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천은을 입어 공무의 여가에 노모를 찾아 뵙게 되고 또 선물을 하사받아 노모에게 드리게 되었으니, 죽도록 감격하여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내려갈 때 여주(驪州)를 지나는 도중 말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서 중상을 입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또 노모의 쇠약한 숨소리가 실낱 같음을 보니 사정(私情)이 절박하여 속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날 지체하여 두 번씩이나 소명을 받게 되었으며, 도중에 또 계속 비에 막히어 지금에야 비로소 들어오게 되었으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죄합니다.” |
하였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영의정 유성룡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영상이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상처나 입지 않았는가.” |
“신이 파사성(婆娑城)에서 발행할 때 다리 밑 물 가운데로 추락하였습니다.” |
“다리 밑으로 추락하였으면 필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말이 좋지 않아 이와 같은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다.” |
“마침 하인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구출해 주어서 상처를 입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
“노모를 귀근(歸覲)하였으니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러나 사정(私情)에 절박하여 속히 떠나지 못하고 여러 날 지체하다가 두 번씩이나 소명을 받았으니 극히 황공합니다.” |
“지나 온 일로(一路)의 방어(防禦) 등의 일과 민간의 제반사는 보기에 어떠하던가?” |
“신이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만나 보았습니다.” |
“소신이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성주(星州)와 팔거(公?)에서【고을 이름.】 찾아왔는데, 이어 말하기를 ‘남방이 근래부터 모든 조련(操練) 등의 일을 거행하면서 군정(軍丁)을 모아 곳곳에서 연습하고 있으나, 대개 원액이 많지 않아 좌·우도를 합하여 겨우 2천여 명 밖에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소신이 남방의 인심을 보니 모두 해이해져 있었으며 수령 등도 모두 성을 지킬 뜻이 없었습니다. 양반(兩班)·품관(品官) 등의 사람들도 전연 견고한 의지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흩어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온 민심이 내외가 일반이니 극히 한심합니다.” |
“안동(安東) 사람들이 신히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보는 자가 많았는데 신이 그들에게 간곡히 되풀이해 효유하기를 ‘그대들이 모두 고수할 의지가 없으니 매우 잘못이다.’ 하고 상주(尙州) 등지의 인사들 또한 찾아와 보는 자가 있기에 이들에게도 모두 견고히 지켜 동요하지 말라는 뜻으로 권면하였습니다.” |
“지난번 체찰사의 서장(書狀)을 보니, 진주(晉州) 등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방어할 계획이라고 하고, 정경세(鄭經世)를 머물러 두어서 서로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
“대개 남쪽 지방의 수령과 인민들이 조금도 고수할 의지는 없고 모두 산곡으로 도망가 피신하려 하니, 원익(元翼) 또한 이 일이 극히 민망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민심이 이와 같으니 적이 쳐들어오지 않아도 국사는 알 만합니다. 신이 내려갈 때 충주(忠州)를 지나갔습니다. 그 때 판관(判官) 이영도(李詠道)는 파직되었고 신관(新官)이 미처 내려가지 않은 상태였는데, 백성들이 영도를 유임시키고자 하여 도로에서 호소하였습니다. 본 고을은 경성(京城)에 대하여 가장 긴요한 관문이 되는 곳입니다. 영도가 재직할 때 둔전(屯田)을 극력 주선하여 황강(黃江)·수산(壽山)·사창(社倉)·연원(連原)·용안(用安) 등지에 모두 창고를 설치하여 곡식을 가득하게 저축하였는데, 본창(本倉)에는 8천여 석이나 비축하였습니다. 영도가 전에 연원 찰방(連原察訪)으로 있다가 판관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도와 구제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지금 그를 원하면서 말하기를 ‘판관은 될 수 없더라도 도로 찰방이라도 된다면 또한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 합니다. 충주는 국도의 상류가 되므로 반드시 먼저 충주를 견고히 한 뒤에야 경성을 옹호할 수 있습니다. 죽령(竹嶺)에서부터 단양(丹陽)·청풍(淸風)에 이르기까지는 그 지세와 도로가 극히 험준하니 만약 이곳에 요새를 만들어 방어하면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
“비록 성이 있기는 하나 그 성은 토적(土賊)도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단양읍 뒤에 가은 산성(可隱山城)이 있어 그 형세가 몹시 좋은데, 김일손(金馹孫)의 《이락록(以樂綠)》【김일손(金馹孫)의 《탁영집(濯纓集)》에는 이락루기(二樂樓記)로 되어 있다.】에 실려 있습니다. 대개 죽령은 적이 넘을 수 없고, 죽령을 넘어 단양에 이르기까지는 형세가 매우 험준하며, 도로 또한 몹시 험난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두 산이 벽립(壁立)하고 기암(奇巖)이 높이 솟아 있는데 김일손의 기록 중에는 서골암(栖?巖)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지난 임진년에 적이 내침할 때에 청풍 등지는 모두 통과하였으나 단양의 잔도(棧道)는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만약 험새(險塞)를 설치하면 국가는 철관(鐵關)을 둔 것 같을 것입니다. 조령(鳥嶺)에 신충원(辛忠元)이 설치한 곳 또한 극히 험준하여 두 산이 벽립하여 있고 그 사이에 다만 하나의 통로가 있을 뿐인데, 계곡이 굽이굽이 돌고 골짜기가 깊어 요새에 적합합니다. 정경세가 요새를 설치하고자 하는 곳은 바로 고모성(姑母城)인데【곧 면찬천(免竄遷)이다.】 그 형세가 참으로 천연의 험새입니다. 영남의 형세가 몹시 좋으니 국가가 만약 이 유리한 지세를 이용하여 지키면 적을 방어함에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
“신충원이 설치한 곳을 혹자는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좋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니 무슨 까닭인가?” |
“신충원이 신을 보고 모조(某條)에 대해서는 그 소임을 면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는 비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 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충원의 공은 적지 않습니다. 충원이 만약 그 곳에 요새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조령은 필시 보전될 형세가 없었을 것이니, 조령으로부터 안보(安保)·수회(水回) 등지에 이르기까지 인연(人烟)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모두 충원의 힘이었습니다. 그가 미천한 사람이라 사람들이 모두 얕보기 때문에 비방이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정경세가 아니었다면 충원은 더욱 이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정경세는 체찰사가 머물러 두기를 계청하였는데, 경연(經筵)에 사람이 없어 소환하려 하니 어떠한가?” |
“산성의 공사를 마칠 때까지 아직 2∼3개월 동안 머물러 두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대개 고모산성 밑에 새외야(塞外野)가【들 이름이다.】 있는데 평평하고 기름져 둔전(屯田)을 만들 만하며, 그 밑에 또 호계(虎溪)가 있는데, 만약 문경(聞慶)·함창(咸昌)과 합쳐 하나의 큰 진(鎭)을 만든다면 가장 합당할 것입니다.” |
“산성은 아니고, 평평한 언덕과 같은데 진을 설치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곳을 넘으면 또 반석야(盤石野)가【들 이름이다.】 있는데 평평하고 넓어 경작할 만하며, 그 땅이 마치 조간자(趙簡子)의 진양(晉陽)과 같아 만약 잘 경영하여 포치(鋪置)하면 경성이 걱정없을 것입니다. 그 밑에 또 금강정(錦江亭)이 있다고 하는데 중묘(中廟) 때 진영을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다가 중지되었다고 합니다. 금강정에서 탁 트이게 바라보이는 곳이 80여 리가 되는데, 금오산(金鰲山) 및 대구(大丘) 등지와 서로 연접된다고 합니다. 적중(賊中)으로부터 나오는 자를 수습하여 거민(居民)을 만들고 농사를 짓게 하면 그들 또한 안집(安集)의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
“우리 나라 사람이 본래 이를 알지 못하고 또 이 계획을 착안하지 못하므로 적을 방어함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개 금강정의 지세가 그리 높지 않고 평평하게 일어나 진영을 설치하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합니다. 이번에 신이 이원익을 보고 상의하였거니와, 일시에 할 필요는 없고 적이 물러가면 점차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신충원이 설치한 곳 밑에 또 할 만한 곳이 있다고 하는데 어느 곳인가?” |
“그 밑의 한 곳이 할 만하니, 만약 그곳에 토성(土城)을 쌓되 행로(行路)는 막지 말고 행로를 향해 포루(砲樓)를 설치하면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만약 고모 산성에 진을 설치하고 웅거하여 지키면 그 형세가 가장 좋을 것입니다. 대개 지난해는 농사가 크게 풍년이 들어서 민간에 아직은 식량 걱정이 없으니, 하늘이 만약 잘 도와 금년에 적이 다시 준동하지 않는다면 조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군수품이 핍절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상주 등지도 또한 모두 군량이 없으니 극히 걱정됩니다. 부득이 군병을 모으고 또 군량을 조치한 뒤에야 수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미 시작하였습니다. 신이 김경로(金景老)의 처사를 들었는데 지극히 잘못한 일입니다. 먼저 군졸을 수습하고 또 그들에게 애정을 베푼 뒤에야 성취가 있을 것인데 그는 형벌을 씀이 너무 엄격하여 흩어져 도망치게 하였습니다. 소행이 이와 같은데 성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
“이원익이 말하기를 ‘기인(其人)의 폐단이 극심하다. 기인의 가포(價布)가 1삭(朔)에 목(木) 8필인데, 금년에는 목이 귀하고 쌀[米]이 천해서 8필의 목을 비납(備納)하기가 극히 어려우니, 쌀로 그 가격을 상정(商定)하면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다. 또 조예(?隷) 1삭의 가목(價木)이 6필인데 봉납(捧納)이 극히 민망하다 하니, 이것 또한 쌀로 상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
“비변사(備邊司)는 해사(該司)와 의논하여 하라.” |
“용진(龍津)은 어떠한가. 전에 경연(經筵)에서 ‘새 기지라 좋지 않다.’고 말한 일이 있었는데 사실이 그러한가?” |
“그렇습니다. 그곳은 대개 진(鎭)을 설치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또 파사성(婆娑城)의 공사가 아직 멀었고, 역군(役軍)이 몹시 적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파사성에 대해 의논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대개 백성을 보호한다는 말이 오늘날의 대지(大旨)이나 또한 폐할 수 없는 일시의 급무가 있기 때문에 근래에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소민의 무리가 모두 윗사람의 영을 받을 뜻이 없고 완개(玩?)만을 일삼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극히 염려됩니다.” |
“모든 일이 다 민심에서 나오는 것인데 민심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
“위에서 하실 일입니다. 부득이 먼저 경성에 근본을 정한 뒤에야 일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사방에 발을 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신이 항상 모순되는 말로 상달하였던 것입니다.” |
“체찰사가 대개 무슨 말을 하던가? 그리고 적의 정세는 어떠하다고 하던가?” |
“신이 만났을 때에는 몹시 우려된다고 하였는데, 근래에는 적이 철수하였다고 하니, 어떠한 상황인지 알 수 없습니다.” |
“이원익이 ‘장계(狀啓)가 여러 번 방계(防啓)당해서 비록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도 지금은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
“이와 같기 때문에 승지(承旨)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방계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을 말하였다.” |
“체찰사가 성주(星州)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던가?” |
“대개 그 사람은 애민(愛民)을 위주로 하여 수습하고 무마하는 뜻이 지성에서 우러나오며 자신을 철저하게 단속하고 거처가 숙연합니다. 체찰사의 명령으로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수축하니 영남 사람들이 모두 공산 산성에 들어가 계획을 펴며, 근일에는 모두 ‘천생 산성(天生山城)을 수축하면 거기에 들어가 웅거할 만하다.’고 하므로 배설(裵楔)로 하여금 이 성을 수축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개 중국 장수들이 늘 ‘이 성을 수축함이 옳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
“우상(右相)이 내려간 지 오래인데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이 경중(京中)에까지 들린다고 하니 사실인가?” |
“반드시 먼저 민심을 수습한 후에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니, 이는 곧 근본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있는 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대개 이 사람은 자봉(自奉)이 몹시 검소하여 국사에 심력을 다하니, 당장의 계책은 부족할 지 모르나, 장래의 계책은 남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
“근래 적의 형세를 영상의 생각에는 어떠하다고 여기는가? 그리고 배신(陪臣)의 발송을 지금 재촉하고 있는데 이 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사리(事理)로 말하면 다시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세(事勢)로 보면 반드시 방법이 있어야 하니, 서서히 우리 형세가 강건해짐을 본 뒤에야 조치할 수 있습니다. 대개 평조신(平調信)이 전에 들어갔을 때에 서로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하니, 이 말이 극히 수상합니다. 이원익이 말하기를 ‘수길(秀吉)의 하는 일은 비록 그의 장수들도 알지 못하니 적의 모책이 지극히 흉패하여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니, 대개 다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다하면 거의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병부(兵部)의 차부(箚付)가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
“내가 보았다. 대개 차부에서 그의 의도를 보니, 석 상서(石尙書)가 자신에게 난처한 일이 있기 때문에 차부를 보낸 것인데 자기의 뜻을 속히 성취하고자 하는 까닭에서이다. 조선이 만약 통사(通使)를 허락하지 않으면 그들이 스스로 갈 것이요, 만약 보내기를 허락하면 함께 갈 것이니, 봉사(封事)를 급급히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의도가 대개 봉사를 성취한 후에는 우리 나라가 스스로 일본과 서로 처리할 뿐이라는 것인데 내 생각에는 그 계책이 극히 우려된다.” |
“주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또 단성(丹城)이 지금 직로(直路)가 되어 백성들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니 청풍(淸風)에 병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이 이번에 지나올 때 청풍 백성들이 도로에서 호소하기를 ‘본읍이 지금 영남의 대로가 되어 능히 지탱할 수 없으니 어진 태수를 보내주기 바란다.’고 하였는데, 신이 서울에 도착하여 들으니, 허진(許震)이 새 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허진은 단양(丹陽)의 원이 되었을 적에도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나이가 노쇠한데 어떻게 벼슬살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 이조(吏曹)의 인사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또 신이 오늘 입궐할 때 한산(韓山)의 인민이 도로에 모여 서서 말하기를 ‘전 군수가 직무에 심력을 다하였는데도 파직되었으니 유임시키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호소하는 자가 몹시 많았는데, 전 군수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
“자세히 알수 없으나 대개 직무를 하리(下吏)에게 맡기며 온갖 차역(差役)이 공평하지 못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다는 등의 일로 논박을 받았습니다.” |
“영상이 남방을 왕래하면서 장수에 적당한 인재를 견문한 적이 없는가?” |
“견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장수는 일을 꾀할 줄은 모르고 한갓 형장(刑杖)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널리 의논하여 인재를 얻는 것을 마치 중국의 인재 취득하는 방법과 같이 하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간혹 말하기를, 소신이 무명(無名)의 인사를 채용한다고 합니다. 소신 역시 이 말이 나온 원인을 알고 있습니다만, 인재를 뽑는 것은 유명 무명을 따질 것 없이 오직 인재를 얻는 데 있을 뿐입니다. 위에서 시폐(時弊)를 강구하고 군하(群下)를 책려하되 조금도 태만히 하실 일이 아닙니다. 대개 지금의 습속을 그대로 따르면서 지금의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일을 성취하기가 극히 어려울 것입니다. 공과(功過)에 대해 상벌하는 일 같은 것은 분명히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조정의 명령이 감사에게 행해지지 않고 감사의 명령이 수령에게 행해지지 않습니다. 소신이 비변사에 있을 때에는 분명히 알지 못하였는데 남하한 뒤에 비로소 상세히 들어 알았습니다. 민심이 대개 이와 같으니 국사를 다시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기강이 확립되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또 지난날의 천변이 극히 놀랍습니다. 천도(天道)가 옳게 운행되어야 끊임없는 공을 이루고 만물이 생성하는 것입니다. 국운의 불행함이 비록 이에 이르렀으나, 다시 나라를 잘 다스려 마치 해가 중천에 있는 것처럼 하시면 만민이 다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데 주상께서 매양 퇴탁(退托)하는 마음을 가지시니 극히 미안합니다. 시대가 이와 같으나 어찌 할 만한 일이 없겠습니까. 주상께서 항상 삼가하고 여러 신하들을 책려하여 퇴탁할 마음을 갖지 마셔야 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전일의 천변이 극히 참혹했다고 합니다. 소신이 미처 올라오지 못하여 동료들과 함께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계사년에 대가(大?)가 해주에 있을 때에도 그런 변괴가 있었으니, 이는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초 장왕(楚莊王)은 천변이 없으면 반드시 ‘하늘이 나를 잊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수향(受香)할 때 쓸 인마(人馬)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일에 대한 응보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시 그 뜻이 있을 것이니, 정원이 아뢴 바가 극히 옳습니다.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이 섬기듯이 하고 없는 이 섬기기를 있는 이 섬기듯이 하여 그 효성이 지극한 곳에서야 예 또한 극진한 것입니다. 지금 이 뇌성벽력에 조종의 신령이 필시 놀라셨을 것이니, 주상께서 한번 친히 전알(展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성상의 마음이 편안하실 것이며, 민정 또한 감동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한(漢)의 소열 황제(昭烈皇帝)가 촉(蜀)에 나라를 세울 때 먼저 종묘를 세워 고황제(高皇帝)를 제사하였고, 《주역(周易)》 췌괘(萃卦)에도 ‘췌도(萃道)는 왕이 종묘를 세우는 데에서 지극해진다.’고 하였으니, 효(孝)는 종묘를 세운 뒤에 지극해지는 것입니다.” |
“영상이 힘을 다해 말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을 어찌 따르겠는가. 내 뜻을 이미 알았을 것인데 지금 왜 다시 말하는가. 내 병세가 점점 위중하여 정신과 기력이 전연 전과 같지 않다. 게다가 통증과 현기증까지 생겼다. 지난날 경연(經筵)이 끝난 뒤 쓰러질 뻔하다가 겨우 안으로 들어갔는데, 계사(啓辭)와 잡문서가 앞에 가득 쌓여 있었다. 나의 일신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어찌 이를 잘 재결할 수 있겠는가. 극히 민망하고 절박하다. 군무(軍務) 등의 일이야 내가 처분해야 하겠지만, 다른 온갖 사무는 세자를 시켜 처결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사세가 편리할 것이다. 이때에 만약 물러나고자 한다면 이는 자극히 잘못이니, 내 생각은 여기에 있지 않다. 나는 평소 손수 약을 다려 먹었는데 지금은 병세가 심중하기 때문에 손수 다리지 못하고 내관(內官)이 돕고 있다. 모든 잡무를 동궁(東宮)에게 물어 재결함은 옛날의 실례도 있다.” |
“주상께서 대강(大綱)을 총괄하시고 때로 동궁으로 하여금 곁에 있으면서 참결(參決)토록 함이 무방하겠습니다.” |
“정원이 병무(兵務) 등만 나에게 품신(稟申)하고 기타 각사(各司) 공사는 세자에게 품하여 단행하는 것이 좋겠다.” |
“내가 일찍부터 이 생각이 있었으나 영상이 없었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름지기 나아가 좌상과 상의하여 조처하라. 이 일은 아주 무방한 것으로 나에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역》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문호(門戶)나 알고 죽고 싶은데, 정신이 이와 같으니 어쩌겠는가.” |
“소신이 매양 아뢰기가 황공하니 이따금 세자로 하여금 곁에 있으면서 재결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자 또한 황민(惶悶)하게 여길 것입니다. 주상께서 몸소 큰 변란을 겪어 머나먼 천리길을 전전하셨으면서도 지금까지 안보를 누리시는 것은 하늘에 계시는 열성(列聖)의 영혼이 도와주시는 음덕을 힘입은 것입니다. 지금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시며 이와 같은 계책을 행하려 하십니까. 신이 삼가 성교(聖敎)를 듣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
“동궁이 밤낮 곁에 있다면 혹시 재결에 참견할 수 있겠지만, 형편상 밤낮 곁에 있을 수 없으니 사세가 몹시 편치 못하다. 만약 문안할 때를 기다려 재결하게 하여도 사세가 역시 불편할 것이다.” |
“소신이 오늘 홀로 입시하였습니다. 밖에 있는 대신들이 또한 무슨 이론(異論)이 있겠습니까.” |
“죄인의 발을 감히 묘문(廟門)에 들여 놓을 수 없으니, 나로 하여금 묘문 밖에서 배사(拜謝)하게 한다면 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고 종묘에 들어가 친제(親祭)하는 것은 결코 감히 할 수 없다. 비록 후세에 죄를 진다 하더라도 나는 감히 이 일을 할 수 없다.” |
“사리를 들어 비유해 말하겠습니다. 부모의 집에 만약 변이 있을 경우 자식이 죄가 있다고 하여 그 부모의 집에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
“부득이 하여 친히 제사한다면 옛날에 섭행(攝行)하는 일이 있으니, 세자 혼자 이를 할 수는 없겠는가. 문묘(文廟) 같은 곳은 세자가 제사를 지낼 수 있으니, 종묘도 제사 지낼 수 있지 않겠는가.” |
“내 외모는 이와 같으나 속에는 병이 실로 심중하다. 내 기품이 본래 잔약함을 누구인들 모르겠는가.” |
“이 달에 침을 맞으셨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
“그렇다. 의원들이 이미 와 있다. 대개 이 통증이 벌써 깊어져 점점 쇠약해지고, 나이 또한 쇠로해 가니, 이미 고질이 된 병이라 다시 차도가 있을 리 없다. 영상은 나를 알 것이다. 내가 본래 심병(心病)이 있지 않은가. 문서가 어지러이 앞에 쌓여 있는데 임금이 한번 재결을 그르치면 그 피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재결하는 것 중에 선결(善決)이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하면 염려스러울 뿐이다. 세자를 책봉한 후에는 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 전에는 모름지기 내 말과 같이 시행함이 좋을 것이다.” |
“궐문 밖에 있었던 벼락의 변괴는 극히 수상합니다. 신이 우둔하여 무슨 일의 응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종묘에 친히 제사지내는 일은 온 나라가 간절히 바라는 일이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주상께서는 비상한 변을 만났을 경우 마땅히 그 허물을 인책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영상이 이른바 기강 정사 절목(紀綱政事節目)도 먼저 하고 뒤에 할 일이 있다. 임금의 지위가 어떠한 지위인데 감히 함부로 처해 있을 수 있겠는가. 구차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일을 정한 후에 다른 일을 할 것이니 이는 곧 대신의 책임이다. 먼저 이 일을 조처한 후에 다른 절목을 처리할 것이다. 만약 이 일을 결정하면 내 일신만 다행할 뿐 아니라 우리 나라 역시 괜찮을 것이다. 비록 중국에서 듣더라도 필시 옳은 일이라고 할 것이다.” |
“이 하교를 들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해서 심병이 생겼다. 물러나 쉬고자 하는 생각이 정리(情理)에 구애됨이 없을 터인데 대신들은 어찌 통량(通量)하지 않는가. 마땅히 할 일이 아님을 억지로 하고 있으니 몹시 가소로운 일이다. 대신이 조치할 일이니 고집하지 말고 좌상과 속히 의논하여 조처하기 바란다.” |
“신자(臣子)로서 차마 듣지 못할 일입니다.” |
“시사와 국세가 위급하니 서로 고집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한 걸음 사이인들 어찌 이 일을 잊겠는가. 나의 이 마음이 이미 원민(怨悶)을 이루었다.” |
“만약 이 하교를 써서 내린다면 신민된 자치고 그 누구인들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황공하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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