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윤치호가 창씨개명하자 민족지도자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그의 집 앞에다가 ‘분(糞)’을 한무더기 실례해 놓았다

천하한량 2007. 3. 22. 05:56
[한국야구사의 이색 인물]친일파의 거두 윤치호
[폭탄뉴스.com 2005-02-18 16:38:00]

윤치호는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지배할 당시 민족지도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됐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석방됐던 윤치호는 1915년 3월14일치 <매일신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우리 조선민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 이라고 공개 선언하는 등 그 때부터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시작했다.

 

독립협회 운동이 절정기에 달했던 1898년께 윤치호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하는 등 근대 민족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친일파 99인> 가운데서 발췌

철저하게 변절했던 그는 선친 윤웅렬의 뒤를 이어 일제로부터 남작의 지위를 물려받았고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적극 동조, 부역하는 등 이토 치카우(伊東致昊)로 창씨개명해서 살다가 갔다.

 

윤치호가 창씨개명하자 민족지도자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그의 집 앞에다가 ‘분(糞)’을 한무더기 실례해 놓았다는 길거리의 얘기도 있었다.

누군가 이상재 선생에게 그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묻자 윤치호의 창씨개명의 발음(이동→이똥)에 빗대 “그가 바로 이 똥이다”라고 비웃었다는 말이 전해내려 온다.

 

그야 어쨋든 윤치호는 1928년 5월18일에 열린 제 9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시구자로 나섰다.

옛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시구를 하는 장면이 한국야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야구사>에 실려 있다.

홍윤표 기자 chuam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