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걸쳐 한국 개신교가 배출한 가장 대중적인 민족인사였다. 그는 일찍이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견학했으며 1887년에는 초대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미국문화를 직접 목격했다. 그후 한국에 돌아와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물론 이상재 선생도 발전한 서구문명의 배후에는 기독교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오병이어나 부활 같은 기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만들었을 때 그는 독립협회를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이끌어가려고 생각했다. 여기에 이상재는 반대했다.
이상재는 1902년 6월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친러내각에 의해서 조작된 역모사건에 휘말려서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다. 당시의 감옥의 상황은 비참하였다. 같은 해 8월에 괴질이 돌아서 하루에 6∼7명씩 죽어나갔다. 당시 감옥에는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전도를 하고 있었으며 감옥에는 이미 신자가 된 이승만 등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상재가 갈등을 끝내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1903년 어느 날 체험한 신비스러운 경험 때문이었다. YMCA의 브로크만은 이렇게 전한다. “이상재는 당시 자신의 생애에 아주 낯선 체험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대한 왕의 사자’가 자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몇 년 전 당신이 워싱턴에 갔을 때 성경을 주어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그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것이 첫번째 죄이다. 또 나는 그대가 독립협회에 있을 때에도 기회를 주었지만 당신은 반항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 까지도 방해를 하였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막았으니 이것이 더욱 큰 죄이다. 나는 그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감옥에 두었는데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지금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것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이상재는 주님을 믿게 되었고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박명수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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