대로 선출되고 있다. 이원필은 1914년부터 목포교회를 그리고 1916년부터는 군산개복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1917년 새로 분리된 전북노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18년 5월 2일 전북노회 임시회는 "이원필씨가 7계(간음)에 범과한 일로……확실한 본인의 자백과 증거가 있은 즉 직분을 거두고 출교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실무위원회인 임사위원의 위원은 공교롭게도 김인전(전주서문밖교회 목사)과 류기택이었다. 류기택이 불참한 가운데 김인전은 그의 출교 결정을 주도하였다. 1915년 이경필이 목사가 되었다. 그는 먼저 여산지방 5개 교회의 목사로 시작하여 2년 뒤에는 이원필의 목회지였던 목포교회(1917∼1921), 제주도 전도목사(1921∼1930), 광주금정교회(1930∼1943)에서 차례로 목회하였다. 초창기 충남 출신의 목사들은 주로 군산(이창규·이원필)·전주(김인전)·광주(이경필)·목포(이원필·이경필)·제주(이경필·이창규) 등 호남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그 지역 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14년 금산군에는 위의 두 교회 외에도 상가리(1907년 : 쇠실, 금곡, 하가리, 현 금성교회), 진산읍(지방교회에서 분립), 수영골, 요광원(추부면 요광리), 경당리(1910 : 금산읍교회에서 분립), 역평(역들 : 남이면 역평리) 교회가 이창규 조사의 사역을 받고 있었다. 1914년 이원필 장로가 떠난 후 금산읍교회는 1915년경 교회에서 운영하던 심광학교 교사 임구환을 장로로 세웠다. 임구환은 장로회원으로서 처음 참석한 1916년 노회에서 총회 총대로 선출되는 등 노회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17년 금산읍교회는 주일학생 70명, 세례교인 38명, 전체교인 71명, 재정 200.73원의 교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교인 수로는 지방동교회(1917년 : 전체 교인 100명, 재정 59원)에 못 미치지만 재정이 풍부하여 학교 운영에 많은 예산을 할애하고 있다. 금산읍교회는 1920년 이춘원을 장로로 세워 장로가 둘인 교회가 되었다. 이춘원 장로는 일찍이 금산읍에 살면서 마로덕의 전도를 받고 금산읍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장로가 된 경우이다. 그는 이미 1914년 전라노회로부터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아 입학하였으나 휴학과 계속 수학을 반복하여 1924년에야 목사가 되었다. 그는 1929년부터 1950년까지 충남 서남부 지역의 목사로 시무하면서 당대 충남을 대표하는 목회자였다. 1918년 지방동교회는 "……검산 지방동교회는 잘 진취하는 중 학교도 재미가 많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감으로 장로 1인 더 택하기로 하오며……"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고 있다. 그리고 1919년 류기택 장로의 돌연한 사망으로 다시 장로 1인을 증원하여 1920년 박태호와 안재룡을 장로로 세웠다. 역시 장로가 두 명인 당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는 다시 제원교회, 군북교회(1919, 심광학교 중심), 초현교회 등이 설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3년 현재 금산군의 교회는 모두 17개로, 그 중 2개가 조직교회였다. 선교사 1명과 조사 1명(1921년 금산읍교회 통계, 김현근 조사), 장로 4명, 목사는 없고, 10명 이상의 영수가 있었다. (3) 논산 1905∼1923 지금의 논산군 연무대읍은 1952년 육군 제2훈련소(연무대)가 설치되면서 생겨난 지명이다. 연무대는 조선시대 은진군 구자곡에 속해 있던 곳으로 훈련소 설치 후 면회 제도가 생겨나자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1963년 전북 익산의 황화면을 병합해 읍으로 승격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바로 익산군 황화면 지역에 있었던 두화, 고내리, 황화정교회의 역사에 있다. 마로덕은 1923년 현재 익산군의 23개 교회 중에서 하위렴 지방의 11개 교회를 제외한 12개 교회를 자신의 구역(마로덕 지방 또는 전주동북시찰)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 있기 전 여산군의 경내로서, 마로덕은 1904년경부터 이 지역을 줄곧 관리해 온 터였다. 1898년 남장로교 선교사 최의덕은 전주 북부 지역을 순회하면서 여산에도 그 발길을 돌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 대한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관심은 1902년 이후 시작되고 있다. 1903년 9월의 연례회의에서 하위렴은 자신이 최의덕과 여산에서 전도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하위렴의 조사 김필수는 1903∼1904년 사이에 여산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 결과 이곳에는 1903년부터 교회들이 설립되고 있었는데, 고내곡교회(1903년)의 뒤를 이어 1907년에 황화정, 1908년에 두화교회가 각각 세워졌다. 1905년 마로덕이 연례회의에 보고한 "주일에 정기적으로 모이는 5개의 작은 소그룹들" 가운데는 고내곡의 신자 집단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07년 모두 29개의 모임에서, 1908년 10개가 더 늘어나던 때 황화정과 두화교회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1912년 8월 제2회 전라노회는 "고내곡·황화정 두 교회에 장로 1인씩 택"하고자 하는 마로덕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913년 8월 여산 고내곡교회의 장로 오상운이 장로회원으로서 3회 노회에 참석하고 있다. 또 1914년 노회에서는 "익산군 두화교회 장로 1인 택하기로 허락"한 결과, 1915년 8월 제 5회 전라노회에 두화교회 서명오 장로가 참석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노회에서 마로덕은 "익산군 황화정교회와 두화교회 선리교회에 이미 허락받아 장로로 피택된 삼씨를 장립하야 당회를 조직하였사오며, 황화정교회 장로 김창열 씨는 시험에 빠져 여러 번 권면해도 듣지 아니함으로 직분을 거두었"다고 알리고 있다. 그래서 세 교회 중 황화정교회의 당회 조직이 좀 늦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그 회의에서 두화리·황화정·고내곡·여산 선리·고산 밀곡 등 5교회는 공동으로 목사를 청원하였다. 이 교회들은 비록 힘을 합친 것이지만 목사를 청원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것이다. 1917년 현재 그 교회들의 교인 수는 두화 40명, 고내곡 45명, 황화정이 밀곡(민파)과 합쳐서(이경필 지방) 94명이었다. 앞서 살폈듯이 이경필은 1915년 9월 여산 지방 5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2년 간 시무했다. (4) 조치원 1905∼1923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기 이전의 조치원은 연기군의 북일면과 청주군 강외면의 일부에 해당하는 농촌 지역이었다. 그러나 조치원역이 세워지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치원의 개신교 전래는 북장로교 선교부의 청주 스테이션 개설 준비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1902년 북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는 청주 스테이션 설치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그 위원회는 1904년의 연례회의에서 8개항으로 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두 번째 항목의 "(청주 스테이션의 설치를 위해서) 철도가 지나가는 (청주 인근의) 조치원(시장)에 서점과 휴식을 위한 건물을 세울 것"을 권고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기도 양주군 신촌에 거주하던 여현기가 조치원으로 이주하여 권서로 전도한 결과 조치원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한 '장로회사기'의 기록과 충분히 연관지을 수 있다고 본다. 여현기는 경부선 철도의 개통(1905. 1. 1)을 전후하여 충북의 관문으로서 그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한 조치원에 파견된 매서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모여 예배드리며 형성되었을 조치원교회의 출현은 퍽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이 지역의 책임자인 민노아는 "소책자의 사도"라고 불리울 만큼 선교사업에서 문서의 중요성을 잘 알고 또 활용했던 선교사로서, 조치원의 연락 거점 여현기의 역할을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조치원교회가 수립될 당시 청주에는 이미 신대교회(1901년 설립 추정)와 청주읍교회(1904년)가 세워져 있었다. 1912년 10월 22일자〈예수교회보〉에 실린 충청북도 청주 조치원교회 여현기 영수의 글(사랑 査經會) 은 그의 됨됨이를 잘 보여준다. 여현기는 단순한 책장사가 아니었다. 그는 청주 스테이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일들을 예년과 비교할 수 있는 목회적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다. 선교사·조사들과의 관계도 그리 단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문장의 미려함과 융숭한 잔치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그가 어느 정도 학식과 교양을 갖추고 있던 인물임을 느끼게 해준다. 1917년 조치원교회는 "특별전도가 잘되"며 "평북노회에서 보낸 전도인 고려위 씨가 조치원에 전도하는 중 재미"를 보고 있었다. 1920년 조치원교회는 그 해 전도헌금으로 노회 전도부에 2원을 납부하고 있다. 1922년 조치원교회는 8백원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23년 노회에 사기를 보고한 30개 교회 가운데 조치원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조치원교회는 처음 여현기 영수의 집에서 시작한 이래 1917년 경 전도에 진력하면서 어느 정도 교회의 모습을 이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단독으로 조사를 두고 예배당을 신축하며 전도헌금을 납부하는 형편으로 성장했다. 이미 조치원교회는 1922년부터 "조치원·보시울 두 교회가 연합하여 장로 1인……청원함을 협의하였으며", 1924년 제26회 경충노회에서는 충북 청주읍, 괴산읍, 영동 장척리교회와 함께 장로 1인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조치원교회의 장로 장립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5. 충남지방 장로교인들의 입교 동기와 교회 생활
충남의 장로교회 형성 과정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전직 관료나 양반층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봉교회의 김규배, 완포교회의 김인전, 지방동교회의 류기택, 종지교회의 유성열 그리고 금산읍교회의 이경필 영수가 그들이다. 김규배의 관직은 비록 감역에 머물고 있지만, 그는 신앙과 신학문의 선각자였다. 그의 입교는 동향이었던 월남 이상재의 영향으로 이뤄졌다. 이창규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不肖의 거주하는 이웃집에 金監役 奎培氏란 학자가 매년 留京하시는 선생이라. 서울단여 歸鄕하면 서울에 대한 時局談話를 洞中人을 모히고 취미잇게 하는데 1904(甲辰)年 여름에 서울단여와서 時局對한 談話中에 美國人 宣敎師 元두우라는 사람이 예수교를 선전하는데 그가 우리나라 皇帝의 愛護를 받는다 하며 서울에 유명한 人物들인 이상재 씨 윤치호 씨 이원긍 씨 유성준 씨 신흥우 등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하며 자기도 믿기로 작정하엿다 하며 기독청년회설립하고 대활동하고 잇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一生史略)
김규배는 기호지방 개혁관료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김인전 역시 부친의 영향으로 입교한 양반의 후예였다. 그가 세워 운영한 한영학교의 졸업생들은 후에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이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로 성장했다. 그 역시 전주서문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전북 지역 3·1운동의 유력한 배후 인물이었고, 그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유성열 역시 강릉 유씨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그는 김인전과 더불어 충남 장로교회의 우국지사형 지도자의 전형을 이룬다. 또 금산 지방동교회의 류기택 장로는 남인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또 지주로서 자신의 경지를 경작하고 있는 소작인들을 동반 개종시킨 일화를 지니고 있다. 류기택은 마로덕을 만나 지방동교회를 세우기 이전에 이미 서울에서 경성청년회와 접촉하고 있었다.
京城靑年會에 入會하고 卽時 靑年會라는 名稱으로 自宅舍廊에 置폁고 主日이면 幾個人이 會集폁야 權威的 行動으로 事務를 視取폁는 場所를 作폁엿더니 同年(1906년)二月中에 全州美順會 助事 崔大珍 氏가 傳道次로 來訪폁ꏡ 適者主日을 當한지라 禮拜를 갓치볼꿡비로소 敎의 大旨를 聞한지라.……適期時에 全州馬牧師路德氏가 崔大珍 氏를 同伴來訪폁야……於時乎 靑年會의 名目과 監理派에 連絡은 漸次疎遠폁고……(지방동교회 교회사기) 류기택 또한 서울의 기호지방 구 중간계급과 연결된 인물로 추정된다. 또 그의 존재는 금산 교회들의 설립 초기에 나타나는 감리교 청년전도대와도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가 전직 관료였던 금산읍교회의 이경필이다. 그는 입교 직전인 1903년 대한제국의 9품 종사랑을 역임했던 관리 출신이었다. 이경필은 감리교 청년전도대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에 관심을 보였던 몇 명의 청년 가운데 리더로서,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어떤 종교적인 성격의 모임을 형성했을 뿐더러 결국 그들 가운데 제일 먼저 세례를 받고 금산읍교회의 설립을 주도했다. 선교사들이 주도하고 있었던 치리회에서의 이들에 대한 대접은 남다른 것이었다. 김규배는 장로회원으로 참석한 첫 대리회에서 서기로, 또 1912년 전라노회 부서기로 피선되었다. 김인전은 1913년 회원으로 참석한 첫 회의에서 바로 총회 총대와 노회 서기가 되었다. 더욱이 목사로 장립받은 즉시 호남 최초의 교회로서, 사실상 전주스테이션의 직할 교회였던 전주서문교회의 목사로 청빙받고 또 전북노회장에 피선된 것은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웅변한다. 사실 당시에는 조사 1명도 선교사들의 동의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때였다. 지방동교회의 류기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김규배가 서울로 떠나고 김인전이 목사로 신분을 바꾸면서 류기택과 종지교회 유성열 장로는 전라노회의 단골이었다. 그리고 다 같은 장로라고 해서 이들과 같이 노회의 직분을 계속 중복해서 맡는 것은 아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총회 총대는 고사하고 거의 직분을 맡지 못하는 장로도 있었다. 그러므로 충남 지역 장로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은 양반 및 전직 관료층과 소농층에서 함께 배출되었지만 그 무게는 양반 출신들에게로 기울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양반들의 입교는 다시 자신이 속한 향촌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창규 목사의 자료는 20세기 초 한국인들의 기독교 입교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19세기말 충남 서남부 지역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당에서 6년 동안의 유교 교육을 받은 19살 청년(과 그 친구들)의 입교담은 퍽 자연스럽다. 그(들)의 개종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의 부름이었다. ……김감역규배씨는 고명한 학자이시라 매년 留京하는바 경성부터 시골 본댁에 오면 동주민들이 기댁에 모혀 경성의 시국니야기를 취미잇게 듣는대 1904년에는 서울단여와서 여러 가지 시국담화하는중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구원의 복음을 믿는 니야기를 하엿고 主日을 당하면 수출교회에 나가셔 예배를 참여하엿다 그러함으로 그말씀을 드른 청년들이 무의식중에 수출예배당에 가보자고 상의하고 본동에 거주하는 동지……7인이 1904년(계묘)12월 제2차주일에 그교회에 나가니 모힌 교우들이 擧手歡迎을 하엿다.……(〈蓮峰敎會創立60週年略史〉) ……자기(김규배)도 믿기로 작정하였다.……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교회나가서 形便을 알고 습헛다. 그리하여 이웃친구 七人이 同行하여 韓山 水出이란 곳에 잇는 교회를 주일에 차저갓더니 그 교회 교인들이 大歡迎을 하며 잘 믿으라고 권함을 받고 도라와서 주일이면 단이기 시작하엿는데……(一生史略) 조선조 이래의 전통적인 가치관은 20세기 초 한국 중남부 지역 향촌사회의 젊은이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신문화에 대한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서울의 소식과 개화된 지식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향촌사회에서의 권위의 발생은 관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 문명의 선점'에 있었다. 김규배의 권위는 "경성의 시국이야기"에 있었다. 이것은 중앙이 갖고 있는 사회적 파급력 그 이상이었다. 한산 청년 이창규의 입교는 주자학과 기독교, 동양과 서양, 봉건적 질서와 신문명간의 까다로운 선택이 아니라 마땅히 그랬어야 할 어떤 당위의 냄새가 난다. 개항 이후 선교사들의 입국이 시작된 지 20여 년 만에 기독교는 신문명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외견상 김규배의 말을 듣고 그가 하는 것을 따라서 "무의식중에" 교회에 간 것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각 속에는 김규배가 들려준 신문화-서양문명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당시 서울지역의 기독교 인사들이 갖고 있던 속성, 즉 문명개화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인 입신출세의 동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즉 기독교야말로 문명부강의 근본이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자야말로 참 개화한 사람이라는 논리이다. 이렇게 문명개화의 맥락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당시 신지식층의 의식세계는 머지않아 그들의 출신지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비단 이창규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의 기독교 입교 양상의 한 패턴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창규 목사는 연봉교회 설립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1905年 1月에 南長老會 宣敎會 主催로 全南 光州에서 10日間 男大査經會를 開催하는데 金監役 先生의 指導로……4人이 참예함으로 신앙상 만헌 은혜를 받고왔다.……1905年度에 隣近各洞에서 믿는 사람이 점점 增價되여서 數十名이 水出敎會에 禮拜參席하엿난데……때에 선교사 夫偉廉牧師가 多數가 와서 工夫함을 매우 기뻐하면서 韓山東面에 곧 교회를 설립하여걷다고 發言하매……1906년 1월 第4次 主日에 水出敎會에서 禮拜畢後에 助事 朴化成氏 司會로 共同議會를 열고 東面으로 敎會分立할걷을 즐거웁게 可決하고 2월 첫주일부터 東面서 禮拜보기로 決定하다 그러함으로……1906년 2월 첫주에 宣敎師夫偉廉牧師와 魚亞力牧師와 朴化成助事가 와서 夫牧師 主禮로 敎會設立禮拜를 드리고 敎會設立을 宣布하고……1906년(丙午) 2月末頃에……新築禮拜堂에서 禮拜드리기 시작하니 蓮峰 龍頭 九洞 花村 芝湖 等地에서 믿고 나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서 매주일에 백명 信徒가 모혀 예배드렷다.……(《蓮峰敎會創立60週年略史》) 화산교회의 청년 신도 이창규가 기독교 신앙에 몰입하게 된 것은 1905년 1월 광주에서 열렸던 사경회에 참석하여 "신앙상 많은 은혜"를 받은 후였다. 아직 대부흥운동이 확산되기 전이었지만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많은 경우가 그러했듯이 그도 사경회를 통해 복음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갔다. 1903년 15∼30명이 참석하고 있던 화산교회의 회원은 1905년이 되자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연봉리가 속해 있었던 한산 동면의 청년 신도 10여 명이 참여한 1906년의 군산사경회에서 부위렴 선교사는 그것에 매우 고무되어 한산 동면에도 교회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다. 이어서 화산교인들의 전체회의(공동의회)에서 연봉교회의 신설이 "즐거웁게" 결정되었다. 충남 장로교회의 초창기에 지역 교회의 확산은 바로 이러한 우호적인 분립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있었지만 전임 목회자는 없었다. 선교사 부위렴·어아력 그리고 박화성·김치만 조사의 담당 구역은 구암교회와 군산의 다른 모임들 그리고 충남 지역까지 그 범위가 꽤 넓었다. 화산교회의 선배 신자들이 신설 연봉교회의 예배를 인도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정기적으로 설교를 듣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사경회 중시 전통은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싹텄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평소의 집회과 구별된, 보다 양질의 사경회에 신앙생활의 비중을 두었을 법하다. 또 다른 예로 충남의 교회가 초창기를 벗어난 1923년 충남의 서천·보령·부여 지역에는 33교회에 1200명 이상의 교인과 1300명 이상의 주일학교 학생이 있었지만 선교사·목사·조사를 합한 전담교역자는 8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아무리 바삐 움직인다고 해도 일반 교인들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이들과 접촉할 수 있는 수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견고한 (칼빈주의의) 고백적 공동체가 탄생하기란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충남의 복음주의 공동체가 유지되고 발전해 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또 조사들의 교육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훈련을 주로 담당했던 성경학원의 교수 수준도 역시 성경의 단락 구분과 당대 세계관으로의 본문 어휘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사경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것들은 경건과 개인의 윤리와 내세를 강조하고 있지만, 거기서 전통 기독교의 계시의 풍부함과 포괄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다. 선교사들이 지니는 근대복음주의의 탈신학적 경향은 20세기 초 충남의 선교 현장에서도 그대로 발견되고 있다. 최소한 충남의 장로교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0세기 초반 충청남도의 선교 현장에서 발생했던 장로교회 창설의 과정은 한마디로 "기독교의 갑작스러운 인기(boom)현상"을 배경으로 벌어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행간에는 근대 초기 한국인들의 의식과 삶의 급격한 변모의 과정이 숨어 있다. 개항기 한국이 처했던 정치·종교적 공황 상태는 이렇게 기독교를 어떤 압도적인 힘으로 끌어 올렸다.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향촌 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질서는 이제 그들의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합의가 그들 가운데 암암리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최소한 연봉교회의 경우 그들의 기독교에로의 귀의가 교리의 치밀한 소개나 집중적인 교육을 통해서 이뤄진 흔적은 없다. 한학에 능통한 전직 관료로서, 향촌의 리더였던 김규배의 태도는 백 명이 모여 예배했던 연봉교회 성장의 비결이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국 서북 지역 기독교의 성장이 관서지방에 대한 지역적 차별과 상인층에 대한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고 중산층이 되기를 열망했던 신흥 상공인층의 기독교 프로테스탄티즘과의 접맥이었다면, 우리가 살펴본 연봉교회의 경우에는 '서구 기독교문명의 힘'을 알고 있었던 향촌의 영향력있는 양반 관료가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그의 리더십은 구체제에 대해서는 별 미련이 없으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대해서는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는, 바로 그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심전심으로 겪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빛나고 있다. 충남 장로교의 출발은 교회가 문명개화의 힘을 온축(蘊蓄)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6. 맺음말 충남의 장로교회는 먼저 남장로교 군산스테이션 소속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수립되었다. 당시 금강 하류의 마주 보고 서있는 양안은 하나의 생활권으로서, 그 영향을 받은 서천과 한산에는 1901년과 1902년에 각각 개신교의 신자 모임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왕골의 침례교 계통의 모임이 군산 스테이션의 구역 안에 포함되었다. 미남장로교의 충남 선교가 급진전된 것은 1905년부터로 그때부터 해가 다르게 모임과 교인의 수가 늘어났다. 금산의 장로교 전래 역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06년경 금산과 진산에 각각 교회가 시작되었다. 남장로교 전주 스테이션의 하위렴과 조사 김필수의 활동으로 여산에는 1903년 고내곡, 1907년 황화정, 1908년에는 두화교회가 세워졌다. 이곳은 1963년 충남 논산군 연무대로 편입되었다. 1906년경 세워진 조치원교회는 북장로교 선교부가 청주 스테이션의 설치 준비를 하면서 조치원에 이주한 매서인 여현기를 통해 세워졌다. 조치원교회는 경충노회와 충청노회에 속해 있다가 1945년 충남노회에 가입하였다. 최소한 19세기말 20세기 초 충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교적 전통이 두드러지게 강하거나 양반의 고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충남 지역은 조선후기 이래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재지사족들이 몰락하고 한양에 거주하던 경화사족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지역이었다. 충남의 장로교 신앙의 당사자들은 전직 관료나 양반층, 그리고 소농민층에서 배출되었다. 이들의 신속한 개종의 배경에는 자신들의 불우하거나 불안정한 처지를 만회하려는 신분 상승과 안전에 대한 욕구가 서려 있다. 이들에게 있어 유교적 가치는 개인의 도덕성을 유지하는 기능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명개화론'은 먼저 충남의 전직 관리와 일부 양반층에 수용되었고, 충남의 향촌사회는 그들의 변화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향촌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독교에로의 귀의가 교리의 치밀한 소개나 집중적인 교육을 통해서 이뤄진 흔적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견고한 (칼빈주의의) 고백적 공동체가 탄생하기란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 조사들의 교육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훈련을 주로 담당했던 성경학원의 교수 수준도 역시 성경의 단락 구분과 당대 세계관으로의 본문 어휘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들은 경건과 개인의 윤리와 내세를 강조하고 있지만, 거기서 정통 기독교의 계시의 풍부함과 포괄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선교사들이 지니는 근대복음주의의 경향은 20세기 초 충남의 선교 현장에서도 그대로 발견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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