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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창립된 신간회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추대

신간회 창립 1927년 당시 좌우익의 민족인사들이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위해 결성한 신간회에 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이념을 초월해 이미 광범위한 민족적 신망을 얻고 있던 선생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미처 신간회의 활성화와 조국독립의 날을 보지못한채 서거했..

70고령에도 “일제에 항거”외친「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선생

▲ 월남 이상재선생 연설장면 1902년에는 소위 개혁당 사건으로 2년여의 옥중생활을 했으나 출옥후 곧바로 일제에 저항하는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활동을 비롯, YMCA를 통한 청년계몽, 일본기독청년회의 국내침투저지, 국내청년종교단체 친목회 조직,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창립 등 왕성한 저..

1896년 7월 월남 이상재선생은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 독립협회 회원들 ▲ 독립문 ▲ 독립신문 1896년 7월 선생은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 간립 독립신문 발간 등을 통해 국민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한 고종의 환궁을 강력히 촉구 해 이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이어 서울종로에서 ..

월남 이상재선생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 판견시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시찰

신사유람단 수행 1881년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선생은 단장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 개화사상을 갖게 된 것이 다. 이후 선생은 우정국 주사(郵政局 主事)를 거쳐 주미(駐美) 서기관 등을 역임하며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기위해 관계 에 몸을 담는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

해학과 풍자를 지닌 참다운 레지스탕스 월남 이상재선생.그는 민중의 영원한 반려...

월남 이상재선생은 구원(久遠)의 청소년으로서, 해학과 풍자를 지닌 참다운 레지스탕스로서, 그리고 긴 안목의 소유자이며 애국으로 일관한 청빈한 시민이었다. 또한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는 불요불급의 의지인이요, 독실한 신앙인이기도 했다. 월남을「민중의 영원한 반려」라는 짧은 한마디로 요..

월남 이상재선생 1927년 3월 29일 서울의 한 구석에서 78세로 생을 마감하다

풍운의 한말(韓末)과 일제(日帝) 암흑시대를 숨가쁘게 동시호흡한 이상재 선생은 개화의 의지속에 국정개혁을 도모하고 자주독립의 신념으로 애국청년을 지도하고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으로 일제의 우민정책을 질타하며 때때로 대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등 열렬한 삶을 살다 1927년 3월 29일 서..

눈물을 지으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손을 잡아주었던 고종

1894년 월남이 학부(學部)학무국장과 관립외국어학교교장을 겸임하며 민족을 이끌어갈 동량을 키워나갈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외세에 빌붙어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金鴻陸) 일파가 고종에게 보자기에 싼 뇌물을 바쳤다. 이를 본 선생은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고 일갈한 뒤 서..

월남 이상재 선생 을사조약 체결되자 관직사퇴,국민계몽 앞장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역사의 분수령에서 그처럼 올곧고 굵은 선을 그어놓은 선각자는 흔치 않다. 월남(月南)은 역사가 인물을 만든 경우가 아니라 인물이 역사를 창조한 경우에 해당한다. 교육자 민권운동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