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서원고개’ 선교사 마을
전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온 때는 1893년이다. 그해 6월, 갓 들어온 미국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 레이놀즈(W. D. Reynolds)의 어학 선생 정해원이 전주에 내려와 전주천 ‘개울 건너’ 곤지산 자락 은송리(현 동완산동)에 초가집 한 채를 장만하고 전도를 시작했으며, 3개월 후에는 선교사 테이트(L. B. Tate)와 전킨(W. M. Junkin)이 방문하여 두 주간 머물다 올라갔다. 그리고 은송리 초가집에서 그해 가을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전라도 선교와 전주 서문교회의 출발이다. 그러나 이듬해 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 ‘척양멸왜’(斥洋滅倭)를 기치로 내건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하는 바람에 선교사와 교인들의 전주 출입이 봉쇄되었고 선교에도 위기가 닥쳤다.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된 1895년 2월에야 테이트와 레이놀즈가 전주에 들어왔는데 은송리 집회는 중단되고 교인들도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선교사들은 다시 시작하였다. 레이놀즈와 테이트 남매를 비롯하여 해리슨과 잉골드 등이 속속 합류하여 은송리 언덕에 선교사 사택을 짓고 거기서 병원(후의 예수병원)과 남·녀학교(후의 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장날이면 장터로 가서 ‘자전거 묘기’를 보이며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오래지 않아 김창국과 김성희, 김내윤 등 토착 교인들을 얻었다. 이처럼 선교가 어느 정도 활기를 띠게 된 1900년, 정부에서 은송리 일대를 ‘전주 이씨’ 시조 관련 성역으로 조성하면서 서쪽 다가산 자락 화산리(지금 중화산동)에 새 부지를 내주어 선교부를 그리로 옮겼다. 새로 옮겨 간 곳은 조선시대 화산서원과 희현당이 있던 곳이라 ‘서원고개’로 불리던 곳이었다.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 일대 14만 평의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예수병원을 옮겼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40년 세월 동안 적막했던 마을이 붉은 ‘양관’들이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 초 선교사들이 철수하기까지 화산동 남장로회 선교부는 전주뿐 아니라 전라도 지방의 복음 선교 및 개화 운동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 시대엔 이곳에 남·녀 성경학교(지금 한일장신대학)가 있어 호남 지역 ‘토착 전도인’들을 양성했다. 화산동 선교부는 해방 후 개발 시대를 거치면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변하였지만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예수병원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예수병원 건너편 언덕에 전주와 군산 지역에서 활동하다 별세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어 이곳에서 이루어진 복음 선교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서문교회 ‘한옥’ 종각과 희년 기념비
선교부를 은송리에서 화산리 ‘서원고개’로 옮기면서 예배당도 옮겼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기대만큼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다. 교인 수는 늘어났지만 가난한 부녀자들이 주류였고 개울 건너 ‘부중’(府中) 양반들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1903년 전주 서문 바로 안쪽(다가동 21번지)에 ‘책방’을 냈다. 공개적으로 ‘예수교 책’을 팔 수 없어 토착 교인을 내세워 포목점 간판을 걸고 가게 한구석에 성경과 전도책을 놓고 팔았다. ‘책’을 통해 선비들에게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결실을 맺어 2년 후부터 양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양반들은 ‘뒷골목’으로 교회에 왔지만 오래지 않아 당당하게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전주 주민들이 교회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교인 수도 50명에서 300명으로 늘어났다. 교인들은 ‘개울 건너’ 서문 밖 다가동에 미나리 밭 800평을 사서 60평 규모로 기와지붕 벽돌 예배당을 지었다. 이때부터 이곳을 ‘서문밖교회’ 혹은 ‘서문교회’라 불렸다.
일제 시대 전주 서문교회는 김필수, 김병농, 김인전, 배은희 등 민족의식이 강한 목사들이 담임하였다. 특히 1919년 3·1운동 당시 담임자 김인전 목사는 전주 지역 만세운동을 지휘하였을 뿐 아니라 만세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항일투쟁을 벌이다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배은희 목사가 담임했던 1930년대 서문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여 시내에 완산·중앙·동부 등 세 곳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1935년에는 호남에서 제일 큰 2층짜리 벽돌 예배당(230평)을 지었다. ‘조선의 성자’로 불리는 기전여학교 처녀 교사 방애인이 교회 옆에 고아원을 차리고 전주천에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 기른 것도 유명하다. 1933년 방애인이 별세하였을 때 기전여학교 학생과 교사, 서문교회 부인들이 소복을 입고 꽃상여를 메는 ‘여인장’(女人葬)으로 치러진 장례 행렬이 십리나 되었다 한다.
해방 후 꾸준히 성장한 서문교회는 1983년 방주형 벽돌 성전을 지으면서 옛날 예배당을 헐었지만 새 성전 1층에 역사 자료관을 마련, 빛바랜 교회 문서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다행히 성전 뜨락에는 국내 최고(最古) 종각이 남아 있다. 1908년 별세한 남장로회 선교 개척자 전킨을 기념하여 그 부인이 미국에서 만들어 보내온 종을 달려고 만든 것이다. 서양식으로 목재 종탑을 세우고 한국의 전통적인 팔작지붕을 씌움으로써 한옥 건물 안에 서양종을 매단 형태가 되었는데 동·서양 문화의 조화, 복음의 ‘토착화’를 아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종각 옆에 화강암으로 만든 ‘창립 50주년 기념비’가 있다. 조각 작품 같은 외형도 볼 만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측면의 비문 내용이다. 그 전문이다.
本敎會湖南之基督敎發祥地也上帝使米國南長老派來傳福音於此地五十年前明治二十六年癸巳年主後千八百九十三年六月完山下隱松里以數間屋爲會所初始傳道遭甲午動亂而止乙未更始丁酉五月始洗六人乙巳擇地建堂于現所戊申組織堂會壬子招聘牧師辛酉設幼稚園癸亥興兒童學校戊辰聖誕節營孤兒院乙亥建二階卽今此堂也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은송리에서 복음 전도를 시작한 것부터 2층 예배당을 건축하기까지 교회 역사를 담고 있는데 비문을 순한문으로 새긴 것이 특이하다. 비석을 세운 1943년 4월은 일제 말기로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광분하던 때라 한글을 사용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일본어로 비문을 새길 수는 없어 아예 한문으로 쓴 것이다. 복잡한 연호 표기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제는 서기 연호를 일절 쓰지 못하게 하였고 ‘명치’와 ‘대정’, ‘소화’ 같은 일본 연호를 강요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일본 연호 대신 간지(干支) 연호를 사용하였고 ‘서기’ 연호를 쓰고 싶을 때는 간지와 일본 연호를 함께 썼다. 그 결과 ‘1893年’이라고 하면 될 것을, ‘明治二十六年 癸巳年 主後千八百九十三年’ 하는 식으로 표기했다. 표현의 자유마저 빼앗긴 일제 말기,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전주 ‘선비’ 교인들의 지혜가 담긴 비석이다.
스스로 거지가 된 양반 교인
서문교회에는 이처럼 자존심을 지킨 ‘선비’ 교인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자존심을 스스로 포기한 ‘양반’ 교인들도 있었다. 전주 이씨 문정공파 후손 이보한(李普漢)이 대표적이다. 감찰 벼슬을 한 부친이 1905년 봄, 집에 강도(혹은 의병)가 들어 중상을 입었는데 전주 예수병원의 포사이드(W. H. Forsythe) 선교사가 와서 하룻밤 머물면서 고쳐 주었다. 그런데 강도(혹은 의병)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말을 타고 온 선교사를 일본 경찰로 알고 재차 그 집을 습격하였다. 포사이드는 집중 공격을 당하면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강도(혹은 의병)를 미소로 대했다. 이보한은 그런 선교사를 보고 ‘새 종교’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살아난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다친 선교사에게 미안한 마음에서 “우리 집안에서 누군가 교회에 나가 줘야겠는데 누가 나가겠는가?” 하자 그가 선뜻 나섰다.
그는 서원고개 예배당에 나간 직후부터 거리에 나가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였다. 그래서 ‘거두리’로 불렸다. ‘거두리’는 그가 믿으면서 얻은 ‘성명’(聖名)이다. 그만큼 전도에 열심이었다. 한번은 진사 벼슬을 한 집안 어른을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끈질기게 찾아갔다. 거두리의 집요한 전도에 지친 양반은 건성으로 “자네를 대접해서라도 다음주에 나감세”라고 하였다. 교회에 나갈 맘이 전혀 없던 양반은 주일 전에 50리 떨어진 고산 화암사로 들어가 숨었다. 그런데 주일 이른 아침 거두리는 화암사까지 찾아갔다. 핑곗거리를 찾던 양반은 밤새 눈이 내려 사방이 하얗게 된 것을 보고, “양반이 눈길을 헤치고 어찌 가겠나? 다음주엔 꼭 감세” 하였다. 그러자 거두리는 “정성을 봐서라도 눈을 쓸어놓은 데까지만 가시지요” 하였다. 양반은 ‘기껏해야 절 입구까지 쓸었겠지’ 하고 배웅하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는데 길은 십리나 이어졌고 길 끝엔 화산교회 예배당이 있었다. 진사 양반은 그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느니라”(고전 4:20)는 시골 교회 전도사 설교에 마음이 녹았다. 그가 바로 서문교회 4대 장로가 된 이돈수 장로다.
이거두리는 민족의식도 강했다. 전주천 다리 밑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신흥학교 학생들을 모아놓고 “Boys, be ambitious!”, “The barking dog is more useful than the sleeping lion” 등 영어 속담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고, 네 살 아래인 김인전 목사가 독립운동을 모의하러 외출할 때면 앞장 서 “물렀거라. 김 목사님 행차시다”며 길을 열었다. 3·1운동 때는 서울까지 올라가 만세를 부르고 체포되었는데, 유치장 안에서 아무데나 오줌을 누며 저항하는 바람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 풀려났다. 그는 그런 식으로 천안과 대전을 거쳐 전주까지 내려오면서 만세를 불렀다. 3·1운동 후에는 걸인과 기생들이 모은 독립운동 자금을 김인전 목사의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거두리는 믿으면서 양반의 허울을 벗어 버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다. 가을 추수 때가 되어 부친이 소작료를 받아 오라고 하자 소작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네는 가난하니까 내지 말게” 하는 식으로 탕감해 주었다가 집에서 쫓겨났다. 어쩌다 새 옷이 생기면 그날로 거지와 바꿔 입고 들어왔고 양반 친구 집을 찾아가 “자네 옷 많구먼” 하고는 옷을 가져다 거지에게 나눠 주었다. 변호사 친구를 찾아가 “하늘나라에 저금하는 셈 치게” 하며 돈을 뜯어다(?) 거지 잔치를 벌였고, 장날 늦도록 나무를 팔지 못한 나무꾼들을 데리고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강매하기도(?) 했다. ‘참봉’(參奉) 칭호를 받던 그였던지라 경찰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기꺼이 걸인들의 후견인이 된 것이다. 콧대 높았던 전주 양반들은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으면서 스스로 낮아지는 법을 배웠다.
전주 이씨 문중 묘소로 들어가기까지
이 거두리가 1931년 8월 별세하자 전라도 거지들이 몰려와 ‘걸인장’(乞人葬)으로 치렀는데 얼마나 조문객이 많았는지 상업은행을 창설한 전주 부자 박영철의 부친상 때보다 더하였다 한다. 그의 묘는 ‘문중 양반’들의 반대로 색장리에 있는 ‘전주 이씨’ 종중 묘지에 쓰지 못하고 죽림리 공동묘지에 썼다가 1982년 공동묘지가 없어질 때 이미 전주 여러 교회의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던 전주 이씨 ‘문중 교인’들의 주선으로 색장리 종중 묘지로 옮겨졌다. 50년 만의 ‘문중’ 귀환이었다. 그후로 남원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색장리에 있는 이거두리 묘소는 양반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거지 대장’이 되어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들의 친구가 되었던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닮으려는 교인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이덕주 교수는 한국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감리교신학대학에서 한국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눈물의 섬 강화 이야기」 「한국 토착 교회 형성사」 등이 있다.
전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온 때는 1893년이다. 그해 6월, 갓 들어온 미국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 레이놀즈(W. D. Reynolds)의 어학 선생 정해원이 전주에 내려와 전주천 ‘개울 건너’ 곤지산 자락 은송리(현 동완산동)에 초가집 한 채를 장만하고 전도를 시작했으며, 3개월 후에는 선교사 테이트(L. B. Tate)와 전킨(W. M. Junkin)이 방문하여 두 주간 머물다 올라갔다. 그리고 은송리 초가집에서 그해 가을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전라도 선교와 전주 서문교회의 출발이다. 그러나 이듬해 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 ‘척양멸왜’(斥洋滅倭)를 기치로 내건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하는 바람에 선교사와 교인들의 전주 출입이 봉쇄되었고 선교에도 위기가 닥쳤다.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된 1895년 2월에야 테이트와 레이놀즈가 전주에 들어왔는데 은송리 집회는 중단되고 교인들도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선교사들은 다시 시작하였다. 레이놀즈와 테이트 남매를 비롯하여 해리슨과 잉골드 등이 속속 합류하여 은송리 언덕에 선교사 사택을 짓고 거기서 병원(후의 예수병원)과 남·녀학교(후의 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장날이면 장터로 가서 ‘자전거 묘기’를 보이며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오래지 않아 김창국과 김성희, 김내윤 등 토착 교인들을 얻었다. 이처럼 선교가 어느 정도 활기를 띠게 된 1900년, 정부에서 은송리 일대를 ‘전주 이씨’ 시조 관련 성역으로 조성하면서 서쪽 다가산 자락 화산리(지금 중화산동)에 새 부지를 내주어 선교부를 그리로 옮겼다. 새로 옮겨 간 곳은 조선시대 화산서원과 희현당이 있던 곳이라 ‘서원고개’로 불리던 곳이었다.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 일대 14만 평의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예수병원을 옮겼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40년 세월 동안 적막했던 마을이 붉은 ‘양관’들이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 초 선교사들이 철수하기까지 화산동 남장로회 선교부는 전주뿐 아니라 전라도 지방의 복음 선교 및 개화 운동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 시대엔 이곳에 남·녀 성경학교(지금 한일장신대학)가 있어 호남 지역 ‘토착 전도인’들을 양성했다. 화산동 선교부는 해방 후 개발 시대를 거치면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변하였지만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예수병원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예수병원 건너편 언덕에 전주와 군산 지역에서 활동하다 별세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어 이곳에서 이루어진 복음 선교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서문교회 ‘한옥’ 종각과 희년 기념비
선교부를 은송리에서 화산리 ‘서원고개’로 옮기면서 예배당도 옮겼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기대만큼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다. 교인 수는 늘어났지만 가난한 부녀자들이 주류였고 개울 건너 ‘부중’(府中) 양반들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1903년 전주 서문 바로 안쪽(다가동 21번지)에 ‘책방’을 냈다. 공개적으로 ‘예수교 책’을 팔 수 없어 토착 교인을 내세워 포목점 간판을 걸고 가게 한구석에 성경과 전도책을 놓고 팔았다. ‘책’을 통해 선비들에게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결실을 맺어 2년 후부터 양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양반들은 ‘뒷골목’으로 교회에 왔지만 오래지 않아 당당하게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전주 주민들이 교회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교인 수도 50명에서 300명으로 늘어났다. 교인들은 ‘개울 건너’ 서문 밖 다가동에 미나리 밭 800평을 사서 60평 규모로 기와지붕 벽돌 예배당을 지었다. 이때부터 이곳을 ‘서문밖교회’ 혹은 ‘서문교회’라 불렸다.
일제 시대 전주 서문교회는 김필수, 김병농, 김인전, 배은희 등 민족의식이 강한 목사들이 담임하였다. 특히 1919년 3·1운동 당시 담임자 김인전 목사는 전주 지역 만세운동을 지휘하였을 뿐 아니라 만세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항일투쟁을 벌이다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배은희 목사가 담임했던 1930년대 서문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여 시내에 완산·중앙·동부 등 세 곳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1935년에는 호남에서 제일 큰 2층짜리 벽돌 예배당(230평)을 지었다. ‘조선의 성자’로 불리는 기전여학교 처녀 교사 방애인이 교회 옆에 고아원을 차리고 전주천에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 기른 것도 유명하다. 1933년 방애인이 별세하였을 때 기전여학교 학생과 교사, 서문교회 부인들이 소복을 입고 꽃상여를 메는 ‘여인장’(女人葬)으로 치러진 장례 행렬이 십리나 되었다 한다.
해방 후 꾸준히 성장한 서문교회는 1983년 방주형 벽돌 성전을 지으면서 옛날 예배당을 헐었지만 새 성전 1층에 역사 자료관을 마련, 빛바랜 교회 문서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다행히 성전 뜨락에는 국내 최고(最古) 종각이 남아 있다. 1908년 별세한 남장로회 선교 개척자 전킨을 기념하여 그 부인이 미국에서 만들어 보내온 종을 달려고 만든 것이다. 서양식으로 목재 종탑을 세우고 한국의 전통적인 팔작지붕을 씌움으로써 한옥 건물 안에 서양종을 매단 형태가 되었는데 동·서양 문화의 조화, 복음의 ‘토착화’를 아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종각 옆에 화강암으로 만든 ‘창립 50주년 기념비’가 있다. 조각 작품 같은 외형도 볼 만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측면의 비문 내용이다. 그 전문이다.
本敎會湖南之基督敎發祥地也上帝使米國南長老派來傳福音於此地五十年前明治二十六年癸巳年主後千八百九十三年六月完山下隱松里以數間屋爲會所初始傳道遭甲午動亂而止乙未更始丁酉五月始洗六人乙巳擇地建堂于現所戊申組織堂會壬子招聘牧師辛酉設幼稚園癸亥興兒童學校戊辰聖誕節營孤兒院乙亥建二階卽今此堂也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은송리에서 복음 전도를 시작한 것부터 2층 예배당을 건축하기까지 교회 역사를 담고 있는데 비문을 순한문으로 새긴 것이 특이하다. 비석을 세운 1943년 4월은 일제 말기로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광분하던 때라 한글을 사용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일본어로 비문을 새길 수는 없어 아예 한문으로 쓴 것이다. 복잡한 연호 표기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제는 서기 연호를 일절 쓰지 못하게 하였고 ‘명치’와 ‘대정’, ‘소화’ 같은 일본 연호를 강요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일본 연호 대신 간지(干支) 연호를 사용하였고 ‘서기’ 연호를 쓰고 싶을 때는 간지와 일본 연호를 함께 썼다. 그 결과 ‘1893年’이라고 하면 될 것을, ‘明治二十六年 癸巳年 主後千八百九十三年’ 하는 식으로 표기했다. 표현의 자유마저 빼앗긴 일제 말기,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전주 ‘선비’ 교인들의 지혜가 담긴 비석이다.
스스로 거지가 된 양반 교인
서문교회에는 이처럼 자존심을 지킨 ‘선비’ 교인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자존심을 스스로 포기한 ‘양반’ 교인들도 있었다. 전주 이씨 문정공파 후손 이보한(李普漢)이 대표적이다. 감찰 벼슬을 한 부친이 1905년 봄, 집에 강도(혹은 의병)가 들어 중상을 입었는데 전주 예수병원의 포사이드(W. H. Forsythe) 선교사가 와서 하룻밤 머물면서 고쳐 주었다. 그런데 강도(혹은 의병)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말을 타고 온 선교사를 일본 경찰로 알고 재차 그 집을 습격하였다. 포사이드는 집중 공격을 당하면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강도(혹은 의병)를 미소로 대했다. 이보한은 그런 선교사를 보고 ‘새 종교’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살아난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다친 선교사에게 미안한 마음에서 “우리 집안에서 누군가 교회에 나가 줘야겠는데 누가 나가겠는가?” 하자 그가 선뜻 나섰다.
그는 서원고개 예배당에 나간 직후부터 거리에 나가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였다. 그래서 ‘거두리’로 불렸다. ‘거두리’는 그가 믿으면서 얻은 ‘성명’(聖名)이다. 그만큼 전도에 열심이었다. 한번은 진사 벼슬을 한 집안 어른을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끈질기게 찾아갔다. 거두리의 집요한 전도에 지친 양반은 건성으로 “자네를 대접해서라도 다음주에 나감세”라고 하였다. 교회에 나갈 맘이 전혀 없던 양반은 주일 전에 50리 떨어진 고산 화암사로 들어가 숨었다. 그런데 주일 이른 아침 거두리는 화암사까지 찾아갔다. 핑곗거리를 찾던 양반은 밤새 눈이 내려 사방이 하얗게 된 것을 보고, “양반이 눈길을 헤치고 어찌 가겠나? 다음주엔 꼭 감세” 하였다. 그러자 거두리는 “정성을 봐서라도 눈을 쓸어놓은 데까지만 가시지요” 하였다. 양반은 ‘기껏해야 절 입구까지 쓸었겠지’ 하고 배웅하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는데 길은 십리나 이어졌고 길 끝엔 화산교회 예배당이 있었다. 진사 양반은 그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느니라”(고전 4:20)는 시골 교회 전도사 설교에 마음이 녹았다. 그가 바로 서문교회 4대 장로가 된 이돈수 장로다.
이거두리는 민족의식도 강했다. 전주천 다리 밑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신흥학교 학생들을 모아놓고 “Boys, be ambitious!”, “The barking dog is more useful than the sleeping lion” 등 영어 속담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고, 네 살 아래인 김인전 목사가 독립운동을 모의하러 외출할 때면 앞장 서 “물렀거라. 김 목사님 행차시다”며 길을 열었다. 3·1운동 때는 서울까지 올라가 만세를 부르고 체포되었는데, 유치장 안에서 아무데나 오줌을 누며 저항하는 바람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 풀려났다. 그는 그런 식으로 천안과 대전을 거쳐 전주까지 내려오면서 만세를 불렀다. 3·1운동 후에는 걸인과 기생들이 모은 독립운동 자금을 김인전 목사의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거두리는 믿으면서 양반의 허울을 벗어 버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다. 가을 추수 때가 되어 부친이 소작료를 받아 오라고 하자 소작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네는 가난하니까 내지 말게” 하는 식으로 탕감해 주었다가 집에서 쫓겨났다. 어쩌다 새 옷이 생기면 그날로 거지와 바꿔 입고 들어왔고 양반 친구 집을 찾아가 “자네 옷 많구먼” 하고는 옷을 가져다 거지에게 나눠 주었다. 변호사 친구를 찾아가 “하늘나라에 저금하는 셈 치게” 하며 돈을 뜯어다(?) 거지 잔치를 벌였고, 장날 늦도록 나무를 팔지 못한 나무꾼들을 데리고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강매하기도(?) 했다. ‘참봉’(參奉) 칭호를 받던 그였던지라 경찰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기꺼이 걸인들의 후견인이 된 것이다. 콧대 높았던 전주 양반들은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으면서 스스로 낮아지는 법을 배웠다.
전주 이씨 문중 묘소로 들어가기까지
이 거두리가 1931년 8월 별세하자 전라도 거지들이 몰려와 ‘걸인장’(乞人葬)으로 치렀는데 얼마나 조문객이 많았는지 상업은행을 창설한 전주 부자 박영철의 부친상 때보다 더하였다 한다. 그의 묘는 ‘문중 양반’들의 반대로 색장리에 있는 ‘전주 이씨’ 종중 묘지에 쓰지 못하고 죽림리 공동묘지에 썼다가 1982년 공동묘지가 없어질 때 이미 전주 여러 교회의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던 전주 이씨 ‘문중 교인’들의 주선으로 색장리 종중 묘지로 옮겨졌다. 50년 만의 ‘문중’ 귀환이었다. 그후로 남원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색장리에 있는 이거두리 묘소는 양반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거지 대장’이 되어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들의 친구가 되었던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닮으려는 교인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이덕주 교수는 한국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감리교신학대학에서 한국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눈물의 섬 강화 이야기」 「한국 토착 교회 형성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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