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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정신은 통합과 포용… 사회갈등 푸는 나침반”

천하한량 2007. 2. 17. 00:42
신간회 정신은 통합과 포용… 사회갈등 푸는 나침반”

신간회(新幹會).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국사 교과서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던, 일제 때 민간 단체 중 하나로 기억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우리 근현대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좌우합작(左右合)의 소중한 실현 사례였다.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손을 잡아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이 단체는 광복 이후 이념적으로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이제 그 신간회가 돌아온다. 지난해 2월 첫 신간회 창립기념식을 열고 행사를 준비해 온 민세 안재홍기념사업회는 오는 15일 오후 1시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신간회 창립 80주년 기념행사’와 학술회의, 신간회 기념사업회 창립대회를 연다. 이번 일을 주도하고 있는 김진현(金鎭炫·71) 민세기념사업회장을 만났다.



 

―언제부터 신간회 기념사업을 준비해 왔는가?

“민세기념사업회장을 맡은 직후인 2005년부터다. 신간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선생은 일제의 유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끝까지 민족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비타협주의자였다. 그런 한편 그의 사상은 국제적으로는 열려 있는 ‘신민족주의’였다. 바로 이런 입장이야말로 오늘날 좌우(左右) 이념논쟁과 남남(南南)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훌륭한 나침반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을 추진하게 됐다.”

신간회 운동의 어떤 정신을 지금 계승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통합과 포용의 정신이다. 신간회의 중심 인물들은 당시 가장 시대를 앞섰던 근대 지식인이었다. 우리나라 인구가 2000만 명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전국에 회원이 4만 명이었다는 사실은 의식있는 지사와 지식인들이 모두 모인 것으로 봐야 한다. 학계·언론계·노동운동·여성운동을 총괄했고, 조직과 이념에서 항일운동과 계몽운동의 총합이나 다름없다. 우리 역사상 근대화 운동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것이다. 이상재(李商在) 조선일보 사장이 회장을 맡고 안재홍 주필이 총무간사를 맡는 등 초기 구성을 보면 당시 조선일보가 신간회의 실질적인 기관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2월 15일 서울 YMCA에서 신간회 해체 이후 최초로 79주년 창립기념식을 치렀는데, 그 반향은?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연락을 해 왔고 자료를 제공했다. 신간회가 전국에 120~150개의 지회(支會)를 가지고 있었던 커다란 단체였음이 지금도 증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신간회 연구에 기념비적 업적을 쌓았던 이균영(李均永) 전 동덕여대 교수가 1996년 작고한 이후 연구에 큰 진척이 없었는데, 곧 창립될 신간회 기념사업회 중심으로 관련된 분들의 후손까지 연락을 해서 보다 생생한 당시의 자료들을 수집하게 되리라 본다.”

―80주년 기념식과 함께 창립하게 될 ‘신간회 기념사업회’에는 어느 단체들이 참여하는가?

“민세 안재홍 기념사업회, 월남 이상재 기념사업회, 월봉 한기악 기념사업회, 고당 조만식 기념관,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만해사상실천선양회 등의 인사들과 김병로·허헌 선생의 유족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거나 참여 의사를 밝혔다.”

―‘좌우합작’이라는 신간회의 정신이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우파와 민족주의 좌파가 손을 잡은 운동이었다. 여기서 좌파는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외세의존적 좌파’가 아니었다. 허헌(許憲) 선생 같은 분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좌파를 했을 뿐이지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자였다. 우파는 민족개량을 부르짖는 자치주의자와는 뚜렷한 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신간회의 좌·우는 국가와 민족, 인류의 이익이라는 같은 기준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몇 번의 뒤틀림 때문에 ‘좌우’란 말이 본래의 뜻에서 많이 일탈돼 있지만, 본래의 의미로 돌아가면 인간 본연의 삶의 가치를 향상하되 그 방법에 있어 평등과 복지를 우선하는 쪽이 좌(左), 자유와 인권을 우선하는 쪽이 우(右)였다. 문명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독선과 아집을 버린다면 얼마든지 타협과 공존이 가능하다.”

(김 회장은 작년 79주년 기념식에서 ‘기성세대이되 이상을 놓치지 않고, 젊은 세대이되 독선에 매몰되지 않고, 좌·우·보수·진보 모두 사회 공동선과 국가 공익, 보편 윤리에 충실하고 이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21세기 신간회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런 공존을 위해서 갖춰야 할 공동선(共同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7500만 한민족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어디에 둘 것이냐는 점은 이미 명백해졌다. 새로운 신간회 정신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근대화 혁명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일어나야 한다. 결코 김일성·김정일 유일사상하의 북한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북한 동포를 근대화의 커다란 역사적 조류에 끌어안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당시 신간회를 주도했던 민세 안재홍 선생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주류는 거의 다 1950년 5·30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제2대 국회에 진출했다. 6·25 전쟁으로 상황이 바뀌었을 뿐 대한민국의 정체성 문제는 그때 이미 결론이 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오직 대한민국의 체제였기 때문에 백남준도 조수미도 반기문도 나올 수 있었다.”

―신간회 당시의 민족주의 정신이 지금도 유효한가?

“그때의 민족주의와 지금의 민족주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체제를 넘어선 열린 민족주의다.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자는 가짜 민족주의가 아니라 기아선상의 북한 동포를 도와주는 민족주의가 돼야 한다.”

―신간회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게 되나?

“신간회에 참여하셨던 선열들의 미처 못 밝힌 행적들을 세상에 다시 알릴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모적이고 잘못된 이념 논쟁을 정리하고 수렴하는 장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 金鎭炫회장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논설주간, 과학기술처 장관, 한국경제신문 회장, 서울시립대 총장,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이사장, 문화일보 회장, 이봉창 기념사업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제헌의원 유족회장, 장준하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IT전략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부친 김영기(金英基)씨가 경기 안성에서 신간회 운동에 참여 하고, 안재홍 선생과 정치 노선을 같이했던 것을 계기로 민세 안재홍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게 됐다. 최근 단행본‘일본친구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일왕 스스로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헤이세이(平成) 유신’을 촉구해 화제를 모았다.











● 신간회는 좌·우 민족진영 손잡고 창립

신간회는 1927년‘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란 표어 아래 비타협적 민족주의·사회주의 진영이 손을 잡아 창립됐다. 이상재·안재홍·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신석우(申錫雨)·이석훈(李錫薰)·조만식(曺晩植)·한기악(韓基岳)·한용운(韓龍雲)·허헌·홍명희(洪命熹) 등 좌·우를 막론한 민족지사들이 참여했으며, 조선 민족의 정치·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며 기회주의를 부인하는 것을 정강정책으로 삼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민중대회를 계획하다 관련자 수십 명이 연행·구속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 민족의 통합과 발전을 추구했던 신간회 이념은 최근 다시 주목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