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 김일손(金馹孫)이 상소하기를, |
“신이 금년 2월 5일에 의정부 사인사(議政府舍人司)에서 전지를 받들어 신에게 이문(移文)한 것을 엎드려 받자오니, ‘내가 덕이 없이 큰 자리를 이어받아서 애통한 상중에 어찌할 바를 모르니, 가언(嘉言) 선정(善政)을 어찌하여 듣겠으며, 민간의 이익과 폐단되는 것을 어찌하여 알 수 있으랴. 대소 신민(大小臣民)들로 하여금 나의 처음 즉위한 뒤에 여러 신하에게 묻는 뜻에 맞추어 각기 시국에 마땅한 것을 진술하여 실봉(實封)으로 올리라.’ 하셨으니, 신이 받들어 읽으매 눈물이 흘러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옵고, 곧 관내(管內) 54관(官)에 반포하였는데, 여태까지 한 사람도 봉장(封章)을 올리는 자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조종(祖宗) 백 년 동안의 두터운 덕택 가운데서 살아왔고, 거듭 대행 대왕(大行大王) 26년 동안 교양하고 성취시킨 은혜를 입었는데, 하루아침에 전하의 애통하신 전지를 받고도 새 정치에 도움될 한 마디 말도 하는 이 없으니, 신이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신이 생각건대, 말하지 않는 자의 마음에는 반드시 ‘임금이 성스럽고 신하가 어질고 예(禮)와 법이 갖추어졌으므로 천한 사람의 말은 아뢸 필요가 없다.’ 하고, 또 반드시 ‘새 정치의 처음에 태학생(太學生)을 물리쳤으니, 충성스러운 말은 한갓 제 몸에 화가 돌아올 뿐이다.’ 하고, 또 반드시 즉위한 처음에 구언(求言)하는 것은 예사(例事)일 뿐이니, 말을 아뢰어도 반드시 쓰이지 않을 것이다.’ 할 것이니, 낮은 자는 죄를 받을까 겁내고, 높은 자는 이름을 얻으려 한다는 혐의를 피하는 것이 침묵하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은 자는 제 몸을 위하여서는 가하나, 모두 품은 뜻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임금을 아끼고 나라에 충성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
신이 선조(先祖)에 벼슬하여 녹을 먹은 지가 10년이요, 벼슬이 5품 자리에 있어, 나라의 은혜는 이미 두터운데 하는 것 없이 지내와서, 선왕께 한 말씀으로도 보답한 것이 없었는데, 이제 또 저의 몸만 삼가하여 전하의 높은 뜻을 외롭게 한다면 신의 죄가 더욱 심할 것이거니와 평생에 배운 바를 어디에 쓰오리까. 신은 어리석은 일득(一得)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애통 박절한 심정으로 애통 박절한 전지를 받들으매 마음이 격동되어서 모르는 사이에 말이 절로 법식에 벗어나오니, 전하께서 살피시기에 달렸습니다. |
신이 듣기로는, 가언(嘉言)은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는 것만한 것이 없고 선정(善政)은 집을 바루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만한 것이 없다 하오니, 경연(經筵)에 일찍이 납시는 것이 근본입니다. 민간의 이익과 병폐는 본디 아뢸 것이 많이 있으나, 조정의 이익과 병폐 또한 아뢸 것이 있사오니, 신이 낱낱이 진술하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가언·선정을 듣고자 하시어, 듣고 나서 뜻에 두지 않으신다면, 듣는 보람이 없을 것이요, 민간의 이익과 병폐를 알고자 하시어, 알고 나서도 시행하지 않으신다면, 아시는 보람이 없을 것이오니 듣고서는 실천하고 알고서는 실행한다면, 요 순(堯舜)이 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요 순을 성인이라 하는 까닭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사사로운 뜻을 고집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임(臨)하신다면, 가언·선정이 날마다 아뢰어지고 민간의 이익과 병폐가 날마다 들리더라도, 이것이 모두 나는 벌레 소리와 지나가는 까마귀 소리 같아서, 한갓 전하의 총명을 어지럽게 할 뿐입니다. |
신이 듣기로는 ‘재앙은 무단히 생기는 것이 아니요, 허물은 반드시 돌아가는 데가 있다.’ 하옵는데, 신이 한 도에만 매여 있어서 사방의 재앙을 알지 못하오나, 한 도를 가지고 보더라도 몇 달 동안에 재앙이 또한 심하였습니다. 지난 12월 27일(임오)에 서산(瑞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는데, 곧 전하께서 상주가 되신 뒤의 일입니다. 올해 정월 18일(계묘)에 한산(韓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고, 2월 초하루에 3분의 1이나 먹은 일식이 있었고, 그 달 7일에는 대낮에 별이 떨어졌으니, 괴이함이 또한 심합니다. 옛날 위상(魏相)이 한(漢)나라 정승이 되고, 이항(李沆)이 송(宋)나라 정승이 되어, 날마다 사방의 재변을 임금에게 아뢰었으니, 오늘날의 위상과 이항의 직책을 맡은 자가 능히 위상·이항의 마음을 간직하여 위상·이항처럼 사방에서 일어나는 재변을 전하에게 아뢰고 경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천도(天道)가 아득하여 재앙과 허물을 추측하기 어렵다 해서 스스로 경계하여 반성하지 않는다면 전하와 여러 신하들의 복이 아닙니다. 신이 영춘현(永春縣)에 떨어진 이물(異物)을 보았는데, 세상에 장화(張華)가 없으니, 누가 그 괴이한 것을 분변하겠습니까. 신이 듣자오니, 조정에서 쪼개어 보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의심한다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돌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나 별이 떨어지면 돌이 되는 것이니, 이것 또한 공중에서 변화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이 감히 당장에 어떤 사건을 지적해서 그 재변에 해당된다고 증거댈 수는 없사오나, 전하께서는 마땅히 몸에 되돌이켜 보고 마음에서 찾아서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겨,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여야 할 때입니다. 하늘이 전하에게 임(臨)한 것이 바로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임한 것과 같아서,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경계하는 데는 형벌이 있고, 하늘이 전하를 경계하는 데에는 재변이 있으니, 그 일은 다르나 이치는 같습니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데에 들게 된다.’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가 전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노하여 죄주시겠거니와, 만약 전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면 하늘이 어찌 전화를 돌보겠습니까. 여러 신하가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늘을 두려워하시어 멀다 하지 마소서. 하늘을 두려워한 뒤에야 만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니, 한 번 천도를 멀다 하시면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하늘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만물을 맡아보면 이 마음이 방자하여져서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여러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가 전하의 몸 아래에 물건인데, 두려울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대신을 공경할 필요가 없고 대간(臺諫)을 믿을 필요가 없으며, 시종(侍從)을 친근히 할 필요가 없어서 ‘내 말은 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내명은 거슬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여, 내가 잘낫다는 마음이 날로 쌓이고 달로 자라나서 다시는 용납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현인과 군자는 머뭇거리며 속으로만 아파하고 다시는 진언(進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늘을 두려워하면 마음이 발라질 것입니다. |
전하께서는 하늘을 두려워함으로써 뭇 신하에 임할 뿐 아니라 또한 하늘을 본받아서 전하의 마음을 비우소서. 오직 마음이 비워지고서야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오니, 진실로 주일(主一)하여 마음을 비우신다면, 마음이 하늘과 통하여서 탕탕(蕩蕩) 평평(平平)한 도(道)가 점점 이루어져서 황극(皇極)이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을 비우지 않으신다면, 대신에게 맡길 적에 그가 사랑을 믿고 권세를 휘두를까 의심하여 간섭하고, 대간을 대우하는 데는 그가 명예에 마음을 두고 책임만 면하는가 의심하여 물리치고, 청론(淸論)을 들으면 그것이 너무 옛것에 얽매어 오활(迂闊)하다고 의심하여 경홀히 여기며,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데는 제 사정(私情)을 따르는가 의심하고, 형관(刑官)이 법을 다루는 데는 사정을 쓰는가 의심하게까지 되어,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가 사정이 있다고 의심하신다면, 전하의 마음은 날마다 위에서 수고롭고 신하들은 의사를 펴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한 선제(漢宣帝)와 당 선종(唐宣宗)은 명목과 실제가 맞는가를 살펴 권강(權綱)을 모조리 잡아 쥐었으므로, 명찰(明察)한 임금이라 일컬으나 지덕(至德)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람을 알아보아서 잘 맡기고 인재 얻기를 잘하고, 마음을 비워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임금된 이의 훌륭한 절제(節制)입니다. |
전하께서 세자로 계실 때는 한 마디 말씀도 실수가 없으시고 한 가지 행실도 이지러짐이 없으셨으므로, 숨긴 덕과 감춘 빛을 남들이 추측할 수 없었으며, 즉위하시어서는 집상(執喪)을 애통하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되게 하고 첫 정사를 밝게 시행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깨우쳤습니다. 중외(中外)의 신하 백성들은 한집안에 오랜 종들과 같아서 가장(家長)이 살았을 때에는 그 아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의 뜻이 어떠한지 몰랐으나, 가장을 잃고 나서는 황황하여 우러러 의지할 곳이 없어서, 문득 상속한 맏아들의 행동이 법도에 맞는가를 보아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며, 다행히도 가업이 더욱 융성하면 서로 경축하고 칭송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러하므로 한 말씀과 한 동작의 관계됨이 중하니, 전하께서 삼가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
삼년상(三年喪)이 공통된 것은 천자(天子)부터 서인(庶人)까지 같으니, 어찌 귀천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처음 초상을 당해서는 목소리는 다시 못들어도 유체(遺體)가 자리에 있으니 오히려 붙들고 울 수가 있으나, 염(斂)하게 되어서는 형용마저 한 나무에 거두니 간을 뭉개고 허파를 찢듯이 망극함을 어쩔 수 없고, 빈(殯)하게 되어서는 그일이 아득해지되 오히려 평일에 거처하던 곳에서 아침 저녁으로 곡림(哭臨)하여 생시처럼 봉양하니, 또한 스스로 위안할 만하나, 장사하게 되어서는 어둡고 어두운 구덩이 속에 아주 묻으니 울부짖어 봐도 미칠 수 없으니 영원히 버린 것이며, 이에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잃은 자는 3년이 지나고서는 상복을 다시 더 입어 볼 수 없음을 생각하고, 장사하고 나서는 빈소에 계실 때를 생각하고, 빈하고 나서는 염하지 않았을 때를 생각하고, 염하고 나서는 편찮았을 때를 생각하나, 일이 때와 더불어 지나가서 날로 멀어지매 소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禮)에 ‘거상중에 병이 있으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되 병이 나으면 전대로 한다.’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속(嗣續)이 중하기 때문인데, 하물며 임금의 한 몸에는 종묘 사직의 중함이 매였음에리까. 옛적에 임금이 돌아가매 새 임금이 3년 동안 말하지 아니하고, 여러 백관이 총재(冢宰)에게 모든 정사를 묻는 것인데, 지금의 원상(院相)이 곧 총재니, 신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졸곡(卒哭) 전에는 다만 원상으로 하여금 승지(承旨)와 함께 편의한 대로 정무를 처리하게 하시어 전하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혀서 몸을 보존하시고, 신하들의 말하는 것도 또한 오래 거절하지 마시어 생각을 안정하고, 산릉(山陵)이 정한 기한이 있어서 빈전을 뫼실 날이 많지 않으니, 몸을 살피시고 힘을 헤아리시어 다시는 애태우지 마시고 편찮으시면 속히 양음(涼陰)으로 돌아가시어 큰 효도를 마치소서. 이것이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큰 효도입니다. 비록 자자분한 것을 처분하지 않더라도 삼가고 잠잠히 있는 가운데에 조화가 절로 유행할 것이거니와, 또한 전하께서 비록 삼가고 잠잠히 계실 날이라도 날로 대신을 가까이 하시어 의원을 감독하며 환후를 보살피는 것을 허락하소서. 송 영종(宋英宗)이 재궁(梓宮) 앞에서 병을 얻었을 때에 한기(韓琦)가 옆에 없었더라면 위태할 뻔하였거니와, 전하께서는 이것을 경계하소서. |
대신을 가까이 하고 환관(宦官)을 멀리 하는 것이 또한 몸 닦는 급무(急務)입니다. 옛날에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던 이는 반드시 먼저 집을 다스렸으니, 대저 위로는 삼전(三殿)부터 아래로는 구족(九族)까지, 안으로 환관(宦官)·궁첩(宮妾)과 밖으로 복례(僕隷)까지도 모두가 전하의 한집안입니다. 전하께서 위로 삼전께 효도를 다하여 삼전으로 하여금 선왕의 돌아가심을 잊게 하시고, 아래로 구족에게 도타이 하여 구족으로 하여금 전하의 인자함을 받게 한 뒤에야 백성에게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의 모후는 흔히 낳은 어머니가 아니어서 이간하는 말에 동요되어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삼전께 효도를 하시되 대비에게 낳은 어머니와 똑같이 효도를 다하고서야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효도란 순함을 위주로 하되 어버이의 영을 따르지 못할 수도 있고, 은혜란 후함을 위주로 하되 의리를 가리우지 못할 때가 있으니, 구차스런 효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 궁중의 청(請)을 막고 밖의 사(私)를 끊어서, 환관과 궁첩이 감히 제 뜻을 행하지 못하고 복례와 하천(下賤)이 감히 제 뜻을 법에 범치 못하게 하시고서야 집이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명덕 황후(明德皇后)는 친정에 수레와 말이 많은 것을 보고 자신을 뼈저리게 꾸짖었고, 송나라 선인 태후(宣仁太后)는 〈친정인〉 고씨(高氏)를 검찰한다고 스스로 일컬어 감히 사가 없었으니, 이것은 만세의 궁중에서 법받아야 할 바입니다. 근자에 월산군(月山君)의 종 길종(吉從)이란 자가 시골에서 폭력을 부렸으니, 법으로 보아서는 마땅히 변방에 귀양 보낼 것인데, 부인이 공공연하게 단자(單子)를 올려서 종을 두둔하려 하여 국법을 범했으되, 전하께서는 그의 청을 특별히 들어 주셨으니, 이것은 귀근(貴近)에게는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홍산현(鴻山縣)에서는 내수사(內需司)의 억센 종 열두어 명이 함께 밤에 공해(公廨)를 습격하여 공공연히 물건을 가져간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미쳐 모르시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은 세력을 믿고 법을 어지럽히고 고을 관가를 업신여겨 못할 짓이 없을 것이오니, 전하께서 사령(赦令)을 거쳤다 해서 아니 다스리지 마소서. 대저 임금은 사사 재산을 둘 수 없으니, 내수사에서 재산을 늘리는 것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선왕께서 초년에 없앴다가 중년에 다시 둔 것은 자손이 번성하여 여기에서 가져다 나누어 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지금 없애신다면 무엇이 누(累)가 되겠습니까. 특히 선왕의 초년 뜻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
전하께서 초상을 당한 슬픔에 지쳐서 정신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셨고, 또 자전(慈殿)의 뜻을 거슬릴 수 없어 우선 설재(設齋)를 허락하셨으니, 비록 ‘하지 않는 극진한 선’ 만하지는 못하나, 역시 이는 인효(仁孝)의 허물이니, 마침내 손상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태학생(太學生)의 우직함을 너그러이 용납하지 않고 귀양보내고 정거(停擧)시키시매 여러 대부(大夫)가 모두 옳지 않다 하되, 전하께서 한결같이 거절하고 듣지 않으셨는데, 설재는 경(輕)한 일이고 태학생들을 죄주는 것은 중한 일이며, 태학생에게 죄주는 것은 경한 일이고 여러 신하의 의논을 거절하는 것은 중한 일이니, 이것은 신정(新政)의 큰 누(累)가 됩니다. 국민은 다만 태학생이 물리쳐짐을 보고 전하의 뜻은 알지 못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유교를 미워하는가 의심하여서, 이이(訑訑)하다는 소문이 사방에 들리어, 드디어 전하께서 참으로 간하는 말을 거절하신다고 생각들 하니, 신 또한 놀라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곧 들리기를, 전하께서 간하는 말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시어 길종의 일은 도로 법으로 처단하셨다 하오니, 이른바 ‘마치 일·월식(日月蝕)과 같아서 허물을 고치매 백성이 모두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확충하여 잘못을 아시거든 능히 뉘우치고, 뉘우치거든 반드시 고치셔서, 만사를 모두 그렇게 하신다면 태갑(太甲)·성왕(成王)과 같기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바뤄지고 몸이 닦아지고서 집 또한 다스려질 것이니, 집이 다스려진 뒤에야 비로소 치국(治國)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익과 병폐 26가지를 삼가 조목으로 아룁니다. |
1. 상제(喪制)입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단상(短喪)을 유조(遺詔)한 이래로 역대(歷代)에 삼년상을 이행한 자가 거의 없었고, 천여 년 동안에 오직 진 무제(晉武帝)·위 효문제(魏孝文帝)·송 효종(宋孝宗) 세 임금뿐이었으니, 이 세 임금은 어찌 전하께서 본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중국에서도 이행하지 아니하나 우리 조종(祖宗)은 능히 삼년상의 제도를 이행하였으니, 우리 왕조의 가법(家法)이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할 수 있으나, 일시적 제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극한 슬픔을 당하여서 면복(冕服)으로 즉위한 것은 강왕(康王)의 실수이었습니다. 왕위를 이어받는 날에 비록 신하들의 권함에 이기지 못하여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을 입으셨으나, 전하께서는 반드시 더 애통하실 것이니, 효도로써 사방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서는 최복을 입고 신하에게 임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예가 답습되어 온 지 이미 오래였고, 특히 오늘날에만 시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삼군(三軍)이 희게 입는 것은 의리에 틀리는 것이 아닌데, 지금 군진(軍鎭)에서 초상에 임하지 않고, 이 음악을 그쳐야 할 때를 당하여 북·나팔 소리가 평상과 같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존장(尊長)이 앉아서 곡하는 것은 당연한 예인데, 두 대비의 곡할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교서를 반포할 때에는 최복을 입고, 지방관이 교서를 받을 때에는 길복(吉服)을 입게 되어 있으니, 즉위하는 교서는 당연하나, 관찰사(觀察使)가 받드는 교서 또한 길복을 입고 맞이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관찰사는 평일에 사삿일로 휴가를 얻어서 얼마 동안 도계를 넘을 수 있는데, 오직 진향(進香)하는 데는 나갈 수 없다 하여, 새로 임명받아 부임하지 않은 감사를 시켜서 진향하도록 하였으니, 비록 드나드는 폐단은 줄인다고는 하나, 예에 벗어난 것은 어찌하겠습니까? 초라한 면포(綿布)로 전 드릴 물건은 사서 바치니, 비록 옛 규례라고는 하나, 신은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저 즉위할 때에 교서를 반포함은 전국에 훈계하여 처음을 바르게 하는 것인데, 조관을 보내지 않고 작은 폐단을 헤아려 대체를 가벼이하니, 신은 구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허물삼지 않으나, 오히려 마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문관·무관이 졸곡을 지내고부터 흰 갓을 쓰는 것과 능 앞에 비각(碑閣)을 세우는 것은 《오례의(五禮儀)》 주(注)에 자세히 실렸는데, 신이 듣기로는, 흰 갓을 검은 갓으로 고친 것은 정희 왕후(貞熹王后) 초상 때부터였고, 능 앞에 비각을 폐지한 것은 광릉(光陵)때부터였다 합니다. 옛사람은 검은 갓을 쓰고 조상(弔喪)하지 않았으니, 조상에도 검은 갓을 쓰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삼년상의 갓임에리까. 비록 흰 갓을 따라 사모를 희게 하지 못하더라도 검은 사모를 따라 갓을 검게 하지 못할 것이나, 아직 존양(存羊)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수 문제(隋文帝)의 아들 준(俊)이 죽었을 때에 유사(有司)가 비를 세우자고 문제에게 청하니, 문제가 답하기를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면 한 권의 역사책으로 족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선왕의 높은 덕은 나라 역사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무엇하러 비를 세우자고 청하겠습니까마는 다만 신하의 무궁한 생각은 임금의 유체(遺體)를 위해서 더욱 멀리 천만 년 뒤에 가서 어떨까 염려해서입니다. 옛날 공자(孔子)가 계찰(季札)의 묘도비에 손수 쓰시기를 ‘오나라 연릉 계자의 묘다[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하였으니, 어찌 말이 많아야 되겠습니까. 글 잘하는 신하를 시켜서 다만 날짜나 쓰고 검덕(儉德)을 간략히 기술하고 명기(明器)는 나무로 쓰고 주옥이나 금을 묻지 않은 뜻은 다음 세상에 가서 능이 옮기고 골짜기가 바뀌더라도 간사한 도둑이 〈도굴할〉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요, 지식이 있는 자는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니, 또한 손해될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신라 옛 도읍터에 관광을 갔더니, 무덤이 총총하여 귀천을 구별할 수 없다가 한 무덤을 지나다가 보니 잘라져 쓰러진 빗돌에 ‘태종능’이라고 쓰였기에 늠연히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 물러난 적이 있으니, 이것이 역시 한 증거입니다. 이 두 일에는 예문을 들어서 써도 늦지 않다 하겠습니다. |
2. 자주 사면(赦免)하지 마실 것입니다. 공명(孔明)이 촉(蜀)을 다스릴 때에 사령을 함부로 내리지 않았으니, 공명이 어질지 않은 사람이 아니지만 함부로 간사한 무리에게 혜택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왕께서 병환이 계실[彌留] 때에 신하들이 선왕의 영명(永命)을 비는 뜻으로 극형의 죄수까지 모두 놓아 주었으니, 사령 전지가 본도에 도착하였을 때가 벌써 선왕께서 승하하신 뒤였으니, 미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감히 청하지 못한 것은 명령이 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올해 민간에 도둑이 많은 까닭도 이 때문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도둑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종이 주인의 아내를 간통하고 아우가 형을 구타한 자 또한 면하니, 강상(綱常)에 있어서는 어찌하리까. 신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사령을 자주 내리지 마시고 내리더라도 보통 사령에서 용서하지 않는 것만은 제외하시면 양민에게 큰 다행이겠습니다. |
3. 토지 소출의 다과를 참작하여 진상(進上)을 삭감하고 몸소 절약하고 검소해서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을 삼가실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는 각 지방에서 진상하는 공물 중에 토산물 아닌 것이 많아서 관리들이 판출할 능력이 없어서 민간에게 강제로 할당시키면 민간은 베[布]·조[粟]를 가지고 소산지를 찾아다니면서 곱절이 넘는 값을 주고 사게 되니, 진상할 물건은 언제나 말[斗]로 주고 되로 받고 섬으로 주고 말로 받게 되며, 또한 대소 관리들은 장부에 의거하고 침탈하는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니니, 민간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이 국가에서 포루(布縷)의 세는 곡물의 세를 공제하여 바치기 때문에 민간의 부담은 맥도(貊道)보다도 더 가볍다고 하니, 이것은 장부에 기록된 것 외에 거둬 들이는 것이 한도가 없어서 명년에 바칠 것을 금년에 독촉하는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에도 벌써부터 저축해 오던 것이 모두 바닥이 드러났는데 민가에 어찌 저축될 것이 있겠습니까. 가령 금년 재정이 국휼(國恤)과 중국 사신의 왕래로 인하여 명목 없는 물품이 모두 관청으로 하여금 준비케 하니, 관청에서는 제대로 준비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민간에게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명목 없이 잡다한 과세가 곡물 조세의 10배나 되었을 것이니, 백성이 어찌 정신을 차리고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옵건대, 명년부터 인자하고 너그러운 중앙 관원을 각 지방에 파견시켜서 토산물을 자세히 조사한 다음 공안(貢案)을 작성하소서. 각도의 진상으로 말하면 가까운 곳에서는 날로 바치고 먼 곳에서는 달로 바쳐서 육해(陸海) 생산물이 모두 바쳐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당초에는 한두 가지 생산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떤 감사가 생각하기를, 신 자신은 먹고 나라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서 바쳤던 것이 이미 바친 뒤에는 으레 바칠 품목으로 지정되니, 생산된 것이 떨어져 지탱할 수 없어 다른 것을 팔아 바꾸어서 충당하느라고 수레가 엎어지고 말이 쓰러져 가면서 사옹원(司饔院)에 바치면 엄인(閹人)·선부(膳夫)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어찌 모두 백성들의 피와 기름인 줄을 알겠습니까. 소자첨(蘇子瞻)의 시에 ‘우리 임금의 군색한 것이 어찌 이 물건인가. 구체(口體)를 기르는 것이 어찌 이다지 누(陋)한가.’라고 하였으니, 이 뜻이 매우 좋습니다. 신이 요동(遼東)의 위치를 살펴보았더니, 산을 등지고 강에 닿아서 생산물이 또한 숱하나, 공물 바치는 것은 다만 인삼과 오미자뿐인데, 그것은 약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폐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하에는 은어(銀魚)가 나서 매우 흔한 것인데 어떤 환관이 가져다가 황제에게 바쳤더니, 지금 황제가 먹어 보고 맛이 좋아서 궁내의 돈으로 사들이도록 하고, 백성에게 공물로 바치라는 조서(詔書)는 내려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송 인종(宋仁宗)이 구운 양[燒羊]을 들이지 말게 한 뜻과 같습니다. 종묘에 설만(褻慢)한 음식을 올리는 것은 남제(南齊)의 실례(失禮)인데, 지금에 설만한 음식을 올리는 사실이 이미 많으니, 또한 예가 아닙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몸소 검소하고 절약하여 자세히 살펴서 처분하시어 사방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기어코 구하여 바치려고 애쓰지 말도록 하소서. 요즘 사대부들이 제 몸 봉양이 너무 사치스러워서 토지는 척박하건만 풍속은 사치스러워지며, 백성은 가난한데 조세는 촉급하니, 진실로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그 원인은 위에 있으니, 먼저 전하께서 음식 의복에 좋아하는 것을 삼가서 백관에게 본을 보이소서. 신은 들으니, 적삼 깃을 밖으로 접은 것은 옛적에는 이러한 풍습이 없었던 것인데, 세종께서 어느날 저녁에 바깥으로 접은 것을 여러 신하가 본받고 사방이 따라서 지금까지 폐지되지 않았으니, 임금이 한 번 좋아한 것이 미세한 것이라도 한때에 법이 되며 만세에 본받는 것이 이같으니, 어찌 삼가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
4. 작은 허물을 가볍게 다루고 오복(五服)을 소중히 여겨서 조정에 충후(忠厚)한 풍도를 세울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는 요즘 음해하고 적발하는 풍조가 점점 늘어나고, 충후하고 미더운 도(道)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으니, 〈예를 든다면〉 어떤 정승에 있어서 본래부터 장자(長者)라고 일컬어 왔어도 한 가지 일에 잘못이 있으면 갑자기 간사한 자라 일컫고, 어떤 명사에 있어서 본래부터 깨끗한 선비라고 일컬어 왔어도 한 가지 흠만 있으면 갑자기 소인으로 지적해서 아침에는 교유하는 자리를 같이 하고, 저녁에는 공박하는 글월을 빼들어 남몰래 적발하여, 자못 실없고 경솔한 자가 되도록 하니, 사람은 정신이 밝음과 어두움이 있고, 생각이 잃음과 얻음이 있고, 재질이 길고 짧음이 있으니, 이것이 곧 선사(先師)의 ‘허물은 용서함이 있고 모두 다 잘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송나라 인물로 본다면, 왕문정(王文正)이 좋은 구슬을 받고 자신이 천서(天書)를 받았다고 하였으니, 그 잘못이 이미 크나 오히려 큰 인물[大雅]이라고 일컬었고, 한기(韓琦)·부필(富弼) 두 사람은 공훈이 하늘에 치닿을 정도였으나, 한기는 의리 용맹을 풍자하다가 복의(濮議)를 그르쳤고, 부필은 선학(禪學)을 좋아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을 부족하다 하지 않았고, 왕안석(王安石)에 있어서는 온 세상이 소인의 조종이라 하였으나,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다만 고집스럽다고 일컬었고, 주 문공(朱文公)이 또 명사(名士) 가운데 넣었으니, 충후함이 이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또한 매우 충후하였으니, 당개(唐介)는 임금 앞에서 ‘문언박(文彦博)이 기이한 비단을 짜 가지고 궁인에게 뇌물로 주어서 정승이 되었다.’고 꾸짖었는데, 그것이 실정이 아니었으나 〈문언박이〉 그 자리를 피하여 사례하고 변명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당개를 천거해 주기까지 하였고 한위공(韓魏公)이 영릉사(永陵使)가 되었을 때에 소명윤(蘇明允)이 공문[移書]으로 ‘그가 어버이 장사를 후하게 지냈다.’고 책망하여 화원(華元)에 견주기까지 하였는데, 위공의 실정이 아니었으나 구연(瞿然)히 일어나 빌기를 ‘감히 가르침을 받지 않으리요.’ 하였으니, 당시 대신들이 자신이 충후한 도를 이행하고, 또 남의 직언(直言)을 능히 용납하였음이 이와 같으니, 대개 대신으로서 남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임금이 간하는 말 듣지 않는 것을 어찌 〈들으라고〉 간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대신에게는 속이지 못하게만 하고, 소신이 거슬리는 것을 노하지 말아서 양편에 다같이 후하게 하시어, 각기 그 명분을 이루도록 하면 사사로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 풍속이 사사가 많고 법 제정이 역시 잘못이 있으니, 처첩(妻妾)의 친척과 동성(同姓) 친척이 다같이 상피(相避)하는 것은 대저 사사를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관직에 있는 자가 혹은 처첩의 시마(緦麻) 친척은 피하고 당형(堂兄) 종숙(從叔) 사이에는 피하지 않고 벼슬 받으니 동성이 도리어 이성(異姓)보다 더 경하게 되고, 이밖에는 본래부터 피하는 규정이 없어서 기공(朞功) 친척간에 〈항렬〉 높은 이가 낮은 직위에 있고 〈항렬〉 낮은 이가 높은 직위에 있게 되었으니, 신이 일찍이 그 거슬림을 보았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지금부터 오복(五服) 친척 가운데서 〈항렬〉 높은 자가 낮은 직위에 있다면 모두 다른 벼슬로 옮기도록 하여서 조정에서 인륜을 두터이 하소서. |
5. 조종의 법을 복원시켜서 해당 관서에게 법을 지키도록 단속하실 것입니다. 대저 《경제육전(經濟六典)》과 《속육전(續六典)》은 조종의 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논의하는 자는 반드시 조종의 법은 고칠 수 없다 하는 것은 조종께서는 우려하는 마음이 깊고 일을 고쳐 본 경력이 많아서 법을 제정하는 데 주밀하지 않은 점이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원·속 두 법전이 태조(太祖)께서 처음 제정한 것이 아니고, 태종(太宗)께서 고려의 옛법에서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어서 제정한 것이, 마치 명나라 법이 당나라 법에 의거한 것과 같습니다. 지금에 쓰는 《대전》이 원·속 두 법전에서 나왔으나, 때에 따라서 빼고 넣었기 때문에 그 본진(本眞)이 점점 없어져서 조종의 좋은 법과 거룩한 뜻이 더러 소멸되어 남아 있지 않고, 또한 유사(有司)가 백 년 지난 문부(文簿)를 판별하려면 의거할 곳이 없으니, 신은 청하건대, 원·속 육전을 인출하여 각 지방 관서에 펴 주어서 《대전》과 함께 참고하여 쓰도록 하소서. 신이 보기에는 선왕의 정사는 인(仁)과 서(恕)를 숭상하고 무릇 사람을 치죄할 때에는 실정과 법을 여러번 참작하다가 유사의 논죄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였으니, 이 때문에 법사(法司)가 그 실정은 가벼운 죄인 줄 알면서 고의로 그 율(律)을 무겁게 정하여서 위의 처분대로 마침내는 말감(末減)을 따르더니, 그것이 점차 성풍(成風)한 중에 금옥(禁獄)이 우심하오니, 전하께서 속이지 말고 법을 잡기를 마치 장석지(張釋之)가 임금의 의사 경중을 따르지 않던 것처럼 하도록 단속하신다면, 모든 옥사(獄事)가 매우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
6. 제조(提調)를 혁파하여 도당(都堂)에 통솔되도록 할 것입니다. 삼공(三公)이 육경(六卿)을 통솔하고, 육경이 모든 관리[執事]를 통솔하여야, 체통이 서로 유지되고 정사가 한 곳에서 나올 것인데, 요즘에는 삼공이 하는 일 없이 도당에 앉아 있어 산관(散官)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으며, 관청마다 각기 제조를 두고 저마다 따로 법을 만들어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통섭할 도리가 없으니, 내수사처럼 미미한 관아에서도 역시 자의로 《속전(續典)》 외의 교령(敎令)을 시행하니, 공문서가 어지러워져서 다른 관원이 받들어 이행하기가 현란합니다. 신은 원하건대, 제조를 태거(汰去)하여 각 관직을 육조에 붙이고, 대제배(大除拜) 대정령(大政令)이 있을 때에는 육조에서 도당의 명령을 들어서 시행하여야, 조정의 체제가 대강 설 것이니, 이것이 조종의 법입니다. |
7. 시신(侍臣)이 교명(敎命)을 봉환(封還)하고 논박하는 일입니다. 당나라에서부터 내려오면서 한림(翰林)이 내조의 제령[內制]을 맡고 급사(給舍)가 외조의 제령[外制]을 맡아서 무릇 임명과 파면이 있을 때에 모두 제사(制詞)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림이나 급사가 다같이 조칙을 봉박(封駁)할 수 있으니, 한림은 내전(內殿)에 두어서 임금을 모시는 데에 따라서 옮겼고, 급사는 중서문하(中書門下)에 두었던 것인데, 전조(前朝)에서는 문하부(門下府)에 두었었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의정부에 두었다가 그 다음에 분리해서 별도로 둔 것입니다. 대개 당시에 서무는 의정부에서 처리하였으나 간원이 붙이게 된 것은 곧 옛적에 급사를 중서문하에 두었던 의미입니다. 지금에 와서 옛것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선조(先朝)에 있을 때에 연경(燕京)에 가서 대명 백관도(大明百官圖)를 살펴보았더니, 육과 급사중(六科給先朝)은 낮은 7품 벼슬로도 맡은 임무는 우리 조정의 육승지와 같아서 어가[鸞駕]를 인도하고 어명[綸命]을 출납(出納)하고, 혹시 임금의 잘못이 있으면 논박하여 아뢰고, 혹 뜰에 내려서서 간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가까이 모셨기 때문에 일을 보고 겪는 것이 빨라서 금하지 못할 것도 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승정원은 서정을 관할하고 있으니, 권리는 상서성(尙書省)과 같습니다. 그러나 상서랑(尙書郞)도 또한 논박할 수 있었고 오늘날 사간원이나 사헌부는 이름은 시종 지신이라고 하지만 외관(外官)과 같은 청사에 있으면서 겨우 서리들의 문견 기록을 얻어 보고 성명(成命)이 내려진 뒤에 비로소 논박하니, 그리하여 늦어지게 됩니다. 홍문관은 곧 옛날 한원(翰苑)인데, 비록 혹 일을 논하더라도 논박할 만한 사두(詞頭)가 없고, 다만 감사(監司)에게 내리는 교서나 지을 뿐이요, 격환(繳還)하는 고사(故事)가 없으니, 그렇다면 우리 조정의 시신은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승정원이 모두 대사간을 겸직하고 상서랑의 권리를 가지고 급사중의 책임을 맡도록 해서 드러나게 봉박하는 책임을 수행하도록 한다면 곤직(袞職)에 있어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요, 만약 지당합니다 하고 다만 문서처리나 할 뿐이라면 서리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순임금이 대언(代言)에게 명할 때에는 반드시 일러 주기를 ‘나의 말을 출납(出納)하여야 오직 신임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른바 신임한다는 것은 한갓 출납하는 것뿐이 아닙니다. |
8. 종실의 훌륭한 자를 뽑아서 쓸 것입니다. 대저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수(數)가 있으니, 옛날에는 사람을 쓰는 데 오직 그 재질이 훌륭한 것만 보았고, 가깝고 멀고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땅이 비좁아서 인재가 나는 것이 한정이 있는데, 가리는 것은 갈래가 많고 쓰는 데는 빼놓을 것이 많아서, 서얼(庶孽)이면 쓰지 않고 재가(再嫁)하여 낳은 자식도 쓰지 않으니, 설사 뛰어난 인재가 있어서 주의(周顗)·범중엄(范仲淹)·조여우(趙汝愚) 같은 무리가 그 가운데 태어날지라도 역시 뜻을 펴 볼 길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논할 것도 없으나, ‘종자(宗子)는 오직 성(城)이다.’ 말은 시인이 이른 바요, 우리 광릉(光陵)께서 또한 많이 채용하셔서 백관들 사이에 두었으니, 지금이라도 먼 친척에 훌륭한 사람을 뽑아서 조정 반열에 참가시켜 쓴다면 또한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전한(前漢)은 동성(同姓)을 많이 봉해서 오래 유지하였고, 조위(曹魏)는 골육(骨肉)을 소박하여서 빨리 망하였으니, 모두가 경계할 만한 일입니다. |
9. 사관(史官)을 더 두어 선악(善惡)을 기록할 것입니다. 국가의 사관으로 조정에는 홍문관(弘文館)·승정원(承政院)·예문관(藝文館)과 육조에 각기 한 사람씩 두었으니,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모두가 중앙에만 있기 때문에 지방의 풍속이 나쁘고 좋음과 인물이 잘나고 못난 점을 기록할 수 없으니, 악한 것은 기록하지 못하여도 탈될 것은 없으나, 선한 것이 행여나 빠진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동방 선비가 사장(詞章)이나 읽기를 즐기고 뜻을 세우는 데는 스스로 힘쓰지 않아서 비록 관가의 일로써 독책할지라도 오히려 힘써 하지 않을 것이니,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손성(孫盛)의 필법을 나타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조(前朝)의 역사는 난잡하여 볼 만한 것이 못되고, 선왕의 실록도 필경 좋은 일이 많이 빠졌을 것입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각 지방의 막료(幕僚)에게 춘추관을 예겸(例兼)하도록 하고, 수령(守令)에게도 학문이 넉넉한 자는 또한 춘추관을 겸임토록 하여서 기재할 임무를 맡기고, 한 번 춘추관을 겸하였으면 비록 파면된 뒤라도 듣는 대로 계속 기재해서 직업삼아 하도록 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10. 감사(監司)를 오래 유임토록 하고 가끔 어사(御史)를 보낼 것입니다. 대저 ‘지나는 곳마다 인심을 교화시켜서 신기한 자취를 남긴다.’는 성인으로도 반드시 3년이 지나야 이루는 것이 있다고 하니, 요즘 감사로서 어찌 능히 한 해 동안에 업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옵건대 6도의 감사를 다같이 〈함경도·평안도〉 두 도의 감사처럼 주의 목사를 겸직토록 하여 3년 임무를 마치도록 한다면, 조세 행정이 흡족할 수 있을 것이오, 이것이 또한 조종의 법입니다. 선왕께서는 조정의 신하를 보내서 사방의 폐단을 물어보고 더러는 적발토록 명하였으나, 일정한 제도는 없었으니, 신은 원하옵건대, 해마다 봄 가을에 강직한 조정 신하를 뽑아 벼슬에 따라 권리를 주어 보내서 사방을 순시한 다음 간대(諫臺)에 올려 탄핵하도록 한다면, 지방 관원이 민간에게 마음대로 직권을 남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논의하는 자는 더러 간사한 아전의 횡포를 미워해서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던 분사 어사(分司御史)를 두어서 단속하던 제도를 모방할려고 하나 나라는 적은데 관원이 많게 되면 좋지 못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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