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부(장관 : 남궁 진)는 3월의 문화인물로 독립운동가이자 시민운동가로 YMCA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제치하 고도의 해학과 기지로 우리 겨레에게 희망을 주어 후련한 마음을 가지게 한 이상재 선생을 선정하고,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거리캠페인(3.9), 역사학자와 함께 하는 독립운동유적지답사(3.24), 월남 청소년 지도력 캠프(3.30∼31) 등의 기념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이상재(月南 李商在 : 1850-1927) : 독립운동가, 시민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YMCA에서 민족운동 전개, 일제치하 해학과 기지로 한국인의 정신고양
1850년 충남 서산에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6대 손으로 출생한 이상재는 1881년 박정양이 이끄는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에 가면서부터 정치계에 발을 드려 놓게 된다. 특히 그는 개화 독립운동에 앞장서 1897년부터 독립협회를 윤치호와 같은 여러 신진인사들과 함께 조직하고, 토론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주권 사수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3년여의 옥고를 치르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일생의 일대 전환기가 된다. 거기서 그는 선교사들이 차입한 기독교 서적을 읽고,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출옥이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들어가 한국인 지도자로 그 일생을 보내고, 만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일하며, 동시에 1927년 2월 좌우 일치의 신간회를 조직할 때 그 회장으로 피선된다. 하지만 한 달 후인 1927년 3월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55세의 나이로 YMCA에 들어가 그의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며, 젊은이들에게 불타는 민족애와 신앙을 심어 주어 민족의 미래를 기약하여 나갔다. 그는 YMCA활동을 통하여 민영환과 같은 상류층의 애국지사들과 이승만이나 윤치호와 같은 신진 지식인들이 와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하였다.
더구나 그는 고도의 해학(諧謔)으로 일제 압제하의 우리 겨레에게 희망과 웃음을 주어 후련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지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제 고관, 가령 이등박문(伊藤博文)과 같은 사람들 앞에서도 신랄(辛辣)할 정도의 해학을 서슴치 않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민(四民) 사상을 혁신하는 교육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곧 YMCA에서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직업의 소중함을 알게 하여 한국 근대화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음악과 체육을 가르쳐서 한국인의 생활에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인간상을 실천해 나가도록 하였다.
그는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한 일이 있으며, 일본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조선일보가 강력한 민족지로서 출발하게 하기 위해서 조선일보 사장을 맡았던 일도 있다.
하지만 그의 가장 거대한 공적은 그가 서거하기 한달 전에 양단 된 국내독립운동의 2대 계파(사회주의 계와 민족주의 계)를 단일하게 묶는 신간회 회장을 맡았던 일이다. 그가 회장을 맡았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양대 계파가 다 같이 존경하고 추앙할 수 있는 지도자가 이상재, 그 사람밖에는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는 이처럼 일제 하 우리 겨레의 참다운 민족의 지도자로서 맑고 깨끗하고 웅대한 겨레의 얼과 정신을 드높이고 서로가 사상이 다르고 신념이 다를지라도 한 마음으로 손잡고 나아가게 한 우리 현대사의 가장 존경할 만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3월의 문화인물 "월남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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