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교회의 김규배, 완포교회의 김인전, 지방동교회의 류기택, 종지교회의 유성열 그리고 금산읍교회의 이경필 영수가 그들이다. 김규배의 관직은 비록 감역에 머물고 있지만, 그는 신앙과 신학문의 선각자였다. 그의 입교는 동향이었던 월남 이상재의 영향으로 이뤄졌다. 이창규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不肖의 거주하는 이웃집에 金監役 奎培氏란 학자가 매년 留京하시는 선생이라. 서울단여 歸鄕하면 서울에 대한 時局談話를 洞中人을 모히고 취미잇게 하는데 1904(甲辰)年 여름에 서울단여와서 時局對한 談話中에 美國人 宣敎師 元두우라는 사람이 예수교를 선전하는데 그가 우리나라 皇帝의 愛護를 받는다 하며 서울에 유명한 人物들인 이상재 씨 윤치호 씨 이원긍 씨 유성준 씨 신흥우 등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하며 자기도 믿기로 작정하엿다 하며 기독청년회설립하고 대활동하고 잇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一生史略)
김규배는 기호지방 개혁관료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김인전 역시 부친의 영향으로 입교한 양반의 후예였다. 그가 세워 운영한 한영학교의 졸업생들은 후에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이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로 성장했다. 그 역시 전주서문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전북 지역 3·1운동의 유력한 배후 인물이었고, 그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남포현감과 수원부사까지 지낸 경재의 부친
김규배씨는 개화기 선각자였다.
한영학교를 설립한 뒤 장남인 경재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기독교 학교인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경재는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를 숙부에게 맡기고 34세의 늦은 나이에 평양신학교에 들어간다.
1914년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전주서문밧교회(현 서문교회) 초빙 목사로 부임했다.
전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게 된 계기가 여기서부터였다.
한국인 출신의 두번째 서문교회 목사로 부임한 경재는 상해로 망명할 때까지 목회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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