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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밖교회 김병롱 목사의 사면과 김인전 목사의 청빙

천하한량 2007. 3. 15. 21:14

(1) 김병롱 목사의 시무 활동

  서문밖교회가 처음으로 당회를 조직한 것은 김필수 씨를 장로로 세운 1908년 8월이었는데 이는 김병롱 목사가 위임목사로 교회에 부임하기 전이다. 김병롱 목사 부임 전 서문밖교회는 담임 이눌서 목사와 김필수 장로 두 사람으로 당회를 구성했었다. 이눌서 목사는 당회에서 교정업무를 처리하기보다는 제직회를 통해 폭넓게 그리고 민주적으로 처리해 나갔다. 더욱이 김필수 장로는 당시 평양신학교에 학적을 두고 1년 중 수개월을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1909년 9월에 김필수 장로는 평양신학교에서 열린 독노회 석상에서 최중진·윤식명·김찬성·최관흘·정기정·장관선·이원민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고 마로덕 목사와 동사(同事)목사로 진안 지방의 여러 교회를 시무했다. 따라서 서문밖교회가 다루어야 할 치리 업무는 1909년 10월부터 이승두·최국현 두 피택 장로가 류서백 목사와 함께 당회에서 처리했다. 1911년 1월 1일 이승두가 정식으로 장로로 장립된 후부터는(최국현 장로는 남문밖교회가 분립된 후 남문밖교회에서 1910년 12월에 장립식을 했음) 정규 당회로서 처리하여야 할 권징업무, 직원 선출, 담임목사 선임과 청빙에 관한 업무를 관장, 처리했다.

  1912년 9월 28일 당회에서는 회장 이눌서 목사와 서기 이승두 장로가 당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 당시 당회의 업무처리 상황을 보면, 교인 정대성이 다른 유부녀와 아내와 동거생활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임을 깨우치고 권면하였으나 남녀가 함께 회개치 않으므로 이들을 출교 처분하고 교회 앞에 광고한 일이 있었고, 다른 교인 한아무개(韓某)가 십계명 중 제8계를 범하였으므로 회개할 때까지 수찬정지(受餐停止)의 벌에 처하기로 하는 일 등을 처리한 바 있었다. 1912년 9월 29일(주일)에는 예배 후 공동의회를 열고 장로 1인과 집사 1인을 투표로 택하여 장로에 최광진, 집사에 이석원(李錫源)이 각각 피택되었다.

  1912년 11월 24일에 이눌서·최의덕·김필수 목사와 이승두 장로 등 당회가 모여 교회 앞에서 이미 당회에서 결정한 대로 본교회에 부임하여 온 김병롱(金炳) 목사의 위임식을 이눌서 씨의 강도와 주관 아래 김필수 씨의 목사 권면, 김성식 씨의 교회 권면으로 거행했다. 서문밖교회에 비로소 한국인 담임목사가 시무하게 된 것이다. 김 목사 시무 초인 1913년 2월 5일(목요일, 기도회날) 오후 7시 교회에서는 투표로 집사 3인(田永七·崔鎭河·金建杓)을 선택하고 지난해 이미 선택해 둔 이석원 집사와 함께 집사 임직식을 당회에서 거행했다. 또한 당회는 성찬예식과 학습세례식을 거행하고 남·여 권찰 15인과 남·여 사찰 4명을 선택하여 교회 앞에 공포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세례문답을 실시한 36인 중 18인을 시세(施洗)하고 3명의 아이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었으며 학습문답을 실시한 19인 중 13인을 학습교인으로 세웠다. 이를 보면 당시 교회는 학습세례문답과 세례 베푸는 일을 신중하게 처리했으며 교인의 혼례식도 규정에 따라 허락했음을 알 수 있다. 또 8월 30일 토요일 아침에 당회가 모여 교인 중 손아무개(孫某)가 술장사를 하므로 그를 불러 권면했으나 본인이 불응할 뿐 아니라 회개치 않으므로 책벌로 성찬받는 것을 정지시키고 다음날 주일 교회 앞에 이를 광고하여 교회의 법도를 세웠다.

  그러나 당회의 결정이 항상 딱딱하고 권위적이지만은 않았다. 같은 해 9월 4일 혼인날에 목사가 출타하게 되면 피택 장로(최광진)로 혼례식 주례를 담당하도록 결의하여 혼가에 곤란을 주지 않았고, 또 11월 9일 주일에 세 사람을 문답하여 학습교인을 세우고, 11월 23일 주일에 아홉 사람을 문답하여 학습교인으로 세웠다. 이것을 볼 때 교인 관리에 융통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914년 1월 4일(주일)에는 그전에 피택되었던 전영칠 씨를 김병롱 목사와 이승두 장로가 안수하여 장립 집사로 세우고 그간 담당하고 있던 교중사무를 자신감 있게 처리하도록 했다. 이날 오전 7시에 당회가 모여 술장사하는 교인 장아무개(張某)를 불러, 그 동안 수차에 걸쳐 권면한 바 있었으나 회개하지 않으므로 책벌하기로 하고, 당일 11시 예배 때 교회 앞에 이를 공포하여 교인생활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 그 동안의 처리사항을 보면 교회 안에 권징업무가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는 믿는 자에게 적용되어야 할 행위와 질서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오늘날과 같이 타협적이며 미온적인 교정방식이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신속히 일을 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회록(책벌사항)
1910년 무렵,남이 버린 아내와의 동거,술장사,불신자와의 결혼 등에 대해
교회가 엄정히 책벌한 기록이 보인다.


  1914년 1월 18일(주일)에 학습·세례문답을 실시하였다. 학습문답을 실시한 5인 중 3인만을 학습교인으로 세우고 세례문답을 실시한 22인 중 18인에게, 또 아이 8인에게 시세(施洗)했다. 성찬식에 남·여 교인 181인이 참여하여 교회는 기쁨이 넘쳤다. 권징업무가 엄정하였지만 교세는 증가하여 집사를 증원하였다. 1914년 1월 26일(월요일) 공동의회로 모여 집사 3인을 선거했는데 김건표·안영렬·송치백(金建杓·安瑛烈·宋致伯)이 택정되었다.

  그후 교회의 권징업무는 계속 엄정하게 유지되었다. 1914년 4월 5일(주일) 오전 7시에 당회에서는 교인 중 불신자와 결혼한 두 사람에게 그 동안 수차 권면하였지만, 개전(改悛)의 정이 없으므로 혼례의 잘못을 깨우치면서 11시 예배 때에 교회 앞에서 책벌을 광고하였다. 대개 이와같은 책벌은 회개의 열매가 보일 때까지 수찬정지로 처리하였는데, 이는 가볍게 생각하기 쉬우나 구속이 약속된 교인에게 심각하고 무거운 벌이 아닐 수 없다. 구속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자리에 참예함을 거절당하는 벌이기 때문이었다.

(2) 김병롱 목사의 사임서 제출

  부임 이래 교정을 순조롭게 처리하면서 위임목사로 서문밖교회에서 1년 6개월간(1912년 11월 24일에 위임식을 거행한 후부터 사임서를 제출한 1914년 5월까지) 시무하던 김병롱 목사는 표면적인 어떠한 사건도 없이 갑자기 시무사면서를 교회에 제출하였다. 그가 사면서를 제출한 이유는, 자신이 전주서문밖교회에 부임한 후에 교회가 기대하는 만큼 흥왕하지 못하였고 교우들이 열성을 내지 않고 있으므로, 그 원인이 자신의 능력 부족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인한다고 하면서 “더 이상 시무하는 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송구하여 사면서를 제출하는 바라.”라고 하였다. 부임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한 데 반하여 교회의 발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므로 스스로 반성한다는 목회자로서의 양심적인 태도는 오늘의 목회자들이 교회 부진의 이유를 남에게 돌리고 반성할 줄 모르는 태도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그의 강직한 책임의식과 고결한 품성은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모범이 된다.

  사표를 접수한 당회는 이눌서 목사를 임시 회장으로 세우고 김병롱 목사에게 사표를 철회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사퇴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이 사실을 교회 앞에 알리고 5월 10일(주일)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의 의사를 묻는 투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사표를 받지 말고 반려하자는 이가 78명이고, 사표를 받자는 이가 38명이었다. 반려하자는 주장이 투표에 참석한 116인 중 3분의 2에 달하므로 김병롱 목사의 사표는 받지 않는 것으로 가결 처리되었다. 그러나 김 목사가 불응하며 사표를 철회하지 않으므로 교회에서는 부득이 지체하지 않고 노회에 처리를 청원하여 바로 그 주간에 전라노회 임시회의가 1914년 5월 15일(금요일) 서문밖교회당에서 모였다. 서문밖교회는 이승두 장로와 최광진·전영칠 두 집사를 대표로 파송하여 사표반려를 청원하니 노회는 이를 가부투표에 부쳐 사면서를 받지 않는 것으로 결의하였다.

  위와 같은 경위로 사표는 일단 반려되고 김 목사는 계속 시무하고 있었는데 지난 공동의회 때 사면서를 그대로 받자는 38표가 마음에 걸렸음인지 3개월이 지난 8월에 또 다시 사면서를 제출하고 자기는 황해도 재령지방으로 갈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8월 28일 교회 앞에 제출한 사표는 교회로서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14년 9월 5일 제4회 전라노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회 총회가 황해도 재령읍 남산재예배당에서 개최되고 있는 기간 중 그곳 성경학당에서 긴급하게 임시노회로 회집하여 김병롱 목사의 사면서를 그대로 수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교인의 잠재된 의사를 파악한 이상 구차하게 임기를 연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결단성과 강직한 의지와 개결한 품성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단호하게 사면하는 그의 이력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김병롱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권)에 나타난 바대로 1897년부터 평북 의주군 읍내교회에서 초대 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1905년에는 평북 선천읍교회에서 세운 남자중학교(신성중학교 전신) 설립에 가담하여 교사로도 봉직하였으며, 평북 의주군 몇몇 교회에서 조사로 교역하였다. 그리고 1908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 전북의 최대진(崔大珍) 목사와 함께 졸업하였다. 평양에서 열린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에서 목사로 장립받아 의주군 남재·낙원·농상교회의 동사목사로 교역을 담당하던 중 1912년 9월 전주서문밖교회의 청빙을 받고 11월에 부임하였다. 그가 당시의 교계 유일의 신문인 『예수교회보』에 논설을 몇 차례 발표한 것을 보면 중학교 교사 출신다운 지식과 문필력이 있어 잘 가르치는 목사상(牧師像)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문밖교회로서는 처음으로 청빙한 한국인 목회자가 너무도 짧은기간 시무하게 되어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그의 목회 편력(遍歷)을 보면 서문밖교회를 사임한 후 황해도 재령지방을 잠깐 거쳐서 1915년 경상노회의 임시전도목사로 시무하다가 일년만에 1916년 평북노회 차련관교회로 옮겨 약 2년간 시무하고 1918년 평북과 의산노회의 파송으로 만주지방(안동현과 봉천)에서 임시전도목사로 선교하다가 1924년 경북노회로 다시 와서 미국 북장로회 파송 안의와(Adams, James Edward, 安義窩) 선교사의 위탁전도목사로 시무하였다.

(3) 법을 초월한 목사 청빙


  김병롱 목사의 사면으로 공석이 된 서문밖교회의 후임 목사 청빙을 위해 1914년 9월 8일 총회기간 중에 열린 전라노회 임시회의는 교회가 절차를 생략하고 제출한 청원서를 김인전(金仁全) 씨에게 전하여 주기로 가결하였다. 황해도 재령읍에서 열렸던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회 총회가 9월 11일 폐회되자 노회 총대들이 돌아왔다. 서문밖교회에서는 1914년 9월 20일 이눌서 목사를 임시회장으로 하여 공동의회를 열고 회중에게 후임 목사 청빙을 설명하였다. 공동의회는 청빙할 목사를 세 종류 목사(위임·동사·임시목사)중 이눌서 목사와 동사 목사로 하고 월봉은 20원으로 하기로 가결하였다. 목사 청빙을 담당할 교회 대표로 이승두 장로·전영칠 집사·이돈수(李敦壽) 권찰 등 3씨를 선임하였는데 이미 9월 8일 임시노회 때 청빙의사를 전달한 바 있던 김인전 씨를 정식 청빙하기로 하고



김인전 목사

다음과 같은 청빙청원서를 제정(提呈)하여 이를 노회에 제출했다.

김인전 목사 좌하
전라북도 전주군 서문외교회가 당신의 목사다운 자격이 풍족하심을 아옵고 강도하심과 심방하심을 이미 들음으로, 깊이 바라옵건대 당신이 우리 교회의 목사 되시면 신령적으로 극히 유익될 줄 믿삽고 본교회의 목사 직분 감당하시기를 간절히 복청하나이다. 이 직분의 사역을 우리 가운데 행하실 때에 우리가 주 안에서 마땅히 도와드리고 위로하며 복종하리이다. 또한 당신으로 세상 걱정과 생업에 얽매이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장담코 약조하기를 당신이 본교회에 동사목사로 계실 동안에 우리가 달마다 금 이십 원씩 드리기로 증거하며 본인 등이 교회 대표로 성명을 좌기하여 도장을 찍나이다.

              1914년 9월 21일 전라북도 전주군 서문外교회
                              대표인 리승두, 전영칠, 리돈수
                              증인 공동의회회장 목사 리눌셔

  전라노회는 서문밖교회가 정식 절차를 밟아 김인전 씨를 청빙하겠다는 청원서를 받자 1914년 10월 10일부터 서문밖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속회하고 회무를 처리하였다. 10월 11일 부위렴 목사의 사회로 신학준사(神學準士) 김인전·이원필(李元弼)의 목사문답을 받고 예식절차에 들어가 김필수 목사의 권면과 노회원 일동의 안수, 이눌서 목사의 기도와 마로덕 목사 축도로서 목사 장립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서문밖교회의 청빙서는 김인전 목사에게, 목포 양동교회의 청빙서는 이원필 목사에게 각각 전달되었다. 전라노회에서 노회장 최의덕 목사는 김인전 목사의 전주서문밖교회 취임식의 예식위원으로 마로덕·이눌서·최국현 세 사람을 자벽(自)하였다.

  교회와 노회가 김인전 목사를 후임으로 신속하게 선임한 것은 선교사들을 비롯한 전 노회원들이 김인전 목사의 인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인 충청도 한산에서 사재를 들여 중학교를 세우고 청소년 육영사업을 하는 중 나라가 기울어짐을 보고 교회를 단독으로 개척·설립하고 장로가 된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를 청빙하고자 한 때는 그가 막 졸업한 때였다. 그는 당시 장로로서 전라노회의 서기였기에 교회일로 전라노회의 선교사들과 서문밖교회의 장로 및 집사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사람들은 그의 인품과 덕성이 뛰어나고 학문실력이 출중함을 잘 알게 되었고 특히 선교사들은 선비가문 출신인 그의 학덕에 매료되었으며 교회 제직들은 그의 강설에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그가 담임목사 후임으로 거론되었고 교회는 절차를 제대로 밟을 겨를도 없이 재령에서 모였던 임시노회에 청빙의 의사를 제출하였다. 또 노회 역시 이를 기각하지도 않고 넌지시 본인에게 전달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렇듯 김인전 목사의 청빙 절차에는 미소지을 수밖에 없는 법을 초월한 처사가 있었다. 서문밖교회는 자신들이 기대한 훌륭한 목회자를 맞게 되어 활기를 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