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3. 1운동과 학생
일제의 무단 통치(武斷統治)는 한국인의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반일세력은
물론 그와 흡사한 요인까지도 철저하고도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역
경에도 불구하고 민족사회의 신진층으로 대두. 부상한 것이 학생층이었다.
당시의 학생층은 신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민족의 불행을 더욱 심각하게 자각
하여 열화같이 분노하면서 항일 광복의 길에 가치의 기준을 설정하려 하였
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대한 신
뢰가 높아지고 민족독립의 여지가 한국에도 강하게 대두됨에 따라, 독립과
자주 자존의 의지를 행동화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
생들은 2. 8독립선언운동을 일으키고 또 3. 1독립운동에서도 조직적이고도
강력한 집단세력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3. 1독립운동은 성인과 학생들의 주도체와의 연합세력에 의해서 진행되었
다. 박희도는 김원벽, 강기덕, 김형기, 한위건, 송종의, 이공후, 주익, 윤
상정 등과 만나서 연합전선을 펴기로 대체적인 합의를 보았다. 또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각 학교 대표에게 전달하고 3·1독립운동에 동참하는 방법까
지도 자세하게 전하였기에 3. 1운동은 국민모두가 혼연일체로 한 덩어리가
되어 진행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인쇄 책임자인 이종일은 오세창의 지시를 받아가며 안상덕,
김상열, 인종익, 이경섭, 김창준, 한용운, 김성국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
하였다.
인종익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안상덕은 강원도와 함경도를, 김상열은 평
안도, 김경섭은 황해도, 그리고 김창준은 평양시와 선천, 이삽성은 서울과
경상도, 한용운은 주로 경상도의 사찰을 담당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던
것이다.
인종익은 2,000매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2월 2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3
월 1일 새벽에 전주에 도착했다. 이 독립선언서는 다시 이리, 남원, 임실
방면으로 배포되었다.
인종익으로부터 1,700매의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은 전주 천도교구에서는 3
월 1일 300매를 인편으로 이리 천도교구로 보냈다. 이리교구장 이유종은 이
중달로 하여금 호남선 철도의 각 정거장에 살포케 하였는데, 이 독립선언서
는 불행하게도 대부분 일인 경찰들에게 회수되어 버린다.
전주 천도교구에서는 나머지 1,500매의 독립선언서를 김신극에게 맡겨 요
소요소에 배포토록 하였다. 김신극은 인편으로 임실, 남원의 천도교구에 보
내어 함열, 김제, 금마, 용안, 여산 등지로 나누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천안군 양대리의 초등하교 교원
으로 있었던 임영신은 함태영의 지시로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천신만고 끝에
전주에 도착하여 서문 밖 교회 이돈수 장로를 찾아갔다. 이돈수 장로는 서
문 밖 교회 김인전 목사와 청년의사(醫師)신일용 등과 만나서 임영신이 가
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기전 80년사, 1982.10.26 발행.
p184~185)
군산지방으로도 기독교의 조직을 통해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이렇
게 해서 전북지방 곳곳에 비밀리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자 비로소 독립만세
운동의 시위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서와 같은 긴밀한 협
조와 철통같은 조직이 이뤄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각 종교단체별로, 혹은 학
교별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진행 될 수 밖에 없었다.
전주 천도교구의 김봉득과 김신극은 바로 박태련(신간회 지부장. 일본 명
치대학 재학생)과 만나 전주시내의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힘을 합하여 독립
운동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박태련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였다.
박태련은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어 신흥학교의 유병민, 문병무와 기전학교
의 함의선, 김지순 등 교사들을 초치하여 시민, 학생과 교인 등 되도록 많
은 군중들을 규합하여 동참케 하자는데 의견이 일치하였으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의 제작을 협의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만세 운동을 위한 시위를 결행
할 계획을 세워 서두르고 있던 터에 3월 5일 예정보다 빨리 군산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1919년 3월 4일과 5일에 군산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결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전주에서는 독립만세 시위 결행의 날짜를 결정하는 일과 그 준비
를 화급히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서울의 독립만세 시우
에 관한 정보는 시시각각으로 전해오고 있는 터였다.
전주의 박태련, 김신극 등 지도자들은 천도교, 기독교, 신흥학교 학생 등
각계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3월 13일 전주 장날을 독립만세 시위 결행
일로 정했다. 그리고 만세시위 때 필요한 태극기는 간납대의 대밭 속의 박
태련의 집에서 만들고 기독교인과 학생들에게 나눠줄 태극기는 신흥학교의
지하실에서 목판 인쇄하기로 하였다.
1.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 준비
전주시내의 기독교계와 천도교계 지도자, 그리고 학생, 교사들은 연합하
여 독립만세 시위를 펴기로 합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의 준비까지 완료
하여, 지도자들은 시위 군중들과 시민에게 나눠 줄 격문(檄文)도 마련하여
놓았다. 김신극이 박태련과 함께 작성한 것이다.
아 삼천만 동포(我 三千萬 同胞)에 경고(警告)함
희(噫)라 오인동포(吾人同胞)여, 안(眼)을 거(擧)하여 세계의 대세를 보
라. 평화의 신(神)과 자생(自生)의 신(神)은 이제서야 장대한 수(手)를 들
어 제국가(諸國家)의 비인도적인 침략주의를 타파하고 흥도강국(興道强國)
의 압력하(壓力下)에서 신음(呻吟)하는 각민족의 각반(脚絆)을 풀어 세계
수평선상에 평화의 낙원을 축조하며 자유의 무대를 건설하려한다.
희호(噫呼)라. 오동포(吾同胞)여, 호매(豪邁)한 력(力)으로서 속박(束縛)
한 줄을 끊어내리고 최대한 결심과 성심으로서 독립기를 세우고 가자.
오호라, 오동포여 기회는 두 번 다시 아니 온다. 이 시(時)를 당(當)하여
맹연(猛然)히 기(起)하여 멸망의 구렁에서 자유를 구(句)하여 약진하자. 희
(噫)라. 오동포여 맹연히 분기(奮起)하자. 각성하자. 난폭의 음모는 절대적
으로 피할 사(事)
3. 1독립만세운동 자체가 평화적 비폭력 주권 회복 운동이었기에 독립선
서에 표방한 비폭력주의를 그대로 본 따서 격문(일명 告警書)말미에 난폭을
피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천도교측 지도자들의 종교운동의 기본정신이
었다.
3월 13일의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준비의 일단을 <기전80년사>에
서 더듬어 본다.
...영신은 치밀한 계획 아래 활동을 개시하였다. 김인전 목사님과 비밀
리에 만나서 서로의 뜻을 통했고 김목사님을 통해서 서문 밖 교회 교인이며
신흥학교 출신인 최종삼, 그리고 김목사의 동생 김가전씨, 그리고 역시 신
흥학교 출신으로 당시 서울 경동학교에 다니던 김종곤 등과 자주 만나서 자
세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모임은 주로 청년의사 신일용씨 집에서 가졌다.
기전의 한문선생 김진상씨도 이에 적극 호흥하고 나섰다. 물론 영신과 함께
비밀결사를 했던 기전학생들도 뜻을 같이 하였다. 이돈수 장로님 댁에서 기
전의 딸들이 20여명씩 모여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고 영신은 대외적인
교섭을 담당해서 신흥학생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중략...
신간회의 총무 박태련도 풍남동 대밭에서 그의 친척 박태훈, 박태화, 박
태호 등과 비밀리에 태극기를 등사해서 기독교측과 연락을 긴밀히 했었다.
…성경학교가 끝나자 선교사 마로덕목사를 통해 미리 김종곤집에서 만들
어 둔 태극기와 인쇄물을 나눠주고 장날을 기해서 만세를 부르라고 지령했
었다.
...중략...
그러나 이상스런 낌새를 눈치챈 당국은 만세운동의 가장 핵심이 될 신흥.
기전학교를 미리서 방학 조치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기전의 학생 간부들
은 계속 학교에 나와서 소식을 듣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때의 졸업반
김신회, 최금주, 송순이는 후배들을 포섭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도한 학생
들 집을 찾아다니면서 방학일지라도 시골집으로 가지 말 것을 종용했다. 이
때 기전이 선생으로는 3회 졸업생 함의선, 김한순 선생도 같이 참가하여서
학생들이 사기는 바야흐로 충천했다.…
2.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
가. 3월 13일의 독립만세 시위
3월 13일은 전주 남문장날이었다.( 5일장) 천도교 조직원들과 신흥학교
기독교 학생들은 남문시장으로 들어가는 완산동( 용머리 고개로부터 전주로
들어가는 관문격임)과 서학동( 구이방면에서 남문시장으로 들어가는 관문격
임)전주교 남쪽편에서 남문시장 쪽을 향해서 모여드는 장꾼과 시위 군중들
에게 은밀하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낮이 되
면 독립선언서를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 를 외치면서 일
제히 독립만세 시위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1919년 3월 13일 전라북도 장관이 상급관청에 보낸 일일보고 를 여기에
소개한다.
전주에서는 수일 전부터 13일 정오를 기해서 독립운동을 거행한다는 풍
설이 있었으므로 경계 중 (1). 13일 오후 12시 20분께 야소 학교 남녀학생
(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말함) 및 천도교와 일반인 등 약 150명이
목판인쇄지제, 미농판형(木版印刷紙製, 美濃判型)태극기를 들고 남문 밖 시
장부근으로부터 제2보통학교( 현 완산초등학교의 옛 명칭으로 당시의 위치
는 현 전주교육대학교 부속 전주초등학교가 있는 위치)운동장 근처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중에 들어와 등사판으로 찍을 고경서(告警書-격문을 말함)
를 살포하면서 구보로 행진하여 남문으로부터 우편국(현 전주 중앙우체국)
앞까지 행렬을 하였으나 경무관헌(警務官憲)의 저지를 당했다.
주모자로 인정되는 자 10여 명을 체포하고 즉시 유고(諭告)를 발하여 이
들 요소에 계시하고 민심을 진정시키기에 노력하였으나 오후 3시경 다시 남
문시장에 약 100명이 집단 하여 남문으로부터 본정(本町 -※현 다가동. ※
풍남문-매곡교 사거리-전주전매서 사거리-관광호텔로 빠져나가는 거리)으로
향하는 도중에 또다시 경무관의 저지로 곧 해산하였다. 이 때 경무관헌은
주모자로 인정되는 자 10여명을 구금하고 취조(조사, 심문)중이다. 당일은
장날이었으므로 특히 시중에 내왕하는 자가 다수였으며 상점은 만일의 위험
을 염려하여 폐점 휴업하고 ( 철포)경찰서는 소방조 정식 소방경찰관이
아닌 자원 소방봉사대에 해당함)를 소집하여 경계 중에 있는데 (2) 저녁 9
시경 약 30여명으로 조직된 단체 2조 중 하나는 도청 앞에 와서 만세를 부
르고 북쪽으로 갔으며 (3) 다른 일단은 남문과 남문 밖 시장부근을 근거로
하여 수십명씩 집합하고 있었으나 (4) 모두 경무관헌의 손에 의하여 해산
되었으며 (5) 12시가 지나서 모두 조용해졌다. 오늘 경무관청에 검거된 자
는 74명이다.(이하 생략)
앞에서 인용한 보고서 중 (1)의 시위대열에 참가한 150명이라 함은 축소
보고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남문에서 현 전주 중앙 우체국까지의 길이는
약 550m나 되며 시위가 구보로 진행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젊은 학생층(꼭
학생만은 아니지만)이 주동이 되었던 것이며, 당시 전주고등보통학교 입학
시험을 친 방기준씨의 증언에 의하면 구두시험(면접고사)자리에서 시험관이
응시생에게 3월 13일에 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방기준
씨는 전주고보구령 제1회 졸업생으로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그렇다면 보통
학교 학생도 독립만세시위 대열에 동참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연령상
으로는 반드시 12.3세 정도는 아니며 참가인원수도 관변측 보고서에는 대체
로 숫자를 축소 보고하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2)와 (3)에서는 모순점
이 발견된다. (4)는 무력을 동원한 강제 해산으로서 시위대원들을 저지하면
그대로 순순히 물러 서버리는 나약한 시위대가 아니니 시간이 지나 스스로
해산해 귀가하는 사람들은 골목길에 숨어 있는 관헌들이 뒤에서 물감을 뿌
려 삼삼오오 또는 하나 둘씩 귀가하는 길목에서 소문나지 않게 감쪽같이 붙
잡아 가는 비겁한 색출 체포방법까지 동원했었던 것이다.
보고서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시위군중이 수효의 축소 요인은 한국인의
독립만세 시위가 숫적으로 미미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술책이며 한편
으로는 시위 저지에 동원된 일은 경무관헌의 막강한 힘으로 쉽게 저지할 수
있었다는 능력의 과시와 독립만세 시위를 평화적으로 저지한 것처럼 기술했
지만 적어도 전라북도청 소재지인 전주에서 그리고 많은 군중을 동원하고
참여시키려는 시위 계획자들이 노리는 장날을 D-데이로 정했다는 점과 천도
교도, 기독교인, 학생, 시민 등 사전조직에 의한 시위대의 동원, 또 순수한
장꾼일지라도 현장의 분위기와 애국 열기로 참여했던 수효가 겨우 백여명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양보하여 생각하여도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
라 할 수밖에 없다.
<기전 80년사>에서 당일의 독립만세 시위의 상황을 더듬어 본다.
...기전의 벗들은 비운에 돌아가신 고종황제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는 트레머리한 뒤 흰 띠를 질끈 동여매서 풀리지
않게 했고, 짚신을 끈으로 단단히 맨 뒤 이미 약속한 대로 남문의 인경소리
울리기를 남문 밖 최요한나 집(현 전주시 전동 295번지) 안방에서 초조히
기다렸다. 최요한나의 아버지는 서문교회( 원 서문밖교회)에 갈려나간 남문
교회의 초대장로이신 최주현씨로, 이 곳 남문에서 15m 떨어진 집에서 당시
기름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졸업만 김신희(3학년)의 어머니와 다른 학생들의 어머니는 자그마한 시장
바구니를 들고 남문밖 길가를 줄곧 왕래하면서 꽃받정( 꽃받정이. 현 평화
동. 동경 127도 08 , 북위 35도 47 )에서 몰려오기로 한 신간회측과 신흥학
교 지하실에서 만든 태극기, 독립선언서를 채소인 양 가마니 포대에 넣어
이미 지금의 서학동 파출소 자리에 가 있던 신흥학생과 기독교측의 남자들
이 남문 밖으로 나오면 우리 기전이 합세하기로 작정된 대로 언제 오는지
망을 봐 주셨다. 자신들의 어린 딸들이. 그것도 남학생이 아닌 연약한 여학
생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만세를 부르려고 할 때 여느 부모처럼
지금 가면 죽는 길이 될 테니 나가지 말라고 막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
금 가면 어찌 될지 모른다 하시면서 성경책과 돈을 가슴 깊숙히 넣어 주시
고 자신들이 앞장서서 줄곧 왕래하면서 연락해 주시는 기전의 그 어머니들
이요, 그 딸들이었다. 과연 대망의 인경이 울린 뒤 얼마 있으려니 어머니들
이 급히 뛰어 오시며 온다! 온다! 하고 알려 주신다.
마지막 손을 붙잡고 죽기를 맹세한 기전의 결사대원들은 자신들이 밤잠을
자지 않고 만들었던 태극기를 한아름 안고 쓰개치마를 둘러 쓴 뒤 즉각 남
문밖에 이르러 노도처럼 밀려오는 남자들의 만세 시위대와 합세하였다.
때마침 남문 주위에는 전주 장날이라서 수 많은 장꾼들이 몰려 혼잡을 이
루고 있었다. 거리는 삽시간에 만세군중이 쇄도하면서 하이얀( 하얀, 흰)
치마 저고리에 머리에는 흰 띠를 질끈 동여맨 기전의 처녀들이 아무런 두려
움도 없이 나누어주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든 장꾼들은 너나 없이
따라서 대한독립만세! . 대한독립만세! . 대한독립만세! .를 목이 터지
게 외쳤다.
군중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남자들은 재빨리 기전의 결사대를 자기들 가
운데로 감싸주었다. ...(중략)... 감격의 눈물이 뒤범벅이 된 채 시위군중
은 우편국 앞에 가서 만세를 부르고 다시 경찰서 앞에 가서 힘껏 만세! 를
외쳤다. 처음 왜경은 당황한 나머지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도합 두시간
동안 만세를 불렀다. 그때야 비로소 정신이 든 왜경들은 공포를 쏘고 말을
탄 채 총대를 휘둘러 무자비하게 군중을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앞장을
서서 달리던 임영신이 경찰에게 맞아 기절했다. 그러나 여학생들은 굽히지
않고 계속 만세를 부르다가 기어이 기전의 결사대 10명이 경찰에게 붙잡혀
가게 되었다. 이때의 10명은 임영신, 김공순, 김신희, 송순이, 최금주, 최
애경, 최요한나, 정복수, 함연순자매 등이었다.
...이날 오후에도 500여 명이 오목대에 모여서 본정 우체국( 현 다가동
우체국)으로 몰려가 경찰은 일본도를 휘둘렀고 소방대원도 소방차(손수레)
를 이끌고 아서 갈쿠리로 마구 찍어댔으며 빨간 물감을 군중들 옷에 마구
뿌리고 일단 해산한 사람들을 물감 묻은 사람만 요소 요소에서 잡으니 무려
200여명이 검거되었다. 그 날 밤 9시경 기전의 김순실, 김나현, 함의선, 강
정순, 김신애 등이 주동이 된 230명의 시위 결사대가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구속된 애국동포를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또다시 검거되었다. 이때
붙잡힌 기전학생 총수는 3~40여 명이 되었다.
나. 3월 14일의 독립만세 시위
3월 14일의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는 전날 참여하지 못했던 기전여학교 학
생들이 전폭적으로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였다. 이 날도 박태련과 신흥학교
교사인 유병민과 문병무 등이 학생들을 인솔하여 아침 일찍부터 완산동 용
머리고개에 집결하였다. 이 길은 정읍, 김제방면, 쑥고개, 난전, 애통이,
이서, 세내 쪽에서 전주 시내로 들어오는 큰 목에 해당된다. 전날의 시위는
서학동에서 전주교를 지나 남문에서 중앙동 우체국으로 진출하는 경로였는
데, 14일에는 김제가도에서 다가동으로 향하는 경로를 주로 하는 시위였다.
일제 관헌들의 일일보고서에 14일 아침부터 시중에 내왕이 다(※多)함으로
경찰관헌도 경계를 했던 바 오후 3시경 완선정 김제가도에 300명 1단이 집
합하여 본정 2정목( 본정 2정목- 다가동)부근까지 시위하였으나 경비대의
저지로 곧 해산하였다...
위의 단체는 야소학교(주로 기전) 및 기타의 학생과 야소교도, 천주교도
가 가담한 것인데, 그 중 16명의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야중(夜中)에도 각
처에서 소집단을 하고 있었으나 대사에 이르지 않고 ... (이하 생략)
이상 전라북도장관이 일제 식민통치의 권부인 조선총독부에 보낸 일일보
고의 내용이다. 3월 14일의 전주에서의 독립만세 시위 역시 밤늦게까지 시
내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단 300명
은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숫자가 분명하다. 형편에 따라 숫자는 불었다 줄
었다 하는 것이 상식이다. 논공행상이 가해질 경우 포상대상일 경우에는 숫
자가 불어가고 문책, 처벌의 대상일 경우에는 극히 축소화하는 것이 상례이
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지 다른 지방에 비해서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는
중앙에서의 시위와 마찬가지로 온건한 편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당초의
지침과 사상이 비폭력, 평화적 시위 를 강조하였고 이에 충실하였기 때문
에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14일의 독립만세 시위에서 기전여학교
생을 포함하여 90명이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3·
1운동 관계 자료 집 인용)
3월 13, 14일 양일간의 전주 시위에서는 살상의 비극은 없었으나 천도교
인, 기독교인, 남녀 학생, 시민들을 통틀어서 164명이 검거되었으며, 박태
종, 김신극, 유병민, 함의선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전원 일제의 쇠사슬에
묶이게 되었다.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 :朴殷植 저)>의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
(원문-漢文)를 다음에 인용한다.
전주의 여학생 임영신, 정복수, 김공순, 최애경, 김인섭, 최요한나 강점
순, 최금주, 김신희 등 14인이 독립운동을 하고 갇혔는데 여학생들은 필사
의 결심으로 음식을 단식한 지 4일이 되었다.
일(日)검사는 위압으로 심문하였으나 여학생들은 화평한 기상과 담대한
언사로 대답하되 우리가 어찌 너희들의 판결에 복종하랴? 너희들은 우리
강토를 강탈하고 우리 부모를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삼천리 주인이 되
려는 우리를 비법이라 하니 이는 불법한 판결 이라 하였더니 日 검사가 대
노하여 칼을 빼어 한 학생의 왼쪽 귀를 째며 여러 학생의 의복을 다 벗겨
나체로 세워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학생을 조롱했다.
이때 임영신은 日 검사의 따귀를 때리며 섬 오랑캐의 관습을 감히 예의
인에게 행하느냐? 하였더니 日 검사는 또 묻되 너희 조선에는 군함과 대포
와 병정이 없는데 어떻게 완전 독립을 하겠느냐? 학생들 대답은 금후의
시대는 군함, 병정, 대포가 사태가가 날텐데 네가 그런 조건으로 질문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日 검사는 말하되 누가 너희를 시켜 이런 일을 하
였느냐? 학생의 대답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국이 의(義)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 만세를 일제히 호창한 것이거늘 시켰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너희는
진실로 세계적 정세에 어두운 섬사람이다.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는 3월 13, 14일 양일간에 걸친 시위 운동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 이후에도 집회 횟수 21회, 집회에 참여한
인원수 50,000명, 투옥자 수는 556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시위 지도자들이 체포당한 후에도 시민, 학생들이 소규모 집단
으로 시도 때도 없이 부단히 독립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3월 13
일부터 5월 말까지 75일간에 걸쳐서 전주시내에서 모두 21회의 독립만세 시
위가 있었고 여기 참여한 시위꾼의 수효는 50,000명에 이르렀으며 15명의
부상자와 434명의 애국인사가 체포. 구금되었다.
일제의 무단 통치(武斷統治)는 한국인의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반일세력은
물론 그와 흡사한 요인까지도 철저하고도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역
경에도 불구하고 민족사회의 신진층으로 대두. 부상한 것이 학생층이었다.
당시의 학생층은 신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민족의 불행을 더욱 심각하게 자각
하여 열화같이 분노하면서 항일 광복의 길에 가치의 기준을 설정하려 하였
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대한 신
뢰가 높아지고 민족독립의 여지가 한국에도 강하게 대두됨에 따라, 독립과
자주 자존의 의지를 행동화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
생들은 2. 8독립선언운동을 일으키고 또 3. 1독립운동에서도 조직적이고도
강력한 집단세력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3. 1독립운동은 성인과 학생들의 주도체와의 연합세력에 의해서 진행되었
다. 박희도는 김원벽, 강기덕, 김형기, 한위건, 송종의, 이공후, 주익, 윤
상정 등과 만나서 연합전선을 펴기로 대체적인 합의를 보았다. 또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각 학교 대표에게 전달하고 3·1독립운동에 동참하는 방법까
지도 자세하게 전하였기에 3. 1운동은 국민모두가 혼연일체로 한 덩어리가
되어 진행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인쇄 책임자인 이종일은 오세창의 지시를 받아가며 안상덕,
김상열, 인종익, 이경섭, 김창준, 한용운, 김성국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
하였다.
인종익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안상덕은 강원도와 함경도를, 김상열은 평
안도, 김경섭은 황해도, 그리고 김창준은 평양시와 선천, 이삽성은 서울과
경상도, 한용운은 주로 경상도의 사찰을 담당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던
것이다.
인종익은 2,000매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2월 2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3
월 1일 새벽에 전주에 도착했다. 이 독립선언서는 다시 이리, 남원, 임실
방면으로 배포되었다.
인종익으로부터 1,700매의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은 전주 천도교구에서는 3
월 1일 300매를 인편으로 이리 천도교구로 보냈다. 이리교구장 이유종은 이
중달로 하여금 호남선 철도의 각 정거장에 살포케 하였는데, 이 독립선언서
는 불행하게도 대부분 일인 경찰들에게 회수되어 버린다.
전주 천도교구에서는 나머지 1,500매의 독립선언서를 김신극에게 맡겨 요
소요소에 배포토록 하였다. 김신극은 인편으로 임실, 남원의 천도교구에 보
내어 함열, 김제, 금마, 용안, 여산 등지로 나누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천안군 양대리의 초등하교 교원
으로 있었던 임영신은 함태영의 지시로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천신만고 끝에
전주에 도착하여 서문 밖 교회 이돈수 장로를 찾아갔다. 이돈수 장로는 서
문 밖 교회 김인전 목사와 청년의사(醫師)신일용 등과 만나서 임영신이 가
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기전 80년사, 1982.10.26 발행.
p184~185)
군산지방으로도 기독교의 조직을 통해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이렇
게 해서 전북지방 곳곳에 비밀리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자 비로소 독립만세
운동의 시위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서와 같은 긴밀한 협
조와 철통같은 조직이 이뤄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각 종교단체별로, 혹은 학
교별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진행 될 수 밖에 없었다.
전주 천도교구의 김봉득과 김신극은 바로 박태련(신간회 지부장. 일본 명
치대학 재학생)과 만나 전주시내의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힘을 합하여 독립
운동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박태련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였다.
박태련은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어 신흥학교의 유병민, 문병무와 기전학교
의 함의선, 김지순 등 교사들을 초치하여 시민, 학생과 교인 등 되도록 많
은 군중들을 규합하여 동참케 하자는데 의견이 일치하였으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의 제작을 협의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만세 운동을 위한 시위를 결행
할 계획을 세워 서두르고 있던 터에 3월 5일 예정보다 빨리 군산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1919년 3월 4일과 5일에 군산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결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전주에서는 독립만세 시위 결행의 날짜를 결정하는 일과 그 준비
를 화급히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서울의 독립만세 시우
에 관한 정보는 시시각각으로 전해오고 있는 터였다.
전주의 박태련, 김신극 등 지도자들은 천도교, 기독교, 신흥학교 학생 등
각계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3월 13일 전주 장날을 독립만세 시위 결행
일로 정했다. 그리고 만세시위 때 필요한 태극기는 간납대의 대밭 속의 박
태련의 집에서 만들고 기독교인과 학생들에게 나눠줄 태극기는 신흥학교의
지하실에서 목판 인쇄하기로 하였다.
1.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 준비
전주시내의 기독교계와 천도교계 지도자, 그리고 학생, 교사들은 연합하
여 독립만세 시위를 펴기로 합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의 준비까지 완료
하여, 지도자들은 시위 군중들과 시민에게 나눠 줄 격문(檄文)도 마련하여
놓았다. 김신극이 박태련과 함께 작성한 것이다.
아 삼천만 동포(我 三千萬 同胞)에 경고(警告)함
희(噫)라 오인동포(吾人同胞)여, 안(眼)을 거(擧)하여 세계의 대세를 보
라. 평화의 신(神)과 자생(自生)의 신(神)은 이제서야 장대한 수(手)를 들
어 제국가(諸國家)의 비인도적인 침략주의를 타파하고 흥도강국(興道强國)
의 압력하(壓力下)에서 신음(呻吟)하는 각민족의 각반(脚絆)을 풀어 세계
수평선상에 평화의 낙원을 축조하며 자유의 무대를 건설하려한다.
희호(噫呼)라. 오동포(吾同胞)여, 호매(豪邁)한 력(力)으로서 속박(束縛)
한 줄을 끊어내리고 최대한 결심과 성심으로서 독립기를 세우고 가자.
오호라, 오동포여 기회는 두 번 다시 아니 온다. 이 시(時)를 당(當)하여
맹연(猛然)히 기(起)하여 멸망의 구렁에서 자유를 구(句)하여 약진하자. 희
(噫)라. 오동포여 맹연히 분기(奮起)하자. 각성하자. 난폭의 음모는 절대적
으로 피할 사(事)
3. 1독립만세운동 자체가 평화적 비폭력 주권 회복 운동이었기에 독립선
서에 표방한 비폭력주의를 그대로 본 따서 격문(일명 告警書)말미에 난폭을
피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천도교측 지도자들의 종교운동의 기본정신이
었다.
3월 13일의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준비의 일단을 <기전80년사>에
서 더듬어 본다.
...영신은 치밀한 계획 아래 활동을 개시하였다. 김인전 목사님과 비밀
리에 만나서 서로의 뜻을 통했고 김목사님을 통해서 서문 밖 교회 교인이며
신흥학교 출신인 최종삼, 그리고 김목사의 동생 김가전씨, 그리고 역시 신
흥학교 출신으로 당시 서울 경동학교에 다니던 김종곤 등과 자주 만나서 자
세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모임은 주로 청년의사 신일용씨 집에서 가졌다.
기전의 한문선생 김진상씨도 이에 적극 호흥하고 나섰다. 물론 영신과 함께
비밀결사를 했던 기전학생들도 뜻을 같이 하였다. 이돈수 장로님 댁에서 기
전의 딸들이 20여명씩 모여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고 영신은 대외적인
교섭을 담당해서 신흥학생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중략...
신간회의 총무 박태련도 풍남동 대밭에서 그의 친척 박태훈, 박태화, 박
태호 등과 비밀리에 태극기를 등사해서 기독교측과 연락을 긴밀히 했었다.
…성경학교가 끝나자 선교사 마로덕목사를 통해 미리 김종곤집에서 만들
어 둔 태극기와 인쇄물을 나눠주고 장날을 기해서 만세를 부르라고 지령했
었다.
...중략...
그러나 이상스런 낌새를 눈치챈 당국은 만세운동의 가장 핵심이 될 신흥.
기전학교를 미리서 방학 조치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기전의 학생 간부들
은 계속 학교에 나와서 소식을 듣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때의 졸업반
김신회, 최금주, 송순이는 후배들을 포섭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도한 학생
들 집을 찾아다니면서 방학일지라도 시골집으로 가지 말 것을 종용했다. 이
때 기전이 선생으로는 3회 졸업생 함의선, 김한순 선생도 같이 참가하여서
학생들이 사기는 바야흐로 충천했다.…
2.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
가. 3월 13일의 독립만세 시위
3월 13일은 전주 남문장날이었다.( 5일장) 천도교 조직원들과 신흥학교
기독교 학생들은 남문시장으로 들어가는 완산동( 용머리 고개로부터 전주로
들어가는 관문격임)과 서학동( 구이방면에서 남문시장으로 들어가는 관문격
임)전주교 남쪽편에서 남문시장 쪽을 향해서 모여드는 장꾼과 시위 군중들
에게 은밀하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낮이 되
면 독립선언서를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 를 외치면서 일
제히 독립만세 시위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1919년 3월 13일 전라북도 장관이 상급관청에 보낸 일일보고 를 여기에
소개한다.
전주에서는 수일 전부터 13일 정오를 기해서 독립운동을 거행한다는 풍
설이 있었으므로 경계 중 (1). 13일 오후 12시 20분께 야소 학교 남녀학생
(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말함) 및 천도교와 일반인 등 약 150명이
목판인쇄지제, 미농판형(木版印刷紙製, 美濃判型)태극기를 들고 남문 밖 시
장부근으로부터 제2보통학교( 현 완산초등학교의 옛 명칭으로 당시의 위치
는 현 전주교육대학교 부속 전주초등학교가 있는 위치)운동장 근처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중에 들어와 등사판으로 찍을 고경서(告警書-격문을 말함)
를 살포하면서 구보로 행진하여 남문으로부터 우편국(현 전주 중앙우체국)
앞까지 행렬을 하였으나 경무관헌(警務官憲)의 저지를 당했다.
주모자로 인정되는 자 10여 명을 체포하고 즉시 유고(諭告)를 발하여 이
들 요소에 계시하고 민심을 진정시키기에 노력하였으나 오후 3시경 다시 남
문시장에 약 100명이 집단 하여 남문으로부터 본정(本町 -※현 다가동. ※
풍남문-매곡교 사거리-전주전매서 사거리-관광호텔로 빠져나가는 거리)으로
향하는 도중에 또다시 경무관의 저지로 곧 해산하였다. 이 때 경무관헌은
주모자로 인정되는 자 10여명을 구금하고 취조(조사, 심문)중이다. 당일은
장날이었으므로 특히 시중에 내왕하는 자가 다수였으며 상점은 만일의 위험
을 염려하여 폐점 휴업하고 ( 철포)경찰서는 소방조 정식 소방경찰관이
아닌 자원 소방봉사대에 해당함)를 소집하여 경계 중에 있는데 (2) 저녁 9
시경 약 30여명으로 조직된 단체 2조 중 하나는 도청 앞에 와서 만세를 부
르고 북쪽으로 갔으며 (3) 다른 일단은 남문과 남문 밖 시장부근을 근거로
하여 수십명씩 집합하고 있었으나 (4) 모두 경무관헌의 손에 의하여 해산
되었으며 (5) 12시가 지나서 모두 조용해졌다. 오늘 경무관청에 검거된 자
는 74명이다.(이하 생략)
앞에서 인용한 보고서 중 (1)의 시위대열에 참가한 150명이라 함은 축소
보고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남문에서 현 전주 중앙 우체국까지의 길이는
약 550m나 되며 시위가 구보로 진행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젊은 학생층(꼭
학생만은 아니지만)이 주동이 되었던 것이며, 당시 전주고등보통학교 입학
시험을 친 방기준씨의 증언에 의하면 구두시험(면접고사)자리에서 시험관이
응시생에게 3월 13일에 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방기준
씨는 전주고보구령 제1회 졸업생으로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그렇다면 보통
학교 학생도 독립만세시위 대열에 동참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연령상
으로는 반드시 12.3세 정도는 아니며 참가인원수도 관변측 보고서에는 대체
로 숫자를 축소 보고하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2)와 (3)에서는 모순점
이 발견된다. (4)는 무력을 동원한 강제 해산으로서 시위대원들을 저지하면
그대로 순순히 물러 서버리는 나약한 시위대가 아니니 시간이 지나 스스로
해산해 귀가하는 사람들은 골목길에 숨어 있는 관헌들이 뒤에서 물감을 뿌
려 삼삼오오 또는 하나 둘씩 귀가하는 길목에서 소문나지 않게 감쪽같이 붙
잡아 가는 비겁한 색출 체포방법까지 동원했었던 것이다.
보고서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시위군중이 수효의 축소 요인은 한국인의
독립만세 시위가 숫적으로 미미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술책이며 한편
으로는 시위 저지에 동원된 일은 경무관헌의 막강한 힘으로 쉽게 저지할 수
있었다는 능력의 과시와 독립만세 시위를 평화적으로 저지한 것처럼 기술했
지만 적어도 전라북도청 소재지인 전주에서 그리고 많은 군중을 동원하고
참여시키려는 시위 계획자들이 노리는 장날을 D-데이로 정했다는 점과 천도
교도, 기독교인, 학생, 시민 등 사전조직에 의한 시위대의 동원, 또 순수한
장꾼일지라도 현장의 분위기와 애국 열기로 참여했던 수효가 겨우 백여명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양보하여 생각하여도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
라 할 수밖에 없다.
<기전 80년사>에서 당일의 독립만세 시위의 상황을 더듬어 본다.
...기전의 벗들은 비운에 돌아가신 고종황제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는 트레머리한 뒤 흰 띠를 질끈 동여매서 풀리지
않게 했고, 짚신을 끈으로 단단히 맨 뒤 이미 약속한 대로 남문의 인경소리
울리기를 남문 밖 최요한나 집(현 전주시 전동 295번지) 안방에서 초조히
기다렸다. 최요한나의 아버지는 서문교회( 원 서문밖교회)에 갈려나간 남문
교회의 초대장로이신 최주현씨로, 이 곳 남문에서 15m 떨어진 집에서 당시
기름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졸업만 김신희(3학년)의 어머니와 다른 학생들의 어머니는 자그마한 시장
바구니를 들고 남문밖 길가를 줄곧 왕래하면서 꽃받정( 꽃받정이. 현 평화
동. 동경 127도 08 , 북위 35도 47 )에서 몰려오기로 한 신간회측과 신흥학
교 지하실에서 만든 태극기, 독립선언서를 채소인 양 가마니 포대에 넣어
이미 지금의 서학동 파출소 자리에 가 있던 신흥학생과 기독교측의 남자들
이 남문 밖으로 나오면 우리 기전이 합세하기로 작정된 대로 언제 오는지
망을 봐 주셨다. 자신들의 어린 딸들이. 그것도 남학생이 아닌 연약한 여학
생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만세를 부르려고 할 때 여느 부모처럼
지금 가면 죽는 길이 될 테니 나가지 말라고 막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
금 가면 어찌 될지 모른다 하시면서 성경책과 돈을 가슴 깊숙히 넣어 주시
고 자신들이 앞장서서 줄곧 왕래하면서 연락해 주시는 기전의 그 어머니들
이요, 그 딸들이었다. 과연 대망의 인경이 울린 뒤 얼마 있으려니 어머니들
이 급히 뛰어 오시며 온다! 온다! 하고 알려 주신다.
마지막 손을 붙잡고 죽기를 맹세한 기전의 결사대원들은 자신들이 밤잠을
자지 않고 만들었던 태극기를 한아름 안고 쓰개치마를 둘러 쓴 뒤 즉각 남
문밖에 이르러 노도처럼 밀려오는 남자들의 만세 시위대와 합세하였다.
때마침 남문 주위에는 전주 장날이라서 수 많은 장꾼들이 몰려 혼잡을 이
루고 있었다. 거리는 삽시간에 만세군중이 쇄도하면서 하이얀( 하얀, 흰)
치마 저고리에 머리에는 흰 띠를 질끈 동여맨 기전의 처녀들이 아무런 두려
움도 없이 나누어주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든 장꾼들은 너나 없이
따라서 대한독립만세! . 대한독립만세! . 대한독립만세! .를 목이 터지
게 외쳤다.
군중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남자들은 재빨리 기전의 결사대를 자기들 가
운데로 감싸주었다. ...(중략)... 감격의 눈물이 뒤범벅이 된 채 시위군중
은 우편국 앞에 가서 만세를 부르고 다시 경찰서 앞에 가서 힘껏 만세! 를
외쳤다. 처음 왜경은 당황한 나머지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도합 두시간
동안 만세를 불렀다. 그때야 비로소 정신이 든 왜경들은 공포를 쏘고 말을
탄 채 총대를 휘둘러 무자비하게 군중을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앞장을
서서 달리던 임영신이 경찰에게 맞아 기절했다. 그러나 여학생들은 굽히지
않고 계속 만세를 부르다가 기어이 기전의 결사대 10명이 경찰에게 붙잡혀
가게 되었다. 이때의 10명은 임영신, 김공순, 김신희, 송순이, 최금주, 최
애경, 최요한나, 정복수, 함연순자매 등이었다.
...이날 오후에도 500여 명이 오목대에 모여서 본정 우체국( 현 다가동
우체국)으로 몰려가 경찰은 일본도를 휘둘렀고 소방대원도 소방차(손수레)
를 이끌고 아서 갈쿠리로 마구 찍어댔으며 빨간 물감을 군중들 옷에 마구
뿌리고 일단 해산한 사람들을 물감 묻은 사람만 요소 요소에서 잡으니 무려
200여명이 검거되었다. 그 날 밤 9시경 기전의 김순실, 김나현, 함의선, 강
정순, 김신애 등이 주동이 된 230명의 시위 결사대가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구속된 애국동포를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또다시 검거되었다. 이때
붙잡힌 기전학생 총수는 3~40여 명이 되었다.
나. 3월 14일의 독립만세 시위
3월 14일의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는 전날 참여하지 못했던 기전여학교 학
생들이 전폭적으로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였다. 이 날도 박태련과 신흥학교
교사인 유병민과 문병무 등이 학생들을 인솔하여 아침 일찍부터 완산동 용
머리고개에 집결하였다. 이 길은 정읍, 김제방면, 쑥고개, 난전, 애통이,
이서, 세내 쪽에서 전주 시내로 들어오는 큰 목에 해당된다. 전날의 시위는
서학동에서 전주교를 지나 남문에서 중앙동 우체국으로 진출하는 경로였는
데, 14일에는 김제가도에서 다가동으로 향하는 경로를 주로 하는 시위였다.
일제 관헌들의 일일보고서에 14일 아침부터 시중에 내왕이 다(※多)함으로
경찰관헌도 경계를 했던 바 오후 3시경 완선정 김제가도에 300명 1단이 집
합하여 본정 2정목( 본정 2정목- 다가동)부근까지 시위하였으나 경비대의
저지로 곧 해산하였다...
위의 단체는 야소학교(주로 기전) 및 기타의 학생과 야소교도, 천주교도
가 가담한 것인데, 그 중 16명의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야중(夜中)에도 각
처에서 소집단을 하고 있었으나 대사에 이르지 않고 ... (이하 생략)
이상 전라북도장관이 일제 식민통치의 권부인 조선총독부에 보낸 일일보
고의 내용이다. 3월 14일의 전주에서의 독립만세 시위 역시 밤늦게까지 시
내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단 300명
은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숫자가 분명하다. 형편에 따라 숫자는 불었다 줄
었다 하는 것이 상식이다. 논공행상이 가해질 경우 포상대상일 경우에는 숫
자가 불어가고 문책, 처벌의 대상일 경우에는 극히 축소화하는 것이 상례이
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지 다른 지방에 비해서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는
중앙에서의 시위와 마찬가지로 온건한 편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당초의
지침과 사상이 비폭력, 평화적 시위 를 강조하였고 이에 충실하였기 때문
에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14일의 독립만세 시위에서 기전여학교
생을 포함하여 90명이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3·
1운동 관계 자료 집 인용)
3월 13, 14일 양일간의 전주 시위에서는 살상의 비극은 없었으나 천도교
인, 기독교인, 남녀 학생, 시민들을 통틀어서 164명이 검거되었으며, 박태
종, 김신극, 유병민, 함의선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전원 일제의 쇠사슬에
묶이게 되었다.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 :朴殷植 저)>의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
(원문-漢文)를 다음에 인용한다.
전주의 여학생 임영신, 정복수, 김공순, 최애경, 김인섭, 최요한나 강점
순, 최금주, 김신희 등 14인이 독립운동을 하고 갇혔는데 여학생들은 필사
의 결심으로 음식을 단식한 지 4일이 되었다.
일(日)검사는 위압으로 심문하였으나 여학생들은 화평한 기상과 담대한
언사로 대답하되 우리가 어찌 너희들의 판결에 복종하랴? 너희들은 우리
강토를 강탈하고 우리 부모를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삼천리 주인이 되
려는 우리를 비법이라 하니 이는 불법한 판결 이라 하였더니 日 검사가 대
노하여 칼을 빼어 한 학생의 왼쪽 귀를 째며 여러 학생의 의복을 다 벗겨
나체로 세워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학생을 조롱했다.
이때 임영신은 日 검사의 따귀를 때리며 섬 오랑캐의 관습을 감히 예의
인에게 행하느냐? 하였더니 日 검사는 또 묻되 너희 조선에는 군함과 대포
와 병정이 없는데 어떻게 완전 독립을 하겠느냐? 학생들 대답은 금후의
시대는 군함, 병정, 대포가 사태가가 날텐데 네가 그런 조건으로 질문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日 검사는 말하되 누가 너희를 시켜 이런 일을 하
였느냐? 학생의 대답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국이 의(義)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 만세를 일제히 호창한 것이거늘 시켰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너희는
진실로 세계적 정세에 어두운 섬사람이다.
전주의 독립만세 시위는 3월 13, 14일 양일간에 걸친 시위 운동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 이후에도 집회 횟수 21회, 집회에 참여한
인원수 50,000명, 투옥자 수는 556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시위 지도자들이 체포당한 후에도 시민, 학생들이 소규모 집단
으로 시도 때도 없이 부단히 독립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3월 13
일부터 5월 말까지 75일간에 걸쳐서 전주시내에서 모두 21회의 독립만세 시
위가 있었고 여기 참여한 시위꾼의 수효는 50,000명에 이르렀으며 15명의
부상자와 434명의 애국인사가 체포. 구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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