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
일제강점기, 조선일보는 당대 최고 지식인·문인·사회주의들이 한데 어울려 신세계를 향한 희망과 열정의 사자후를 토해낸 에너지의 원천이자 분출구였다. 울분과 헐벗음 속에서도 신문을 끝내 지켰던 그들은 어두운 현실에서도 기개와 낭만을 잃지 않았다.
최근 발간된 ‘조선일보 사람들’(조선일보 사료연구실 지음, 랜덤하우스중앙)은 그들의 업적보다 인물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시대를 복원한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닷컴은 일제시대·광복이후 두 편으로 나온 책에서 열정과 풍류로 살아간 인물들을 골라 주요 장면을 발췌, ‘조선일보 인물 열전’을 연재한다. 그 첫편은 조선일보 제4대 사장을 역임한 민족지도자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 편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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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은 1924년 30세 나이로 조선일보를 인수한 신석우(申錫雨·1894~1953)의 권유로 고사 끝에 사장 직을 맡았다. “동아일보와 서로 경쟁하지 말고 합심해 민족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사장 제의 수락을 위한 조건이었다고 한다.(신석우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1919년 4월10일 임시정추 첫 의정원 회의에서 ‘대한’을 국호로 제안했고 광복 후엔 초대 대만 대사로 부임했다.)
그 시절에도 ‘파업’은 있었다. 경영난과 체임을 이유로 공무국 직원들이 파업을 벌이자, 월남은 “밥 한끼 못 먹어 죽는 일 없지만 신문은 하루도 쉬어선 안 된다”고 했고, 그 말 한마디에 직원들이 파업을 풀었다고 한다.
“송편은 먹었는가?” 월남은 어느 해 추석 편집국 기자들과 임원들에게 같은 질문을 따로 했다고 한다. 기자들은 “(송편은 커녕) 월급이나 받았으면 좋겠다”, 간부들은 “먹었다”고 답했고, 월남은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1926년 봄 손자 이홍직(1930년 조선일보에 공채1기로 들어온 기자)의 배재고 졸업식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축사를 부탁받자, “여러분 조선말 들을 줄 아시우? 나는 일본말을 몰라 조선말로 한마디 하겠고”라고 말해 좌중을 웃겻고, 앞서 일본어로 축사를 대독한 조선인 관리 두 명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월남은 1927년 줄곧 병석에 누워있다 그해 3월 25일 사임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이 치러졌고, 장의위원장은 독립협회장을 지낸 윤치호가 맡았다.
당시 경성 인구의 3분의 1인 10만명이 운구가 지나는 종로에서 경성역까지 나와 ‘겨레의 사표(師表)’가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선산인 충남 한산으로 가는 도중 군산에서는 그곳 차부(車夫)들이 자진 휴업해 조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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