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일본 정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문>도 월남 이상재선생의 장례식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그는 '민중의 진정한 벗이였다고...'

천하한량 2007. 3. 8. 00:17
월남 이상재(1850-1927)

나라를 위해서는 불굴의 정신으로
민족을 위해서는 위대한 지도력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투철한 신앙인으로
이 땅이 젊은이들에게 생명력과 비젼을 심어준 겨레의 등불 이상재

충신의 가문에서 태어남

이상재 선생은 1850년 10월 26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아버지 이희택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고려 말기의 3대 충신으로 정몽주, 길재, 그리고 목은 이색을 꼽을 수 있다. 이상재는 고려 말기를 빛낸 충신이요 대 학자이기도 한 목은 이색의 16대 자손으로 태어났다.

이색의 시(詩)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물렀구나 /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이런 긍지를 아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이희택은 어렸을 때부터 아들에게 늘 그의 가문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는 조상 목은 할아버지가 나라의 충신이었다는 사실을 너는 늘 잊지 말아라”
“네, 그런데 아버지 그 충성이란 말이 무슨 뜻이죠?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안 가요.”
“충신아란 자기가 한번 옳다고 여기는 일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거란다. 그리고 또 그런 태도를 가지고 오로지 한 임금에게만 자기의 절개를 바치는 신하를 가리켜 충신이라고 하는 거야.”

이상재는 7살부터 마을에 있는 서당에 다니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서당에 나가서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등을 익히게 되었다. 집이 가난해 자기 책을 가지지 못하고 언제나 남의 책을 빌려 읽어야만 했다. 이상재의 비범한 재능은 어릴 때부터 훈장까지도 놀라게 하곤 하였다. 어떤 글자나 글을 한번 익혔다 하면 그 후로는 좀처럼 잊지 않고서 정확히 읽었던 것이다.
아버지 이희택은 아들에게 공부에 전념 할 것을 훈시하였다.
“사람이란 배움이 없으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란다. 밤낮 먹고 자고 하는 노릇이야 짐승도 다 하는 짓들 아니냐. 그러나 넌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그가 서당에 다인지 2-3년 후, 어느 가을날 서당의 몇몇 아이들이 그를 꼬이기 시작하였다.
“상재야”
“넌 공부에 싫증나지도 않니? 우리와 함께 산으로 놀러 가지 않을래?”
“뭐? 공부는 어떻게 하고 놀러 간단 말이야?”
“요즘 산에 가면 밤나무마다 익을 알밤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넌 모르지?”
“알밤들이 쏟아진다구?”
“그래, 밤나무 밑에 가서 서 있기만 해도 머리고 따끔하게 아플 정도로 주먹같은 알밤들이 툭툭 떨어진단 말이야?”
주먹같은 알밤들이 툭툭 떨어진다는 말에 이상재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튿날 부모님께는 서당에 간다고 하고 그 아이들과 어울려 그만 산으로 가고 말았다.
이런 재미에 빠져 이상재는 이틀이 멀다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산으로 가서 종일 쏘다니곤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 이희택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가 이웃마을에 다녀오다가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보고 싶었다. 서당에서 글읽은 소리에 내 아들이 있겠지 하고 생각을 하였는데, 공부가 끝나고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상재는 보이지 않았다.
훈장어른이 상재가 서당에 하루 걸러서온다는 말을 놀랍고 의아해서 막막하기까지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희택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 드디어 상재가 태연히 들어섰다.
“너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냐?”
“서당에요”
“지금 그 말이 정말이야?”
“정말입니다.”
“어디 한번 더 들어보자꾸나. 그 대답이 정말이야?”
“...”
“어찌 대답이 없느냐. 이 애비가 방금 전에 서당엘 들렸다가 왔는데 그래도 네가 거짓말을 할 작정이냐?”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
“그래 오늘 어디 갔었느냐?”
“아이들과 함께 산에 갔었어요”
“거긴 뭣하러?”
“알밤을 주으려구요.”
“그래, 공부하는 일보다 알밤 줍는 일이 더 중했단 말이냐?”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요.”
“안 돼. 이런 일은 그냥 용서할 수 없다. 어서 막대기 하나 가져와!”
“아버지, 다시는 안 그럴께요.”
“어서 막대기를 가져 오래두.”
아버지의 얼굴이 누그러들지 않자 어린 상재는 떨면서 막대기 하나를 주워왔다.
그날 이 상재는 아버지에게 혼줄나게 종아리를 얻어맞았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을 때리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이런 기회에 잘못된 버릇을 고쳐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호되게 벌을 주면서 다시는 부모를 속이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아두었다.


총명하다는 평판
어느덧 이상재가 13살이 되었다. 그해 어느 날 그는 아버지를 따라 한산장에 간 일 있었다. 한산장은 모시로 유명한데 이때 상재도 아버지와 함께 장으로 모시를 팔러 간 것이었다. 그러나 장터에 도착한 이희택은 책방부터 둘러보았다. 책방이라야 낡은 종이로 꿰매어 만든 몇 권의 책들이 바닥에 놓여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책들을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을 때에, 상재는 아버지에게 어른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춘추좌전]이라는 책을 사 달라고 졸라댔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모시를 판 값으로 춘추좌전 몇 권을 사 주었다. 이것을 상재는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 기어코 다 읽었다.

이상재가 너무나 비범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15살 때 강릉 유씨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상재가 총명하다는 평판과 함께 또 한 사람의 목은 선생이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자 풍수설에 능한 어떤 지관이 아무도 몰래 그 선산을 찾아 여기저기 눈여겨 둘러보았다. 이상재의 할아버지 묘지를 보고는 이 자리는 나라 안팎에 그 이름을 떨칠 만한 인물이 날 자리라는 것이 소문이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어떤 부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 부자는 모략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 부자는 좋다는 묘자리가 탐이 나 즉시 많은 돈을 지관에게 주어 그의 입부터 틀어막았고, 다음엔 지방 관리에게 더 많은 돈을 보내어 그의 마음을 샀으며, 곧 서생을 불러서 이희택의 선산이 옛날엔 자기 땅이었다는 거짓문서를 만들어 즉시 관청에다 고소하도록 하였다. 이어 재판 때를 대비하여 완벽한 증인까지 세워두는 등 그야말로 음흉한 계략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드디어 관원들이 관가에서 나와 이상재의 아버지 이희택을 무작정 연행해 갔다.
관가에 도착하니 문제를 만들어 낸 부자가 증인까지 데리고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앞뒤의 일을 까맣게 모르는 이희택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고, 형식적인 재판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뛰어난 지략과 용기

이희택은 아무런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억울한 누명을 써야만 했다 이상재는 자기 아버지가 관가에 끌려간 사실을 그날 저녁 늦게 서야 알게되었다. 그 다음날 일찍 관가로 달려갔다. 이상재는 관가의 대문에서 실랑이를 벌였으나 문지기는 막무가내였다. 마침 이때 관원이 대문을 열고 나오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 관원으로부터 아버지가 남의 땅을 가로챈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초지종을 알고 싶어 관가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문지기의 반대로 도저히 들어갈 수 가 없자, 그 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해괴한 행동까지 벌이자 문지기는 그만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문밖으로 행차하던 관리와 딱 마주치게 되었다. 이상재는 벌떡 일어나 곧 관리의 손을 덥썩 끌어 잡았다.
“관리 나으리, 가옥에 갇힌 제 아버지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 안에 억울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 대신 제가 감옥살이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벌은 죄지은 자가 받는 것이다.”
“아닙니다. 예로부터 부모님을 편안히 모시지 못한 놈을 가리켜 불효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아버지의 고통을 대신 받지 않으면 전 영영 씻을 수 없는 불효자식이 되고 맙니다. ”
“어허, 이놈이 보통 놈이 아니구나.”
그 말을 가상히 여긴 관리는 이상재를 관가의 감옥으로 데려가 이희택을 풀어내고 대신 이상재를 가두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지방 관리가 참으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된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였다.
“아버지, 제가 대신 감옥 살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왜 내가 자식까지 고생시켜야 한단 말이야. 어서 돌아가거라.”
“아닙니다. 아버지. 이것이 자식된 도리입니다. 그러니 들어주십시오.”
“안 된다. 너까지 고생을 시키면 이 애비 마음이 편할 줄 아느냐.”
대신 하겠다. 안 된다. 대신 하겠다. 안 된다는 부자간의 애절할 실랑이를 보고 난 관리는 한 가닥 양심의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관리는 그 자리에서 즉시 두 사람을 동시에 풀어주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상재는 당장에 서천군 동헌에 이르러 사또 앞으로 나아갔다.
“네가 누군데 무슨 일로 왔느냐?”
“예. 한산지방에 살고 이상재라고 합니다. 조상들은 몽땅 도적맞고 하도 억울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뭐, 조상들을 도적맞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떤 부자놈에게 하루아침에 선산 땅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이게 조상들을 도적 맞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초지종을 듣고 난 사또는 이윽고 밖에다 대로 소리쳤다.
“지금 당장 관원 하나를 한산 지방으로 보내어 아무개 부자가 어떤 놈인지 낱낱이 조사해 오도록 하여라.”
차출된 관원을 서둘러 한산지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만나 문제의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탐해 보았다.
전후사정을 다 듣고 난 서천 사또는 당장 그 부자를 불러들인 다음 다시 재판을 열어 이희택에게 선산을 되돌려주도록 하였다. 결정적으로 빼앗겼던 땅을 아직 15살밖에 안 된 이상재의 기지로 말미암아 다시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한산지방 사람들 뿐아니라 서천군 일대의 사람들 입에서까지 이상재의 이름이 파다하게 오르내렸다.

과거시험에 응시했다가

이상재는 1867년 18살 때 큰 뜻을 품고 과거에 응시하였다. 이 당시에 과거시험은 형식상이였다. 돈을 주고 과거합격자까지 사는 경향이었다. 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한 선비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 저기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힘없는 선비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상재도 미리 예상은 하였지만 실망과 좌절이 한꺼번에 몰려와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온몸에 기운이 빠진 채,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바로 이때, 누군가 등뒤에서 그의 어깨를 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숙부님이었다. 상재는 숙부님께서 현 정부의 정치을 한탄하며, 시골로 내려가서 조용히 농사나 지으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숙부님을 말했다.
세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썩어빠진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양심과 양식이 살아있는 자가 분명이 있다면서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는데 바로 승지(승정원 관직의 하나, 오늘날 문화공보주안에 있는 직위같은 것으로 임금의 대변인이자 비서의 임무를 수행함) 박정양이었다. 이 박정양은 [열하일기]와 [양반전]이 작가인 연암 박지원의 일가였다.

승지 박정양의 집에서

두 눈에 총기가 번득이는 젊은이, 빈틈없이 똑똑한 언변을 가진 젊은이. 게다가 현직 벼슬아치 앞에서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같은 벼슬아치들의 부패를 공격하고 나서는 젊은이, 그런 젊은이의 기개가 승지 박정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집에서 머물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상재가 하는 일은 박정양의 집에서 개인비서나 다름없이 집안의 잔심부름과 내방객들을 안내하는 정도였고, 저녁때 박정양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하루 동안의 집안 일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부지런히 책을 읽곤 하였다. 이곳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13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정변의 소용돌이

이상재는 가끔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과 아내를 만나보는 것 외에는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없이 대부분 박정양의 집에서만 지냈다. 승지 박정양을 향해 어서 길을 열어달라고 조급하게 부탁하는 적도 없었다. 그리고 과거시험에 한번 떨어지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응시해 보려는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양이 집으로 돌아오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때는 그가 호조판서에 오른 뒤였다.
“조정(정부)에서 신사유람단을 조직하여 일본을 시찰하도록 할 계획을 세웠는데 고종께서 그 대표를 나에게 맡겼거든. 그래서 나는 자네를 내 수행원으로 삼아 함께 일본을 다녀오고 싶구만. 자네의 심중은 어떤가?”
“좋습니다. 정말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대원군의 통치시대에는 쇄국정책에 의해 외국과의 통상이 없었지만, 고종황제의 비인 민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부터는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1876년에는 처음으로 일본과 한일 수호조약을 체결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윽고 호조판서 박정양을 대표로 한 일행 18명은 일본으로 향했다.(1881.4.) 일본에 도착한 수행원들은 70일동안 일본의 여러곳을 돌아보면서 일본의 발전한 모습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들은 돌아와서 즉시 조정안에서 소위 개화파를 형성하였고, 자기들의 소신을 밀어부쳐 이듬해인 1882년에는 미 수호조약을 체결시키는데 성공하여 처음으로 미국과 교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소위 수구파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두 파 사이의 갈등은 결국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수교후 불과 두 달만에 임오군란을 겪게 되었다.
이 임오군란에서 승리한 수구파는 즉시 대원군을 다시 권좌에 복위시켰으나 한달 만에 대원군은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천진으로 납치되었고, 그 동안 피신해 있던 민비가 다시 실권을 잡음으로 개화파는 숨통을 틀 수가 있었다. 이때 개화파는 수구파에 속한 민영익, 조영하, 민태호등의 무리들을 도륙하고 신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개화파 정권은 문벌폐지, 관리제도의 개혁, 세금제도의 혁신 등 그 동안의 병폐들을 일소하면서 일대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였다. 개화파가 이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배후에서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화파의 정권은 그만 3일 천하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수구파 잔당의 긴급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사가 물밑듯 서울로 쳐들어와 개혁파 섬멸에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개화파의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홍영식과 박영효 등은 한양으로 되돌아갔다가 청군에게 잡혀서 죽고 말았다. 한편 이상재는 일본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홍영식의 주선으로 우정국의 요직에 앉게되었다. 그러다가 갑신정변이 개화파의 실패로 끝나자 이상재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였다. 갑신정변에 관련된 자들을 색출하여 죽이는 총책을 맡은 한규설을 자기 발로 직접 찾아간 일이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이상재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난 홍영식의 주선으로 우정국 요직을 얻게 되엇던 자지요. 내가 내란에 가담한 적은 없지만 개화파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기에 혐의를 받을 만하지요. 다소나마 책임을 느끼고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부모님을 봉양코자 합니다. 그러니 나에게 조금이라도 혐의가 생기거든 한산 땅으로 내려와서 즉시 나를 체포해 가십시오. 후에 혹시라도 이상재가 어디로 도망쳤다는 말을 듣게 될까봐 미리 일러두는 바입니다. ”
한규설은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여 자기 수하 사람들을 모아놓게 경계시켰다.
“이상재가 개화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는 절대로 체포하지 말아라.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그래서 이상재는 서로 죽이는 살벌한 난국 속에서도 무사히 고향으로 내려가서 지낼 수 있었다.
‘아, 우리 나라의 개화는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가고 있구나. 도대체 이 나라의 운명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법부참사관 자리까지 올라

이상재는 3년 동안 고향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 호조판서 박정양은 이상재를 잊지 않고 한양으로 불러 나중에 미국에 갈 때를 준비하여 낮은 벼슬을 주었다. 1887년 8월 38살이었다.
박정양은 1887년 10월에 주미공사로 정식 임명을 받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이상재를 서기관으로 임명하여 동행시켰다. 10월 2일에 인천을 출발하여 요꼬하마에서 영국 배를 갈아타고 11월1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26일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도 청나라은 조선을 자기 나라의 속국으로 생각하여 조선에서 하는 모든 일에 자기들의 승낙을 받아야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이상재는 청나라 공사에 찾아가서 조선은 엄연한 독립국이 청나라는 간섭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런 일수에 박공사는 이상재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일체의 외교문제를 이상재에게 맡겨버리고 자기는 공사라는 명함만 지키게 되었다. 이상재는 틈만 나면 워싱턴 거리를 둘러보았는데, 조선의 자존심과 체통을 잃지 않으려고 도포 자락에 상투, 갓, 그리고 나막신을 끌고 다니면서 거리를 활보하였다. 간혹 연회석에 초청을 받아서가기도 했지만 절대로 포크를 사용하는 법이 없었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젓가락을 꺼내러 음식을 들 곤했다. 그런 모습이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되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미국 땅에 있는 동안 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미국이 눈부시게 발전하게 된 요인이 모든 국민들이 거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서 고종은 박정양 공사를 조선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박정양이 조선에 들어오면 생명이 위태로우니 들어오지 말고 일본에 머물러 있으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이상재 혼자서 조선에 들어왔다. 고종은 이상재의 공로를 생각해서 벼슬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는 사양하였다. 이 이유는 자기가 모셨던 박정양이 관직을 빼앗이기고 일본에서 피신하고 있는데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고종은 이상재의 의도를 알고는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은 벼슬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서는 판국인데 먼저 도리를 앞세워 벼슬을 사양하니 그의 인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조선을 극도로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고종은 일본에 있는 박정양을 불러들어 내무대신, 총리대신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고, 이상재는 법부참사관과 외국어 교장직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오로지 정의만을 위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내정에 노골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일본 공사인 이노우에가 외국인 학교에 모든 교사를 일본 사람으로 바꾸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상재는 이 공문을 들고 일본공사를 만나 따졌다.
“여기 외국인 학교를 일본인 교사들로만 채우라니 그게 어디서 나온 착상이요. 우리가 외국인 학교를 세워 운용하고 있는 목적인 여러 나라의 문화와 문물을 배워 익히기 위함인데 그럼 일본의 문물만 배우란 말인가? 당신이 보낸 공문의 취지는 외국인 학교에 맞지 않으니 공문을 되돌려 주려고 왔다”하면 공사 앞에 던져버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나라가 어려워지지 고종은 전운사를 복구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찬반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운사란 전국에서 세곡으로 받아들인 쌀과 보리 등 곡식들을 중앙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이 관청은 중간관리들의 극심한 부정 때문에 갑오경장때(1894년) 폐지시켰던 것이다. 고종도 여기 찬성하여 재가까지 내렸다. 그러나 이상재는 이일에 총책임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이것을 안 고종은 대단히 노하였다. 이상재는 왕의 명령을 어긴다고 하더라도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종은 이상재의 충성어린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자기의 뜻을 바꾸고 취소하였다. 정말로 이상재는 자기가 한번 옳다고 여긴 일은 국왕의 명령까지도 목숨을 내걸고 반대하는 그런 강직한 사람이었다.

독립협회의 활동

1896년 그 동안 미국에서 지냈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국내에서는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싹트고 있었다.
이상재가 서재필을 만난 것은 ‘정동 구락부’(국제적 사교모임이며, 나라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이곤 함)라는 모임이다. 또한 중국으로 망명했던 윤치호가 귀국하였다. 이렇게 세 사람은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결집할 수 있는 기구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1896. 7.) 독립협회는 순수한 한글신문이요,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독립신문은 부정부패의 죄악상을 온 천하에 폭로하여, 국민들의 눈을 뜨게 하였고, 합리적인 교육과 정당한 개혁을 촉진해 인간개발에 도움을 주는데 주력하였다. 독립협회가 처음에 조직할 때에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1896년 말이 되어서는 2천명이상으로 늘어났다.
서재필은 기독교인이므로 이상재에게 예수님을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내키지 않은 듯 믿지를 않았다.
이런 독립신문을 만들자, 부정을 일삼은 관리들은 정부의 일을 비판하니 역적이라고 비난하며 한글로 신문을 펴내자 무식한 놈들이 간행한다고 폭로하였다.

한편 독립신문이 정부의 폐단이 생길 때마다 정부를 향해 시정할 것을 이야기 하자, 정부와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고, 독립협회가 나라를 반역하는 단체라고 고종에게 거짓으로 일러바쳤다. 정부가 우유부단한 시책을 펴는 바람에 이런 틈을 타서 러시아가 조선의 군사권과 재정권을 간섭하면서 착취하려고 했는데, 이런 일에 대해 독립협회가 정부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신랄하게 정식으로 항의하고 나섰던 것이다.

러시아는 조선고종에게 독립협회가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독립협회에서는 상소문을 쓰고 군중집회를 계획하였다.
상소문의 요지는 이렇다
“만약 정부가 외국의 요청을 그때마다 다 들어준다면 외국인들은 또 다시 더 무리한 요청을 해올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우리 정부는 그들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우리조국은 500년 역사로 끝나게 될 것이고 삼천리 금수강산은 종말을 맞고 말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절대로 나 한 사람이나 우리 협회의주장만이 아니라 하늘을 머리에 받들고 땅을 밟고 있는 억조창생이라면 다 한결같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정부는 압력이 무서워 강대국들의 요청들을 우물쭈물 허락해오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그러면서도 정부는 그런 일을 지적당하면 책임 전가하기에 바빴고, 그런 일은 다 나라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만 해 왔습니다. 어떤 때는 애국적인 충고를 반정부 행동이라고 몰아부치기도 하였습니다.
어째든 지금 상황에서는 외국들이 우리나라의 일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는 일이 정부의 급선무라고 생각됩니다. 저들이 우리를 능멸하는 동안은 절대로 압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부는 이제라도 자성하여 주체성을 세우는 일에 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1897년 3월 9일 종로에서 수천 명의 회원과 시민들이 모인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열렸던 집회는 1897년 10월 29일에 열렸던 소위 “만민공동회”라는 군중 궐기였다.
이때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였고, 정부는 1897년 8월 17일에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국왕의 칭호도 “황제”라고 하여 10월 12일 고종황제의 즉위식까지 거행하였다.

독립협회가 러시아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자 그 무렵 친러시아파 무리가 “황국협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가 열린 다음날 독립문 돌벽에는 말할 것도 없고 장안 각처에 “독립협회는 정부가 허약한 틈을 타서 5백년 왕조를 뒤엎어버리고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세우려는 공화정치를 획책하고 있다”고 괴벽보를 일제히 나붙었다.
이러하여 이상재를 포함한 17명의 독립협회 요원들은 하루아침에 반역자로 몰려 감옥에 투옥되었다.
며칠후 정부의 요직에 있던 심상훈은 이상재의 비범한 기상을 아깝게 여겨 고종에게 알현하여 이상재의 충직한 마음을 모두가 앎으로 풀어 줄 것은 항소하였다.
이상재는 투옥된지 6일만에 풀려나 모든 관직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평민으로 돌아갔다. 한편 황국협회는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외국에서 입국하게 되면 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소문을 퍼지게 하였다. 고종 황제는 배신감과 분노에 당장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1898.12.)

마침내 하나님을 영접하여

독립협회가 해산되어, 서재필은 미국으로 쫓겨난지 오래였고, 윤치호도 지방으로 은둔해 버리자 이상재는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재는 감옥살이와 많은 모함을 당하면서 관직에서까지 물러났지만 지금까지 벌여 온 운동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죄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흩어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하나 불러 모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완용은 자기의 심복 이근택에게 소위 반정부 세력을 철저히 뿌리뽑는다는 명복을 내세워 ‘경위원’이라는 특무기관을 설치하였다.
1902년 6월 이상재는 즉시 체포되어 경위원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조선 협회의 공모자라는 죄목이었다. 나라를 구하려다 도리어 반역죄인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된 이상재는 겉으로만 보면 정말 불운한 사람이었다. 이상재 본인 또한 그런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막다른 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였다.
감옥에는 이승만뿐만 아니라 많은 애국인사들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상재에게 다가가 기독교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선생님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이제 신앙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양 사람들의 머리가 어디 우리만 못해서 기독교를 숭상하고 있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유교가 몸에 배었던 사람이라 도무지 선교사들의 전도가 먹혀들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결국 기독교는 유교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진리라고 깨닫게 되었지요.”
“어떻게?”
“선교사들이 틈틈히 여러 가지 책들을 차입해 주었는데 그 주에는 성경책도 있었지요. 그래서 부지런히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했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신앙을 받아들이신다면 애국 운동도 전혀 새로워 질 것입니다.”
이상재는 이승만이 가져다 준 성경을 읽을 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작 별다른 체험이 없었다. 성경을 보는 동안 더러 수긍이 가서 머리를 끄덕이긴 했지만 특별한 깨달음은 없었다. 얼마 전에 이승만에게서 애국정신과 신앙생활에 대해들은 것만 해도 그랬다.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나의 민족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도 평화를 도모하게 된다는 말이 감동적 이였는데, 그것은 이상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가 이상재는 결정적인 사건을 만나게된다.
어느 날, 감옥벽 틈에 무슨 종이 쪽지 하나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이게 무슨 쪽지일까?’ 이상재는 무심히 손을 뼏쳐 그 쪽지를 빼내어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마태복음 5장 끝부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외편도 돌려대며■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을 접하는 순간 신선한 감동과 깨달음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상재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어도 새롭게 다가오기만 하였다.
“아. 이것이야말로 참 진리이다. 오, 하나님이여! 저는 정말 큰 죄인입니다. 무지한 제가 애국자란 이름하에 남을 미워하기만 했으니 이보다 더 큰 잘못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를 용서해 주시고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소서.”
그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미천한 자신의 존재가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1903년 어느 봄, 그의 나이 54살 때였다.
이런 뜨거운 체험 후에 그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특히 그의 애국관에 있어서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된 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적을 적으로 대적하지 않고 설사 어떤 대적이 있어 그가 칼을 들고 휘두르며 달려든다 하더라도 그를 대적하지 않고 포용해야만 되는 것, 이것이 곧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나라 사랑의 길이다’이렇게 생각한 그는 신자가 되고 나서 감옥 안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향해 자기가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이상재는 이때부터 기도도 열심히 하였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그리고 가엾은 우리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소서.”

기독교 청년회 운동의 시작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한국은 완전히 일본의 독무대가 돼버렸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자기 군대까지 조선 땅에다 주둔시켜 버렸다. 이처럼 정세가 바뀌자, 정부에서도 민영환을 학부대신으로, 윤치호를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이상재를 비롯한 독립협회 관련자들도 곧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지 3년만의 일이다.
이상재는 감옥생활에서 종교서적과 여러 가지 서적을 넣어준 여러 선교사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인사하였다. 감옥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니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가 연못골교회(지금의 연동교회)로 게일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교회에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나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상재는 게일 선교사와 더불어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선교사님, 정말 답답합니다. 애국운동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혀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
“이 선생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 해 1903년 10월 28일에 우리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황성 기독교 청년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른바 지식층 청년들을 끌어들여 복음정신에 부합한 기독교 사업을 펼치려고 이를 구상했던 것이지요. 물론 이 조직이 무슨 정치운동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선생님이 이 단체에 들어오셔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구국운동을 펼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황성기독교 청년회란 YMCA의 전신인데, 게일 선교사의 말 그대로 지식층 청년들을 주동으로 하여 복음사업을 펼쳐가는 것이 그 설립의 취지였다. 이렇게 하여 이상재는 YMCA에 가담했을 뿐아니라 감옥 안의 친구들까지 끌어들여 활동을 전개시켜 갔다. 1904년 중순경일 이다.
YMCA는 원래 1884년 영국 태생인 종교사업가 죠지 윌리엄이 기독교 정신에 따라 젊은이들에게 지 덕 체의 세 가지 요소를 고루 함양시킨다는 목적을 두고 만든 단체였다.

1905년 11월 9일 마침내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기에 이르렀고, 황성신문 사장인 장지연은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는 사설을 쓰면서 온 겨레와 함께 울었고, 민영환은 그 조약을 끝까지 저지하려다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친일파인 이완용과 이근택 등은 전혀 딴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절망의 수렁에서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세계평화를 의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몇 애국자들 이상재, 한규설, 이상설, 이준 등등이 은밀히 모여서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야욕을 세계에 폭로할 것을 결의하였다. 밀사로는 이상설과 이준 그리고 주러시아 조선 공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이위종이었다. 이들은 고종은 설득하여 밀서에다 어인을 찍고 승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회의 의장이 이들 조선 밀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조선의 국권은 일본의 손안에 있게 절대로 참석시킬 수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이들 세 사람은 각국의 대표들을 만나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해 보았으나 일본을 비난하려 들진 않았다.
참으로 암담하였다. 그래서 결국 이상설과 이위종은 그 길로 미국으로 망명해 버리고 혼자 남은 이준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일로 인해서 고종을 황제자리에서 강제로 폐위되고 그 아들 순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907년 7월 20일이었다. 이에 이상재는 분개하였고, 차라리 자결을 버리는 것이 가장 떳떳한 일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인 유씨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부인이 숨을 거둔지 불과 4일 후에 맏아들 승윤이가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1908년 둘째아들 승인마저 세상을 떠나게되어 이상재는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철저한 비통함에 이상재는 견디지 못하고 게일 선교사를 불러 고향에 내려가서 유산을 정리하고 자결하겠다는 뜻을 비취었다. 이에 선교사는 ‘자결은 우선 하나님 앞에 큰 범죄입니다. 사람이란 누구에게나 불운한 때가 있습니다. 그 절망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라면 설득하였으나 결심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게일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를 불러모아 그를 위로하였다.

젊은이들을 위한 헌신

여러 선교사들이 와서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설사 나라가 망하고 가족이 다 죽었다 하더라고 이 땅에는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선생님들의 자식들일 뿐 아니라, 이 나라의 희망이지 않습니까. “
이 말을 들은 이상재는 다시 힘을 일어나게 되었고, YMCA측에서는 그에게 총무직을 맡겨주었다. 이때부터 이상재는 YMCA의 일로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지냈다. 환갑이 다 된 그였지만 어느 젊은이 못지 않게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일했다. 어느 해 1년 동안에는 젊은이들이 성경 연구반에 628명이나 등록하였고, 46회의 전도집회를 열어 연 인원 1만 8천여 명의 사람을 참석시키기도 하였다.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상재에게는 젊은이들 못지 않게 활력이 있었다. 이상재는 젊은이들의 다정한 친구이며, 귀감이 되는 스승이기도 하였다.
국내적으로 1903년부터 시작한 신앙의 부흥운동은 ‘1백만 구령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YMCA에서는 이색적인 강연회를 계속 주도하였다. 강연회 열 때마다 시작시간에 먼저 애국가를 봉창하였고, 마칠 때에는 반드시 기도로 맺곤 하였다. 또 그는 청년들이 강당에 모일 때마다 더 큰 소리로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라는 찬송을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또 YMCA안에서 전도대를 조직해 몸소 골목골목을 누비며 전도지를 뿌리고 다녔다. 연극공연에는 이상재가 각본도 직접 쓰고 연출까지 직접 하였는데, 계몽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권력의 부패와 일본의 횡포 그리고 민족의 비애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결론부분에서는 늘 신앙의 힘을 강조하였고, 언제나 이 민족이 하나님의 신앙으로 깨어나야 한다는 주제였다. 이런 연극은 한국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현대식 연극이었고, 개화운동의 좋은 방법이다. 연극공연때마다 초만원을 이뤘고, 일반 청년들, 가정주부나 처녀들까지 심지어는 기생들까지 변장을 하고 들어와 관람하면서 한 마음이 되어 울고 웃고 했던 것이다.
이런 사이에 조선은 1910년 8월에 강제로 단행된 한일합방이 되었고, 조선 5백년의 역사를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비분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나라가 망하자 이상재는 더욱 암담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다시 일어났다. 이상재는 젊은이들에게 계속적으로 애국심을 불어넣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심어주기에 바빴다.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찌가 부임해 왔다. 그는 부임하자 YMCA를 가장 위험한 반대세력으로 주목하여 노려보았다.
1910년 11월 5일 압록강 철교가설공사의 낙성식에 데라우찌가 참석하기로 하였는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도중에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이런 모의 주체가 YMCA라는 것이었다. 이런 조작을 근거로 일본경찰을 출동하여 123명의 YMCA회원들을 검거하였고, 이들 중 105인이 실형을 받았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일본당국은 YMCA안으로 첩자 김린이 일으킨 “유신회사건”이 있었다. 김린은 YMCA안에서 유신회를 조직하고, 외국세력을 차단하려고 온갖 술책을 썼다. 그런다가 이런 음모가 드러나자 그는 파면되었고, 이에 화가 난 김린은 불량배들을 난입시켜 행패를 부리고 지도자들을 구타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런 사건으로 YMCA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윤치호는 6년간의 실형을 언도 받았고, 이승만과 김규식 등은 해외로 피신하였으며, 당시 회장까지 사임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렸으니 조직이 온전해질 수가 없었다.
이에 총독부는 압력을 가해와 한국의 YMCA은 일본의 YMCA의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 이상재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오, 하나님. 이 나라의 청년들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입니다. 제발 우리 YMCA를 버리지 말고 인도해 주소서.”

불굴의 정신

YMCA는 이제 파탄상태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재는 다시 한번 불굴의 투지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어느 날 데라우찌 총독은 자기의 내무부장인 우사미와 대화를 하면서 이상재를 해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데라우찌의 명령으로 우사미가 YMCA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이 선생님, 이거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무척 늙으셨군요.”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사실 우리 총독께서 이 선생님의 건강을 여간 걱정하고 계신 것이 아니랍니다.”
“총독이 내 건강을 걱정한다구?”
“그래서 우리 총독께서 선생님을 걱정하여 이런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우사미는 자기 호주머니 안에서 커다란 봉투를 하나 꺼내어 이상재 앞에다 내밀었다.
“많은 건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고향으로 내려가서 이걸로 땅을 사면 만년을 평안히 쉬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5만원입니다.(지금의 10억원 정도) 우리총독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이상재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면서 우사미를 쏘아보면서.
“당신 총독이 날 잘못 보았수. 이 돈을 가지고 당장 나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에 집어던질 테니까.”
그러더니 이상재는 돈 봉투를 집어들어 냅다 바닥에 팽개쳤다. 그러자 우사미는 즉시 돈 봉투를 집어넣고서 뒷걸음질 쳐 물러갔다.
우사미는 총독에게 보고하면서,
“바늘끝 하나도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좌우간 청렴하기로 한국에서 이상재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다 성깔 또한 대단합니다.”

일의 실패로 끝나자 데라우찌는 다시 이상재에게 사람을 보내어 총독부 산하의 법부대신 지위를 권해 보기도 하였다. 어떤 수단이든지 일본에 대한 반항세력을 꺾어버리고자 했던 술책이었다.
“뭐, 데라우찌가 나에게 법부대신 자리를 주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나를 아직 잘 모르는군.”
어쨌든 이런 일이 있고 나자 이상재는 세간에서 무서운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까지도 몸을 도사릴 만큼 그를 두려워하였다. 돈과 벼슬로도 꺾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외국인들은 이 무렵부터 그의 이름 앞에 “성(聖)”자를 붙여 “성(Saint) 이상재”라 불렀고, 더러는 영국식 높임말은 “이상재 경(卿)”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사람들의 존경심은 점점 높아져 “대인 이상재” 혹은 “한국의 톨스토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이상재는 YMCA를 도맡아 이끌면서부터 우선 교육사업에 주력하였다. 그는 늘 청년들에게 직업교육, 생활교육, 기술교육을 강조하였다. 그가 교육사업을 통해 목공, 철공, 제판, 인쇄, 사진, 염색 등 실업육성에 힘썼던 것은 선비는 최고라고 생각하고 노동을 천시하는 경향이 망국의 병이라는 것을 깨달아기 때문이다.

그는 틈만 나면 모여든 청중 앞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 내용의 대부분은 거의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정신부터 개혁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간디였다. 이상재가 YMCA전국 연합회를 결성했던 해 1914년에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소위 일제 무단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은 전국을 빈틈없이 통제하였고, 집회 결사에 엄금령을 내려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하여 투옥시켰으며, 심지어 일반 문관과 학교의 교원들까지도 일정한 제복을 입고 칼을 차도록 명령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모든 민간단체를 해산시켰고, 어용신문사를 두어 군데만 두고 모든 일반 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리고 각급 학교에는 일본인 교사들만 배치시켜 일본어 교육과 일본 역사 교육을 강제로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총독은 YMCA만 해산시키지 못하고 은근히 강압정책을 펴기만 하였다. YMCA는 순수한 종교단체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압력을 가하지 못하고 조심성 있게 다루었던 것이다.

이때 이상재는 총무직을 윤치호에게 물려주고 뒤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하였다. 그러나 총무직을 수행하던 때보다 더욱 강연회, 토론회, 직업교육, 체육사업, 농촌사업, 음악회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날 강연회 때였다.
이날은 청중이 다른 때보다도 훨씬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일본 형사들도 그만큼 숫자가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단상에 오른 이상재는 곧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형사들은 자기들 신분을 철두철미하게 숨기려 했으나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상재는 느닷없이 청중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은 봄철이 아닌데도 어찌하여 여기에는 이처럼 개나리꽃이 많이 피었습니까?”
처음부터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내 장내는 웃음판으로 변하였고 형사들은 슬슬 꽁무니를 빼면서 문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형사들을 ‘개’라고 불렀고, 경찰은 ‘나리’라고 불렀다. 이런 연유로 이상재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이다. 이상재의 재치는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곤 하였다.

이상재는 체육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장거리 달리기 선수인 김홍식이라는 젊은이는 어느 날 거리에서 달리기 연습을 하다가 어떤 이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고 나서는 운동을 그만 두어 버렸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상재는 즉시 그를 찾아갔다.
“자네가 잘 달린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전차의 속도보다는 못하겠지.”
김홍식은 흥분하면서 소리쳤다. “선생님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전차보다 더 빠릅니다.”
“그럼 실제로 나하고 내기를 한 번 해 볼까?”
“문제없습니다. 얼마든지 내기하죠.”
이상재는 자기가 직접 전차를 타고서 김홍식과 내기 달리기 운동을 벌였다
“잘 뛴다. 정말 잘 뛰어.”
실제 전차를 앞서는 김홍식을 따라가면서 이상재는 그를 격려하였다.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

나라안에는 처음부터 매국노들이 많았지만 한일합방 이후로 변절한 자들도 많았고, 일본의 천황이 작위(벼슬,직위)를 내려주자 그것을 반가워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상재는 천황이 내려준 작위까지도 거절하였다.
조선 총독부가 한국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매수하러 드는 일은 때때로 있었다. 당시의 총독은 반일사상이 강한 이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소위 ‘일본 시찰단 파견’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의 발달한 모습을 보고는 그들이 마음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 이어서였다.
이상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시찰단은 여러 도시와 근대식학교, 새로운 문물들을 접하게 되었다 “와-” “정말 굉장하군.” “이렇게 엄청날 줄이야” 이런 탄성이 들릴 때마다 시찰단을 안내하던 일본 관리들은 어깨를 으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재는 시종 무표정이었다. 아니 어떤 때는 오히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쳐 가지고 하였다. ‘갑신정변이 성공하지 못한 아쉬움이 그의 뇌를 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찰단은 동경에 있는 큰 병기창과 군수공장을 구경하였다. 이곳 병기창은 일본 관리들이 시찰단에게 최대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날 밤 동경시장이 베푸는 환영 만찬 석에서 시찰단은 참석하였고, 각자 소감을 한마디씩 하게 되었다. 시찰단들은 거의가 일본을 찬양하는 말들이었다.
이상재 차례가 되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이상재를 주목했다.
“나는 오늘 병기창을 둘러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포와 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일본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알게 되었소.”
여기까지 듣던 일본 관리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상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정작 놀란 것은 사실 다른데 있었습니다. 성경을 펼쳐보면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일본의 수명은 그리 길 것 같지 않소이다.”
장내의 분위기는 온통 긴장됐다. 일본 관리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상재의 태도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고, 아니 도리어 더 당당하기만 하였다.

이상재는 동경에 있는 ‘조선인YMCA'에 들리어 ‘젊은이들을 여기서 만나고 보니 마치 부모를 잃은 불쌍한 고아들을 만난 것 같아 더욱 견딜 수 없었습니다. 세상 천지는 넓은데 우리는 조국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우리 어떻게 잃어버린 조국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민족정신을 호소하였다. 이상재의 일거일동은 민족혼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무저항 투쟁의 지도자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 얼마후의 일이었다.
매국노의 두목인 이완용은 조선 미술협회라는 것을 창립하고 그 창립식에 이상재를 초청하였다. 이상재는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그 초청에 응하였다.
식장에서 이상재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들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어허, 두 대감은 어서 동경으로 이사를 가야겠수다!”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그중 송병준이 대꾸하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님.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왜 동경으로 이사를 갑니까?”
“당신네 두 사람이 나라를 망치는 데는 다 같이 천재적인 두뇌를 지녔잖소, 그러기에 두 대감이 동경으로 이사를 가면 일본도 곧 망하고 말 것 아닙니까?”
그러자 두 사람은 금방 얼굴이 벌개지면서 어찔할 줄 몰랐다.

그후 어느 날 또 이상재는 일본헌병 사령관의 초청을 받고서 커다란 연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사령관은 인사를 나누다가 몇 번 기침을 콜록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난 요즘 감기가 걸려서 대단히 고생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내 기침소리를 좀 양해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이상재는 황당한 말로 답변했다.
“사령관님. 그 감기는 대포로 쏘아서 잡지 못하나요?”
“넷, 그게 무슨 말씀-”
“일본은 지금 대포 하나면 그 무엇도 해결치 못할 일이 없다는 태도던데 왜 그 감기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잖소.”
“하하하, 왜 내 말이 틀렸소?”
언중유골(言中有骨)이었다.

1919년 3월 1일 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무저항 정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당시에 헌신적인 기독교신자는 아니었으나 나에게서 기독교사상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신구약 성경을 즐겨 읽었고, 특히 외경을 읽다가 무저항 정신을 깨달았다.’
3■1운동의 방법을 무저항 투쟁으로 주장한 이는 이상재였다. 이 무저항 비폭력 만세 운동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류 역사상 영광된 사적을 남기게 되었다.
언제가 이상재는 <청년>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현대 세계의 정황을 보라.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군대가 자기 국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날카로운 창칼이 자기민족에게 활로를 열어 주고 있는가. 폭탄과 대포가 자기 겨레의 운명을 연장케 만들어주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서로 치게 되면 마지막날이 오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복음적 민족주의를 가르쳐

이상재는 1920년에 들어서면서 YMCA 명예총무직과 함께 전국 연합회 회장직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71살의 고령이었으나 정신력과 투지는 어느 젊은이 못지 않았다. 어느 날 총독부의 어용신문인 경성일보의 기자가 찾아와서 이상재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 무척 건강해 보이십니다. 일본의 오오구마 선생은 자신이 125살까지는 살 수 있다고 장담한 일이 있었고, 중국의 오정방 선생은 자신이 150살까지는 살 수 있다고 장담한 일이 있는데 월남 선생님은 몇 살까지나 살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사람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났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야지 왜 125살, 150살만 살고 죽어야겠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성경을 한번 읽어보시오. 거기엔 믿는 자는 죽어도 영원히 산다고 했거든. 내 몸은 늙었지만, 기독교 신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진리라오.”
“......”

이상재는 몹시도 젊은이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언제나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그가 YMCA의 총무직을 맡고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찾아와 두툼한 돈 봉투를 하나를 말없이 내밀었다.
“선생님께서 하도 냉방에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워 약간의 돈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으로 땔감과 양식을 좀 마련하십시오.”
‘오, 그래. 정말 고마우이. 그럼 잘 받겠네.“
이상재는 돈 봉투를 받아 깔고 있던 방석 밑에 넣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또 어떤 청년이 찾아왔다.
“사실은 좀 어려운 일이 생겨서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니?”
“제가 이번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고자 하는데- 여비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어떤 대책이 없을까 하고-”
‘나에게 물으러 왔다 그 말이지?“
“그렇습니다 ”
“그럼됐네.”
이상재는 그렇게 대꾸하고 방금 전에 받은 돈 봉투를 꺼내어 건네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여비를 하게나.”
“아니 선생님”
“염려 말게. 내가 미리 마련해 둔 거니까. 공부나 잘 하고 돌아오게.”
“예,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 청년은 몹시 감격하여 물러갔다. 이것을 본 돈 봉투를 가져왔던 청년이 난천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선생님, 그 돈을 주어버렸으니 무엇으로 땔감과 양식을 구하시렵니까?”
그러자 이상재는 태연히 대답하였다.
“돈은 우선 필요한 사람부터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또 가져다주겠지.”

그는 <청년>지 논설에 통해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호소한 바도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민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이는 마치 한 집에 자기의 부모와 형제가 사랑하는 법과 마찬가지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모르고 형제간의 우애를 모르고서야 어찌 인륜의 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기 민족을 사랑한다고 남의 민족을 배척하거나 다른 민족을 무자비하게 살상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오류이다. 무릇 한 민족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웃에 다른 많은 민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남이 있으므로써 나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민족의 존립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민족을 사랑하듯 다른 민족도 사랑해야 하고, 내 민족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다른 민족의 평화도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재의 민족주의는 아집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인류와 더불어 평화를 도모하면서 살기를 바라는, 자기를 넓게 개방하는 민족주의였다. 내가 살려면 남도 사랑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 그것이었다. 이런 그의 민족주의 정신은 예수님의 정신이기도 했다.
그는 마치 찔레나무에 장미를 접목해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워내듯 우리 고유의 민족주의에다 예수님의 정신을 접붙여 온 세계 인류와 더불어 평화를 누려야 된다는 복음적인 민족주의를 피워냈던 것이다.

그가 떠나던 날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전 국민은 좌절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상재는 이런 때일수록 젊은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신념이 더욱 강하에 타올라, 몇몇 동지들과 민립대학 설립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정부는 방해 공작을 폈고, 그 대안으로 경성대국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일본 정부가 경성제국 대학교 개교식을 가지게 되었을 때 뜻밖에 이상재에게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의 행동에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작 초청장을 받아 든 이상재의 태도는 달랐다.
“왜들 이러는 거요?”
“그럼 선생님께서는 이런 초청에 응하실 생각인가요?”
“초청장을 받았으면 당연히 가야지.”
“아니 선생님, 어떻게■.”
“어허, 모두들 눈앞의 일만 보지 말게나. 저 경성제국 대학교라는 것이 언젠가는 우리의 것이 되고 말 것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 대학교 개교식과 마찬가지라구.”
그때서야 주위 사람들은 이상재의 보이지 않는 신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방이후 그는 1922년5월에 일본의 YMCA에 예속되고 말았던 한국 YMCA를 독립시키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국제 YMCA 기구는 어디까지나 전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시키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YMCA만이 일본에 예속되어 정신적 자유를 박탈당하고있으니 어디 말이 됩니까. 그러니 당장 지금의 법조문을 고쳐야 합니다.”
그는 일본 대표들에게 이렇게 주장하여, 결국 한국의 YMCA는 더 이상 일본에 속박되지 않고 직접 국제기구와 상이하게 되었다. 그 당시 YMCA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한국의 유일한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상재가 중국 북경을 방문하고 있을 당시 그는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받게 되었다.
“선생님.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아예 망명해 버리십시오. 그리고 현재 우리 임시정부를 이끌어 갈 인물이 없는 형편이니 제발 우리를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재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하였다.
“안 될 일입니다. 나까지 조국에서 빠져나오면 안에서는 누가 일합니까. 국외에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에서 일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사실 이상재는 젊은이들에게 등대와도 같은 존재였다. YMCA를 완전히 독립시키고 난 이상재는 이때부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라’는 주제를 내걸고 전도 강연에 주력하였다.
“성경은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야 한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여 현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 세상일이 돈으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돈이 없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니 실업교육에 눈을 떠야 할 때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도덕성을 양육해야 하고, 인내심도 길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주셨던 분이다. 우리도 그런 정신을 배워서 실천해야 한다.”

1924년 이상재는 보이스카우트의 초대 총재가 되었고, 같은 해 <조선일보>사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처음부터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운영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으나 <조선일보>는 어떤 친일 단체의 지원을 받게 되어 민족신문으로서 구실을 제대로 못했다. 이런 일을 보다 못한 신석우, 최선익등이 나서서 조선일보를 인수한 다음 이상재를 사장에 추대하게 되었다.

그후 1927년에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이상재는 몸의 거동이 불편해 <조선일보>사장직을 내놓고 집에서 쉬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도 신간회 중심인물들이 찾아와서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였다.
“마음은 앞서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가만히 거처에 계시기만 해도 됩니다. 정신적으로 기둥만 되어주시면 모든 일은 우리가 다 할 것입니다.”
“정 그렇다면 내가 회장직을 맡지요. 우리 조국을 위하는 일인데 어찌 내 목숨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
신간회의 회장직을 맡긴 했으나 직접 나서서 일할 수는 없었다. 사실상 이때부터 이상재는 완전히 자리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그가 눕게 된 곳은 종로구에 있는 재동 자택이었으나 이것도 세 들어 사는 남의 집이었다. 그의 집이라곤 고향 한산에 있는 초가삼간뿐이었고, 죽기까지 자기 집 하나 없이 살았던 것이다.
그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문병객들이 찾아왔다. 어느 날은 종로 경찰서의 고등계 형사인 미와가 찾아왔다. 그는 당시 교활하고 악독한 형사라는 평판을 자자하게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상재의 인격에 감동하여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존경하였다.
“아버지,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래,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께서 이처럼 자리에 누워 계신데 자식이 어찌 찾아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 나 묶어 끌고 갈 쇠고랑은 가져왔느냐?”
이상재의 입에서 이것은 농담이 흘러나오자 미와도 걸맞은 대꾸를 하였다.
“오늘은 깜빡 잊고서 그만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다음 번에는 잊지 않고 가져오겠습니다”
“예끼 이놈아, 이젠 사람 좀 그만 괴롭혀라.”
“예, 이젠 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 내가 지옥에 가면 날 잡으려고 거기까지 네가 따라오겠느냐?”
“아버지로 모실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따라 가야죠.”
형사 미와는 이 말을 하면서 울먹이기까지 하였다.
이상재는 이때까지도 침략자 일본정부를 미워하고는 있었지만 일본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이상재의 유머감각은 자리에 누워서도 여전했다. 어느 날 번영로 등 몇 사람의 청년들이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선생님, 이제야 찾아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러자 이상재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꾸하였다.
“이놈들, 내가 죽었나 안 죽었나 보려고 왔느냐. 난 아직 멀쩡하다.”
그러더니 그는 눈시울을 적시며 청년들의 손을 차례로 뜨겁게 붙잡는 것이었다. 그후 변영로는 ‘이상재 선생님의 그 눈물을 평생 잊을 길이 없다’고 말하곤 하였다.

1927년 3월 29일
그 동안 조국의 독립과 청년운동, 곧 나라 잃은 젊은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이상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78살이었다.
이상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등은 즉시 이 사실을 전국에 알렸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저명인사들의 글로 지면을 채웠다. 그의 장례식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한 신문은 통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당시는 일본의 통치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온 겨레는 한 마음이 되어 성대한 사회장을 치루었다. 어느 나라의 국상도 그만큼 훌륭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였다. 1927년 4월 7일에 월남 선생의 유해는 선생의 고향인 충남 한산으로 모셔졌는데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군중이 선생의 영구를 따라 장안 대로를 행진하던 광경은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일본인들은 은근히 긴장을 하기도 했다.
장례식 광경 또한 장관이었다.
영구는 쌍두마차가 끌었는데 전국 각 계급이 유지 대표자 800명이 그 영구를 호위하면서 따랐고, 행렬의 맨 선두에는 기마에 오른 경호부장이 앞서고, 그 뒤에는 선생의 영정을 모신 소년 군이 따랐으며, 영구 뒤로는 소년 척후대(보이스카우트 전신)가 각종 악기로 조가를 연주하면서 따랐다. 그리고 그 뒤로는 남녀 학생 3천명이 행렬을 지어 따랐고, 그 다음에는 200개의 조기와 300개의 만장대가 따랐으며, 그 뒤로는 무수한 일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게다가 마지막 가는 이상재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려고 연도를 꽉 메움 인파가 10만 명을 훨씬 넘었으니 이 얼마나 장엄한 장례식이었겠는가. 또 영구를 모신 특별 열차가 서울역에서 군사까지 가는 동안 정거장마다 애도의 물결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하였으니 이상재 선생의 죽음은 정녕 전체 민족의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할 것이다.
심지어 일본 정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문>도 이상재의 장례식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이상재 선생이 묻히던 날 조선 민족은 온통 흐느껴 울었는데 이런 일로 미루어 그는 민중의 진정한 벗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