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학교
김인전 선생은 1911년 한산군 남하면 와초리 지사울(지금의 화양면 와초리)에 세워진 한영학교(韓英學校)에 재직하면서 인재 육성에 열정을 쏟으신 분이다. 알다시피 1910년 일제는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열게 하여 한일합방을 의결케 하고 8월 29일 합방조약을 공포하였다.
그후 일제가 교육방침을 분명하게 표명한 것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 하면서부터다. 즉 그들은 우리 나라 교육이 '공리(空理)를 숭상하고 실리(實理)를 천시하는 경향에 빠져 있었던 것을 지적하며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맞는 교육을 실시할 뜻을 표 시한 후 금후 조선교육은 오로지 유용한 지식과 온건한 지식과 온건한 덕성을 양성하여 제 국 신민된 자질과 품성을 갖추게 하는 것으로써 주안을 삼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저의를 살펴보면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거세하고 우민화(愚民化) 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의 서천 지역의 교육현황을 살펴보면 1911년 한산공립보통학 교, 1912년에 서천공립보통학교, 1913년에 비인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사립학교로는 기산보통학교가 이승휴(李承休)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종교학교로는 김영배에 의하여 한영학교가, 이시재(李時在)에 의하여 기독진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립학교와 종교학교는 일제의 통제와 간섭으로 점차 폐교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한영학교의 경우 중등교육과정으로 교직원이 5명, 보통과 학생 10명, 고등과 학생 16명이었으며, 학교장은 부위렴(夫尉廉)이었다. 와초리에서 한영학교에 대한 기억을 가지신 분은 김옥준 씨가 생존하여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학교가 달랐다. 애국가를 불렀고, 운동장에서 공을 방망이로 치던 생각도 난다.
선교사도가끔오고가고 했지.
학교는 어떤 건물이 있었어요?
김홍전 씨의 집 내에 학교가 있었다. 살림집, 사랑채, 학교, 광녕(말 사육장) 등이 있었는데 학교는 기와집이었다.
학교가 왜 없어졌다고 생각하세요.
애국가를 불러 일본인이 못하게 했을 거야.
김인전 선생 기억하세요?
무서운 양반이었어. 안경을 쓰고 항상 검정 양복 입고 말을 타고 다니셔서 아이들이 보면 겁이 나서 도망쳤지.
그때 교육 내용이 일본인과는 등지게 가르쳤던 것 같아.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면서 한영학교는 뭔가 달랐고, 일본의 감시 하에서도 민족 의식을 기르게 하려고 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이 학교의 교사 중 한 분이 김인전 선생이었다. 선생은 재직하면서 일제의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양질의 교육을 한 결과 1919년 3월 29일 한산 새장 3.1 운동의 주역을 육성해 내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들이 바로 송기면, 임학규, 이근호, 김인두로 김인전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한영학교 출신이다. 이 얼마나 값진 교육적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민족이 암울한 시기에 일본의 통제 속에서도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교육자다운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교육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단시 간 내에 교육의 효과를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김인전 선생은 한영학교에서 양질의 상품적 가치가 높은 교육을 실시하였기에 그와 같은 결과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영학교는 역사 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영학교는 서천에서 화양에 이르면 다시 완포리 쪽으로 2km 정도 가다 와초 교회 안내문을 따라서 500m 정도 가면 된다. 지금 한영학교 자리에는 기와집이 다른 집들과 달리 있는데 이 건물은 조길종씨 소유로 별장화되어 있다. 그러나 한영학교에 대한 안내문이 없어 답사 때마다 아쉬운 감이 있다. 한영학교 터라는 것과 이 학교 출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마산 신장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것만이라도 소개하면 좋겠다.
- 『서천·서천 사람들』 중에서 유승광 지음
김인전 선생은 1911년 한산군 남하면 와초리 지사울(지금의 화양면 와초리)에 세워진 한영학교(韓英學校)에 재직하면서 인재 육성에 열정을 쏟으신 분이다. 알다시피 1910년 일제는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열게 하여 한일합방을 의결케 하고 8월 29일 합방조약을 공포하였다.
그후 일제가 교육방침을 분명하게 표명한 것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 하면서부터다. 즉 그들은 우리 나라 교육이 '공리(空理)를 숭상하고 실리(實理)를 천시하는 경향에 빠져 있었던 것을 지적하며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맞는 교육을 실시할 뜻을 표 시한 후 금후 조선교육은 오로지 유용한 지식과 온건한 지식과 온건한 덕성을 양성하여 제 국 신민된 자질과 품성을 갖추게 하는 것으로써 주안을 삼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저의를 살펴보면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거세하고 우민화(愚民化) 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의 서천 지역의 교육현황을 살펴보면 1911년 한산공립보통학 교, 1912년에 서천공립보통학교, 1913년에 비인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사립학교로는 기산보통학교가 이승휴(李承休)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종교학교로는 김영배에 의하여 한영학교가, 이시재(李時在)에 의하여 기독진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립학교와 종교학교는 일제의 통제와 간섭으로 점차 폐교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한영학교의 경우 중등교육과정으로 교직원이 5명, 보통과 학생 10명, 고등과 학생 16명이었으며, 학교장은 부위렴(夫尉廉)이었다. 와초리에서 한영학교에 대한 기억을 가지신 분은 김옥준 씨가 생존하여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학교가 달랐다. 애국가를 불렀고, 운동장에서 공을 방망이로 치던 생각도 난다.
선교사도가끔오고가고 했지.
학교는 어떤 건물이 있었어요?
김홍전 씨의 집 내에 학교가 있었다. 살림집, 사랑채, 학교, 광녕(말 사육장) 등이 있었는데 학교는 기와집이었다.
학교가 왜 없어졌다고 생각하세요.
애국가를 불러 일본인이 못하게 했을 거야.
김인전 선생 기억하세요?
무서운 양반이었어. 안경을 쓰고 항상 검정 양복 입고 말을 타고 다니셔서 아이들이 보면 겁이 나서 도망쳤지.
그때 교육 내용이 일본인과는 등지게 가르쳤던 것 같아.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면서 한영학교는 뭔가 달랐고, 일본의 감시 하에서도 민족 의식을 기르게 하려고 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이 학교의 교사 중 한 분이 김인전 선생이었다. 선생은 재직하면서 일제의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양질의 교육을 한 결과 1919년 3월 29일 한산 새장 3.1 운동의 주역을 육성해 내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들이 바로 송기면, 임학규, 이근호, 김인두로 김인전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한영학교 출신이다. 이 얼마나 값진 교육적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민족이 암울한 시기에 일본의 통제 속에서도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교육자다운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교육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단시 간 내에 교육의 효과를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김인전 선생은 한영학교에서 양질의 상품적 가치가 높은 교육을 실시하였기에 그와 같은 결과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영학교는 역사 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영학교는 서천에서 화양에 이르면 다시 완포리 쪽으로 2km 정도 가다 와초 교회 안내문을 따라서 500m 정도 가면 된다. 지금 한영학교 자리에는 기와집이 다른 집들과 달리 있는데 이 건물은 조길종씨 소유로 별장화되어 있다. 그러나 한영학교에 대한 안내문이 없어 답사 때마다 아쉬운 감이 있다. 한영학교 터라는 것과 이 학교 출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마산 신장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것만이라도 소개하면 좋겠다.
- 『서천·서천 사람들』 중에서 유승광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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