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四學)의 유생(儒生) 윤득화(尹得和) 등 1백 15인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멀리는 고정(考亭)의 통서(統緖)를 잇고 가까이는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아 성덕 대업(盛德大業)이 백세(百世)의 유종(儒宗)이 되니, 무릇 상도(常道)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누가 존신(尊信)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고(故) 상신(相臣) 윤증(尹拯)은 40년 동안 스승으로 섬긴 사람으로서 하루아침에 배반하여 헐뜯고 배척하는 것이 원수같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초에 성상께서 이미 몹시 미워하여 죄주고 삭직(削職)하셨을 때에는 시비가 아닌게 아니라 크게 밝혀졌으나, 불행히도 세도(世道)가 여러 번 변하여 어진이를 해치는 무리들이 모두 송시열에게 마음대로 못하지 않게 되어서는 윤증에 대하여 반드시 굽혀 절하고 높여 꾸몄고, 전하께서도 능히 마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다시 대부(大夫)를 부르는 예(禮)를 베푸셨습니다. |
대저 이 일은 다투는 곡절이 매우 상세하나, 사가(私家)의 문적(文籍)은 반드시 보시지 못하였을 것이니 혹 상세한 데까지 두루 아시지는 못하였을 것인데도, 대개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父師輕重]’는 넉 자로 재단하셨기 때문에 십수 년 동안 국시(國是)가 밝지 않고 인심은 더욱 떨어져 급속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번에 좨주(祭酒) 신(臣) 권상하(權尙夏)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序文)을 지은 일로 인하여 윤증의 낭패스러운 사실을 분명히 말하여 장차 사정(邪正)의 분별을 엄하게 하려 한 것은 대개 또한 마지못하여 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살피지 않으시고 미안한 뜻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 뒤로 대간(臺諫)에 대한 비답(批答)과 연중(筵中)의 분부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점점 격렬하여져서 유현(儒賢)에게는 비난하여 꾸짖어 마지않고 윤증에 대하여는 반드시 지극히 마땅한 것으로 돌리시니, 흑백이 뒤바뀌고 청탁(淸濁)이 뒤섞였습니다. 사문(斯文)·세도(世道)도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
송시열이 윤증에게 노여움을 산 것은 그 아비의 묘문을 지은 일 때문에 틈이 생긴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이것이 과연 무슨 큰 사고이고 큰 원수길래 저버리고 끊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까? 삼가 듣건대 저번에 연중에서 ‘제 부모가 욕을 당하는데 그 아들된 자로서 편안히 받아들인다면 천리(天理)와 민이(民?)가 장차 아주 없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성상께서 그 묘문의 실상을 통촉하지 못하여 이런 분부가 계셨던 것일 뿐이고, 전하께서 그 묘문을 한 번 보신다면 욕이 있는지 없는지를 당장 가리실 수 있을 것이니, 신(臣)들이 전하를 위하여 한 번 그 전문(全文)을 아뢰겠습니다. 그 글에 ‘숭정(崇禎) 기유년 4월 18일에 미촌 선생(美村先生) 파평 윤공(坡平尹公) 휘(諱) 선거(宣擧) 자(字) 길보(吉甫)가 이산(尼山)에 있는 집에서 졸서(卒逝)하니, 원근(遠近)의 장보(章甫)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弔問)하지 않는 자가 없고, 와서 곡하고 부조(賻助)하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으며, 그 행실을 숭앙하는 진신(搢紳)도 탄식하고 아까와하였다. 아! 성상께서 연신(筵臣)의 말을 바로 받아들여 벼슬을 추증하고 상수(喪需)를 주었으며, 장례 때에는 송장(送葬)하는 자가 거의 수백 인이었고, 장사지내고 나서는 그가 살던 고장과 들렀던 곳에 다 장차 사당을 세워 제향하려 하니, 군자들이 말하기를, 「성덕(盛德)이 인심을 감복시키는 것이 이러하다.」하였다. |
대저 공(公)은 팔송공(八松公) 휘(諱) 황(煌)의 계자(季子)이며, 비(?) 성씨(成氏)는 우계 선생(牛溪先生) 문간공(文簡公) 휘(諱) 혼(渾)의 딸이니, 공은 전광(前光)을 배태(胚胎)하고 만력(萬曆) 경술년 5월 28일(임신)에 태어났다. 숭정(崇禎) 계유년에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양시(兩試)에 합격하여 반궁(泮宮)에 출입하였는데, 의논이 늘 동배(同輩)에서 뛰어났고, 일찍이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하여 추숭(追崇)하는 것이 예(禮)에 어그러짐을 논하였다. 병자년에 금로(金虜)가 참호(僭號)하며 두 사자(使者)를 보내어 오니, 공이 또 앞장서서 논하고 두 번 상소하여 노사(虜使)를 베어 대의(大義)를 밝히기를 청하였다. 겨울에 오랑캐[虜]가 크게 침입하니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고 팔송공은 남한(南漢)에서 싸움에 종사하였다. 공은 동지와 함께 강을 건너려고 하며 사잇길로 남한에 가고자 꾀하였고, 또 일을 맡은 사람들이 눈앞의 안일만 도모하는 잘못을 논하였으며, 이미 가지 못하게 되어서는 자청하여 성의 수비에 분속되었다. |
이듬해 정축년 정월에 성이 함락되고 난(難)이 그치자 팔송공은 영동현(永同縣)에 정배(定配)되었는데, 일찍이 척화(斥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에, 사유(赦宥)받아 한산(韓山)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공이 줄곧 따라 모셨으며, 이때부터 과거(科擧) 공부를 포기하고 성리(性理)의 글에 전념하였다. 팔송공이 서거하니, 공이 형제와 함께 이산(尼山)에서 상(喪)을 지켜 그 정문(情文)을 다하였다. 복을 벗고서는 다시 금산(錦山)으로 돌아가 시남(市南) 유공(兪公) 계(棨)와 함께 집을 지어 산천(山泉)이라 편액(扁額)을 걸고 상대하여 토론하기에 밤낮을 다하여 게을리하지 않았고, 또 신재(愼齋) 김선생(金先生)의 문하에 출입하여 강습하고 질의하다가 드디어는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정하였다. 무자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효종 대왕(孝宗大王) 신묘년에 전설 별검(典設別檢)·왕자 사부(王子師傅)에 잇따라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정신(廷臣)들이 서로 잇따라 논천(論薦)하매 드디어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로 불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이때 공은 이미 이산으로 돌아갔는데, 공문(公門)의 고족(高族)이 크게 규약(規約)을 만들므로 스스로 이끌었고, 또 향리(鄕里) 사람들과 음사(飮射)·향약(鄕約)·사창(社倉) 등의 고법(古法)을 행하니, 노소(老少)가 믿고 따랐다.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높였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불렀으나, 공이 스스로 죽을 죄를 지은 신하라 하고 기보(畿輔)에 가서 강도(江都)의 일을 힘껏 아뢰어 사직하므로 체직되었다. 곧 장령(掌令)·진선(進善)으로 높였는데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批答)에 「네가 뜻을 지켜 변하지 않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으나, 다시 상소하여 힘껏 사직하였다. 이때부터 끊임없이 소명(召命)을 받았으므로 드디어 대궐에 나아가 진정(陳情)하였는데, 임금이 곧 입대(入對)하라고 명하였으나, 다시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사직하니, 우악(優渥)하게 비답하고 재촉하여 불렀다. 권공(權公) 시(?)와 송공(宋公) 준길(浚吉)은 먼저 이미 입조(入朝)하였는데, 권공이 상소하여 사복(士服)으로 들어와 뵙게 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으나, 다시 면직(免職)을 청하므로, 송공이 공에게 말하기를, 「명을 받들지 않으려면 빨리 떠나서 성의(聖意)만 근고(勤苦)하시게 하지 말라.」 하였다. 드디어 소장(疏章)을 남겨두고 지레 돌아갔는데, 잇따라 장령·진선으로 불렀으나 다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
기해년 5월에 효종 대왕께서 승하하시니, 금상(今上)께서 별유(別諭)하여 불러서 곧 들어 오는 길에 집의(執義)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제수하고 음식을 내리고 입대하게 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므로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니, 대궐에 나아가 진사(陳謝)하고는 근교에 나가 살았는데, 사업(司業)·상의 정(尙衣正)을 제수하고 또 입대하라고 명하였으나 이때 인산(因山)이 겨우 끝나자 소명을 사양하고 남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여러 번 집의의 임명이 있었고, 또 원자(元子)의 강학관(講學官)으로 불렀으며,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찾아가 가난을 진휼하는 일을 묻게 하고, 또 재이(災異) 때문에 불러 재변(災變)을 그치게 할 계책을 순문(詢問)하려고 했다. 대개 양조(兩朝)의 은택(恩澤)과 예우(禮遇)가 더욱 많이 보내지고 더욱 후해졌는데, 공은 단지 음식·서책을 내린 것만 받을 뿐이었고, 졸서(卒逝)하고 나니 임금이 끝내 보지 못한 것을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기셨다. |
대개 공의 학문의 연원(淵源)과 거취의 시종(始終)은 사람들이 다 보아서 아나 그 조예(造詣)의 심천(深淺)과 의리의 정조(精粗)로 말하면 본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더구나 나는 공에 비하면 황곡(黃鵠)과 땅벌레의 차이일 뿐만이 아니니, 공을 오래 따르고 공에게 깊이 심복하였다 하더라도 그 깊은 뜻을 엿볼 만하지 못하고, 또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그 덕을 형용할 글은 더욱 더 아득하여 말을 만들 방법을 모르겠다. 가만히 보건대 제현(諸賢)이 기술한 글은 많고 성대하되 오직 현석(玄石) 박화숙(朴和叔)의 글이 널리 관통하고 두루 포함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말하면 참람하고 경솔한 허물을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말하기를, 「당초에 우계 선생(牛溪先生)은 정암(靜庵) 조 문정공(趙文正公)의 학문을 그 아버지 청송공(聽松公)에게서 얻고 이어서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과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는 것이 더욱 지극하였으니, 대개 그 문로(門路)가 바르고 행실이 독실한 것은 우리 동방의 선비 중에서 조금도 앞설 사람이 없을 것이다. |
팔송공은 일찍부터 그 문하에 다녔고 뒤에는 능히 대의(大義)에 강직하였으므로 선생이 본디 그 대강을 들어서 알았거니와 또 신재 선생(愼齋先生)은 사계(沙溪) 문원공(文元公)의 가전(家傳)을 얻고 율곡의 세적(世嫡)이 되었으므로, 선생이 이에 아버지와 스승이 있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제론(諸論)을 살피고 모아서 전일(專一)하게 힘써 노력하여 바로잡고 쌓았으니, 그 학문을 넓히고 몸가짐을 단속한 과정은 대저 파산(坡山)의 법문(法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차례로 올라가면 뿌리가 고정(考亭)까지 닿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생은 덕성(德性)이 인서(仁恕)하고 우량(宇量)이 굉심(宏深)하며 규모는 근엄(謹嚴)하고 용모는 단정하고 의연(毅然)하여 조금도 태만한 빛이 없으므로, 바라보면 문득 그 험준한 고산(高山) 같은 기상을 알게 된다. 의리가 끝이 없고 곡절이 만 가지로 다르더라도 한결같이 성현의 유훈(遺訓)을 실마리로 삼아 풀어서 밝히고, 알아 내지 못하면 분발하여 잠도 잊었다. 평소에는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는 정좌(正坐)하여 글을 읽으면서 조금도 옆으로 기대지 않았으며, 그 본심을 존양(存養)하는 것은 충신(忠信)을 근본으로 삼고 경외(敬畏)를 요체로 삼으니, 엄연(儼然)하여 항상 임(臨)한 것이 있는 듯하고 척연(?然)하여 항상 두려운 것이 있는 듯하였다. 그 지행(知行)에 있어서는 서로 반드시 안팎이 일치하여 그 마음을 쓰지 않는 데가 없었으며, 어버이를 섬기고 조상을 받드는 예(禮)는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였으니, 형제는 그 행실을 믿고 친척은 그 덕을 생각하며 벗은 그 의리를 따르고 향당(鄕黨)은 그 인(仁)에 교화되었고, 그 풍도(風度)에 심복(心服)되어 떨쳐 일어나는 사방의 선비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병자년·정축년의 화(禍)를 당하고서 드디어 세도(世道)에서 뜻을 끊었는데, 효종의 은택(恩澤)과 예우를 받게 되었으나 불러도 오지 않고 만류하여도 머무르지 않았다. 위로는 당저(當?)로부터 아래로는 조정의 신하들과 평소에 공을 안다는 친한 벗들까지 누구나 다 그가 잠시 머무르기를 바랐으나, 선생은 확연히 한 번 정하여 변함이 없었다.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상경(常經)을 지키고 대의(大義)를 맡되 종신토록 원망이나 후회를 갖지 않은 까닭은 본디 이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은 감히 조금도 게을리할 수 없으므로, 혹 강구하는 것이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이면 문득 제공(諸公)을 위하여 반복하여 버려두지 않았고, 나라의 형세가 튼튼하지 못하거나 그른 사람이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말을 들으면 늘 슬피 한숨쉬며 항상 말하기를, 『오늘날 급히 힘쓸 일은 반드시 사사로운 뜻을 가진 자를 내쳐서 무너진 기강을 떨치고 겉치레를 없애서 실공(實功)을 이루고 사치한 버릇을 막아서 피폐한 백성을 살리고 구장(舊章)을 밝혀서 병폐를 고쳐야 하는 것인데, 큰 요체는 다 임금에게 달려 있다.』하였다. 그 탁월한 자질과 독실한 공과 훌륭한 말을 하여 가르침을 끼친 것은 근세에서 찾아도 짝할 이가 드물다.」 하였다. |
아! 이것은 화숙(和叔)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참으로 감복한 말이니, 사람들이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종형(從兄) 용서(龍西) 윤백분(尹伯奮)이 서술한 묘표(墓表)로 말하면 글은 비록 간략하나 뜻은 더욱 융숭하여 공이 시종한 깊은 뜻에 대하여 지극하고 극진하였으니, 다시 군말이 필요 없다. 공이 역경(易經)을 읽고 스스로 후천설(後天說)에 부합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첩천도(疊天圖)》를 지었고, 또 시남(市南)과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었고, 또 문집(文集) 15권(卷)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
부인 이씨(李氏)는 먼저 죽어 경기 교하현(交河縣)에 묘소를 썼는데, 내가 일찍이 그 행적을 기록하였다. 맏아들 윤증(尹拯)은 행실이 공정하고 의로우므로 조야(朝野)에서 징사(徵士)로 대우하였고, 작은 아들 윤추(尹推)는 전에 교관(敎官)을 지냈고, 딸은 사인(士人) 박세후(朴世?)의 아내이며, 서출(庶出)인 아들로 윤벌(尹撥)·윤졸(尹拙)·윤읍(尹?)이 있다. |
명(銘)하노니, 세속으로부터 은둔하여 후회하지 않는 이는 대개 많이 있으나, 성인이 말하기를, 「성인이라야 능히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성인이 말한 것은 중용(中庸)에 따르는 것이기에 여느 백성으로서는 능히 할 수 있는 자가 드문 지 오래인데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지(智)·인(仁)·용(勇)을 삼덕(三德)이라 하거니와 진실로 이것에 말미암지 않으면 어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배우고 생각하여 가려내는 것을 지(智)라 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그만두지 않는 것이 인(仁)·용(勇)이다. 여기에 종사하되 지나치지 않고 치우치지 않아야 하는데, 공은 여기에 뜻을 두었으나 하늘이 그 수명을 끝나게 하였으니, 사문(斯文)의 사기가 꺾이고 사림(士林)이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 이문순(李文純)이 청송(聽松)의 송(頌)을 적을 때에 기(夔)·설(卨)과 장저(長沮)·걸익(桀溺)의 이동(異同)을 평정(評定)하였는데, 공은 그 가전(家傳)에 충실하였으니 어찌 흠모하고 숭앙하지 않겠는가? 금세(今世)의 어느 사람이 포창(褒彰)하겠는가? 성실한 현석(玄石)이 극히 칭찬하였으니, 나는 그대로 전하고 짓지는 아니하여 이 명문(銘文)에 싣는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실로 최초의 본(本)인데, 이 글에서 욕한 것이 어느 말이고 헐뜯은 것이 어느 꼬트리이기에 아들이 과연 편안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스승의 의리가 과연 편안하게 보전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그 서술한 차례가 상세히 갖추어지고 칭찬도 본디 융숭하나, 총론(總論)한 곳에서는 선정신 문순공 박세채가 기술한 행장(行狀)을 들어서 말하였을 뿐이고 자기 뜻을 넣지 않았으므로, 윤증은 스스로 입론(立論)하지 않고 남의 글을 빌린 데에는 미묘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여 유감을 품었을 것입니다. |
아! 아들이 어버이를 높이는 데에는 끝이 없는 정이 있기는 하나, 이제 그 묘문에는 본디 한 마디의 욕이 없고 다만 칭찬이 제 뜻에 차지 않았을 뿐이니, 어찌 이 때문에 드디어 그 스승을 원수로 여기기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박세채가 사우(師友)의 비상한 변을 눈으로 보고 또 윤증의 낭패를 아까와하여 왕복하여 책망하였으나 끝내 돌이켜 깨닫지 못하니, 박세채가 사도(師道)가 멸절(滅絶)할 것을 크게 염려하여 《사우고증(師友考證)》 한 편(篇)을 지어서 당세(當世)에 알렸고, 또 배우는 자에게 글을 남겨 그 본말을 극진히 논하기를, ‘붕우(朋友)【붕우란 윤증의 자호(自號)가 붕재(朋齋)이므로 말한 것이다.】는 우장(尤丈)【배우는 자가 송시열을 우재(尤齋)라 칭한다.】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강습하여 수십 년 동안 섬기면서, 신원(伸?)할 일을 당하면 소장(疏章)을 기초로 하여 앞장서서 논의하고, 환난(患難)을 당하면 글을 올려 스스로 표명하고, 출처(出處)할 일을 당하면 그 설(說)을 준용(遵用)하였으니, 사람들이 다 송문(宋門)의 고제(高弟)인 줄 안다. 그러나 세상에서 논하는 자는 반드시 「스승은 도(道)가 달려 있는 바이니 도가 그르면 끊어야 한다.」 하여 한 번 쓰고 버릴 물건과 다름없이 여기니, 이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와 스승의 구분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므로 견주기 어렵고, 복수하는 의리는 조금 그럴듯하나 또한 결국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하고, 또 ‘내 생각으로는 복수하는 의리가 아니면 끊을 수 없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
아! 박세채가 공심(公心)·혈성(血誠)으로 시비를 공평히 하였으므로 그 사리가 지극히 밝고, 그 말이 믿을 만하니, 신(臣)들의 여러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아! 윤증은 큰 윤리를 이미 잃었으므로 나머지는 논할 것도 없으나, 부자가 전술(傳述)한 것이 본디 윤휴(尹?)를 조종으로 삼는 법문(法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마음에 두고 행실을 가다듬는 것도 오로지 이해(利害)·화복(禍福)에 달려 있었습니다. 송시열이 목숨을 버리고 윤휴를 배척하다가 간사한 자들에게 크게 미움받은 것을 이미 보았고, 뒷날에 세도(世道)가 여러 번 변하면 송시열이 마지막 승부를 걸게 될 것은 틀림없겠거니와, 주문(朱門)의 당금(黨禁)은 서산(西山)에게 먼저 미쳤고 본조(本朝)의 사화(士禍)는 문도(門徒)에게 뒤섞여 미쳤으니, 윤증의 환난을 염려하는 마음으로서는 어찌 송시열의 문하에서 머리 숙여서 수사 연좌(收司連坐)의 율(律)을 달게 받으려 하였겠습니까? 그가 스스로 사문(師門)을 끊고 분당(分黨)하여 따로 선 까닭은 반드시 오로지 묘문(墓文)에 관한 일에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하고 침묵하는 것과 따르고 피하는 것이 윤휴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돌아가고, 문득 기사년에 이르러 날뛴 것을 보면 더욱 증험할 수 있습니다. |
전하께서 당초에 ‘윤증을 죄주신 것은 본디 지극하였거니와, 백광호(白光瑚)를 배척하신 분부에 윤증이 스승을 저버리고 바른 사람을 헐뜯는 것은 실로 세도의 변고이고 사문(斯文)의 죄인이니, 무릇 시비를 가리는 천성이 있는 자라도 누가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하셨으니, 윤증을 과연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신 것입니까? 오늘의 윤증은 바로 그때의 윤증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더라도 경형(?刑)·월형(?刑)은 보상할 수 없는데, 도리어 완전한 덕을 갖춘 군자로 추대하여 조금만 배척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어진이를 무함한 죄로 돌리시니, 어찌하여 대성인(大聖人)의 전후의 시비가 일체 상반(相反)됨이 이토록 극에 달하게까지 되었습니까? |
신들이 소장을 써서 올리려 할 즈음에 삼가 이진유(李眞儒)의 소본(疏本)을 보니 유현(儒賢)을 무함하여 방자하게 능욕하였고, 전석(前席)에 입대(入對)하여서는 그 말한 것이 흉포(凶怖)하였고, 또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송시열의 묘표(墓表)에 있는 한 마디 말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돌리며, 끝에는 ‘반드시 처분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그 마음 쓰는 것이 참혹하게 해독을 끼치니 사람들을 놀라고 두렵게 합니다. 아! 통분합니다. 기사년의 화(禍)를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조짐을 쌓아서 빚어낸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대개 윤증 부자가 처음부터 윤휴에게 편들어 치우치게 그 해독을 맞았으므로 윤휴가 주자(朱子)를 헐뜯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차마 끊지 못하였는데, 송시열이 당여(黨與)를 먼저 다스린다는 뜻으로 매우 힘써 배척하였으므로 윤씨 집안에서 원한을 품고 유감을 쌓은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시세가 일변하여 윤휴의 무리가 다시 일어나게 되자 윤휴의 원한을 신설(伸雪)하고 윤증의 벼슬을 현탁(顯擢)하며, 송시열은 죄명이 낭자하여 마침내 참화(慘禍)를 입었으니, 윤휴를 배척하여 도둑이라 하고 윤증을 배척하여 윤휴의 무리라 하는 것은 실로 송시열을 죄준 장본인(張本人)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박세채도 기사년 봄에 윤증에게 글을 보내어 ‘오늘날 우장(尤丈)을 다시 죄수(罪首)로 삼는데 시의(時議)는 아마도 반드시 뜻을 달리하는 자를 찾아서 도움으로 삼을 것이니, 고명(高明)을 위하여 매우 염려하는 사람이 많다.’ 하고, 또 ‘여원(驪?)을 푸는 데에 반드시 또 형의 집을 끌어대어 명증(明證)으로 삼을 것이다.’ 하였는데, 여(驪)라는 것은 윤휴가 여주에 살았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윤증이 그 명성(名聲)과 위세(威勢)를 도와 함께 놀라운 책략을 선동한 것은 이미 엄폐하기 어려운데다가, 더구나 그 비밀한 음모를 잘 아는 것은 그 무리만한 자가 없을 것인데, 그때 윤증을 논계(論啓)한 데에 ‘작년 경화(更化)한 일은 윤증이 그 사이에서 올렸다 내렸다 한 것이 있다.’ 하였습니다. |
아! 참혹합니다. 이것이 어찌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문(師門)의 그때의 말에 따르고 일세(一世)의 공론의 말을 따서 여러 묘석(墓石)에 써서 후래(後來)에게 깨우친 것은 도리어 권상하의 책임이 아니니, 권상하도 어찌 화를 두려워하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진실을 모아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주객(主客)의 구분은 제신(諸臣)의 소(疏)·계(啓)에 다 있으므로 성명(聖明)이 반드시 굽어살피셨을 것인데 이제 금령(禁令)이 또 엄하니 신들이 감히 다시 구구한 말을 할 수 없으나, 《가례집해(家禮集解)》와 《가례원류》는 상략(詳略)이 크게 다른데도 지금 한 자(字)도 가감한 것이 없다고 말하며 천위(天威)가 지척인 곳에서 방자하게 면대하여 속였으니, 그도 심장(心腸)이 있는데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
“일이 진실로 가려야 할 만한 것이라면 다만 도리에 맞게 말하여야 할 따름인데, 선정(先正)을 헐뜯은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다.” |
하였다. 윤득화 등이 다시 상소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여 물리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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