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183

忠南 韓山으로 유해가 운구되는 700리 길가에는 120여 단체 회원들이 나와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조선일보 80년사)

신간회가 창립된 지 한 달쯤 지나서 李商在 사장이 老患으로 자리에 누웠다. 부득이 3월 25일에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5대 사장은 신석우 부사장이 맡아 같은 날 취임했다. 이상재 전 사장은 사임 나흘 만인 1927년 3월 29일에 78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국내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조선일보 사장..

인간의 크기에있어서 감히 월남 이상재 선생을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 (김동길)

구한국 말로부터 일제에 이르는 반세기 가까운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매력 있는 지도자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월남 이상재를 택할 것이다. 학식으로는 그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그보다 더 출세한 사람, 유명해진 사람이 수두룩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크기에 있어서..

일본 의회 정치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키오가 남긴 월남 이상재선생 기록..

일본인 오자키 유키오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오자키는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로서 일본 '의회정치의 아버지'로 불렸고 25번이나 중의원 의원을 지낸, 당시 일본 정가의 양심으로도 통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오자키는 당시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을 두루 방문하던 중 월남 선생을 만나보고 ..

윤치호가 창씨개명하자 민족지도자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그의 집 앞에다가 ‘분(糞)’을 한무더기 실례해 놓았다

[한국야구사의 이색 인물]친일파의 거두 윤치호 [폭탄뉴스.com 2005-02-18 16:38:00] 윤치호는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지배할 당시 민족지도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됐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석방됐던 윤치호는 1915년 3월14일치 <매일신보>에 실린..

1957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0.26~1927.3.29) 묘비가 세워지다. (경기도 양주)

1957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종교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0.26~1927.3.29) 묘비가 세워지다. 정부 요인과 각계 각층의 명사들이 묘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력한 결과, 이상재가 세상을 뜬지 30여 년만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 묘소에서 묘비가 제막되었다.

월남 이상재선생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모시려 했으나 ....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 창설회장, 1922년에는 중국 북경에서 열린 세계 학생Y 연맹(WSCF) 세계대회에 한국대표단장, 1923년에는 연합소년척후단(오늘의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 1925년에는 제1회 전국기자대회의 명사회자로 좌우 격돌로 해산 직전의 위기를 수습, 1927년에는 소..

청년들과 어울려 장기을 두던 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선생

선생이 어느 날 청년들과 어울려 장기를 두고 있는데, 마침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와 그 모습을 보고 한 마디했다. “여보게, 젊은 사람들과 너무 실없이 어울리면 젊은이들의 버릇이 나빠져.” 그러자 선생이 이렇게 대꾸했다. “여보게, 그래도 내가 젊은이가 되어야지, 젊은이에게 노인이 되라고 한단..

이등방문까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게한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독설

월남 이상재가 기독교 대표로 일본을 시찰했을 때의 일화다. 일본은 시찰단을 거대한 병기창으로 안내했다. 그러더니 환영행사까지 열었다. 이상재의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마침 어떤 사람이 병기창을 둘러본 소감을 물었다. 이상재는 거침없이 한마디했다.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병기창을 보았더..

월남 이상재 선생은 1927년 줄곧 병석에 누워있다 그해 3월 25일 사임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 세상을 떠났다.

월남 이상재 흙 한줌, 풀 한포기엔들 역사의 숨결이 남아있지 않으랴. 근대의 여명을 열고 왜정(倭政)의 풍상을 견딘 조선일보의 오늘 지면도 매한가지리라. 일제강점기, 조선일보는 당대 최고 지식인·문인·사회주의들이 한데 어울려 신세계를 향한 희망과 열정의 사자후를 토해낸 에너지의 원천이..

월남 이상재선생과 일제 조선군 사령관 우도궁과의 대화

이상재 선생 초상화 어둡던 시절 민중의 계몽에 참여하시기 위하여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시고, 일 제 시대에 굽힘 없는 자신의 표현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지 않았나? 일제 시대 조선군 사령관 '우도궁(宇都宮)'이 명사(名士)를 초대하여 연회를 베푼 일이 있었다. 월남 선생도 기독교 청년회를 대표..

고종 황제 앞에서 사령장 보따리를 태워버린 월남 이상재선생

“ 高宗황제가 아라사 공관에 피신하고 있었다. 친로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셈이었다. 나라 일이 정동 골목에서 집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선생은 참찬이라는 벼슬자리에 있어 고종을 뵈려고 아라사 공관으로 갔다. 그러한 난중에도 나인(궁녀)들은 자줏빛 보자기에 싼 것을 고종 앞에 갖다 놓으니, ..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월남 이상재선생과 젊은이들과의 대화

월남은 독립협회 사건과 3.1만세 사건으로 두 차례나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선생이 감옥에서 풀려나던 날, 청년들이 달려와 문안을 드렸다. "선생님,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월남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러는 젊은이들 손을 어루만지며, "그럼 자네들은 바깥에서 호강하며 지냈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