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의 고향은 충청남도 한산군 북부면 종지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명은 옛것이며, 지금은 이와 같지 않다.
오늘날 행정상으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로 개편되었다.
한산면 종지리에 남아 있던 선생의 생가는 외솔회가 1972년에 발행한 <나라사랑> 제 9집의 특집 연보에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선생은 나이 열다섯이 되던 해에 강릉 유씨와 한산에서 결혼하여 사림을 차렸으나 열여덟 살 때부터 서울의 박정양 댁에 식객으로 머물렀으므로 한산 고향에는 별다른 삶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산읍에서 3리쯤 떨어진 곳에 보일 듯 말 듯 봉서암(鳳棲庵)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암자가 이상재 선생이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3동(三冬)이나 머무른 곳이라고 사람들이 일러 준다. 고색 창연한 암자가 아니고 작고 아늑한 암자이다.
나이 열여덟에 고향을 떠난 뒤 서른다섯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우정국 주사 자리를 내던지고 다시 찾아오기까지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향을 지킨 것은 부인과 큰아들, 둘째아들, 그리고 셋재 아들이다. 열아홉에 장자 승윤, 스물둘에 차남 승인, 스물다섯에 3남 승간, 서른여덟에 4남 승준을 낳았고, 부인 유씨는 4형제를 혼자 기르다시피 하였다. 이상재 선생이 쉰여덟이던 해에 부인 강릉 유씨가 세상을 떠나고 또 큰아들 승윤도 잃는다. 그 대신 같은 해에 둘째 아들 승인에게서 손자가 태어났는데, 이분이 뒷날 한국절력 사장을 지낸 이홍직 씨다.
그리고 이상재 선생의 모습은 서울 종로 3가 종묘 공원 앞뜰에 놓은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다.
YMCA는 해마다 선생의 기일인 3월 29일에 이 동상 앞에서 추모의 모임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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