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활동과 회심
1896년 7월 2일에는 서재필과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가 창설된다. 이 협회는 구미형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일종의 근대화 운동의 하나였다. 이 협회를 지탱하고 있는 사상의 축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기독교신앙과 민주주의일 것이다. 관료중심적인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시민계층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내지는 안으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독립협회는 1897년 8월 29일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에 독립관(모화관을 개수하여 1897년 5월 23일 완공)에서 정기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월남은 이 토론회에서 독립협회 지명토론자로 참석하게 되었다. 1898년 3월 10일에는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최초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의정부 참정대신 박정양 이하 십여 명의 정부고관들과 각 사회단체와 학생, 일반시민, 상인과 하류계층 사람들 수천 명이 참가하였다. 이러한 만민공동회에서 월남은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개최된 만민공동회에서는 국정개혁을 위한 6개조의 헌의안을 결의하여 정부에 제출하였는데, 개혁파 정부는 중추원신관제(의회설립법)를 11월 2일 고종황제의 재가를 얻어 11월 4일 공포하였다. 이에 반발한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며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부대신에 이상재 그리고, 그 밖의 각부대신에 독립협회 간부들을 임명하려 한다고 모함을 하였다. 이에 고종황제는 이상재를 비롯한 독립협회 간부를 구속하고 독립협회를 혁파하라는 조칙을 내리게 되었다. 월남은 이 일로 인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감옥 안에서 월남은 청년 이승만과 신흥우, 김정식 등을 만나게 된다. 이들 감옥동지들은 선교사들이 차입해 준 성경과 각종 서적을 가지고 "감옥문고"를 만들어 번갈아 읽었다. 월남도 이 시기에 성경을 진지하게 읽게 되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특히 산상수훈 속에서 기독교가 진정한 관용과 박애정신이 충만한 종교임을 깨닫고 감탄하였다. 그러다가 요한복음을 대하게 되면서 생명의 말씀을 가슴 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54세의 나이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를 통한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감 3년 만에 석방이 되자마자 감옥동지들과 함께 게일이 창립한 연못골 예배당(오늘날 연동교회)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기독청년회(YMCA) 활동
헐버트는 직접선교 대신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 YMCA, 즉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였다. 월남은 이 단체야말로 자신이 평생 몸담아 일해야 할 단체라 여기고 이에 가입하였으며 한국의 모든 청년들을 다 청년회원으로 삼아 범민족적인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1905년은 참으로 가슴아프고 뼈저린 해였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우리 나라에 대하여 을사보호조약을 강제적으로 체결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민영환이 자결하고 월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박정양이 분사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월남 역시 자결의 길을 택하고자 하였다. 스승과 동지들이 자결을 하고 각처에서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끊는 이 마당에 혼자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YMCA 동료들의 간곡한 만류와 감시로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국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다. 이 때부터 확연히 변화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즉 충신의 모습에서 순교자의 모습으로, 개혁가의 모습에서 예언자의 모습으로의 변화였다.
월남은 영(Spirit)·지(Mind)·체(Body)의 삼육정신에 입각하여 지육사업과 영육사업을 개척했고, 잇달아 체육사업을 개척해 나갔다. 언제나 청년들과 회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과 장기도 같이 두고, 놀기도 같이했다. 하루는 월남의 친구 한 사람이 월남이 늘상 청년들과 함께 놀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눈에 거슬려서 젊은이들과 격 없이 지내다 보면 버릇이 나빠지지 않겠는가 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월남은 정색을 하면서 "내가 청년이 되야지, 청년들더러 노인이 되라고 해서야 되겠는가?"라며 이야기했다고 한다.
3·1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월남은 3·1운동의 무저항 비폭력의 운동방법을 제시했으며, 천도교측과 협의하여 함께 일을 추진하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월남은 3·1운동 직후 구금되었다가 6월에 석방되었는데, 일본 검찰관의 심문에서 3·1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운동은 누가 먼저 시작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2천만 민족이 다같이 시작했다."고 하였고, "구체적으로 말하라."는 질문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지시로 했다."고 말하였다. "당신이 한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는 "나도 했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월남이 바라보는 3·1운동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2천만 민족이 다함께 참여한 운동이었다.
이후 월남은 1922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WSCF 세계대회 한국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가 상해 임정의 인사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월남에게 상해 임정에 참여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망명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월남은 자신까지 조국을 빠져나가면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불쌍하지 않겠느냐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월남은 귀국하여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여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을 빼놓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이유였다. 일제의 방해로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으나 월남은 이에 굴하지 않고, 물산장려운동, 도서출판 창문사의 설립과 기독교 문서선교 및 문화운동, 농촌운동 등을 지도하며 전개해 나갔다.
그가 남긴 교훈
월남이 쓴 논설 "청년이여"를 보면, 월남의 청년에 대한 애절한 호소와 함께 그의 운동정신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는 청년의 무대요 이 세계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청년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혁명의 시대인데, 그것은 과거의 혁명이 아니요, 미래의 혁명인즉, 미래의 혁명은 바로 청년에게 그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혁신이라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다. 바로 정신의 혁명, 정의와 인도의 구현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월남 선생의 생각을 접하면서 참으로 큰 어른이시며, 영원한 청년이신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상재 선생의 조국에 대한 희망의 중심에는 기독교와 청년이 있었다. 기독교와 청년에 의하여 이 세상은 언제나 새롭게 변혁되고 바른 기초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은 사실 정신과 영의 문제이며, 개혁의 참된 실현은 밖이 아니라 안을 새롭게 하는 데 달려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통찰하였던 것이다.
청년이 자신을 수양하고 준비한 만큼 우리의 내일에 소망이 있을 것이다. 정신을 개혁하고 진실을 추구하며 사랑으로 행하는 그들에 의하여 우리의 내일이 열릴 것이다. 결국 이 세계는, 즉 우리 민족과 인류사회는 예수의 제자 된 기독교 청년들을 고대하고 이들에 의하여 개혁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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