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南 韓山으로 유해가 운구되는 700리 길가에는 120여 단체 회원들이 나와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조선일보 80년사) 신간회가 창립된 지 한 달쯤 지나서 李商在 사장이 老患으로 자리에 누웠다. 부득이 3월 25일에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5대 사장은 신석우 부사장이 맡아 같은 날 취임했다. 이상재 전 사장은 사임 나흘 만인 1927년 3월 29일에 78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국내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조선일보 사장.. ▒ 월남이상재 ▒ 2007.04.05
인간의 크기에있어서 감히 월남 이상재 선생을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 (김동길) 구한국 말로부터 일제에 이르는 반세기 가까운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매력 있는 지도자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월남 이상재를 택할 것이다. 학식으로는 그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그보다 더 출세한 사람, 유명해진 사람이 수두룩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크기에 있어서.. ▒ 월남이상재 ▒ 2007.04.05
1927년 봄, 월남 서거시 조선일보 기사 (1927.3.30) <1927.3.30 조선일보 기사> 이상재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께서 가시니 이 나라는 어디서 의로움을 찾으며 이 백성은 어디서 스승을 구하겠는가! 오직 덕스러움을 지니신 어른으로 선생을 생각하니 우리는 그의 업적을 들추려하지 않고 그의 사상을 따지려하지 않는다. 파란이 중첩했던 민.. ▒ 월남이상재 ▒ 2007.04.05
월남 이상재 선생, 배재학당 졸업식 축사에서... 어느해 월남 이상재(1850-1927)선생의 손자가 배재학당을 졸업하게 되어 월남 선생도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내빈과 학부형들이 졸업 식 축사를 하는데, 총독과 도지사 대리로 나온 조선인 관리 두명이 모두 축사를 일본어로 낭독하였다. 이제 월남 선생의 차례가 되어 월남 선생이 단상에 올랐다. ".. ▒ 월남이상재 ▒ 2007.04.05
일본 의회 정치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키오가 남긴 월남 이상재선생 기록.. 일본인 오자키 유키오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오자키는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로서 일본 '의회정치의 아버지'로 불렸고 25번이나 중의원 의원을 지낸, 당시 일본 정가의 양심으로도 통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오자키는 당시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을 두루 방문하던 중 월남 선생을 만나보고 .. ▒ 월남이상재 ▒ 2007.04.05
월남 이상재 선생의 활동과 그가 남긴 교훈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독립협회 활동과 회심 1896년 7월 2일에는 서재필과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가 창설된다. 이 협회는 구미형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일종의 근대화 운동의 하나였다. 이 협회를 지탱하고 있는 사상의 축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기독교신앙과 민주.. ▒ 월남이상재 ▒ 2007.04.05
윤치호가 창씨개명하자 민족지도자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그의 집 앞에다가 ‘분(糞)’을 한무더기 실례해 놓았다 [한국야구사의 이색 인물]친일파의 거두 윤치호 [폭탄뉴스.com 2005-02-18 16:38:00] 윤치호는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지배할 당시 민족지도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됐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석방됐던 윤치호는 1915년 3월14일치 <매일신보>에 실린..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 선생...나는 영원한 젊은이다... ‘나는 영원한 젊은이다. 그것은 이 나라를 생각하는 감정이 늘 내 마음을 적시기 때문이다.’ -월남 이상재-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 선생과 신흥우와의 일화 월남 이상재 선생이 YMCA 총무로 있을 때 신흥우와 함께 강연차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주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신흥우가 먼저 등단하여 월남 선생을 소개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돌아가신 명사들만 존경하고, 숭상하고, 찬양할 것이 아니라 현재 생존해있는 위인을 더 존경하고 .. ▒ 월남이상재 ▒ 2007.03.22
1957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0.26~1927.3.29) 묘비가 세워지다. (경기도 양주) 1957 독립운동가&#8228;사회운동가&#8228;종교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0.26~1927.3.29) 묘비가 세워지다. 정부 요인과 각계 각층의 명사들이 묘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력한 결과, 이상재가 세상을 뜬지 30여 년만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 묘소에서 묘비가 제막되었다. ▒ 월남이상재 ▒ 2007.03.22
[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문 열어 [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문 열어 기독교청년회(YMCA)는 오는 30일 서울기독교청년회 종로회관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아 각종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부설 `월남시민문화연구소'의 문을 연다. 연구소장은 연세대 신과대 교수가 맡는다. 기독교청년회는 “월남은 신간회 활동을 통해 항일운..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선생 유품 도난 이상재선생 유품 도난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의 유품과 공주 갑사의 탱화 등이 잇따라 도난당해 경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 23일 충남 서천경찰서에 따르면 이상재 선생의 손자 은직(64)씨가 이날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355 이상재 선생 유물관에 보관중이던 유품 11점이 없어졌다고 신고해왔..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본 YMCA초청 만찬에서... 1911년 민족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일본 YMCA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일본의 속셈은 선생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꿈을 버리게 하는데 있었다. 선생은 식사 후 총리대신 등 일본의 정치인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일본이 강대국이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할지 .. ▒ 월남이상재 ▒ 2007.03.22
박건호님이 지은 '월남 이상재 선생님' 가사 1. 총칼로는 안된다 힘으로도 안된다 침략자는 무릎을 꿇어라 용기와 신념으로 본을 보이신 월남 이상재 선생님 젊은이여 너희는 나라의 기둥 힘써 배우고 익혀 배우고 익혀 뜻을 펼쳐라 어둠 속에 헤매는 가슴에 굳센 의지 심어 주셨네 깨어라 이땅의 청년들아 외치는 월남 선생님 2. 개나리 꽃 보인다.. ▒ 월남이상재 ▒ 2007.03.22
萬事無求源理外 一心自在不言中 월남 이상재 선생 萬事無求源理外 一心自在不言中 온갖 일 원리 밖에서 찾지 마시오 한 마음 말 않는 속에 절로 있나니... 이상재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은 이완용과 만난 자리에서... 민충정공이 자결한 곳에서 혈죽이 솟아났다는 말이 파다했을 때 월남은 이완용과 만난 자리에서, 대감이 죽은 자리에서는 뺑대쑥이 날거요, 하여 파랗게 질리게 하였다 이렇게 의를 꺾고 이에 부합하는 것을 증오하던 월남정신은 우리들 곁에서 영원히 빛날것이다.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 선생의 호떡론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1850~1927)가 시국 강연회를 열었을 때 일이다. 장내는 청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연단 옆에는 제복을 입은 종로 경찰서 고등 계 주임이 칼을 짚고 앉아 있었다. 월남은 연단에 올라가자 큰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시작하기 전에 지금 내가 보고 온 이야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장.. ▒ 월남이상재 ▒ 2007.03.22
시간의 소중함을 말하시든 월남 이상재선생 월남 이상재 선생이 나이 60이 되엇을 때에 영어 단어를 열심히외웠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한 중학생이 '선생님 나이가 60이 되셨는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사신다고 그렇게 영어 단어를 열심히 암송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선생께서 '그야 써먹으려고 외우는 거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본식 코풀기 월남 선생이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맞은 편 자리에 있던 일본 형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죠센시끼데 하나오 간데야로!(朝鮮式で はなをかんでやろう! 조선 식으로 코를 풀어 보자!) 하더니 집게손가락으로 콧구멍 하나를 막고 이쪽 저쪽으로 팽팽 하고 코를 푸는 것이었다. 이 소..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 선생 일본인 형사에게 일갈.... 종로서의 담당형사가 오랫동안 선생이 두문 불출하니, 혹시 독립운동할려고 만주나 몰래 간 것인지 와병중인지 알길이 없어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실은 선생이 와병중인것을 확인하고 일어 설려고 하니 선생이 갑짜기 일본 형사의 소매자락을 끌어 댕기며 "이 놈아! 가긴 어딜가! 네가 살아 생전..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선생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모시려 했으나 ....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 창설회장, 1922년에는 중국 북경에서 열린 세계 학생Y 연맹(WSCF) 세계대회에 한국대표단장, 1923년에는 연합소년척후단(오늘의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 1925년에는 제1회 전국기자대회의 명사회자로 좌우 격돌로 해산 직전의 위기를 수습, 1927년에는 소.. ▒ 월남이상재 ▒ 2007.03.22
청년들과 어울려 장기을 두던 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선생 선생이 어느 날 청년들과 어울려 장기를 두고 있는데, 마침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와 그 모습을 보고 한 마디했다. “여보게, 젊은 사람들과 너무 실없이 어울리면 젊은이들의 버릇이 나빠져.” 그러자 선생이 이렇게 대꾸했다. “여보게, 그래도 내가 젊은이가 되어야지, 젊은이에게 노인이 되라고 한단.. ▒ 월남이상재 ▒ 2007.03.22
청빈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 월남 이상재 선생님은 80평생을 청빈하게 사셨다. 그는 일생을 집 한 칸 없을 정도로 물질에는 욕심이 없었다. 일본 고위층이 엄청난 돈으로 유혹했어도 거절했다. 이상재 선생님이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선생님 댁을 찾아왔다. 그때가 바로 추운 겨울이었는데 ..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 선생과 일본인 국회의원과의 대화 어느 날 일본인 국회의원이 선생에게 물었다. “한일 합방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것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요? 당신도 역시 좋다고 생각하시오?” 그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반문하자 선생이 대답했다. “만일 내가 좋지 않다고 한들 당신네들이 합병을 취소할 리도 만무하.. ▒ 월남이상재 ▒ 2007.03.22
이등방문까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게한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독설 월남 이상재가 기독교 대표로 일본을 시찰했을 때의 일화다. 일본은 시찰단을 거대한 병기창으로 안내했다. 그러더니 환영행사까지 열었다. 이상재의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마침 어떤 사람이 병기창을 둘러본 소감을 물었다. 이상재는 거침없이 한마디했다.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병기창을 보았더..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 선생은 1927년 줄곧 병석에 누워있다 그해 3월 25일 사임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 세상을 떠났다. 월남 이상재 흙 한줌, 풀 한포기엔들 역사의 숨결이 남아있지 않으랴. 근대의 여명을 열고 왜정(倭政)의 풍상을 견딘 조선일보의 오늘 지면도 매한가지리라. 일제강점기, 조선일보는 당대 최고 지식인·문인·사회주의들이 한데 어울려 신세계를 향한 희망과 열정의 사자후를 토해낸 에너지의 원천이.. ▒ 월남이상재 ▒ 2007.03.22
월남 이상재선생과 일제 조선군 사령관 우도궁과의 대화 이상재 선생 초상화 어둡던 시절 민중의 계몽에 참여하시기 위하여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시고, 일 제 시대에 굽힘 없는 자신의 표현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지 않았나? 일제 시대 조선군 사령관 '우도궁(宇都宮)'이 명사(名士)를 초대하여 연회를 베푼 일이 있었다. 월남 선생도 기독교 청년회를 대표.. ▒ 월남이상재 ▒ 2007.03.22
김구선생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의로운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 의에 맞지 않는 일은 국왕까지도 무서워하지 않고 반대하는 그런 무서운 분이었습니다."라고 .... ▒ 월남이상재 ▒ 2007.03.22
고종 황제 앞에서 사령장 보따리를 태워버린 월남 이상재선생 “ 高宗황제가 아라사 공관에 피신하고 있었다. 친로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셈이었다. 나라 일이 정동 골목에서 집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선생은 참찬이라는 벼슬자리에 있어 고종을 뵈려고 아라사 공관으로 갔다. 그러한 난중에도 나인(궁녀)들은 자줏빛 보자기에 싼 것을 고종 앞에 갖다 놓으니, .. ▒ 월남이상재 ▒ 2007.03.22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월남 이상재선생과 젊은이들과의 대화 월남은 독립협회 사건과 3.1만세 사건으로 두 차례나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선생이 감옥에서 풀려나던 날, 청년들이 달려와 문안을 드렸다. "선생님,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월남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러는 젊은이들 손을 어루만지며, "그럼 자네들은 바깥에서 호강하며 지냈나?" 하고.. ▒ 월남이상재 ▒ 2007.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