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燕山君日記 卽位年(1494년)~中宗實錄 三十九年(1544년)까지 한산에 관련된 기록

천하한량 2007. 3. 21. 20:30

연산 2권 1년 1월 19일 (계묘) 003 / 충청도 한산·서천·홍산·부여·비인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충청도 한산(韓山)·서천(舒川)·홍산(鴻山)·부여(扶餘)·비인(庇仁) 등지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원전】 12 집 637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연산 5권 1년 5월 28일 (경술) 005 / 충청도 도사 김일손이 시국에 관한 이익과 병폐 26조목으로 상소하다①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 김일손(金馹孫)이 상소하기를,

“신이 금년 2월 5일에 의정부 사인사(議政府舍人司)에서 전지를 받들어 신에게 이문(移文)한 것을 엎드려 받자오니, ‘내가 덕이 없이 큰 자리를 이어받아서 애통한 상중에 어찌할 바를 모르니, 가언(嘉言) 선정(善政)을 어찌하여 듣겠으며, 민간의 이익과 폐단되는 것을 어찌하여 알 수 있으랴. 대소 신민(大小臣民)들로 하여금 나의 처음 즉위한 뒤에 여러 신하에게 묻는 뜻에 맞추어 각기 시국에 마땅한 것을 진술하여 실봉(實封)으로 올리라.’ 하셨으니, 신이 받들어 읽으매 눈물이 흘러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옵고, 곧 관내(管內) 54관(官)에 반포하였는데, 여태까지 한 사람도 봉장(封章)을 올리는 자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조종(祖宗) 백 년 동안의 두터운 덕택 가운데서 살아왔고, 거듭 대행 대왕(大行大王) 26년 동안 교양하고 성취시킨 은혜를 입었는데, 하루아침에 전하의 애통하신 전지를 받고도 새 정치에 도움될 한 마디 말도 하는 이 없으니, 신이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신이 생각건대, 말하지 않는 자의 마음에는 반드시 ‘임금이 성스럽고 신하가 어질고 예(禮)와 법이 갖추어졌으므로 천한 사람의 말은 아뢸 필요가 없다.’ 하고, 또 반드시 ‘새 정치의 처음에 태학생(太學生)을 물리쳤으니, 충성스러운 말은 한갓 제 몸에 화가 돌아올 뿐이다.’ 하고, 또 반드시 즉위한 처음에 구언(求言)하는 것은 예사(例事)일 뿐이니, 말을 아뢰어도 반드시 쓰이지 않을 것이다.’ 할 것이니, 낮은 자는 죄를 받을까 겁내고, 높은 자는 이름을 얻으려 한다는 혐의를 피하는 것이 침묵하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은 자는 제 몸을 위하여서는 가하나, 모두 품은 뜻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임금을 아끼고 나라에 충성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이 선조(先祖)에 벼슬하여 녹을 먹은 지가 10년이요, 벼슬이 5품 자리에 있어, 나라의 은혜는 이미 두터운데 하는 것 없이 지내와서, 선왕께 한 말씀으로도 보답한 것이 없었는데, 이제 또 저의 몸만 삼가하여 전하의 높은 뜻을 외롭게 한다면 신의 죄가 더욱 심할 것이거니와 평생에 배운 바를 어디에 쓰오리까. 신은 어리석은 일득(一得)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애통 박절한 심정으로 애통 박절한 전지를 받들으매 마음이 격동되어서 모르는 사이에 말이 절로 법식에 벗어나오니, 전하께서 살피시기에 달렸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가언(嘉言)은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는 것만한 것이 없고 선정(善政)은 집을 바루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만한 것이 없다 하오니, 경연(經筵)에 일찍이 납시는 것이 근본입니다. 민간의 이익과 병폐는 본디 아뢸 것이 많이 있으나, 조정의 이익과 병폐 또한 아뢸 것이 있사오니, 신이 낱낱이 진술하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가언·선정을 듣고자 하시어, 듣고 나서 뜻에 두지 않으신다면, 듣는 보람이 없을 것이요, 민간의 이익과 병폐를 알고자 하시어, 알고 나서도 시행하지 않으신다면, 아시는 보람이 없을 것이오니 듣고서는 실천하고 알고서는 실행한다면, 요 순(堯舜)이 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요 순을 성인이라 하는 까닭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사사로운 뜻을 고집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임(臨)하신다면, 가언·선정이 날마다 아뢰어지고 민간의 이익과 병폐가 날마다 들리더라도, 이것이 모두 나는 벌레 소리와 지나가는 까마귀 소리 같아서, 한갓 전하의 총명을 어지럽게 할 뿐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재앙은 무단히 생기는 것이 아니요, 허물은 반드시 돌아가는 데가 있다.’ 하옵는데, 신이 한 도에만 매여 있어서 사방의 재앙을 알지 못하오나, 한 도를 가지고 보더라도 몇 달 동안에 재앙이 또한 심하였습니다. 지난 12월 27일(임오)에 서산(瑞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는데, 곧 전하께서 상주가 되신 뒤의 일입니다. 올해 정월 18일(계묘)에 한산(韓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고, 2월 초하루에 3분의 1이나 먹은 일식이 있었고, 그 달 7일에는 대낮에 별이 떨어졌으니, 괴이함이 또한 심합니다. 옛날 위상(魏相)이 한(漢)나라 정승이 되고, 이항(李沆)이 송(宋)나라 정승이 되어, 날마다 사방의 재변을 임금에게 아뢰었으니, 오늘날의 위상과 이항의 직책을 맡은 자가 능히 위상·이항의 마음을 간직하여 위상·이항처럼 사방에서 일어나는 재변을 전하에게 아뢰고 경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천도(天道)가 아득하여 재앙과 허물을 추측하기 어렵다 해서 스스로 경계하여 반성하지 않는다면 전하와 여러 신하들의 복이 아닙니다. 신이 영춘현(永春縣)에 떨어진 이물(異物)을 보았는데, 세상에 장화(張華)가 없으니, 누가 그 괴이한 것을 분변하겠습니까. 신이 듣자오니, 조정에서 쪼개어 보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의심한다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돌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나 별이 떨어지면 돌이 되는 것이니, 이것 또한 공중에서 변화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이 감히 당장에 어떤 사건을 지적해서 그 재변에 해당된다고 증거댈 수는 없사오나, 전하께서는 마땅히 몸에 되돌이켜 보고 마음에서 찾아서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겨,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여야 할 때입니다. 하늘이 전하에게 임(臨)한 것이 바로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임한 것과 같아서,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경계하는 데는 형벌이 있고, 하늘이 전하를 경계하는 데에는 재변이 있으니, 그 일은 다르나 이치는 같습니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데에 들게 된다.’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가 전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노하여 죄주시겠거니와, 만약 전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면 하늘이 어찌 전화를 돌보겠습니까. 여러 신하가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늘을 두려워하시어 멀다 하지 마소서. 하늘을 두려워한 뒤에야 만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니, 한 번 천도를 멀다 하시면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만물을 맡아보면 이 마음이 방자하여져서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여러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가 전하의 몸 아래에 물건인데, 두려울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대신을 공경할 필요가 없고 대간(臺諫)을 믿을 필요가 없으며, 시종(侍從)을 친근히 할 필요가 없어서 ‘내 말은 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내명은 거슬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여, 내가 잘낫다는 마음이 날로 쌓이고 달로 자라나서 다시는 용납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현인과 군자는 머뭇거리며 속으로만 아파하고 다시는 진언(進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늘을 두려워하면 마음이 발라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을 두려워함으로써 뭇 신하에 임할 뿐 아니라 또한 하늘을 본받아서 전하의 마음을 비우소서. 오직 마음이 비워지고서야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오니, 진실로 주일(主一)하여 마음을 비우신다면, 마음이 하늘과 통하여서 탕탕(蕩蕩) 평평(平平)한 도(道)가 점점 이루어져서 황극(皇極)이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을 비우지 않으신다면, 대신에게 맡길 적에 그가 사랑을 믿고 권세를 휘두를까 의심하여 간섭하고, 대간을 대우하는 데는 그가 명예에 마음을 두고 책임만 면하는가 의심하여 물리치고, 청론(淸論)을 들으면 그것이 너무 옛것에 얽매어 오활(迂闊)하다고 의심하여 경홀히 여기며,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데는 제 사정(私情)을 따르는가 의심하고, 형관(刑官)이 법을 다루는 데는 사정을 쓰는가 의심하게까지 되어,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가 사정이 있다고 의심하신다면, 전하의 마음은 날마다 위에서 수고롭고 신하들은 의사를 펴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한 선제(漢宣帝)와 당 선종(唐宣宗)은 명목과 실제가 맞는가를 살펴 권강(權綱)을 모조리 잡아 쥐었으므로, 명찰(明察)한 임금이라 일컬으나 지덕(至德)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람을 알아보아서 잘 맡기고 인재 얻기를 잘하고, 마음을 비워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임금된 이의 훌륭한 절제(節制)입니다.

전하께서 세자로 계실 때는 한 마디 말씀도 실수가 없으시고 한 가지 행실도 이지러짐이 없으셨으므로, 숨긴 덕과 감춘 빛을 남들이 추측할 수 없었으며, 즉위하시어서는 집상(執喪)을 애통하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되게 하고 첫 정사를 밝게 시행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깨우쳤습니다. 중외(中外)의 신하 백성들은 한집안에 오랜 종들과 같아서 가장(家長)이 살았을 때에는 그 아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의 뜻이 어떠한지 몰랐으나, 가장을 잃고 나서는 황황하여 우러러 의지할 곳이 없어서, 문득 상속한 맏아들의 행동이 법도에 맞는가를 보아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며, 다행히도 가업이 더욱 융성하면 서로 경축하고 칭송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러하므로 한 말씀과 한 동작의 관계됨이 중하니, 전하께서 삼가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삼년상(三年喪)이 공통된 것은 천자(天子)부터 서인(庶人)까지 같으니, 어찌 귀천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처음 초상을 당해서는 목소리는 다시 못들어도 유체(遺體)가 자리에 있으니 오히려 붙들고 울 수가 있으나, 염(斂)하게 되어서는 형용마저 한 나무에 거두니 간을 뭉개고 허파를 찢듯이 망극함을 어쩔 수 없고, 빈(殯)하게 되어서는 그일이 아득해지되 오히려 평일에 거처하던 곳에서 아침 저녁으로 곡림(哭臨)하여 생시처럼 봉양하니, 또한 스스로 위안할 만하나, 장사하게 되어서는 어둡고 어두운 구덩이 속에 아주 묻으니 울부짖어 봐도 미칠 수 없으니 영원히 버린 것이며, 이에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잃은 자는 3년이 지나고서는 상복을 다시 더 입어 볼 수 없음을 생각하고, 장사하고 나서는 빈소에 계실 때를 생각하고, 빈하고 나서는 염하지 않았을 때를 생각하고, 염하고 나서는 편찮았을 때를 생각하나, 일이 때와 더불어 지나가서 날로 멀어지매 소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禮)에 ‘거상중에 병이 있으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되 병이 나으면 전대로 한다.’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속(嗣續)이 중하기 때문인데, 하물며 임금의 한 몸에는 종묘 사직의 중함이 매였음에리까. 옛적에 임금이 돌아가매 새 임금이 3년 동안 말하지 아니하고, 여러 백관이 총재(冢宰)에게 모든 정사를 묻는 것인데, 지금의 원상(院相)이 곧 총재니, 신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졸곡(卒哭) 전에는 다만 원상으로 하여금 승지(承旨)와 함께 편의한 대로 정무를 처리하게 하시어 전하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혀서 몸을 보존하시고, 신하들의 말하는 것도 또한 오래 거절하지 마시어 생각을 안정하고, 산릉(山陵)이 정한 기한이 있어서 빈전을 뫼실 날이 많지 않으니, 몸을 살피시고 힘을 헤아리시어 다시는 애태우지 마시고 편찮으시면 속히 양음(涼陰)으로 돌아가시어 큰 효도를 마치소서. 이것이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큰 효도입니다. 비록 자자분한 것을 처분하지 않더라도 삼가고 잠잠히 있는 가운데에 조화가 절로 유행할 것이거니와, 또한 전하께서 비록 삼가고 잠잠히 계실 날이라도 날로 대신을 가까이 하시어 의원을 감독하며 환후를 보살피는 것을 허락하소서. 송 영종(宋英宗)이 재궁(梓宮) 앞에서 병을 얻었을 때에 한기(韓琦)가 옆에 없었더라면 위태할 뻔하였거니와, 전하께서는 이것을 경계하소서.

대신을 가까이 하고 환관(宦官)을 멀리 하는 것이 또한 몸 닦는 급무(急務)입니다. 옛날에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던 이는 반드시 먼저 집을 다스렸으니, 대저 위로는 삼전(三殿)부터 아래로는 구족(九族)까지, 안으로 환관(宦官)·궁첩(宮妾)과 밖으로 복례(僕隷)까지도 모두가 전하의 한집안입니다. 전하께서 위로 삼전께 효도를 다하여 삼전으로 하여금 선왕의 돌아가심을 잊게 하시고, 아래로 구족에게 도타이 하여 구족으로 하여금 전하의 인자함을 받게 한 뒤에야 백성에게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의 모후는 흔히 낳은 어머니가 아니어서 이간하는 말에 동요되어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삼전께 효도를 하시되 대비에게 낳은 어머니와 똑같이 효도를 다하고서야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효도란 순함을 위주로 하되 어버이의 영을 따르지 못할 수도 있고, 은혜란 후함을 위주로 하되 의리를 가리우지 못할 때가 있으니, 구차스런 효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 궁중의 청(請)을 막고 밖의 사(私)를 끊어서, 환관과 궁첩이 감히 제 뜻을 행하지 못하고 복례와 하천(下賤)이 감히 제 뜻을 법에 범치 못하게 하시고서야 집이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명덕 황후(明德皇后)는 친정에 수레와 말이 많은 것을 보고 자신을 뼈저리게 꾸짖었고, 송나라 선인 태후(宣仁太后)는 〈친정인〉 고씨(高氏)를 검찰한다고 스스로 일컬어 감히 사가 없었으니, 이것은 만세의 궁중에서 법받아야 할 바입니다. 근자에 월산군(月山君)의 종 길종(吉從)이란 자가 시골에서 폭력을 부렸으니, 법으로 보아서는 마땅히 변방에 귀양 보낼 것인데, 부인이 공공연하게 단자(單子)를 올려서 종을 두둔하려 하여 국법을 범했으되, 전하께서는 그의 청을 특별히 들어 주셨으니, 이것은 귀근(貴近)에게는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홍산현(鴻山縣)에서는 내수사(內需司)의 억센 종 열두어 명이 함께 밤에 공해(公廨)를 습격하여 공공연히 물건을 가져간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미쳐 모르시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은 세력을 믿고 법을 어지럽히고 고을 관가를 업신여겨 못할 짓이 없을 것이오니, 전하께서 사령(赦令)을 거쳤다 해서 아니 다스리지 마소서. 대저 임금은 사사 재산을 둘 수 없으니, 내수사에서 재산을 늘리는 것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선왕께서 초년에 없앴다가 중년에 다시 둔 것은 자손이 번성하여 여기에서 가져다 나누어 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지금 없애신다면 무엇이 누(累)가 되겠습니까. 특히 선왕의 초년 뜻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초상을 당한 슬픔에 지쳐서 정신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셨고, 또 자전(慈殿)의 뜻을 거슬릴 수 없어 우선 설재(設齋)를 허락하셨으니, 비록 ‘하지 않는 극진한 선’ 만하지는 못하나, 역시 이는 인효(仁孝)의 허물이니, 마침내 손상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태학생(太學生)의 우직함을 너그러이 용납하지 않고 귀양보내고 정거(停擧)시키시매 여러 대부(大夫)가 모두 옳지 않다 하되, 전하께서 한결같이 거절하고 듣지 않으셨는데, 설재는 경(輕)한 일이고 태학생들을 죄주는 것은 중한 일이며, 태학생에게 죄주는 것은 경한 일이고 여러 신하의 의논을 거절하는 것은 중한 일이니, 이것은 신정(新政)의 큰 누(累)가 됩니다. 국민은 다만 태학생이 물리쳐짐을 보고 전하의 뜻은 알지 못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유교를 미워하는가 의심하여서, 이이(訑訑)하다는 소문이 사방에 들리어, 드디어 전하께서 참으로 간하는 말을 거절하신다고 생각들 하니, 신 또한 놀라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곧 들리기를, 전하께서 간하는 말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시어 길종의 일은 도로 법으로 처단하셨다 하오니, 이른바 ‘마치 일·월식(日月蝕)과 같아서 허물을 고치매 백성이 모두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확충하여 잘못을 아시거든 능히 뉘우치고, 뉘우치거든 반드시 고치셔서, 만사를 모두 그렇게 하신다면 태갑(太甲)·성왕(成王)과 같기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바뤄지고 몸이 닦아지고서 집 또한 다스려질 것이니, 집이 다스려진 뒤에야 비로소 치국(治國)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익과 병폐 26가지를 삼가 조목으로 아룁니다.

1. 상제(喪制)입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단상(短喪)을 유조(遺詔)한 이래로 역대(歷代)에 삼년상을 이행한 자가 거의 없었고, 천여 년 동안에 오직 진 무제(晉武帝)·위 효문제(魏孝文帝)·송 효종(宋孝宗) 세 임금뿐이었으니, 이 세 임금은 어찌 전하께서 본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중국에서도 이행하지 아니하나 우리 조종(祖宗)은 능히 삼년상의 제도를 이행하였으니, 우리 왕조의 가법(家法)이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할 수 있으나, 일시적 제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극한 슬픔을 당하여서 면복(冕服)으로 즉위한 것은 강왕(康王)의 실수이었습니다. 왕위를 이어받는 날에 비록 신하들의 권함에 이기지 못하여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을 입으셨으나, 전하께서는 반드시 더 애통하실 것이니, 효도로써 사방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서는 최복을 입고 신하에게 임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예가 답습되어 온 지 이미 오래였고, 특히 오늘날에만 시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삼군(三軍)이 희게 입는 것은 의리에 틀리는 것이 아닌데, 지금 군진(軍鎭)에서 초상에 임하지 않고, 이 음악을 그쳐야 할 때를 당하여 북·나팔 소리가 평상과 같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존장(尊長)이 앉아서 곡하는 것은 당연한 예인데, 두 대비의 곡할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교서를 반포할 때에는 최복을 입고, 지방관이 교서를 받을 때에는 길복(吉服)을 입게 되어 있으니, 즉위하는 교서는 당연하나, 관찰사(觀察使)가 받드는 교서 또한 길복을 입고 맞이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관찰사는 평일에 사삿일로 휴가를 얻어서 얼마 동안 도계를 넘을 수 있는데, 오직 진향(進香)하는 데는 나갈 수 없다 하여, 새로 임명받아 부임하지 않은 감사를 시켜서 진향하도록 하였으니, 비록 드나드는 폐단은 줄인다고는 하나, 예에 벗어난 것은 어찌하겠습니까? 초라한 면포(綿布)로 전 드릴 물건은 사서 바치니, 비록 옛 규례라고는 하나, 신은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저 즉위할 때에 교서를 반포함은 전국에 훈계하여 처음을 바르게 하는 것인데, 조관을 보내지 않고 작은 폐단을 헤아려 대체를 가벼이하니, 신은 구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허물삼지 않으나, 오히려 마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문관·무관이 졸곡을 지내고부터 흰 갓을 쓰는 것과 능 앞에 비각(碑閣)을 세우는 것은 《오례의(五禮儀)》 주(注)에 자세히 실렸는데, 신이 듣기로는, 흰 갓을 검은 갓으로 고친 것은 정희 왕후(貞熹王后) 초상 때부터였고, 능 앞에 비각을 폐지한 것은 광릉(光陵)때부터였다 합니다. 옛사람은 검은 갓을 쓰고 조상(弔喪)하지 않았으니, 조상에도 검은 갓을 쓰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삼년상의 갓임에리까. 비록 흰 갓을 따라 사모를 희게 하지 못하더라도 검은 사모를 따라 갓을 검게 하지 못할 것이나, 아직 존양(存羊)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수 문제(隋文帝)의 아들 준(俊)이 죽었을 때에 유사(有司)가 비를 세우자고 문제에게 청하니, 문제가 답하기를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면 한 권의 역사책으로 족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선왕의 높은 덕은 나라 역사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무엇하러 비를 세우자고 청하겠습니까마는 다만 신하의 무궁한 생각은 임금의 유체(遺體)를 위해서 더욱 멀리 천만 년 뒤에 가서 어떨까 염려해서입니다. 옛날 공자(孔子)가 계찰(季札)의 묘도비에 손수 쓰시기를 ‘오나라 연릉 계자의 묘다[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하였으니, 어찌 말이 많아야 되겠습니까. 글 잘하는 신하를 시켜서 다만 날짜나 쓰고 검덕(儉德)을 간략히 기술하고 명기(明器)는 나무로 쓰고 주옥이나 금을 묻지 않은 뜻은 다음 세상에 가서 능이 옮기고 골짜기가 바뀌더라도 간사한 도둑이 〈도굴할〉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요, 지식이 있는 자는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니, 또한 손해될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신라 옛 도읍터에 관광을 갔더니, 무덤이 총총하여 귀천을 구별할 수 없다가 한 무덤을 지나다가 보니 잘라져 쓰러진 빗돌에 ‘태종능’이라고 쓰였기에 늠연히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 물러난 적이 있으니, 이것이 역시 한 증거입니다. 이 두 일에는 예문을 들어서 써도 늦지 않다 하겠습니다.

2. 자주 사면(赦免)하지 마실 것입니다. 공명(孔明)이 촉(蜀)을 다스릴 때에 사령을 함부로 내리지 않았으니, 공명이 어질지 않은 사람이 아니지만 함부로 간사한 무리에게 혜택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왕께서 병환이 계실[彌留] 때에 신하들이 선왕의 영명(永命)을 비는 뜻으로 극형의 죄수까지 모두 놓아 주었으니, 사령 전지가 본도에 도착하였을 때가 벌써 선왕께서 승하하신 뒤였으니, 미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감히 청하지 못한 것은 명령이 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올해 민간에 도둑이 많은 까닭도 이 때문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도둑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종이 주인의 아내를 간통하고 아우가 형을 구타한 자 또한 면하니, 강상(綱常)에 있어서는 어찌하리까. 신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사령을 자주 내리지 마시고 내리더라도 보통 사령에서 용서하지 않는 것만은 제외하시면 양민에게 큰 다행이겠습니다.

3. 토지 소출의 다과를 참작하여 진상(進上)을 삭감하고 몸소 절약하고 검소해서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을 삼가실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는 각 지방에서 진상하는 공물 중에 토산물 아닌 것이 많아서 관리들이 판출할 능력이 없어서 민간에게 강제로 할당시키면 민간은 베[布]·조[粟]를 가지고 소산지를 찾아다니면서 곱절이 넘는 값을 주고 사게 되니, 진상할 물건은 언제나 말[斗]로 주고 되로 받고 섬으로 주고 말로 받게 되며, 또한 대소 관리들은 장부에 의거하고 침탈하는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니니, 민간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이 국가에서 포루(布縷)의 세는 곡물의 세를 공제하여 바치기 때문에 민간의 부담은 맥도(貊道)보다도 더 가볍다고 하니, 이것은 장부에 기록된 것 외에 거둬 들이는 것이 한도가 없어서 명년에 바칠 것을 금년에 독촉하는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에도 벌써부터 저축해 오던 것이 모두 바닥이 드러났는데 민가에 어찌 저축될 것이 있겠습니까. 가령 금년 재정이 국휼(國恤)과 중국 사신의 왕래로 인하여 명목 없는 물품이 모두 관청으로 하여금 준비케 하니, 관청에서는 제대로 준비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민간에게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명목 없이 잡다한 과세가 곡물 조세의 10배나 되었을 것이니, 백성이 어찌 정신을 차리고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옵건대, 명년부터 인자하고 너그러운 중앙 관원을 각 지방에 파견시켜서 토산물을 자세히 조사한 다음 공안(貢案)을 작성하소서. 각도의 진상으로 말하면 가까운 곳에서는 날로 바치고 먼 곳에서는 달로 바쳐서 육해(陸海) 생산물이 모두 바쳐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당초에는 한두 가지 생산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떤 감사가 생각하기를, 신 자신은 먹고 나라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서 바쳤던 것이 이미 바친 뒤에는 으레 바칠 품목으로 지정되니, 생산된 것이 떨어져 지탱할 수 없어 다른 것을 팔아 바꾸어서 충당하느라고 수레가 엎어지고 말이 쓰러져 가면서 사옹원(司饔院)에 바치면 엄인(閹人)·선부(膳夫)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어찌 모두 백성들의 피와 기름인 줄을 알겠습니까. 소자첨(蘇子瞻)의 시에 ‘우리 임금의 군색한 것이 어찌 이 물건인가. 구체(口體)를 기르는 것이 어찌 이다지 누(陋)한가.’라고 하였으니, 이 뜻이 매우 좋습니다. 신이 요동(遼東)의 위치를 살펴보았더니, 산을 등지고 강에 닿아서 생산물이 또한 숱하나, 공물 바치는 것은 다만 인삼과 오미자뿐인데, 그것은 약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폐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하에는 은어(銀魚)가 나서 매우 흔한 것인데 어떤 환관이 가져다가 황제에게 바쳤더니, 지금 황제가 먹어 보고 맛이 좋아서 궁내의 돈으로 사들이도록 하고, 백성에게 공물로 바치라는 조서(詔書)는 내려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송 인종(宋仁宗)이 구운 양[燒羊]을 들이지 말게 한 뜻과 같습니다. 종묘에 설만(褻慢)한 음식을 올리는 것은 남제(南齊)의 실례(失禮)인데, 지금에 설만한 음식을 올리는 사실이 이미 많으니, 또한 예가 아닙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몸소 검소하고 절약하여 자세히 살펴서 처분하시어 사방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기어코 구하여 바치려고 애쓰지 말도록 하소서. 요즘 사대부들이 제 몸 봉양이 너무 사치스러워서 토지는 척박하건만 풍속은 사치스러워지며, 백성은 가난한데 조세는 촉급하니, 진실로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그 원인은 위에 있으니, 먼저 전하께서 음식 의복에 좋아하는 것을 삼가서 백관에게 본을 보이소서. 신은 들으니, 적삼 깃을 밖으로 접은 것은 옛적에는 이러한 풍습이 없었던 것인데, 세종께서 어느날 저녁에 바깥으로 접은 것을 여러 신하가 본받고 사방이 따라서 지금까지 폐지되지 않았으니, 임금이 한 번 좋아한 것이 미세한 것이라도 한때에 법이 되며 만세에 본받는 것이 이같으니, 어찌 삼가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4. 작은 허물을 가볍게 다루고 오복(五服)을 소중히 여겨서 조정에 충후(忠厚)한 풍도를 세울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는 요즘 음해하고 적발하는 풍조가 점점 늘어나고, 충후하고 미더운 도(道)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으니, 〈예를 든다면〉 어떤 정승에 있어서 본래부터 장자(長者)라고 일컬어 왔어도 한 가지 일에 잘못이 있으면 갑자기 간사한 자라 일컫고, 어떤 명사에 있어서 본래부터 깨끗한 선비라고 일컬어 왔어도 한 가지 흠만 있으면 갑자기 소인으로 지적해서 아침에는 교유하는 자리를 같이 하고, 저녁에는 공박하는 글월을 빼들어 남몰래 적발하여, 자못 실없고 경솔한 자가 되도록 하니, 사람은 정신이 밝음과 어두움이 있고, 생각이 잃음과 얻음이 있고, 재질이 길고 짧음이 있으니, 이것이 곧 선사(先師)의 ‘허물은 용서함이 있고 모두 다 잘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송나라 인물로 본다면, 왕문정(王文正)이 좋은 구슬을 받고 자신이 천서(天書)를 받았다고 하였으니, 그 잘못이 이미 크나 오히려 큰 인물[大雅]이라고 일컬었고, 한기(韓琦)·부필(富弼) 두 사람은 공훈이 하늘에 치닿을 정도였으나, 한기는 의리 용맹을 풍자하다가 복의(濮議)를 그르쳤고, 부필은 선학(禪學)을 좋아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을 부족하다 하지 않았고, 왕안석(王安石)에 있어서는 온 세상이 소인의 조종이라 하였으나,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다만 고집스럽다고 일컬었고, 주 문공(朱文公)이 또 명사(名士) 가운데 넣었으니, 충후함이 이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또한 매우 충후하였으니, 당개(唐介)는 임금 앞에서 ‘문언박(文彦博)이 기이한 비단을 짜 가지고 궁인에게 뇌물로 주어서 정승이 되었다.’고 꾸짖었는데, 그것이 실정이 아니었으나 〈문언박이〉 그 자리를 피하여 사례하고 변명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당개를 천거해 주기까지 하였고 한위공(韓魏公)이 영릉사(永陵使)가 되었을 때에 소명윤(蘇明允)이 공문[移書]으로 ‘그가 어버이 장사를 후하게 지냈다.’고 책망하여 화원(華元)에 견주기까지 하였는데, 위공의 실정이 아니었으나 구연(瞿然)히 일어나 빌기를 ‘감히 가르침을 받지 않으리요.’ 하였으니, 당시 대신들이 자신이 충후한 도를 이행하고, 또 남의 직언(直言)을 능히 용납하였음이 이와 같으니, 대개 대신으로서 남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임금이 간하는 말 듣지 않는 것을 어찌 〈들으라고〉 간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대신에게는 속이지 못하게만 하고, 소신이 거슬리는 것을 노하지 말아서 양편에 다같이 후하게 하시어, 각기 그 명분을 이루도록 하면 사사로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 풍속이 사사가 많고 법 제정이 역시 잘못이 있으니, 처첩(妻妾)의 친척과 동성(同姓) 친척이 다같이 상피(相避)하는 것은 대저 사사를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관직에 있는 자가 혹은 처첩의 시마(緦麻) 친척은 피하고 당형(堂兄) 종숙(從叔) 사이에는 피하지 않고 벼슬 받으니 동성이 도리어 이성(異姓)보다 더 경하게 되고, 이밖에는 본래부터 피하는 규정이 없어서 기공(朞功) 친척간에 〈항렬〉 높은 이가 낮은 직위에 있고 〈항렬〉 낮은 이가 높은 직위에 있게 되었으니, 신이 일찍이 그 거슬림을 보았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지금부터 오복(五服) 친척 가운데서 〈항렬〉 높은 자가 낮은 직위에 있다면 모두 다른 벼슬로 옮기도록 하여서 조정에서 인륜을 두터이 하소서.

5. 조종의 법을 복원시켜서 해당 관서에게 법을 지키도록 단속하실 것입니다. 대저 《경제육전(經濟六典)》과 《속육전(續六典)》은 조종의 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논의하는 자는 반드시 조종의 법은 고칠 수 없다 하는 것은 조종께서는 우려하는 마음이 깊고 일을 고쳐 본 경력이 많아서 법을 제정하는 데 주밀하지 않은 점이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원·속 두 법전이 태조(太祖)께서 처음 제정한 것이 아니고, 태종(太宗)께서 고려의 옛법에서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어서 제정한 것이, 마치 명나라 법이 당나라 법에 의거한 것과 같습니다. 지금에 쓰는 《대전》이 원·속 두 법전에서 나왔으나, 때에 따라서 빼고 넣었기 때문에 그 본진(本眞)이 점점 없어져서 조종의 좋은 법과 거룩한 뜻이 더러 소멸되어 남아 있지 않고, 또한 유사(有司)가 백 년 지난 문부(文簿)를 판별하려면 의거할 곳이 없으니, 신은 청하건대, 원·속 육전을 인출하여 각 지방 관서에 펴 주어서 《대전》과 함께 참고하여 쓰도록 하소서. 신이 보기에는 선왕의 정사는 인(仁)과 서(恕)를 숭상하고 무릇 사람을 치죄할 때에는 실정과 법을 여러번 참작하다가 유사의 논죄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였으니, 이 때문에 법사(法司)가 그 실정은 가벼운 죄인 줄 알면서 고의로 그 율(律)을 무겁게 정하여서 위의 처분대로 마침내는 말감(末減)을 따르더니, 그것이 점차 성풍(成風)한 중에 금옥(禁獄)이 우심하오니, 전하께서 속이지 말고 법을 잡기를 마치 장석지(張釋之)가 임금의 의사 경중을 따르지 않던 것처럼 하도록 단속하신다면, 모든 옥사(獄事)가 매우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6. 제조(提調)를 혁파하여 도당(都堂)에 통솔되도록 할 것입니다. 삼공(三公)이 육경(六卿)을 통솔하고, 육경이 모든 관리[執事]를 통솔하여야, 체통이 서로 유지되고 정사가 한 곳에서 나올 것인데, 요즘에는 삼공이 하는 일 없이 도당에 앉아 있어 산관(散官)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으며, 관청마다 각기 제조를 두고 저마다 따로 법을 만들어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통섭할 도리가 없으니, 내수사처럼 미미한 관아에서도 역시 자의로 《속전(續典)》 외의 교령(敎令)을 시행하니, 공문서가 어지러워져서 다른 관원이 받들어 이행하기가 현란합니다. 신은 원하건대, 제조를 태거(汰去)하여 각 관직을 육조에 붙이고, 대제배(大除拜) 대정령(大政令)이 있을 때에는 육조에서 도당의 명령을 들어서 시행하여야, 조정의 체제가 대강 설 것이니, 이것이 조종의 법입니다.

7. 시신(侍臣)이 교명(敎命)을 봉환(封還)하고 논박하는 일입니다. 당나라에서부터 내려오면서 한림(翰林)이 내조의 제령[內制]을 맡고 급사(給舍)가 외조의 제령[外制]을 맡아서 무릇 임명과 파면이 있을 때에 모두 제사(制詞)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림이나 급사가 다같이 조칙을 봉박(封駁)할 수 있으니, 한림은 내전(內殿)에 두어서 임금을 모시는 데에 따라서 옮겼고, 급사는 중서문하(中書門下)에 두었던 것인데, 전조(前朝)에서는 문하부(門下府)에 두었었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의정부에 두었다가 그 다음에 분리해서 별도로 둔 것입니다. 대개 당시에 서무는 의정부에서 처리하였으나 간원이 붙이게 된 것은 곧 옛적에 급사를 중서문하에 두었던 의미입니다. 지금에 와서 옛것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선조(先朝)에 있을 때에 연경(燕京)에 가서 대명 백관도(大明百官圖)를 살펴보았더니, 육과 급사중(六科給先朝)은 낮은 7품 벼슬로도 맡은 임무는 우리 조정의 육승지와 같아서 어가[鸞駕]를 인도하고 어명[綸命]을 출납(出納)하고, 혹시 임금의 잘못이 있으면 논박하여 아뢰고, 혹 뜰에 내려서서 간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가까이 모셨기 때문에 일을 보고 겪는 것이 빨라서 금하지 못할 것도 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승정원은 서정을 관할하고 있으니, 권리는 상서성(尙書省)과 같습니다. 그러나 상서랑(尙書郞)도 또한 논박할 수 있었고 오늘날 사간원이나 사헌부는 이름은 시종 지신이라고 하지만 외관(外官)과 같은 청사에 있으면서 겨우 서리들의 문견 기록을 얻어 보고 성명(成命)이 내려진 뒤에 비로소 논박하니, 그리하여 늦어지게 됩니다. 홍문관은 곧 옛날 한원(翰苑)인데, 비록 혹 일을 논하더라도 논박할 만한 사두(詞頭)가 없고, 다만 감사(監司)에게 내리는 교서나 지을 뿐이요, 격환(繳還)하는 고사(故事)가 없으니, 그렇다면 우리 조정의 시신은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승정원이 모두 대사간을 겸직하고 상서랑의 권리를 가지고 급사중의 책임을 맡도록 해서 드러나게 봉박하는 책임을 수행하도록 한다면 곤직(袞職)에 있어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요, 만약 지당합니다 하고 다만 문서처리나 할 뿐이라면 서리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순임금이 대언(代言)에게 명할 때에는 반드시 일러 주기를 ‘나의 말을 출납(出納)하여야 오직 신임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른바 신임한다는 것은 한갓 출납하는 것뿐이 아닙니다.

8. 종실의 훌륭한 자를 뽑아서 쓸 것입니다. 대저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수(數)가 있으니, 옛날에는 사람을 쓰는 데 오직 그 재질이 훌륭한 것만 보았고, 가깝고 멀고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땅이 비좁아서 인재가 나는 것이 한정이 있는데, 가리는 것은 갈래가 많고 쓰는 데는 빼놓을 것이 많아서, 서얼(庶孽)이면 쓰지 않고 재가(再嫁)하여 낳은 자식도 쓰지 않으니, 설사 뛰어난 인재가 있어서 주의(周顗)·범중엄(范仲淹)·조여우(趙汝愚) 같은 무리가 그 가운데 태어날지라도 역시 뜻을 펴 볼 길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논할 것도 없으나, ‘종자(宗子)는 오직 성(城)이다.’ 말은 시인이 이른 바요, 우리 광릉(光陵)께서 또한 많이 채용하셔서 백관들 사이에 두었으니, 지금이라도 먼 친척에 훌륭한 사람을 뽑아서 조정 반열에 참가시켜 쓴다면 또한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전한(前漢)은 동성(同姓)을 많이 봉해서 오래 유지하였고, 조위(曹魏)는 골육(骨肉)을 소박하여서 빨리 망하였으니, 모두가 경계할 만한 일입니다.

9. 사관(史官)을 더 두어 선악(善惡)을 기록할 것입니다. 국가의 사관으로 조정에는 홍문관(弘文館)·승정원(承政院)·예문관(藝文館)과 육조에 각기 한 사람씩 두었으니,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모두가 중앙에만 있기 때문에 지방의 풍속이 나쁘고 좋음과 인물이 잘나고 못난 점을 기록할 수 없으니, 악한 것은 기록하지 못하여도 탈될 것은 없으나, 선한 것이 행여나 빠진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동방 선비가 사장(詞章)이나 읽기를 즐기고 뜻을 세우는 데는 스스로 힘쓰지 않아서 비록 관가의 일로써 독책할지라도 오히려 힘써 하지 않을 것이니,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손성(孫盛)의 필법을 나타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조(前朝)의 역사는 난잡하여 볼 만한 것이 못되고, 선왕의 실록도 필경 좋은 일이 많이 빠졌을 것입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각 지방의 막료(幕僚)에게 춘추관을 예겸(例兼)하도록 하고, 수령(守令)에게도 학문이 넉넉한 자는 또한 춘추관을 겸임토록 하여서 기재할 임무를 맡기고, 한 번 춘추관을 겸하였으면 비록 파면된 뒤라도 듣는 대로 계속 기재해서 직업삼아 하도록 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10. 감사(監司)를 오래 유임토록 하고 가끔 어사(御史)를 보낼 것입니다. 대저 ‘지나는 곳마다 인심을 교화시켜서 신기한 자취를 남긴다.’는 성인으로도 반드시 3년이 지나야 이루는 것이 있다고 하니, 요즘 감사로서 어찌 능히 한 해 동안에 업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옵건대 6도의 감사를 다같이 〈함경도·평안도〉 두 도의 감사처럼 주의 목사를 겸직토록 하여 3년 임무를 마치도록 한다면, 조세 행정이 흡족할 수 있을 것이오, 이것이 또한 조종의 법입니다. 선왕께서는 조정의 신하를 보내서 사방의 폐단을 물어보고 더러는 적발토록 명하였으나, 일정한 제도는 없었으니, 신은 원하옵건대, 해마다 봄 가을에 강직한 조정 신하를 뽑아 벼슬에 따라 권리를 주어 보내서 사방을 순시한 다음 간대(諫臺)에 올려 탄핵하도록 한다면, 지방 관원이 민간에게 마음대로 직권을 남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논의하는 자는 더러 간사한 아전의 횡포를 미워해서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던 분사 어사(分司御史)를 두어서 단속하던 제도를 모방할려고 하나 나라는 적은데 관원이 많게 되면 좋지 못합니다.

【원전】 12 집 675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연산 9권 1년 10월 19일 (무진) 002 / 판의금부사 이철견 등이 해랑도 사람의 쇄환과 개성부의 성곽 수축을 아뢰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철견(李鐵堅) 등이 아뢰기를,

“해랑도(海浪島)에 내왕하는 사람은 전에 이미 논죄하였는데, 섬 가운데 도망해 사는 7집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입니다. 다만 섬이 중국에 가까워서 마음대로 쇄환(刷還)할 수 없기 때문에 성종조에서 쇄환하겠다는 뜻으로 요동(遼東)에 자문(咨文)을 보냈지만 여태까지 회보하지 않으니, 해사로 하여금 쇄환의 편리 여부를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철견이 또 아뢰기를,

“이보다 앞서 개성부(開城府)의 성첩을 수축하다가 가뭄 때문에 공사를 중지하였으며, 한산군(韓山郡)의 성터도 이미 정하였는데, 그때 역시 엄동이어서 쌓지 않았습니다. 성곽(城郭)은 나라의 울타리오니, 수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올해는 좀 풍년이오니, 명년 봄에 수축을 완성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13 집 41 면

【분류】 *호구-이동(移動) / *군사-관방(關防) / *재정-역(役)

 

연산 12권 2년 1월 10일 (기축) 002 / 개성부·한산군의 성 쌓는 일을 이세인이 아뢰다


사헌부 지평(持平) 이세인(李世仁)이 낙산사(洛山寺)에 소금 공급하는 불편과 내수사(內需司)에서 함부로 아뢴 일이 불가하다는 것을 재차 논하며 이어 아뢰기를,

“개성부(開城府)와 한산군(韓山郡)의 성(城)을 금년 봄에 쌓도록 명하셨사온데, 국가에서 전자에 국상을 당한 데다 겹쳐서 3 명의 중국 사신이 왔었으므로 민력이 심히 지쳐 있사온데, 지금 이 역사를 시작한다면 이는 거듭 지치게 하는 것이오며, 지금 비록 역사를 시작한다 할지라도 3, 4월까지도 공역을 끝내지 못할 것이니, 장차 백성이 농사를 짓지 못할가 걱정이옵니다. 성을 쌓는 것은 국가의 대사이니, 비록 폐할 수는 업을 지라도 가을을 기다려서 쌓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성을 쌓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63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사급(賜給) / *왕실-궁관(宮官) / *사상-불교(佛敎) / *수산업-염업(鹽業) / *재정-역(役)

 

연산 12권 2년 1월 11일 (경인) 003 / 축성 체찰사 이철견이 성 쌓는 일을 아뢰다


축성 체찰사(築城體察使) 이철견(李鐵堅)이 아뢰기를,

“개성부(開城府)와 한산군(韓山郡)의 성은 계축년에 역사를 시작했다가 흉년이 들었으므로 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산(韓山)은 돌을 이미 주워 놓았으니 역사가 불과 한 달이면 끝날 것이옵고, 개성부는 전에 이미 쌓기 시작했다 끝내지 못한 것이므로, 대간(臺諫)이 비록 국휼(國恤)과 천사(天使)를 가지고 말을 한다 하나 지난해는 자못 풍년이 들었는데, 지금 만약 쌓지 않으면 명년 역사가 또 어떻게 될지 보장하기 어렵사오니, 청컨대 쌓는 역사를 끝내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승정원에 물으매, 승지들이 아뢰기를,

“한산의 성은 농사철 이전에 끝마칠 수 있다면 쌓게 하는 것도 무방하오며 개성부의 성은 만약 역사를 시작한다면 경기에서 선군(船軍)과 정병(正兵)을 영솔해 가야 할 것이온데, 지금 선릉(宣陵) 남지(南池)를 수축하는 일들이 있으니, 다섯 군데의 역사를 일시에 병행한다면 백성이 반드시 지칠 것이오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서 성쌓는 일을 끝내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13 집 64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연산 12권 2년 2월 29일 (정축) 004 / 대간이 경연에 힘쓸 것 등을 상소하다


대간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듣자옵건대, ‘상(上)에서 법을 취하면 겨우 그 중(中)을 얻고, 중에서 법을 취하면 이는 하(下)가 된다.’하옵는데, 고니[鵠]를 새기다 이루지 못하면 그래도 따오기[鶩]와 같지만, 범을 그리다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개와 같다는 비유가 정히 이를 이른 것이니, 사대부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임금임에리까. 이러므로 옛날의 크게 유위(有爲)한 임금은 뜻을 세움을 먼저 할 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으니, 뜻을 세움이 높은 데에 있으면 작게 이루는 것으로써 만족하게 여기지 않아서 진취하는 바가 원대한 데에 도달하고, 뜻을 세움이 높지 않으면 소행이 사위(事爲)의 말단에 급급한 데에 지나지 않아서 날로 낮은 데로 향할 따름입니다. 전일에 신들이 전하의 과실을 논하였더니, 하교하시기를,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니고는 누가 과실이 없겠느냐.’하시고, 전하께서 간쟁을 거절하시는 것을 논하였더니, 하교하시기를, ‘너희들이 비록 그렇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겠느냐.’하시매, 신들은 전하께서 우연히 이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여겼사온데, 이제 와서 보니, 전하께서 실정(失政)은 더욱 심해지고 간쟁은 더욱 굳게 거절하시면서 오히려 회오(悔悟)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하교하시기를, ‘내가 밝지 못하다.…’하셨습니다. 아아! 임금이 간쟁을 거절하는 것을 금기로 삼지 않으면 정론(正論)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으며, 요순(堯舜) 같기를 스스로 기약하지 않으면 좋은 정치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그 뜻을 정하시어 요순 같기를 기약하시고서, 요순의 정일(精一)하여 중(中)을 잡은 것이 제왕의 학문이 된다는 것을 들으시면, ‘저도 임금이요 나도 임금인데, 저는 이를 능히 하거늘 나는 이를 능히 하지 못한단 말인가.’하시고, 날로 경연(經筵)에 납시어 치도(治道)를 강론하시고 요순이 여러 신하에게 어진 정승을 천거하게 하여, 그를 백규(百揆)에 앉혀서 평화롭고 명랑한 정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들으시면, 자신을 책하기를, ‘저도 임금이요 나도 임금인데 저는 이것을 능히 하거늘 나는 이것을 능히 하지 못한단 말인가.’하시와 어진 정승을 가려 천위(天位)를 함께하여 요순과 같지 못한 것은 버리고 요순과 같은 데로만 나아갈 것을 생각하소서. 간쟁(諫諍)을 받아들이고 환시(宦寺)를 억제하고 형벌(刑罰)을 삼가고 민력(民力)을 아끼는 일 같은 것으로 말하면 모두 지금 당한 급무이오니, 전하께서 이 두어 가지 일을 지성으로 행하신다면 어찌 요순에게 미치지 못할 것을 걱정하오리까. 삼가 그 일을 아래와 같이 아룁니다.

1. 경연(經筵)에 부지런하는 것입니다. 무릇 임금의 마음은 다스림을 만들어 내는 근본인 동시에 만화(萬化)의 근원이니, 그 본원(本源)이 맑고 깨끗하여 마치 거울이 비치고 저울대가 평평한 것과 같으면, 능히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게 알아서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각각 마땅함을 갖게 될 것이오며, 다스림을 만들어 내는 근본을 깨끗하게 하게 온갖 정화(政化)의 근원을 맑게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오라, 다만 경연에 부지런히 납시어 성학(聖學)을 강명(講明)하고 치도(治道)를 자문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근자에 옥체(玉體)가 미령하시어 경연에 납시지 않은 적이 거의 서너 달이 되었사오니, 비단 성학(聖學)이 중도에서 폐하게 된 것뿐만이 아니라,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을 접견하실 길이 없고, 금중(禁中)에서 대하시는 것은 내시 밖에 없으니, 모르시는 가운데에 마음이 옮겨가고 뜻을 빼앗기는 것이 어찌 적다하오리까. 〈이런 처지로서는〉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정도(正道)를 얻지 못함을 괴이하게 여길 수 없사옵니다. 옛날 한 고조(漢高祖)가 병이 나서, 문지기에게 명령하여 여러 신하를 들여보내지 못하게 했는데, 번쾌(樊噲)가 문을 밀고 곧장 들어가고 대신들이 그 뒤를 따라가 보니, 고조가 내시 한 사람을 베개삼아 누워 있으므로 번쾌 등이 고조를 뵙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폐하(陛下)는 유독 조고(趙高)의 일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하니, 고조가 웃고 일어났습니다. 대저 문을 밀고 들어가 뵙는 것은 진실로 임금이 하루라도 정사(正士)를 보지 않으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들이 득의하여 총명을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궁(聖躬)이 강거하시게 되면 경연을 게을리하지 마시고 시종 여일하게 하소서.

2. 어진 정승을 택하는 것입니다. 삼공(三公)이란 임금의 팔다리요 백관(百官)의 모범이라, 국가의 치란(治亂)과 종사(宗社)의 안위(安危)가 하나도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정괄(鄭佸)이 죽은 뒤로 전하는 여러 달 정승을 자리를 비워 두시니,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목을 늘이고 눈을 씻으며 어진 정승이 나오기를 기대하였는데, 급기야 선마(宣麻)를 보니 용렬한 정문형(鄭文炯)이었으니, 누구인들 실망하지 않으리까. 대저 서까래의 지목은 대들보에 알맞지 않고 느린 말[馬]의 자질로는 운소(雲霄)에 올라가지 못하는 법이온데, 지금 문형(文炯)을 삼공의 자리에 않힌 것은 곧 서까래를 대들보로 쓰고 느린 말로 운소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이니, 이러고서 지치(至治)를 이루고자 바란다는 것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문형을 파직하시고 알맞은 인재를 다시 구하여 삼공의 소임을 맡기소서.

3. 간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나무는 먹줄을 맞으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언을 들으면 성스러워진다.’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성된 말이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실에는 이롭다.’하였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에 간쟁을 거절하고서 어지러워지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진 시황(秦始皇)이 직언을 듣기 싫어하다가 망이궁지변(望夷宮之變)을 빚어냈고, 수 양제(隋煬帝)가 사람들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다가 강도지화(江都之禍)를 재촉한 일 같은 것은, 앞에 간 수레가 엎어진 것을 뒤에 오는 수레가 조심해야 하는 본보기인데, 근일에 대간의 논계를 하나도 들어 주신 일이 없으시니, 심히 조정의 복이 아니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아집을 버리시고 남의 공정한 의견을 다르시며, 허심 탄회하여 간쟁을 받아들이소서.

4. 내시들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내시는 궁증을 지키고 명령을 전달할 따름이니, 어찌 조정의 공사(公事)에 간여할 수 있으리까. 한·당(漢唐)의 말엽에 내시들이 권세를 부려 조정의 정사에 멋대로 간여하여 마침내는 공경(公卿)을 노예와 같이 보고 천자(天子)를 문생(門生)과 같이 여겨, 나라의 형세가 무너져서 그 화가 참혹하였으니, 이는 대개 일찌감치 분변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직 우리 성종대왕께서 이 폐단을 깊이 아시고 법으로써 통렬히 다스리시되 털끝만큼도 용서하지 않으셨으니, 사왕(嗣王)이 법받아야 할 일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부터 내시들이 용사(用事)하기 시작하여 용선(用善)은 앞에서 먼저 부르고 효강(孝江)은 뒤에서 화답하였사온데, 그 문서와 법령(法令)을 농간하여 천청(天聽)을 기만한 죄는 효강이 오히려 용선보다 더하오니, 용선·효강이 어찌 유독 성종 앞에서는 손을 움츠리고 전하 때에는 간사를 부리는 것입니까? 어찌 전하의 첫 정사에 한 번 시험하여 그 천심(淺深)을 엿보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서는 한심이 여기지 않는 자가 없사온데, 전하께서만 깨닫지 못하시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그 죄를 다스리시어 그 나머지 자들을 일깨우소서.

5. 형벌(刑罰)을 삼가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어쩌다가 저지른 재앙은 사(赦)해 주고, 고의로 방종한 것은 형(刑)을 가한다.’하였으니, 만약 죄가 중형에 해당하는데 도리어 경하게 하면 간악한 마음을 키우는 것이 되고 죄가 경형에 해당하는데 도리어 중하게 하면 호생(好生)의 덕을 이지러지게 하는 것이므로 진실로 기쁨으로 인하여 가벼이 풀어 주어도 안되고, 성남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죄주어도 안됩니다. 근일에 와서 한때의 사랑과 미움으로써 경중이 전도되는 것은 매우 작은 일이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밝히 살피시고 신중히 처결하시어 중(中)을 잃지 말게 하소서.

6. 민력(民力)을 아끼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백성을 보기를 상할 것 같이 여겨 어린 아이를 보호하듯이 할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편안하고자 하는 것을 알면 어루만져서 수고롭지 않게 하며, 백성이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을 알면 후히 하여 궁곤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왕씨(王氏)는 말하기를, ‘세상을 다스리는데 백성을 사랑하는 것만한 방법이 없다’하였고,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하였으니, 진실로 백성이란 오직 나라의 근본이어서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성상(聖上)께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으셨는데도 대신(大臣)이 한 가지 일을 맡게 되면 백성들의 농사때임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봉행하여 일을 끝내는 것만을 능사로 삼아서 국맥(國脈)을 쇠잔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근자에 축성 체찰사(築城體察使)가 개성부(開城府)·한산군(韓山郡) 등을 계청(啓請)하여, 아울러 올 봄 안으로 성을 쌓고자 하는 것을 전하께서 신들의 말을 들으시고 명하여 정지시키셨는데, 체찰사가 자기 뜻이 달성되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서 힘써 전의(前議)를 주장하여 다시 시행할 것을 청하여, 전하의 백성을 사랑스럽게 마음으로 하여금 도리어 백성을 해롭게 하는 일을 하시게 하였으니, 신들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대개 개성부나 한산군은 모두 다 내지(內地)로서 조석에 적(敵)을 받을 땅이 아니오니, 민력이 소생되고 농사가 한가한 때를 기다려서 쌓더라도 역시 늦지 않습니다. 신이 보기로는, 이 두 도(道)의 백성이 국상(國喪)을 당한 이래로 일차로 산릉(山陵)의 상장(喪葬)의 역사에 피곤했고, 재차로 중국 사신의 행차에 피곤했으며, 또 선릉(宣陵)에 나무를 심고 장생전(長生殿)에 황장목(黃腸木)을 운반하는 역군을 계속해서 조달했고, 그 나머지 공부(貢賦)를 출하하는 역꾼도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니, 한 집의 재력은 한도가 있사온데, 백성 부리는 역사는 쉴 줄을 모른다면 어찌 측은하지 않으리까. 이때를 당해서는 비록 입은 옷을 벗어서 입혀 주고, 먹는 밥을 밀어 주어 먹이더라도 오히려 유리 분산을 면하지 못할 터인데, 어찌 그 농사철도 헤아리지 않고서 또 성 쌓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나라를 튼튼히 하기를 원하면서, 도리어 나라의 근본을 흔든다면 되겠습니까. 단 강원(江原) 일도는 토지가 메마르고 주민이 드물어서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니며, 근일에 와서는 그 힘이 더욱 피곤하온데, 어찌 이미 피곤한 백성을 출역시켜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들어 이 쓸데 없는 승도(僧徒)들을 공양해서 되겠습니까. 하물며 불교의 요망하고 황탄함은 새 정사에 있어 마땅히 먼저 배척해야 할 바이온데, 지금 비록 그 무리들을 다 뽑아다가 군액(軍額)에 충당은 못할망정 어찌 존숭하고 신앙하여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왕은 그 덕을 써서 하느님께 기원하여 명(命)을 길게 하소서.’하셨으니, 옛날의 제왕은 덕을 공경하는 것으로써 명을 길게 하는 실상을 삼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연대를 오래 가게 하는 근원을 삼았으며, 일찍이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과 수를 얻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급하지 않은 역사를 정지하여 민력을 늦추어 주고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하소서.

7. 구장(舊章)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어기지도 잊지도 말고 옛 제도만을 따르라.’하였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선왕의 성헌(成憲)을 본뜨시어 길이 어김이 없게 하소서.’하였습니다. 주(周)나라에서는 선왕·강왕[成康]을 이르고, 한(漢)나라에서는 문제·경제[文景]을 일컫는 것은 능히 문왕·무왕[文武]과 고제·혜제[高惠]의 법을 지켰기 때문이니, 주(周)의 자손이 길이 문왕·무왕의 법을 지켰다면 어찌 능이 쇠락(衰落)하기에 이르렀으며, 한(漢)의 자손이 길이 고제·혜제의 법을 지켰다면 어찌 위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오직 우리 성종대왕께서 세상에 뛰어나신 고견으로 날마다 원신(元臣) 석보(碩輔)와 더불어 둘다 깊이 생각하고 먼 장래를 염려하시어 짐작 손익(損益)하여 《대전횡간속록(大典橫看續錄)》을 만들었는데, 무릇 정사를 좀먹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은 모두 삭제하고 싣지 아니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기구로 삼았으니, 그 자손 만세를 위한 계획이 지극하신 것이옵거니와, 전하께서는 이를 준수하여 잃어버리지 마셔야 하며, 일시의 이해(利害)로 자주 고쳐서는 안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효강(孝江)의 편녕(偏佞)을 사랑하실지라도 하늘에 계신 성종의 영(靈)에 어찌 하시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그 법을 준수하여 길이 길이 어김이 없게 하소서. 옛날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의 상신(相臣)이 되자 말하기를, ‘나는 내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지 못하면 마음에 부끄러워서 마치 저자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다.’하였는데, 태갑이 그 말을 아름답게 받아들여 능히 진실한 덕으로 끝마쳤으니, 태갑은 비록 중등 가는 임금이라 해도 오히려 요 순으로써 스스로 기약하였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생지(生知)의 성(聖)으로서 요 순으로써 스스로 기약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태갑(太甲)의 아래에 계시겠습니까. 동중서(董仲舒)는 말하기를, ‘학문을 힘쓰면 견문이 해박하여 아는 것이 더욱 밝아지고, 힘써 도(道)가 행하면 덕이 날로 나아가서 크게 공효가 있다.’하였고, 또 ‘생각을 더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이 말을 체득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상소의 사연은 진실로 좋으니, 내가 두고 보겠으며, 말한 일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다. 다만 상소에 경연에 나가지 않는 것을 들어 말한 것은 나 역시 그렇게 여기나 내가 바야흐로 병으로 복약(服藥)하고 있으므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매, 대간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원전】 13 집 77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재정-역(役)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경연(經筵) / *왕실-궁관(宮官)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연산 56권 10년 11월 3일 (기축) 004 / 전민을 빼앗긴 데 대해 불만을 품은 자들을 모두 고문하게 하다


한산(韓山)의 난언(亂言)한 사람 철중(哲中)의 공초에 ‘비록 국가라 할지라도 어찌 무단히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을 수 있는가.’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고발하러 온 사람 물금(勿金) 및 연루된 사람을 모두 고문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671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중종 5권 3년 1월 26일 (갑자) 002 / 대간이 노영손을 서용할 수 없음과 박상에 관한 일을 아뢰다


주강에 나아갔다.

대간이 합사하여 노영손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홍문관과 대간으로서 특지(特旨)에 따라 외임(外任)에 의망(擬望)된 사람은 있지만, 지금 헌납(獻納) 박상(朴祥)을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제수한 것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노영손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박상의 일은 이조에서 의망(擬望)한 까닭으로 낙점(落點)한 것인데, 나도 또한 그 연유는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음가에 대한 일은 마땅히 물러가 명을 기다리겠습니다마는, 영손의 일은 크기 때문에 아직도 합사해서 논계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원전】 14 집 223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중종 5권 3년 1월 26일 (갑자) 005 / 민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원(閔㥳)을 사간원 헌납(獻納), 김정(金淨)·김식(金湜)을 사간원 정언(正言), 박상(朴祥)을 한산 군수(韓山郡守), 노영손을 오위 도총관(五衛都摠管)으로 삼았다.

【원전】 14 집 22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중종 5권 3년 4월 8일 (을해) 002 / 송연손에게 쌀과 포목을 부의하도록 하다


명하여, 죽은 한산 군수(韓山郡守) 송연손(宋演孫)에게 쌀과 포목을 부의(賻儀)하도록 했다.【송연손은 왕의 즉위하기 전의 스승이다.】

【원전】 14 집 242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중종 27권 11년 12월 10일 (병진) 004 / 소격서를 없애고, 정조의 공상을 감할 것을 요구한 한산 군수 손세옹의 상소문


한산 군수(韓山郡守) 손세옹(孫世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일찍이 기신재(忌晨齋)가 잘못임을 목도하고, 지난 폐조(廢朝) 때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소를 올려 역력히 진달(陳達)하였었는데, 올여름에 성상께서 간원(諫院)의 말을 받아들여 영구히 폐지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다만 소격서(昭格署)에서 받는 정조(正租)는 곧 기신재에 쓰는 것인데, 기신재는 이미 폐지하였으나 정조는 아직도 제감되지 않아서 마치 침중한 병은 거의 나았으나 남은 증세가 아직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대범 도류(道流)란 것은 곧 황관 도사(黃冠道士)와 같은 따위입니다. 옛적에 연개소문이 유(儒)·석(釋)·황관 등 세 교(敎)를 일으키려고 솥의 세 발에 비유해서 보장왕(寶藏王)을 설득하여, 숙달(叔達) 등을 보내 입도(入道)시켜 줄 것을 당 태종(唐太宗)에게 주청(奏請)하였으니 이는 도류가 동방(東方)에 들어온 연원이요,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을 보냈었으니 이는 고구려 불법(佛法)의 시초이며, 호승(胡僧) 난타(難陀)가 진(晉)나라에서 왔었으니 이는 백제 불법의 시초요, 사문(沙門) 묵호자 아도(墨胡子阿道)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로 왔으니 이는 신라 불법의 시초입니다. 《삼국유사》의 이른바 ‘순도가 고구려를 세우고, 난타가 백제를 열고, 아도가 신라를 터전잡게 했다.’는 것이 이것인데, 신은 결코 고구려는 순도가 세운 것이 아니고, 백제는 난타가 연 것이 아니고, 신라는 아도가 터전잡게 한 것이 아님을 아오니, 역사를 만든 사람들의 말이 자못 떳떳하지 못합니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상문사(尙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살리며 존숭하여 받들었으되 신은 순도가 그 세상을 복되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침류왕(枕流王)이 신도(新都)에 불사(佛寺)를 창건하고 난타를 살리며 존숭하여 받들었으되 신은 난타가 그 세상을 복되게 하였음을 듣지 못했으며, 눌지왕(訥祇王)이 아도를 모례(毛禮)의 집에 두고 존숭하여 받들었으되 신은 아도가 그 세상을 복되게 하였음을 듣지 못했고, 고구려의 육왕(育王)이 곳곳마다 탑을 세워 세상에 가득하였으되 신은 옛 탑이 그 세상을 복되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며, 신라 진흥왕이 황철(黃鐵)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 삼존(釋迦三尊)의 장륙불(丈六佛)을 만들었으되, 신은 삼존 장륙이 그 세상을 복되게 하였음을 듣지 못했고, 경덕왕(景德王)이 49만 7천 3백여 근의 종을 만들었으되 신은 옛 종이 그 세상을 복되게 했음을 듣지 못했고, 보장왕(寶藏王)이 도사(道士)를 유생(儒生) 위에 앉혔고, 백천(百川)의 유로(儒老)들로 하여금 바다같이 왕양(汪洋)한 석도(釋道)를 조종(祖宗)삼게 하였지만 신은 도사들이 그 세상을 복되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성종 대왕께서 불도가 성화(聖化)에 상서롭지 못함을 아시어 축수재(祝壽齋)를 혁파했고 금번에 우리 성상께서 또한 기신재를 혁파하시어,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의 오도(吾道)를 위한 생각이 지극하시니, 이는 동방(東方) 만대의 복이옵니다마는, 유독 도류(道流)가 아직도 남아 그 뿌리를 다 베지 못한 듯합니다. 만일 눌지왕·침류왕 같은 모든 왕이 다시 후세에 나온다면, 탑을 세우거나 종을 만들거나 장륙불을 만들어 생민(生民)을 병들게 하지 않으리라고 기필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 어찌 오도를 우익(羽翼)하는 일이겠습니까? 실로 이단(異端)의 계제(階梯)를 만드는 일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통쾌히 소격서를 없애고 오도를 높이어 확대시키시되, 시급히 정조(正租)의 공상(貢上)을 제감하여 좋지 않은 폐단을 제거하소서.”

【원전】 15 집 243 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정론-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사상-도교(道敎) / *재정-전세(田稅) / *역사-전사(前史)

 

중종 36권 14년 5월 11일 (계묘) 004 / 충청도의 한산·서천·비인에 우박이 내리다


충청도의 한산(韓山)·서천(舒川)·비인(庇人)에 우박이 내렸다.

【원전】 15 집 537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중종 37권 14년 12월 4일 (갑자) 003 / 한산 군수 손세옹이 구언에 따라 5가지 일을 상소하다


한산 군수(韓山郡守) 손세옹(孫世雍)이 구언(求言)에 따라 상소한 것이 모두 5조인데, 첫째는 구법을 지키는 것, 둘째는 대신을 공경하는 것, 세째는 사습(士習)을 바로잡는 것, 네째는 인물 등용을 삼가는 것, 다섯째는 남을 헐뜯고 칭찬하는 일을 그치게 하는 것이었다.

【원전】 15 집 593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중종 44권 17년 5월 25일 (경오) 004 / 충청도에 황충이 있다


충청도 연산(連山)·한산(韓山)·임천(林川)·부여(扶餘)·은진(恩津)에 황충(蝗蟲)이 일었다.

【원전】 16 집 122 면

【분류】 *과학-생물(生物)

 

중종 50권 19년 2월 8일 (계묘) 002 / 충청도 서천 등지에 눈 내리고 천둥이 있다


충청도 서천(舒川)·한산(韓山)·홍산(鴻山)·남포(藍浦) 등 고을에 눈이 내리고 천둥하였다.

【원전】 16 집 287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중종 50권 19년 4월 7일 (신축) 004 / 충청도 청주 등지에 우박이 내리다


충청도 청주(淸州)·공주(公州)·괴산(槐山)·서천(舒川)·한산(韓山)·옥천(沃川)·연기(燕岐)·평택(平澤)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원전】 16 집 299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중종 55권 20년 8월 23일 (경술) 004 / 충청도 한산에서 우박이 내리다


충청도 한산(韓山)에 우박이 내렸다.

【원전】 16 집 448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중종 56권 21년 3월 8일 (신묘) 002 / 충청도 관찰사 이환이 도내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치계하다


충청도 관찰사 이환(李芄)이 치계(馳啓)하였다.

“도내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온양(溫陽) 7명, 아산(牙山) 3명, 예산(禮山) 6명, 서천(舒川) 10명, 이산(尼山) 10명, 결성(結城) 1명, 임천(林川) 65명, 정산(定山) 4명, 한산(韓山) 19명으로 도합 1백 22명입니다.”

【원전】 16 집 502 면

【분류】 *호구-호구(戶口) / *보건(保健)

중종 56권 21년 3월 16일 (기해) 003 / 충청도 부여·결성·홍주·문의 등지에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다


충청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부여(扶餘) 10명, 결성(結城) 3명, 홍주(洪州) 13명, 문의(文義) 4명, 보령(保寧) 16명, 연기(燕岐) 2명, 덕산(德山) 1명, 한산(韓山) 5명, 진잠(鎭岑) 8명, 이산(尼山) 8명이었다.

【원전】 16 집 503 면

【분류】 *호구-호구(戶口) / *보건(保健)

 

중종 61권 23년 4월 16일 (정사) 005 / 전라도 병사 우맹선이 부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다


전라도 병사 우맹선(禹孟善)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 경상도 병사 때에도 어버이가 늙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 봉양했었는데, 이번에 또 전라도 병사가 되었습니다. 신의 부모가 충청도 한산(韓山)에 사는데, 한산이 전라도 지경과 연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도가 다릅니다. 독자인데 나이 많은 부모가 있으므로 직에 나아가기가 편치 못하여 감히 사직합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비록 늙은 어버이가 있더라도, 남도(南道)는 북도(北道)와 같지 않아 때때로 가볼 수 있을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

【원전】 16 집 65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윤리-강상(綱常)

중종 61권 23년 5월 9일 (기묘) 001 / 경기·충청도·황해도·전라도 일대 고을에 우박이 내리다


경기 통진(通津)에 새알만한 큰 우박이 내렸는데, 반 자 가량씩이나 쌓여 이틀이나 녹지 않으므로 곡식이 손상(損傷)되었다. 용인(龍仁)·인천(仁川)·양지(陽智)·고양(高陽), 충청도 보령(保寧)·홍산(鴻山)·서천(舒川)·한산(韓山), 황해도 배천(白川)·강음(江陰)·송화(松禾), 전라도 무장(茂長)·태인(泰仁)·흥덕(興德)에 우박이 내렸다.

【원전】 16 집 661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 *농업-농작(農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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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90권 34년 4월 1일 (무술) 001 / 조서 모셔 두는 일과 천사를 접대함에 시문에 능한 이희보 등이 돕게 하다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김극성(金克成) 등이 아뢰기를,

“조서(詔書)를 모셔 두는 일에 대하여, 전에는 대신을 파견하여 벽제(碧蹄)에서 조서 모셔 두기를 청한다고 했으나, 지금 천사(天使)는 항상 《사조선록(使朝鮮錄)》【명나라 사신 공용경(襲用卿)이 지은 것이다.】을 본다고 하는데, 《사조선록》에는 다만 ‘근정전(勤政殿)에서 사례(私禮)를 행한 뒤에 조서를 받아서 대신으로 하여금 후전(後殿)에 안치하게 한다.’는 말만 실려 있고 ‘벽제에서 미리 청한다.’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별다른 말을 하지 말고 있다가 조서를 반포한 뒤 천사가 막차(幕次)에 들어가거든 어떤 관원을 보내 고하기를, ‘사례를 행하기 전에 조서를 받아 대신에게 주어서 후전에 안치하는 것은 전부터 예(禮)로 되어 있다.’고 한 뒤, 그의 태도를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은 필시, 전례를 끌어대어 막차에서 조서를 모시기를 청하면 천사가 반드시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천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조서를 공경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를 보려고 사람을 보내어 청하는 것은 미안한 듯하다. 조서를 반포한 뒤에 내가 의당 직접 나아가서 조서 모셔 두는 일을 청하고서 천사가 듣지 않거든 전례를 끌어대어 다시 청하는 것이 옳다.”

하였는데, 회계하기를,

“신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상의 하교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종조에 있어서는 문관인 천사가 나오게 되면 반드시 글 잘하는 선비들을 많이 모았었는데 서얼까지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글을 잘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이희보(李希輔) 역시 도움이 될 만한 재능이 있으나 대간의 논박을 받고 있는데, 이희보는 노련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천사를 접대한 경험이 있으며, 또 제술(製述)에 민첩합니다. 유람할 때 신들 역시 참례하게 되는데 천사가 시를 짓는다면 부득이 화답해야 될 것이니 반드시 도와 줄 사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신들이 반복하여 깊이 헤아려 본 뒤에 아뢰는 것입니다. 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도 시문에 능한 사람이라 역시 도와 줄 만한 사람인데, 천사가 서울에 머무는 시일이 필시 오래지 않을 것이니 그를 올라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이희보는 나도 생각하고 있다. 대간이 비록 논계하지만 이는 이희보 때문이 아니라 중국을 위한 일이니 대신이 아뢴 말이 마땅하다. 이약빙 역시 아뢴 대로 하라.”

【원전】 18 집 262 면

【분류】 *외교-명(明)

 

중종 95권 36년 4월 2일 (무오) 002 / 재앙을 이기기 위해 힘써야 할 열 가지 일에 대한 홍문관 부제학 등의 상소문②


제사를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역경(易經)》 췌괘(萃卦)에 이르기를 ‘임금이 사당을 두었다.’ 하였습니다. 제사하여 보답하는 것은 인심에 근본하는 것입니다. 성인이 의례를 제정하여 덕(德)을 이룸으로써, 사람은 매우 많으나 마음이 향하여 우러르는 데를 하나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심이 향하는 데를 몰라도 성경(誠敬)을 다할 수는 있고, 귀신을 헤아릴 수는 없어도 귀신이 오게 할 수는 있습니다. 인심을 모아 합치고 중지(衆志)를 모아 거느리는 도리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지극히 큰 것으로는 종묘(宗廟)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죽은 이를 살아 있을 때처럼 섬기고 없는 이를 있는 것처럼 섬기는 것이 지극한 효성입니다. 사직(社稷)에 제사하는 것은 만물이 땅에서 살며 곡식을 먹기 때문이고 석전(釋奠)·석채(釋菜)는 선성(先聖)·선사(先師)가 백성을 위하여 가르침을 세웠기 때문이며, 산천의 여러 신에게 제사하는 것은 재앙을 막고 환난을 물리쳐 백성에게 공이 있기 때문이며, 성황(城隍)·여단(厲壇)은 발원하는 곳이기 때문에 제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큰 일은 제사하는 데 있고 신명을 섬기는 도리는 또 성경(誠敬)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사전(祀典)이 갖추어져 있고 전하의 효성도 지극합니다. 그러나 재실(齋室)이 누추하고 제사가 정갈하지 못함이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으니 몸을 깨끗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며 정성을 더하고 공경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서울도 그러한데, 더구나 궁벽한 고을이겠습니까. 신(神)을 업신 여김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사(有司)의 죄입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대개 정성이 있으면 신명이 있고 정성이 없으면 신명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옛 성인이 제사는 반드시 참여하여야 신명이 있는 듯이 여기는 정성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근래 종묘의 대향(大享)을 으레 섭행(攝行)하는데 그 섭행도 대신(大臣)이 하지 않으니, 선조를 받들고 신을 공경하는 도리에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전하께서 날이 밝기 전에 옷을 입고 해가 진 뒤에 저녁을 드시며 정사에 근심하고 힘쓰신 30여 년 동안에 어찌 성궁(聖躬)이 편찮으신 적이 없었겠습니까. 심한 추위와 더위 그리고 비가 내릴 때에는 친히 거행하시기가 참으로 어렵겠으나, 그 밖의 날씨가 온화하여 알맞고 기체가 강녕하실 때에는 큰 사고만 없다면, 친히 제사하시는 의례를 빠뜨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전에 새앙쥐가 교우(郊牛)의 뿔을 갉아먹은 일을 《춘추(春秋)》에서 경계하여 보였는데, 더구나 이제 삼생(三牲)이 재앙을 당하여 날로 다 죽어 가니, 신명의 꾸짖음이 준엄하고도 절박하다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임금이 사당을 두는 의리와 신명이 있는 듯이 하는 정성을 다하고, 몸소 솔선하여 경건하게 신하들을 거느리소서. 그러면 일에 분주한 반열(班列)에 있는 백관(百官)과 집사(執事) 모두가 명령하지 않아도 공경하고, 말하지 않아도 성신(誠信)하며, 성내지 않아도 부월(鈇鉞)보다 위엄이 높아 앞에서 말한 재실(齋室)·제복(祭服) 같은 것을 절로 삼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교사(郊社)의 의례와 체상(禘嘗)의 의리에 밝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인효(仁孝)와 성경(誠敬)이 지극하고 성신을 따라 행하여 순리에 통달하는 것이 극진하면 하늘과 사람이 서로 부합하고 귀신이 복을 내려서 재변이 있다 하더라도 재변다운 화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의 고통을 돌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고, 전(傳)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니, 백성을 아끼지 않고서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백성을 자식처럼 아끼고 자식처럼 보호하여, 가렵고 아픈 것을 모두 내 몸보다 절실하게 여기고 환·과·고·독(鰥寡孤獨)을 반드시 먼저 어루만져 기르며, 그 전리(田里)를 제정하고 농사와 가축 기르는 것을 가르쳐,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되 풍년에는 일년 내내 배부르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임금의 정사의 근본입니다.

보건대 전하께서 백성을 아끼는 정성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백성을 중하게 여기는 정사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에 수재와 한재로 기근이 거듭 이르므로, 농사에 힘쓰는 백성이 한 해가 다하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하루아침에 굶어 죽는 목숨을 건지지 못하여, 중등 가는 재산을 가진 집도 열 집 중에서 아홉 집은 비었으니, 떠도는 백성이 어떻게 의지하여 살겠습니까. 그렇다면 돌보아 구제하고 곡식을 대여하는 방도를 마치 불 속에서 구제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지듯이 급급하게 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아치 가운데에는 자상하고 정성스러운 무리가 적고, 한없이 탐욕하고 포학한 무리가 많습니다.

납세를 급하게 독촉하여 일을 잘 처리한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생각하고, 처첩이 입고 먹는 것을 지극히 풍부하게 하려고 생각하며, 제가 섬기는 권세 있고 높은 자가 뇌물을 좋아하면 그 욕망을 채워 주려고 생각하고, 제가 아는 가난한 자가 구제하여 주는 것을 은덕으로 여기면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생각하여, 공교하게 명색을 만들어 위축된 백성을 침탈하니, 관가의 창고에는 곡식이 어지러이 많으나 민간에는 텅 비어 베도 없습니다. 그 밖에 변방의 장수가 잔학하고 여러 관사(官司)가 침탈하는 것도, 이와 같은 무리는 있는 곳마다 그러하여, 전하의 어린 백성이 재변에 한 번 괴롭고 가혹한 정사에 다시 괴로움을 당하므로, 그 시름하는 소리가 높으나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이뿐이 아니라, 보병(步兵)·수군(水軍)은 토목일에 지치고【왕자, 왕녀의 집을 지을 때에 튼튼하고 크게 하여 전보다 낫게 하려고 힘쓰므로, 서울에 올라온 보병과 경기의 수군이 늘 그 일에 이바지하느라 몹시 고달팠다.】 선상(選上)된 조례(皂隷)는 무거운 부과에 괴롭습니다. 재산을 기울이고 논밭을 죄다 팔아서 그 신역(身役)에 응하고는, 집에 돌아와 생업을 이을 수 없으면 서로 이끌고 타향으로 떠나는데, 그 폐해가 친척과 이웃에 미치므로, 원한의 기운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이러한데도 화기(和氣)가 감응하여 제때에 비가 오고 개는 고른 날씨를 바란다면 어찌 아득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한 선제(漢宣帝)가 ‘백성이 그 전리(田里)에 안정하여 탄식하고 시름하는 소리가 없는 것은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다스려지기 때문이니, 나와 이 일을 함께 할 자는 오직 양이천석(良二千石)이라야겠다.’ 하였습니다. 대저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 중에서 수령(守令)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그 선임(選任)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임금이 이 백성의 부모가 된 마음으로 어린 자식의 목숨을 자상한 관리에게 맡기지 않고 범과 이리의 입에 맡기는 것이 어찌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조종(祖宗) 때의 천거하던 법은 그 생각이 매우 깊고 조정(朝廷)이 이를 거행한 것은 그 뜻이 매우 아름다운 것인데, 경대부(卿大夫)가 성심(聖心)을 몸받지 않고 사정에 따라 공사를 해치며 용렬한 자를 마구 천거하여 먼저 좋은 법을 무너뜨립니다. 대저 천거하는 자가 이런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기가 이롭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군민(軍民)을 침탈하는 것은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의 소행이 아니라 바로 조정의 소행입니다. 조정이란 시방의 근본인데, 근본을 비루지 않고서 그 말단을 다스릴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조정에 염치가 있어서 침탈하는 폐단을 없애고, 좋은 법에 장애되는 것이 없어서 선임(選任)의 공정을 얻는다면, 아마도 참다운 혜택이 아래에 미쳐 백성이 소생해서 화기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화(敎化)를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두 가지가 있는데, 형정(刑政)과 교화(敎化)뿐입니다. 형정은 밖에서 제재하는 방도이고 교화는 마음에서 느끼게 하는 방도인데, 형정으로 제재하면 백성이 면하되 염치가 없게 되고 교화하여 느끼게 하면 염치가 있고도 바루어지는 것입니다. 대저 교화하는 방도는, 그 사람의 마음에 없는 것을 굳이 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도(常道)를 지키는 덕(德)은 각각 스스로 넉넉히 갖추었으므로, 그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것에 말미암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소 행하여 이끌어 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이 없어서 떨쳐 일어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교화가 밝지 않아서 사습(士習)이 바르지 않으므로, 절의(節儀)와 염치가 땅을 쓴 듯이 죄다 없어졌습니다. 인심이 날로 투박하여져서, 명절(名節)과 행검(行檢)이 귀한 줄을 모르고, 오직 아첨하고 유연하게 처세하며 앞 다투어 이록(利祿)을 구하여 세력에 붙는 것을 힘쓸 뿐입니다. 권세가 있는 곳이면 멀리서 바라보고도 쏠리듯 하고, 세력이 있는 곳이면 기미를 보고 먼저 달려가서, 위를 속이고 아래에 붙는 풍습이 일어나고, 공도(公道)를 저버리고 사리(私利)를 꾀하는 폐단이 일어났는데, 저번에 있었던 일이 대개 이미 이를 증험한 것입니다.

사습이 어그러지자 풍속도 따라서 무너지고 삼강(三綱)이 땅에 떨어져 인륜의 변고가 잇달아 일어나서,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종이 상전을 죽이고 아내가 지아비를 죽이니, 그 변고는 하늘의 재변보다 심한 것입니다. 이에 이르러 천리(天理)가 무너지고 인도(人道)가 죄다 없어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대개 인심이 바르지 않은 것은 교화(敎化)가 밝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고, 교화가 밝지 않은 것은 이끄는 것이 도리에 어그러진 데에서 말미암습니다.

삼대(三代)의 학문은 다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면 백성이 아래에서 새로와지는데, 이것은 다 임금이 몸소 행하는 데에 근본하여 마음에서 얻는 것이고, 밖에서 빌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학교의 정사가 인륜에 근본하지 않고 있으며 권려(勸勵)하는 방도는 사장(詞章)을 외는 말단에 있을 뿐인데 사장을 외는 것도 폐기할 수는 없으나,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근본은 참으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신에서 반성하여 그 근원을 밝혀 인륜의 도리를 다하고 교화의 근본을 세우소서. 그러면 감화(感化)가 풀이 바람에 쓸리는 것과 같이 빨라서, 사습이 절로 바루어지고 민덕(民德)이 절로 두터워질 것이니, 화기를 가져오고 재변을 그치게 하는 도리로서 무엇이 이보다 낫겠습니까.

형옥(刑獄)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늘이 만물에 비와 이슬을 내려서 살리고 서리와 눈을 내려서 죽이는 것은 모두가 인애(仁愛)하는 것이고, 성인(聖人)이 백성들을 덕례(德禮)로 기르고 형벌로 위엄을 보이는 것은 모두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백성은 혹 이욕(利欲)에 움직이기도 하고 과오에 빠지기도 하고 속임수에 걸려들기도 하고 연체(連逮)되기도 하는데, 일의 정상이 천 가지로 변하고 실정과 거짓이 만 가지 꼬투리이므로, 지극히 밝지 않으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없고, 지극히 공정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고 끊어진 것은 다시 이을 수 없으니,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천지의 인애를 몸받고 생물의 마음을 미루어 죄 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고 옥사(獄辭)를 친히 보시어 사수(死囚)를 삼복(三覆)하시니 삼가고 돌보는 뜻이 지극하시나, 옥송(獄訟)을 들어서 결단하는 관리는 사정을 써서 공정하지 않기도 하고 재능이 모자라서 밝지도 못하여, 백성의 살갗을 다치게 하고 백성의 목숨을 해칩니다. 그래서 조리가 바른 자가 그 실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상이 가벼운 자가 흔히 무거운 죄에 빠지니, 가슴 속에 쌓인 원통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조옥(詔獄)을 설치하여 추고하는 것은 임금이 친히 추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은 억울한 일을 잘 살피기 위한 것인데, 지금은 조옥에 들어간 자가 스스로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으레 고분고분 승복하여 성상의 인자함으로 특별히 용서받기를 바라니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사림(士林)의 화가 반복하여 여러 번 일어나 형벌에 숨진 사대부가 얼마였는지 모르는데, 그 죄진 것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고 정상이 명백하여 왕법(王法)이 용서할 수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그 사이에 어찌 그 죄가 아닌데 무거운 벌을 받고 죽어서 어두운 지하에서 원통한 마음을 품은 자가 없겠습니까.【이를테면, 기묘년에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기준(奇遵)과 유생(儒生) 홍순복(洪順福) 등이 다 무함당하여 죽었는데 이는 남곤(南衮)·심정(沈貞)·이항(李沆)이 한 짓이며, 임진년에 생원(生員) 이종익(李宗翼)은 상소하여 여러 가지를 아뢰었기 때문에, 을미년에 진사(進士) 진우(陳宇)는 항간에서 의논하였기 때문에 참형당하였는데 이는 김안로(金安老)가 무함한 것이었다.】원기(冤氣)가 맺혀서 흩어지지 않는 것이 많으면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화기를 상하여 재변을 부르는 것입니다. 임금이 인애하고 돌보는 법은 사생(死生)에 차별 없이 거듭 살펴서 옥사를 너그럽게 결단하고 원통함을 풀어 주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도 재변을 그치게 하는 한 방도입니다.

사치(奢侈)를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사치가 폐해가 됨이 심합니다. 하늘이 온갖 물건을 낳되 사람이 그것을 취하여 쓰니 사람은 온갖 물건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이 끝이 없고, 물건은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는 것인데 그 나는 것에 한정이 있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기에 천하의 물건으로 한 사람을 받들어도 넉넉하지 못하고, 나는 것은 한정이 있기에 한 사람이 천하의 물건을 다 써도 모자랍니다. 하늘이 낸 물건을 다 없애어 하늘이 노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서 백성이 원망하여, 원망을 쌓고 노여움을 쌓는데도 알지 못하면, 쟁탈이 일어나서 난망(亂亡)이 뒤따를 것입니다.

근래 왕자(王子)의 집은 극도로 넓고 크게 하려고 힘쓰고 화려하고 사치하게 하는 것을 앞다투어 숭상하여, 백성의 집을 헐어 치우고 여염에 가로 뻗쳐 지어서 마룻대를 높이고 들보를 겹쳐 궁궐과 비슷하게 하며, 혼인의 예(禮)에 있어서도 수레·의복·집기로 갖추는 것을 무엇이나 다 극진히 화려하게 하는데, 사대부의 집도 따라서 이를 본뜹니다. 큰 집과 사치한 혼례가 재물을 손상하고 분수를 넘는 것이 끝이 없으니, 앞으로 폐단을 바로잡기 어려울 것입니다. 언관(言官)이 늘 토목일의 폐단을 논열(論列)하여 마지않아도 전하께서 막연하게 들으시는 까닭은 반드시 ‘사대부는 초야에서 일어나 고조·증조가 쌓은 업적이 없어도 집을 크게 세우고 혼례를 극진하게 갖추는데, 더구나 당당한 한 나라 임금의 아들, 딸로서 도리어 집을 높이고 혼례를 갖추지 못하겠느냐.’고 생각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그 죄가 본디 사대부에게 있으나, 임금이 스스로 닦는 도리로 말한다면, 위에서 근원을 밝혀 아래에서 본받게 하여야 마땅합니다.

또 일설이 있는데, 사치로 그 아들, 딸을 기르는 것은 그 아들, 딸을 사랑하기 때문이나, 그 사랑하는 방법이 도리어 해치는 방법이 되기에 알맞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검약하면 복을 얻고 사치하면 해를 부르는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지금 보는 것으로 말하자면, 큰 집이 겨우 이루어지자 문득 꺼릴 것이 생겨 여염으로 피하여 가서 살고 주문(朱門)은 비워 잠가 두므로, 겨우 한 세대가 바뀌면 곧 폐가가 되어 자손으로서 보유하는 자가 거의 없으니, 이것은 한정 있는 재물을 써서 보탬 없는 집을 지은 것입니다.【왕자, 왕녀가 혼인하여 분가하거나 시집갈 때에는 나이가 겨우 열 두세 살인데, 집은 크고 사람은 적으며 방은 넓고 나이는 어려서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기 쉬우므로, 모두가 피하여 가서 살고 집은 비운다.】

예전에 종실(宗室) 효령 대군(孝寧大君)은 성품이 자못 겸허하고 소박하여 화려한 집에 살기를 싫어하여서 초가를 지어 늘 그 안에서 살았는데, 마침내 수(壽)가 아흔에 미치고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이것은 근래의 일 중에서 명백한 증험입니다. 지금의 사치는 본디 온갖 폐단의 근원이고 그 근원은 궁금(宮禁)에 있는데, 나라의 근본이 쇠하고 관가의 창고가 비는 것이 다 여기에서 말미암고 또한 이것이 충분히 원망을 일으켜 재변을 가져올 만하니, 전하께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간쟁(諫諍)을 받아들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임금은 자기 자신의 눈과 귀만으로는 밝게 보고 들을 수 없으며 반드시 많은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을 모은 다음에야 밝게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예전의 거룩한 임금은 그 총명한 생각이 범상한 뭇 사람으로서는 그 한 부분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의 간언(諫言)을 즐겨 받아들인 까닭은 착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스스로 상등 가는 거룩한 자질을 지니고 묻기를 좋아하는 덕을 가지시어 무릇 결점을 논열하는 일이 있으면 받아들여 잘못으로 여기고 스스로 책망하시니 성탕(成湯)이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인 것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움이 점점 처음만 못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빛이 혹 겉으로 나타나고, 진언할 즈음에 너그러니 용납하는 것을 보일 뿐이고 채용하는 실속이 없으며, 재변을 당하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도 겉치레만 일삼고 직언을 구하는 분부가 없으시니, 직언을 듣기 싫어하고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신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뿐만 아니라, 대간이 조금 굳게 논집(論執)하는 것이 있어서 위의 뜻에 거슬리면 곧 특명을 내어 문득 다른 벼슬로 옮기시니, 지적하여 말할 만한 자취는 없으나, 물정에 혹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저번에 직언을 구하신 뒤에 글을 올린 자【기해년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가 우연히 꺼릴 일에 저촉되었으므로 그를 곧 죄주려고 삼성(三省)에 명하여 추국하게까지 하셨고, 혹 가문이 천한 자가 일을 말하면【경자년에 노인 한석(韓碩)이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조정을 어지럽히려는 자라고 분부하셨으니, 이것은 직언을 구하는 것으로 나라 안에 함정을 만든 것입니다. 각각 품은 생각을 아뢴 데에 마땅하지 않은 말이 있더라도, 임금은 그 가운데서 착한 것만을 가려서 쓸 따름인데, 어찌 망령되게 말한 사람에게 노여움을 가하여야 하겠습니까. 간쟁이란 임금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복입니다. 말로 죄를 입는다면 누가 천둥 같은 위엄을 무릅쓰고 보탬이 없는 말을 아뢰려 하겠습니까. 저번에 나라의 권세가 간사한 자의 손에 떨어져 위망(危亡)이 조석에 달려 있었는데도 사람들이 감히 한 마디 말씀도 아뢰어 저촉하지 못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 정상을 지적하여 말하는 자가 있었다면, 간흉(奸兇)의 창끝에 다쳤을 뿐더러 역린(逆鱗)의 노여움을 받아,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졌을 것은 결코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감(聖鑑)에서 조금은 뉘우치셔야 할 터인데 병통의 근원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물정이 답답해하고 재변이 생기는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대저 무릇 결점을 아뢰어 간하는 것은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덕(聖德)이 갖추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니, 전하께서 더욱더 살피시기 바랍니다.

신들이 보건대, 전하께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셨는데도 다스리는 도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셨는데도 백성의 고통이 없어지지 않고,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셨는데도 하늘의 견책이 날마다 내려오며, 넓고 그윽한 곳에 계실 때에는 늘 몸을 편히 두지 못하고 경계하며 덕음(德音)을 낼 때에는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많이 나타내시는데도 보탬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세대를 보면 다스려져서 일이 없다 할지라도 실상은 헤아리지 못할 근심과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어서 어두운 데 숨어 있지도 않고 밝은 데 드러났는데, 대신(大臣)은 예사로 여겨 버려둘 뿐 건의하여 밝히는 것이 없고, 소신(小臣)은 소홀히 여겨 직무를 잘 거행하지 않아, 눈앞의 결함만을 기워 가며 시일을 보냅니다.

신들이 사사로운 근심과 지나친 헤아림으로 밤낮으로 생각하니, 물 한 방울이나 티끌 하나의 만 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감히 소원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감히 격렬하게 말하지도 못하고서, 이른바 열 가지 일로 하나하나 지적하여 말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바삐 힘쓸 일이고 전하께서 절실히 경계하실 일입니다. 소신의 죄를 끌어댈 겨를도 없고 대신의 잘못도 거론할 겨를 없이 굳이 성궁(聖躬)에 책망하기를 바라는 까닭은, 참으로 천하의 큰 근본이 성궁에 달려 있고 천하 고금에 통달하는 도리가 성궁으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렇게 하지 않고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런 이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 강(綱)에 마음을 다하고 아홉 목(目)에 도리를 다하여 날로 성학(聖學)을 진취시키시어 지금의 폐단을 바로잡고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소서. 그러면 종사(宗社)가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였다.

“이제 이 상소를 재삼 보건대, 한 강과 아홉 목이 다 도리에 맞으니, 더욱 살펴서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기묘년에는 선비가 빈빈(彬彬)히 배출하여 성하게 쓰이게 되었는데, 위에서도 뜻을 돋우어 다스릴 도리를 강구하였다. 이 때문에 진강(進講)할 때에는 서로 논란을 거두지 않아서 혹 해가 저물 때도 있었다. 그 뒤로는 위에서 학문에 힘쓰기는 하였으나 점점 처음만 못하여 때로 싫어하는 빛을 자못 나타내었는데, 간사한 남곤(南衮)과 심정(沈貞)이 뜻을 맞추어 끼어 들어, 몰래 홍경주(洪景舟)를 꾀어 중간에서 궁금(宮禁)에 통하게 하여, 사림(士林)을 가리켜 청류(淸流)가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힌다 하여 거의 다 제거하였다. 남곤이 또 진언(進言)하기를 ‘성학이 이미 고명하십니다……’ 하니, 이때부터는 경연(經筵)에서 진강할 때에 글을 두 번만 읽으면 곧 책을 덮고 물러갔다. 위에서는 문난(問難)에 뜻이 없고 아래에서도 위축되어 진언을 하지 못하니, 남곤의 계책이 공교하고 간사하다 하겠다. 그 폐단을 무궁하게 끼친 것도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대저 임금에게 조금이라도 게으른 생각이 있으면, 소인이 그 틈을 타서 끼어 들어가니,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기묘년에 남곤·심정의 무리가 조광조(趙光祖) 등을 꺼려서 해치려 하였으나 아직 발동하지 못하였는데, 그때 홍경주의 딸이 귀인(貴人)이 되었다. 남곤 등이 홍경주와 결탁하여 귀인을 통해 매일 참소하여 임금을 현혹하게 하고 나서, 남곤 등이 몰래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 아뢰어, 사림을 일망 타진하였다. 그 뒤에 심정·이항(李沆) 등이 권세를 독차지하여 방자하게 굴다가, 다시 김안로(金安老)와 사이가 나빠지자 김안로를 꺼려 귀양보냈다.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전에 이미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를 통하여 아뢰었으므로 적소(謫所)에서 소환되어, 드디어 은밀히 임금에게 아뢰도록 시키고 겉으로는 허항(許沆) 등을 시켜 공박하니, 심정 등이 다 패하였다. 김안로가 심정과 이항을 제거하고 나서 흉악하고 방자한 것이 날로 쌓여 갔는데, 정유년에 왕비의 친족인 윤안인(尹安仁)·윤원로(尹元老)가 김안로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았고, 위에서도 김안로가 나쁜 줄 알았으나 누르기 어려웠다. 마침내 윤임(尹任)이 대사헌(大司憲) 양연(梁淵)에게 말하여 논핵(論劾)해서 주벌(誅罰)하였는데 윤임도 외척이다.

【원전】 18 집 452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의약-수의학(獸醫學)

 

중종 100권 38년 6월 1일 (갑술) 001 / 최보한과 구수담 등이 형조 판서 소세양을 체직하라고 아뢰니 윤허하다


대사헌 최보한(崔輔漢)과 대사간 구수담(具壽聃) 등이 아뢰기를,

“형조 판서 소세양(蘇世讓)은 본디 변덕이 많은 사람으로 외람되이 높은 반열에 있으면서 항시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암암리에 해를 끼침이 귀역(鬼蜮)과 같습니다. 그 정상이 밝게 드러나 사람마다 확실히 보았고 공론이 격발되어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다시 재상의 반열에 둘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재상의 진퇴(進退)는 관계됨이 중대한데 신들이 어찌 범연한 계획으로 아뢰겠습니까. 위에서 가벼이 파직시킬 수 없다고 핑계하면서 여러날을 망설이고 있어 물정이 더욱 격동되므로 신들이 합사(合司)하여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세양은 아뢴 뜻으로 본다면 죄가 없을 수 없다. 다만 변덕스런 형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재상된 사람을 죄준다면 사체에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윤허하기를 망설인 것이다.”

하였다. 최보한 등이 다시 아뢰기를,

“소세양이 변덕스럽고 보잘것 없으며 암암리에 해를 끼침은 행동에 이미 나타나서 나라 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는데 어찌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람은 결코 다시 조정의 반열에 둘 수가 없으니, 망설이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세양이 암암리에 해를 끼친 일을 아래에서는 모두 안다고 하지마는 위에서는 모르고 있다. 재상된 사람은 그 죄를 안 뒤에 죄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구수담 등이 세 번째 아뢰기를,

“소세양이 지난번에 양사(兩司)의 장관 성세창(成世昌)·유인숙(柳仁淑)과 한재(旱災)로 인한 소방(疏放)의 일을 논급하였는데【정유년에 죄를 입은 허흡(許洽)의 무리들을 소방하려고 하였다.】 안 될 일인 줄 알면서도 몰래 성사시키고자 부추기다가 금방 번복했으며, 게다가 시종(侍從)을 사주하여 도리어 대관(臺官)을 배격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구언(求言)한 다음 소장을 올리는 이가 있으면【기해년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연산(燕山)과 노산(魯山)에게 혈사(血祀)할 것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그 말이 비록 옳지 않더라도 죄주지 않으므로써 언로(言路)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사사로운 혐의를 품고【지난 기묘년에 소세양과 이약빙이 혼인 맺기로 약속하였는데 약빙이 뒤에 약속을 저버리니 세양이 이 때문에 감정을 품고 있었다.】 몰래 대간을 사주, 옥에 가두고 국문(鞫問)하여 장차 불측한 죄에 빠뜨리려 하였으니, 하마터면 성명(聖明)에 누가 될 뻔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암암리에 벌인 일이 한둘이 아니라서 낱낱이 들기 어려우니, 이러한 수단을 두번 다시 조정에서 시험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공론이 갈수록 격해지니 망설이지 말고 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고, 최보한이 홀로 아뢰기를,

“소세양이 변덕스럽고 해끼치는 것이 한둘이 아니므로 공론이 격발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함께 참여하여 논계(論啓)하였는데 이번에 동료들이 아뢴 ‘소세양이 지난날 양사(兩司)의 장관 성세창 등과 함께 소방(疏放)의 일을 논의하면서 몰래 부추기어 이루어지게 하고는 도리어 시종된 사람을 사주하여 대관을 공격하게 하였다.’는 내용 가운데 시종된 사람이란 곧 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시종이 대관을 공격하는 논의는 비록 신이 발설한 바는 아니지마는 신이 실지로 세양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이 동료가 아뢴 내용 때문에 신이 장관으로서 함께 참여하여 아뢰지 못하였으니, 매우 미안스럽고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구수담 등에게 답하기를,

“아뢴 뜻으로 본다면 소세양이 범한 일이 매우 무례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최보한에게 답하였다.

“지난 시종 때의 일로써 지금 사직함은 옳지 않다. 사직하지 말라.”

【원전】 18 집 679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중종 101권 39년 1월 15일 (갑인) 003 / 시강원 문학 이여의 졸기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이여(李畬)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여의 자(字)는 유추(有秋)이고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이며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형 치(菑)와 함께 뜻을 가다듬어 배움을 도타이 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기되 낯빛을 부드럽게 하여 봉양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맛있는 것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부지런히 글을 읽었다. 불행히도 어머니가 나질(癩疾)에 걸렸는데, 이여가 치와 함께 옷을 벗지 않고 밤낮으로 구완하며 처자를 물리치고 몸소 곁에서 간호하였다. 몇 해를 이렇게 하였으나 마침내 살리지 못하매, 형제가 애훼(哀毁)하며 예(禮)를 극진히 하였다. 이치가 먼저 젊어서 죽으니, 여가 그 남긴 고아를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평생 학문을 하며, 오직 옛사람과 같게 되려고 스스로 기약하여 동정(動靜) 하나하나를 다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에 의논하는 자가 소세양(蘇世讓)을 정승으로 삼고자 하매 이여가 지평(持平) 이윤경(李潤慶)을 가 보고 ‘소세양이 정승이 되면 내가 공박하겠는데, 임자의 뜻은 어떠한가?’고 말하였는데, 이윤경이 응답하는 것이 시원하지 않으므로, 이여가 탄식하며 ‘당세의 선비 중에 임자 같은 이가 몇 사람이나 되겠으며 함께 일을 논할 만한 이가 또한 몇 사람이나 되기에 임자도 그러한가?’고 말하니, 이윤경이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였다. 일찍이 ‘황헌(黃憲)이 으르렁거리며 착한 사람을 물어뜯는 것이 소세양보다 심하니 뒷날의 화는 아마도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평소에 병이 많아서 말미를 많이 얻었는데, 사진(仕進)하지 않은 날을 계산하여 많으면 으레 녹봉(祿俸)을 받지 않았고 선물을 보내와도 일체 받지 않았으나, 남들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문학(文學)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병을 얻었으나,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제때에 학문을 진취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여 병을 무릅쓰고 진강(進講)하되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역학(易學)에 정통하여 터득한 것이 매우 높았으므로, 진강할 때에는 깊은 뜻을 분석하고 예(例)를 끌어대어 비교해서 반드시 덕(德)을 진취하게 하려고 정성을 지극히 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안국(金安國)이 일찍이 ‘경연(經筵)·서연(書筵) 때에 이여와 함께 입시(入侍)하면 내가 말할 것이 없이 물러나오더라도 편안히 잘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니, 그가 존중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으며, 죽게 되니 사림(士林)에서 한탄하고 아까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원전】 19 집 35 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중종 104권 39년 7월 5일 (임인) 002 / 황당선 적간의 일을 아뢰는 전라 병사 한기의 계본


전라 병사(全羅兵使)【한기(韓琦).】의 계본(啓本)【*】을 정원(政院)에 내리고 일렀다.

“황당선(荒唐船)의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을 잡아갔다가 도로 버려두었다 하였는데, 우리 나라 사람이 공초한 것을 보면 그 일이 분명하니, 굳이 잡아와서 추열(推閱)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이 뜻을 해조(該曹)에 말하라.”

【*계본은 다음과 같다. “군산도(群山島)를 수색하다 이름 모를 네 사람을 잡아서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우리는 한산(韓山)의 염간(鹽干)인데 여덟 사람이 같은 배에 타고 소금을 싣고서 황해(黃海) 지방을 향하여 가던 중 마량(馬梁) 앞에 이르니, 큰 배 한 척이 있고 그 좌우에 작은 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기도 하고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한 이상한 복장의 사람이 1백여 명 있었다. 이들이 배에 올라와 약탈하기 시작할 때에 다른 네 사람은 물에 뛰어들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 안손(安孫) 등 우리 네 사람은 잡아 가서 샘물이 있는 곳을 안내하게 하여 횡간도(橫看島)에 이르러 샘물을 길어다가 배에 실은 뒤에, 우리들을 섬에 버려두고 곧 쌍돛을 펴고 서해 큰 바다를 향하여 갔다.’ 하였습니다.”】

【원전】 19 집 110 면

【분류】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