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睿宗實錄 卽位年(1468년)~成宗實錄 二十五年(1494년)까지 한산에 관련된 기록

천하한량 2007. 3. 21. 20:24

예종 6권 1년 6월 29일 (신사) 002 / 국정 전반에 관한 공조 판서 양성지의 상소①


공조 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가 상서하였는데, 그 상서는 이러하였다.

“신은 엎드려 보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고 관고(冠古)하신 자질로 선성(先聖)의 부탁(付托)의 중함을 받아서 대보(大寶)를 이어 등극하시어,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셨으니, 먼저 방납(防納)을 혁파하여 우리 일국(一國)의 복(福)이 되게 하셨고, 다음으로 도둑을 엄하게 다스리시어 우리 양민(良民)에게 은혜(恩惠)를 베푸셨으며, 역적(逆賊)을 평정하여 종사(宗社)가 견고해졌습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조야(朝野)가 경사스러우니, 이는 신자(臣子)의 정백(精白)한 한 가지 마음을 바르게 하여서 휴덕(休德)을 이어받은 시기입니다. 신은 용렬한데도 특별히 선왕(先王)의 천지(天地)같은 사사로운 은혜를 입었으나, 조그마한 보답도 하지 못하여 전하에게 보답을 도모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품은 바를 늦추겠습니까? 삼가 관견(管見) 28가지를 조목별로 기록하여 올리니, 엎드려 생각건대 예감(睿鑑)을 드리워 살피소서.

1. 장장(長墻)에 대한 의논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만 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 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 요(堯)임금과 아울러 섰고, 주(周)나라에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위(元魏)와는 통호(通好)하였으며, 풍연(馮燕)에는 정성을 바쳤고, 수(隋)나라는 육사(六師)가 대패(大敗)하였고, 당(唐)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요(遼)나라는 패군(敗軍)하여 처참하였으며, 송(宋)나라는 섬겼고, 금(金)나라는 부모(父母)의 고향이라고 일컬었으며, 원(元)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도 또한 삼한(三韓)이라 이르고 하하(下下)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동(遼東)의 동쪽 1백 80리는 연산(連山)을 경계로 하여 파절(把截)을 삼았으니, 성인(聖人)께서 만리를 헤아려 밝게 보시는데 어찌 토지가 비옥하여 가축을 기르거나 사냥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수백 리의 땅을 버려 그 곳을 비게 하였겠습니까? 진실로 동교(東郊)의 땅은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兩國)의 강역(疆域)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으니, 만약 혹 서로 섞인다면 흔단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건대, 중국에서 장차 동팔참(東八站)의 길에 담장[墻]을 쌓아서 벽동(碧潼)의 경계에 이르게 한다고 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본국 평안도(平安道)의 백성 가운데 부역(賦役)에서 도망한 자가 저곳에 흘러 들어갔으니, 동쪽으로는 개주(開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대개 고을의 취락(聚落)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몇천만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만산군(漫散軍)은 모두 4만여 인이었는데, 근년(近年)에 요동(遼東)의 호구(戶口) 가운데 동녕위(東寧衛)에 십분의 삼이 살고 있습니다. 만약 장장(長墻)이 없다면 야인(野人)이 출몰(出沒)할 것이니 진실로 염려스럽고, 만약 혹 담장을 쌓는다면 도로 내지(內地)가 되어서 진실로 좋은 땅이 될 것이니, 그 유망(流亡)하는 자가 어찌 옛날보다 만만배(萬萬倍)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害)의 첫번째입니다.

만약 중국에서 연대(煙臺)를 벌여서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행한다면, 이와 같다면 양국의 사이에는 다만 강 하나만이 한계가 될 뿐이니, 이름은 해외(海外)라고 하여도 실로 같은 안입니다. 저들이 어찌 천백 년 동안 우리 변방을 엿보지 않았겠습니까? 혹은 이익이 되기도 하고 혹은 해가 되기도 하여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해의 두 번째입니다.

장장(長墻)이 비록 요하(遼河)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염려할 만한 것이 있는데, 만약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 사이에 이른다면, 이는 동한(東韓)의 땅이어서 저들의 봉역 가운데에 있으니, 사람에 있어서는 팔꿈치와 겨드랑이의 사이와 같고 인가(人家)가 울타리 안에 있는 것과 같아, 한쪽은 여기에 있고 한쪽은 저기에 있어서 저들의 주장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다만 장사(長沙)의 무수(無袖)뿐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의 세번째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利害)는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건주(建州)의 사람들은 형세상 반드시 와서 싸울 것이나, 가까이 들리는 일은 항상 그 실지를 잃음이 많을 터인데, 만약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데도 태평하게 주청(奏請)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무능(無能)하다고 여기고 더욱 능욕(凌辱)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모름지기 급히 달려서 상주(上奏)하여야 할 것입니다. 연산 파절(連山把截)은 고황제(高皇帝)가 정한 바이므로 양국의 봉강(封疆)은 서로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벽동(碧潼) 이서와 의주(義州) 이북은 큰 강이 한계로 막혀 있어서 족히 염려할 것이 못되나, 이어 김보(金輔) 등 내사(內史) 족친(族親)을 보내어 들어가서 나라 사람들의 뜻을 아뢰어 제총(帝聰)에 이르도록 하여 요하(遼河)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쌓도록 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청(請)에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자치(自治)하는 일이 더욱 엄중하게 하여 만세(萬世)토록 견고하게 할 뿐입니다.

신이 가만히 보건대, 평안도의 폐해로서 큰 것이 셋 있으니, 부방(赴防)이고 관부(館夫)이고 기재(騎載)하여 영송(迎送)·호송(護送)하는 데 지대하는 일입니다. 만약 벽동의 강 밖에다 또 장장(長墻)을 쌓는다면 북방(北方)의 수어(守禦)는 옛날에 비해서 가벼워질 것입니다. 만약 전과 같이 남쪽 경계의 군사로써 강변(江邊)의 땅을 지키게 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요해(遼海)로 흘러 들어갈 것이니, 그 해로움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강 연안의 주(州)·군(郡)을 흩어서 적유령(狄踰嶺)을 관방(關防)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강계(江界)·위원(渭原)은 희천(熙川)에, 이산(理山)·벽동(碧潼)은 운산(雲山)에, 창성(昌城)·삭주(朔州)는 귀성(龜城)에 옮기소서. 이렇게 하면, 강변을 부방(赴防)하는 폐단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또 나라의 대소 사명(使命)은 모두 평양(平壤)에 이르러 감사(監司)에게 전부(傳付)되는데, 백성의 일은 도사(都事)로 하여금, 군사의 일은 우후(虞候)로 하여금 행하게 하고, 작은 일은 지인(知印)이 적간(摘奸)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한번에 관부(館夫)의 폐단은 없앨 수 있습니다.

또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朝使) 외에 사하사(謝賀使)·주문사(奏聞使) 등은 모두 따르는 자를 데리고 가므로 동팔참(東八站)의 길에 과연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즉 한번 길에 3절(三節)의 사람이 부사(副使)를 대동하고 간다고 해도 불과 15인이고, 단사(單使)로 가면 12인이니, 이로 인하여 군사는 50명, 건량(乾糧)은 50두(斗)로 정하고, 말에 실리는 짐[馬䭾]은, 상절(上節)이라면 5, 중절이라면 3, 하절이라면 2로 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기재(騎載)하여 영송·호송하는 데 지대하는 폐단도 또한 없앨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평양부(平壤府)를 승격시켜서 서경(西京)으로 하고, 한성부(漢城府)·함흥(咸興)·경주(慶州)·전주(全州)·개성부(開城府)와 더불어 육경(六京)으로 삼는다면, 우리 나라의 형세를 굳게 하고, 서인(西人)의 마음을 수습하고, 지도(地圖)를 나누어 형세를 고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병정(兵政)을 고쳐서 위(衛)로 나누어, 경기(京畿)·충청도(忠淸道)를 중위(中衛)로 삼고,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를 후위(後衛)로 삼고, 평안도(平安道)·함길도(咸吉道)를 전위(前衛)로 삼고, 강원도(江原道)를 우위(右衛)로 삼고, 황해도(黃海道)를 좌위(左衛)로 삼으소서. 신의 전의 상소와 같이 함길도의 각 고을은 종친(宗親)에게 분사(分賜)하여 관향(貫鄕)으로 삼게 하고, 평안도의 각 고을은 공신(功臣)에게 분사하여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면, 안팎이 서로 이어지고 양계(兩界)가 충실하게 됩니다. 또 옛날 강동(江東)과 같이 평양의 상류(上流)를 요해처(要害處)로 삼고 다시 큰 고을을 설치하면, 중병(重兵)이 유숙할 수 있고, 만약에 건주 사람이 이른다면 올 때는 접대하고 갈 때는 따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모련위(毛憐衛)·대마도(對馬島)의 사람은 더욱 후대(厚待)를 더하여 원교(遠交)를 하여서 완급(緩急)할 때 좌우(左右)에서 돕도록 하소서.

1. 성학(聖學)에 힘쓰는 일입니다.

대개 인주(人主)는 그 한 몸이 하늘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어 조종(祖宗)의 부탁이 중하지 않을 수 없고, 신민(臣民)의 의지하여 바라는 것이 깊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생각의 차이로 혹은 무궁한 근심을 끼치기도 한고, 한 가지 일의 실수로 혹은 막대한 폐단을 이루기도 하니, 진실로 마땅히 성학(聖學)을 궁구(窮究)하여 다스리는 근원을 밝게 추출하고, 사전(史傳)을 확실히 헤아려 치란(治亂)의 자취를 살핀 연후에야 가히 적으면서도 군중을 제어할 수 있으며, 옛날로써 오늘을 징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세자[靑宮] 때부터 덕(德)을 기르시고 춘방(春坊)에서 학문을 강(講)하시어 성현들이 지은 온갖 책을 연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실로 신민이 함께 들어서 알고 있는 바입니다.

오늘부터 계속하여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통감(通鑑)》을 강(講)하는 것을 마치고, 다음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자경편(自警編)》·《정관정요(貞觀政要)》·《송원절요(宋元節要)》·《대명군감(大明君鑑)》·《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국조보감(國朝寶鑑)》, 또 사서(四書) 가운데 《논어(論語)》, 오경(五經) 가운데 《상서(尙書)》를 강하여 항상 관람하시면 심히 다행함을 이길 수 없겠습니다.

1. 《고려사(高麗史)》를 반포하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고려사》는 전조(前朝)의 치란(治亂)을 기록하여 후세(後世)의 권징(勸懲)이 되는 것이므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역란(逆亂)의 일이 있다면 소위 역란하는 자는 역대(歷代)의 역사가 모두 있는 것이니, 어찌 홀로 전조의 역사에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참칭(僭稱)한 일이 있다면 전조의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하나로 통일하고 개원(改元)하여서 종실(宗室)을 칭하였고, 금(金)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황제(皇帝)로 삼았고, 고황제(高皇帝)는 스스로 성교(聲敎)가 있다고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참칭하는 데에 혐의가 되겠습니까? 소위 번국(蕃國)이라고 하는 것은 기내(畿內)의 제후(諸侯)와는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만약 근대(近代)의 일이 있어서 유전(流傳)할 수 없다면, 지금 명(明)나라도 《원사(元史)》를 행하니, 어찌 그 이목(耳目)이 미칠 것을 헤아리겠습니까? 만약 숨겨야 할 일이 있다면, 삭제하고서 행하면 가할 것입니다. 비단 지경 안에서만 행할 것이 아니라 《사략(史略)》과 같이 중국에 전하거나 일본에 전해도 또한 좋겠습니다.

이는 비단 일시의 계책이 아니고 만세의 무궁한 계책이 되는 것이니, 빌건대 우리 나라에서 찬술한 여러 서적 가운데 부득이한 비밀 문서(祕密文書) 외에 《고려전사(高麗全史)》와 같은 것은 옛날대로 전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의창(義倉)을 넉넉하게 하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인군(人君)은 하늘을 대신한 직책이니, 백성을 기르는 것[養民]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백성을 기르는 방법은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먹이게 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세종 대왕은 의창의 일을 중히 여겨 세월(歲月)을 기하여서 크게 차도록 하고자 하였으며, 세조 대왕조(世祖大王朝)에 미쳐서는 소신(小臣)이 성상[耿光]을 면대(面對)하여 두 가지로 이해(利害)를 진술하였고, 실봉(實封)하여 상달(上達)한 자도 또한 두 번이나 되었습니다. 소위 의창이라는 것은 경오년에 견감(蠲減)한 이후로는 백성으로서 받는 자는 견감하여 면하기만을 바라고 제때에 납부하지 않는 것이 많으니, 이는 성상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기르는 대절(大節)로서, 급급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빌건대, 금후로 백호(百戶)의 현(縣)에서는 의창에 5백 석(石), 군자(軍資)로 5백 석을 쌓고, 천호(千戶)의 군(郡)에서는 의창·군자 또한 각기 5천 석씩을 쌓아 인근 고을에 옮겨서 균등하게 하고, 그 부족한 것을 나라에서 다방면으로 포치(布置)하여 10년을 기하여 족한 연후에라야 그만두게 하면, 곧 민생(民生)에도 매우 다행이고, 군국(軍國)에도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1. 군자(軍資) 모미(耗米)를 거두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듣건대, 외방 수령(守令)의 공수(公須)와 아록(衙祿)은 구하는 바에 따라서 상정(詳定)하니, 둔전(屯田)에는 액수(額數)가 있고 징속(徵贖)하는 것의 금함이 있으며, 일체의 이익은 모두 관(官)에 들이는데, 감사(監司)가 공궤(供饋)하는 것이 오히려 충분하지 못하여 도내(道內)의 별상(別常)이나 경중(京中) 사객(使客)의 지대(支待)에 칭대(稱貸)하여서 한 것이 많다고 하며, 심한 자는 향리(鄕吏)로 하여금 날마다 교대로 이바지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각 고을에서 받는 군자 미곡이 적은 것은 수백 석이고 많은 것은 천 석, 만 석인데, 1백 석의 곡식이라도 1년을 지나면 쥐가 먹거나 썩어서 줄어드는 것이 거의 10석에 이릅니다. 이로써 1만 석의 곡식이라면 1천 석이 되니, 1천 석의 곡식을 한 수령이 어찌 능히 판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수령들이 해유(解由)를 받지 못하는 자가 많은데, 이것이 어찌 공사(公私)의 큰 근심이 아니겠습니까?

금후로 군자미(軍資米)도 또한 백성들에게 빌려 주어 그 환납(還納)할 때에 1석에 대해서 쥐가 없앤 2두(斗)를 취하소서. 이렇게 하면 거의 관민(官民)이 둘 다 편하고 창름(倉廩)은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1. 직전(職田)에서 납초(納草)하는 것을 혁파하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경기(京畿)는 근본의 땅인데도 요역(徭役)은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무겁습니다. 납초(納草)하는 한 가지 일로써 말하더라도, 여름에는 청초(靑草)를 바치고 겨울에는 곡초(穀草)를 관(官)에 바치니, 즉 《우공(禹貢)》의 3백 리(里)에서 볏짚[秸]을 바치는 뜻입니다. 이미 관에 바치고 또 직전을 받은 자에게 바치니, 한 묶음의 풀에 대해서 쌀 1두(斗)를 징수하는 것이므로, 풀값의 쌀과 원래 세(稅)의 쌀이 같습니다. 이것을 어찌 기현(畿縣)의 백성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법을 혁파하지 않는다면 수년이 가지 않아서 민전(民田)은 진황지(陳荒地)가 많아지고 기전(畿甸)의 백성은 유망(流亡)하는 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풍습으로 이미 이루어졌으니, 갑자기 법을 중지하는 것이 불과합니다. 처음에는 비록 조금씩 거두더라도 후에는 반드시 없애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직전(職田)에서 납초(納草)하는 법을 혁파하지 않는다면 직전에 원래 정해진 수를 더하여, 종실(宗室)·대군(大君)의 2백 25결(結)은 지금 4백 50결로 정하고, 유내(流內) 9품 10결은 지금 20결로 정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사대부(士大夫)가 실망(失望)하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고, 관내(關內)의 백성은 영구히 생성(生成)의 은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1. 공부(貢賦)를 정하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공물(貢物)의 상정(詳定)은 예로부터 어렵게 여겨왔습니다. 산과 바다에서 산출되는 바가 각기 달라서 균일하게 나누어 정할 수 없으나, 범연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모름지기 수륙(水陸)으로 인하여 상정(詳定)해야 할 것이니, 하삼도(下三道) 같은 데에서는 면포(綿布)를 바치고, 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는 면주(綿紬)를 바치고, 함길도(咸吉道)·강원도(江原道)는 상포(常布)를 바치며, 또 양계(兩界)는 초피(貂皮)·서피(鼠皮)를 바치고, 강원도는 재목(材木)을 비치고, 황해도는 철물(鐵物)을 바치고, 전주(全州)·남원(南原)은 후지(厚紙)를 바치고, 임천(林川)·한산(韓山)은 생저(生苧)를 바치고, 안동(安東) 등지는 돗자리[席子]를 바치고, 강계(江界) 등지는 인삼(人蔘)을 바치고, 제주(濟州)는 양마(良馬)를 바쳐서 곳곳에 있는 물건이 이르고 또 곳곳에 나누어 정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여 산군(山郡)에서는 피물(皮物)을 바치고, 해군(海郡)에서는 어물(魚物)을 바쳐 그 많고 적은 것을 균등하게 하고, 그 자질구레한 것을 제한다면, 매우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1. 활을 바치는 것[貢弓]을 혁파하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공부(貢賦)를 정하는 것은 민력(民力)을 헤아려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도에서 바치는 활은 관(官)으로 하여금 준비하여 바치도록 하니, 각 고을 가운데 순천(順天)·나주(羅州)와 같이 산출되는 바가 있는 곳 외에서도 비록 산출되는 바가 적어도 이익을 모두 관에 들이게 되는데, 하물며 백성에게서 거두라는 정한 제도가 있고 징속(徵贖)하는 것은 그 금하는 바가 있으니, 어찌 능히 바치는 활을 그 수와 같이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부득이 모두 백성에게서 징수하게 되므로, 대저 농민(農民)은 삼시(三時)의 힘을 다하게 되어 풍흉(豐凶)이 이미 또한 고르지 않게 됩니다. 해가 비록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상세(常稅) 외에 세를 거두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서 한 가구(家口)가 먹기에도 오히려 충분하지 못하고, 다음해의 양식은 전부 의창(義倉)을 바라보게 되니, 또한 어찌 능히 바치는 활을 그 숫자와 같이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이라도 심하다고 이르는데, 하물며 매년이겠습니까? 만약 국가의 군사와 백성이 부실(富實)하다면 백성들이 스스로 준비할 수 있으나, 또한 오랫동안 갈무리하여 두면 마땅히 부패(腐敗)할 우려가 있어 반드시 속히 이루고자 하니, 즉 전일에 피갑(皮甲)을 제조하였던 것 같은 것은 집집마다 농우(農牛)를 모두 죽여서 거의 멸종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그릇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지금부터 이후로 궁시(弓矢)는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준비하게 하고, 군사로서 내금위·겸사복(兼司僕)·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는 3장(張)을 갖추고, 정병(正兵)은 2장을 갖추고, 선군(船軍)은 1장을 갖추게 하며, 조관(朝官) 가운데 1·2품은 3장, 3·4·5·6품은 2장, 7품 이하는 1장을 갖추게 하고, 연호군(煙戶軍) 가운데 대호(大戶)는 3장, 중호(中戶)는 2장, 소호(小戶)는 1장을 갖추게 하소서. 각 진의 진상(進上)과 군기시(軍器寺)의 월과(月課)는 모두 녹각궁(鹿角弓)을 만들어 3년을 한하여서 스스로 근각(筋角)을 갖추어 활로 삼고, 또 금(金)을 바치거나 실[絲]을 바치며, 또한 그 폐단을 의논하여 헤아려서 감한다면, 생민에게도 매우 다행하겠고, 국가에도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먹을 바치는 것[貢墨]을 감하는 일입니다.

신이 엎드려 보건대, 전교서(典校署)에서 1년에 바치는 책지(冊紙)가 1만 첩(帖)이고 먹[墨]이 또한 1만 정(丁)인데, 신이 근년에 먹을 쓴 수를 살펴보니, 1년에 쓴 바가 불과 수천 정이었습니다.

빌건대, 금후로 반을 감하여 5천 정을 공물(貢物)로 삼으면, 민력(民力)을 회복할 것입니다.

1. 소목(燒木)을 없애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모든 일이 그 명목은 있으나 실제는 없으니, 그 폐단을 혁파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일 방납(防納)할 때에 방납하게 하였더니 백성에게서 많이 취한 것이 소목(燒木)만큼 심한 것이 없었습니다. 만약 사축서(司畜署)에서 돼지 수백 구(口)를 기른다면, 돼지 한 마리당 사료를 불때는 데 드는 소목(燒木)이 1일에 11냥(兩)이고, 1두(斗)의 사료에는 나무 1근(斤)을 불때게 되니, 10두(斗)의 사료라면 10근의 나무를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1석(石)을 합하여 불때게 되면 1,2근을 더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1년에 돼지를 기르는 데에 사료를 불때는 나무가 2백 50근이니, 그 값을 쌀로 계산하면 23두(斗)이고, 그 사료인 콩도 72두이며, 밀기울[麥麩]은 반이 됩니다. 그러나 돼지 한 마리에 1년에 드는 비용이 가히 10여 필(匹)인데, 하물며 돼지의 본래 가격도 또한 각기 10여 필이겠습니까? 양(羊)도 진실로 이러한 유(類)이고 닭은 또한 더욱 심합니다.

빌건대, 금후로 1년에 쓰이는 바는 그 수를 헤아려서 감하여, 필요한 바가 없을 때에는 경기(京畿)와 외방(外方)에서 취하여 쓰도록 들어주고, 외방의 소읍(小邑)은 30구(口), 차군(次郡)은 50구, 대목(大牧)은 1백 구로 하여, 이로써 검거(檢擧)하게 하소서. 그 가축의 사료도 진실로 낙판(落板)한 자에게 주고, 사료를 불때는 나무는 물가로 나아가게 하되 산(山)은 금하도록 정하며, 선상 노자를 더 정하여 풀을 베어오게 하고, 참(站)의 배로써 실어 나르도록 하며, 그 전에 정한 소목의 처소는 아울러 모두 추이(推移)하여 감하도록 하소서. 전생서(典牲署)·사복시(司僕寺)에도 이러한 유가 많으니, 빌건대 상정소(詳定所)에 내려서 다시 상정하게 하소서. 또 경중(京中)의 각호(各戶)에서도 거두어 내는 것이 두 가지 있으니 사축서(司畜署)에서 돼지를 기르는 조강(糟糠)과 조지서(造紙署)에서 종이를 만드는 석회인데, 과반수를 쌀로 받아들이므로 일에는 유익함이 없습니다. 금후로 조강은 양사(兩司)에서 각기 그 부근 성저(城底) 10리에서, 석회는 삼각산(三角山) 근처에서 소용되는 바를 쓰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공물(貢物)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듣건대, 경중 각사(各司)의 노자(奴子)가 외방의 대소 공물의 납입(納入)을 맡는데, 반드시 사리에 어두운 관리들이 여러 방면으로 침어(侵漁)하여 막히게 하여서 즉시 채납(採納)하지 않으니, 만약 바치는 풀[草]이 막히게 되면 푸른 풀이 누렇게 되고, 바치는 돼지가 막히게 되면 비대한 것이 파리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외방의 관리를 책하여서 쌀을 거두면 명목을 대납(代納)이라고 하여 달리 풀을 바치는데, 이는 실로 남문(南門)에서 나와서 서문(西門)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풀만 거듭 바치고 그 쌀을 아울러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외방 관리를 책하여 면포(綿布)를 거두면 그 집에서 돼지를 대납하는데, 외방 관리의 돼지도 또한 아울러 거두어서 길렀다가 후일에 쓰는 것입니다. 만일 실[絲]을 바치게 하면, 외방 관리의 실은 품질이 좋아도 좋지 않다고 말하고, 종[奴子]의 실은 품질이 좋지 않아도 좋다고 하여, 부득이 많은 값을 주어서 종으로 하여금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베[布]를 바치게 하면, 스스로 가지고 와서 바쳐야 하는데, 거칠다고 말하여 그 베를 종에게 주고 그 값을 주어서 바치도록 하면 바치게 되니, 이와 같은 유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폐단을 금하지 않는다면, 방납(防納)이 비록 혁파된다고 하더라도 외방에서는 백성에게서 많이 거두지 않을 수 없고, 각사(各司)의 종으로 하여금 각사의 종에게 주어서 대납하게 하여 속히 바치게 됩니다.

금후로 품질이 좋은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막히게 하거나 침어(侵漁)하거나 뇌물을 주도록 하는 자는 외방의 관리가 진고(進告)하는 것을 들어주어, 풍속이 바른 데로 돌아가기를 한하여 극형(極刑)에 처치하고, 관리로서 정상을 아는 자는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않으며, 알지 못하는 자도 즉시 파출(罷黜)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대관(臺官)을 보내어 세를 거두는 것을 감독하는 일입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방납(防納)의 일은 예전에는 부등방목(不等方木)·유밀(油密)·청밀(淸密)에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 그 전해 내려온 폐단이, 작은 것은 하나의 풀과 같이 미세한 것으로부터 큰 것은 삼세(三稅)와 같이 크게 바치는 것에 이르러 대납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생민(生民)의 식량을 빼앗아 부상(富商)의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재물이 되게 하니, 실로 사직(社稷)의 대계(大計)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소신도 또한 그 폐단을 세 가지로 진술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먼저 이 법을 혁파하고 아뢰는 자도 죽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전하께서 이를 받드시어 팔도(八道)의 백만 백성으로 하여금 생취(生聚)하게 하여 모두 전하께서 생육(生育)하시는 은혜와 그 널리 구제하시는 은택을 입게 하셨으니, 반드시 위로 천심(天心)에 통하고 본지(本支)가 백세(百世)에 이어질 것이며, 영구히 음덕(陰德)의 보답을 무궁토록 누리실 것입니다. 방납을 한 번 혁파하면 생민(生民)의 해가 열이면 일곱은 없어질 것이나 또한 횡렴(橫斂)이 있습니다. 신은 듣건대, 남원(南原)의 관리가 지난해 세를 거둘 때에 장두(醬豆) 1두(斗)를 바친 자는, 장두를 바치고도 또 조미(糙米) 1두를 바치고, 또 면포(綿布) 1필을 바치고, 또 주지(注紙) 1권(卷)을 바친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한 가지 일을 들으면 그 다른 것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법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금하는 것이 엄하지 않은 소치입니다.

각도의 세를 거두는 곳에 울타리를 넓게 쌓고, 강명(剛明)한 대관(臺官)과 차사원(差使員)을 택하여 보내어서 전부 봉납(捧納)하게 하여, 대낮에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친히 문안(文案)을 잡고 차례로 그 이름을 불러 처결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스스로 하루에 받아들인 석(石)을 헤아리게 하여 그 관리에게 주고 관리로 하여금 침범하지 못하게 하되, 만일 10석(石)에서 1석(石)이라도 더하여 횡렴한 자가 있으면 처결하고 진고하도록 하여, 풍속이 바른 데로 돌아가기를 한하여 극형에 처치한다면, 생민(生民)에게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원전】 8 집 393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호구-호구(戶口) / *군사(軍事) / *역사-전사(前史) / *과학-지학(地學) / *재정-공물(貢物) / *역사-고사(故事) / *재정-창고(倉庫) / *재정-전세(田稅) / *농업-전제(田制)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인사-관리(管理) / *농업-축산(畜産) / *농업-임업(林業) / *상업-상인(商人)

 

성종 3권 1년 2월 30일 (기묘) 004 / 병조에서 지금의 군액 및 분번할 수와 3도 군정의 감액할 수 등을 기록하여 아뢰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지를 받들건대, ‘국가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니, 군액(軍額)이 점점 줄어 들었다. 세조(世祖)께서 국가 대계를 위하여 대신을 보내어 한산(閑散)한 사람들을 찾아 모아서 군액을 보충하게 하였으나 초쇄(抄刷)할 때에 너무 상세한 것을 면치 못하였고, 백성들도 안일한 데에 습관이 되어 혹 도피하는 자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군보(軍保)가 충실하지 못하고, 번상(番上)이 빈삭하여 농사에 힘쓸 틈이 없어서 백성이 매우 괴롭게 여기니, 쓸데 없는 군사는 도태하여 버리고, 번차(番次)를 다시 정하여 군사와 백성을 유족하게 함으로써 세조의 군사를 족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히 하는 뜻에 부합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신 등이 자세히 참고하건대, 제색(諸色)의 군사가 정한 액수가 너무 많아서 액수를 채우기가 쉽지 않고, 아울러 4번(番)으로 서로 교대하게 하니, 쉬는 날이 많지 않아서 점점 피폐(疲弊)하게 됩니다. 또 을유년에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의 군사를 병적에 올릴 때에 밭[田] 5결(結)로 한 정부(丁夫)에 준(准)하고, 고공(雇工)·백정(白丁)을 아울러 계산하여 보(保)를 만들었으므로, 그 액수는 비록 많으나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고쳐서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평안도(平安道)·영안도(永安道) 등의 도는 그때 군안(軍案)을 미처 만들지 못하였는데, 전정(田丁)·고공(雇工)·백정(白丁)을 아울러 계산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 액수의 많고 적은 것이 알맞으니, 마땅히 예전 그대로 하소서. 다만 위의 항목에 제도(諸道)·제읍(諸邑)의 군사는 정한 액수가 없으므로, 이것으로 인하여 번상(番上)이 가지런하지 못합니다. 지금 군액(軍額) 및 분번(分番)할 수와 3도(道) 군정(軍丁)의 감액(減額)할 수와 아울러 응당 행해야 할 사건을 가지고 개록(開錄)하여 아룁니다.

1. 별시위(別侍衛)는 2천 4백인데, 지금 1천 5백으로 정하고, 5번(番)으로 나누어 매번(每番)에 3백으로 하여 넉달에 서로 교대하고, 갑사(甲士)는 2만인데, 지금 1만으로 정하고 5번으로 나누어 매번에 2천으로 하여 넉달에 서로 교대하고, 파적위(破敵衛)는 3천인데, 지금 2천 5백으로 정하고, 5번으로 나누어 매번에 5백으로 하여 넉달에 서로 교대하고, 대졸(隊卒)은 3천 4백 40인데, 지금 3천으로 정하고, 5번으로 나누어 매번에 6백으로 하여 넉달에 서로 교대하고, 팽배(彭排)는 6천인데, 지금 5천으로 정하고, 5번으로 나누어 매번에 1천으로 하여 넉달에 서로 교대하고, 내금위(內禁衛)는 2백인데, 지금 1백으로 정하여 장번(長番)으로 하고, 응양위(鷹揚衛)는 2백인데, 지금 1백으로 정하여 장번으로 하고 친군위(親軍衛)는 40인데, 전 수에 의하여 2번으로 나누고, 매번에 20으로 하여 1년에 서로 교대하고, 충찬위(忠贊衛)는 정한 수가 없는데, 지금 5번으로 나누어 넉달에 서로 교대하고, 충순위(忠順衛)는 정한 수가 없는데, 지금 5번으로 나누어 넉달에 서로 교대하고, 족친위(族親衛)는 정한 수가 없는데, 장번으로 하고, 충의위(忠義衛)는 정한 수가 없는데, 장번으로 하고, 만강대(彎强隊)·장용대(壯勇隊)는 아울러 6백인데, 장번으로 하고, 이미 일찍이 입속(入屬)한 자 외에는 이후로 천인(賤人)이 입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정병(正兵)은 8만 60인데, 지금 7만 4천 2백으로 정하고, 7번으로 나누어 매번에 1만 6백으로 하여 두 달에 서로 교대하고, 외방(外方) 각진(各鎭)의 유방군(留防軍)은 5천 5백이고, 번상(番上)하는 군사는 5천 1백인데, 절도사(節度使)로 하여금 마련하여 전례에 의하여 성적(成籍)하게 하고, 총수(摠數)를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1. 갑사(甲士)는 전에는 4번(番)이었는데, 지금 5번으로 나누어 16달[朔] 만에 휴식하고, 정병(正兵)은 전에는 4번이었는데, 지금 7번으로 나누어 12달 만에 휴식하고, 두 달에 서로 교대하여 모두 신역(身役)을 가볍게 하여 쉬게 하며, 갑사(甲士)의 봉족(奉足)은 7정(丁) 가운데에서 2정을 줄이고, 기정병(騎正兵)의 봉족은 5정 가운데 2정을 줄이고, 보정병(步正兵)의 봉족은 3정 가운데 1정을 줄이소서.

1. 전정(田丁)·고공(雇工)·재백정(才白丁) 및 제색 장인(諸色匠人)은 아울러 계산하여 보(保)를 만들지 마소서.

1. 번상(番上)하는 군사를 점고(點考)할 때에 호수(戶首)·봉족(奉足)이 혹 튼튼하고 실하지 못하거나, 융기(戎器)가 혹 정련(精練)되지 못하였거나, 번상하는 군사와 유방군(留防軍)이 혹 당번이 아니거나, 혹 도(到)를 궐하였거나, 혹 대신 세웠거나, 혹 말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혹 활쏘고 말타는 것이 능하지 못하면 범한 것의 경중에 따라 본인은 장(杖) 1백 대를 때리고, 집리(執吏)도 장 1백 대를 때리고 전 가족을 변방에 옮기고, 여수(旅帥)·대정(隊正)은 결장(決杖)하여 먼 변방에 충군(充軍)시키고, 수령(守令)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절도사(節度使)·평사(評事)는 논죄하여 파출(罷黜)하소서.

1. 충청도(忠淸道)에 있어서 충주(忠州)는 제색 군사(諸色軍士)가 본래는 2천 1백 87인데 지금 2천 1백 47로 정하고, 괴산(槐山)은 3백 30인데 지금 3백으로 정하고, 연풍(延豐)은 82인데 지금 40으로 정하고, 청풍(淸風)은 2백 32인데 지금 1백 90으로 정하고, 영춘(永春)은 98인데 지금 60으로 정하고, 음성(陰城)은 1백 44인데 지금 1백 10으로 정하고, 단양(丹陽)은 55인데 지금 35로 정하고, 제천(堤川)은 2백 71인데 지금 2백 40으로 정하고, 청주(淸州)는 1천 9백 9인데 지금 1천 8백 69로 정하고, 진천(鎭川)은 4백 60인데 지금 4백 30으로 정하고, 문의(文義)는 3백 36인데 지금 2백 99로 정하고, 보은(報恩)은 6백 88인데 지금 6백 50으로 정하고, 청산(靑山)은 3백 1인데 지금 2백 70으로 정하고, 황간(黃澗)은 2백 49인데 지금 2백 10으로 정하고, 영동(永同)은 3백 95인데 지금 3백 60으로 정하고, 청안(淸安)은 3백 19인데 지금 2백 80으로 정하고, 직산(稷山)은 1백 50인데 지금 1백 25로 정하고, 목천(木川)은 2백 98인데 지금 2백 60으로 정하고, 천안(天安)은 5백 51인데 지금 5백 20으로 정하고, 회인(懷仁)은 1백 88인데 지금 1백 50으로 정하고, 전의(全義)는 2백 25인데 지금 1백 95로 정하고, 공주(公主)는 2천 7백 54인데 지금 2천 7백 30으로 정하고, 정산(定山)은 2백 49인데 지금 2백 10으로 정하고, 부여(扶餘)는 1백 42인데 지금 1백 10으로 정하고, 임천(林川)은 3백 96인데 지금 3백 67로 정하고, 한산(韓山)은 2백 9인데 지금 1백 70으로 정하고, 석성(石城)은 1백인데 지금 70으로 정하고, 이산(尼山)은 2백 84인데 지금 2백 50으로 정하고, 연산(連山)은 3백 9인데 지금 2백 70으로 정하고, 연기(燕岐)는 4백 20인데 지금 3백 90으로 정하고, 회덕(懷德)은 3백 1인데 지금 2백 66으로 정하고, 진잠(鎭岑)은 1백 65인데 지금 1백 25로 정하고, 옥천(沃川)은 5백 64인데 지금 5백 30으로 정하고, 은진(恩津)은 2백 90인데 지금 2백 55로 정하고, 홍주(洪州)는 1천 5백 80인데 지금 1천 5백 45로 정하고, 청양(靑陽)은 3백 55인데 지금 3백 10으로 정하고, 평택(平澤)은 89인데 지금 40으로 정하고, 비인(庇仁)은 1백 14인데 지금 80으로 정하고, 온양(溫陽)은 5백 15인데 지금 4백 60으로 정하고, 신창(新昌)은 2백 74인데 지금 2백 30으로 정하고, 면천(沔川)은 3백 85인데 지금 3백 50으로 정하고, 결성(結城)은 4백 16인데 지금 3백 80으로 정하고, 보령(保寧)은 3백 83인데 지금 3백 50으로 정하고, 서산(瑞山)은 5백 63인데 지금 5백 30으로 정하고, 남포(藍浦)는 2백 96인데 지금 2백 60으로 정하고, 서천(舒川)은 2백인데 지금 1백 80으로 정하고, 홍산(鴻山)은 95인데 지금 60으로 정하고, 예산(禮山)은 2백 85인데 지금 2백 40으로 정하고, 아산(牙山)은 4백 54인데 지금 4백으로 정하고, 덕산(德山)은 4백 71인데 지금 4백 31로 정하고, 당진(唐津)은 2백 90인데 지금 2백 55로 정하고, 대흥(大興)은 4백 26인데 지금 3백 80으로 정하고, 태안(泰安)은 2백 67인데 지금 2백 37로 정하고, 해미(海美)는 2백 75인데 지금 2백 30으로 정하였습니다. 총계가 예전에는 2만 3천 3백 84인데, 1천 9백 54를 줄이고, 지금 정한 것이 2만 1천 4백 31입니다.

전라도(全羅道)에 있어서, 창평(昌平)은 제색 군사가 4백인데 지금 3백 70으로 정하고, 곡성(谷城)은 4백 41인데 지금 4백 10으로 정하고, 함평(咸平)은 9백 16인데 지금 8백 80으로 정하고, 무장(茂長)은 1천 43인데 지금 1천 10으로 정하고, 남평(南平)은 5백 21인데 지금 4백 80으로 정하고, 무주(茂朱)는 3백 17인데 지금 2백 70으로 정하고, 광양(光陽)은 2백 59인데 지금 2백 20으로 정하고, 화순(和順)은 3백 37인데 지금 3백으로 정하고, 동복(同福)은 5백 29인데 지금 5백으로 정하고, 순천(順天)은 6백 55인데 지금 6백 30으로 정하고, 고산(高山)은 5백 79인데 지금 5백 40으로 정하고, 무안(務安)은 3백 5인데 지금 2백 80으로 정하고, 흥양(興陽)은 5백 19인데 지금 4백 71로 정하고, 진도(珍島)는 1백 98인데 지금 1백 80으로 정하고, 해남(海南)은 6백 46인데 지금 6백 10으로 정하고, 만경(萬頃)은 3백 78인데 지금 3백 30으로 정하고, 임피(臨陂)는 7백 69인데 지금 7백 20으로 정하고, 옥구(沃溝)는 4백 31인데 지금 3백 90으로 정하고, 임실(任實)은 7백 48인데 지금 7백 10으로 정하고, 영광(靈光)은 1천 1백 83인데 지금 1천 1백 50으로 정하고, 금구(金溝)는 4백 58인데 지금 4백 20으로 정하고, 운봉(雲峰)은 4백 26인데 지금 3백 80으로 정하고, 장흥(長興)은 8백 81인데 지금 8백 60으로 정하고, 고창(高敞)은 3백 95인데 지금 3백 60으로 정하고, 낙안(樂安)은 2백 29인데 지금 2백으로 정하고, 태인(泰仁)은 1천 1백 11인데 지금 1천 80으로 정하고, 광주(光州)는 9백 29인데 지금 9백으로 정하고, 고부(古阜)는 1천 1백 42인데 지금 1천 1백 12로 정하고, 진산(珍山)은 2백 50인데 지금 2백으로 정하고, 순창(淳昌)은 9백 30인데 지금 9백으로 정하고, 보성(寶城)은 6백 6인데 지금 5백 76으로 정하고, 정읍(井邑)은 4백 92인데 지금 4백 50으로 정하고, 강진(康津)은 1천 7인데 지금 9백 80으로 정하고, 흥덕(興德)은 4백 56인데 지금 4백 20으로 정하고, 구례(求禮)는 1백 57인데 지금 1백 20으로 정하고, 남원(南原)은 1천 8백 57인데 지금 1천 8백 30으로 정하고, 나주(羅州)는 1천 4백 15인데 지금 1천 3백 90으로 정하고, 영암(靈巖)은 2백 7인데 지금 1백 70으로 정하고, 전주(全州)는 1천 8백 91인데 지금 1천 8백 65로 정하고, 담양(潭陽)은 8백 10인데 지금 7백 75로 정하고, 진안(鎭安)은 4백 18인데 지금 3백 84로 정하고, 함열(咸悅)은 4백 36인데 지금 3백 90으로 정하고, 장성(長城)은 5백 14인데 지금 4백 70으로 정하고, 장수(長水)는 3백 78인데 지금 3백 30으로 정하고, 익산(益山)은 3백 82인데 지금 3백 30으로 정하고, 금산(錦山)은 6백 24인데 지금 지금 5백 90으로 정하고, 옥과(玉果)는 4백 29인데 지금 3백 90으로 정하고, 김제(金堤)는 9백 41인데 지금 9백 10으로 정하고, 부안(扶安)은 1천 1백 61인데 지금 1천 1백 30으로 정하고, 용담(龍潭)은 1백 14인데 지금 80으로 정하고, 용안(龍安)은 1백 64인데 지금 1백 19로 정하였습니다. 총계가 예전에는 3만 3천 6백 39였는데, 1천 9백 53을 줄이고, 지금 정한 것이 3만 1천 6백 86입니다.

경상도(慶尙道)에 있어서, 언양(彦陽)은 제색 군사가 69인데 지금 40으로 정하고, 영덕(盈德)은 2백 57인데 지금 2백 30으로 정하고, 청송(靑松)은 2백 71인데 지금 2백 44로 정하고, 양산(梁山)은 74인데 지금 50으로 정하고, 의성(義城)은 6백 25인데 지금 5백 94로 정하고, 비안(比安)은 3백 60인데 지금 3백 30으로 정하고, 경산(慶山)은 1백 55인데 지금 1백 24로 정하고, 예천(醴泉)은 7백 8인데 지금 6백 80으로 정하고, 봉화(奉化)는 85인데 지금 55로 정하고, 밀양(密陽)은 7백 93인데 지금 7백 70으로 정하고, 현풍(玄風)은 1백 53인데 지금 1백 20으로 정하고, 청도(淸道)는 4백 46인데 지금 4백 20으로 정하고, 장기(長鬐)는 97인데 지금 70으로 정하고, 신녕(新寧)은 78인데 지금 48로 정하고, 기장(機長)은 2백 31인데 지금 2백 3으로 정하고, 영천(榮川)은 3백 13인데 지금 2백 2백 85로 정하고, 영천(永川)은 5백 30인데 지금 5백으로 정하고, 창녕(昌寧)은 3백 90인데 지금 3백 65로 정하고, 대구(大丘)는 3백 46인데 지금 3백 16으로 정하고, 흥해(興海)는 1백 95인데 지금 1백 65로 정하고, 하양(河陽)은 78인데 지금 40으로 정하고, 진보(眞寶)는 1백 81인데 지금 1백 50으로 정하고, 청하(淸河)는 1백인데 지금 70으로 정하고, 예안(禮安)은 65인데 지금 35로 정하고, 동래(東萊)는 2백 63인데 지금 2백 30으로 정하고, 군위(軍威)는 2백 84인데 지금 2백 50으로 정하고, 영해(寧海)는 3백 30인데 지금 3백으로 정하고, 경주(慶州)는 1천 4백 72인데 지금 1천 4백 50으로 정하고, 인동(仁同)은 3백 96인데 지금 3백 50으로 정하고, 용궁(龍宮)은 2백 62인데 지금 2백 20으로 정하고, 풍기(豐基)는 3백 97인데 지금 3백 60으로 정하고, 안동(安東)은 6백 86인데 지금 6백 60으로 정하고, 울산(蔚山)은 1천 30인데 지금 1천 10으로 정하고, 영일(迎日)은 2백 29인데 지금 2백 5로 정하고, 의흥(義興)은 1백 52인데 지금 1백 20으로 정하고, 영산(靈山)은 2백 19인데 지금 1백 90으로 정하고, 거제(巨濟)는 2백 20인데 지금 2백으로 정하고, 초계(草溪)는 1백 24인데 지금 94로 정하고, 사천(泗川)은 91인데 지금 70으로 정하고, 칠원(漆原)은 98인데 지금 70으로 정하고, 합천(陜川)은 1백 6인데 지금 76으로 정하고, 김해(金海)는 5백 6인데 지금 4백 80으로 정하고, 고성(固城)은 6백 54인데 지금 6백 25로 정하고, 웅천(熊川)은 69인데 지금 50으로 정하고, 문경(聞慶)은 2백 52인데 지금 2백 20으로 정하고, 함안(咸安)은 2백 69인데, 지금 2백 40으로 정하고, 창원(昌原)은 2백 88인데 지금 2백 60으로 정하고, 성주(星州)는 1천 5백 9인데 지금 1천 4백 80으로 정하고, 함창(咸昌)은 2백 73인데 지금 2백 30으로 정하고, 의령(宜寧)은 5백 41인데 지금 5백 10으로 정하고, 지례(知禮)는 1백 34인데 지금 1백으로 정하고, 하동(河東)은 99인데 지금 75로 정하고, 거창(居昌)은 4백 20인데 지금 3백 95로 정하고, 고령(高靈)은 1백 30인데 지금 1백으로 정하고, 안음(安陰)은 1백 77인데 지금 1백 40으로 정하고, 상주(尙州)는 1천 7백 72인데 지금 1천 7백 30으로 정하고, 금산(金山)은 5백 65인데 지금 5백 35로 정하고, 진주(晉州)는 1천 1백 1인데 지금 1천 80으로 정하고, 삼가(三嘉)는 1백 41인데 지금 1백 10으로 정하고, 선산(善山)은 7백 65인데 지금 7백 35로 정하고, 곤양(昆陽)은 1백 88인데 지금 1백 60으로 정하고, 산음(山陰)은 1백 73인데 지금 1백 50으로 정하고, 진해(鎭海)는 42인데 지금 22로 정하고, 개령(開寧)은 4백 51인데 지금 4백 24로 정하고, 함양(咸陽)은 2백 28인데 지금 2백 4로 정하고, 단성(丹城)은 95인데 지금 65로 정하였습니다. 총계가 예전에는 2만 3천 8백 70이었는데, 1천 9백 53을 줄이고, 지금 정한 것은 2만 1천 9백 17입니다.

경기(京畿)에 있어서, 지평(砥平)은 제색 군사가 25이고, 양천(陽川)은 21이고, 영평(永平)은 21이고, 김포(金浦)는 21이고, 부평(富平)은 2백 7이고, 가평(加平)은 51이고, 진위(振威)는 1백 36이고, 파주(坡州)는 1백 7이고, 죽산(竹山)은 1백 84이고, 교동(喬桐)은 36이고, 과천(果川)은 55이고, 마천(麻田)은 10이고, 용인(龍仁)은 1백 72이고, 양주(楊州)는 2백 62이고, 삭녕(朔寧)은 93이고, 양성(陽城)은 2백 18이고, 포천(抱川)은 89이고, 인천(仁川)은 89이고, 안성(安城)은 1백 91이고, 양근(陽根)은 59이고, 안산(安山)은 55이고, 수원(水原)은 1천 2백 49이고, 양지(陽智)는 92이고, 적성(積城)은 25이고, 강화(江華)는 2백 50이고, 음죽(陰竹)은 1백 47이고, 연천(漣川)은 55이고, 광주(廣州)는 2백 45이고, 풍덕(豐德)은 1백 17이고, 남양(南陽)은 1백 98이고, 여주(驪州)는 2백 31이고, 이천(利川)은 2백 57이고, 통진(通津)은 1백 1이고, 교하(交河)는 1백 27이고, 개성(開城)은 7백 28이고, 고양(高陽)은 1백 67이고, 금천(衿川)은 55이고, 장단(長湍)은 1백 38인데, 아울러 예전대로 하여 총계가 6천 3백 73입니다.

강원도(江原道)에 있어서, 회양(淮陽)은 제색 군사가 1백 92이고, 고성(高城)은 34이고, 간성(杆城)은 58이고, 횡성(橫城)은 81이고, 낭천(狼川)은 50이고, 양구(楊口)는 79이고, 춘천(春川)은 2백 73이고, 양양(襄陽)은 1백이고, 흡곡(歙谷)은 25이고, 정선(旌善)은 44이고, 강릉(江陵)은 53이고, 평강(平康)은 41이고, 영월(寧越)은 1백 30이고, 통천(通川)은 44이고, 울진(蔚珍)은 65이고, 평해(平海)는 51이고, 평창(平昌)은 51이고, 금성(金城)은 1백 85이고, 철원(鐵原)은 1백 4이고, 삼척(三陟)은 63이고, 원주(原州)는 2백 81이고, 인제(麟蹄)는 33이고, 홍천(洪川)은 80이고, 김화(金化)는 55이고, 이천(伊川)은 88이고, 안협(安峽)은 78인데, 아울러 예전대로 하여 총계가 2천 3백 38입니다.

황해도(黃海道)에 있어서, 황주(黃州)는 제색 군사가 2백 81이고, 해주(海州)는 1천 1백 42이고, 연안(延安)은 6백 2이고, 평산(平山)은 5백 15이고, 서흥(瑞興)은 2백 34이고, 수안(遂安)은 2백 31이고, 곡산(谷山)은 2백 84이고, 안악(安岳)은 4백 24이고, 재령(載寧)은 3백 48이고, 배천(白川)은 3백 33이고, 봉산(鳳山)은 1백 82이고, 풍천(豐川)은 22이고, 장연(長淵)은 1백 22이고, 옹진(甕津)은 50이고, 강령(康翎)은 30이고, 우봉(牛峰)은 2백 15이고, 신계(新溪)는 1백 57이고, 은율(殷栗)은 66이고, 송화(松禾)는 2백 12이고, 문화(文化)는 96이고, 장련(長連)은 80이고, 신천(信川)은 2백 99이고, 토산(兎山)은 1백 36이고, 강음(江陰)은 42인데, 아울러 예전대로 하여 총계가 6천 1백 3입니다.

평안도(平安道)에 있어서, 곽산(郭山)은 제색 군사가 66이고, 선천(宣川)은 1백 27이고, 철산(鐵山)은 1백 20이고, 용천(龍川)은 1백 59이고, 의주(義州)는 8백 68이고, 삭주(朔州)는 1백 40이고, 창성(昌城)은 2백 36이고, 귀성(龜城)은 2백 23이고, 정주(定州)는 2백 31이고, 영유(永柔)는 3백 80이고, 삼화(三和)는 2백 34이고, 증산(甑山)은 94이고, 함종(咸從)은 2백 66이고, 용강(龍崗)은 5백 45이고, 중화(中和)는 2백 29이고, 순안(順安)은 2백 11이고, 숙천(肅川)은 3백 29이고, 평양(平壤)은 2천 8백 53이고, 강서(江西)는 3백 70이고, 안주(安州)는 2백 88이고, 가산(嘉山)은 60이고, 강계(江界)는 8백 24이고, 영변(寧邊)은 4백 44이고, 이산(理山)은 3백 41이고, 영원(寧遠)은 1백 42이고, 위원(渭原)은 1백 48이고, 운산(雲山)은 58이고, 벽동(碧潼)은 4백 15이고, 자산(慈山)은 1백 58이고, 은산(殷山)은 2백 85이고, 덕천(德川)은 2백 40이고, 성천(成川)은 4백 96이고, 삼등(三登)은 5백 40이고, 양덕(陽德)은 75이고, 상원(祥原)은 3백 15이고, 맹산(孟山)은 1백 46이고, 개천(价川)은 3백 41이고, 순천(順川)은 97이고, 태천(泰川)은 64이고, 박천(博川)은 71이고, 희천(熙川)은 1백 74인데, 아울러 예전대로 하여 총계가 1만 3천 5백 4입니다.

영안도(永安道)에 있어서, 옛 길주(吉州)는 제색 군사가 2백 67인데, 위의 길주(吉州)를 나누어 길성(吉城)·명천(明川)을 만든 뒤에 군정(軍丁)을 나누어 시행하였으나, 회계(會計)가 이르지 않았으며, 단천(端川)은 2백 72이고, 이성(利城)은 1백 19이고, 북청(北靑)은 5백 97이고, 갑산(甲山)은 3백 21이고, 삼수(三水)는 1백 8이고, 홍원(洪原)은 1백 99이고, 함흥(咸興)은 6백 20이고, 정평(定平)은 2백 28이고, 영흥(永興)은 5백 31이고, 고원(高原)은 1백 41이고, 문천(文川)은 1백 16이고, 덕원(德源)은 1백 8이고, 안변(安邊)은 3백 24이고, 경성(鏡城)은 4백 21이고, 부령(富寧)은 2백 89이고, 회령(會寧)은 7백 35이고, 종성(鍾城)은 1천 52이고, 온성(穩城)은 7백 88이고, 경원(慶源)은 7백 79이고, 경흥(慶興)은 3백 76인데, 아울러 예전대로 하여 총계가 9천 91입니다. 양계(兩界)는 그 도(道)에 부방(赴防)하여 번상(番上)으로 왕래하는 폐단이 없으니, 예전대로 4번(番)으로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총계가 11만 4백 68이었다.

【원전】 8 집 473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성종 4권 1년 4월 15일 (계해) 003 / 의금부에 전지하여 노비로 삼거나 충군·안치한 죄인을 놓아 보내라고 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에게 내려 준 난신(亂臣)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 딸 이가질구지(李加叱仇之)·이말비(李末非)·이막금(李莫今), 우참찬(右參贊) 황효원(黃孝源)에게 내려 준 이유기의 딸 이소근소사(李小斤召史), 선산(善山)에 부처(付處)한 이정원(李貞元), 서흥(瑞興)에 안치(安置)한 고승익(高承益)·고승후(高承厚), 강진(康津) 관노(官奴)로 정속(定屬)한 강효문(康孝文)의 형(兄) 강효성(康孝誠), 아우 강효순(康孝舜), 강효문의 아내 미동(未同)이 보수(保授)한 첩(妾)의 딸 강효금(康孝今), 좌승지(左承旨) 윤계겸(尹繼謙)에게 내려 준 강이경(姜利敬)의 아내 말비(末非), 말비가 보수한 아들 강금정(康今丁), 딸 강알금(姜謁今)·강세금(姜世今), 신씨(愼氏)가 보수한 강이경의 딸 강종금(姜終今), 해남(海南)에 안치한 강이찬(姜利讚)·강이온(姜利溫), 김효진(金孝震)이 보수한 강명중(姜命重), 영암(靈巖)에 안치한 강이인(姜利仁)·강이순(姜利順), 순천(順天)에 안치한 강이성(姜利誠), 사천(泗川)에 안치한 강이흥(姜利興)·강이공(姜利恭)·강이행(姜利行), 하동(河東)에 종[奴]이 된 윤말손(尹末孫), 거제(巨濟) 관비(官婢)로 정속(定屬)한 춘비(春非), 전주(全州)에 주접(住接)하는 어미가 보수한 난생(卵生), 호비(戶婢) 석비(石非)가 보수한 억정(億丁)·만정(萬丁), 영암(靈巖)에 안치한 허씨(許氏)가 보수한 연동(連同), 나주(羅州)에 안치한 조치(趙治)·조맹근(趙孟根)·조계근(趙季根), 한산(韓山)에 충군(充軍)한 이계명(李季明), 평산(平山)에 종이 된 경유공(慶由恭), 해남(海南)에 종이 된 김효조(金孝祖), 순천(順天)에 부처한 조철산(趙哲山) 등을 놓아 보내고, 성주(星州) 관노(官奴)로 영속(永屬)한 양유원(楊有源)·양득원(楊得源)·양계원(楊繼源)은 본주(本州)에 안치하고, 장례원(掌隷院)에 정속한 어()의 여종[婢] 건이(件伊)·사월(四月)은 제가 젖먹여 기른 어()의 딸 수리(修理)와 유아(乳兒)에게 주게 하라.”

하였다.

【원전】 8 집 488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변란(變亂)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성종 8권 1년 10월 25일 (기사) 004 / 강희맹·원정의·이영은·양순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희맹(姜希孟)을 숭정 대부(崇政大夫) 진산군(晉山君)으로, 원정의(源正義)를 청풍군(淸風君)으로, 이영은(李永垠)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한산군(韓山君)으로, 양순석(梁順石)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현명선(鉉明善)을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신준(申浚)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박형량(朴亨良)을 통선랑(通善郞) 행 사간원 정언(行司諫院正言)으로, 김관(金瓘)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삼았다.

【원전】 8 집 53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성종 10권 2년 5월 29일 (신축) 005 / 충청도 관찰사 김영유에게 하서하여 우박의 피해를 치계하라 명하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영유(金永濡)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이제 들으니 본월 초10일에, 임천(林川)·한산(韓山)·함열(咸悅) 등지에 내린 우박(雨雹)이 크기가 계란과 같아, 부딪친 자는 상(傷)하였다 하는데, 경(卿)은 어찌하여 아뢰지 않았는가? 그것을 속히 치계(馳啓)하라.”

하였다.

【원전】 8 집 575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 *정론-간쟁(諫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성종 12권 2년 윤9월 19일 (무오) 001 / 한산군 이영은의 졸기


한산군(韓山君) 이영은(李永垠)이 졸(卒)하니,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영은의 자(字)는 자건(子健)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인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현손(玄孫)이다. 경태(景泰) 병자년에 과거에 올라 승사랑(承仕郞)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고, 정축년에 중시(重試) 1등에 뽑혔는데, 세조가 그 대답한 글을 보고 4품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전조(銓曹)에서 논박하여 통덕랑(通德郞)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특별히 뛰어 올렸다. 얼마 안 있다가 세자 필선(世子弼善)에 오르고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옮겼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올라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논하였는데, 세조가 매우 좋게 여겨 말하기를, ‘너의 말이 시대의 병통을 깊이 맞추었고 또 소장(疏章)의 격식에도 적합하니, 참으로 너의 조부(祖父) 목은(牧隱)의 문장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대우가 매우 융숭하여 얼마 아니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탁배(擢拜)되고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가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병조(兵曹)·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거쳤다. 신묘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이다. 정도(丁悼)라고 증시(贈諡)하니, 사실을 진술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한 것을 정(丁)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 죽은 것을 도(悼)라 한다. 아들은 이효문(李孝文)이다.

이영은은 총명하고 글을 잘하며, 항상 큰소리치기를, ‘다만 몸을 곧게 함을 요할 것이고 남의 말은 돌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좌우 시종(侍從)이 한 사람도 이영은을 천거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특립(特立)한 사람이다.’ 하였으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탐묵(貪墨)하여 형조 참판이 되어서는 뇌물받기를 만족함이 없게 하였다. 일찍이 혜장(鞋匠)에게 가죽을 주고 신[鞋]을 만들게 하여 값 얼마를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값을 깎고 만들기를 매우 엄하게 독촉하여 조금 더디면 문득 가두었다. 그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것이 이와 같음이 많았다. 예조 판서 김겸광(金謙光)과 더불어 첩(妾)을 가지고 다투다가 사헌부(司憲府)에 고소하니, 사헌부에서 이영은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의금부(義禁府)에 옮겨서 국문(鞫問)하자, 이영은이 분(憤)이 발하여 졸(卒)하니 당시의 평론이 더럽게 여겼다.

【원전】 8 집 602 면

【분류】 *인물(人物)

 

성종 15권 3년 2월 1일 (무진) 007 / 병조에서 하삼도의 군액 감소 계획을 올리니 받아 들이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지난 번에 전지를 받으니, ‘제도의 군액(軍額)이 너무 많다. 병사는 많은 것보다 정한 것이 귀중하니, 재주를 시험하지 않은 군사는 그 수를 적당히 감하라.’ 하셨습니다. 신 등이 지난 경인년에 〈정한〉 제도의 정병(正兵)의 원액(元額)을 자세히 참고하여 보니, 총인원 8만 60가운데에서 하삼도(下三道)에는 5천 8백 60을 줄이고, 또 제진(諸鎭)의 유방군(留防軍) 1만 6천 5백을 제하고, 〈나머지〉 5만 7천 7백을 가지고 7번(番)으로 나누어 번마다 8천 2백 40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인(保人)을 정함에 있어서 전정(田丁)·고공(雇工)·재인(才人)·백정(白丁)과 각종 장인(匠人)을 아울러 계산할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여 감한 수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제 위 항목의 5만 7천 7백 가운데에서 〈전정·고공 등〉 9천 7백을 감하고, 하삼도(下三道) 각 고을의 인물의 쇠잔하고 성함을 따라 골고루 줄여서 기록하여 아뢰니, 청컨대 제도의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로 하여금 자세하게 상고하여 보인을 개정하고 군적(軍籍)을 만들게 하소서. 그런데 지난 번에 각종 군사[諸色軍士]의 거느리고 있는 인정(人丁)을 보인으로 삼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역사를 정한 까닭에 한 집안에 부자 형제(父子兄弟)가 각각 신역(身役)이 있어 서로 구원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가긍(可矜)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군사가 동거하는 아들·사위·아우는 비록 보수(保數)보다 많다 하더라도 2정(丁)에 한하고, 〈나머지는〉 다른 역사를 정하지 말게 하소서. 또 《대전(大典)》에는 원주(院主)와 동거하는 족친(族親) 2인(人)은 다른 역사를 정하지 못하도록 되었지만, 그러나 그 소임이 매우 괴로우니, 청컨대 1인을 더하여 다른 역사를 정하지 말게 하소서. 각진의 유방군(留防軍)은 옛날에는 3번(番)으로 나누어 한 달[一朔]만에 서로 체대(遞代)하게 되어 다른 군인보다 힘들고 괴로우니, 이제 번상(番上)하는 정병(正兵) 4만 8천 가운데에서 5천 5백명을 덜어서 유진군(留鎭軍)에 이속시켜 4번(番)으로 나누어 번갈아가며 쉬게 하고, 그 나머지 정병 4만 2천 5백 명은 8번(番)으로 나누어 번마다 5천 3백 10명씩 번상(番上)하여 숙위(宿衛)하게 하소서.

태평소(太平簫)는 마상병(馬上兵)인데 보정병(步正兵)의 예에 의하여 보(保)를 주는 것은 미편합니다. 청컨대, 기정병(騎正兵)의 예에 의하여 보를 주되, 충청도(忠淸道)에 있어서 충주(忠州)는, 각종 군사[各色軍士] 2천 1백 87 가운데에서 전에는 정병(正兵) 40을 줄여 2천 1백 47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정병 67을 줄여 2천 80으로 정하게 하고, 괴산(槐山)은 3백 30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3백으로 정하였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2백 50으로 정하게 하고, 연풍(延豊)은 82 가운데에서 전에는 42를 줄여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5를 줄여 25로 정하게 하고, 청풍(淸風)은 2백 32 가운데에서 전에는 42를 줄여 1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영춘(永春)은 98 가운데에서 전에는 38을 줄여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5를 줄여 35로 정하게 하고, 음성(陰城)은 1백 44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1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5를 줄여 75로 정하게 하고, 단양(丹陽)은 55 가운데에서 전에는 20을 줄여 3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5를 줄여 20으로 정하게 하고, 제천(堤川)은 2백 7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2백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청주(淸州)는 1천 9백 9 가운데에서 전에는 40을 줄여 1천 8백 69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9를 줄여 1천 8백으로 정하게 하고, 진천(鎭川)은 4백 60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4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3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문의(文義)는 3백 36 가운데에서 전에는 37을 줄여 2백 99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9를 줄여 2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보은(報恩)은 6백 88 가운데에서 전에는 38을 줄여 6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5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청산(靑山)은 3백 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2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황간(黃澗)은 2백 49 가운데에서 전에는 39를 줄여 2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영동(永同)은 3백 95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3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3백으로 정하게 하고, 청안(靑安)은 3백 19 가운데에서 전에는 39를 줄여 2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직산(稷山)은 1백 50 가운데에서 전에는 25를 줄여 1백 2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5를 줄여 90으로 정하게 하고, 목천(木川)은 2백 98 가운데에서 전에는 28을 줄여 2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천안(天安)은 5백 5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2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4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회인(懷仁)은 1백 88 가운데에서 전에는 38을 줄여 1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으로 정하게 하고, 전의(全義)는 2백 25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1백 9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5를 줄여 1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공주(公州)는 2천 7백 50 가운데에서 전에는 20을 줄여 2천 7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천 6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정산(定山)은 2백 49 가운데에서 전에는 39를 줄여 2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50으로 정하게 하고, 부여(扶餘)는 1백 42 가운데에서 전에는 32를 줄여 1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0을 줄여 80으로 정하게 하고, 임천(林川)은 3백 96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3백 67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7을 줄여 3백으로 정하게 하고, 한산(韓山)은 2백 9 가운데에서 전에는 39를 줄여 1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석성(石城)은 1백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0을 줄여 40으로 정하게 하고, 이산(尼山)은 2백 84 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2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연산(連山)은 3백 9 가운데에서 전에는 39를 줄여 2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연기(燕岐)는 4백 20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3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2를 줄여 3백 28로 정하게 하고, 회덕(懷德)은 3백 1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2백 66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6으로 정하게 하고, 진잠(鎭岑)은 1백 65 가운데에서 전에는 40을 줄여 1백 2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5를 줄여 70으로 정하게 하고, 옥천(沃川)은 5백 64 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5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4백 50으로 정하게 하고, 은진(恩津)은 2백 90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2백 5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5를 줄여 1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홍주(洪州)는 1천 5백 80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1천 5백 4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5를 줄여 1천 4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청양(靑陽)은 3백 55 가운데에서 전에는 45를 줄여 3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50으로 정하게 하고, 평택(平澤)은 89 가운데에서 전에는 49를 줄여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0을 줄여 30으로 정하게 하고, 비인(庇仁)은 1백 14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60으로 정하게 하고, 온양(溫陽)은 5백 15 가운데에서 전에는 55를 줄여 4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3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신창(新昌)은 2백 74 가운데에서 전에는 44를 줄여 2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면천(沔川)은 3백 85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3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결성(結城)은 4백 16 가운데에서 전에는 36을 줄여 3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3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보령(保寧)은 3백 84 가운데에서 전에는 33을 줄여 3백 51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1을 줄여 2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서산(瑞山)은 5백63 가운데에서 전에는 33을 줄여 5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8을 줄여 4백 62로 정하게 하고, 남포(藍浦)는 2백 96 가운데에서 전에는 36을 줄여 2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2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서천(舒川)은 2백 가운데에서 전에는 20을 줄여 1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홍산(鴻山)은 95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40으로 정하게 하고, 예산(禮山)은 2백 85 가운데에서 전에는 45를 줄여 2백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아산(牙山)은 4백 54 가운데에서 전에는 54를 줄여 4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3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덕산(德山)은 4백 71 가운데에서 전에는 41을 줄여 4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3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당진(唐津)은 2백 90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2백 5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5를 줄여 1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대흥(大興)은 4백 26 가운데에서 전에는 46을 줄여 3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3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태안(泰安)은 2백 67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2백 37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7을 줄여 1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해미(海美)는 2백 75 가운데에서 전에는 45를 줄여 2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 80으로 정하게 하소서.

전라도(全羅道)에 있어서, 창평(昌平)은 각종 군사[各色軍士] 4백 가운데에서 전에는 정병(正兵) 30을 줄여 3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2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곡성(谷城)은 4백 4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4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3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함평(咸平)은 9백 16 가운데에서 전에는 36을 줄여 8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8백으로 정하게 하고, 무장(茂長)은 1천 43 가운데에서 전에는 33을 줄여 1천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9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능성(綾城)은 7백 6 가운데에서 전에는 46을 줄여 6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5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남평(南平)은 5백 21 가운데에서 전에는 41을 줄여 4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4백으로 정하게 하고, 무주(茂朱)는 3백 17 가운데에서 전에는 47을 줄여 2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2백으로 정하게 하고, 광양(光陽)은 2백 59 가운데에서 전에는 39를 줄여 2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1백 50으로 정하게 하고, 화순(和順)은 3백 37 가운데에서 전에는 37을 줄여 3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2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동복(同福)은 5백 29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5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4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순천(順天)은 6백 55 가운데에서 전에는 25를 줄여 6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5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고산(高山)은 5백 79 가운데에서 전에는 39를 줄여 5백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5를 줄여 4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무안(務安)은 3백 5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2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흥양(興陽)은 5백 19 가운데에서 전에는 43을 줄여 4백 76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6을 줄여 4백으로 정하게 하고, 진도(珍島)는 1백 98 가운데에서 전에는 18을 줄여 1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해남(海南)은 6백 46 가운데에서 전에는 36을 줄여 6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5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만경(萬頃)은 3백 78 가운데에서 전에는 48을 줄여 3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2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임피(臨陂)는 7백 69 가운데에서 전에는 49를 줄여 7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6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옥구(沃溝)는 4백 31 가운데에서 전에는 41을 줄여 3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3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임실(任實)은 7백 48 가운데에서 전에는 38을 줄여 7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6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영광(靈光)은 1천 1백 83 가운데에서 전에는 33을 줄여 1천 1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1천 70으로 정하게 하고, 금구(金溝)는 4백 58 가운데에서 전에는 38을 줄여 4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3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운봉(雲峯)은 4백 26 가운데에서 전에는 46을 줄여 3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3백으로 정하게 하고, 장흥(長興)은 8백 81 가운데에서 전에는 21을 줄여 8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7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고창(高敞)은 3백 95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3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2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낙안(樂安)은 2백 29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2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태인(泰仁)은 1천 1백 1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1천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90을 줄여 9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광주(光州)는 9백 29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9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8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고부(古阜)는 1천 1백 4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1천 1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1천 30으로 정하게 하고, 진산(珍山)은 2백 50 가운데에서 전에는 50을 줄여 2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순창(淳昌)은 9백 30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9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90을 줄여 8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보성(寶城)은 6백 6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5백 76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6을 줄여 4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정읍(井邑)은 4백 92 가운데에서 전에는 42를 줄여 4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3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강진(康津)은 1천 7 가운데에서 전에는 27을 줄여 9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9백으로 정하게 하고, 흥덕(興德)은 4백 56 가운데에서 전에는 36을 줄여 4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3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구례(求禮)는 1백 57 가운데에서 전에는 37을 줄여 1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70으로 정하게 하고, 남원(南原)은 1천 8백 57 가운데에서 전에는 27을 줄여 1천 8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90을 줄여 1천 7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나주(羅州)는 1천 4백 50 가운데에서 전에는 60을 줄여 1천 3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90을 줄여 1천 3백으로 정하게 하고, 영암(靈巖)은 2백 7 가운데에서 전에는 37을 줄여 1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전주(全州)는 1천 8백 91 가운데에서 전에는 26을 줄여 1천 8백 6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95를 줄여 1천 7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담양(潭陽)은 8백 10 가운데에서 전에는 35를 줄여 7백 7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9를 줄여 6백 86으로 정하게 하고, 진안(鎭安)은 4백 18 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3백 84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4를 줄여 3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함열(咸悅)은 4백 36 가운데에서 전에는 46을 줄여 3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3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장성(長城)은 5백 14 가운데에서 전에는 44를 줄여 4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4백으로 정하게 하고, 장수(長水)는 3백 78 가운데에서 전에는 48을 줄여 3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2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익산(益山)은 3백 82 가운데에서 전에는 52를 줄여 3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2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금산(錦山)은 6백 24 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5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5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옥과(玉果)는 4백 29 가운데에서 전에는 39를 줄여 3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3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김제(金堤)는 9백 4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9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8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부안(扶安)은 1천 1백 6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1천 1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80을 줄여 1천 50으로 정하게 하고, 용담(龍潭)은 1백 14 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60으로 정하게 하고, 용안(龍安)은 1백 64 가운데에서 전에는 44를 줄여 1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0을 줄여 90으로 정하게 하고, 여산(礪山)은 2백 95 가운데에서 전에는 45를 줄여 2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진원(珍原)은 2백 55 가운데에서 전에는 45를 줄여 2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백 50으로 정하게 하소서.

경상도(慶尙道)에 있어서, 언양(彦陽)은 각종 군사[各色軍士] 69 가운데에서 전에 정병(正兵) 29를 줄여 40으로 정하였고, 영덕(盈德)은 2백 57 가운데에서 전에는 27을 줄여 2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1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청송(靑松)은 2백 71 가운데에서 전에는 27을 줄여 2백 44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4를 줄여 2백으로 정하게 하고, 의성(義城)은 6백 25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5백 94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4를 줄여 5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양산(梁山)은 74 가운데에서 전에 24를 줄여 50으로 정하였고, 비안(比安)은 3백 60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3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2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경산(慶山)은 1백 55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1백 24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4를 줄여 80으로 정하게 하고, 예천(醴泉)은 7백 8 가운데에서 전에는 28을 줄여 6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6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봉화(奉化)는 85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5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5를 줄여 40으로 정하게 하고, 밀양(密陽)은 7백 93 가운데에서 전에는 23을 줄여 7백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7백으로 정하게 하고, 현풍(玄風)은 1백 53 가운데에서 전에는 33을 줄여 1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1백으로 정하게 하고, 청도(淸道)는 4백 46 가운데에서 전에는 26을 줄여 4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3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장기(長鬐)는 97 가운데에서 전에는 27을 줄여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50으로 정하게 하고, 신녕(新寧)은 78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48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8을 줄여 30으로 정하게 하고, 기장(機長)은 2백 32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2백 3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3을 줄여 1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영천(榮川)은 3백 13 가운데에서 전에는 28을 줄여 2백 8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5를 줄여 2백 30으로 정하게 하고, 영천(永川)은 5백 30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5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4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창녕(昌寧)은 3백 91 가운데에서 전에는 25를 줄여 3백 66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6을 줄여 3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대구(大丘)는 3백 46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3백 16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6을 줄여 2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흥해(興海)는 1백 95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1백 6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5를 줄여 1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하양(河陽)은 78 가운데에서 전에는 38을 줄여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0을 줄여 30으로 정하게 하고, 진보(眞寶)는 1백 8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1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으로 정하게 하고, 청하(淸河)는 1백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0을 줄여 60으로 정하게 하고, 예안(禮安)은 65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3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를 줄여 30으로 정하게 하고, 동래(東萊)는 2백 63 가운데에서 전에는 33을 줄여 2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1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군위(軍威)는 2백 84 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2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2백으로 정하게 하고, 영해(寧海)는 3백 30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3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2백 50으로 정하게 하고, 경주(慶州)는 1천 4백 72 가운데에서 전에는 22를 줄여 1천 4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1천 3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인동(仁同)은 3백 96 가운데에서 전에는 46을 줄여 3백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3백으로 정하게 하고, 용궁(龍宮)은 2백 62 가운데에서 전에는 42를 줄여 2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1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풍기(豊基)는 3백 97 가운데에서 전에는 37을 줄여 3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3백으로 정하게 하고, 안동(安東)은 6백 86 가운데에서 전에는 26을 줄여 6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6백으로 정하게 하고, 울산(蔚山)은 1천 30 가운데에서 전에는 20을 줄여 1천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9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연일(延日)은 2백 29 가운데에서 전에는 24를 줄여 2백 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5를 줄여 1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의흥(義興)은 1백 52 가운데에서 전에는 32를 줄여 1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1백으로 정하게 하고, 영산(靈山)은 2백 19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1백 9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1백 50으로 정하게 하고, 거제(巨濟)는 2백 20 가운데에서 전에는 20을 줄여 2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1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초계(草溪)는 1백 24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94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4를 줄여 60으로 정하게 하고, 사천(泗川)은 91 가운데에서 전에는 21을 줄여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0을 줄여 60으로 정하게 하고, 칠원(漆原)은 98 가운데에서 전에는 28을 줄여 7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50으로 정하게 하고, 합천(陝川)은 1백 6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76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6을 줄여 50으로 정하게 하고, 김해(金海)는 5백 6 가운데에서 전에는 26을 줄여 4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4백 20으로 정하게 하고, 남해(南海)는 66 가운데에서 전에는 26을 줄여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7을 줄여 23으로 정하게 하고, 고성(固城)은 6백 54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6백 2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5를 줄여 5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웅천(熊川)은 69 가운데에서 전에는 19를 줄여 5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0을 줄여 40으로 정하게 하고, 문경(聞慶)은 2백 52 가운데에서 전에는 32를 줄여 2백 2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1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함안(咸安)은 2백 69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2백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2백으로 정하게 하고, 창원(昌原)은 2백 88 가운데에서 전에는 28을 줄여 2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2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성주(星州)는 1천 5백 9 가운데에서 전에는 29를 줄여 1천 4백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70을 줄여 1천 4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함창(咸昌)은 2백 73 가운데에서 전에는 43을 줄여 2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1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의령(宜寧)은 5백 4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5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4백 50으로 정하게 하고, 지례(知禮)는 1백 34 가운데에서 전에는 34를 줄여 1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80으로 정하게 하고, 하동(河東)은 99 가운데에서 전에는 24를 줄여 7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5를 줄여 50으로 정하게 하고, 거창(居昌)은 4백 20 가운데에서 전에는 25를 줄여 3백 9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5를 줄여 3백 40으로 정하게 하고, 고령(高靈)은 1백 30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1백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0을 줄여 80으로 정하게 하고, 안음(眼陰)은 1백 77 가운데에서 전에는 37을 줄여 1백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40을 줄여 1백으로 정하게 하고, 상주(尙州)는 1천 7백 72 가운데에서 전에는 42를 줄여 1천 7백 3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2백 40을 줄여 1천 4백 90으로 정하게 하고, 금산(金山)은 5백 65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5백 3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5를 줄여 4백 80으로 정하게 하고, 진주(晉州)는 1천 1백 1 가운데에서 전에는 21을 줄여 1천 8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0을 줄여 1천 20으로 정하게 하고, 삼가(三嘉)는 1백 41 가운데에서 전에는 31을 줄여 1백 1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0을 줄여 80으로 정하게 하고, 선산(善山)은 7백 65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7백 35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5를 줄여 6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곤양(昆陽)은 1백 88 가운데에서 전에는 28을 줄여 1백 6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1백 10으로 정하게 하고, 산음(山陰)은 1백 73 가운데에서 전에는 33을 줄여 1백 40으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50을 줄여 90으로 정하게 하고, 진해(鎭海)는 42 가운데에서 전에 20을 줄여 22로 정하였고, 개령(開寧)은 4백 51 가 운데에서 전에는 27을 줄여 4백 24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64를 줄여 3백 60으로 정하게 하고, 함양(咸陽)은 2백 28 가운데에서 전에는 24를 줄여 2백 4로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34를 줄여 1백 70으로 정하게 하고, 단성(丹城)은 95 가운데에서 전에는 30을 줄여 65를 정하였었는데 이제는 15를 줄여 50으로 정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충청도는 총계 2만 1천 4백 41 가운데에서 이제 2천 8백 60이 줄어 1만 8천 5백 81이 되고, 전라도는 총계 3만 1천 6백 76 가운데에서 이제 3천 9백 45가 줄어 2만 7천 7백 31이 되고, 경상도는 총계 2만 1천 9백 10 가운데에서 이제 2천 8백 95가 줄어 1만 9천 15가 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8 집 629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성종 15권 3년 2월 18일 (을유) 004 / 효우와 절의가 특이한 복승정·첩 지지 등 여럿을 포상·정문하게 하다


예조(禮曹)에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영유(金永濡)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홍주(洪州) 사람 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복승정(卜承貞)은 어려서부터 절행(節行)이 있어 항상 어버이를 기쁘게 하려고 힘썼고, 부모의 뜻을 어김이 없었으며, 등제(登第)하여 벼슬하기 시작하였으나 사직하고 돌아와 시양(侍養)하였으며, 아비가 벼슬하라고 꾸짖으면 마지못해 머뭇거리며 차마 떠나지 못하였고, 떠나는 길에 오를 때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가 죽자 애훼(哀毁)함이 예(禮)를 넘고, 상장(喪葬)은 다 《가례(家禮)》에 따랐습니다.

또 한산군(韓山郡) 사람 장사랑(將仕郞) 박지(朴地)는 어려서부터 효심(孝心)이 지극하여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항상 어버이의 곁에 있으면서 감지(甘旨)의 봉양을 끊이지 아니하였고, 어미가 질병을 얻었을 때 기도하여도 낫지 않았는데, 똥을 맛 보아 맛이 달자[嘗糞味甛] 마음으로 극히 우구(憂懼)하여 매일 밤 별에다 절하면서 대신할 것을 원하여 어미의 병이 낫게 되었으며, 부모가 죽자 집 곁에 장사하고, 지금까지 10여 년이 되었는데도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배례하고,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제사하며, 출입하면 반드시 고하여 애모하는 마음이 초상(初喪) 때와 같았습니다.

또 태안군(泰安郡) 사람 학생(學生) 김득중(金得中)은 어린 나이[弱齡] 때부터 양친(兩親)을 효양(孝養)하여 무릇 어버이가 하고자 하는 것과 먹고자 하는 것은 어버이의 뜻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아비가 죽자 밤낮으로 읍혈(泣血)하며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죽을 먹고 얼굴이 검게 되어 애훼(哀毁)함이 예(禮)를 넘어 거의 성품을 상실하기에 이르렀으며, 어미를 봉양하기 30년에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미가 병에 걸리니 향(香)을 피워 하늘에 고하고 몸으로써 대신할 것을 청하여 어미의 병이 문득 나았으며, 뒤에 어미가 죽으니 슬퍼하기를 아비의 초상과 꼭 같이 하였습니다.

또 학생(學生) 조숭례(曹崇禮)는 어려서부터 지조(志操)가 있어 부모를 섬기는 데 효도를 다하고 아침저녁으로 정성(定省)을 폐하지 않았고, 부모가 죽자 무덤 곁에 여막(廬幕)을 치고 애훼(哀毁)함이 예(禮)를 넘으므로 온 고을이 칭송하였습니다.

또 청주(淸州) 사람 종사랑(從仕郞) 경연(慶延)은 타고난 성품이 정직하여 어버이를 색양(色養)하며, 반드시 감지(甘旨)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질병이라도 있으면 근심하고 걱정하며 몸소 약을 다리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 아비가 일찍이 병에 걸려 낫지 않았는데 정월에 큰 비가 내려 냇물이 불었습니다. 아비가 신선한 회[鮮膾]를 맛보고자 하므로, 경연(慶延)이 즉시 냇가에 가서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 그물을 쳤으나 물결이 사납고 급하므로, 경연은 다시 물결이 순하게 흐르는 데로 그물을 옮겨 하루 종일 밤을 새면서 기다리니, 마침내 큰 고기 두어 마리가 그물에 걸렸습니다. 가지고 와서 바치니, 아비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밥을 먹지 못하고 오직 물고기만 먹고 싶었는데 이제 얻어 먹게 되니 매우 입에 맞으며, 내 병이 차도(差度)가 있을 것 같다.’고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과연 병이 나으니 사람이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뒤에 아비가 죽자 3일을 물과 장을 입에 넣지 않고 초상의 제도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여 젓[醢]·장(醬)을 먹지 않고 지나치게 슬퍼하며 뼈만 남았으며, 3년 동안 여묘(廬墓)하면서 일찍이 그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가묘(家廟)를 세워 삭망(朔望)에 반드시 제사하고,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고하여 살았을 때와 같이 섬기고, 새 음식물이 생기면 반드시 천신(薦新)하고, 천신하지 않고는 먹지 않았습니다. 어미를 섬기기에 더욱 부지런하여 반드시 주육(酒肉)으로 봉양(奉養)하고, 밤이면 어미가 잠자리에 누워야만 물러났고, 나이가 40이 넘었어도 출세하기를 일삼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혹 벼슬하기를 권하면 말하기를, ‘궁(窮)하고 영달(榮達)하는 것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구한다고 되겠느냐?’ 하였습니다. 아비가 일찍 노비 2구(口)를 주었는데, 아비가 죽은 뒤 경연(慶延)은 아우와 누이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귀신을 믿고 부처를 숭배하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물리치니 향리(鄕里)가 감화(感化)하였습니다.

그리고 면천군(沔川郡)의 선군(船軍) 박문(朴文)의 딸 지지(芷芝)는 일찍이 어미를 잃고 고모 집에서 자랐으며, 나이 17세에 같은 고을 사람 안지의(安止義)의 첩(妾)이 되었는데, 안지의가 나질(癩疾)을 얻어 수년 동안 두 눈이 멀고 머리털이 빠지고 피부는 벗겨진 것과 같고 지체(支體)에는 피가 흘러 악한 냄새가 풍겨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데도 지지는 섬기기를 꺼려하지 아니하였으며, 안지의(安止義)는 눈에 예막(瞖膜)이 있었는데, 혀로 핥기를 무릇 19년을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안지의가 죽자 집 동산[家園]에 빈소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몸소 전(奠)을 드리고 애도(哀悼)하였으며, 3년상을 마치자 고을 사람이 장가들려는 자가 있었고 고모도 또한 그 지조(志操)를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지지(芷芝)가 말하기를, ‘고모가 만약 나에게 강요(强要)하면 나는 물에 빠져 죽겠습니다.’ 하니, 고모는 송연(竦然)하여서 그만두었습니다. 끝내 신절(信節)을 지킨 지 14년에 애모(哀慕)로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신 등은 《대전(大典)》의 장권(奬勸) 조를 자세히 참고하니, ‘효우(孝友)와 절의(節義)가 특이(特異)한 자는 벼슬로 상을 주고, 혹은 물건으로 상을 주며, 더욱 특이한 자는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청컨대 복승정(卜承貞)·박지(朴地)·김득중(金得中)·조숭례(曹崇禮)·경연(慶延)은 이조(吏曹)·병조(兵曹)로 하여금 재주에 따라 탁용(擢用)하고, 안지의(安止義)의 첩(妾) 지지(芷芝)는 열녀문(烈女門)을 세워 정표(旌表)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8 집 637 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성종 27권 4년 2월 19일 (경진) 004 / 의금부에서 오자경·맹석흠의 죄를 아뢰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전 보산군(寶山君) 오자경(吳子慶)은 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목공(木工) 위사문(魏士文)을 불렀다가 오지 않으매, 성이 나서 매를 때려 죽이고는, 자취를 없애려고 관(棺)을 열고 시체를 훔쳐 내어 강물에 던졌으니, 죄가 율문(律文)에 따라 교형(絞刑)에 해당하며, 또 절도사(節度使) 김봉원(金奉元)에게 청탁하여 온양(溫陽)의 정병(正兵) 2여(旅) 반과 파적위(破敵衛) 36명을 사사로이 빌어 쌀 46석과 재목(材木)을 거둬들였으니, 죄가 율문에 따라 장(杖) 1백 대에다 도(徒) 3년에 해당하는데, 종중(從重)하여 교대시(絞待時)가 됩니다. 신창군(新昌君) 맹석흠(孟碩欽)은 절도사 김봉원에게 청탁하여 신창(新昌)의 정병 1여 반과 한산(韓山)의 정병 20명을 사사로이 빌어 쌀 23석을 거둬들였으니, 그 죄는 율문에 따라 장 90대에, 도 2년 반에 처하고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追奪)하고 사적(仕籍)에서 제명(除名)하여 서용(敍用)하지 않는 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모두 사유(赦宥)가 있기 이전의 일입니다.”

하니, 오자경은 고신을 거두고 외방(外方)에 안치(安置)하며, 맹석흠은 고신을 거두고 외방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9 집 8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군사-특수군(特殊軍)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성종 30권 4년 5월 4일 (갑오) 005 / 형조에서 한산의 죄수 강자을미·이석 등의 죄를 아뢰다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한산(韓山)의 죄수 강자을미(姜者乙美)·이석(李石)은 승사(僧舍)를 겁탈하여 강도(强盜)하였으니, 죄가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하고, 수교(受敎)에 의거하여 처자(妻子)는 변방 고을의 노비(奴婢)로 영속(永屬)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9 집 22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가족-친족(親族)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성종 40권 5년 3월 8일 (계사) 002 / 의금부에서 상중에 간통한 인심·박옥형과 인심을 간통하고자 한 정혼의 죄를 아뢰다


이보다 앞서 전 만호(萬戶) 유정문(柳井汶)의 서녀(庶女) 유인심(柳仁心)이 집안이 넉넉하고 용자(容姿)가 있으므로 한산군(韓山君) 이영은(李永垠)이 취(娶)하여 첩(妾)으로 삼았다. 유정문과 이영은이 죽게 되자, 인심(仁心)이 상복을 입고 과부로 지내니, 유학(幼學) 박옥형(朴玉衡)이 몰래 간통하였는데, 전 현감(縣監) 정혼(鄭渾)도 또한 사통하고자 하여 그 방에 들어갔다가 그 집안에서 쫓겨나는 바가 되었다. 일이 발각되어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이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인심(仁心)은 아비와 남편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박옥형에게 시집갔으므로, 죄가 율(律)에 장(杖) 80에 해당하니 홀로 좌죄(坐罪)시키되, 주혼(主婚)은 물론(勿論)하고, 박옥형은 상중에 있는 인심을 취(娶)하였으므로, 죄가 태(笞) 30에 해당하니 이이(離異)시키게 하고, 인심의 어미 승비(勝非)는 상중에 있으면서 혼인하는 일을 주관하여 딸을 박옥형에게 시집보냈으니, 죄가 장(杖) 80에 해당하며, 정혼(鄭渾)은 조사(朝士)로서 상중에 있는 여인과 간통하고자 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가 욕(辱)을 당하였으니, 죄가 장(杖) 80을 속(贖)하는 데 해당하니 고신(告身) 3등을 빼앗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되, 명하여 정혼은 다만 고신만 거두게 하고, 박옥형은 이이(離異)하지 말게 하였다.

【원전】 9 집 95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성종 67권 7년 5월 27일 (기사) 003 / 충훈부·의정부 당상들이 대간들의 의견대로 황효원의 죄를 청했지만 들어주지 않다


충훈부(忠勳府)의 경력(經歷) 김극수(金克羞)가 당상(堂上)들의 의논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황효원(黃孝源)이 첩으로 처를 삼은 데 대하여 당초(當初)에 하문(下問)을 할 때에 신(臣) 등은 모두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 대신(大臣)으로서 난신(亂臣)의 딸에게 장가들어 첩을 삼는다는 것이 있을 법이나 한 일입니까? 게다가 또 도리어 예(禮)를 갖추어서 성혼(成婚)을 했다고 한다니, 그가 말한 혼서(婚書)와 예장(禮狀)은 거짓입니다. 또 현재는 난신의 딸로 첩을 삼은 자가 한둘이 아닌데, 만약 황효원의 첩으로 처를 삼는 것을 들어준다면 그 나머지들도 그것으로 관례를 삼을 것이니, 청컨대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였고,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이세필(李世弼)도 당상관들의 의논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은 급부(給付)받은 난신(亂臣)의 딸로 첩을 삼았고, 이제 또 처를 삼고자 하여, ‘그의 어미가 생존(生存)했을 때에 예(禮)를 갖추어 성혼(成婚)한 것이다.’고 말합니다만, 이미 천인(賤人)이 된 형편인데 어느 겨를에 예를 갖추어 성혼을 했겠습니까? 그것은 거짓입니다. 배필(配匹)을 구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적체(適體)라야 하는데, 황효원은 대신(大臣)으로서 난신(亂臣)의 딸로 처를 삼았으니, 그 죄가 한 가지이고, 병자년의 반역(反逆)은 반역중에서도 큰 반역인데, 황효원은 이미 훈신(勳臣)이 된 처지로서 반역한 사람의 딸로써 처를 삼았으니, 그 죄가 두 가지입니다. 세종(世宗) 때에 심씨(沈氏)가 죄를 얻은 뒤에 이숭지(李崇之)가 심씨의 집안에 장가를 들자, 조정(朝廷)의 의논(議論)이, 이하(李夏)가 가장(家長)이면서 불충(不忠)한 집안의 딸로 며느리를 보았다 하여 직첩(職牒)을 수탈(收奪)하고 오랫동안 서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효원이 장가든 것은 불충뿐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즈음 대간(臺諫)들이 계속해서 진언(進言)하는 것이니, 청컨대 청납(聽納)하소서.”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어떻게 대신(大臣)으로서 예를 갖추어 성혼하지 않고서 거짓으로 성례(成禮)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급부(給付)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종[婢]으로 부리지는 않았다. 내가 어찌 의친(議親)이라고 해서 두둔함이겠는가? 그의 족계(族係)는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의 후손(後孫)이다.”

하였다.

【원전】 9 집 346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신분-천인(賤人)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성종 67권 7년 5월 28일 (경오) 002 / 경연에서 장령 이숙문 등이 황효원의 처·첩 분변을 논하자 첩으로 논정하게 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이숙문(李淑文)이 아뢰기를,

“황효원(黃孝源)의 죄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전하(殿下)게서는 관용(寬容)을 베푸실 뿐만 아니라 그의 욕구를 들어주려고 하시니, 신 등은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정부(政府)와 충훈부(忠勳府)에서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은 것은 의친(議親) 때문도 아니며 대신(大臣)인 때문도 아니다. 이유기(李裕基)의 딸은 곧 한산군(韓山君)의 후손(後孫)이니, 이는 사실상 세가(世家)의 자손(子孫)이다. 비록 아비의 일로 인하여 급부(給付)는 되었으나 황효원이 애당초 역사(役使)시키지 않았으며, 또 예(禮)를 갖추어 성혼(成婚)했다고 하니, 대신의 말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윤허(允許)를 않은 것이다.”

하니, 영사 김질(金礩)이 아뢰기를,

“세상 사람들 가운데 그의 처부(妻父)가 혹 역주(逆誅)되고 혹 장물(贓物)로 좌죄(坐罪)되면 그의 처자를 버리고 다시 장가든 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효원은 굳이 난신의 딸로써 처를 삼으려고 하니 이는 도대체 무슨 마음입니까? 더구나 급부(給付)된 종[婢]을 중매를 해서 맞이하는 것이 예(禮)이겠습니까? 만약 법대로 바로잡지 않는다면, 세상에는 난신의 딸로 첩을 삼은 자들이 많은데, 이들도 다 통혼(通婚)할 수 있도록 하시렵니까? 이것은 난신의 외손(外孫)으로 하여금 모두 조정(朝廷)의 대열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결과이니, 그렇게 되면 난적(亂賊)을 주토(誅討)한 의의(意義)가 없게 됩니다. 청컨대 고치게 하소서.”

하였고, 영사(領事) 조석문(曹錫文)도 처를 삼을 수는 없다는 뜻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다른 것은 의논할 것이 없고, 난신의 딸이란 점을 구실로 삼는다면 처를 삼게 하는 것은 과연 불가(不可)한 것이다.”

하고, 인하여 우승지(右承旨) 임사홍(任士洪)에게 명하기를,

“첩으로 논정(論定)하라.”

하였다.

【원전】 9 집 347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신분-천인(賤人)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성종 73권 7년 11월 18일 (무오) 006 / 세 쌍둥이를 나은 양녀 춘덕과 귀비에게 전례에 따라 쌀·콩을 각각 10석씩 내려주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경기(京畿)의 금천(衿川)에 사는 사노(私奴) 복만(卜萬)의 아내인 양녀(良女) 춘덕(春德)과 충청도(忠淸道)의 한산(韓山)에 사는 선군(船軍) 최중(崔衆)의 아내인 양녀(良女) 귀비(貴非) 등은 모두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으니, 청컨대 전례(前例)에 의하여 각각 쌀·콩 아울러 10석(石)씩을 내려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9 집 394 면

【분류】 *호구-호구(戶口) / *왕실-사급(賜給) / *신분-천인(賤人)

 

성종 88권 9년 1월 11일 (갑술) 003 / 병조에서 군기 연마의 소홀함에 대한 처벌을 건의하다


병조(兵曹)에서 하삼도 순찰사(下三道巡察使) 이극배(李克培)의 계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충청도(忠淸道) 충주 목사(忠州牧使) 박계성(朴繼姓)·태안 군수(泰安郡守) 김조양(金調陽)·한산 군수(韓山郡守) 최지(崔漬)·충주 판관(忠州判官) 이봉손(李奉孫)·직산 현감(稷山縣監) 조충로(趙忠老)·덕산 현감(德山縣監) 신자제(愼自齊)·연풍 현감(延豐縣監) 전석동(全石童)·청안 현감(淸安縣監) 김신손(金愼孫)·제천 현감(堤川縣監) 신숙서(申叔胥)·영동 현감(永同縣監) 유성(柳誠)·이산 현감(尼山縣監) 최연명(崔延命)은 군기를 연마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계본에 의하여 파직하여 내치고, 본도의 절도사(節度使)도 검거(檢擧)하지 못하였으니, 유사(攸司)를 시켜 추국(推鞫)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9 집 543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성종 89권 9년 2월 3일 (병신) 004 / 예조에서 보로가 소허를 살해한 죄에 대한 처벌에 대해 아뢰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평안도 위원군(渭原君)에서 올려 보낸 올량합(兀良哈) 유가장개(柳加將介)의 공초에, ‘본래 모련위(毛憐衛)의 시기리(時其里)에 살았었는데, 지난 정유년 12월쯤에 친동생 보로(甫老)가 같은 마을 사람인 올량합 소허(所虛)와 사냥하다가 사슴 때문에 다투면서 소허를 쏘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내 우을지(亐乙只)·창거(昌巨) 및 보로(甫老)·자을지(者乙只) 등과 함께 그 곳을 도망하여 떠나서 위원군으로 향하여 왔으니, 귀국에서 살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유가장개 및 아내 우을지·창거 등 3인은 충청도(忠淸道) 한산(韓山)으로 보내고, 보로·자을지 등 2인은 서천(舒川)으로 보내어 살게 하소서. 또 보로와 자을지로 하여금 아내를 얻도록 허락하고, 다 가옥과 토지를 주고, 5년을 한도로 관(官)에서 세 철[三節]의 의복과 식량을 주어서 거처를 잃지 말게 하고, 연말마다 사는 상황을 갖추어 기록해서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9 집 553 면

【분류】 *외교-야(野)

 

성종 90권 9년 3월 19일 (신사) 007 / 예조에서 투항해 온 야인들의 처리에 대해 아뢰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평안도(平安道)에 나온 야인(野人) 나하추(羅何秋)·누채(樓蔡) 등이 공칭(供稱)하기를, ‘계통이 요동(遼東) 사람인데, 포로가 되어서 건주위(建州衛)에 이르러 올량합(兀良哈) 유롱가(劉弄可)의 집에 살면서 그 종(奴)이 되었다는데, 시키는 일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금년 정월 초1일에 그곳을 도망해 나와서 평안도를 향해 나왔습니다. 우리들은 본래 한어(漢語)를 알지 못하고, 또 부모가 사는 땅과 종족(宗族)의 성명도 알지 못하니, 귀국(貴國)에 귀의(歸依)하여 살고자 합니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충청도 한산(韓山)에 분치(分置)한 올량합 유장개(柳將介)의 예(例)에 따라 전라도 금산(錦山)에 배치하고, 부실(富實)한 민호(民戶)에서 보증을 해 주어서 아내를 얻게 하고, 가옥(家屋)과 전지(田地)를 주되, 3년 동안 한(限)하여 관(官)에서 의복과 식량을 주어 생업(生業)에 안정(安定)하게 하고, 매년 세말(歲末)에 생활하는 상태를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9 집 570 면

【분류】 *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

 

성종 129권 12년 5월 15일 (기축) 003 / 의정부 좌참찬 이훈의 졸기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이훈(李塤)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훈의 자(字)는 화백(和伯)이요, 처음 이름은 이서(李墅)였다. 한산(韓山) 사람으로서 관찰사(觀察使) 이축(李蓄)의 아들이었고,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사위였다. 처음에 사직(司直)으로 제수되었다가 정통(正統) 정묘년에 세자 우위솔(世子右衛率)로 임명되었고, 무진년에 호군(護軍) 겸(兼) 전첨(典籤)에 승진되어 세자 좌익찬(世子左翊贊)이 되었고, 경태(景泰) 계유년에 동부지돈녕부사(同副知敦寧府事)로 승진되었고, 갑술년에 예빈시 윤(禮賓寺尹)으로 전임(轉任) 하였다가 한참 만에 동첨지돈녕부사(同僉知敦寧府事)로 천전(遷轉)하였고, 또 대호군(大護軍)으로 천전하여, 내직 사준원(內直司樽院)의 일을 간판(幹辦)하다가 제용감(濟用監)·군자감(軍資監)·전농시(典農寺) 판사(判事)를 역임하였고, 천순(天順) 기묘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되어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천전하였고, 신사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승진되어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천전하였고, 정해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승진되었고, 무자년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제수되었고, 기축년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로 승진되었고, 경인년에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으로 천전하였다가 신묘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下賜)받고 한성군(漢城君)에 봉(封)해졌고, 임진년에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되었고, 경자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임명되었다가 한참 만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3세 였다. 시호(諡號)를 안소(安昭)라고 하였는데, 화평(和平)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아니한 것을 안(安)이라 하였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고 하였다. 이훈은 성질이 총명하고 지혜롭고 행동이 단정하고 방정(方正)하였다. 생장(生長)하여 부귀(富貴)하였으나 화려한 옷을 입는 습성이 없었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서사(書史)를 상당히 섭렵하였고, 문사(文士)와 더불어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하고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사치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아들은 이유청(李惟淸)이었다.

【원전】 10 집 213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성종 187권 17년 1월 18일 (을축) 001 / 이거가 두 집 살림을 차린 김세적을 논핵하니 도의 수령에게 국문하도록 하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박숭질(朴崇質)이 형조(刑曹)의 계본(啓本)을 가지고 아뢰기를,

“한산(韓山)의 죄수인 사비(私婢) 의비(義非)가 죽은 남편 명천(命千)과 공모하여 그 주인 정결(貞潔)을 죽인 죄는, 율이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이거(李琚)가 아뢰기를,

“충청도 수군 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 김세적(金世勣)이 민효원(閔孝源)의 첩의 딸에게 장가들어 면천(沔川)에 두고 또 공주(公州) 양가(良家)의 딸에게 장가들어 첩(妾)을 삼았는데, 두 집에 왕래하는 사이에 반드시 폐단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국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우의정(右議政) 이극배(李克培)가 말하기를,

“과연 이말과 같다면 그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마도 김세적이 이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이거가 말하기를,

“단연코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문할 만하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경동(李瓊仝)이 아뢰기를,

“청컨대 조관을 보내어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추문(推問)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세적은 한미한 데에서 일어나 활쏘고 말타는 것이 당시 무리의 으뜸이 되었다. 임금이 그 재주를 사랑하여 좋은 벼슬을 고루 거치게 해서 중대한 임무를 맡겼지만 반 줄의 글도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이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이 많았으며 자못 교만하고 자부하는 기색이 있었다. 일찍이 승지(承旨)가 되어 해관(該官)과 중국 물건의 값을 양정(量定)하고 나서 종이로 중국 물건을 싸 소매속에 넣고 가니, 사람들이 더럽게 여겨 냉소하였다. 임금은 김세적이 글을 아는가를 시험하고자 하여 아는 시구(詩句)를 써서 올리게 하였더니, 김세적이 녹양심원적무인(綠楊深院寂無人)이라는 시구를 썼는데, 녹(綠)을 녹(祿)으로, 적(赤)을 적(寂)으로 썼다.” 하였다.

【원전】 11 집 9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법-탄핵(彈劾) / *신분-천인(賤人) / *윤리(倫理) /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성종 188권 17년 2월 25일 (신축) 002 / 의정부 좌찬성 이파의 졸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이파(李坡)가 졸(卒)하였다. 조회를 철폐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파의 자(字)는 평중(平仲)이고 자호(自號)를 송국재(松菊齋)라 하였으며, 본관은 한산(韓山)으로서,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달라서 나이 겨우 15세에 여러 사서(史書)를 널리 읽었다. 경태(景泰) 경오년 17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신미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교서관 저작랑(校書館著作郞)에 뛰어올려 제수되었다가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로 전직(轉職)되었다. 누차 천직(遷職)되어 응교(應敎)에 이르렀고,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세자 보덕(世子輔德)·판내자 예빈시사(判內資禮賓寺事)를 두루 거쳤다. 천순(天順) 계미년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직(陞職)되었고, 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로 발탁되어서 임명되었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도승지(都承旨)로 승직되었으나 일로써 임금의 뜻을 거슬려서 첨지중추원사로 천직(遷職)되었다.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옮겼다가 얼마 안되어 가선 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승직되었다. 병술년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였고, 정해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가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옮겼다. 무자년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제수되었고, 기축년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승직되었다.

일찍이 집을 짓는 역사(役事)에 근수(根隨)가 언덕을 파 가면서 터를 넓히다가 2명이 압사(壓死)하였으므로 파직되었다. 갑오년에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제수되었다가 곧 지사(知事)로 승직되었으며, 을미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제수되었다. 정유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직되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사민(徙民)한 자들이 대부분 흩어지고 도망하였으므로 무육(撫育)을 잘못한 것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북경(北京)에 새해를 하례(賀禮)하러 갔다가 돌아오면서 팔참(八站)에 이르렀는데, 눈의 깊이가 수척이나 되었다. 이파는 사로잡힌 군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뜻밖의 일에 놀라서 어찌할 줄 몰랐으나 서장관(書狀官) 박삼길(朴三吉)의 도움으로 사졸(士卒)들이 흩어져 도망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오는 것을 무릅썼기 때문에 얼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자년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임명되었다. 임인년에 임금이 자주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재상들과 성리학(性理學)을 논하였는데, 이파가 분석하여 대답하였으므로, 임금이 현명하게 여겨 특별히 서대(犀帶)를 내려 주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뛰어올려 품계를 더하였다. 을사년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있다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직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이 파는 젊어서부터 술을 즐겨서 이로 인하여 병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갑자기 졸(卒)하였으며, 나이는 53세이다. 시호는 명헌(明憲)인데, 생각하는 바가 과단성있고 멀리 내어다보는 것이 명(明)이고, 견문이 넓고 다재 다능한 것이 헌(憲)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파는 사람됨이 활달하고 시원스러우며, 용모가 아름답고 담론(談論)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풍류(風流)와 문아(文雅)가 한 시대에서 추앙(推仰)받았다. 의리(義理)의 학문에 널리 통하였고, 문장의 화려함이 그 장점은 아니었으나 자못 문장과 경제(經濟)로써 자부하였다. 총명함이 남달리 뛰어나, 무릇 나라 사람들 가운데 벼슬한 자의 이력(履歷)과 씨족(氏族)·세대(世代)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며, 조정(朝廷)의 전고(典故)를 상세히 아는 바가 많았다. 다만 일을 의논할 때 영합(迎合)하려고 많이 힘썼으며, 성품이 또한 호사스럽고 허황되어 재리(財利)를 널리 경영하였다.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대간(臺諫)과 함께 시종(侍從)하였는데, 장차 진강(進講)하려고 전문(殿門)에 모여 앉아 바야흐로 경전(經傳)의 뜻을 강론(講論)하려 하였다. 그 때 이파가 홀연히 말하기를, ‘금년은 쌀값이 매우 싸니 면포(綿布)를 많이 살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온 좌중이 잠잠하였고 이파도 얼굴과 목이 붉어졌으니, 마음속으로 산업(産業)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이 나오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원전】 11 집 101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인사-관리(管理)

성종 224권 20년 1월 2일 (신유) 001 / 김방이 독대하여 한산 사람 이서 등이 모반을 공모하였다고 보고하다


김연근(金連根)이란 자가 있어 승정원(承政院)에 나아가 고하기를,

“파적위(破敵衛) 김방(金方)이 내게 이르기를,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나 상달할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감히 고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김방에게 묻기를,

“네가 고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

하니, 김방이 말하기를,

“상감 앞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한언(韓堰)과 이계남(李季男)에게 명하여 좌우 사람을 물리치고 자세히 묻게 하니, 김방이 말하기를,

“한산(韓山) 사람 이서(李湑)·이항(李沆)·이엄(李渰)·이순(李淳)과 군수(郡守) 한철동(韓鐵同), 조산 만호(造山萬戶) 양취(梁鷲) 등이 재상(宰相) 이봉(李封)·신준(申浚)·노공필(盧公弼)·신부(申溥)와 조사(朝士) 이균(李均)·이탄(李坦) 등과 더불어 불궤(不軌)를 공모하였습니다. 이항(李沆)의 말을 듣건대, ‘내가 문소전 직(文昭殿直)이 되어 일찍이 보건대, 임금이 문소전에 친히 제사한 뒤에 연은전(延恩殿)으로 행차하는데, 그 사이 어로(御路)가 좁고 위사(衛士)가 없으므로 큰 일을 거행할 수 있다.’고 하였고, 또 신준 등도 그런 말을 하였음을 들었으며, 부서(部署)가 이미 정하여져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선전관(宣傳官)·겸사복(兼司僕)·의금부 낭관(義禁府郞官)을 나누어 보내어 일에 관련된 사람을 가서 잡게 하였다. 명하여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좌의정 홍응(洪應)·거창군(居昌君) 신승선(愼承善)·대사헌(大司憲) 이칙(李則)·대사간(大司諫) 안호(安瑚)·우승지(右承旨) 이계남(李季男)을 불러 당직청(當直廳)에 모여 앉아서 잡문(雜問)하게 하였다.

【원전】 11 집 429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성종 224권 20년 1월 3일 (임술) 002 / 한산 군수 한철동 등을 체포하고 모반 문서를 수색하라는 명을 내리다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한사개(韓士介)와 도사(都事) 윤여림(尹汝霖)을 보내어 한산 군수(韓山郡守) 한철동(韓鐵同)과 이서(李湑) 등을 체포하게 하고, 의금부 경력 김훈(金薰)을 보내어 이서 등 네 사람의 집을 봉적(封籍)하고 모란 문서(謀亂文書)를 수색하게 하였다.

【원전】 11 집 429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성종 224권 20년 1월 7일 (병인) 003 / 병조 참지 조극치에게 한산에서 돌아오지 않은 선전관 등을 잡아오도록 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선전관(宣傳官) 등이 한산(韓山)에 가서 모두 오지 아니하니, 피인(彼人)들이 거짓 모르는 체하고 혹시 쏘아 죽인 것이나 아닌가? 내가 무신(武臣)으로서 사체(事體)를 아는 자를 보내어 잡게 하려고 하는데 어떠하겠는가?”

하니, 승지들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조극치(曹克治)에게 명하여, 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 열 사람을 거느리고 가서 잡게 하였다.

【원전】 11 집 430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변란-정변(政變)

 

성종 224권 20년 1월 7일 (병인) 004 / 경력 김훈 등이 돌아와 이항 등의 집을 수색한 결과를 보고하다


경력(經歷) 김훈(金薰)과 선전관 허감(許瑊)이 한산(韓山)에서 돌아왔다. 김훈이 아뢰기를,

“신이 이항(李沆) 등 4형제의 집을 수색하니, 다른 문서는 없고 단지 소식(消息) 1통, 노비 문기(奴婢文記) 1봉(封), 노비 화명기(奴婢花名記) 1통, 가사(家事)·전지(田地)·가재(家財)를 허락해 준 기록 3통, 소식 잡문서 4통 뿐입니다.”

하였다.

【원전】 11 집 430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행형(行刑) / *가족-가산(家産) / *변란-정변(政變)

 

성종 224권 20년 1월 8일 (정묘) 002 / 한산에서 잡아온 이항 등을 국문하게 하다


선전관(宣傳官) 이윤순(李允純)이 한산(韓山)에서 이항(李沆)·이엄(李渰)·이서(李湑)·정지예(鄭之裔)·한철동(韓鐵同)을 잡아 오니, 의금부에 내리기를 명하고, 인해 정승(政丞)들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원전】 11 집 430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성종 224권 20년 1월 16일 (을해) 002 / 호조 참판 노공필의 자신을 변명하는 상소문


호조 참판(戶曹參判) 노공필(盧公弼)이 상소하기를,

“뜻밖에도 신이 남에게 고변함을 입어 화(禍)가 장차 예측할 수 없었는데, 삼가 천감(天鑑)의 밝게 비추어 보심을 힘입어, 특별히 신을 불러서 고변(告變)한 말을 보이시고 인하여 의심하지 아니하시는 뜻을 유시(諭示)하시니, 성은(聖恩)이 망극하여 비록 사랑하는 아비가 아들을 돌본다고 하더라도 어찌 여기에 더하겠습니까? 신은 곧 황송하고 놀라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성상께서는 신을 의심하지 아니하시고 신의 마음은 여기에 혐의가 없을지라도 신이 이미 고변한 가운데 있으니, 마땅히 옥(獄)에 들어가서 분변해 밝혀지기를 기다려야 마음에 편할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신의 집안이 여러 조정에서 열성(列聖)의 은혜를 입었고 신의 아비에 이러러서는 세조(世祖)의 지우(知遇)를 입어 의(義)는 비록 군신(君臣)이나 은혜는 부자(父子)보다 더하여 높은 사랑과 두터운 신임이 한 세대를 독차지하였으니, 전하께서 신의 아비에게 대우하심은 더해지기만 하고 쇠함이 없으셨습니다. 또 신에게까지도 전하께서 무상(無狀)하다고 여기지 아니하시고 특별히 그릇에 맞추어 임명을 가하시어 뽑아 써서 여기에 이르렀으니, 감싸 키워 주신 은혜는 천지와 같아 끝이 없습니다. 신의 일문(一門)은 대대로나라의 은혜를 입음이 지극히 깊고 지극히 중하여 짝할 이가 없습니다. 신의 부자가 항상 이르기를, ‘몸 가루가 되도록 보답하기를 도모할지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감히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신이 신준(申浚) 형제에게는 한때 조정에 같이 있었고 이봉(李封)은 신의 아내의 오촌숙(五寸叔)이므로 비록 서로 아는 것은 본래 있었으나 모두 신이 깊이 사귄 것은 아닙니다. 이서(李湑)·이항(李沆)·이엄(李渰)에 이르러서는 신이 모두 일찍이 얼굴도 알지 못하며, 그 나머지 한산(韓山)의 수십 사람도 모두 신과는 알지 못하는 사이입니다. 그 가운데 양취(梁鷲) 등 두어 사람은 전에 시골 사람으로서 와서 보아 단지 그 얼굴만 기억할 뿐입니다. 신이 만약 이들과 더불어 서로 알고 사사로이 친함이 있었으면 한 고을의 귀와 눈을 어찌 다 속일 수 있겠습니까? 또 한철동(韓鐵同)과 김숙연(金叔演)은 역시 조관(朝官)으로서 그 이름과 얼굴을 아는데, 한철동은 그가 한산에 부임할 때에 신이 그 집에 가서 전송하였을 뿐이며 모두 평시에 왕래하며 좋아하는 사이는 아닙니다. 이균(李均)과 이탄(李坦)은 비록 신의 아내와 오촌(五寸)이 되지만 역시 본래 친절함은 없고 다만 신이 이조 참판이 되었을 때에 이균 형제가 그 매부 박영번(朴英蕃)의 벼슬 구하는 일로써 한두 번 신의 집에 왔을 뿐이며 신은 이탄과 이균의 집을 알지 못합니다. 신이 한철동 등 각 사람과 사귀어 친한지의 여부는 조정에 있는 사귀어 노는 이가 아는 바인데, 감히 속이겠습니까? 신이 저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데 저들이 어찌 신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마음을 서로 알지 못하면 길에서 만난 사람과 다름이 없는데, 그렇다면 감히 길가는 사람과 더불어 일을 꾀하겠습니까? 작은 일도 길가는 사람과 더불어 꾀할 수 없는데 하물며 큰 일이겠습니까?

신이 그윽이 역대(歷代)의 모역(謀逆)한 자를 보건대, 모두 쇠란(衰亂)한 세상과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즈음을 당하여 혹은나라를 담당한 권간(權奸)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벼슬을 잃고 불평을 품은 무리에게서 나오기도 하며 혹은 무부(武夫)의 불순한 마음에서 나오기도 하는데, 지금은 성명(聖明)한 임금이 위에 계시어 조야(朝野)가 편안한데 누가 이런 마음을 내겠으며 누가 이런 꾀를 꾸미겠습니까? 하물며 신과 같은 자는 아비는 삼공(三公)의 열(列)에 있고 아들은 육경(六卿)의 다음에 있으니, 사랑과 영화가 지극한데 감히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제 고한 것은 모두 한산 사람인데, 신은 한갓 경재소 당상(京在所堂上)인 까닭으로써 관련된 바가 되었으니, 통곡할 만한 일입니다. 신과 함께 고변을 입은 사람은 본래 신과 사귀어 친한 자가 아니므로 그 정상(情狀)을 쉽게 밝힐 수 있으나 성상께서 미처 자세히 알지 못하실까 하여 감히 이렇게 모람되게 진술합니다. 신이 재상의 뒤에 있으면서 갑자기 간궤(奸詭)한 비방(誹謗)을 입으니, 집에 있어 대죄(待罪)하면서 밤낮으로 허둥지둥 불안해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을 옥에 내려 스스로 변명하게 하여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니, 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노공필의 상소는 통분(痛憤)함에서 나온 것으로서, 옥(獄)에 나아가 변명하기를 기다리고자 하니, 법에 당연합니다.”

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예로부터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모두 어린 임금이나라를 다스릴 때와 위태롭고 어지러운 세상에 나오는 것인데, 사책(史策)을 상고하면 밝게 볼 수 있으니, 이는 전하께서 통촉하시는 바입니다. 신은 망령되게 생각하건대, 어찌 한산(韓山) 한 고을 토호(土豪)가 능히 난을 일으킬 자가 있겠습니까? 성명(聖明)한 임금 밑에서 이와 같은 악한 풍속이 있지 아니할 듯합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는 반드시 향중(鄕中)의 무식한 자가 법을 어지럽게 할 뿐입니다. 끝까지 물어 다스리면 옳고 그름이 스스로 밝혀질 것이며 옳고 그름이 밝혀지면 노공필의 유죄와 무죄도 마침내 스스로 밝혀질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노사신(盧思愼)의 가문에 어찌 이같은 일이 있겠는가? 나는 의심스러운 바가 없으니, 결단코 그렇지 아니함을 알겠다. 내가 마땅히 짐작하겠다.”

하였다.

【원전】 11 집 433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정론-정론(政論)

 

성종 224권 20년 1월 19일 (무인) 002 / 숭문당에 나가 김방과 이서 등을 직접 심문하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종친(宗親) 1품 이상과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 육조 판서(六曹判書) 이상, 의빈부 당상(儀賓府堂上)과 대간(臺諫)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김방(金方)과 이서(李湑) 등에게 물으니, 김방이 아뢰기를,

“정미년 11월에 신이 이 일을 비밀히 들었고, 무신년 4월에 이서(李湑)가 관비(官婢) 중가(仲加)를 데리고 우리 집에 머물러 잤는데 보병기(步兵記)를 내어 보이며 저에게 서명(署名)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서의 꾀하는 일을 네가 이미 들었는데, 그 꾀하는 바가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하니, 김방이 아뢰기를,

“저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하므로 그것이 무슨 꾀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문소전(文昭殿)에서 연은전(延恩殿) 가는 길에 일을 거행할 만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서에게 물으니, 이서가 말하기를,

“무신년(戊申年) 4월에 관비(官婢) 중가(仲加)를 데리고 김방(金方)의 집에서 머물러 잤을 뿐이고 김방과 더불어 말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김방의 집에서 자면서도 김방과 더불어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신이 김방과 더불어 말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다만 국가에 관계되는 일은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자, 그 말이 근사하다고 하여 형(刑)을 한 차례 가하도록 명하였다. 이항(李沆)과 이엄(李渰)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신은 아무 일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한철동(韓鐵同)에게 물으니, 한철동이 아뢰기를,

“이서 등 4형제는 토호(土豪)로서 요역(徭役)에 이바지하지 아니하기에 신이 독촉해 꾸짖기를 평면(平民)의 예(例)로 하였기 때문에 이서 등이 원수처럼 보니, 작은 일도 같이 꾀할 수 없는데 더구나 큰 일이겠습니까?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또 신준(申浚)은 전일에 신이 대강 알았고, 이봉(李封)·신부(申溥)·노공필(盧公弼)·이균(李均)은 이름만 들었을 뿐 사귀어 친한 일은 전연 없는데, 어찌 감히 큰 일을 같이 꾀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탄(李坦)에게 물으니, 이탄이 말하기를,

“근년 이래 한 번도 한산(韓山)에 내왕하지 아니하였고, 이서(李湑)·이항(李沆)과 더불어 서신을 통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신부·신준·이봉·노공필은 본래 사귀어 친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큰 일을 같이 꾀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순(李淳)에게 물으니, 이순이 아뢰기를,

“신은 형 이서와 본래 같이 꾀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일에 관련된 사람 정일남(鄭一南) 등 20명에게 두루 물으니, 모두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도로 하옥(下獄)시키도록 명하였다. 입시(入侍)한 사람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김방이 처음에는 고한 일을 정미년 11월에 들었다고 하였었는데, 이제 말하기를, ‘신(臣)이 편히 잠자지 못하고 통분(痛憤)하여 고했다.’고 하니, 그 마음이 이처럼 급하면 어찌하여 3년을 지나서 고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그 말하는 바가 여러 번 그 말의 단서를 바꾸고 한결같이 지킴이 없습니다. 이항(李沆)은 갑술년에 문소전 직(文昭殿直)이 되었으니 연은전(延恩殿)이 건립되기 전인데, 두 전(殿) 사이가 길이 좁아서 일을 거행할 수 있다는 말은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도 이와 같다.”

하였다.

【원전】 11 집 436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성종 225권 20년 2월 17일 (을사) 002 / 영안도 관찰사 이봉이 하직을 청하다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봉(李封)이 상서(上書)로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풍문(風聞)으로 듣자니, 〈신의〉 본향(本鄕)인 한산(韓山)의 간사한 백성 김방(金方)이라고 일컫는 자가 있어 어지러운 말을 얽어서 상변(上變)하여 유향 품관(留鄕品官)과 한 두 경재소 당상(京在所堂上)을 고발하였다고 하며, 혹은 신도 참여하였다고 전하기도 하고 혹은 신은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근거없는 말이므로 따를 바가 없으니 진퇴(進退)가 낭패(狼狽)하여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요사이 또 듣건대, 한산의 유향 품관 등이 모두 잡혀 오고 경재소 당상관과 낭관(郞官)이 모두 참여하였다고 하니, 일의 형편으로 보건대, 신도 한 고을의 당상관(堂上官)인데 홀로 면하기가 어려우므로, 옥(獄)에 나아가서 스스로 변명하기를 청합니다. 비록 신이 참여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신이 두 눈이 아파서 여러 방법으로 치료하였으나 아직 효력을 보지 못하고, 또 풍증(風症)과 해소(咳嗽)와 여러 병이 한데 어우러져 일어나며, 더욱이 이 도(道)는 인심이 조용하지 못함은 신면(申㴐)의 일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이 만약 스스로 주저하고 스스로 의혹하여 혐의를 끌어 숨고 피하면, 인심이 의심하고 더욱 흉흉(洶洶)하여 블측한 변이 일어날까 만단으로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겉으로는 태연하게 사람들에게 보였으나, 또한 형세가 지극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이 지극히 편치 못하니, 청컨대 신의 직(職)을 바꾸어서 여생(餘生)을 온전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글을 내려 회유(回諭)하기를,

“경(卿)의 아뢴 바를 모두 자세히 살펴보았다. 요즘 조산 만호(造山萬戶) 양 취(梁鷲)가 나포되어 왔는데, 만약 감사(監司)를 또 바꾸면 반드시 민심이 흉흉할 것이니, 일이 매우 옳지 못하다. 또 본래 털끝만한 의심스러움이 없으므로 경의 청하는 바는 마땅히 윤허하지 아니할 것이니, 경은 그것을 알라. 김방이 변(變)을 고한 일을 누가 듣고 경에게 전하였는가? 혹은 경이 참여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전한 자는 누구인가? 혹은 경이 참여하였다는 것을 전한 자는 또 누구인가? 경이 상세하게 기록하여 계달하라.”

하였다.

【원전】 11 집 445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성종 225권 20년 2월 22일 (경술) 005 / 어모 장군 이성 등을 처벌하도록 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어모 장군(禦侮將軍) 이서(李湑)가 토호(土豪)로서 요역(徭役)에 이바지하지 아니한 죄는 율(聿)이 장(杖) 80대와 고신(告身) 3등을 추탈(追奪)하는 데 해당하고 한산 군수(韓山郡守) 한철동(韓鐵仝)은 차일죽(遮日竹)과 연실(蓮實)을 신준(申浚)에게 주었는데 친문(親問) 때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한 죄는 율이 장 1백 대와 도(徒) 3년에 고신을 모두 추탈하는 데 해당합니다.”

하니,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심회(沈澮)·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계본(啓本)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계본에 의하여 시행하되, 다만 이서(李湑)는 시골 무관(武官)으로 불법(不法)을 많이 행하였으므로, 간사한 무리가 이를 인연하여 드디어 부도(不道)한 말을 발하였으니, 이를 빠뜨려 두고 다스리지 아니하면 뒤에는 장차 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길거리[街路]에서 곤장을 쳐서 뒷사람을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고, 홍응(洪應)과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계본에 의하여 시행하되, 다만 한철동은 당대(當代)의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므로 결장(決杖)하는 것은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한철동은 장(杖)만 속(贖)바치게 하고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도록 해라.”

하였다.

【원전】 11 집 44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성종 244권 21년 9월 28일 (정축) 002 / 서해의 지형과 방비 대책을 적은 도순찰사 성건의 서계


도순찰사(都巡察使) 성건(成健)이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하기를,

“남포(南浦) 땅의 마량(馬梁)에 정박(碇泊)한 병선(兵船)은 조수(潮水)가 차면 뜨고, 조수(潮水)가 물러 가면 뭍에 있어 위급(危急)한 때에 쓰기는 어려우나, 적선(賊船)도 또한 반드시 조수를 타고서 오게 되니, 이 때에 우리도 또한 응변(應變)할 만합니다. 또 그 지역은 산(山)이 둘러 있고 물이 넓어서 배를 감추어 둘 만합니다. 도둔곶[都芚串]은 비록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이라 하더라도 배를 정박하는 곳이 얕게 드러나 조수가 물러 가면 배는 마땅히 뭍에 있게 되니, 마량(馬梁)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오나 마량(馬梁)은 본시 긴요한 곳이니, 진실로 이를 버리고 다른데로 옮길 수 없으므로, 그전대로 둠이 편하겠습니다. 도둔곶[都芚串]도 또한 방비(防備)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으로 이전에 조전소(助戰所)라고 일컫고, 마량 군관(馬梁軍官) 1인이 병선(兵船) 1척(隻)과 수군(水軍) 30명을 거느리고 나누어 방비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병선(兵船) 1척(隻)만으로 요해지(要害地)를 수비(守備)하기란 심히 고단(孤單)하니, 모름지기 마량진(馬梁鎭)의 소맹선(小猛船) 2척(隻)과 수군(水軍) 60명을 더 보내어 방어(防禦)하도록 하소서.

옥구(沃溝)·군산포(群山浦)와 서천(舒川)은 단지 1포(浦)만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의 바닷길은 겨우 수리(數里) 남짓합니다. 서천포(舒川浦)는 해구(海口)에 당(當)하고, 군산포(群山浦)는 약간 내지(內地)에 있어 형세로 보면, 서천포(舒川浦)가 첫길[初路]에 있으므로 군산포(群山浦)는 혁파할 만합니다. 그러나 부안(扶安) 검모포(黔毛浦)로부터 다음이 군산(群山), 다음이 서천(舒川)이니, 3진(鎭)이 열치(列置)하여 검모포(黔毛浦)로부터 군산포(群山浦)까지는 수로(水路)가 몇 백여리나 됩니다. 만약 군산포(群山浦)가 없어서 그 사이에 적(賊)이 일어나면 서천포(舒川浦)는 구원(救援)하는 데 미치기에 어려울 것 같으며, 비록 옥구(沃溝)의 진영(鎭營)이 있더라도 배가 없으면 또한 응변(應變)하기가 어렵습니다. 군산포(群山浦)는 옥구(沃溝)·임피(臨陂)의 요충에 당(當)하며, 서천진(舒川鎭)은 서천(舒川)·한산(韓山)의 요충에 당(當)하니, 관계된 것이 가볍지 않습니다. 오직 군산포(群山浦)는 서천(舒川)·검모(黔毛) 양포(兩浦)의 중앙(中央)이 아니어서 적로(賊路)의 요해(要害)한 땅이 아닌 것 같으나, 진(鎭)을 옮겨서 당해낼 만한 곳이 없으니, 이제 경이하게 혁파할 수는 없습니다. 용안(龍安) 덕성창(德城倉)은 포구와 가까워 쌀을 운반하여 배에 싣기가 편이(便易)한데다 또 조선(漕船)이 정박하는 곳은 산(山)이 둘러 있고 물결이 잔잔[水停]하므로, 표탕(漂蕩)하고 패몰(敗沒)하는 근심이 없으니, 지극히 적당하기는 하나 다만 해구(海口)와의 거리가 요원(遙遠)하고 그 사이에 많은 섬과 풀[嶼草]이 있어, 행선(行船)하기가 어려워 이 때문에 배가 떠난 뒤에 7, 8일 혹은 10여 일 혹은 15여 일 만에야 바로 노인성(老人城) 앞 포구(浦口)에 이르고, 이어서 오식도(筽食島)에 이르러 바람을 기다려 경강(京江)에 도달합니다.

옥구(沃溝) 노인성창(老人城倉)은 제읍(諸邑)의 전세(田稅)를 수납하는 대로 즉시 배에 실으면, 출해(出海)하여 곧바로 오식도(筽食島)에 이르렀다가 바람을 기다려 상경(上京)하니 지극히 편리합니다. 그러나 쌀을 운반하여 포구(浦口)를 나오는데는 득성창(得城倉)에 비(比)하여 약간 멀고, 조선(漕船)의 출입(出入)이 불편하여 부득이 쌀을 메고 포구를 나오므로 조수(潮水)가 가들 찰 때는 점점 물이 스며들어 수렁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이 두 곳은 서로 이해(利害)가 있어 경이(輕易)하게 정탈(定奪)할 수 없으니, 아직은 노인성(老人城) 부근(附近)의 제읍(諸邑)의 금년 전세(田稅) 1만여 석(碩)을 여기에서 수입(收入)하여, 조전(漕轉)의 편부(便否)를 시험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충주(忠州) 달천(達川)은 지금 수심(水深)이 3척(尺)이고 너비가 1백 50척(尺)이니, 만약 제방(堤防)을 쌓아 물을 끌어 들인다면, 뚝의 높이는 모름지기 10척(尺) 8촌(寸)이어야 하고, 뚝의 길이는 모름지기 4백 척(尺)이 된 뒤에야 흐르는 물을 끌어 댈 만합니다. 하지만 도랑을 칠 곳은 암석(巖石)이 험조(險阻)하여, 물이 통하도록 뚫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가령 제방을 쌓고 도랑을 친다 하더라도 달천(達川)은 발원(發源)이 깊고 길며 수세(水勢)가 사납고 급하니, 만약 우수(雨水)가 창일(漲溢)하게 되면 방죽과 도랑이 다 허물어져서 남음이 없을 터이니, 장구(長久)한 이익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물며 그 관개(灌漑)한 곳은 공한(空閑)한 묵정의 땅이 아니고, 이것이 다 기름진 땅[膏腴田]이겠습니까? 갑자기 대우(大雨)라도 있어 범람하여 복사(覆沙)하게 되면 도리어 그 해(害)를 받을 것입니다. 신의 소견(所見)으로는 천방(川防)은 편하지 않을 것 같으며, 아울러 도형(圖形)을 올립니다.”

하니,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보이었다. 심회(沈澮) 등이 의논하기를,

“성건(成健)이 아뢴 대로 시행(施行)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11 집 645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재정-전세(田稅) / *재정-창고(倉庫) / *교통-수운(水運) / *농업-수리(水利)

 

성종 255권 22년 7월 4일 (무인) 002 / 개성부 유수 유순·경기 관찰사 김제신 등에게 하서하여 북정 일정을 통지하다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유순(柳洵)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김제신(金悌臣)과 강원도 관찰사 김여석(金礪石)과 충청도 관찰사 홍흥(洪興)과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 조숙기(曹淑沂)와 전라도 관찰사 김극검(金克儉)과 병마 절도사 신주(辛鑄)와 경상도 관찰사 정숭조(鄭崇祖)와 좌도 병마 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 하숙부(河叔溥)와 우도 병마 절도사(右道兵馬節度使) 조극치(曹克治)와 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 변종인(卞宗仁)과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 성준(成俊)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무기(武器)를 창고에 넣어 두고 학문을 닦아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것은 비록 제왕(帝王)의 성덕(盛德)이기는 하나, 포악(暴惡)을 금지시키고 난당(亂黨)을 제거하는 것은 곧 성인(聖人)의 의병(義兵)이니 지난 시대의 계책을 상고한다면 간책(簡策)에서 증거할 수가 있다. 만형(蠻荊)이 원수가 되니 주(周)나라 선왕(宣王)에게 채기(采芑)의 군대가 있었고 힐리(頡利)가 업신여기니 당(唐)나라 태종(太宗)에게 막북(漠北)의 토벌(討伐)이 있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도 또한 무공(武功)을 힘쓰셨으니, 기해년에는 동방(東方) 정벌(征伐)이 있었고, 계축년에는 서방(西方) 정벌(征伐)이 있었으며, 경진년에도 정벌(征伐)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무력(武力)을 남용(濫用)한 것이었겠는가? 모두가 백성에게 해독이 되고 사직(社稷)에 근심이 되므로 마지못해서 한 것이다.

내가 기업(基業)을 계승함으로부터 문교(文敎)를 크게 밝혔으니, 어찌 군사를 일으키고 군대를 동원(動員)하여 오로지 무위(武威)만을 과시(誇示)하려고 하겠는가? 교린(交隣)하고 사대(事大)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오랑캐가 우리 국경(國境)에 인접(隣接)해 있는 것에 있어서도 피차(彼此)의 차별이 없이 은혜와 신의(信義)로써 무마(撫摩)했는데도 도리어 이 북쪽 오랑캐는 악한 일을 쌓아서 은혜를 저버리고서 지난해에 우리의 무이보(撫夷堡)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좀도둑은 대적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내버려 두고 문죄(問罪)하지 않았는데, 금년에 또 조산보(造山堡)를 침범하여 우리의 진장(鎭將)을 살해하고, 우리의 백성을 죽이고 우리의 가축(家畜)을 빼앗아갔다. 그러므로 변성(邊城)의 사람들이 밤낮으로 이를 갈면서 모두가 한 번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위광(威光)을 잠시 보이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생각하건대, 이같이 하는데도 토벌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당당(堂堂)한 군대의 위세(威勢)로써 어찌 보잘것 없는 오랑캐에게 굴욕(屈辱)받는 것을 견딜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죄를 묻는 군대를 일으켜 법을 범한 자에게 대한 형벌을 빨리 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허종(許琮)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성준(成俊)과 이계동(李季仝)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금년 10월에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바로 그 굴혈(窟穴)을 공격하여 무찔러 없애버리고야 말겠다.

지금 병부(兵符)를 보내니, 합해 조사하여 경기(京畿)의 남양(南陽)·수원(水原)·양성(陽城)·진위(振威)·용인(龍仁)·안산(安山)·음죽(陰竹)·여주(驪州)·이천(利川)·지평(砥平)·양근(楊根)·가평(加平)·영평(永平)·포천(抱川)·양주(楊州)·광주(廣州)·과천(果川)·금천(衿川)·죽산(竹山)·양지(陽智)·마전(麻田)·연천(漣川)·인천(仁川) 등의 고을의 군사는 9월 초 2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4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개성부(開城府)의 군사는 9월 초 3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4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충청도(忠淸道)의 서천(舒川)·임천(林川)·한산(韓山)·홍산(鴻山)·은진(恩津)·이산(尼山)·연산(連山)·부여(扶餘)·석성(石城)·진잠(鎭岑)·정산(定山)·남포(藍浦)·태안(泰安)·서산(瑞山)·면천(沔川)·당진(唐津)·아산(牙山)·평택(平澤)·직산(稷山)·천안(天安)·신창(新昌)·전의(全義)·목천(木川)·보령(保寧)·결성(結成)·홍주(洪州)·대흥(大興)·덕산(德山)·예산(禮山)·해미(海美)·온양(溫陽)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23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3일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공주(公州)·회덕(懷德)·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연기(燕岐)·청주(淸州)·문의(文義)·연풍(延豐)·괴산(槐山)·청안(淸安)·보은(報恩)·회인(懷仁)·진천(鎭川)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20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2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단양(丹陽)·제천(堤川)·영춘(永春)·청풍(淸風)·충주(忠州)·음성(陰城)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22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3일에 길성에 도착하도록 하고, 강원도(江原道)의 원주(原州)·영월(寧越)·평창(平昌)·정선(旌善)·횡성(橫城)·춘천(春川)·인제(麟蹄)·낭천(狼川)·홍천(洪川)·김화(金化)·이천(伊川)·양구(楊口)·회양(淮陽)·금성(金城)·안협(安峽)·철원(鐵原)·평강(平康) 등의 고을의 군사는 9월 초 8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5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평해(平海)·울진(蔚珍)·삼척(三陟)·강릉(江陵)·양양(襄陽)·간성(枰城)·고성(高城)·통천(通川)·흡곡(歙谷) 등의 고을의 군사는 9월 초 4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1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전라도(全羅道)의 영암(靈巖)·무안(務安)·함평(咸平)·진원(珍原)·장성(長城)·동복(同福)·화순(和順)·능성(綾城)·남평(南平)·광산(光山)·담양(潭陽)·순창(淳昌)·창평(昌平)·옥과(玉果)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12일에 길을 떠나서 9월 18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무주(茂朱)·운봉(雲峯)·장수(長水)·진안(鎭安)·용담(龍潭)·금산(錦山)·진산(珍山)·고산(高山)·남원(南原)·임실(任實)·구례(求禮)·곡성(谷城)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초 9일에 길을 떠나서 9월 18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무장(茂長)·흥덕(興德)·고부(古阜)·전주(全州)·여산(礪山)·영광(靈光)·고창(高敞)·정읍(井邑)·부안(扶安)·김제(金堤)·만경(萬頃)·옥구(沃溝)·임피(臨陂)·함열(咸悅)·용안(龍安)·익산(益山)·태인(泰仁)·금구(金溝)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14일에 길을 떠나서 9월 19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경상도(慶尙道)의 함양(咸陽)·산음(山陰)·단성(丹城)·안음(安陰)·진주(晉州)·거창(居昌)·합천(陜川)·삼가(三嘉)·초계(草溪)·의령(宜寧)·지례(知禮)·함안(咸安)·함창(咸昌)·상주(尙州)·문경(聞慶)·창원(昌原)·칠원(漆原)·영산(靈山)·창녕(昌寧)·현풍(玄風)·고령(高靈)·성주(星州)·개령(開寧)·금산(金山)·김해(金海)·선산(善山)·용궁(龍宮) 등 고을의 군사는 8월 15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0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경주(慶州)·흥해(興海)·언양(彦陽)·청하(淸河)·영해(寧海)·영천(永川)·영덕(盈德)·신녕(新寧)·하양(河陽)·밀양(密陽)·청도(淸道)·경산(慶山)·인동(仁同)·대구(大丘)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17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1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안동(安東)·진보(眞寶)·청송(靑松)·풍기(豊基)·영천(榮川)·봉화(奉化)·예안(禮安)·의성(義城)·예천(醴泉)·의흥(義興)·군위(軍威)·비안(比安) 등 고을의 군사는 8월 16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1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영안도(永安道) 군사의 길을 떠날 일시(日時)는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절도(節度)를 듣도록 하라.

아아! 군사가 이미 나가는데 명분(名分)이 있고 군대가 마땅히 정직하매 웅장(雄壯)하게 된다. 죄인(罪人)을 잡아 신문하고 오랑캐를 잡는 것이 목적이니, 내 한사람이 어찌 이오로(伊吾盧)에 분심(憤心)을 풀려고 하겠는가? 말을 쉬게 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변방 백성을 북방 들에서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원전】 12 집 63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성종 281권 24년 8월 3일 (을축) 005 / 의정부 사인을 욕보인 윤탕로의 노비를 추국하게 하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이수언(李粹彦)·민사건(閔師騫)과 검상(檢詳) 이승건(李承健)이 와서 아뢰기를,

“오늘 좌찬성(左贊成) 이철견(李鐵堅)이 한산(韓山)·임천(林川) 등지의 성기(城基)를 간심(看審)하는 일로써 길을 떠나는데 신 등이 조장(祖帳)을 수구문(水口門) 바깥 성밑에 마련하고 전별(餞別)한 뒤에 후(侯)를 베풀고 활을 쏘다가 화살이 밭에 떨어져서 장차 주으려고 하자 그 밭주인이 낫[鎌]을 가지고 와서 후(侯)를 벌려 맨 끈을 끊었는데, 신 등이 조례(皂隷)로 하여금 잡아 오게 하자 그 사람이 도리어 조례를 구타하고 신 등을 꾸짖기를, ‘나는 본방(本房)의 종[奴]인데 어떤 물건의 관원이 감히 이와 같이 하느냐?’ 하였습니다. 신 등이 자세히 물어 보니 바로 윤탕로(尹湯老)의 종입니다. 조금 만에 성첩(城堞) 위에서 노비(奴婢) 10여 인(人)이 있어 신 등을 내려다보면서 꾸짖고 인하여 여러 사람이 후소(侯所)에 와서 손으로 후(侯)를 찢고 갔습니다. 신 등은 비록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은 아니더라도 의정부의 낭청(郞廳)인데 이같은 욕을 당하였으니, 피혐(避嫌)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피혐하지 말라. 윤탕로가 만약 알았으면 어찌 그 종으로 하여금 사인(舍人)들을 욕보이게 하였겠는가? 이는 반드시 노예들이 그 주인이 중궁(中宮)의 동생(同生)이라 하여 세력을 믿고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들을 형조(刑曹)에 내려 수금(囚禁)하여 끝까지 국문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12 집 377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신분-천인(賤人) / *인사-임면(任免)

 

성종 284권 24년 11월 13일 (갑진) 002 / 지중추부사 이봉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봉(李封)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와 제사(祭祀)를 예(例)대로 하였다. 이봉의 자(字)는 번중(藩仲), 호(號)는 소은(蘇隱)이니, 한산인(韓山人)이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고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의 증손(曾孫)이다. 천순(天順) 기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문음(門蔭)으로 보의 장군(保義將軍)에 제수되었고, 성화(成化) 을유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제수되었다. 병술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고 정해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가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더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가 다시 천전(遷轉)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갑오년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제수받았고 을미년에 옮겨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리고 무술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제수받았고, 신축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수받았다가 옮겨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임인년에 특별히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제수받았으며, 갑진년에 특별히 가정 대부(嘉靖大夫)를 더하여 체직되었다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었다. 병오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더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가 홍치(弘治) 무신년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기유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는데 사건에 연좌되어 부안(扶安)으로 유배당하였다가 얼마 안되어 풀려나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천전(遷轉)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계축년에 천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니, 나이가 53세였다. 시호(諡號)는 헌평(憲平)인데, 견문(見聞)이 넓고 능(能)한 것이 많은 것를 ‘헌(憲)’이라 하고, 강직(剛直)함을 펴고 기강(紀綱)을 다스림을 ‘평(平)’이라고 한다. 이봉은 성품이 고집스러워 의위(依違)하지 않았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리(地理)와 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또한 섭렵하였다.

【원전】 12 집 439 면

【분류】 *인물(人物)

 

성종 289권 25년 4월 23일 (신사) 002 / 허침 등과 함께 윤호의 문제와 흥복사의 불사 처벌 문제 등에 대해서 논쟁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허침(許琛)이 아뢰기를,

“정부(政府)는 비록 일을 맡아 보는 곳이 아니라고 하나, 삼공(三公)의 자리에 적당한 사람을 얻으면 사람들이 의지하여 무겁게 여기는 것이며, 또 나라에서 큰 일이 있으면 정부에서 이를 감당합니다. 청컨대 조정에서 선택해서 어진 자에게 제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공(三公)의 자리는 과연 중요하다. 그러나 우의정(右議政)은 단지 노병(老病)으로 기거(起居)를 잘 못할 뿐이다. 비록 인물(人物)이 미덥지 않다고 말하지만, 별로 허물된 행동이 없으니, 헌부에서도 또한 그 허물을 지적해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논어(論語)》를 진강(進講)하였는데, 또한 말하기를, ‘헐뜯는다는 것은 악한 짓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를 흉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삼공은 도리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하고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니, 그 직임이 무거우므로 마땅히 적당한 사람을 고르는 데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영의정을 의망(擬望)할 때에 윤호도 참여하였으니, 가볍게 고치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고, 이어서 좌우에 물었다. 지사(知事) 정괄(鄭佸)이 대답하기를,

“대신(大臣)의 진퇴(進退)를 어찌 가볍게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가 없으니, 특히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허침(許琛)은 말하기를,

“공자께서 이른바 ‘헐뜯고 칭찬한다.’는 것은 바로 보통 사람들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지, 일을 말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대간(臺諫)이 공의(公議)를 논하여 아뢰었는데, 지금은 반드시 그 사람의 잘못한 것을 지적하여 말하도록 하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비밀[陰私]까지도 적발하니, 가장 불가(不可)한 짓입니다. 대간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이 되므로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신을 대간으로 삼으셨으니, 마땅히 신 등의 말씀을 우대하여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신이 윤호(尹壕)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현재 삼공이 모두 있는데, 우의정이 만약 합당치 않다면, 어찌 홀로 대간만이 이를 말하겠는가? 정부에서도 또한 마땅히 말할 것이다. 비록 ‘대간이 인주의 이목이므로 알면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나, 대간의 말을 다 따른다면 옳겠지만, 그 폐단도 있을 것이다. 또 대간이 어찌 다 어질다고 하겠는가? 대간의 말도 다 믿을 수가 없다. 대간이 말한 대로 그 사유를 묻지 않는다면,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허침이 말하기를,

“한(漢)나라·당(唐)나라 시대에 동료(同僚)끼리도 서로 시비하는 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말하는 책임[言責]이 오로지 대간에게만 있고, 이루어진 풍속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정부(政府)에서도 반드시 이를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실이 없는데도 다만 그가 합당치 않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허침이 말하기를,

“외척(外戚)은 일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도로 영돈녕(領敦寧)을 제수한다고 하더라도 그 부귀와 존영(尊榮)은 지극한 것인데, 어찌 반드시 정승을 삼아야 하겠습니까? 작은 일이면 오히려 그만둘 수가 있지만, 이것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요하므로, 만약 대간을 그르다고 생각하시면 대간을 죄주시고, 대간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삼공을 바꾸도록 하소서. 신 등은 바로잡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을 가지고 대간을 죄줄 수가 없고, 또한 이 일을 가지고 삼공을 가볍게 바꿀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하면 일이 좋겠는가? 우의정이 전에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을 때에 대간이 다만 우스갯소리를 잘한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잘못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곧 그를 보낸 것이다. 삼공(三公)의 진퇴(進退)는 가볍게 바꿀 수가 없다. 만약 큰 허물이 있다면 이를 바꾸어야 하지만, 아무런 까닭없이 이를 버릴 수는 없다.”

하였다. 허침이 말하기를,

“그 때에 신이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윤호가 감사가 될 수가 없다.’고 말씀드리자, 성상께서 굳이 그 잘못한 것을 물으셨기 때문에 이런 말을 가지고 아뢰었을 뿐입니다. 삼공의 진퇴는 진실로 가볍게 할 수가 없는데, 지금 윤호의 승진이야말로 거의 가볍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제 들으니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무릇 사람을 쓸 적에 그 초기에 있어서 어떻게 고를 수가 있겠는가?’고 하셨는데, 신은 처음에 사람을 고르지 않았다가 잘못한 일이 있는 다음에야 이를 바꾼다면 제때에 구제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의 말은 처음부터 사람을 고르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허물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이 있는 처지에 나가게 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사람이 과실이 있은 뒤에야 이를 꾸짖는 것이 옳고, 허물이 없는데도 이를 논박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허침이 말하기를,

“과실이 있은 다음에야 이를 고친다면, 은혜를 손상시킴이 크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진(仕進)하지 아니하고 있으니, 이를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허침이 아뢰기를,

“흥복사(興福寺)의 불사(佛事)는 이단(異端)을 숭배하고 믿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미쳐서 미혹되게 하여 재산을 손상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이것도 잘못입니다. 듣건대 대군(大君)의 부인이 중들과 단지 주렴(朱簾)만을 사이하여 자리하였다고 하니, 그 설독(褻瀆)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의 뜻으로서는, 성상께서도 또한 이를 들으시고 진실로 마땅히 놀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도리어 이를 추국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대간의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어렸을 적에 글을 읽다가 부녀자들이 절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였다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부인(夫人)이 대군을 위하여 그 극진한 마음을 쓰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나, 이번 일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부처를 좋아하시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풍속을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인은 그만두더라도 사족(士族)의 부녀자는 절에 올라갈 수가 없으니, 마땅히 그 가장(家長)의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승도(僧徒)도 역시 마땅히 추국하여 한두 사람을 징계함으로써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정괄(鄭佸)은 말하기를,

“헌부에 명하여 추국하게 하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비록 불교를 매우 좋아하시지 않으심이 오히려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후일에 불교를 좋아하는 임금이 있게 되면, 그 남상(濫觴)의 조짐이 반드시 여기에서 비롯되지 아니함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허침은 말하기를,

“이 절의 중들이 이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시장(柴場)을 널리 점거하여 백성들이 땔나무를 할 수가 없으며, 다른 사람의 묘목(墓木)을 벌목하지만 백성들이 금지할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폐해를 받는데도 나라에서 무슨 방법으로 이를 알겠습니까? 부인은 진실로 문책할 수가 없으나, 승도(僧徒)를 안핵(按覈)하는 것이야 무슨 불가한 점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추핵할 수가 없다.”

하였다. 허침이 말하기를,

“당상관(堂上官)의 자급(資級)은 가볍게 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덕망(德望)이 있거나 재능(才能)이 있거나 큰 공로[勳勞]가 있는 다음이라야 줄 수가 있는데, 지금 조그마한 공로가 있다고 하여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불가(不可)하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는데, 정괄이 대답하기를,

“관직을 상으로 주는 것은 과연 너무 무거우니, 물건을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특진관(特進官) 한치례(韓致禮)는 말하기를,

“대가(代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선후(先后)를 위한 것이므로, 조그마한 공로라고 할 수는 없으니, 역시 함부로 상을 준다고 할 수는 없다.”

하니, 허침이 말하기를,

“관작(官爵)뿐만 아니라 상사(賞賜)도 지나칩니다. 나라를 위하는 도리로서는 절약하여 쓰는 것이 귀중한데, 지금 말이 30여 필에 이르고, 그 나머지 물건도 이에 상당하니, 이것은 계속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전일에 종묘(宗廟)를 수리할 적에도 또한 이안(移安)·환안(還安)에 있어서 상사(賞賜)가 있었지만, 이와 같이 지나친 데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고, 정괄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선왕(先王)·선후(先后)를 위해 이를 시행했다고 하시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친 것이 아니므로 고칠 수가 없다.”

하였다.

【원전】 12 집 510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사상-불교(佛敎) / *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건설-건축(建築)

 

성종 292권 25년 7월 21일 (정미) 003 / 농사의 부실로 점마 별감의 파견과 한산의 축성을 정지하게 하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조위(曹偉)가 본도(本道)의 농사(農事)가 부실(不實)한 것으로써 장계(狀啓)하여 점마 별감(點馬別監)을 보내지 말고, 또 한산(韓山)의 축성(築城)하는 일을 멈추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12 집 564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교통-육운(陸運) / *교통-마정(馬政) / *군사-관방(關防) / *농업-농작(農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