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正祖實錄 卽位年(1776년)~哲宗實錄 十四年(1863년)까지 한산에 관련된 기록

천하한량 2007. 3. 21. 20:38

정조 5권 2년 5월 5일 (갑자) 002 / 경기·호서·영남·관동 4도의 진휼을 마치다


경기(京畿)·호서(湖西)·영남(嶺南)·관동(關東) 4도(道)의 진제(賑濟)를 정월부터 시작하여 설시(設施)하다가 이에 이르러 진휼(賑恤)을 마쳤다.【경기의 광주(廣州)·수원(水原)·여주(驪州)·남양(南陽)·죽산(竹山)·이천(利川)·음죽(陰竹) 등의 고을과 화량진(花梁鎭)은 기민(饑民)의 총수가 6만 4천 24구(口)이고 진곡(賑穀)이 4천 2백 25석이었고, 호서(湖西)의 대흥(大興)·한산(韓山)·예산(禮山)·덕산(德山)·당진(唐津)·태안(泰安)·천안(天安)·임천(林川)·서산(瑞山)·은진(恩津)·직산(稷山)·석성(石城)·서천(舒川)·신창(新昌)·해미(海美)·평택(平澤)·온양(溫陽)·면천(沔川)·아산(牙山)·충주(忠州)·서원(西原)·홍주(洪州)·음성(陰城) 등의 고을과 성환(成歡)·율봉(栗峰) 등의 역(驛)과 마량(馬梁)·안흥(安興)·평신(平薪)·서천포(舒川浦)·소근(所斤) 등의 진(鎭)은 기민이 2만 9천 5백 31구이고 진곡이 2만 3천 3백 97석이었고, 영남(嶺南)의 공진(公賑)은 지례(知禮)·비안(比安)·하동(河東)·금산(金山)·개령(開寧)·예천(醴泉)·용궁(龍宮)·안동(安東)·대구(大邱) 등의 고을은 구급(救急)하였고, 상주(尙州)·성주(星州)·인동(仁同)·선산(善山)·경주(慶州)·진주(晉州)·곤양(昆陽)·영천(永川)·삼가(三嘉)·예안(禮安)·거창(居昌)·칠곡(漆谷)·초계(草溪) 등의 고을은 기민 총수가 1만 3천 2백 83구이고 진곡이 9천 5백 27석이었고, 관동(關東)의 인제(麟蹄)·고성(高城) 두 고을은 기민 총수가 7백 84구이고 진곡이 1백 석이었다.】

【원전】 45 집 26 면

【분류】 *구휼(救恤) / *재정-국용(國用)

 

정조 15권 7년 5월 23일 (계축) 002 / 진휼에 대한 논공 행상을 행하다


경기·호서·영남에 진휼청을 설치하였다. 1월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휼을 끝마쳤다.【경기의 관청이 진휼한 곳은, 광주(廣州), 여주(驪州), 파주(坡州), 수원(水原), 부평(富平), 인천(仁川), 남양(南陽), 풍덕(豊德), 통진(通津), 고양(高陽), 안산(安山), 김포(金浦), 교하(交河), 양천(陽川), 금천(衿川), 과천(果川), 음죽(陰竹), 양주(楊州), 장단(長湍), 죽산(竹山), 안성(安城), 진위(振威), 용인(龍仁), 이천(利川), 양성(陽城), 양지(陽智), 포천(抱川) 등의 고을과, 화량(花梁), 덕포(德浦), 덕적(德積), 주문(注文), 장봉(長峰) 등의 진(鎭)이었다. 총 굶주린 백성은 55만 52명이었고, 진휼로 들어간 곡물은 2만 5천 2백 석 영(零)이었다. ○호서의 관청에서 진휼한 곳은 수군 절도영(水軍節度營), 평택(平澤), 아산(牙山), 천안(天安), 직산(稷山), 해미(海美), 신창(新昌), 온양(溫陽), 태안(泰安), 서산(瑞山), 당진(唐津), 면천(沔川), 덕산(德山), 한산(韓山), 임천(林川), 서천(舒川), 석성(石城), 부여(扶餘), 연기(燕岐), 비인(庇仁), 정산(定山), 문의(文義), 결성(結城), 청주(淸州), 홍산(鴻山), 대흥(大興), 홍주(洪州), 예산(禮山), 충주(忠州), 제천(堤川), 공주(公州), 보령(保寧) 등의 고을과 소천(所千), 평신(平薪), 마량(馬梁), 서천포(舒川浦) 등의 진과 성환(成歡), 율봉(栗峰), 연원(連源), 이인(利仁) 등의 역참이었다. 총 굶주린 백성이 40만 6천 8백 89명이었고 진휼에 들어간 곡물은 2만 3천 9백 석 영이었다. 개인이 진휼한 곳은 남포(藍浦), 이성(尼城), 청양(靑陽) 등의 고을이었는데, 굶주린 백성이 총 1만 1천 3백 14명이었고, 진휼에 들어간 곡물은 7백 53석 영이었다. ○영남의 관청에서 진휼한 곳은 양산(梁山), 김해(金海), 함안(咸安), 칠원(漆原), 칠곡(漆谷), 영산(靈山), 밀양(密陽), 군위(軍威), 의령(宜寧), 비안(比安), 인동(仁同), 초계(草溪), 대구(大丘), 성주(星州) 등의 고을과 귀산(龜山), 독용(禿用) 등의 진과 황산역(黃山驛)이었다. 구급(救急)한 곳은 창원(昌原), 현풍(玄風), 창녕(昌寧), 고령(高靈), 영일(迎日), 경산(慶山), 청하(淸河), 청도(淸道), 의성(義城), 의흥(義興), 하양(河陽), 자인(慈仁), 신녕(新寧), 흥해(興海), 진보(眞寶), 장기(長?), 금산(金山), 지례(知禮), 영천(永川) 등의 고을과 포항(浦項), 금도(金島) 등의 진과 자여(自如), 송라(松羅), 성현(省峴), 장수(長水) 등의 역이었다. 굶주린 백성은 총 62만 9천 8백 73명이었고, 진휼에 들어간 곡물은 5만 2천6백 70석 영이었다.】 임금이 하삼도(下三道)에서 진휼을 끝마쳤다고 올린 장계에 대해 진휼청·이조·병조의 당상이 등대(登對)하여 품처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서호수가 아뢰기를,

“진휼의 곡물을 자체에서 준비한 장단 부사 이한오(李漢五), 죽산 부사 이언충(李彦忠), 비인 현감 박형(朴泂)에게는 옷감을 하사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해미 현감 조윤근(曹潤根), 홍주 목사 이겸환(李謙煥), 면천 군수 유언제(兪彦?)에게는 숙마를 하사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용인 현령 김이중(金履中), 부여 현감 윤창(尹昶)에게는 아마를 하사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부유한 백성 중 곡물을 자원해서 바친 이계갑(李繼甲)·나후륜(羅後倫)·이경윤(李景尹)에게는 그에 걸맞는 관작으로 임용해야 하겠으며, 이홍수(李弘遂)·김광재(金光載)에게는 품계를 올려주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지난해 기호(畿湖)에 든 흉년은 거의 최근에 없었던 것이었다. 불쌍한 저 몹시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구렁에 쓰러져 죽게 되었다가 지금 다행히도 진휼을 다 끝마쳐 상처가 겨우 아물었는데, 이는 모두 도백과 고을 원들이 정성을 다하여 구제한 효과이다. 그러나 시행한 실지의 정사와 입은 실지의 혜택이 고을마다 차이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너무나 심하게 형편없게 하지는 않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앞서 조절(操切)한 것은 이미 일정한 격식에 벗어났었는데, 지금에 와서 논공 행상하면서 지나치게 인색하게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해조에서 심리하여 아뢴 것이 비록 매우 정세하고 요약되었으나, 더러 석수(石數)를 보고하지 않았거나 원래 진휼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으로 인해 대부분 논공 행상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너무나 형편없으니, 여주 목사 원후진(元厚鎭)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라. 비인 현감 박형은 진휼의 정사를 가장 잘하였으니, 그의 치적에다 비교하면 그래도 부차적인 것에 속한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별도로 포상을 해야만 다른 사람을 권면할 수 있다. 문벌의 성적(聲績)이 있는 수령도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라. 안산 군수 이성호(李成祜), 고양 군수 임중원(林重遠)은 실지로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는데, 어찌 누락되어서야 되겠는가? 준직(準職)을 제수하라. 청양 현감 이진(李璡), 이성 현감 심희(沈禧)는 비록 원래 진휼한 고을은 아니지만, 자체적으로 준비한 곡물의 수량이 많다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근거할 만한 예를 참고해서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남포 현감 홍상덕(洪相德)은 진휼을 한 정사가 치적보다 월등하여 공과 잘못이 상반(相半)된다고 할 만하니, 논하지 말라. 장단 부사 이한오는 재해지를 조사하고 진휼청을 설치하였으니, 그의 성실함은 실로 듣기 드문 일이다. 해미 현감 조윤근의 노고와 공적은 안산과 고양의 두 군수에 뒤지지 않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품계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의망하라. 용인 현령 김이중은 자체에서 2백 석을 준비하였으니, 승진시켜 서용하라. 부여 현감 윤창은 김이중에 비하면 뒤떨어지니, 반아마(反兒馬)를 하사하라. 엊그제 도성에서 곡물을 발매할 적에나 굶주린 호구를 뽑을 때에 일을 주관한 당상들에게 범의 가죽을 하사하였으니, 지금 달리 할 수는 없다. 경기 감사 이형규(李亨逵), 홍충 감사 김문순(金文淳)에게 각각 중등의 범의 가죽을 하사하라. 지난해에 근실히 하고 태만히 한 것을 평가하겠다는 뜻으로 누차 분부하였으니, 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상을 시행하는 때에 벌을 논하는 정사가 있어야 하겠는데, 조정에서 억지로 구별할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포폄(褒貶)의 달이 바싹 다가왔으니, 그 가운데서 임무를 감당해내지 못한 사람은 혹시라도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그냥 넘기지 말고 한결같이 듣고 본 바의 우열에 따라 상벌의 고하를 삼도록 하되, 의정부에서 이 뜻을 낱낱이 들어 각별히 엄중하게 주의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부유한 백성이 재물을 떼내어 진휼을 해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살렸으니, 그 뜻이 가상하므로 노고도 보답해야 한다. 연전에 호남에서 1천 포의 곡식을 가지고 사적으로 진휼한 세 사람을 올려보내게 하여 실직(實職)을 제수하였던 것은 권장하려는 뜻에서 한 것이었다. 이번 영남과 호서에 진휼을 시행할 때에 한산 이계갑(李繼甲), 밀양 이경윤(李景尹) 등이 사적으로 진휼에 보태준 곡물은 모두 천여 석이 넘었다. 조연(朝筵)에서 실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지만 그냥 놔두고 말았으니, 너무나 실상이 없다. 그리고 경기에 있어서는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부유한 호구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통진 이홍수(李弘遂)가 8백 포를 사적으로 진휼한 것은 한산·밀양의 1천 포와 맞먹을 수 있는데, 품계를 올려 주는 직첩만 지급한다면 또한 권장하는 데에 부족하다. 영남·호서에서 사적으로 진휼한 두 사람과 같이 각기 도백이 올려보내게 한 뒤에 여쭙도록 하라. 서천 진사 나후륜(羅後倫)은 1천여 석의 정제된 곡물로 한 고을의 진휼할 밑천을 전담하였으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일에 손색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고을 수령과도 똑같이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나성추(羅星樞)의 지난 사례가 있으니, 선왕조 계사년의 전교에 따라 실직의 첨지(僉知)에 임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청양 현감 이진(李璡), 이성 현감 심희(沈禧), 기장 현감 서유룡(徐有龍)은 자체에서 진휼의 곡물을 준비하였으니 매우 가상하기는 하나, 사적으로 진휼한 고을에 상을 주자고 청한 것은 사례가 없으니, 그냥 놔두소서.”

하니, 임금이 특별히 이진과 심희는 승진시켜 서용하고 서유룡은 준직으로 조용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45 집 367 면

【분류】 *구휼(救恤) / *인사(人事)

 

정조 17권 8년 5월 22일 (병자) 001 / 호서의 진휼을 마치다


호서에 진휼을 베풀었는데, 2월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진휼을 마쳤다.【공진(公賑)에는 태안(泰安)·평택(平澤)·서산(瑞山)·아산(牙山)·서천(舒川)·직산(稷山)·비인(庇仁)·대흥(大興)·예산(禮山)·한산(韓山)·당진(唐津)·천안(天安)·해미(海美)·온양(溫陽)·보령(保寧)·남포(藍浦)·은진(恩津)·부여(扶餘)·결성(結成)·면천(沔川)·석성(石城)·정산(定山)·공산(公山)·홍주(洪州)·임천(林川)·홍산(鴻山)·서원(西原)·제천(堤川)·연기(燕岐)·문의(文義)·전의(全義)·덕산(德山) 등의 고을과 병영(兵營)·수영(水營)·행영(行營)과 평신(平薪)·소근(所斤)·마량(馬梁)·서천포(舒川浦) 등의 진(鎭)과 성환(成歡)·이인(利仁)·율봉(栗峯) 등의 역(驛)에 총 기민 65만 6천 2백 91구(口)이고, 진곡 4만 9천 6백 38석 영(零)이었다. 사진(私賑)으로, 청양(靑陽)·이성(尼城)·연산(連山)·진잠(鎭岑) 등의 고을의 총 기민 2만 3천 9백 15구, 진곡 1천 7백 46석 영이다.】호서의 도신이 진휼을 마친 장계를 올리니, 비국 당상과 진휼청 당상을 소견하였다.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호서가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모두 성상께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흉작으로 말하면 두 해 동안 연해와 들판이 아주 참혹하였고, 축적된 것으로 말하면 한 도의 공사(公私) 곡식이 모두 비어서 도처의 민정(民情)이 급급 황황(遑遑)하여 그 형세가 장차 서로 이끌고 구렁텅이에 빠질 것 같았는데, 조가(朝家)의 덕의(德意)가 갈수록 간절하고 진지하였으며, 기일 전에 확실하게 강구하여 때에 미쳐서 구제해 겨울부터 봄까지 부족함에 따라서 구휼하고, 세(稅)를 견감하고 적(?)을 정지하였으며, 공(貢)을 면제하고 포(布)를 감하였습니다. 은혜로운 윤음(綸音)이 자주 마음에서 나와 펴시고, 혜택이 양양하게 넘쳐 뼈를 적셨는데도 또 부족하게 여기셨습니다. 곡식을 옮기는 것은 교남(嶠南)에 배를 뛰웠고, 환곡을 보태느라 정세(正稅)를 덜었으며 전곡(錢穀)은 모아서 준 것을 얼마인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궁민을 구휼하라고 신칙하면서는 먼저 조사(朝士)와 장보(章甫)부터 진념하였으며, 별순(別巡)을 보내면서는 내고(內庫)의 진장(珍藏)을 특별히 하사하셨습니다. 질병이 있는 자는 양육하고, 버려진 어린이를 모두 거두워서, 호서의 거의 만 명에 이르는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신음소리를 노래소리로 돌리니, 죽은 자를 살려서 품어 보호하는 인(仁)이 6도(道)에 널리 흡족하여 구제하는 혜택이 마치 한 지방에만 치우친 것 같았습니다. 수령들은 덕의(德意)를 받들어서 심력을 다 쓴 것은 직분 안의 일이나, 애를 썼는데도 보답이 없는 것은 또한 장려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별단에 써서 아뢴 수령 및 원본(原本)에 부기하여 진달한 수령은, 모두 마땅히 등급을 나누어서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민(士民)으로 원납(願納)하여 사사로이 진휼한 자는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 인데도 재물을 의연(義捐)하였으니, 그 격려함은 크고 작은 데 있는 것이 아니나, 그 가운데 1천 포(包)를 납부한 자와 1천 민(緡)을 납부한 자, 두 해에 연달아 마련해 납부한 자는 아주 가상하니, 다과에 따라서 시상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모두 해조로 하여금 예를 상고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복주(覆奏)하여 대흥 군수(大興郡守) 심재진(沈載鎭)은 가자(加資)하고, 서산 현감(瑞山縣監) 이우현(李禹鉉)은 우직(右職)에 조용하고, 사사로이 진휼한 수령 청양 현감(靑陽縣監) 이진(李璡)과 이성 현감(尼城縣監) 심희(沈禧)는 4품 수령을 제수하고, 직산 현감(稷山縣監) 김이규(金履?)는 준직(準職)을 제수하였으며, 원납인은 호남의 예에 의해 수용(收用)하였다.

【원전】 45 집 443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재정(財政) / *금융(金融) / *구휼(救恤)

 

정조 19권 9년 3월 8일 (정사) 001 / 숙장문에서 문양해 등을 친국하다


숙장문(肅章門)에서 나아가서 친국(親鞫)하였다. 문양해(文洋海)에게 묻기를,

“너는 어떤 사람인데 하동(河東)에 가서 살며 하는 일은 무슨 일이고, 사귀는 자는 어떤 자인가? 너의 흉악한 계책과 역적 행위는 이미 죄인들의 공초(供招)에서 드러났다. 그런데 심지어 양형(梁衡)에 대해서는 너의 가까운 친지이기 때문에 또한 감히 숨기지 못할 것이다. 결탁한 도당, 거사할 날짜, 군사를 일으킬 장소, 전재(錢財)는 어디서 가져오고, 무기는 어디에서 나왔으며, 중앙과 지방에 같은 마음으로 포치(布置)한 사람은 또한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시골에 살면서 본래 양반들과 친교를 맺지 않았으며, 일찍이 공주(公州)에 살다가 계묘년에 하동(河東)으로 옮겨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형이 홍낙순(洪樂純)의 아들 홍복영(洪福榮)과 이현(泥峴)에 사는 이율(李?)과 서로 친하여 그들과 하동에서 같이 살려고 하여, 재물을 내어 집을 지었는데 전재(錢財)는 모두 홍복영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거사한다는 한 가지 절목에 대해서는 애초에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군사를 일으킬 절차, 거사할 장소와 네가 친한 서울에 사는 양반들이 이미 드러났는데, 너는 위협에 못이겨 추종한 사람에 불과하니, 그에 대하여 바른대로 고할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향악(香嶽)과 징담(澄潭)은 신이 비록 그들과 서로 친하지만, 그러나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향악의 성은 김가(金哥)이고, 이름은 호(灝)이며, 징담은 성이 고가(高哥)이고 이름은 경명(輕明)이며, 노선생(老先生)은 성이 이가(李哥)이고 이름은 현성(玄晟)이며, 일양자(一陽子)는 성이 모가(茅哥)이고 이름은 문룡(文龍)인데, 모두 지리산 선원(仙園)에 있습니다. 그런데 민간 마을에서 거리가 4,50리가 되는 곳에 거주하는 집 수는 10여 호나 되지만, 외부 사람들은 모두 알지 못합니다. 양형은 이런 사람들과 서로 친해가지고 장래의 운수를 알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정말로 중간에서 왕복하였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운재(雲齋)란 누구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운재란 바로 향악이 살고 있는 집의 이름입니다. 향악의 나이는 지금 63살인데, 홍복영의 서동생(庶同生)과 4촌이 홍복영이 시골로 내려가려는 계획을 저지하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과 양형의 처를 제거하려고 이번에 향산(香山)에 가서 기도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군사를 일으키고 거사한다는 말과 3월 보름경에 대한 일을 물으니, 공초하기를,

“군사를 일으키고 거사한다는 말은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대사(大事)를 3월에 치르고자 한다는 말은 정말로 향약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대사를 도모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누구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홍가(洪哥)와 이가(李哥)가 대사를 도모하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홍가와 이가란 누구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홍가는 바로 홍낙순의 아들 홍복영이고, 이가는 바로 이현에 사는 이율입니다. 요즈음에는 산속의 사람들의 이 일을 행하는 것이 매우 수상하기 때문에 의심스럽고 괴이하여 겁이 났습니다.”

하니, 묻기를,

“의심스럽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그들의 일은 모두 흉악한 계책이고 의리에 어긋나므로 혹시 사람의 목숨을 죽일 것을 의논하기도 하도, 혹은 국가의 안위를 묻기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삼도(三道)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과 거사하는 장소에 대하여 물으니, 공초하기를,

“이른바 삼도에서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바로 삼남(三南)의 해도(海島) 가운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묻기를,

“군사를 일으킬 때의 장수의 성명과 장소가 이미 여러 역적의 공초에서 드러났는데, 어찌 감히 숨기려 하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그런 말을 얻어들은 데 불과하고, 그런 계책에 대해서는 정말로 알지 못합니다. 충청도 태안(泰安)·은진(恩津)·면천(沔川)·서산(瑞山)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였는데, 이가(李哥)·김가(金哥)가 장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김가의 이름은 곧 성(誠) 자라고 하였으나, 위의 이름 한 자는 기억하지 못하며, 이가의 이름은 일성(一誠)인데, 면천 지방에서 산다고 하였으며, 손성인(孫聖隣)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고양(高陽) 시촌(?村)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묻기를,

“네가 서면으로 바친 공초 중에서 이미 도원수(道元帥)의 이름과 부원수(副元帥)의 이름이 있었으니, 서울안에 틀림없이 내응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홍충도(洪忠道)에서는 3월 보름날, 전라도(全羅道)에서는 4월 28일, 경상도(慶尙道)에서는 5월 보름날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장수와 주모자 및 군사를 일으키는 절차에 대해 물으니 공초하기를,

“향약에게서 들으니, 군사 4만여 명을 얻어 가지고 거사를 한다고 하였으며, 도원수는 통천(通川)의 유가(劉哥)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홍충도에도 도원수가 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홍충도 청주(淸州)에 사는 한가(韓哥)가 주모자라고 합니다.”

하였다. 한가의 이름을 물으니, 공초하기를,

“바로 한수채(韓壽採)인데, 청주 사창(淸州社倉)에 살며, 나이는 지금 30여 살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군사를 일으킬 때의 장수에 대해 물으니, 공초하기를,

“청주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의 장수는 바로 강원도 통천(通川)의 유가인데, 한가는 자기 스스로 대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삼도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에 대하여 물으니, 공초하기를,

“홍충도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자는 바로 홍주(洪州) 흥령(興嶺)에 살고있는 자인데 그의 이름은 연(淵)이고, 전라도의 대장은 바로 이인형(李寅瀅)인데 옥구(沃溝)에 살고 있으며, 그가 군사를 일으킬 날짜는 5월 그믐날 이라고 하며, 경상도의 대장은 고경현(高擎懸)인데 상주(尙州)에 살고 있으며 호남에서 군사를 일으킬 사람들과 공모하여 4월 사이에 동시에 거사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서울에서도 또한 내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서울에서는 조영소(趙榮素)가 모의하였는데, 팔각정(八角亭)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조영소는 이율과 서로 친한가?”

하니, 공초하기를,

“서로 친하다고 합니다. 문양해의 서면으로 바친 공초에서 이르기를, 주형채(朱炯采)는 영흥(永興)에 사는데, 향악에게 준 서찰에서 흉악한 말을 써서 왕복 하였으며 조상호(趙上湖)·유덕휘(柳德輝)는 안변(安邊)에 살며 유경일(劉景一)은 통천에 사는데 대도독(大都督)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권생만(權生晩)은 고성(高城) 칠송정(七松亭)에 사는데 대도독이라고 하며, 오성겸(吳聖謙)·이춘홍(李春紅)은 광양(光陽)사는데 마땅한 수창(首唱)한 공신으로 되며, 재물과 양식을 많이 모아가지고 후일의 수요에 대비 한다고 합니다.

조수정(趙秀精)과 조수인(趙秀仁)은 태안(泰安)에 사는데,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천하게 살지만, 후일에는 수창한 자가 되며, 가명정(賈命正)은 태안에 사는데, 학문과 계략에 매우 밝아서 유장(儒將)이 될 만 합니다. 조두진(趙斗鎭)·서홍기(徐弘基)·한제만(韓際滿)은 당진(唐津)에 살고, 허계(許啓)는 면천(沔川)에 살며, 이인치(李仁治)는 대흥(大興)에 살고, 권우(權瑀)는 공산(公山) 효포(孝浦)에 살며, 진규(眞圭)는 공산(公山) 상대장리(上大庄里)에 사는데, 향악과 더불어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서로 점검하고 내응하였으며, 정탁(鄭濯)은 한산(韓山)에 사는데 그 형제 세 사람의 집이 부자라고 합니다. 홍정유(洪正裕)는 공산(公山) 유구역(維鳩驛)에 사는데, 진사로서 자못 권력이 있으며 이형윤(李亨允)은 봉산(鳳山)에 살고, 정몽로(鄭夢老)는 황주(黃州)에 사는데 해서(海西) 지방의 괴수로서, 큰 두루마리에 직함이 올라 있으며, 박필현(朴必賢)은 곽산(郭山)에 살고 있으며, 진사 정래정(鄭來鼎)과 정래익(鄭來益)은 몇해 전에 서소문(西小門) 밖에 살았는데, 작년 2월 사이에 향악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조정을 비방하기를, ‘내가 비록 재능이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이나 주공(朱公)의 부하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율은 이현(泥峴)에 사는 진사인데 홍익영에게 준 편지에서 이르기를, ‘이날을 보지 아니 할 때가 언제인가? 나의 뜻을 온 세상에 펴는 것을 보지 못하면, 한탄한들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중 벽규(碧奎)는 계룡산 갑사(岬寺) 적멸암(寂滅庵) 후이방(後珥房)에 살고 있는데, 대장리(大庄里) 진규의 집에서 서찰을 주형채의 집과 왕복하며 중 혜준(慧俊)은 하동 영원사(靈源寺)에 살면서, 서남쪽에서 봉안(奉安)까지 서찰을 왕복하면서 전하여 주었는데, 조수정(趙秀精) 형제의 집에 전하는 것이 더욱 회수가 잦았습니다. 거사(居士) 혜정(慧淨)은 안벽(安邊) 석왕사(釋王寺)에 살면서 향악의 서찰을 받아서 통천의 유경일(柳景一)과 고성의 권생만(權生晩)의 집에 종종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원전】 45 집 506 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정조 23권 11년 5월 23일 (기축) 001 / 경기·영남·호남·호서·관동·관북 여섯 도의 진휼을 마치다


경기(京畿)·영남(嶺南)·호남(湖南)·호서(湖西)·관동(關東)·관북(關北) 여섯 도(道)의 설진(說賑)을 정월(正月)부터 베풀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휼을 마쳤다.【경기. 광주(廣州)·수원(水原)·통진(通津)·풍덕(豊德)·인천(仁川)·부평(富平)·김포(金浦)·고양(高陽)·교하(交河)·과천(果川) 등의 고을과 덕포(德浦)·덕적(德積) 등의 진(鎭)의 총 기민(饑民)은 17만 8천 9백 39구(口)이고, 진곡(賑穀)은 1만 3천 4백 44석(石) 영(零)이며, 강화부(江華府)의 사진(私賑)은 총 기민이 4천 2백 32구이고, 진곡은 1백 86석 영이며,전(錢)이 6백 24냥 영이다. 영남. 남해(南海)·웅천(熊川)·거제(巨濟)·진해(鎭海)·양산(梁山)·청하(淸河)·칠원(漆原)·장기(長?)·울산(蔚山)·함안(咸安)·김해(金海)·동래(東萊)·연일(延日)·기장(機張)·하동(河東)·곤양(昆陽)·고성(固城)·사천(泗川)·초계(草溪)·밀양(密陽)·진주(晉州)·거창(居昌)·지례(知禮)·단성(丹城)·함창(咸昌)·함양(咸陽)·언양(彦陽)·산청(山淸)·경주(慶州)·흥해(興海)·영해(寧海)·영덕(盈德)·의령(宜寧)·합천(陜川)·청도(淸道)·하양(河陽)·경산(慶山)·삼가(三嘉)·현풍(玄風)·대구(大丘)·인동(仁同)·영산(靈山)·영천(榮川)·예천(醴泉)·성주(星州)·상주(尙州)·창녕(昌寧)·봉화(奉化)·선산(善山)·안동(安東)·고령(高靈)·금산(金山)·안의(安義) 등의 고을과 좌병영(左兵營)·우병영(右兵營)·좌수영(左水營)의 우후(虞候)·귀산(龜山)·사량(蛇梁)·당포(唐浦)·삼천포(三千浦)·남촌(南村)·구소(舊所)·비적량(非赤梁)·미조항(彌助項)·평산(平山)·가덕(加德)·제포(薺浦)·안골(安骨)·천성(天城)·신문(新門)·청천(晴川)·부산(釜山)·다대(多大)·개운(開雲)·두모(豆毛)·서평(西平)·포이(包伊)·서생(西生)·지세(知世)·옥포(玉浦)·영등(永登)·조라(助羅)·가배(加背)·율포(栗浦)·장목(長木)·금도(金島)·독용(禿用) 등의 진(鎭)과 자여(自如)·소촌(召村)·송라(松羅)·황산(黃山)·사근(沙斤)·성현(省峴) 등의 역(驛), 진주(晉州)·울산(蔚山) 등의 목장(牧場)의 총 기민이 1백 8만 8천 2백 87구이고, 진곡은 8만 3천 5백 31석 영이다. 호남. 나주(羅州)·남원(南原)·순천(順天)·장흥(長興)·보성(寶城)·영광(靈光)·영암(靈巖)·진도(珍島)·낙안(樂安)·만경(萬頃)·광양(光陽)·강진(康津)·부안(扶安)·무장(茂長)·무안(務安)·흥덕(興德)·고창(高敞)·동복(同福)·진안(鎭安)·장수(長水)·운봉(雲峰)·흥양(興陽)·구례(求禮)·해남(海南)·함평(咸平) 등의 고을과 병영(兵營)·좌수영(左水營)·우수영(右水營)·격포(格浦)·방답(防踏)·사도(蛇渡)·법성(法聖)·임자도(荏子島)·가리포(加里浦)·고금도(古今島)·고군산(古群山)·위도(蝟島)·임치(臨淄)·여도(呂島)·발포(鉢浦)·녹도(鹿島)·금갑도(金甲島)·남도(南桃)·지도(智島)·다경포(多慶浦)·목포(木浦)·마도(馬島)·신지도(薪智島)·어란이진(於蘭梨津)·검모포(黔毛浦)·회령포(會寧浦)·고돌산(古突山)·흑산도(黑山島)·섬진(蟾津) 등의 진(鎭)과 나주·진도·흥양·순천 등의 목장, 벽사역(碧沙驛)의 총 기민 1백 55만 6천 4백 39구이고, 진곡은 8만 6천 1백 71석 영이며, 사진(私賑)은 전주(全州)·광주(光州)·순창(淳昌)·금산(錦山)·창평(昌平)·옥과(玉果)·곡성(谷城)·화순(和順)·임실(任實)·용담(龍潭) 등의 고을의 총 기민이 27만 5천 4백 38구이고, 진곡은 1만 6천 9백석 영이다. 호서. 태안(泰安)·온양(溫陽)·평택(平澤)·아산(牙山)·직산(稷山)·석성(石城)·홍산(鴻山)·정산(定山)·부여(扶餘)·음성(陰城)·신창(新昌)·비인(庇人)·청양(靑陽)·공주(公州)·서천(舒川)·보령(保寧)·홍주(洪州)·결성(結城)·천안(天安)·전의(全義)·예산(禮山)·한산(韓山)·남포(藍浦) 등의 고을과 수영(水營)· 행영(行營)·마량(馬梁)·서천포(舒川浦)·소근(所斤) 등의 진(鎭), 성환(成歡)·이인(利仁) 등의 역(驛)의 총기민이 27만 9천 8백 77구이고, 진곡이 1만 7천 75석 영이며, 사진(私賑)은 임천(林川)·은진(恩津)·연산(連山)·진잠(鎭岑) 등의 고을과 금정역(金井驛)의 총 기민이 3만 2천 6백 57구이고, 진곡은 2천 3백 38석 영이다. 관동. 간성(杆城)·고성(高城)·울진(蔚珍)·평해(平海)·흡곡(?谷)·통천(通川) 등의 고을의 총 기민이 1천 6백 3구이고, 진곡은 9백 94석 영이다. 관북. 안변(安邊)·북청(北靑)·갑산(甲山)·삼수(三水)·이원(利原)·단천(端川)·길주(吉州)·명천(明川)·경성(鏡城)·부령(富寧)·무산(茂山)·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 등의 고을의 총 기민이 9만 5백 31구이고, 진곡은 2천 4백 14석 영이다.】

여러 도(道)의 도신(道臣)이 진휼을 마쳤다고 아뢰니, 차등을 두어 시상하고, 경기의 통진 부사(通津府使) 황인영(黃仁煐)과 파주 목사(坡州牧師) 홍인묵(洪仁默)은 계제직(階梯職)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고, 김포 군수(金浦郡守) 유한위(兪漢緯)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고, 통진 전 군수(通津前郡守) 이홍수(李弘遂)는 가자(加資)한 후 실직(實職)에 조용하고, 여주 목사(驪州牧使) 이문원(李文源)에게는 녹비[鹿皮] 한 령(令)을 사급(賜給)하고,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소(李素)와 부평 부사(富平府使) 윤기동(尹耆東)에게는 아마(兒馬)를 사급하며, 이천 부사(利川府使) 심규(沈?)와 음죽 현감(陰竹縣監) 최재수(崔在修)에게는 상현궁(上弦弓)을 사급하고, 원납인(願納人) 이병후(李秉?) 등에게는 제직(除職)하거나 혹은 상가(賞加)·체가[帖加]하였다. 영남의 장기 현감(長?縣監) 유환보(柳煥輔)는 준직을 제수하고, 함양 부사(咸陽府使) 이득준(李得駿)은 계제직(階梯職)으로 승천(陞遷)하고, 의령 현감(宜寧縣監) 홍선양(洪善養)은 준직에 조용(調用)하고, 경주 부윤(慶州府尹) 김이용(金履容)에게는 표리(表裏)를 사급하고,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이계(金履?)에게는 아마(兒馬)를 사급하고, 울산 부사(蔚山府使) 심공예(沈公藝)와 거제 부사(巨濟府使) 김혁(金爀)은 승서(陞敍)하고, 원납인 황득린(黃得麟) 등은 제직하거나 혹은 체가하였다. 호남 병사(湖南兵使) 이한오(李漢五)·전수사(前水使) 허임(許任)·우수사(右水使) 신우문(申遇文)에게는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내리고, 해남 현감(海南縣監) 윤수묵(尹守默)은 가자하고, 낙안 군수(樂安郡守) 심묵지(沈默之)·광양 현감(光陽縣監) 허명(許溟)·장흥 부사(長興府使) 송재서(宋載瑞)·함평 현감(咸平縣監) 송관휴(宋觀休) 가운데 이미 준직(準職)한 자는 영장(營將)·중군(中軍) 가운데서 승천하고 준직하지 않은 자는 도내(道內)의 부사나 군수에 차의(差擬)한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민정환(閔廷桓)·흥덕 현감(興德縣監) 장집소(張集紹)·고창 현감(高敞縣監) 박문경(朴文絅)·임실 현감(任實縣監) 서유풍(徐有豊)은 준직에 조용하고, 순창 군수(淳昌郡守) 홍수영(洪守榮)·곡성 현감(谷城縣監) 임하철(林夏喆)·화순 현감(和順縣監) 임성운(林性運)은 승직하여 조용하고, 원납인 장익복(張益福) 등은 제직하거나 혹은 상가한다. 호서(湖西)의 임천 전 군수(林川前郡守) 김재구(金載久)·태안 현감(泰安縣監) 박형(朴泂)에게는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 연산 현감(連山縣監) 김사석(金思?)·진잠 현감(鎭岑縣監) 윤귀석(尹龜錫)은 승품(陞品)하여 조용하였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조명준(曹命峻)에게는 숙마(熟馬)를 사급하고, 원납인은 체가하였다. 관동(關東)의 울진 현령(蔚珍縣令) 홍치범(洪致範)은 계제직(階梯職)에 조용하고, 평해 전 군수(平海前郡守) 정은성(鄭殷誠)·통천 군수(通川郡守) 김동진(金東鎭)은 승서(陞敍)하고, 고성 군수(高城郡守) 이최원(李最源)은 아마(兒馬)를 사급하고, 평해 군수(平海郡守) 김이빈(金履彬)·흡곡 현령(?谷縣令) 장한철(張漢喆)은 꾸미지 않은 활을 사급하고, 원납인 등에게는 체가하였다. 또 명하기를,

“이해 오부(五部)에서 발매(發賣)할 때의 한성부의 당상관과 낭관·부관(部官)과 선혜청의 당상관·낭관에게 시상하라. 판윤(判尹) 정창순(鄭昌順)에게는 녹비[鹿皮]를 내리고, 선혜청 제조 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에게는 상현궁(上弦弓)을 내리고, 진휼청 낭청 이창회(李昌會)·민백준(閔百準)은 승품하여 조용하고, 남부 도사(南部都事) 박영원(朴英源)·북부 봉사(北部奉事) 임호상(任好常)은 수령에 조용하고, 원납인은 변장(邊將)을 제수하라.”

하였다.【오부(五部)의 발매는 총 2만 6천 9백 66호(戶)에 쌀 4천 8백 91석(石) 영(零)이었다.】

【원전】 45 집 653 면

【분류】 *구휼(救恤) /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

 

정조 34권 16년 윤4월 4일 (임신) 005 / 삼남 제민창에 소속된 각 읍의 수송 문제로 각도 감사에게 상황을 문의하다


이에 앞서 삼남(三南) 제민창(濟民倉)에 소속된 각읍에서 수송하는 폐단 때문에 세 도의 감사에게 이속(移屬)시키는 것이 편리한지 불편한지에 대하여 문의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호서(湖西)와 영남의 감사가 장계로, 호서에서는 비인(庇仁)과 서천(舒川)은 그대로 본창(本倉)에 두고 한산(韓山)과 남포(藍浦)는 각각 본읍(本邑)의 해창(海倉)에 두며 홍산(鴻山)은 곡식이 적고 해창이 없으니 나누어 이웃 읍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였고, 영남에서는 사천(泗川)과 곤양(昆陽)은 본읍(本邑)에 받아 두고 진주(晉州)와 고성(固城)은 별도로 해창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원전】 46 집 294 면

【분류】 *재정(財政) / *교통(交通)

 

정조 37권 17년 5월 24일 (을묘) 001 / 호서의 진휼 정사가 끝나자 여러 관리에게 차등있게 가자하다


호서에 진휼을 베풀었는데,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이르러 진휼의 일을 끝마쳤다.【공진으로는 수군 절도영 관할인 온양(溫陽)·석성(石城)·직산(稷山)·홍산(鴻山)·연기(燕岐)·평택(平澤)·아산(牙山)·신창(新昌)·은진(恩津)·청산(靑山)·부여(扶餘)·정산(定山)·보령(保寧)·비인(庇仁)·남포(藍浦) 등의 고을과, 마량(馬梁)·서천(舒川) 등의 진과, 성환역(成歡驛)의 기민 총 20만 1천 4백 97명에 진휼곡은 1만 5천 9백 84석 남짓이었고, 사진으로는 공주(公州)·충주(忠州)·청주(淸州)·홍주(洪州)·청풍(淸風)·한산(韓山)·면천(沔川)·서산(瑞山)·직산(稷山)·옥천(沃川)·대흥(大興)·단양(丹陽)·임천(林川)·천안(天安)·서천(舒川)·예산(禮山)·황간(黃澗)·이성(尼城)·제천(堤川)·연풍(延豊)·영춘(永春)·문의(文義)·태안(泰安)·음성(陰城)·청안(淸安)·회덕(懷德)·진잠(鎭岑)·연산(連山)·청양(靑陽)·진천(鎭川)·결성(結城)·전의(全義)·보은(報恩)·회인(懷仁)·영동(永同)·목천(木川)·덕산(德山)·해미(海美)·당진(唐津) 등의 고을과, 안흥(安興)·소근(所斤)·평신(平薪) 등의 진과, 연원(連原)·율봉(栗峯)·금정(金井)·이인(利仁) 등 역의 기민 총 25만 5천 8백 51명에 진휼곡은 2만 9천 6백 18석 남짓이었다.】

이조·병조가 도신 이형원(李亨元)의 장계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연기 현감 황운조(黃運祚)는 도신이 치적과 진휼 정사에서 가장 우수하게 드러났다 하여 표창의 맨 머리에 놓았으니 표리를 내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정산 현감 정량채(鄭亮采)는 도신이 비록 차등은 두었지만 스스로 곡식 5백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벼슬을 올려주어야 할 것이며, 청산 현감 임정주(任靖周), 은진 현감 윤행진(尹行進), 남포 현감 조윤수(曺允遂)도 모두 치적이 있으니 아마(兒馬)를 내리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사로이 진휼한 고을로서 서천 군수 이적(李迪)은 스스로 곡식 1천 1백여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숙마(熟馬)를 내려야 할 것이고, 공주 판관 이종휘(李種徽)는 스스로 곡식 1천 60여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벼슬을 올려주어야 할 것이며, 예산 현감 유전(柳?)은 스스로 곡식 8백 99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아마를 내려야 할 것이고, 가선 대부 김종철(金宗喆)은 벼 1천 석을 자원 납부하였으니 의당 실직을 제수해야 할 것이며, 3백 석 이하를 자원 납부한 절충 장군 조명서(趙明瑞) 등 10인에게는 의당 체가(帖加)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황운조는 4품 벼슬에 등용하고, 임정주는 책을 끼고 다니던 시절에 그의 공부가 있음을 익히 알았었으니 의당 치적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계방(桂房)의 옛 요속들을 모두 관례를 깨고 등용하여 옛 정의를 기념하였는데 이 사람만 유독 빠졌으니 특별히 한 자급을 가자하라. 그리고 조윤수는 벼슬을 올려주라.”

하였다.

【원전】 46 집 390 면

【분류】 *구휼(救恤) / *인사(人事) / *왕실(王室)

 

정조 41권 18년 10월 11일 (을축) 003 / 충청도 수군 절도사 유심원이 태풍으로 1백 16명이 익사했다고 보고하다


충청도 수군 절도사 유심원(柳心源)이 장계로 아뢰기를,

“8월의 대풍으로 비인(庇仁)·보령(保寧)·서천(舒川)·결성(結城)·남포(藍浦)·홍천(洪川)·태안(泰安)·대흥(大興)·한산(韓山)·서산(瑞山) 등의 10개 고을에서 빠져 죽은 사람이 1백 16명이나 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이처럼 많다니 나도 모르게 놀랍고 측은하다. 호남에도 이미 구휼하는 은전을 시행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그런데 지금에야 비로소 장계로 아뢰니 태만하고 소홀함이 심하다. 그 당시의 수신을 해부로 하여금 나문하여 처결하게 하라. 전라도 관찰사는 장계로 보고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충청도 관찰사는 아직도 한 마디도 없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원전】 46 집 513 면

【분류】 *과학(科學)

 

정조 41권 18년 11월 4일 (무자) 003 / 호서 위유사 홍대협을 불러 보고 봉서를 내리다


호서 위유사 홍대협(洪大協)을 소견하였다. 이어서 봉서를 내려 이르기를,

“호서 일대는 천 리나 되는 경기 지역과 접하고 있으므로 내 크게 근심하는 바이다. 비록 풍년이 든 해라도 그 돌보아주는 바가 다른 지역보다 배나 되는데 하물며 근래에 드문 올해 같은 흉년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가을부터 겨울까지 내가 국사에 부지런히 힘쓰는 가운데서도 호서 지역을 가장 근심하며 잊지 못해 왔다.

대개 가까운 이들이 능히 편안한 뒤에야 멀리 있는 이들이 감싸주는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가까이 있는 자가 기뻐한 뒤에야 멀리 있는 자가 그리워하는 법이다. 만일 견감해주고 돌보아주는 정사와 구제해주는 방도가 도리어 양남만 못하다면 이는 가까운 이를 버리고 멀리 있는 이를 취하며 소원한 이를 귀히 여기고 가까운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상례에서 벗어난 특별한 거조를 두어 지차의 고을에까지 아울러 미치게 한 것이다.

우심한 곳은 태안(泰安)·석성(石城)·평택(平澤)·연기(燕岐)·서산(瑞山)·서천(舒川)·직산(稷山)·신창(新昌)·은진(恩津)·이성(尼城)·영동(永同)·당진(唐津)·면천(沔川)·한산(韓山)·천안(天安)·아산(牙山)·예산(禮山)·남포(藍浦)·해미(海美) 등 20개 고을이고, 지차는 부여(夫餘)·임천(林川)·홍산(鴻山)·보령(保寧)·결성(結城)·덕산(德山)·온양(溫陽)·청주(淸州)·음성(陰城)·진잠(鎭岑)·회덕(懷德)·청풍(淸風)·청안(淸安)·영춘(永春)· 연산(連山)·청산(靑山)·보은(報恩)·대흥(大興)·홍주(洪州)·연풍(延豊)·문의(文義)·목천(木川)·옥천(沃川)·충주(忠州)·평신(平薪) 등 24개 고을과 진(鎭) 한 곳이다.

진헌하는 봉물을 정지할 것과 공부(貢賦)를 너그럽게 면제해줄 것에 대해서는 유시하는 글 아래에 기록해 두었다. 너는 모쪼록 정성과 힘을 다해 사민과 부로들에게 상세히 효유하여서 그들이 사는 곳에서 안정되게 하여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었다는 탄식이 없게 하라. 마땅히 행해야 할 조건은 아래와 같다.

1. 정지하는 것, 견감하는 것, 대납하는 것의 세 가지 조목을 섞어놓기는 쉽지만 분배하기는 어렵다. 너는 모쪼록 질서있게 구별하여 마을마다 두루 알려서 군민들로 하여금 환히 그 나눈 수량을 알게 해서 향리들이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없게 하라. 지차의 고을까지 아울러 거행하는 것은 곧 양남에는 베풀지 않았던 은혜인데, 대개 호서 지역은 그 명목은 비록 지차라도 실제는 우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틀에 한끼 먹는 자와 하루에 한끼 먹는 자가 한 곳에 앉아 있을 경우, 이틀에 한끼 먹는 자에게는 사람들이 진수성찬으로 먹여주면서 날마다 한끼 먹는 자에게는 아무도 먹여주는 이가 없다면 어찌 은혜가 고르지 못하다는 탄식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차라리 지나치게 베푼 데서 잘못할지언정 소홀한 쪽을 따르지 않고자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모쪼록 이 뜻을 잘 알아서 마을마다 위유하도록 하라.

1. 위유사의 행차는 비록 안렴사와는 다르나 경내에 들어가서 풍속을 묻고 말을 듣고 치적(治績)을 살펴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중 크게 불법을 저지르거나 가장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즉시 장계로 보고하여 논죄해서 여러 고을들이 소문만 듣고도 인끈을 풀러놓는 기풍을 만들도록 하라.

1. 진헌하는 여러 가지 물품을 오히려 면제해주고 감해주었는데도 만약 군영과 읍이 복정(卜定)한 것으로 인해 아전들이 가렴주구하여 옛날처럼 어민과 농민들에게 폐단을 끼친다면 ‘도에 감사가 있고 읍에 수령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각별히 조사해서 나타나는 대로 보고하라.

1. 호(戶)를 뽑을 적에 빈부가 서로 뒤섞여서 풍족한 이와 잔약한 이를 가려내기가 어려웠으므로 더러는 세력가로서 당연히 빠져야 할 자가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빈궁하여 당연히 들어가야 할 자가 빠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전혀 딴 세상에 사는 듯하고, 앞뒤의 이웃마을이 판연히 다른 하늘 아래 사는 듯하다면 특별한 은혜 중에서도 특별한 은혜를 베풀 데가 없을 것이다. 관문을 내기도 하고 면유하기도 하여서 예사롭게 엄칙하지 말고 기어이 실제적인 효과가 있게 하라.

1. 오늘날의 급선무는 도둑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 수령에게 맡겨서 각자 자기 경내를 깨끗하게 하라. 이미 묘당의 행회가 있었는데도 만일 혹 부지런히 힘쓰지 않는 자가 있으면 영장 이하는 잡아다가 곤장으로 다스리고 병사는 장계로 보고하여 논죄하도록 하라. 태만하고 임무를 소홀히 하는 수령은 작은 경우는 대신 다스리고 큰 경우는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1. 요판(料販)을 거듭 금하고, 환곡의 진휼 대상을 정밀하게 뽑도록 하라. 억울한 일을 풀지 못한 것과 아직 정표하지 않은 효자나 열녀, 군정(軍政)의 억울한 징발, 지나치게 받아들이는 둔세(屯稅) 등에 관해서 일일이 탐문해 살펴서 큰 것을 장계로 보고하고 작은 일은 조정에 돌아온 후에 아뢰도록 하라.

1. 당하관의 수령으로서 높은 수레를 타는 것과 길가에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문제에 대해 과연 법을 어긴다는 탄식이 없는지 일체 자세히 살피도록 하라.

1. 사전(祀典)의 중요함은 서울이나 지방이나 다 마찬가지이니 제향에 치성을 드리고 제단을 깨끗이 청소하는지에 대해서 모두 살피도록 하라.

1. 안면도(安眠島)의 바람에 꺾여진 소나무는 이미 백성들이 발매하는 것을 허락하여 진휼할 밑천에 보태도록 하였으니, 영과 읍에 직접 신칙하여 실제적인 효과가 있게 하라.

1. 우심한 읍은 궁벽한 먼 마을까지 일일이 다녀보고, 지차 읍은 연로가 아닌 곳에는 비장과 편장을 나누어 보내 위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6 집 520 면

【분류】 *왕실(王室) / *재정(財政) / *사법(司法) / *구휼(救恤)

 

정조 42권 19년 5월 21일 (신미) 002 / 경모궁을 참배하다. 호남과 호서에서의 진휼을 끝마치다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호남에서 진휼(賑恤)을 행하였는데 1월부터 시작해서 이 때에 이르러 끝마쳤다.【공곡(公穀)으로 구제한 지역은 전주(全州)·나주(羅州)·광주(光州)·남원(南原)·장흥(長興)·순천(順天)·여산(礪山)·고부(古阜)·영암(靈巖)·영광(靈光)·진도(珍島)·김제(金堤)·임피(臨陂)·만경(萬頃)·용안(龍安)·부안(扶安)·함평(咸平)·강진(康津)·옥구(沃溝)·흥덕(興德)·정읍(井邑)·고창(高敞)·무장(茂長)·무안(務安)·곡성(谷城)·화순(和順)·흥양(興陽)·해남(海南) 등의 고을과 병영(兵營)·좌수영(左水營)·우수영(右水營)과 벽사(碧沙)·경양(景陽) 등 역(驛)과 법성(法聖)·사도(蛇渡)·임치(臨淄)·군산(群山)·가리포(加里浦)·방답(防踏)·고금도(古今島)·고군산(古群山)·임자도(荏子島)·위도(蝟島)·회령포(會寧浦)·여도(呂島)·마도(馬島)·녹도(鹿島)·발포(鉢浦)·검모포(黔毛浦)·다경포(多慶浦)·목포(木浦)·어란(於蘭)·남도(南桃)·금갑도(金甲島)·이진(梨津)·지도(智島)·신지도(薪智島)·격포(格浦)·고돌산(古突山)·흑산도(黑山島)·위봉산성(威鳳山城) 등 진(鎭)과 나주(羅州)의 감목(監牧)과 순천(順天)·진도(珍島)·흥양(興陽) 등의 목관(牧官) 등으로 기민(飢民)이 총 2백 20만 7백 52구(口)였고 진휼한 곡식은 10만 9천 9백 69석(石)이었다. 사곡(私穀)으로 진휼한 지역은 담양(潭陽)·순창(淳昌)·보성(寶城)·함열(咸悅)·남평(南平)·태인(泰仁)·순천(順天) 등 고을로 기민은 총 6만 1천 6백 64구였으며 나누어 진휼한 각종 곡물이 도합 3천 5백 47석 6두(斗) 6승(升) 5합(合)이었다. 응급 구제한 지역은 익산(益山)·창평(昌平)·금구(金溝)·광양(光陽)·옥과(玉果)·임실(任實) 등 고을과 삼례(三禮)·오수(獒樹) 등 역으로 기민은 총 4만 9백 95구였으며 진휼한 곡식은 2천 19석이었다.】

호서(湖西)에서 진휼을 행하였는데 1월부터 시작해서 이 때에 이르러 끝마쳤다.【공곡으로 진휼한 지역은 수영(水營)·태안(泰安)·석성(石城)·평택(平澤)·연기(燕岐)·서산(瑞山)·비인(庇仁)·서천(舒川)·직산(稷山)·신창(新昌)·은진(恩津)·노성(魯城)·영동(永同)·당진(唐津)·면천(沔川)·한산(韓山)·천안(天安)·아산(牙山)·예산(禮山)·남포(藍浦)·해미(海美)·부여(扶餘)·임천(林川)·홍산(鴻山)·보령(保寧)·결성(結城)·덕산(德山)·청주(淸州)·회덕(懷德)·청풍(靑風)·대흥(大興)·홍주(洪州)·목천(木川) 등 고을과 안흥(安興)·소근(所斤)·마량(馬梁)·서천포(舒川浦) 등 진과 성환(成歡)·율봉(栗峯) 등 역으로 기민이 총 62만 6천 4백 70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4만 5천 3백 40석이었다. 사곡으로 진휼한 지역은 연산(連山)·청산(淸山)·연풍(延豊) 등 고을과 병영(兵營)으로 기민이 총 2만 1천 9백 95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1천 4백 89석 6두 8승 1합이었다. 응급 구제한 지역은 충주(忠州)·공주(公州)·단양(丹陽)·온양(溫陽)·괴산(槐山)·문의(文義)·음성(陰城)·진잠(鎭岑)·청안(淸安)·영춘(永春)·청양(靑陽)·정산(定山)·전의(全義)·진천(鎭川)·회인(懷仁)·황간(黃澗)·제천(堤川) 등 고을과 평신진(平薪鎭)과 이인(利仁)·금정(金井)·연원(連原) 등 역으로 기민이 총 8만 4백 84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4천 9백 77석이었다.】

【원전】 46 집 574 면

【분류】 *왕실(王室) / *구휼(救恤)

 

정조 43권 19년 12월 12일 (기축) 001 / 전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을 한산군에 정배하고, 이조원의 고신을 빼앗다


전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을 한산군(韓山郡)에 정배(定配)하고 이조원(李祖源)의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본도(本道)의 곡물을 내다 팔 때 예전의 잘못을 다시 저지르며 기록을 변조한 죄 때문이었다.

【원전】 46 집 619 면

【분류】 *사법(司法)

 

정조 44권 20년 4월 27일 (임인) 001 / 부름에 응하지 않는 승지 신기를 한산 군수로 삼다


승지 신기(申耆)를 특별히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삼았다가 곧이어 다시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삼았다. 이는 신기가 사정을 이유로 부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전】 46 집 648 면

【분류】 *인사(人事)

 

정조 48권 22년 5월 12일 (을해) 006 / 호서에 진휼을 시행하다


호서에도 진휼을 시행했는데, 정월부터 진휼하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마쳤다.【은진(恩津)·한산(韓山)·임천(林川)·서천(舒川)·석성(石城)·노성(魯城)·부여(扶餘)·평택(平澤)·황간(黃澗) 등의 읍과 서천진인데, 기민 총 2만 8천 3백 8명에 진곡은 2천 1백 15석 남짓 들었다.】

【원전】 47 집 87 면

【분류】 *구휼(救恤)

 

정조 51권 23년 5월 9일 (병인) 008 / 호서 지방의 기민 구제를 위해 납미한 사람에게 실직을 제수하다


호서(湖西)의 기민 구제는 1월부터 실시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진휼을 끝냈다.

【공적으로 진휼한 곳은 홍주(洪州), 청주(淸州), 은진(恩津), 석성(石城), 부여(扶餘), 한산(韓山), 연기(燕岐), 태안(泰安), 서천(舒川), 임천(林川), 회덕(懷德), 서산(瑞山), 정산(定山), 직산(稷山), 아산(牙山), 평택(平澤), 진잠(鎭岑), 보령(保寧), 결성(結城), 당진(唐津), 전의(全義), 천안(天安), 덕산(德山), 해미(海美) 등의 읍(邑), 수군 절도사 영(營), 성환(成歡), 율봉(栗峯) 등의 역참, 평신(平薪), 안흥(安興), 소근(所斤), 마량(馬梁), 서천포(舒川浦) 등의 진(鎭)이었고, 사적으로 진휼한 곳은 공주(公州), 이성(泥城), 옥천(沃川), 면천(沔川), 문의(文義), 연산(連山), 영동(永同), 황간(黃澗), 대흥(大興), 홍산(鴻山), 청안(淸安), 보은(報恩) 등의 읍, 병마 절도사 영, 이인(利仁) 역참이었다. 긴급 구제한 곳은 괴산(槐山), 진천(鎭川), 청양(靑陽), 남포(藍浦), 비인(庇仁), 회인(懷仁), 청산(靑山), 제천(堤川) 등의 읍과 금정(金井) 역참이었다. 총계하면, 굶주린 백성은 50만 9천 7백 22명이었고 구제하는 데에 든 곡식은 4만 5천 8백 10섬이었다.】 이조가 아뢰기를,

“1천 섬 이상을 자원하여 바친 안치택(安致宅) 등 세 사람은 실직(實職)을 제수해야 되겠고 1백 섬 이상을 바친 박성권(朴聖權) 등 세 사람은 가자첩을 만들어 지급해야 하겠습니다. 3백 섬을 바친 청주(淸州)의 김한걸(金漢杰)은 사인(士人)이니 낭관 품계의 직첩을 만들어 지급해야 되겠습니다.”

하였는데, 따랐다. 전교하기를,

“실직에 제수할 세 사람은 알맞은 벼슬자리를 만들어서 등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7 집 185 면

【분류】 *구휼(救恤) / *인사-관리(管理)

핑계댄 무리들을 한결같이 다 태거(汰去)할 일과 역마(驛馬)를 함부로 타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킬 일과, 안면도(安眠島)의 소나무에 관한 정책을 거듭 엄하게 단속할 일과 어염선세(魚鹽船稅)를 조사하여 감하여 줄 일을 말하니,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점을 따라 채택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원전】 48 집 398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헌종 14권 13년 10월 11일 (정사) 002 / 어사의 서계로 조운철·이철영·신선호 등을 차등을 두어 죄주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운철(趙雲澈)·서천 전 군수(舒川前郡守) 이철영(李喆榮)·서산 군수(瑞山郡守) 신선호(申善浩)·예산 현감(禮山縣監) 송일성(宋一成)·홍산 현감(鴻山縣監) 김노겸(金魯謙)·석성 현감(石城縣監) 홍헌섭(洪憲燮)·결성 현감(結城縣監) 신명연(申命衍)·해미 현감(海美縣監) 김성호(金性浩)·공주 전 판관(公州前判官) 권영규(權永圭)·한산 전 군수(韓山前郡守) 한익동(韓益東)·예산 전 현감(禮山前縣監) 이정관(李正觀)·청양 전 현감(靑陽前縣監) 박신규(朴臣圭)·공주 판관(公州判官) 이원필(李源弼) 등을 차등을 두어 죄주었다.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말미암은 것이다.

【원전】 48 집 526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