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06편>
‘백제멸망, 낙화암, 삼천궁녀’의 진실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0.29(일) 00:05-01:00
* 나오는 사람들
태자효 백승철
의자왕 유호한
대신1 차진욱
대신2, 당 신하 장민혁
부여태 정형석
문사 이지환
소정방, 신라병사 김석환
김법민 이병용
장수, 왜 사신 남도형
예식 박영재
병사 심승한
김춘추 방우호
여자1 안소이
여자2 김희진
낭독 이승주
*시그널 + 타이틀
<효과> (전투 중-성밖에서 화살 날아오고)
(군사들 함성 들리는)
태자효 대왕마마, 이제 사비도성은 나당연합군의 파상공격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사옵니다.
의자왕 (늙고 지친)허어,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애비가 충신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태자효 아바마마, 아무래도 이 사비도성은 오래 가지 못할 듯 보이옵니다. 속히 거취를 결정하시옵소서.
의자왕 음, 웅진으로…웅진으로 피신을 해야겠다.
태자효 날이 밝으면 적의 눈에 띨 것이옵니다. 야음을 틈타 암문(暗門)으로 나가서 피신하여야 합니다. 서두르시옵소서.
의자왕 (일어나 나가며)알겠느니라. 태자는 앞장서도록 하라!
대신1 (달려와서)대왕마마, 신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는 것이옵니까!
대신2 아니 되옵니다, 대왕마마. 사비도성을 포기하지 마시옵소서!
태자효 (칼 빼들고)저리 비키지 못하겠느냐! 대왕마마, 어가에 오르시옵소서.
<효과> (임금, 어가에 오르는 등)
태자효 자, 가자!
대신들 (비통한) “대왕마마…”
<효과> (수레 달려가는)
<해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서기 660년 7월 13일,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이 태자를 비롯한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도피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의자왕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읍(邊邑)으로 달아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신라본기에서는 ‘의자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밤에 도망하여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이 태자 효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가버리고난 뒤에 사비성의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기로 할까요?
부여태 이 나라의 대왕과 태자가 측근 신료들과 백성들을 버리고 도성을 빠져 도망쳐버렸다! 지금과 같은 비상한 때를 맞이하여 한 시라도 왕위를 비워둘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내가 백제국왕으로서 국사를 지휘할 것이다!
<해설> 이렇게 왕을 자처하고 나선 사람은 의자왕의 둘째아들 부여태였습니다. 그러자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 간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의자왕의 또 다른 아들 융(隆)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문사 대왕마마께서 태자와 함께 사비성을 빠져나가버렸고, 그러자 숙부가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나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 성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럇!
<효과> (말 울음 소리-달려가고)
낭독자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문사가 측근의 사람들을 데리고 성을 넘어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나, 부여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해설> 상황이 좀 복잡한데요, 국왕인 의자왕과 태자인 부여효가 도성인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피신하자, 의자왕의 둘째아들인 부여태가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또 그러한 상황에 불안을 느낀 태자의 아들 문사가 백성들과 함께 성을 빠져나갔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때쯤 되면 백제의 힘이 기울어서 이미 패망을 앞둔 상황인 것 같은데, 그 어지러운 난리통에 권력다툼을 벌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충남역사문화원 강종원 연구원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인서트-1. 테입<115> 강종원
(44:13 일단은 사비 도성이 함락은 됐지만 의자왕이 피신을 한 상태에서 백제가 망했다, 이런 개념은 아닌 것 같고요. 그리고 또 당은 사실 백제를 멸망을 시키지만 직접 지배는 역시 안 되는 상황이거든요. 그렇다면 괴뢰 정권 내지는 친당 정권을 세우는데 있어서 백제의 왕족, 심지어는 의자왕을 그대로 왕위에 앉히면서 혹시 조공을 약속 받으면서 신라와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44:56)
<해설> 의자왕과 태자 효(孝)가 도성을 비우고 웅진으로 간 사이에 의자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재빨리 왕을 자칭하고 나선 것은, 설령 전쟁에서 패하여 당나라에 항복을 하더라도, 백제가 아주 멸망하는게 아니고, 당나라에 고분고분한 친당(親唐) 정권이 세워질 것이다, 그 때를 대비하여 지금 권력을 차지해 두는 것이 유리하다, 그런 계산을 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지금 우리는 백제의 사비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의 숨 가쁜 순간을 탐색하고 있는데요, 그 다음에 전개될 내용은 한숨 돌리고 난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의자왕이 사비성을 빠져나가 웅진성으로 피신하기 직전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낭독자 당나라 군사가 기세를 타서 들이닥치니 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고, 드디어 태자 효와 함께 북쪽 변읍으로 달아났다.
<해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대목이 바로 의자왕과 함께 달아난 것으로 돼 있는 ‘태자 효(孝)’라는 표현입니다. 잠깐, 16년 전으로 돌아가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을 다시 살펴볼까요?
낭독자 의자왕 4년, 왕이 왕자 융을 세워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 하였다.
<해설> 분명히 의자왕 4년, 즉 서기 643년의 기록에는 의자왕이 왕자 ‘융’을 태자로 삼았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사비도성이 무너지기 직전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사비성을 빠져나가 웅진으로 피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바뀌었다는 얘기죠. 부여융은 의자왕이 태자 효를 데리고 빠져나가버린 사비성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태자가 죄를 짓지도 않고 사망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도중에 바뀐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그렇다면 언제, 무슨 이유로 바뀌었을까요? 백제 연구자들은 의자왕이 재위 15년째 되던 해에 태자를 바꾸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낭독자 의자왕 15년 봄 2월에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해설> 태자가 거처할 태자궁을 호화롭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 때 새로운 태자 효가 융을 밀어내고 태자자리에 등극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효는 누구냐? 의자왕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인물로 은고라는 요사스러운 여인이 문헌기록에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효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백제 연구자들 상당수가 그렇게 추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주대 양종국 교수는 의자왕 재위 도중에 태자 교체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2. 테입<117> 양종국
(15:34 백제 멸망기 태자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만 부여효를 태자로 기록을 놓고 있고 기타 태자와 관련된 모든 사료들은 전부 다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을 해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삼국사기보다 늦게 나오는 삼국유사에서도 삼국사기 기록을 의식한 것 같은데 부여효 태자설을 소개를 하면서 실제로 태자는 부여효가 아니라 부여융이라고하는 그러한 기록도 남겨놓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삼국유사는 늦게 씌어진 책이기 때문에 삼국사기보다 사료적 가치가 떨어질 수는 있지만. 16:14)
<해설> 그러면 일단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당나라 군사가 성으로 육박해오자 백제왕이 최후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면서,
의자왕 (에코)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뉘우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낭독자 라고 말하고 나서 태자 융을 데리고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나니 소정방이 그 성을 에워싸고…
<해설> 여기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의자왕이 데리고 나간 태자를 융이라고 적고 나서, 작은 글자로 각주를 달아놨는데, 그 각주의 내용은 ‘태자를 효라고도 하나 이는 잘못이다’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 삼국사기의 내용을 참고 자료로 삼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데 구태여 태자를 효가 아닌 융으로 쓰면서 각주까지 달아놓은 것은 별도의 조사를 거쳤지 않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양 교수는, 당나라의 소정방이 백제의 항복을 받고나서 정림사의 5층 석탑에 새겨놓은 명문에서도 부여 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 역시 태자가 도중에 바뀐 적이 없었다는 근거로 제시합니다.
*인서트-3. 테입<117> 양종국
(18:08 부여에 있는 정림사 5층 석탑에 씌어진 대당평백제국비명에도 부여융을 태자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사료가 일본서기인데 일본서기는 한 60년 정도 뒤에 씌어진 사료이고 또 일본서기의 성격은 일본서기가 씌어질 당시에 백제가 무너진 뒤에 많은 백제인들이 특히 학문적인 지식을 가진 왕족들이나 관료들, 이러한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에 들어가서 상당히 활동을 많이 하고 있던 그런 시기에 씌어졌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그 당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씌어진 책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18:55)
<해설> 바로 그 일본서기에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살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제명천황 6년 11월 1일에 장군 소정방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융(隆) 등 여러 왕자 13명 등 모두 50여 명을 당나라의 조당에 바쳤다.
<해설> 뿐만 아니라 신당서와 자치 통감 등 중국사서에서도 모두 백제의 태자를 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삼국사기에 만은 의자왕 말년의 백제 태자가 부여융이 아니고 ‘부여효’였던 것으로 올라 있을까요? 그것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수수께끼가 되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러면, 양종국 교수의 말대로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위태로운 상황이었을 때 부여효가 아니라 부여융이 태자였다고 가상하고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기로 할까요? 우선 당시 의자왕이 대단히 연로한 임금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인서트-4. 테입<117> 양종국
(11:06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할 때의 의자왕의 나이는 한 70세 정도는 됐을 걸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상당히 많은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지금 대군이 쳐들어오고 있고 백제 입장에서는 그걸 어떻게 방어를 하는 게 효과적일까 생각한 그런 부분에서 아무래도 의자왕의 왕자들 중에 그 무렵에는 나이가 어느 정도 먹은 왕자들도 많이 있었고 그런 왕자들이 활동역량도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일단 직접적인 공격을 받는 사비성은 그러한 젊은 왕자들이 맡아서 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고. 11:50)
<효과> (성밖에서 군사들 함성 소리)
(간간히 화살 날아오는)
대신1 대왕마마, 당나라의 대군이 이미 도성으로 밀고 들어왔사옵니다.
의자왕 남은 군사를 정비해서 방어막을 치도록 하라!
대신2 대왕마마께옵서 사비도성에 계시는 것은 위험하옵니다. 우리 백제의 왕통이 위급해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방어가 용이한 웅진성으로 옮겨 가시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대신1 그러하옵니다. 이 곳 사비성은 격전이 벌어지고 있사오니 다른 왕자 들에게 맡기시고 대왕마마께서는 태자마마와 함께 웅진으로 옮기시 옵소서!
의자왕 흐음, 알겠느니라. 그럼 짐은 태자와 함께 웅진으로 가서 적을 막을 터이니 너희들은 사비도성을 사수하도록 하라!
대신들 “예, 대왕마마”
<효과> (수레 출발하여 달려가는)
<해설> 그러니까 삼국사기처럼 의자왕이 태자 효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도주한 게 아니라, 대신들 그리고 왕자들과 의논한 끝에, 나이가 많은 의자왕과, 장차 왕통을 이을 태자 융은 웅진성으로 가서 방어하고, 사비성은 다른 왕자들이 맡아서 방어하기로 역할분담이 되었다, 이런 얘깁니다.
<해설> 의자왕과 함께 웅진으로 간 왕자가 효였든 융이었든 그 문제를 떠나서, 당시 의자왕 일행이 사비성을 빠져나간 탈출경로가 어떻게 됐을까요? 계명대 노중국 교수는 그의 저서 ‘백제 부흥운동 이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의자왕의 탈출경로는 분명치 않지만, 적에게 발각되기 쉬운 육로보다는 수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의 부소산성과 공주의 공산성은 모두 백마강으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배를 댈 수 있는 나루가 있어 물자나 사람의 이동이 매우 용이하였다. 또 이 때가 음력 7월 13일 밤이어서 달이 밝았을 것이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해오자 부소산성으로 올라가서 강으로 내려간 다음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러면 다시, 일단 삼국사기에 적힌 대로, 의자왕과 함께 웅진으로 간 태자가 융이 아닌 효인 것으로 상정하고 사비성의 상황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여태 (말 타고 달려다니며)이제부터 내가 백제국의 대왕이니라! 군사들은 물러서지 말고 적군과 맞서 싸울 채비를 갖추라!
<해설> 의자왕의 둘째아들 부여태가 스스로 국왕을 칭하면서 항전을 독려 하였으나, 태자의 아들 문사가 부여융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문사 대왕은 태자와 함께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고, 숙부가 자기 마음대로 왕이 되어버렸으니 만일에 당나라 군사가 이대로 물러가버린다면 우리가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저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성을 나가겠습니다. 자, 나하고 행동을 같이 할 사람은 따라 나서시오!
<효과> (사람들 웅성거리며 몰려가는)
부여태 너희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냐! 내가 새로운 백제의 임금이라 하지 않았느냐. 나를 도와서 이 곳 사비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해설> 태자의 아들 문사를 따라 수많은 백성들이 성을 빠져나갔으나 ‘부여태가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효과> (군사들 전투중인)
소정방 중지하라! 전투 중지를 알리는 신호를 울려라!
<효과> (북 소리)
소정방 허허허, 이제 성을 수비하던 백제의 병졸들이 싸우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성곽위에 올라가서 우리 당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하라!
<효과> (군사들 환호하는)
낭독자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곽을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부여태는 매우 급하여 결국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해설> 이 때 의자왕의 아들 융도 싸우기를 포기하고 대좌평 천복(天福)과 함께 밖으로 나와 항복의사를 표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타난 신라왕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법민이었습니다. 김법민은 당시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었습니다. 잠깐, 의자왕 2년의 삼국사기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의자왕이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의 대야성을 치니,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였으나 윤충은 이들을 모두 죽여 그 머리를 베어 백제로 보내고…
<해설> 이 때 죽은 대야성 성주 품석의 처가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습니다. 딸과 사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그 길로 고구려로 달려가서 구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당나라 황제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당나라가 백제정벌에 나서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사비성을 무너뜨린 서기 660년의 그 전쟁이 물론 당나라의 백제와 고구려 지배전략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김춘추 개인의 백제에 대한 보복전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설> 자, 그럼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이, 의자왕의 아들 융을 무릎 꿇려놓고 뭐라고 얘기하는지 들어보시죠.
김법민 (칼 빼고)네가 백제왕의 아들 융이렷다! 전에 너의 아비는 나의 누이를 참혹하게 죽여서 옥중에 묻어놓아,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제 너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다. 알겠느냐? 자, 내가 네놈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니라, (퉤에!)
<해설> ‘그러자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못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어쨌든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은 이렇게 함락되고 맙니다. 그런데, 아무리 왕실내부의 분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비도성이 너무 쉽게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를 두고, 애당초에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는 부여지방으로 천도를 했던 것이 무리가 아니었느냐, 즉 군사전략상 사비 천도 자체가 잘못 된 것이 아니었느냐, 이런 문제를 제기한 조선시대 실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종원 연구원은 사비도성의 지형과 입지조건에 패전의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5. 테입<115> 강종원
(38:58 실제 사비도 보면 남서쪽으로는 금강이 가로막고 있고 또 동쪽으로는 논산까지 좀 벌판이 있지만 요소 요소에 산성을 축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또 나성도 축조하고. 그렇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그렇게 무방비 상태다, 이렇게 볼 수는 없을 것 같고요. 다만 최전방으로 금산이라든지 논산 일대에 상당히 많은 산성들이 축조되어 있습니다. 그 길목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의 어떤 침략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그런 결과 가 결국 패망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봐야지.38:44)
<해설> 일본서기에서는 사비성 함락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7월10일, 대당(大唐)의 소정방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미자진에 집결하였다. 신라왕 김춘추는 병마를 이끌고 백제의 동쪽 국경지역에 있는 노수리산에 모였다.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서로 싸운지 3일만에 왕성이 함락되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리고, 그로부터 닷새 뒤, 웅진성-.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 멈추는)
장수 (비통한)대왕마마,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말았다는 전갈이옵니다.
의자왕 뭐, 뭣이라? 그 곳을 지키던 왕자들은 어찌 되었다더냐?
장수 사비성 방어책임을 지고 있던 부여태 왕자가 승산이 없음을 미리 알고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 한 채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하옵니다.
의자왕 허허, 이런 애통한 일이 있나.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웅진성의 상황은 어찌 돌아가고 있느냐?
장수 머지않아 적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라 하옵니다.
<해설> 그런데, 사비성과 마찬가지로 웅진성 역시 너무도 싱겁게 항복을 해버린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7월 18일, 의자왕은 태자와 웅진지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해설> 애당초 웅진성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그 족으로 옮겨갔다면, 적군에 대항하여 전투라도 치열하게 한바탕 벌였어야 할 것인데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장군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해설> 그런데, 웅진성에 있던 의자왕이 싱겁게 항복을 해버린 것은 의자왕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웅진성을 지키던 군사책임자는 웅진 방령 예식(?植)이었습니다.
<효과> (밖에서 군사들 싸우는 소리)
예식 대왕마마, 사비성을 지키던 왕자들도 이미 항복을 하였사옵니다. 이제 대세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사옵니다.
의자왕 대세를 돌이키기에 늦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예식 사비성을 무너뜨린 당나라 대군이 여기 웅진성에 대거 몰려와서 파상공세를 펼 것이옵니다. 이만 항복 하시는 것이…
의자왕 무슨 소리냐! 그것이 성을 지키는 군사책임자가 할 소리더냐?
예식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대왕마마께서도 무사하지 못 할 것이옵니다.
<효과> (칼 빼는)
<해설> 웅진방령 예식이 그렇게 협박을 하자 의자왕은 당나라군에게 변변 히 저항 한 번 못해보고 항복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김영관 연구관은, 웅진성의 방령이었던 예식이 말년의 의자왕으로부터 홀대를 당해오던 구(舊) 귀족세력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인서트-6. 테입<116> 김영관
(04:43 그 당시에는 웅진성이 백제의 다섯 개의 방성이 있었는데 북방성입니다. 북방성의 方領이 아마 예식이라고 하는 장군이었는데 그 예식이 의자왕과는 조금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 하는 구 귀족세력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나. 그 당시 멸망 당시에는 백제의 신진귀족 세력을 많이 채용을 해서 의자왕이 정권을 주도하도록 했습니다. 구귀족 세력은 사택지적비의 주인공인 사택지적이라든지 성충이나 흥수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얘기 하는데요 예식도 아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었나. 05:32)
<해설> 예식이 사비성에 있지 못하고 웅진성의 성주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앙 정치권으로부터 좌천당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나당연 합군의 공격을 받아서 의자왕이 자신이 우두머리로 있던 웅진성으로 피신해오자 예식은 그 기회를 자신이 중앙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의자왕을 협박하여 항복을 이끌어낸다는 얘깁니다. 김영관 연구관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사비성을 장악했다가 당나라군에게 항복을 해버린 부여태와, 웅진성 방령 예식이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인서트-7. 테입<116> 김영관
(06:31 태와 예식과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태가 국왕의, 비록 아버지지만 영을 어기고 당군에 항복했다는 것은 전쟁이 만약 어떤 식으로든 종료가 된다고 그러면은, 그리고 당군이 물러간다고 그러면은 태는 살아남지 못 할 그런 입장이었을 겁니다. 그런 입장에 있던 태와 그리고 웅진성에 있던 정치적으로 좌천을 당했던 예식과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항복을 한 태와 더불어 예식에게도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당군에게 항복을 하고 그 뒤에 백제 정국의 중앙세력으로 복귀하려는. 07:20)
병사 (말 타고 달려와서) (내리고)방령 나으리!
예식 왜그러느냐?
병사 지금 사비도성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예식 무슨 내용인지 말해 보아라.
병사 대왕마마와 태자마마께서 사비도성을 비우고 이 곳 웅진성으로 피 신하자, 부여태 왕자께서 스스로 백제의 국왕을 칭하고 사비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식 그 얘기는 나도 은밀히 전해 들었느니라.
병사 그런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여태 왕자께서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해버렸습니다. 당나라군이 포위를 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버리면 대왕마마로부터 용서를 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당군에 미리 항복을 한 것입니다. 헌데, 방령 나리와 부여태 왕자와는 막역한 사이가 아닙니까.
예식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냐?
병사 부여태 왕자께서 방령 나리께 뜻을 같이 하자는 말을 은밀히 전하라 하였습니다. 여기 서찰을 가져왔습니다.
예식 어디 보자. (서찰 펼쳐보고)으음…알았느니라. 나를 따라 어전으로 들어오너라.
<효과> (문 열고 들어가서)
예식 대왕마마, 사비성도 함락되었고 이제 전세가 기울었사오니 당나라에 항복을 하시옵소서.
의자왕 항복이라니! 적을 앞에 두고 그게 장수가 할 소리더냐!
예식 더 이상 저항을 하다가는 희생만 더 커질 것입니다.
의자왕 그 불경스런 언사를 거두고 나가서 싸우도록 하라!
예식 그리는 못 하겠사옵니다. 얘들아, 대왕마마를 사비성으로 압송할 것이니 포박하라!
의자왕 예식이, 너 이놈! 어찌 네 놈이…
예식 뭣들 하느냐! 포박하라지 않느냐!
<효과> (병사들 달려드는)
<해설> 일부에서는 웅진성 방령 예식이, 당나라군으로부터 사후에 보상을 해주겠다는 회유에 넘어가서, 의자왕을 웅진성으로부터 사로잡아서 사비성으로 압송하여 소정방에게 바친 게 아닌가, 이런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서기 660년 7월 18일-.
신병사 (말 타고 달려와 멈추고)대왕마마, 백제국 의자왕이 웅진성을 버리고 사비로 와서 항복을 하였다 하옵니다.
김춘추 그게 정말이더냐? 허허허, 내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자, 그럼 사비로 가자!
<효과> (수레와 말 여러 마리 달려가는)
<해설> 신라 무열왕 김춘추는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지금의 경상도 상주에서 부여로 달려옵니다. 그가 사비의 소부리성, 즉 부여성에 도착한 때가 서기 660년 7월 29일이었습니다. 드디어 660년 8월 초이틀.
소정방 당나라 장졸들은 실컷 마시고 회포를 풀도록 하라,허허허…
김춘추 우리 신라의 장졸들도 이 기쁜 순간을 마음껏 즐기도록 하라!
<효과> (웃고 떠들고 마시는 등)
<해설> 소정방과 김춘추는 당나라와 신라 장병들에게 승전을 만끽하는 잔치를 베풉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왕 김춘추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당상(堂上), 즉 대청마루 위에 앉아 술을 마시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을 대청마루 아래 땅바닥에 무릎 꿇려 앉혔는데,
김춘추 나는 신라 국왕인데, 술잔이 비었구나. 백제왕 의자는 술병을 높이 들어 내 잔을 채우도록 하라! 잔을 채우라지 않았느냐!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의자왕 (울먹이며) (술 따르는)
대신들 (울먹이며) “대왕마마…”
<해설> 그 장면을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당하에 앉은 의자로 하여금 술을 부어 올리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군신들이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서트-8. 테입<116> 김영관
(19:19 신라가 삼국통일의 의지를 가지고 대업을 이루었다, 하는 것은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고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복수입니다. 김춘추의 원한을 갚기 위한 복수 입니다. 그 복수의 장소가 의자왕이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춘추 태종 무열왕에게 항복식을 거행하는 장소였었습니다. 그러니 백제로서는 당나라 신라에게 항복하는 것보다 김춘추에게 진 원한을 그것을 씻는 장소가 된 겁니다.20:00)
<해설> 어찌 되었든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이 함락당하고 백제국왕 의자왕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던 때가 서기 660년 8월 2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 때를 백제가 멸망한 시점으로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의 역사교과서나 대부분의 역사서에서도 이 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서트-9. 테입<115> 강종원
(49:34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결국 의자왕 때를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그 이후에 3년간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다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그런 전쟁. 다시 회복을 해서 백제가 존속된다면 같이 그 연장선상에서 봐야 되겠지만,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식민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그러나 그것으로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당에서는 당 나름대로 지배 체제를 지방 통치 체제를 구축을 하고. 이후에 또 신라는 신라 나름대로 백제를 편제시키는 지방 체제를 갖추기 때문에.50:19)
<해설> 그 뒤에 있었던 부흥운동이 결국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자왕이 항복한 그 시점을 백제가 멸망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강종원 연구원의 견해인데, 그러나 대다수의 백제사 연구자들은 그 뒤에 이어지는 부흥운동 기간을 백제사의 연장이라고 애기합니다. 이도학, 양종국 두 사람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서트-10. 테입<113> 이도학
(1:37:34 백제 왕조의 연장으로 해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순암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서도 백제 마지막 왕을 의자왕이 아니고 풍왕이라 해 놨습니다. 일시적으로 의자왕이 항복하긴 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백제가 망한 것이 아니고 곧바로 백제라는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조국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던 것이고. 풍왕을 수반으로 하는 어엿한 국가 체제를 수립했던 것이고, 그리고 공주하고 부여 일부만 빼놓고 나머지를 다 회복을 했어요. 이것은 백제를 망했다라기보다는 백제가 곤경에 처해서 의자왕은 항복했지만 그러나 백제를 재건하기 위한 힘찬 운동이 계속 전개됐고.1:38:26)
*인서트-11. 테입<117> 양종국
(5:14 15 백제 자체를 완전히 없애고 다른 나라를 세운다든지 아니면 그 나라를 신라에게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백제는 그대로 존속을 시키면서 백제를 지배하는 정권 담당자를 친당 인물로 대체를 시킨다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지요. 그런 의미로 본다면 660년 7월 18일날 의자왕이 항복식을 하고 9월3일날 중국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 내용은 정권이 교체당하는 모습이지, 백제의 정권이 교체당하는 모습이지 백제 자체가 수명이 완전히 끝났다, 백제가 멸망했다 그런 의미는 아닌 것으로 봐야 됩니다. 45:58)
<해설> 도성이 함락 당했고 국왕이 붙잡혀서 항복을 해버렸으면 나라가 망한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서기 475년의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다시 살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고구려의 대로 제우와 재증걸루, 그리고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하여 이레 만에 이를 함락시키고, 또 남쪽 성을 치자 성안에서는 위태해져서 두려워했다. 개로왕이 성에서 나가 도망하니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결박하여 아차성 밑으로 보내어 죽였다.
<해설> 서기 475년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고구려 군사에 붙잡혀서 아차산으로 끌려가 줄줄이 참수를 당합니다. 그러나 그 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라에 지원군을 청하러 갔던 왕자 문주가 백성들과 함께 웅진으로 내려가 그 곳을 도읍으로 삼고 백제의 왕통을 이어나갔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비록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게 되지만, 왜국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이 귀국하여 어엿한 백제의 국왕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대부분의 사서에서 왜 의자왕 때까지만 백제사로 보고, 의자왕이 항복 한 때를 백제의 멸망시점으로 간주해왔을까요? 김영관 연구관은, 신라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인서트-12. 테입<116> 김영관
(26:03 수도 사비성을 함락한 이후에 사실은 신라가 옛날 백제의 영토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672년에 가서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 관할하에 백제가 있었습니다. 그 웅진도독부라는 것도 어떤 임의적인 기구이지 실질적으로 백제 지역을 통치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라 입장에서는 당나라 세력이 끼어 든 그 시대까지도 인정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660년 7월에 백제의자왕이 항복한 것을 가지고 백제역사를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26:51)
<음악> (브릿지)
<해설> ‘의자왕이 퇴장한 것이 곧 백제의 멸망은 아니다’ 이런 견해를 지지 하기로 한다면, 이후에 있었던 백제인들의 당나라와 신라에 대한 싸움을 ‘부흥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모순이 되겠지요.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데 무슨 부흥운동이냐, 이런 항변을 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교과서를 비롯한 여러 사서들의 영향으로, ‘제31대의자왕이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이런 인식이 워낙 오랫동안 유지돼 왔기 때문에, 의자왕 다음에 옹립된 풍왕이 제32대 백제왕 이었다, 이렇게 표현하기가 망설여지는 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희 프로그램에서도 일단 ‘서기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고, 이후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표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러면 서기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다 치고, 가장 큰 궁금증은,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를 침공하는데 백제는 어째서 고구려나 왜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서 18만 대군을 모두 감당하려고 하다가 결국 패망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선 고구려의 경우 백제와 마찬가지로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것이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양종국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13. 테입<117> 양종국
(31:24 공격을 당한 시점에서는 고구려나 일본 입장에서 군대를 바로 동원해서 도와 줄 상황까지는 어려웠으리라고 봅니다. 도와주려고 군대를 동원했다고 그래도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테고 그와 같이 보여지고 그러한 의미에서 660년 10월에 보면 고구려가 신라 칠중성인가 공격하는 그런 기록이 보여지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660년 10월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이 백제의 공격사실을 알게 되면서 고구려가 군대를 모으게 되고 준비하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행동에 옮긴 것이 그 때가 아닌가.32:06)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군대를 보내기에는 늦은 시점이었다는 얘깁니다. 백제가 멸망하고나서 석 달 뒤에야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는데, 그 때는 백제가 부흥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무엇보다 신라가 군사를 멀리 경기도 이천지역까지 북상하게 했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백제의 사비지역을 향해 진격하는 바람에 그 기만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영관 연구관의 얘기 들어보시죠.
*인서트-14. 테입<116> 김영관
(09:54 고구려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백제의 수도사비성으로 바로 진격을 하게 됩니다. 그게 불과 한 달 반 정도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로서는 백제의 구원군을 파견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그리고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를 늘 하고 있다 보니까 남쪽 백제 또는 신라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가 멸망을 당하는데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0:34)
<해설> 바꿔서 설명하자면, 신라와 당나라가 그처럼 대규모 연합작전을 벌이면서도 극비리에 추진했기 때문에 사전에 보안 유지가 아주 잘 되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요. 신라뿐만 아니라 당나라 역시 백제침공에 대한 비밀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사실이 문헌 근거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기 1년 전인 서기 659년, 일본열도의 왜국 사신들이 당나라의 서울 장안에 들어갑니다.
당신하 황제폐하께서는 동경에 가 계시니 왜국의 사신들은 이 길로 역마를 달려 동경으로 가도록 하시오!
<효과> (마차 달려가는)
<해설> 그래서 왜국의 사신들은 동경, 즉 낙양으로 가서 당나라 황제를 만나 업무를 마쳤는데,
왜사신 이제 황제폐하도 알현했고 볼 일을 다 마쳤으니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당신하 왜국 사신들은 동쪽으로는 갈 수가 없소! 황제폐하의 명이오!
왜사신 아니, 우리나라에 돌아가려면 당연히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당신하 우리 당나라가 내년에 반드시 해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바, 그대들 왜국 사신들은 그 기밀을 알았으니 서경으로 가서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오. 황제폐하의 명령이오!
<해설> 일본서기에는 이 때 당나라 동경에 간 왜국 사신들은 서경으로 옮겨져서 특별한 곳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야 풀려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당나라가 백제 침공을 앞두고 기밀유지에 얼마나 신경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이번에는 백제 의자왕, 하면 연상되는 삼천궁녀 얘기를 해보도 록 하겠습니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이 낙화암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은 전설인데요, 이런 전설이 어디서 왜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삼국유사에는 떨어질 타(墮)자에 죽을 사(死)자를 쓰는 ‘타사암’에 얽힌 전설 한토막이 실려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낭독자 부여성 북쪽 귀퉁이에 있는 큰 바윗돌이 밑으로는 강물에 그 모습을 내밀고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의자왕이 여러 궁녀들과 함께 최후를 면치 못 할 줄을 알고 “차라리 자살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는 말자” 하면서 서로 이끌고 이 곳에 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타사암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 못 전해지고 있는 속설이니, 궁녀들만은 여기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은 당나라에 가서 죽었다는 것이 당나라 역사에 명백히 씌어 있다.
<해설> 그렇다면, 의자왕이 타사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궁궐의 귀부인들이나 궁녀들이 당나라군에게 붙잡혀 험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하겠다고 몸을 던졌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걸 따져보기 위해서는 우선 고대의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의 군사가 정복지역에서 어떤 행위를 하는지 부터 먼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인서트-15. 테입<117> 양종국
(38:14 전쟁에서 승리자가 정복당한 지역을 약탈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강간하고 이러한 일들은 어느 전쟁에서나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패배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으로, 이러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정복당했을 당시에도 사실 엄청난 살인 약탈 강간 방화 이런 일들이 실제로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고. 38:54)
<해설> 훗날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했던 흑치상지의 경우 처음엔 의자왕을 따라서 항복을 했으나 백제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격분해서 투쟁전선에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효과> (멀리서 군사들 몰려오는)
<효과> (여자들 아우성)
여자1 적군이 사비로 들어와서 부여성의 성문이 열렸답니다. 우리가 항복을 했대요.
여자2 우리 대왕마마는 궁궐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피신하셨답니다.
여자1 이제 적군이 곧 성안으로 들이닥칠 텐데…
여자2 놈들한테 잡혀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궁궐 뒤쪽 절벽으로 가서 우리 모두 강물에 떨어져 자결합시다.
<해설> 그렇게 해서 궁궐의 여자들이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거기서 타사 암전설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서트-16. 테입<117> 양종국
(39:30 그 당시에 이러한 약탈 방화가 일어나는 이런 과정에서 이걸 피하기 위해서 많은 궁녀들이, 궁인들이 궁성 뒤쪽에 있는 사비성 부소산 쪽으로 피신을 했을 것이고 결국 쫓겨가다가 가장 북쪽에 있는 더 이상 갈 데 없는 오늘날 우리가 낙화암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까지 와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투신해서 목숨을 잃었을 그런 가능성이라든지, 가능성이라기보다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타사암 전설에도 보여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거기서 잃은 슬픈 역사를 백제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인제 후세에 전해지면서. 40:14)
<해설> 그렇다면 낙화암이니 삼천궁녀니 하는 말들은 어디서 생겨났을까요? 고려말기에 활동한 이곡(李穀)이라는 사람이 부여를 회고하여 시를 쓰면서 ‘천척(千尺) 푸른 바위 낙화라 이름했네’라고 묘사했는데, 그러니까 낙화암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와서 처음 쓰인 것 입니다. 조선 후기의 김흔이라는 선비는 낙화암에 대한 시를 쓰면서 ‘삼천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는 표현을 했고 16세기초에 민제인이라는 이가 ‘구름 같은 삼천궁녀를 바라보고’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많다는 것을 나타낼 때 문학적으로 삼천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당나라의 이태백은 매우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고 ‘날아 흐르며 삼천 척을 곧바로 내려가네’라고 표현했고, 긴 머리털을 일컬어 ‘백 발이 삼천 척’이라고 했으며, 백거 이는 그의 시 장한가(長恨歌)에서 양귀비를 일컬어 ‘후궁 중에 미녀들이 삼천이 넘건만 삼천 후궁이 받던 총애를 한 몸에 받는구나’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당초에는 적군에 붙잡혀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겠다고 타사암에 몸을 던진 백제 여인 들의 높은 절개를 칭송하기 위해서 시인묵객들이 삼천궁녀니 낙화암이니 이런 표현을 쓴 것이었는데, 의자왕이 방탕하여 궁녀를 삼천 명이나 두었다는 쪽으로 잘못 알려졌다는 얘깁니다.
*인서트-17. 테입<113> 이도학
(1:12:26 아녀자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상황에서 나라하고 명운을 같이 하는 절개의 표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삼천 궁녀 이야기는 나라를 망친 의자왕의 잘못된 행태하고 관련해서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부여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삼천 궁녀가 있던 곳이 어디입니까, 물어보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삼천 궁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는 경우도 많고. 의자왕 앞에 보면 꼭 삼천 궁녀가 따라붙는 경우가 많습니다마는, 이건 사실 불식시켜야 됩니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그것도 시에 등장하는데 시라는 것은 과장법을 쓰게 돼 있어요. 1:13:07)
<해설> 이도학 교수는 이렇듯 잘 못 알려진 사실들 때문에 의자왕이 매도 당한 측면이 있다고 말하면서, 만일 의자왕대에 백제가 망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달랐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서트-18. 테입<114> 이도학
(:13:09 문학은 또 허구 아닙니까. 허구가 사람을 잡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의 삼국지연의 소설 속에 보면 조조가 나쁜 사람으로 돼 있는데 정사 삼국지에는 위대한 정치가로 돼 있거든요. 이 허구적인 시 속에서 의자왕은 매도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의자왕은 효자의 표상이 되고 효도로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사람이에요. 의자왕대에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의자왕은 도덕 교과서에 실릴 수 있는 그런 인물이기도 했던 거죠. 중국에까지도 명성이 퍼져 가지고 구당서 신당서에 해동의 증자하고 민자 해서 해동의 증민, 해동의 증자, 이런 기록이 남겨지게 된 거죠. 1:13:53)
<해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07편>
의자왕은 갔어도 백성은 남았다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1.5(일) 00:05-01:00
* 나오는 사람들
낭 독 이승주
소정방 박영재
유인원 이지환
하수량 이병용
달솔 심승한
이길연박덕 방우호
남자1 김석환
남자2 정형석
복신 김대중
당태종 차진욱
장수 장민혁
*시그널 + 타이틀
<해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서기 660년, 백제의 31대 임금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게 정식으로 항복을 함으로써 일단 백제의 왕조가 종말을 고하였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후에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에게 치열하게 대항하였고, 일정 기간의 공백을 거친 뒤에 다시 풍왕을 백제의 임금으로 옹립합니다.
*인서트-1. 테입<118> 노중국
(03:08 의자왕이항복례를 함으로써 일단은 백제왕조는 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1년 사이에 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지고 이 부흥군 수뇌부들이 풍왕을 모시고 와가지고 왕으로 삼게 됨으로써 새로운 말 그대로 망한 백제국을 다시 부흥시키게 되어졌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이죠. 03:51)
<해설> 그러니까 계명대 노중국 교수는, 660년에 의자왕이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무열왕 김춘추에게 항복의례를 함으로써 백제왕조는 일단 망한 것이고, 그 이후에 백제 사람들이 부흥운동을 전개했으며, 부여풍이 왜국에서 건너와서 세운 왕조는 ‘부흥 백제국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는 부흥이라는 말은 ‘재건’ 혹은 ‘복구’의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뒤에 국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부흥운동으로 불라서는 안 되고 ‘조국회복투쟁’ 혹은 조국회복전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것을 백제 왕조의 멸망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주장에도 불구하고 의자왕 이후에 백제인들이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벌인 투쟁을 백제 부흥운동으로 부르기로 하고, 지금부터 그 전말을 청취자 여러분과 함께 짚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우선 당나라가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 시킨 뒤에 백제의 통치체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백제 멸망 당시의 인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 한 줄을 살펴보겠는데요.
낭독자 본래 백제는 5부, 37군, 200성, 76만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 와서 지역을 나누어 5도독부를 두었다.
<해설> 이 기록을 고구려 멸망 당시의 기록과 대조해보기로 하죠.
낭독자 고구려는 5부, 176성, 69만여 호였는데 이를 나누어서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하여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
<해설> 대개 고대국가시기의 경우 한 호당 다섯 사람으로 계산을 하기 때문에, 76만호라면 백제의 인구가 거의 4백만 명에 달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인구가 69만여 호이고 백제는 76만호라고 나와 있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백제의 인구가 더 많았다는 것이죠. 혹시 기록이 잘 못된 건 아닐까요? 그러나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은 물론 한국전통 문화학교의 이도학 교수 역시 백제가 고구려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2. 테입<116> 김영관
(1:21:06 고구려는 멸망할 때 69만호라고 나와 있어요. 고구려 멸망 당시보다 백제의 인구가 더 많았습니다. 그건 영토의 차이가 아니고 영토에서가질 수 있는 생산력의 차이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에는 농업경제가 기반이었기 때문에 농업경쟁력으로 따진다면 만주 벌판 평양지역보다는 충청도의 논산평야, 전라도의 만경평야 김제평야 전라남도의 나주평야, 그 넓은 곡창지대를 점유했던 백제의 국력은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1:21:46)
*인서트-3. 테입<113> 이도학
(1:39:16 백제가 자리잡고 있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은 기후 변화가 뚜렷합니다. 그리고 비옥한 농경지를 끼고 있고 해변을 끼고 있기 때문에 해산물을 쉽게 섭취할 수 있는 금싸라기 같은 땅입니다. 그러니까 인구 조밀 지역이에요, 살기 좋은 곳이니까요. 백제 인구가 고구려 인구보다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죠. 사실 고구려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땅은 넓어요. 그러나 척박하기 이를 데 없어요. 물론 3세기 후반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고구려가 자리 잡고 있는 만주 지역을 묘사하면서 산이 많고 골짜기가 깊고 해서 비옥한 평야는 없기 때문에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배를 채울 수 없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구려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1:40:04)
소정방 이제 백제는 우리 당나라 황제폐하의 나라가 되었다. 나는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백제의 영토를 나누어서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할 것이며, 그 도독부 아래에 각각 주와 현을 두어서 통할하게 할 것이고, 각각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할 것이다. 낭장 유인원에게는 사비도성을 지키게 할 것이다.
<해설> 소정방은 전국을 다섯 개의 도독부로 나누어서 그 밑에 주와 현을 둔다고 했습니다. 주와 현은 백제에는 없는 당나라 식의 통치조직 입니다. 그러니까 도독부의 장관은 도독이 되고, 주의 장관은 자사, 그리고 현의 장관은 현령이 되는 것이죠. 그 도독과 자사, 현령을 당나라에 충성을 약속한 백제사람 중에서 뽑아서 통치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해설> 그렇다면, 당나라의 이런 방식의 백제 지배체제가 실효를 거두었을 까요?
*인서트-4. 테입<116> 양종국
(38:10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에다가 웅진도독부를 설치를 합니다. 그리고 웅진도독부 말고 백제의 오방지역에 4개의 도독부를 더 설치를 해서 5도독부 체제를 만듭니다. 이 도독부 체제는 당나라의 전통적인 정복지 지배방식입니다. 거기에 직접 당나라 관료와 행정조직을 투입을 하는 수도 있지만 백제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는 웅진도독부 이외에는 다섯 개의 도독부를 뒀지만 당나라의 관료와 당나라의 행정체제가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38:55)
<해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때 백제의 전 지역을 모두 점령했던 것이 아니라, 함선을 몰고 해상을 통해서 사비성과 웅진성으로 바로 들어와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기 때문에, 각 지방의 백제인들 모두가 당나라에 항복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더구나 당나라 사람으로 지방관을 임명해서 통치를 했던 것이 아니라 백제 사람들 중에서 선발해서 임명했기 때문에, 계기만 주어진다면 이들이 점령군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부흥군 편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상존해 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신라와 군사연합을 해서 백제의 항복을 받아낸 소정방 일행이 당나라로 귀환하기 전에 백제에 남아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소정방 의자를 비롯한 백제의 옛 왕실 포로들과 사로잡은 백제조정의 귀족들을 어찌 관리하고 있는 것이냐?
유인원 예, 모든 무기를 회수하고 성밖 출입을 통제하여 엄중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대장군 나리. 대장군께서 떠나실 때 우리 당나라로 호송 할 준비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소정방 허허허, 알았다. 백제 왕실을 무너뜨리고 임금을 포로로 잡았으니 이들을 데려간다면 황제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구나, 허허허.
유인원 하온데, 대장군께서 백제평정을 기념할 비석을 만들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소정방 그렇지, 그렇지. 하수량 어디 있느냐?
하수량 (들어오며)예, 나으리, 부르셨습까?
소정방 우리 당나라군이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고 백제정벌에 나서서 드디어 항복을 받아낸 그 공적을 길이 새겨둘 비문을 지어야겠다. 하수량, 네가 문장솜씨가 좋으니 작문하도록 하라.
하수량 알겠습니다, 나리. 헌데 비문에 꼭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내용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소정방 그거야, 백제평정에 공이 많은 장수들의 이름을 두루 적고, 우리가 왜 백제를 침공했는지 그 정당성을 강조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수량 알겠습니다. 하온데, 비문의 제목을 어떻게 정할까요?
소정방 으음, 우리 위대한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는 비문이니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 하면 좋지 않겠느냐?
하수량 알겠습니다. 곧 지어 올리겠습니다.
소정방 그런데, 비문을 새겨 넣자면 비석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유인원 대장군 나리, 비석을 따로 장만해서 새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소정방 비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무슨 소리냐?
유인원 소장이 사비도성을 두루 둘러봤사온데, 도성 중심의 큰 길가에 사찰이 하나 있고 그 사찰에 아주 잘 만들어진 5층석탑이 있었습니다.
소정방 아하, 그러니까 비석을 따로 세울 필요 없이 절 안에 있는 그 석탑의 탑신에다가 우리 당나라의 백제평정을 기념하는 비문을 새겨넣자는 말이 아니냐?
유인원 그렇습니다, 장군.
소정방 허허허허, 그거 좋은 생각이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허허허…
<해설> 혹시 부여 시내를 둘러본 적이 있는 청취자라면 옛 정림사 터에 서 있는 5층 석탑을 구경하셨을 것입니다. 그 석탑의 탑신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탑신을 빙 둘러가며 많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 비문이 바로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여 새겨놓은 이른바 ‘대당평백제국비명’입니다.
*인서트-5. 테입<116> 김영관
(56:26 20세기초반만 해도 정림사지 석탑이라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탑 이름을 평제탑, 백제를 평정했다고 해서 평제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 새겨놓은 글의 제목이 당평백제비입니다.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비석이다,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그런 증거가 될 수 있는 그런 금석문자료인데요.57:12)
<해설> 처음에는 이 석탑이 있던 곳에 절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탑을 평제탑이라고 불렀습니다.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한다는 대당평백제 국비명을 줄여서 그렇게 부른 것이지요. 그러던 중 발굴 결과, 정림사라는 사찰 이름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기와가 출토되었고, 그 이후에 이 탑은 공식적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기념으로 붙인 이름을 좇아서 우리도 한 때 덩달아 평제탑이라고 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인서트-6. 테입<118> 노중국
(25:41 백제가 세웠거든요. 성왕이 천도하면서 세운 거니까 백제가 세운 탑이니까 당연히 이거는 백제의 입장에서 절 이름을 부르고 절 이름에 따라서 탑 이름도 붙여질 수가 있는데 백제의 입장에서 불러야 되지요. 그런데 그거를 절 이름을 모르고 탑 이름을 뭔지 기록이 없어가지고 모르는데 거기 적혀져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해가지고 평제탑이라고 일제 때부터 불러온 거죠. 그렇게 부르는 거는 이거는 백제가 세운 탑을 마치 당이 세워서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기록한 것처럼 이런 오해도 줄 수가 있고, 실제로 당이 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이거는 당연히 백제 중심으로 봐야 되는데.26:30)
<해설>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창건한 것으로 보이는 이 절이 백제 시대 당시에도 정림사라고 불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여 중심가 한가운데 큰길가에 있는 사찰인 점으로 미루어 백제의 중심사찰이었고, 그 석탑 역시 백제 사람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는 상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공적을 담은 비문은 별도로 비석을 세워서 새기는 것인데, 그렇다면 소정방은 무슨 이유로 사찰 안에 있던 기존의 탑신에다 글자를 새겼을까요?
*인서트-7. 테입<116> 김영관
(58:37 소정방이 사비도성을 함락한 게 7월 중순이고 돌아간 게 8월말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에 탑을 새로 만들고 거기다가 새길 여유는 없었습니다. 백제의 왕성인 사비도성의 한복판에 있던 정림사의 탑에다가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끔 백제가 당나라 군이 백제를 공격해서 백제 도성을 함락하고 너희 왕을 잡아갔다, 그런 어떤 과시적인 그런 내용을 적어놓은 것이 정림사지 석탑의 내용입니다. 59:17)
<해설> 김영관 연구관은 우선 소정방이 사비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으로 부터 항복을 받고나서 얼마 있지 않아 당나라로 돌아갔기 때문에 새로 비석을 만들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정림사의 석탑에다 글자를 새겼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노중국 교수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당시 소정방이 정림사지 석탑에 자신들의 공적 내용을 새긴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합니다.
*인서트-8. 테입<118> 노중국
(23:36 소정방은 거기에다가 자기의 공로를 새긴다 했을 때는 이제는 백제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또 그 점을 거기에 더해서 자기의 공로까지 나타냄으로써 이중적인 목적을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냐, 자기의 공로도 나타내고 그 다음에 정신적인 구심적 역할을 했던 사찰과 탑에다 그걸 세움으로써 인제 저항 할 수 있는 의자를 꺾어버리는 이런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거기다 새긴 게 아니겠느냐. 24:22)
<해설>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지은 사람은 하수량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권회소로 나와 있습니다. 모두 당나라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쟁판에 나올 때 비석에 글자 새기는 각자공(刻字工)까지는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비석을 쪼아서 글자를 새겼던 사람은 백제 사람이었겠지요.
<효과> (석공-정으로 돌 쪼아서 글자 새기는)
<해설> 백제 사람들의 정신이 깃든 사찰의 탑신을 훼손해가면서, 거기에다 정복자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문을 쪼아 새겼을 그 석공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5층석탑에 새겨 넣은 이른바 대당평백제국비명의 내용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할까요? 비문은 제1면 24행, 제2면 29행, 제3면 36행, 등 총 117행으로 각행은 16자 혹은 18자의 글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해설>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들이 상당수 있는데, 백제와 의자왕에 대한 악의적인 험담을 담은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풀옷을 입고 사는 어리석은 백제는 거리도 장안에서 만 리나 떨어져 있다. 이런 험한 지형지세를 믿고 감히 하늘의 이치를 어지럽히면서 근래에는 황제의 조칙도 어겼으며, 직언하는 신하를 밖으로 내 쫓고 형벌은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에게만 내리고 아부하는 자들만을 총애하여 등용하니…
<해설> 따라서 당나라가 응징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한 마땅히 망해야 할 나라였다, 이런 얘기지요. 비문에는 백제를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운 장수들의 이름이 나열돼 있는데, 소정방을 비롯하여 대체로 이런 인물들입니다.
낭독자 사지절신 구우이 마한 웅진 등 십사도 대총관 좌무위 대장군 상주국 형국공 소정방, 부대청관 유백영, 부대청관 동보덕, 부대총관 김인문, 행군장사 양행의, 좌장군 우원사, 우이도부총관 조계숙, 우일군 총고나 유인원, 좌무위 중랑장 김양도…
<해설> 이들 중에서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의 동생이고, 김양도 역시 신라 사람입니다. 백제의 멸망이 나당 연합군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소정방이 그 전쟁에 출정하면서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부여받은 직함입니다. ‘사지절신 구우이 마한 웅진 등 십사도 대총관 좌무위 대장군 상주국 형국공 소정방’…이렇게 대단히 긴 직함을 부여 받고 백제 정벌에 나섰는데, 앞에서 소정방이 백제에 대한 통치체제를 당나라 식으로 개편해서 발표했던 부분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정방이 당 고종으로부터 부여받고 왔던 직함 중에 이미 웅진 마한 등의 명칭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인서트-9. 테입<118> 노중국
(29:11 백제 멸망시키고 나서 5도독부를 설치하는데 5도독부 명칭하고 일치를 합니다. 그 전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올 때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전후 처리를 어떻게 하겠다, 하는 그런 계획까지를 가지고 왔다는 겁니다. 그냥 군대 가서 그냥 멸망시키고 그 후에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사전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죠. 사실 그거는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집니다. 29:55)
<해설> 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을 경우 백제를 어떻게 다스리겠다는 계획까지를 수립한 뒤에 출정을 했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증이 남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전쟁은 당나라 단독으로 벌인 것이 아니고 신라군과 당군이 연합작전 끝에 승리한 것이었는데, 백제영토를 당나라 맘대로 5도독부로 나누어서 도독을 임명하고, 그 아래에 주현을 두고 하는 것을 신라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을까요?
*인서트-10. 테입<116> 김영관
(40:43 당나라 군대가 신라까지도 내친 김에 공격해서 점령을 하려고 하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까지 했었습니다마는 고구려와의 전쟁문제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신라는 당연히 백제를 멸망시키고나서 백제 영토를 신라령으로 하려고 했었습니다마는 당시 신라가 가진 국력으로서는 당나라에 거역 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고. 41:24)
<해설> 신라는 12년 뒤인 672년에 가서야 당나라로부터 백제 영토의 일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게 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이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패배하고 의자왕이 항복을 함으로써 백제왕조가 멸망했을 때, 그 유민들이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를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무너지자 국외로 탈출해서 고구려나 왜국으로 간 사람을 의외로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요즘과 같지 않아서 가뭄이 심해서 흉년이 들기만 해도 다른 나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라가 망했는데도 왜 국외로 탈출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까요? 노중국 교수는 나당군에 의한 백제 도성의 함락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데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인서트-11. 테입<118> 노중국
(47:52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고 백제 조정에서도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리라 하는 거는 별로 생각을 안 한거지요. 어느 때 갑작스럽게 이제 예상외로 쳐들어와가지고 그 다음에 사비 함락되기까지가 시간이 크게 걸리지 않았으니까 상대적으로 밖으로 이탈 해나가는 파동은 좀 적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흥운동 같은 경우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한 3년 동안 치열하게 싸우다보니까 거기서 부흥군이, 부흥 백제국이 망하면서 나타나는 소위 왜나 고구려로 이탈해나가는 사람들은 숫자도 많이 나오고. 47:40)
<해설> 일본서기 제명기 660년 9월의 기록을 보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달솔 한 사람과 사미각종(沙彌覺從)이라는 사람이 왜국에 건너가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실려 있습니다.
달솔 금년 7월에 신라가 힘을 믿고 세(勢를 이루어서 이웃나라를 친하게 여기지 않고 당나라 사람을 끌어들여 우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포로가 되고 백성들도 거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해설> 이 외에는 왜국으로 망명한 사람이 있었다는 어떠한 기록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백제 부흥군이 전쟁에 졌을 때에는 백제유민들이 대거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660년에는 비록 의자왕이 나당군에게 항복을 했지만, 백성들은 나라가 아예 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 다음, 포로가 되어서 당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의 경우를 짚어볼까요?
낭독자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자 태, 융, 연, 그리고 대신들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2천8백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해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인서트-12. 테입<116> 김영관
(30:26 당나라로 끌려간 사람은 국왕인 의자왕을 비롯하여 태자 융, 태, 효, 이와 같은 왕족들입니다. 이 왕족들은 삼국사기에 보면 이 왕족과 대신들이 일만이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갑니다, 이 사람들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성 그리고 부도인 낙양성 등에 우선 안치를 시켜놓고 그 다음에는 지금의 광동성 쪽으로 강제 이주를 시킵니다. 31:14)
<해설> 1만3천여 명이나 끌려갔다면 의자왕을 비롯한 왕실가족들은 물론 이고 대좌평을 포함한 고위 귀족 관료들, 거기다 왕도인 사비를 비롯하여 웅진에 살고 있던 유력한 귀족들이 모두 잡혀 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효과> (바닷가, 파도 철석거리는)
소정방 자, 백제의 포로들을 모두 배에 태워라! 당나라로 압송할 것이다!
<효과> (사람들 배에 오르는)
<해설>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서 당나라군이 타고 왔던 함선에는 개선하는 당나라군과 그들의 전리품이 되어 호송당하는 패망국의 포로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효과> (노인, 기침 콜록거리는)
<해설> 그 포로들 중에는 연로한 의자왕도 있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가 어림잡아 일흔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나이에, 망국의 한을 안고서, 금강하구를 출발하여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산동반도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육로로 이동해야 했으니 참으로 고단한 행로였겠지요. 공주대 양종국 교수의 얘기 들어보시죠.
*인서트-13. 테입<117> 양종국
(56:42 중국까지 가는 여정이 쉬운 여정이 아니죠. 배를 타고 또 황해를 건너가야 되고, 또 산동반도부터 낙양까지 걸어가는 육로도 쉬운 길이 아닌데 수레를 타고 갔는지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지만 편한 그러한 이동은 아니었을 것 같고. 그렇다고 그러면 아마 포로로 잡혀가는 여행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심리적인 고통도 있었을 테지만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어려움을 많이 겪지 않았을까, 중국으로 끌려간지 며칠만에 죽었다는 것도 결국은 나이와 관련된 심리적인 타격, 그런 것들이 작용해서 일찍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57:26)
<해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 무렵에 네 차례나 당나라에 견당사로 파견 된 적이 있는 왜국의 이길연박덕(伊吉連博德), 일본식 발음으로는 ‘이키노무라치하카도코’ 서기 660년 11월 1일, 대단히 중요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길연 그 동안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려는 계획이 탄로날까봐 우리 견당사들을 출국시키지 않고 감금해두었던 당나라 측에서, 백제를 이미 평정한 후인 9월 12일에 가서야 귀국해도 좋다고 우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11월 1일, 장군 소정방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융 등 여러 명을 조당에 바쳤는데, 중국 황제는 칙명을 내려서 보자마자 풀어주었습니다.
<해설>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당나라의 조당에 바쳐져서 다시 한 번 항복의 예를 치른 다음에 석방되었다는 얘깁니다. 구당서 동이열전에도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낭독자 이자 및 태자 융 등 58명을 사로잡아 보내왔다. 황제는 이들을 꾸짖기만 하고 용서하였다.
<해설> 그리고 구당서의 다음 구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음악> (장송곡 분위기)BG
낭독자 의자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행으로써 섬기기로 널리 알려져 있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여 당시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 혹은 해동의 민자라고 불렀다. 당나라 서울에 와서 며칠만에 죽었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고, 특별히 구신(舊臣)들의 부곡(赴哭)을 허락하였다. 손호(孫皓), 진숙보(陳叔寶)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도 세워주었다.
<해설> 여기서 구신들의 부곡을 허락하였다는 표현은, 의자왕이 숨을 거두었을 때 옛 신하들이 곡을 하여 조의를 표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얘기겠지요. 의자왕의 유해가 손호와 진숙보의 묘 옆에 묻혔다 했는데, 손호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의 손자이며 오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오정공(烏程公)을 가리키고, 진숙보는 남북조 시대 진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후주(後主)를 가리킵니다. 진서(陳書) 후주 본기를 보면 진숙보는 하남 낙양의 망산(芒山)에 장사지냈다고 했으니, 비운의 백제 임금 의자왕도 망국의 한을 품고서 그 곳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러면 다시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을 한 이후의 백제로 돌아가 보기로 하죠. 당나라가 백제의 통치조직을 5도독부로 나누어서 통치하는 등 백제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당나라의 군사력이 미치는 범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종국 교수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인서트-14. 테입<117> 양종국
(51:53 나당연합군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지역은 양군대가 직접 정복을 했던 부여하고 오늘날 공주 당시 웅진 이 두 지역이었던 걸로 여겨지고 나머지 지역들에는 나중에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그런 세력들, 그러한 세력들이 아직 여전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크게 보면은 부여를 중심으로 한 지배와 웅진을 중심으로 한 이 두 지역이 일단 중심이 됐던 것 같고요. 52:30)
<해설> 형식적으로는 백제 전지역을 5도독부로 나누고 그 밑에 다시 주와 현을 두어서 책임자를 임명했지만 군사력으로 실질 지배를 하고 있는 지역은 백제의 도성이었던 사비와 웅진 두 곳 뿐이었다, 이런 분석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백제 부흥군의 활약을 소개하겠는데요, 먼저 나라를 빼앗긴 백제 유민들이 나당군에게 격렬하게 항거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애당초 당나라는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다음에, 태자였던 부여융을 내세워 백제에 친당 정권을 수립한 다음에 군사를 물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제 멸망이 숙원이던 신라가 강력하게 항의를 하자 처음 약속과는 달리 의자왕을 가두고는 군사를 풀어서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자행합니다. 그것이 백제 유민들의 적개심을 자극하여 격렬하게 봉기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학자들의 의견이 대체로 이렇습니다. 노중국 김영관 두 전문가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 보시죠.
*인서트-15. 테입<118> 노중국
(09:06 약탈하고 부녀자 겁탈하고 재산 빼앗고 방화하고 이런 것들이 자행이 되어집니다. 함부로 행해지는 것이죠. 이거는 특수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때 늘 있는 일입니다. 공격군이 공격을 해갈 때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일정한 보상이 있어줘야 되는 것이죠. 그 보상은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함락시켰을 때 올 수 있는 보상, 그 보상은 국가에서 주는 것이 아니고 일정 기간 동안은 완전히 그것을 내버려둡니다. 약탈하고 방화하고 하도록.09:48)
*인서트-16. 테입<116> 김영관
(20:24 대개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 백성들에 대해서는 커다랗게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게 고대사의 일상입니다. 지배층만 제거를 고 백성들은 정복한 나라에 편입을 시키면 그만인 것이 고대사의 일상적인 전쟁의 결과였는데 백제 의자왕과 왕자들 귀족들한테 신라에서 너무 가혹하게 하고 그리고 복수를 한다는 그런 차원에서 접근을 하다 보니까 백제로서는 사생결단을 하고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21:08)
<해설> 전쟁을 통한 약탈이 고대사회의 경제활동 중의 하나였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러나 신라의 경우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대야 성 전투에서 딸과 사위를 잃었던 원한이 워낙 깊었던지라, 백제의 항복을 받고나서도 군사를 풀어 일정 부분 보복적인 행위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효과> (정복군들, 말 타고 달려가며)
(마구 부수는)
(여자들 비명)
남자1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남자2 전쟁이 진 나라의 백성들이 으레 당하는 일 아니더냐? 게다가 임금이 항복을 해버린 마당에 무엇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냐?
남자1 임금이 붙잡혔더라도 백성들이 펄펄 살아 있는 바에 나라를 다시 세워야지요!
남자2 무기도 다 뺏기고 없는데 무얼 가지고 싸우단 말이냐?
남자1 몽둥이라도 들고나가 싸워지야지요! 맨주먹이면 어떻습니까! 자, 당나라군과 신라군을 쳐부수고 백제를 다시 세우자!
<효과> (사람들 함성 지르며 도보로 달려가는)
<해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달솔 여자진(餘自進)은 한 곳에 진을 치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았다. 이전의 싸움에서 무기가 다 없어졌으므로 막대기를 들고 싸워 신라군을 물리쳤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무기를 빼앗았으므로 얼마 후에 백제 군사들이 다시 날쌔져서 당나라군이 감히 대적하지 못 하였다.
<해설> 또 한 가지 요인으로는, 지난 시간에 소개했던 것처럼 의자왕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소정방과 김춘추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항복의 예(禮)’가, 현장을 목격했던 백제사람들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인서트-17. 테입<118> 노중국
(0:40 당나라 최고 사령관 소정방하고 그 다음에 신라 무열왕이 단상에 앉고 그 다음에 단하에 의자왕이 무릎을 꿇고 그 다음에 술잔을 들어가지고 바치고 이런 상황들, 또 그에 앞서가지고 의자왕의 타자 융이 결박돼가지고 무릎이 꿇려 있고 그 다음에 신라 무열왕의 아들 김법민, 나중에 문무왕이 됩니다, 의자왕의 아들 태자 융한테 침을 뱉고 욕을 하는 거죠, 대야성 전투에서 자기 누이와 매부가 죽은 것에 대한 분풀이식의 욕설을 해대는 것, 11:30)
<해설> 뿐만 아니라 노중국 교수는 유교 교육을 받은 백제의 식자층 사람들이 흥망계절의 정신을 널리 공유했던 것이 부흥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8. 테입<118> 노중국
(12:14 부흥군을 결집하려고 하면은 民들의 그러한 마음들을 모을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지도자들이 사실 좀 있어야 되고, 그네들의 思考의 문제도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 해볼 수 있는 것이 그 다시 지배층들의 ‘나라는 비록 망했더라도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야 된다’고 하는 정신, 이게 인제 중국 고전에는 興亡繼絶이라는 형태로 나타 납니다. 망한 것을 다시 일으킨다, 그 다음에 종묘사직이 끊어진 것을 다시 잇는다, 하는 게 흥망계절의 정신인데요. 13:01)
<해설> 본래 중국고전에 나오는 이 흥망계절(興亡繼絶)의 정신이란, ‘망해버린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후사를 잇게 한다’는 의미로서 전쟁에 패배한 나라의 왕자를 꼭두각시 임금으로 삼아서 그들의 조상의 제사를 이어가도록 한다는 경우에 쓰이던 말이었는데, 백제의 유민들은 그 흥망계절이라는 말을 망해버린 백제왕조를 일으켜 세운다는 뜻으로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부여 박물관 광장 한 켠에 당나라 장군 유인원이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기록한 유인원기공비의 비문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낭독자 가짜 승려 도침과 가짜 한솔 귀실복신이 스스로 말하기를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다고 선언하고…
<해설> 그 뜻을 풀이해서 얘기하자면 이렇다는 얘기고 실제로는 ‘흥망계절’ 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유교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백제인들의 유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부흥운동의 당위성을 표현한 흥망계절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러면 백제부흥군의 나당군에 대한 투쟁 과정을 본격적으로 소개 하기 전에, 부흥군을 이끌었던 주역들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복신이라는 인물입니다.
낭독자 -백제의 구장(舊將)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 서부 은솔 귀실복신이 매우 화가 나서 임사기산에 웅거하고 군졸들을 불러 모아 싸웠다.
<해설> 구당서에서는 복신을 구장, 즉 백제의 옛 장수라고 했고, 일본서기에서는 복신의 성을 귀실이라고 했으며 관등을 은솔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백제부흥운동사에서 이 복신은 총사령관 격인데, 그의 출신을 두고 해석이 구구합니다. 우선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28년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무왕은 신라가 빼앗아간 땅을 회복하려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진으로 나가 주둔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이를 듣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급히 알렸다. 무왕이 조카 복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해설> 이 때가 서기 627년입니다.
복신 백제국 대왕마마의 명을 받고 찾아온 복신이라고 하옵니다.
당태종 그대가 백제국왕의 조카인가?
복신 그렇사옵니다.
당태종 신라왕 김진평은 나의 번신이요, 백제 국왕의 이웃나라 왕인데, 백제가 매양 군사를 보내 서로 싸운다 하니 그리하여서는 안 될 것 이다. 나는 이미 고구려와 신라 사신들에게도 서로 화친할 것을 타이른 바 있느니라.
복신 백제국 대왕마마께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해설> 이 때 당나라에 가서 당태종 이세민을 만나고 온 백제 사신이 바로 무왕의 조카인 복신이었습니다. 당연히 무왕의 조카라고 했으니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였겠지요. 그런데 부여복신 혹은 여복신이라고 해야 할 것을 부흥운동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복신은 귀실복신이라고 올라 있습니다. 무왕의 조카라면 의자왕의 사촌이라는 얘긴데,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그 복신과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귀실복신은 동일인물일까요? 우선 양종국 교수는 그 두 복신이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9. 테입<117> 양종국
(59:32 김인문 같은 경우 처음 당나라에 파견된 게 23세거든요. 제가 또 파악을 해보니까 부여융이 처음 중국에 파견되었을 때 나이도 한 23세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은 무왕 조카로 627년에 중국에 복신이 처음 파견된 기록이 보이는데 그 때가 20세초반이라고 그러면은 부흥운동을 일으킬 무렵이라면 한50세 정도, 50세 좀 넘었을 때죠, 그 무렵이 되거든요. 나이에 대한 건 제가 확실히 모르니까. 그런데 기록으로만 봐도 그 정도면 제가 볼 때는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같은 인물로 저는 보고 싶어요. 1:00:14)
<해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23살이었다면 부흥운동을 할 무렵이면 50대 중반이 되고 만일 서른살에 갔다면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됩니다. 나이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부여씨였던 복신이 왜 귀실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인서트-20. 테입<117> 양종국
(1:01:06 일본학자는 결국 부흥운동 일으키는 이 과정에 아마 성을 부여에서 귀실로 바꾸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도라고요. 저 같은 경우에도 실제로 복신이 부흥운동 일으킨 과정에는 이미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정복당했을 때고 그러면서 의자왕이나 부여융을 중심으로 해서 이 왕족들 거의 모든 백제 중앙에 있던 왕족들은 다 끌려가던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여지거든요. 그렇다고 하면 아마 성을 바꿨을 수도 있고 본 인이, 본인 스스로. 이 당시는 또 백제가 정복당했던 시기고. 1:01:47)
<해설> 원래는 왕족으로서 부여씨를 성으로 썼으나,백제가 패망하고 나서 부흥군으로서 나당연합군과 싸우려면 왕성을 감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귀실씨로 바꿨을 것이다, 이런 분석입니다.
그런데 김영관 연구관은 부흥운동을 지휘하는 귀실복신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그 복신은 아닐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인서트-21. 테입<116> 김영관
(44:48 의자왕의 조카로 사료상에 기록이 됐습니다. 물론 무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복신도 나오는데 그 복신과 백제 부흥운동기의 복신과는 연대차가 너무 나서 동일인물로 보기에는 좀 어렵습니다마는 어쨌든 복신은 백제의 왕족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백제 왕족 복신과 그리고 승려인 도침, 삼국시대에는 승려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승려가 되는데 도침도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니었을까.45:32)
<해설> 무왕의 조카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그 복신은 아닐지라도 왕족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라는 얘기죠.
마지막으로 노중국 교수의 견해를 들어볼까요? 우선 하필이면 귀신 귀(鬼)자에다 집 실(室)자로 돼 있는 ‘귀실’을 왜 성씨로 삼았을까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인서트-22. 테입<118> 노중국
(57:40 신찬성씨록에 보면은 귀실이라고하는 성이 왜 나오게 됐냐, 귀신의 감화를 받았다, 이래가지고 귀실이라는 성을 칭하게 됐다는 성에 대한 유래도 나옵니다. 그렇게 보면 귀실복신의 성은 귀실이라고 봐야 됩니다. 복신은 왕족은 맞다, 왕족은 맞는데 무왕의 아버지대든가 그 윗대에 왕실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별도의 성을 칭하게 된 게 아니겠느냐 이렇게 봅니다. 그런 사례로는 가장 좋은 사례가 흑치상지의 흑치입니다. 그도 원래는 왕족 부여씨였는데 흑치라는 지역을 봉지로 받았기 때문에 그 家系는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 이게 나왔거든요. 그것하고 상당히 비슷한 형태가 아니겠느냐. 59:03)
<해설> 참고로 흑치상지 묘지명을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낭독자 그는 이름이 상지이고 자는 항원으로서 백제인이었다. 그 조상은 부여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성씨로 삼았다.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흑치상지의 조상은 원래는 부여씨였는데 조상 중의 한 사람이 공을 세워서 흑치 지역의 땅을 식읍으로 받게 되자 아예 성씨를 흑치씨로 정해버렸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복신의 경우도 본래는 부여복신이었으나 귀실이라는 지역을 식읍으로 받고나서 그 귀실을 성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런 분석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조카 혹은 사촌이면 평범한 왕족이 아니라 왕실의 핵심 인물 인데, 왕성을 버리고 성씨를 그렇게 함부로 바꾸었겠느냐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가 멸망했을 때의 귀실복신의 관등이 한솔로 나와 있는데 무왕의 조카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될 정도의 인물로서는 너무 낮은 관등이기도 하고, 또 33년이 지났으면 더 높은 관등으로 진급을 해야 할 터인데 16관등 중에서 겨우 다섯 번째인 한솔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이렇게 정리를 하지요.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그 인물일 수도 있고 별개의 인물일 수도 있다, 설령 별개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왕족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그 복신이라면, 사신으로 다녀와서 무슨 직책을 수행하다가 백제 멸망의 순간을 맞이했을까요?
*인서트-23. 테입<118> 노중국
(1:02:07 언제 돌아왔는지는 정확치는 않고요 돌아와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인제 부흥군을 일으킬 때 고장(古將), 옛 장수,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거하고 연계를 시켜보면은 당에서 돌아와가지고 백제에서 관료로서 생활을 하는데 주로 인제 군사적인 임무를 많이 맡은 장군으로서 활동을 많이 한 게 않겠느냐.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흥운동 일으킬 때 옛 장수, 복신, 이런 식으로 표현이.1:02:51)
<해설> 소정방이 포로로 잡아서 당나라로 데리고 간 사람은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을 위시하여 1만2천 명이 넘은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웬만한 귀족들은 다 잡혀갔다는 얘긴데,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을 만큼 백제왕실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을 복신은 왜 잡혀가지 않았을까요?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서 멈추고)
장수 장군, 큰일났습니다!
복신 무슨 일이냐?
장수 당나라군과 신라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사비도성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복신 무엇이라? 대왕마마께서는 웅진성으로 피신하셨다 하지 않았느냐?
장수 웅진성에 피신해 계시던 대왕마마께서도 이제 더 이상 싸우기를 포기하고 백기를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복신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나! 대왕마마께서 항복을 해버리셨다 하니 신하된 사람으로서 따르지 않을 수 없구나. 사비로 가자!
장수 안 됩니다, 장군! 장군은 불행 중 다행으로 사비에 있지 않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지금 사비로 가서 스스로 적군의 포로가 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가시면 안 됩니다!
복신 안 가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장수 대왕마마께서 항복을 하시더라도 장군께서는 지방의 군사들을 규합 해서 끝까지 싸우셔야 할 것입니다. 소장도 목숨을 바쳐 돕겠습니다.
복신 좋다, 그렇게 하자!
<해설> 그렇게 해서 복신은 부흥운동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겠지요.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08편>
오합지졸의 부흥군, 소정방 군대와 격돌하다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1.12(일) 00:05-01:00
* 나오는 사람들
낭독 이승주
승려, 장수 이병용
도침 박영재
일관리, 남자1 김석환
부여풍 진 웅
달솔, 남자2 백승철
각종 정형석
정무 방우호
병사1 장민혁
흑치상지 심승한
복신 김대중
병사2 남도형
소정방 이지환
유인원 차진욱
*시그널 + 타이틀
<해설>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지난 시간에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 중의 한 명이었던 ‘귀실복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탐색해 봤습니다. 이번에는 부흥운동 초기에 복신과 쌍두체제를 형성하며 백제 부흥군을 지휘했던 ‘도침’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기로 하겠는데요, 유감스럽게도 문헌기록을 다 뒤져봐도 ‘그가 승려였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승려 출신으로서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웠다면, 그가 동원한 부흥군 역시 승려 출신의 승병들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려사’의 최영전을 보면 고구려 때 연개소문이 승병 3만 명을 출병시켜서 당태종의 군사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정작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기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백제의 승려였던 도침이 승병을 결성하여 나당군과 싸웠다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승군(僧軍) 혹은 승병(僧兵)활동이라 얘기할 수 있겠지요.
공주대 양종국 교수의 설명입니다.
*인서트-1. 태입<117> 양종국
(1:14:22 도침은 승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백제가 불교가 상당히 발전했고 무왕 의자왕 때까지도 왕흥사 터도 발굴되고 있지만 승려도 상당히 큰 세력을 이루고 있던 것 확실했던 것 같거든요. 그러한 부분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 승려들이 힘을 규합하는 그런 역할, 요즘으로 표현하면 아마 승병을 이끄는 승병장 같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여겨집니다. 도침의 경우에는. 1:15:58)
<해설> 계명대 노중국 교수 역시 도침이 승병을 거느린 장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만일 도침이 그저 평범한 승려였다면, 복신과 더불어서 부흥운동기의 백제의 정사를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인서트-2. 테입<118> 노중국
(1:23:24 승려들이 나라가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무기를 들고 일어나게 되어지는데 그래서 승병을 거느린 장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하고 그 담에 두 번째로 그래도 이 승려는 승려이되 적어도 승군을 이끌 정도라고 하면은 당시 불교계 내에서의 지위가 그리 녹녹한 인물은 아니었을 거다, 여기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도침이 그러면 이제 왕족 출신이냐 이니면 귀족 출신이냐, 이거는 사실은 얘기할 수 없습니다. 1:24:15)
<효과> (목탁 소리)
승려 (불당 문 열고 들어오며)대사님! 큰일 났습니다!
도침 (의젓하게)어허, 불전에서 어찌 이리 소란을 떠느냐?
승려 지금 염불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대사님. 사비도성에 이어 웅진성까지 나당연합군에게 함락 당했다고 합니다.
도침 (목탁소리, 염불 그치고)뭐라고 하였느냐? 당나라하고 신라 군사들이 도성을 함락했다는 말이냐?
승려 그렇습니다, 대사님.
도침 지금 대왕마마는 어찌 되었다 하더냐?
승려 적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신 대왕마마와 왕자들이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끌려오고 있다 하옵니다. 이제 곧 우리 대왕마마께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하고 신라왕 김춘추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례를 올릴 것이라고…
도침 너, 이놈!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오, 나무관세음보살…. 모든 승려들은 수행을 멈추고 전장에 나갈 채비를 갖추도록 하라! 이웃 사찰과 암자에도 두루 연락하여 모두 승병에 참여하도록 하라!
<해설> 이렇게 해서 도침은 대대적으로 승병을 규합하였을 것이고, 그 승병들이 부흥군의 한 축이 되면서 그 자신도 복신과 더불어 부흥군 전체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당서 백제전과 유인원 기공비의 금석문을 보면 도침은 항상 그 이름이 복신과 나란히 기재되어 있고, 백제 부흥군의 초기 전투부터 복신?도침이 함께 활약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도침과 복신은 부흥운동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점쳐볼 수 있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백제 부흥군의 활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흑치상지입니다.
낭독자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키가 7척이 넘고, 성품이 날래고, 굳세고, 그리고 지략이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 군장이 되었는데, 이는 당나라의 자사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해설> 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편의 첫 부분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흑치상지는 초기에 백제 부흥군으로 빛나는 투쟁을 하지만 나중에는 당나라에 회유되어서 오히려 백제 부흥군을 정벌하는 데에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지요. 그런 다음 당나라로 들어가서 당나라 장수로서 돌궐족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으나 결국 누군가의 모함을 받아서 옥에 갇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흑치상지 열전편에도 그의 백제부흥군으로서의 활동은 아주 짧게 기록돼 있는 반면에, 당나라로 들어가서 당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내용이 상대적으로 길게 나열돼 있습니다.
문제는 ‘검을 흑(黑)’자에다 치아를 나타내는 ‘이 치(齒)’자를 쓰는 그 ‘흑치’라는 글자가, 그 동안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이상한 성씨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29년 가을, 중국 낙양 북망산에서 도굴꾼들에 의해 묘소 한 군데가 도굴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유해의 신원이 묘지명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바로 흑치상지,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흑치준이었습니다. 서울대 송기호 교수가 해석한 흑치상지 묘지명의 번역문 일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부군(府君)의 이름은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 인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성씨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을 역임했으니,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였고,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해설> 이 묘지명에는 흑치상지의 생전의 행적들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으나 모두 당나라 장수로서 세운 공적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 그가 백제 부흥군으로 활동했다는 얘기는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흑치상지의 조상 중의 한 명이 흑치 지역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부여에서 흑치로 성을 바꿨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도대체 그 흑치라는 지역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인서트-3. 테입<118> 노중국
(1:07:22 이걸 해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집니다. 하나는 인체의 말 그대로 이가 검다, 이래 가지고 그와 연관시켜서 흑치지역을 찾아가는 방법이 하나 있고요 그 다음에 하나는 흑치라 하는 거는 우리 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지 실제 신체 구조상 이가 검다는 그런 뜻은 아니다, 이렇게 보고서 흑치지역을 인제 한 번 찾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앞의 경우에는 신체구조와 관련해서 검은 이 이렇게 할 때는 중국 사서에 흑치국 같은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인제 필리핀 쪽으로 이렇게 보는 견해도 있는데요. 1:08:09)
<해설> 그렇다면 백제의 지명 중에서 흑치로 표기될 수 있는 지역은 어디였을까요? 노중국 교수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인서트-4. 테입<118> 노중국
(1:08:36 흑니, 검은니 이게 검은 내, 삼국사기 지리지 같은 데 보면 내는 우리 내천자 있잖아요 샘 할 때 샘물 할 때 내 천 자로도 표기되고 그 다음에 흑양 토양 할 때 양(壤) 이거도 이제 내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흑니는 흑내 흑양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되어질 수 있고 그래서 예산군 덕산 이 쪽이 흑양으로 또 지리지에 흑양으로도 나오고 있으니까 이 쪽이 아니겠느냐. 1:09:23)
<해설> 그러니까 당시에는 한글이 없었기 때문에 한자를 빌려서 이두식으로 우리말을 표현했는데,
낭독자 ‘흑치’는 ‘검은 니’로 읽을 수 있고, ‘니’는 ‘내’ 혹은 ‘노’등과 상통한다. 이럴 때 주목되는 것이 오늘날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이 백제 때 금물현(今勿縣)이었다는 사실이다. 금물은 ‘검은 내’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흑치의 ‘검은 니’와 상통한다. 따라서 흑치와 금물은 동일지명에 대한 표기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해설> 그래서 예산군 덕산면 지역이 흑치상지의 조상이 식읍으로 받았다는 흑치 지역이라는 추론입니다. 노중국 교수의 부흥운동 관련 논문을 인용해서 보충설명을 해드렸습니다만 설명 자체가 참 난해하지요? 흑치(黑齒)라는 한자가, 어떤 지역의 우리말 발음을 따서 표현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렇게 비정한 것이지요. 다소 무리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만, 예산군 덕산면 지역이라면 부흥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임존성과도 가깝기 때문에, 그러한 견해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그 덕산 지역에 실제로 검은 치아를 가진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얘기 하기도 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의 얘깁니다.
*인서트-5. 테입<116> 김영관
(53:51 실제 그 예산의 덕산 수덕사가 있는 덕산 지역은 잘 아시다시피 온천지대입니더. 온천에는 불소가 포함이 돼 있습니다. 온천물에는. 그 화학기호 F로 플루오르라고 하는 불소가 있는데 그 불소가 다량 함유된 그런 물을 오래 마신다고나 쓰면은 치아가 검게 변한다고 합니다. 정말 백제 당시에 불소가 함유된 그런 온천물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이가 검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마는. 54:34)
<해설> 그런데, 백제 연구자들 중에서 흑치상지의 그 흑치 지역을 대단히 파격적인 곳으로 비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노중국교수의 얘기 중에 필리핀이라는 말이 잠깐 나왔습니다만, 흑치상지의 조상이 받은 흑치라는 곳은 동남아시아의 필리핀이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은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이도학 교수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흑치국을 필리핀의 어떤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이도학 교수의 저서 ‘백제인물사’에 나오는 해당 부분을 발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흑치를 과연 한반도 일원으로 비정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문시된다. 왜냐면 모든 지리서를 통해 보더라도 흑치를 백제 영역이나 한반도로 비정할 수 있는 유사지명이 전혀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흑치상지의 묘지명은 중국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 분명하므로 중국적인 세계관 속에서 흑치의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 풍속상이를 검게 한 데서 유래한 ‘흑치’라는 지역은 중국 사서에 명료하게 확인된다.
<해설> 이 교수는 실제로 산해경과 관자(管子), 그리고 회남자(淮南子), ‘삼국지’ 등의 사서에 흑치국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 책 가운데는 그 소재지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암시하는 문구가 보인다고 소개 합니다.
낭독자 회남자에는 “동남방으로 동북방까지에는 대인국, 군자국, 흑치민, 모민, 노민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신당서 남만전을 보면 “군소(群小)와 만이(蠻夷)의 종류는 많아서 기록할 수가 없는데 흑치, 금치, 은치 세 종류가 있고, 사람을 만날 때는 칠(漆)이나 금은을 새겨서 치아를 장식한다”고 기록하여 흑치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말 정몽주의 시 가운데 “치아에 물들이는 것은 일찍이 월(越)의 습속이었다”라고 하여 중국 남부지역을 가리키는 ‘월’ 지역에서는 치아를 물들이는 습속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보다 일찍이 중국의 ‘양가빈’은 중국 역대 문헌에 보이는 흑치에 관한 기록과 해류 등에 관하여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 위치를 지금의 필리핀으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흑치가 동남아시아에 소재한 지역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백제는 이미 6세기 무렵에 제주도-북큐슈-오키나와-대만해협-필리핀군도-인도차이나반도를 거쳐서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을 정도로 발달된 항해술과 넓은 교역반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해설> 우리가 백제 부흥운동 얘기를 하면서,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한 인물의 성씨에 불과한 ‘흑치’라는 글자에 이처럼 긴 시간을 할애해서 집착하는 것은 그 이유가 있습니다. 흑치를 한반도의 충청도 지역에서 찾느냐, 멀리 필리핀까지 그 가능성을 열어 두느냐에 따라서, 백제의 영역이 한반도 서남부에 국한됐느냐, 중국 대륙은 물론 동남아 일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느냐를 가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백제의 담로제를 소개하면서 대만이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던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학자의 견해를 소개해 드렸지요? 따라서 흑치상지의 조상이 만일 필리핀 북부에 위치한 흑치지역을 식읍으로 받았다면 그 곳 역시 백제의 한 담로로서 지배를 받았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주요인물 가운데 마지막으로 부여풍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부여풍은 실질적인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32대왕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의 이름이 일본서기에는 ‘풍장’으로 나오기 때문에, 사서에 따라서 부여풍장, 부여풍, 여풍, 풍왕 등 여러가지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도성이 함락당하고 의자왕이 항복했을 당시 바다 건너 왜국에 있었기 때문에 고국의 사정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왜국에 갔을까요?
낭독자 서명천황 3년 3월, 백제왕 의자가 왕자 풍장을 보내서 볼모로 삼았다.
<해설>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서명 3년이면 서기로 631년이 되고 이때는 의자왕이 아직 왕자 신분이었던 백제 무왕 시대입니다. 사실은 풍장이 왜국에 갔던 것은 의자왕 때였는데 일본서기의 편자들이 편년을 잘 못 해서 그 기사가 무왕 시기에 간 것으로 배치된 것이다, 이렇게 정리한 바가 있습니다.
*인서트-6. 테입<117> 양종국
(1:22:33 그 사료를 정리하다가 정리하는 그 학자가 혼동을 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그런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판단하기로는 의자왕 때의 기록인데 잘못 해서 무왕 때 들어간 것으로 그렇게 보여져요. 그리고 그 시기가 잘 못 들어갔다고 볼 때가 가장 설득력이 있지 그게 아니라 의자왕과 무왕이 명칭이 뒤바뀌었다든지 이렇게 보면은 기록하는 사람이 그걸 잘 못 바꿔서 기록하는 그런 것 보다는 잘 못 끼워 넣을 확률이 더 크거든요. 그래서 잘 못 끼워진 게 아닌가. 그래서 여기서 풍장은 의자왕의 아들로 저는 첨부터, 의자왕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그렇게 봐야. 1:23:14)
<효과> (산 중턱-새 소리)
(망치로 나무 상자 못질하는)
일관리 (걸어와서)왕자 나리, 지금 바위 밑에서 뭘 하시는 것입니까?
부여풍 허허허, 이게 바로 벌통이니라.
일관리 벌통이라니요? 날아다니는 벌 말입니까?
부여풍 그렇단다. 이렇게 벌통을 만들어 놓으면 벌들이 날아와서 집을 지은 다음 새끼를 치고 그 벌들이 꿀을 따다가 저장해 두면 우리가 아주 달콤한 꿀을 맛볼 수가 있는 것이야.
일관리 야아, 그것 참 신기합니다.
부여풍 우리 백제에서는 산간마을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가 양봉을 하는데 너희는 처음 보느냐?
일관리 그렇습니다요, 왕자 나리.
<해설> 왜에 파견된 부여풍은 일본의 나라분지에 소재한 삼륜산에다 백제에서 가져온 벌통 네 개를 놓고 벌을 치는 등 유유자적하면서 소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륜산에 벌통 네 개를 놓고 길렀으나 끝내 번식하지 못하였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의 양봉기술이 미숙했거나 아니면 환경이 맞지 않았겠지요.
서기 660년 9월, 백제로부터 사미각종(沙彌覺從), 즉 각종이라는 승려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달솔 한 사람이 왜에 도착합니다.
달솔 왕자님, 우리 백제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비도성을 빠져나와 배를 타고 어렵게 도착했사옵니다.
각종 소승은 각종이라 하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부여풍 어려운 사정이라니? 대체 우리 백제가 어떻게 됐다는 말이냐?
달솔 지난 7월에 신라가 이웃나라의 도리를 어기고 당나라를 끌어들여 대대적으로 우리 백제를 공격해 왔사옵니다.
부여풍 그래서, 우리 백제가 나당연합군을 막아내지 못 하였다는 말이냐?
각종 소정방이라는 자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무려 13만에 이르렀고 신라군사 5만까지 더하여 18만대군이 침공해온지라 결국…항복하고 말았사옵니다.
부여풍 이럴 수가…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그럼 대왕마마, 아니 아바마마는 어찌 되었느냐?
달솔 대왕마마를 비롯한 왕실가족과 귀족들이 모두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당나라로 끌려갈 날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부여풍 (허탈하게)허허, 허허허허…칠백년 백제사직이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단 말이냐.
<해설> 그러나 부여풍은 왜에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나당연합군의 포로가 되는 불행은 피할 수 있었고, 훗날 부흥 백제국의 왕으로 옹립되어서 부흥운동의 상징적인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러면 이제부터는 앞에서 소개한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백제부흥을 위한 투쟁을 차근차근 짚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당나라 군사는 수도인 사비성을 비롯한 백제지역의 일부만을 점령하였고, 대부분의 백제 옛 땅은 백제 유민들의 수중에 들어 있었습니다. 신라군 역시 탄현과 황산벌, 기벌포를 거쳐 사비성에 이르는 백제의 일부 거점만을 점령한 상태여서, 대부분의 지방군성(地方群城)들이 아직 백제 지방 세력들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었던 것 입니다.
정무 비록 대왕마마는 적군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는지 모르나, 우리 두시원악의 군사는 결코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한 적이 없다. 당나라 군을 몰아내고 사비도성을 되찾고야 말 것이다. 가자!
<효과> (수백 명의 보병들, 함성 지르고 달려 나가는)
<해설> 두시원악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군사를 모아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는 사람의 관등이 좌평이고 이름은 정무라고 나와 있는데 좌평은 백제의 제1관등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높은 벼슬을 가진 정무는 어떻게 해서 당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않고 살아남았을까요?
*인서트-7. 테입<118> 노중국
(1:26:58 백제가 망할 당시에 정무도 사비성에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시원악이라는 그 지역에 사비성이 아닌 지방 외곽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관등은 좌평입니다. 좌평은 최고관등인데 정무가 이름이고 성이 별도로 있는지 그거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정무 말고 정진이라는 사람도, 또 하나 정복이라는 사람도 있고.1:27:45)
<해설> 나당연합군에게 사비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던 그 시기에 좌평 정무는 우연하게 도성을 비웠다가 화를 면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뒤늦게, 도성이 함락당하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실가족과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겠지요.
정무 허허, 내가 이 나라의 좌평인데…잠시 도성을 비운 사이에 나라가 망해버렸다는 말이냐, 흐흐흐흑…. 좋다, 군사를 모아서 내 기필코 빼앗긴 도성을 되찾고야 말 것이다. 가자, 이럇!
<효과> (말 달려가는)
<해설> 도성으로 돌아가던 중에 의자왕의 항복소식을 들었다면, 그는 왜 하필 말머리를 돌려서 두시원악으로 갔을까요?
앞에서 흑치상지를 소개할 때, 흑치라는 곳이 흑치상지의 조상이 받았던 식읍지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요, 좌평 정무가 군사를 모아서 진을 쳤던 두시원악 역시 정무의 식읍지였을 것이다, 노중국 교수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인서트-8. 테입<118> 노중국
(1:30:20 정무가 두시원악을 근거로 부흥군을 일으킨다고 했을 때 이 두시원악은 정무의 가문의 식읍지일 가능성, 자기 식읍지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 그래서 거기에 있다가, 화를 면했고 화를 면하고 난 다음에 가만 있을 수 없겠다, 망한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 되겠다 해가지고 인제 부흥군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1:30:59)
<효과> (군사들 뒤엉켜 싸우는-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등)
정무 나라를 빼앗길 판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느냐! 목숨 아깝다 생각 말고 용감하게 싸우자. (달려 나가 칼 휘두르며)야아아아!
<해설> 그러나 정무가 그 전투 이후에 어떤 활동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소수의 병사들을 모아서 전투에 나섰다가 나당 연합군에게 진압당하고 그 자신도 전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무가 두시원악을 근거로 해서 일어날 때 사비도성 근방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백제유민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백제의 도성이 함락되자 그 여적(餘敵)들은 남잠성, 정현성 등에 의지하고 군사를 일으켜 대항했으며, 또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에 진을 치고 나당연합군에게 대항하였다.
<해설> 그러나 이 싸움은 백제 유민들이 벌이게 되는 본격적인 전투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백제 부흥군이 초기에 일어날 때 이렇다 할 구심점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봉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시원악에서 좌평 정무가 군사를 일으키고 난 다음에 사비성 가까운 지역에서 여자진, 즉 부여자진이 또 군사를 일으켰고, 풍달군 쪽에서는 흑치상지가. 뒤이어 임존성에서는 복신과 도침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본래 흑치상지는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당군에게 항복할 때 그 역시 당나라군에게 투항을 했습니다. 그런데,
병사1 장군, 지금 나당연합군이 포로가 된 우리 대왕마마와 왕자들을 감금 하고 백제 백성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날뛰면서 약탈과 양민살해를 무차별로 자행하고 있습니다.
흑치상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으음, 당나라 군에게 고개 숙였던 항복의 뜻을 이제 거두어들이겠다. 나는 지금부터 군사를 모아 저 침략군들을 무찌를 것이다. 가자!
<효과> (두 사람, 말 타고 달려가는)
<해설> 흑치상지는 나당군의 백제인에 대한 약탈, 방화, 강간, 살육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서 부흥운동에 뛰어든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군장(郡將)으로 있던 풍달군으로 가서 거병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당서 유인궤 열전을 보면 별부 출신의 사타상여(沙?相如)가 서부 출신의 달솔 흑치상지와 함께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백제의 수도에는 전부, 상부, 중부, 하부, 후부 이 5부를 두고 있었는데 별부(別部)라면 이들 5부에 속하지 않는 특별한 부(部)를 일컫습니다. 일각에서는 천도 논란이 일고 있는 전라북도 익산지역을 별부로 보고 있습니다. 그 주장이 맞다면 사타상여는 익산지역의 군장들을 이끌고 나당군과의 전투준비를 한 셈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부흥군의 총사령관 격인 복신과 도침은 어디 있었을까요?
낭독자 백제의 승려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으로 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해설> 구당서 백제전을 보면 도침과 복신이 초기에 거점으로 삼았던 성이 주류성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인원의 공적을 새겨놓은 유인원기공비에는 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낭독자 서쪽으로 재앙의 조짐이 보여 강성해지자 이내 반역을 도모하니, 곧 가짜 승려 도침과 가짜 한솔 귀실복신이 그들이다. 이들은 우두머리가 되어서 사납고 교활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성에 성채를 쌓고 웅거하여 벌떼처럼 모여서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산골짜기에 가득 차니…
<해설> 구당서와 유인원기공비에는 복신과 도침이 초기에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주류성이 아닌 임존성인 것으로 돼 있습니다. 아무래도 구당서 보다는 백제 멸망기에 새겼던 유인원기공비의 내용을 신뢰해야겠지요. 일본서기에는 또 이렇게 나타납니다.
낭독자 서부은솔 귀실복신이 매우 화가 나서 ‘임사기산’에 웅거하여 진을 치고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 모았다.
<해설> 여기서 임사기산은 곧 임존성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복신과 도침이 초기에 거점성으로 삼았던 곳을 임존성으로 보는 데에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효과> (병사들 모여서 웅성거리는)
복신 장졸들은 잘 들어라! 우리가 나당연합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다시 세울 때까지는, 여기 계시는 도침 큰스님을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영군(領軍) 장군이라 부를 것이다!
도침 아울러 여기 계시는 복신 장군은 상잠(霜岑) 장군이라 호칭할 것이니 우리 승병들뿐만 아니라 모든 장졸들은 그리 알고 절대 복종하라. 알겠는가!
<효과> (병사들 “와!” 함성)
<해설> 구당서에는 복신과 도침이 “스스로 장군임을 칭하고서, 당나라를 배반하고 도망간 백제 군사들을 유인하여 끌어 모으니, 그 세력이 아주 커졌다”, 이렇게 다분히 조롱하는 투로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나당연합군과 한판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 거점으로 삼은 임존성은 어떤 성이었을까요? 임존성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 구축된 돌로 쌓은 석성입니다.
*인서트-9. 테입<118> 노중국
(1:42:02 둘레가 5194척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고 그 안에 우물이 셋이 있다, 이런 식으로도 표현이 돼 있습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산성입니다. 이게 백제 당시에는 5방중의 하나인 서방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제의 지역을 다섯 개로 나눴을 때 그 중의 서방이죠. 서방의 중심성을 방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임존성이 서방의 가장 중심성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거죠. 1:42:40)
<해설> 노중국 교수가 얘기한 성 둘레 5,194척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2천4백50미터에 해당합니다. 어림잡아서 성의 둘레가 2.5킬로미터쯤 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효과> (병사들, 통나무 톱질하고)
(땅 파는 등)
복신 이제 우리는 우리의 원수 나당연합군과 목숨을 건 한 판 전쟁을 벌일 것이다. 이 전투에서 지면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장졸들은 적군이 쳐들어와도 끄떡없이 버틸 튼튼한 목책을 세우도록 하라!
<해설> 복신 등의 부흥군은 임존성 둘레에 소책(小柵)과 대책(大柵), 다시 말해서 나무 기둥을 세우고 울타리를 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입니다.
병사2 장군님! 창칼이나 활이 없는 사람이 태반인데, 전쟁이 벌어지면 맨주먹으로 싸워야 합니까?
도침 어찌 맨주먹이라고 하느냐! 무기가 없는 병사들은 돌을 던지면 될 것이요, 그도 아니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워야 할 것이다. 알겠는가!
병사2 예, 장군님!
*인서트-10. 테입<118> 노중국
(1:39:50 군사조직이 와해된 속에서 군대 긁어모으니까 군졸들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했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죠. 마음속에 의욕은 넘치고 나라를 다시 구해야 되겠다는, 그런 어떤 강렬한 정신력은 가졌는데 사실은 무장은 별 볼일 없는거죠. 손에 잡힌대로 막대기든 골이든 뭐 이런 거 가지고 싸우는 것, 좋는 점은 하나 있습니다, 이 쪽 지리를 잘 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엔 또 사기가 충천했다는 것. 1:40:31)
<효과> (멀리서 보병들 함성 지르며 다가오는)
복신 저게 무슨 소리냐! 나당연합군이 벌써 공격을 시작했느냐?
병사2 아니옵니다, 장군.
도침 그러면 저게 무슨 소리냐?
병사2 풍달군에서 흑치상지 장군이, 그리고 별부에서 사타상여 장군이 각각 군사를 몰고 우리와 합류하기 위해서 이 곳 임존성으로 오고 있습니다.
복신 허허허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도침 두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면 나당연합군이 제아무리 대군이라 한들 무엇이 두렵겠느냐, 허허허…
*인서트-11. 테입<118> 노중국
(1:35:48 고 때에 임존성 안에는 복침 도침 이게 주력군이고 그 다음에 풍달군에서 부흥군을 일으킨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또 여기에 호응을 하는 이런 현상이 되어진 거고 그래서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가지고 소정방이 거느린 군대가 공격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공격해오자 뷰흥군 쪽에서는 이걸 막기 위해서 임존성 안에다가 다시 大柵, 小柵, 이렇게 별도의 방어책을, 방비 시설을 해가지고 막는. 1:36:34)
<해설> 자, 이제 그 동안의 자잘한 국지전을 제외하면, 백제부흥군으로서는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여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서 전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임존성으로 합류하게 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왕족 출신으로서 총사령관 격인 복신과 승병을 이끌고 부흥운동에 나선 도침의 지휘를 받는 조직 구도로 편성이 된 것이지요. 거기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부여자진’도 이 전투에 합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음악> (브릿지)
소정방 무어라고 했느냐? 복신과 도침이 임존성에 반역의 무리들을 모아놓고 감히 우리 당나라 대군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큰소리 치고 있단 말이냐?
유인원 그러나 임존성이 워낙 공격하기에 까다로운 성이어서 너무 얕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소정방 내가 장군에게 사비도성을 지키도록 명했거늘, 어찌 하여 그리 나약한 소리를 하는가? 이번 전투는 내가 직접 지휘할 것이다!
유인원 어찌 오합지졸에 불과한 백제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에 대장군께서 직접 나서신다 하십니까. 소장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진압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소정방 아니다. 백제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도 내가 했으니, 백제 부흥을 외치면서 날뛰는 무리들을 깨끗이 정리한 다음에 본국으로 귀환할 것 이다. 출정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유인원 예, 대장군 나리!
<해설> 앞에서 소개한 내용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침공에 나섰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그의 부하인 유인원이 나눈 대화입니다. 혹시 청취자 여러분 중에서는,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이 격돌했던 임존성 전투 시기에는, 소정방은 이미 당나라로 귀환하고 없는 상황이 아니냐, 이렇게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요, 정리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서기 660년 8월 2일에 의자왕은 소정방과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 앞에서 항복을 합니다. 그로부터 24일이 지난 8월 26일에 소정방은 군사를 이끌고,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 버티고 있는 임존 성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리고 일주일쯤 뒤인 9월3일에 소정방은 당나라로 돌아갑니다. 지난 시간에 의자왕을 비롯한 1만3천여 명의 백제인들이 소정방의 포로가 되어서 당나라로 끌려간 부분을 먼저 소개했습니다만, 사실 백제 부흥군과 소정방의 당나라군이 임존성에서 격돌하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의자왕은 당나라군에게 감금된 채로 아직 사비도성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죠. 그건 그렇고-.
장수 (말타고 달려와서)장군, 지금 당나라 소정방이 직접 군사를 몰고 임존성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신라군도 함께 진격해오고 있습니다.
복신 알겠다.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흑치상지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제일 선에 나서서 당나라군을 적군을 방어하시오!
흑치상 알겠습니다. 자, 가자!
<효과> (보병들 달려 나가는)
복신 그리고 도침대사, 아니 영군장군은 승병을 이끌고 남쪽 언덕에 매복했다가 목책으로 접근하는 적군을 맞아 싸우시오. 나는 신라군 본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겠소! 자, 갑시다!
<효과> (군사들 사방으로 막 달려가는)
<해설> 사실 외형적으로 보면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이라 해야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서 훈련도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이었고,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는 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는 10만이 넘는 당나라의 대군이었습니다. 거기다 신라군까지 합세했으니.
<효과> (상 안팎에서 함성 소리)
(화살 비 오듯 쏟아지는)
복신 물러서지 마라! 활이 없는 병졸들은 돌을 굴려라!
<효과> (돌 구르고 깨지고 하는 소리)
흑치상 당나라군이 함정에 걸려들었다! 공격하라!
<효과> (군사들 함성 지르며 언덕 뛰어 내려가는)
흑치상 칼이 없는 병졸들은 몽둥이를 휘둘러라!
<효과> (양쪽 군사들 뒤엉켜 싸우는)
<해설> 일본서기는 이 싸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무기가 없었으므로 막대기를 들고 싸워 신라군을 무찔렀다. 백제군의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았으므로 얼마 뒤에는 백제 군사들이 다시 강해져서, 당군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복신과 부여자진을 부추켜 세우며 ‘좌평 복신, 좌평 자진’이라고 했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
<해설> 일본서기는 다른 인물에 비해서 복신을 지나치다싶게 옹호하는 듯 한 필치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투의 총지휘자로서 복신의 역할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효과> (양쪽 군사 뒤엉켜 싸우는)
소정방 (멀리서)당나라 군사는 싸움을 멈추고 퇴각하라!
<효과> (북 소리)
(기병들 달려가는)
복신 적군이 후퇴한다! 아직 도주하지 못한 적군을 사로잡아라!
<효과> (소리 지르며 달려가는)
<해설> 자, 그렇다며 이 싸움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우선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나당연합군은 임존성의 대책을 공격하였으나 백제의 많은 군사들이 험지에 의지해 있었으므로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다만 소책만을 격파하였다.
<해설> 백제 군사들이 험한 지역에 진을 치고 있어서 무찌르지 못했고, 대책, 즉 큰 목책을 격파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작은 울타리 즉 소책만 격파하고 물러났다, 이런 내용입니다.
*인서트-12. 테입<116> 김영관
(49:50 당나라군이 임존성을 포위를 하고 계속 공격을 했는데 흑치상지군, 당시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흑치상지가 아주 적절하게 방어를 해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의 소정방은 일단 백제왕인 의자왕을 사로잡고 항복을 받아냈기 때문에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존성 공격에 시간이 오래 걸리자 철수를 하고 당으로 돌아갈 차비를 했던 것입니다.50:31)
<해설> 김영관 연구관의 얘기 따르면 이 당시 소정방은 백제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당나라로 돌아갈 생각 때문에 구태여 총력을 기울여 싸우지 않고 철수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흑치상지를 비롯한 수비군이 방어를 잘 하기는 했지만 정쟁의 승패를 따질 상황은 아니다, 이런 의견입니다. 그러나 노중국 교수의 의견은 다릅니다.
*인서트-13. 테입<118> 노중국
(1:38:25 삼국사기나 또 소정방 열전에 보면은 그냥 소책만 함락하고 물러났다 이렇게만 돼 있습니다. 이거는 사실 실제 상황을 굉장히 축소한 것, 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역사 記述者들의 하나의 그 뭘까 왜곡된 표현이고 실제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히고 당나라 군대가 포로로 잡히고 죽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큽니다.1:39:00)
<해설> 만일 나당연합군이 임존성 공격에 나섰다가 어느 정도의 전과만 올렸다 해도, 소정방 열전에 그 전쟁결과를 기술할 때는 대단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과장했을 텐데, ‘백제군이 험지에 진을 치고 있어서 무찌르지 못했고 겨우 소책, 즉, 작은 목책만 좀 부수고 돌아왔다’고 적은 걸 보면 노중국 교수 말대로 소정방군이 큰 손실을 입고 맥없이 철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노중국 교수는 그 전투에서 많은 당나라 군사를 백제 부흥군이 포로로 잡았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얘기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인서트-14. 테입<118> 노중국
(1:47:09 소정방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했던 임존성 싸움, 여기서 소정방이 패배를 하거든요. 패배를 하면서 그 때 당군이 많은 전사자도 있었을 것이고 부상자는 뭐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중에서 포로들도 상당히 있었을 거다, 그 중에 왜에 보내진 포로100며 명이 이 때 잡힌 포로가 아니겠느냐, 두 번째 생각해볼 대 이 백 명의 포로가 임존성 전투에서 부흥군이 사로잡은 포로의 전부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다는 것. 1:47:51)
<해설> 무슨 소리냐 하면, 임존성 전투가 끝나고 한 달쯤 뒤에 복신은 왜국에 가 있던 부여풍장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는데 그 사신이 빈손으로 간 게 아니라 당나라군 포로 100명을 데리고 가서 왜의 조정에 바쳤다, 일본서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포로가 바로 임존성 전투에서 붙잡은 포로가 아니 겠느냐 이런 얘깁니다. 또한 그 100명이 전장에서 붙잡은 포로들 전부는 아닐 것이고, 그 중 일부라고 한다면, 백제부흥군이 거둔 전과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겠지요.
*인서트-15. 테입<118> 노중국
(1:51:35 그 포로가 갖고 있던 무기들, 또 이네들이 퇴각하면서 버려놨던 무기들, 이게 부흥군으로 봐가지고는 훌륭한 군수물자가 되는 것이죠. 소위 무장할 수 있는 그러니까 이제 주변에 잇던 동원해가지고 군대로, 사실 오합지졸밖에 안 되는데 이네들을 훈련시켰다 하더라도 변변한 무기가 없는데 임존성 전투같은 큰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당군의 무기를 빼앗아가지고 무장을 한다, 이중의 효과를 가지는 이런 상징성도. 1:52:13)
<해설> 임존성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들이 백제부흥군들이 무장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노 교수의 의견은 “무기가 없어서 막대기를 들고 싸우다가 상대의 무기를 빼앗았기 때문에 백제 군사가 더 강해 졌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뒷받침해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정방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복신 등이 앞으로 백제의 부흥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 승전보가 대단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겠지요.
*인서트-16. 테입<118> 노중국
(1:49:51 소정방이 직접 거느리고 온 군대를 물리쳤다는 거, 소정방이 누구냐, 당나라 총사령관입니다. 총사령관이 기벌포에 도착해서 사비성 함락시킬 때 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이 소정방이 임존성 전투에서 복신한테 당한 거지요. 이건 상징성이 굉장히 큽니다. 점령군의 최고 사령관이 공격했다가 실패했다, 패배했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굉장히 큽니다. 소문이 나게 돼 있는 것. 의자왕 항복한 이후 납작 엎드려 있던 지방의 여러 세력들이 숨쉬게 되어지는 겁니다. 1:50:34)
<효과> (사람들 모여서 떠들썩하게 얘기 중인)
남자1 그 엄청나다던 나당연합군이 임존성 싸움에서 백제 부흥군을 못이 기고 돌아갔다면서?
남자2 못 이긴 게 뭐야, 포로로 잡힌 사람만 수백 명이라는데 코가 납작하게 패한 것이지.
남자1 야, 천하의 소정방이하고도 제대로 싸우면 이길 수도 있다, 이 말이지. 이번 전쟁을 총 지휘한 사람이 의자왕 사촌동생 복신이라는데?
남자2 그럼 나당연합군한테 빼앗긴 도성을 다시 찾고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을까?
남자1 당연하지. 그러려고 복신하고 도침 그런 사람들이 군대를 조직해서 당나라군하고 싸운 것 아니겠어.
남자2 그러면 나도 부흥군에 들어가야겠네. 나라를 다시 찾는다는데 목숨 인들 아깝겠나?
남자1 잘 생각했네. 우리 임존성으로 가보세.
<해설> 이처럼 공포와 실의에 빠져 있던 유민들이 백제부흥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백성들의 이런 각성은 부흥군을 이끄는 사람 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복신의 위상이 전보다 훨씬 높아졌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9월 3일-.
소정방 이제 그대가 총 책임을 지고 옛 백제의 사비도성을 지키도록 하라. 내 군사 만 명을 그대에게 줄 것이니라.
유인원 예, 대장군 나리.
소정방 신라와 힘을 합쳐서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사비도성을 지키는 데에도 신라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유인원 예, 대장군 나리. 신라왕자 김인태가 군사 7천 명을 이끌고 사비성에 남아 소장과 함께 지키기로 하였사옵니다.
<해설> 소정방은 유인원에게 사비성을 지키게 하고 군사를 만 명만 남긴 채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소정방은 임존성 싸움에서 적잖은 피해를 당하여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텐데, 어째서 백제 부흥군을 말끔히 무찌르지 못하고 서둘러 군사를 물려서 본국으로 돌아갔을까요?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19년의 기록을 잠시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낭독자 겨울 11월에 당나라에서는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을 패강도 행군대 총관으로 삼고,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좌효위장군 유백영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나누어서 우리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해설> 이 때가 임존성 전투가 끝나고 소정장이 부랴부랴 백제를 떠난 서기 660년 9월 3일로부터 불과 두 달 뒤인 11월이었습니다.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에까지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서정방은 당나라로부터 속히 귀환하라는 훈령을 받았고,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는 얘기가 됩니다.
*인서트-17. 테입<118> 노중국
(1:53:47 소정방이 상당히 많은 군대를 10만 명 넘는 군대를 거느리고 왔단 말예요. 소 정방이 다시 만 명만 빼고 본국으로 돌아간단 말예요. 왜 돌아가데 됐느냐 했을 때 당의 정책인 것 같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그 다음 인제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공격 하겠다, 그래서 소정방을 사령관으로, 고구려 정벌의 사령관으로 하면서도 소정방이 거느리고 갔던 그 군대도 고구려 공격하는 데 투입할 수 있는, 이런 것 때문에 인제 깔끔 하게 마무리 안 돼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1:54:30)
<해설> 자, 이제 소정방이 만 명의 군사만 남겨두고 철수를 했으니 백제 유민들로서는 국가 부흥을 위한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볼 만 했겠지요.
도침 소정방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해 만명의 군사만 남기고 돌아갔소. 이제 우리도 군사를 정비해서 사비도성을 칩시다.
복신 우리 부흥군의 규모가 아직 미미하니 유인원이 거느린 만명의 군대도 만만치 않은 숫자요. 게다가 신라 왕자 인태가 거느린 7천 군사도 함께 방어하고 있으니.
도침 사비도성을 쳐서 당나라와 신라에 마지못해 항복했던 우리 백성들을 우리가 도로 빼앗아 와야 합니다.
복신 좋습니다. 출정합시다! 자, 나당 점령군을 무찌르고 우리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을 탈환하자. 가자!
<효과> (군사들 함성 지르며 달려가는)
<해설> 이 때가 660년 9월 23일이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낭독자 백제 여적들이 사비성으로 쳐들어와서 이미 항복했던 사람들을 도로 빼앗으려 하므로, 유인원은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나가 이들과 싸웠다.
<해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09편>
백제 부흥군, 나 당군과 격전을 벌이다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1.19(일) 00:05-01:00
* 나오는 사람들
낭독 이승주
도침 박영재
복신 김대중
장수1, 2 이지환, 남도형
귀지 심승한
왜국왕(여) 오인실
부여풍 진 웅
장수3 이병용
무열왕 방우호
장수4 백승철
김인문 김석환
문무왕 차진욱
김유신 정형석
*시그널 + 타이틀
<해설>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 침공에 나섰던 당나라의 소정방은,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에 위치한 임존성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과 싸워서 패 했으나, 당나라 조정의 귀환 명령을 받고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소정방이 백제를 떠난 때가 서기 660년 9월 3일이었는데,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 침공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1만7천 명만을 백제에 남겨두고 대부분의 군사를 데리고 떠난 것입니다. 복신과 도침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에게는 빼앗긴 사비도성을 되찾기 위해 도전해볼만한 기회였습니다. 9월 23일-.
<효과> (군사들 출정 준비) (말 울음소리 등)
복신 (군사들 향해 큰 소리로)우리는 한 달 전에, 당나라군의 수괴 소정방이 이끌고 쳐들어온 군사들을, 임존성 전투에서 당당하게 물리쳤다! 비록 무기는 보잘 것 없고 군량은 넉넉하지 못하지만, 빼앗긴 도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전장에 나온 우리 백제군을 감히 어느 누가 대적하겠는가!
<효과> (군사들 함성)
도침 지금 사비성에는 수많은 우리 백성들이 유인원 일당에게 볼모로 잡혀 있다. 우리는 사비성을 공격하여 나당군에게 빼앗긴 우리 백성들을 다시 찾아올 것이다. 자, 가자!
<효과> (함성 지르며 달려 나가는)
(민간인들 거리로 뛰쳐나와 떠들썩)
복신 너희들은 당나라와 신라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느냐, 침략자들을 물리칠 씩씩한 백제의 전사가 되기를 원하느냐!
도침 모두 식솔을 데리고 나와서 우리를 따르라!
<효과> (사람들 몰려나오는 등)
<해설> 부흥군은 사비성으로 쳐들어가서 이미 항복했던 백제 사람들을 다시 빼앗아 오는 등 그 기세가 등등합니다. 그러자 사비도성의 방어 책임을 맡고 있던 유인원이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나와 부흥군과 한바탕 격전을 치릅니다.
<효과> (양쪽 군사 뒤섞여 싸우는)
<해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백제 부흥군을 ‘아직 남아 있는 도적’이라는 의미의 여적(餘賊)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부흥군의 사비도성 침공 부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백제 여적들이 사비성으로 쳐들어와서 이미 항복한 사람들을 도로 빼앗으려 하므로, 유인원은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나가 이를 격파 하여 퇴주시켰다.
<해설> 그러나 나당연합군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백제 부흥군의 공세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어지는 신라본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낭독자 적들은 사비성 남령(南嶺) 위로 물러서서 목책을 굳게 치고서 무리를 모아 진을 구축한 뒤 틈틈이 성읍을 돌며 약탈을 하니, 백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20여 개의 성이 이에 호응하였다.
<해설> 이처럼 사비도성이 위태롭게 되자 당나라 고종은 좌위중랑장을 맡고 있던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급히 백제에 파견합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유인원과 새로 도독으로 임명되어 백제에 파견된 왕문도의 역할은 어떻게 분담되었을까요? 공주대 양종국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1. 테입<117> 양종국
(53:32 왕문도가 웅진도독으로 웅진에 파견되면서 왕문도가 맡았던 역할이라는 것은 결국 이 정복지역의 백성들을 어루만져서 자신들의 지배를 잘 따르게 하는 무마,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그러한 임무를 띤 것 같고 유인원 같은 경우는 부여를 중심으로 해서 주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중심으로 한 군사업무 대외적인 군사업무를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여와 웅진 두 지역이 원래는 약간씩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능을 그 당시에 했지 않을까. 54:12)
<해설> 소정방이 백제를 지배하는 통치조직으로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는데 바로 그 총 책임자격인 도독으로 왕문도를 임명해서 파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문도는 웅진도독으로 임명받고 백제 땅에 온 것만은 틀림없는데 도독으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아니, 기록으로 남길 만한 활동을 할 여유가 없었다는 표현이 옳겠지요. 우선 백제에 온 왕문도는 9월28일에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에 있었던 삼년산성에서 신라의 무열왕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왕문도가 당 고종이 써준 조서를 무열왕에게 전달하는 의식을 가졌던 모양인데요, 그 대목을 기술한 신라본기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낭독자 9월 28일, 왕문도가 삼년산성에 이르러서 무열왕에게 조서를 전달하였다. 이 때 왕문도는 동쪽에 면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에 면하여 서서 황제의 명을 전한 뒤에, 왕문도가 왕에게 예물을 바치려 하는데, 갑자기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되므로 시종관이 대신해서 모든 일을 끝마쳤다.
<해설>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당나라 사서인 구당서를 보면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었다”, 이렇게만 기록돼 있습니다. 먼 길을 오면서 병을 얻어서 죽었는지, 다른 돌발 사건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왕문도는 백제에 오자마자 죽었고, 그러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대방주 자사였던 유인궤를 대신 파견합니다. 계명대 노중국 교수의 얘기 들어볼까요?
*인서트-2. 테입<118> 노중국
(53:58 와서 인제 웅진도독으로 임명됐지마는 제대로 도독으로서의 활동도 하지 못한채 죽어버렸습니다, 죽어버리니까 결국은 두 센터가 하나는 부여의 사비성이고 하나는 오늘날 공주의 웅진성 이렇게 되어지는데 왕문도가 죽으니까 그 후임으로 누가 오느냐면 유인궤가 파견이 되입니다. 그래서 사비성에 주둔한 유인원 군대, 그 다음에 웅진성을 기반으로 하는 유인궤 군대. 54:40)
<해설> 장차 백제 부흥군이 상대해야 할 당나라의 적수가 사비성의 유인원 군대와 웅진성의 유인궤 군대, 이렇게 정리가 된 셈입니다. 물론 신라군도 포함되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사비도성이 위기에 처하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해서 백제 부흥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장수1 (말 타고 달려와서) 장군! 신랑 왕이 태자를 비롯해서 장병들을 총 동원하여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복신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장수1 우리가 확보하고 있던 이례성이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주변의 많은 성들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침 으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진을 치고 있는 사비성 남쪽 고개의 목책은 절대로 적군에게 내주어서는 될 것이다.
<효과> (멀리서 군사들 몰려오는 소리)
복신 저게 무슨 소리냐?
장수1 신라군이 이 곳 남령의 우리 군사목책을 공격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도침 겁먹을 것 없다. 장졸들은 물러서지 말고 나가 싸우라!
<효과> (군사들 몰려가고)
(양쪽 군사들 부딪쳐 싸우는)
<해설> 그러나 신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부흥군은 천오백 명의 군사를 잃는 등 적잖은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기록이 발견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입니다.
낭독자 11월 1일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칠중성을 침공하였는데 군주(郡主)와 필부(匹夫)들이 적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해설> 고구려군이 군사를 일으켜서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칠중성을 공격했다는 내용입니다. 고구려군이 신라의 북쪽 변방을 침공한 사례는 자주 있었으니 이상할 것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시기적으로 이 때는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이 임박한 상태였던 점을 감안하면, 별도로 군사를 일으켜서 신라의 변방을 공격했다는 얘기가 조금 엉뚱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백제사 연구자들은 고구려의 이 칠중성 공격이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한 간접적인 군사지원의 성격이 크다고 분석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복신과 도침이 이끄는 백제 부흥운동군은 나당군과 몇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어느 정도 전열을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한 왕조의 면모를 내외에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왕조를 부활한다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누구를 왕으로 옹립하느냐, 하는 문제였겠지요. 우선 왕위를 탐낼 만한 인물을 꼽자면 당연히 도침과 함께 부흥군을 이끌고 있던 복신이었을 것입니다. 사서에는 복신이 무왕의 조카, 즉 의자왕의 사촌동생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일단 그가 왕족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아마 측근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었겠지요.
복신 무너져버린 백제 왕조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리 백제 땅에서 나당군을 몰아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백성들을 규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라밖에 우리 백제가 다시 일어섰음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헌데, 왕이 없으니 어찌 나라를 다시 세웠다 할 수 있겠느냐?
장수1 지당한 말씀입니다. 지금 당나라나 신라에서는 우리를 백제국의 군사라 부르지 않고 아예 도적 잔당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복신 도침 두 대장군마저…
<해설> 여기서 잠깐, 복신과 도침이 당나라 문헌에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할까요?
*인서트-3. 테입<118> 노중국
(15:56 복신에 대해서는 僞한솔, 엉터리 한솔의 벼슬을 가진 복신, 그 다음에 僞僧, 엉터리승려 도침, 거짓 위(僞)자, 영터리 위자를 쓰고 있는데 이거는 뭐냐 하면은 백제가 망하고난 다음에 부흥군 또는 부흥백제국 이것을 정식 왕조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또 그런 비슷한 예가 왕자 부여 충성과 부여충지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표현도 위왕자 부여충성, 거짓왕자 부여충성, 거짓왕자 부여충지 이렇게 한 것이지요. 16:44)
<해설> 복신이 백제 패망 이전에 가지고 있던 한솔이라는 관등 앞에 허위, 거짓을 나타내는 위(僞)자를 붙여서 ‘가짜 한솔 복신’이라 하고 마찬가지로 승려였던 도침 역시 위승려(僞僧侶)라고 함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무시했다는 얘긴데, 앞에서 노중국 교수가 지적한 이런 표현은 부여박물관에 있는 당유인원기공비에 새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당서에도 복신과 도침이 스스로 장군을 사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함으로써 의자왕 항복 이후의 백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더욱 왕을 옹립해서 왕조의 면모를 갖출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신 마땅히 백제국의 종묘와 사직을 이어나가려면 군주가 있어야 할 것 인데, 백제왕실 가족들이 모두 당나라로 끌려가고 없는 터에 누구를 왕으로 세운단 말이냐?
장수2 비록 태자를 비롯한 왕자들은 당나라로 끌려갔으나 백제 땅에 어찌 왕족이 없다 하십니까?
복신 누구를 이르는 말이냐?
장수2 복신 대장군, 바로 나리이옵니다. 대장군 역시 엄연히 부여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족일 뿐 아니라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그 동안 나당군과 맞서 세운 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나리께서 당당히 왕위에 오르시옵소서.
장수1 마땅히 그리 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복신 흐음…나라고 어찌 권좌에 올라서 백제의 왕실을 부흥시키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겠느냐. 헌데…흐음…
<해설> 그런데, 비록 그가 의자왕의 사촌동생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백성들과 이웃나라에 백제의 국왕으로서, 왕실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내보이기에는 미흡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함께 부흥군의 전투를 지휘해온 도침이 수긍할 리가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복신은 어떤 인물을 왕위에 앉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인서트-4. 테입<119> 노중국
(01:17 유민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인물, 그 다음에 정통성이 있는 인물, 이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거는 나당군하고 싸우려면 부흥군 혼자 힘만 가지고는 곤란하다, 타의 지원을 좀 받을 수 있는 인물, 거기다가 왕으로 옹립해도 복신 스스로 생각할 때 자기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정도의 인물, 여러 가지로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내 스스로 한번 왕이 돼볼까, 이런 생각도 아마 했을 수는 있겠지요. 01:58)
<음악> (브릿지)
<해설> 나름으로 백제국의 미래를 설계한 복신은 도침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복안을 내놓습니다.
복신 대사, 우리가 나당 침략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은 백제의 왕실을 재건하고자 함이 아니겠소?
도침 그야 대장군 말씀이 지당하지요.
복신 이제 실의에 빠져 있던 백성들도 백제 재건의 자신감을 가지고 침략자들을 물리치려는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소이다. 이제는 왕조의 면모를 갖추어야 할 것이오.
도침 왕을 옹립하자는 얘기요?
복신 그렇소이다.
도침 의자대왕이 당나라군에 잡혀갈 때 왕실의 자손들이 모두 함께 붙잡혀 갔는데 대체 누구를 왕으로 세운단 말이오?
복신 왕자들 모두가 당나라로 잡혀간 것은 아닙니다.
도침 잡혀가지 않은 왕자가 있단 말이오?
복신 그렇소이다. 부여풍이 있잖습니까?
도침 바다 건너 왜국에 가 있는 왕자 풍장 말이오?
복신 그렇소이다. 부여풍은 엄연히 의자대왕의 아들이니 백성들과 이웃나라에 백제왕통을 과시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도침 흐음, 왜국에 있는 부여풍을 데리고 와서 임금으로 옹립한다, 흐음…
<해설> 결국 부흥운동의 실세였던 복신과 도침에 의해서, 왜에 가 있던 왕자 풍이 백제 왕실의 맥을 이어나갈 대상으로 간택되는 순간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풍장이라 표기하고 있는 그가, 왜국에 건너간 시기를 놓고 여러 의견이 있으나, 의자왕의 아들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복신과 도침이 새로운 왕조를 이끌어갈 인물로 부여풍을 선택하게 된 배경을,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과 공주대 양종국 교수로 부터 차례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서트-5. 테입<116> 김영관
(1:07:43 복신보다는 왕위 계승권에 있어서 앞서 있었던 그런 인물이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당나라의 포로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과 만이천팔백 명 중에 왕위 계승권과 어느 정도 관련이 된 사람들은 거의 다 잡혀갔다고 봐야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의 도성 내에서는 사실은 왕통을 이을, 그 왕통을 잇는다는 것은 백제 국민들이 따를만한 그런 왕족이 왜에 가 있었던 풍장밖에 없었다, 그렇게 판단이 됩니다. 1:08:25)
*인서트-6. 테입<117> 양종국
(1:24:56 그 당시에 의자왕의 아들 중에서 일본에 인질로 가서 장기간 동안 있을 정도면 그래도 왕자들 중에서 그래도 의자왕이 볼 때 어느 정도 연륜도 있고 믿을만한 사람 보냈으리라고 보고 그렇다고 그러면은 아마 의자왕의 왕자들 중에서 부여풍이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그 대표로 간 게 아닌가 그리고 그 1년 뒤에 부여융이 태자가 되는데 그 전에는 부여풍을 태자로 해놨고 일본서기에 그리고 아직은 백제가 없을 때거든요. 아직 부여웅이 태자로 책봉되기 전이니까. 그러니까 의자왕의 왕자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1:25:37)
<해설> 양종국 교수는 오히려 당나라에 잡혀간 태자 부여융보다 왜국에 가 있던 부여풍이 오히려 나이가 더 많았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런데, 계명대 노중국 교수는, 부여풍을 데려다 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은 복신이 앞장서서 추진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도침도 기꺼이 찬성을 했겠느냐,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서트-7. 테입<119> 노중국
(03:09 궁금한 것 중의 하나가요, 중국측 사서에는 복신하고 도침이 같이 나오는데 일본측 사서에는 도침은 안 나옵니다. 도침의 ‘도’자도 없어요. 그게 참 궁금한데요, 어느 면에서는 이 풍왕을 옹립하는 데 적극적인 거는 복신이었고 도침은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소극적이었을 가능성, 이것도 좀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도침도 같이 적극적으로 했다면 일본서기에 도침 이름이 나올 법한데요, 그게 안 나와요. 03:09)
<음악> (브릿지)
<효과> (바닷가, 갈매기 울음소리)
(사람들 배에 오르는)
귀지 시간이 없다. 곧 출항해야 할 것이니 빨리 태우거라!
장수2 빨리빨리 배에 오르거라! 아흔 일곱, 아흔 여덟, 아흔 아홉, 백! 자평 나리, 포로 백 명을 모두 태웠습니다.
귀지 알겠다. 돛을 달고 출항하라!
<효과> (범선, 물결 가르고 나아가는)
<해설> 백제부흥군의 좌평 귀지(貴智)가, 왜국에 가서 부여풍을 데리고 오라는 복신의 명을 받고 사절단을 이끌고 출항합니다. 그런데,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복신은 귀지에게 왜국 조정에 줄 특별한 선물을 실어 보냈는데, 그 선물이 바로 100명의 당나라 포로였습니다. 고대국가 시기의 외교관계에서 제3국 출신의 포로들을 상대국에 보내고 받는 사례는 자주 발견됩니다. 그런데 이 포로의 성격에 대해서 노중국 교수는, 그 이전에 백제 부흥군이 임존성 전투에서 소정방 군대와 일전을 벌일 때 붙잡은 포로들이라고 얘기했었지요? 반면에 김영관 연구관은 의자왕이 항복하기 이전, 당나라군과 기벌포 싸움에서 붙잡은 포로들이 아니겠느냐, 이런 의견을 제시합니다.
*인서트-8. 테입<116> 김영관
(1:05:23 제 생각으로는 사비도성에 있었던 7천 명 중의 100명이 아닌 13만 당나라대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금강하구의 기벌포 싸움에서는 백제군이 만 명을 손실을 입고 패전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 뒤에 사비도성 근처에서 전투를 했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구체적인 시기와 장소들을 잘 알 수거 없습니다. 전투를 금강 입구에서부터 사비도성까지 하면서 당나라군이 모든 전투에서 다 승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1:06:03)
<해설> 그 포로들을 의자왕 항복 후에 벌어진 임존성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사로잡은 포로로 본다면, 부흥군이 그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는 얘기를 뒷받침 해주는 셈인데, 노중국 교수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좌평 귀지는 당나라군 포로 100명을 태우고, 끊어진 왕통을 이어줄 인물을 데려오기 위해서 현해탄을 건너갑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좌평 귀지가 사신으로 갔을 당시 왜국의 왕은 여자 왕인 제명천황 이었습니다. 일본서기 제명기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왜국왕 (여)지난 9월에 백제의 달솔 한 사람과 승려 한 명이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되었다는 애석한 얘기를 전해 주었느니라. 헌데, 그대는 누가 보낸 사신인가?
귀지 소인은 백제국 좌평 귀지이옵니다. 우선 소인이 가지고 온 선물을 받으시옵소서. 당나라군 포로 100명을 선물로 바치려고 데리고 왔사옵니다.
왜국왕 당나라군 포로라 하였는가?
귀지 예, 비록 당나라 사람들이 벌레같은 우리의 적군을 데리고 와서 우리 영토를 흔들어 사직을 전복시키고 우리 임금과 신하들을 포로로 데리고 갔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다시 백성을 모아서 나라를 이룬 뒤에, 도성을 점령하고 있는 당나라군과 수차 전쟁을 발여 저들을 크게 물리쳤사옵니다.
왜국왕 허허허, 보내 준 당나라 포로들은 잘 받겠는데, 이 고마움을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가?
귀지 소인은 백제국의 귀실복신 대장군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건너왔사옵니다.
왜국왕 귀실복신이 백제국의 지도자라는 얘기로구나.
귀지 대장군께서 특별한 청을 올리라 하였사옵니다.
왜국왕 무슨 청인지 말해보라.
귀지 우리 백제 백성들은 백제국에서 건너와 이 곳에 머무르고 있는 풍장 왕자를 나라의 주인으로 삼기를 삼가 원하옵니다. 더불어서 우리가 침략군을 무찔러 내쫓고 우리 백제 영토를 온전하게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군사를 보내주실 것을 삼가 청하옵니다. 지금 우리는 의지하여 도움을 청할 곳이 없사옵니다. 밤마다 창을 베고 잠을 자며, 끼니때마다 쓸개를 핥아먹는 듯 하옵니다.
왜국왕 으음, 위험에 빠진 자를 도와주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법도에 나타나 있느니라. 멀리서 와서 표를 올리고 도움을 청하니 어찌 그 뜻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장군들에게 명하여 여러 길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구름처럼 모이고 번개처럼 움직여 악한 무리들을 베고 저위급한 나라를 구하도록 하라. 마땅히 조정의 모든 벼슬 가진 자들이 함께 예를 갖추어 백제왕자 풍장을 출발시켜 보내도록 하라!
<해설> 사실 일본 조정에서는 좌평 귀지가 사신으로 가기 한 달 전에, 승려 사미각종 등으로부터 백제멸망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서트-9. 테입<119> 노중국
(04:35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하리라는 생각은 왜 쪽에서는 미처 예상을 못 한것 같습이다. 언제 알게됐냐면은 사미각종 등이 와가지고 백제가 망했다는 얘기를 하고 복신이 임사귀산에서 부흥군을 일으켰다는 얘기를 하게 됨으로써 알 게 된 거죠. 굉장히 충격이었으이라 싶습니다. 왜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한반도의 백제 신라 또는 고구려가 서로 정립상태 이렇게 있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그런데 이 틀이 하나 무너지게 되면은 그 여파가 바다건너 왜 쪽에도 올 수가 있다는 거지요. 05:31)
<해설> 백제가 아예 멸망하게 되면, 바다 건너 왜국이 나당 연합세력의 공격목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지원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얘긴데, 그렇더라도 백제 부흥군측의 사신을 너무 호의롭게 대하고, 또한 지원 요청을 너무 호락호락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인서트-10. 테입<116> 김영관
(1:09:20 왜 조정내에서도 사실은 정권교체가 한 번 있었습니다. 그 정권교체 와중에서 친 신라정책을 취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친백제정책으로 돌아선 시기가 의자왕 말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친 신라정책을 취하던 왜의 세력들이 실권을 하고 친백제 정책을 취하던 왜의 세력들이 집권을 하고 있었던 그런 시댑니다. 1:10:00)
<해설> 그 무렵 왜국에서는 정변이 발생하여 훗날의 메이지 유신을 능가하는 획기적인 개혁조치가 취해지는데, 그 유명한 다이카 개신, 즉 대화개신(大化改新)이 그것입니다. 그 대화개신의 주역이 바로 앞에서 우리가 소개한 여자 왕인 제명천황의 아들 중대형(中大兄) 태자였는데, 이 모자(母子)가 친 백제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백제 부흥군으로서는 왜국의 지원을 받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돼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백제에서 건너가서 꾸준히 세력을 형성해온 일본열도 내의 백제계 세력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었겠지요.
*인서트-11. 테입<119> 노중국
(06:23 당시 왜 조정내에 있는 백제계, 세력들의 활동, 모국이 망했다 이거지, 백제하고 왜의 관계라는 게 단순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보다 굉장히 끈끈한 인적인 관계까지 얽혀져 있는데 이건 인제 도와주어야겠다고 하는 그런 움직임 같은 것 이것이 서로 맞물려지게 돼가지고 부흥군을 지원하기로 결정을 한 게 아니겠느냐. 부흥군이 요구한 거는 크게 두 가집니다. 하나는 풍왕을 귀국시켜 달라, 하나는 군수물자 등을 보내 달라 그 두 개를 일단은 오케이 한 셈이 되어집니다. 07:12)
<음악> (브릿지)
<해설> 서기 660년 10월-. 복신의 명을 받아 왜국에 사신으로 온 좌평 귀지와, 그 동안 왜국에 머물러 있던 백제왕자 부여풍이 마주앉았습니다.
<음악> (회한, 비탄)BG
부여풍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자, 한 잔 받으라.
귀지 황공하옵니다, 태자마마.
<효과> (술 따르고)
부여풍 그래, 아바마마와 내 형제들은 아직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도성 어딘가에 갇혀 있느냐?
귀지 (슬픔 주체하지 못하는)아니옵니다, 태자마마. 지난 달 중순에 당나라 수괴 소정방이 군사를 물려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대왕마마를 비롯한 왕실 가족은 물론이고 대소신료 93명과 백성 1만2천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압송해 갔사옵니다.
부여풍 어찌하여 700년 가까이 이어온 종묘사직이 그리도 어이없이 무너졌다는 말이더냐?
귀지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함선을 타고 바다건너 침공해올지 누가 알았겠사옵니까. 게다가 신라군까지 합세를 했으니…
부여풍 으음, 그래도 나라를 세우겠다는 신념과 용기를 가진 귀족들을 당나라가 모두 잡아가지는 못하였구나. 지금 우리 군사의 형편이 어떠하더냐?
귀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열망으로 백성들이 복신과 도침 두 대장군 휘하에 몰려들고 있사오나, 기개만 드높을 뿐 군사의 수도 적고 무기도 보잘 것 없어서 왜국의 지원이 절실한 형편이옵니다.
부여풍 나에게 따로 전하는 말이 없더냐?
귀지 첫째는 속히 귀국하시어, 백제의 왕통을 이어갈 대왕의 자리에 오르셔서 백성들을 보살펴 달라는 청이옵고, 두 번째는 이 곳 왜의 조정을 설득하여 보다 많은 군사지원을 얻어내시라는 청이옵니다.
부여풍 알겠느니라. 외롭고 고단한 이역(異域)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데도…어찌하여 이리도 가슴이 쓰리고 슬퍼지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귀지 태자마마…(흐느낀다)
<음악> (위 음악 UP & OFF)
<해설> 그런데, 백제부흥군의 지원요청을 흔쾌히 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좌평 귀지가 일본에 당도한 것이 서기 660년 10월이었는데,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온 때는 이듬해 9월이었습니다. 백제에 임금이 없는 공위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왜 그렇게 오래 지체하다 돌아왔을까요?
*인서트-12. 테입<119> 노중국
(08:16 왜 조정 내에서 의견정리 과정도 필요합니다. 사실, 부흥군을 지원한다, 그러면은 어떤 형태로 지원을 할 거냐, 군대를 보낼 거냐, 군수물자만 보낼 거냐, 군수물자만 보낸다면 그걸 어떻게 할 거냐, 온갖 결정을 하고나서 실행에 옮겨야 될 여러 가지 사항들이 있는 거죠. 여기에 대한 논의 과정이 어느 면에서 왜 조정내에서 치열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사천리식으로 일사불란하게 되기보다는.08:56)
<해설> 부여풍을 보내면서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백제의 임금이었던 의자왕이 당나라에 항복하고 잡혀가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제가 패망했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부흥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조정 중신들의 논의과정을 거치면서 내부 진통을 겪느라 상당 시일이 소요됐을 것이고, 가까스로 지원 결정을 했다 하더라도 군사 징발 등의 문제로 적잖은 시간을 소비했겠지요.
*인서트-13. 테입<116> 김영관
(1:11:33 풍을 귀국시켜줄 것을 복신이 요청을 하면서 지원군을 보내줄 것도 백제측에 서는 요청을 했습니다. 왜에서는 당장 지원군을 구성을 해서 보낼 정도로 그 당시 왕권이 확립이 도리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방에 있던 세력들 중에 백제에 구원군을 모집을 했고 그 모집하는 기간 문제가 풍이 귀국을 늦추는 한 원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친백제적인 지방세력들을 모아서 백제로 보냈는데. 1:12:22)
<해설> 당시 야마토 정부의 왕권이 일본열도 전체에 일사불란하게 미치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방 세력을 설득하여 병력을 징발하는 절차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부여풍 여보시오. 지금 우리 백제국 백성들이 왜국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소. 나는 백성의 부름을 받고 한시 바삐 달려가야 할 형편이란 말이오. 제발 서둘러 주시오!
<해설> 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있던 복신과 도침 못지않게 애를 태우는 사람이 있었으니 백제로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부여풍이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좌평 귀지를 사신으로 보내 왜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고 부여풍의 귀국을 청해놓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복신과 도침이 마냥 팔짱끼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서기 661년 3월, 복신과 도침은 사비성을 탈환하기 위한 대공세를 계획합니다.
<효과> (두 사람, 갑옷 차림으로 막사 안으로 들어와 앉고)
복신 지난번에 우리의 부여자진 장군이 사비성 공략에 나섰으나 안타깝게도 신라군의 침공으로 실패하고 말았소. 이번에는 계략을 잘 세워서 기필코 사비성을 되찾읍시다.
도침 좋습니다. 하지만 사비성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과, 당군을 지원하러 오는 신라군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지, 그 계획을 정밀하게 세워야 합니다.
복신 우리 둘이 같이 가지 말고 각각 군대를 나눠서 한 쪽은 당나라의 유인원이 주둔하고 있는 사비성을 직접 공격하고, 다른 한 쪽은 배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신라군이 당군을 지원하러 오는 것을 막아내는 게 어떻겠소?
도침 좋습니다. 내가 군사를 몰고 사비성의 유인원을 칠 테니 복신 대장군께서는 배후에 머물면서 신라군을 차단해 주시오.
복신 도침 대사, 아니, 영군장군, 자신 있습니까?
도침 허허허, 자신 있으니 걱정 말고 신라군이나 잘 막아 주시오.
복신 그럼 이번 전투는 도침 장군이 총 사령관을 맡는 거요. 기대해 보겠소.
도침 걱정 마시오. 자, 출정합시다.
<효과> (북 소리)
(군사들 몰려나가는)
<해설> 이 때 도침이 이끌고 나간 부흥군의 수가 무려 1만 명이 넘는 대군 이었습니다. 당군이 주둔한 사비성 지역은 순식간에 부흥군에 장악 되었는데,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서 멈추고)
장수3 대장군! 지금 사비성에서 유인원 군대의 선발대가 출동하여 우리 진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도침 그래? 그 수가 얼마나 된다 하더냐?
장수3 천 명이 출동하였다 합니다. <효과> (멀리서 군사 몰려오는)
장수3 저 쪽에 벌써 진격해오고 있습니다.
도침 허허허, 제아무리 정예병이라 한들 만 명이 천 명을 못 당하겠느냐. 공격하라!
<효과> (함성 지르며 달려나가는)
(양쪽 군사 부딪쳐 싸우는)
도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목을 베어라! 적군이 달아나면서 버린 무기를 남김없이 수거하라!
<해설> 작전면이나 군사의 규모 면에서 당군은 백제 부흥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천 명의 선발대를 모두 잃은 당나라군은 더 이상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 한 채 사비성 방어에만 급급한 실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웅진성의 유인궤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 다음 사비성의 유인원 군사와 더불어 부흥군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장수3 대장군, 웅진성에서 유인궤 군사가 사비성의 유인원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정하였습니다. 신라군에도 지원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도침 허허허, 그래? 신라군은 복신 대장군이 알아서 방어할 것이다. 우리는 웅진성에서 사비로 오는 유인궤 군사를 도중에 물리면 될 것이다. 자, 사비성의 포위는 풀지 말고 나머지 군사들은 웅진강 입구로 가서 유인궤 군사를 쳐부수자! 자, 가자!
<효과> (군사들 몰려나가는)
<해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백제 부흥군과 당나라의 유인궤 군사는 웅진강 입구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는데 이 전툴르 일컬어 웅진강구 전투라고 부릅니다. 유인궤의 군사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탐지한 도침은 웅진강변에 책(柵)을 세우고 당군을 기다렸는데,
도침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는 이미 사비성의 유인원 군사를 천 명이나 죽이지 않았느냐!
<해설> 1차전 승리에 도취되었던 도침의 군사들은 유인궤 군사를 얕보았다가 웅진강구의 일대 접전에서 대패를 당하고 맙니다.
<효과> (양쪽 군사 맞부딪쳐 싸우는)
도침 안 되겠다, 건너편에 있는 영채로 후퇴하라! 퇴각하라!
<효과> (병사들 몰려가며 비명, 말 울음 소리 등)
<해설> 수많은 병력을 잃은 도침은 사비성을 포위하고 있던 군사들로 하여금 포위를 풀게 하고는 부랴부랴 임존성으로 후퇴하고 맙니다. 구당서 백제전에서는 이 전투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도침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책을 세우고 관군에게 저항하자, 유인궤가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책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서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만명이나 되었다. 도침 등은 이에 사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보존하였다. 결국 이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 때문에 도침은 복신으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고, 도침 휘하에 있던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군을 배신하고 당나라군에 투항했다는 얘긴데, 그 부분은 나중에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신라 지원군의 차단을 목적으로 배후에서 진을 치고 있던 복신의 군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열왕 웅진성의 유인궤 장군으로부터, 백제의 잔적들이 사비성을 침공하였으니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사태가 위급하니 명을 받은 장수들은 속히 전장으로 떠나도록 하라. 이찬 품일을 대장군으로 삼을 것이며,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 아찬 충상 이 상 세 사람을 부장(副將)으로 삼을 것이다. 서둘러 군사를 몰고 나가서 당나라군을 도와 백제의 잔적들을 소탕하고 돌아오도록 하라! 지체말고 당장 출정하라!
<효과> (군사들 몰려가는)
<해설> 661년 3월 5일, 신라군의 총사령관 품일은 군사 일부를 나누어서 먼저 가도록 하고, 자신은 지금의 충남 청양에 소재한 두량윤성(豆良尹城)의 남쪽에 병영 구축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멀리서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백제 부흥군의 복신은,
복신 지금 품일이 거느린 신라군이 진지 구축할 자리를 잡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진영을 행해 진격하라!
<효과> (병사들 고함치며 달려가는)
(병장기 부딪치며 싸우는)
<해설> 이 전투에서 복신은 품일이 이끄는 신라군사를 크게 무찌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도 패배를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품일은 군사 일부를 먼저 가게 하고 두량윤성의 남쪽에 병영칠 곳을 살피게 하였는데, 진영이 정비되지 못한 것을 바라보고 있던 백제 사람들이 갑자기 내달아서 급히 공격하므로 모든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고 크게 놀라 도망하였다.
<해설> 그러자 일주일 뒤인 3월 12일, 신라의 대규모 군사가 전라북도 고부의 고사비성에 진을 치고 있다가 문제의 두령윤성을 향해 더시 진격하는데, 신라본기에는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성을 빼앗지 못하였다’ 고 기록돼 있습니다. 신라군이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에게 참패를 당했다는 얘기지요.
*인서트-14. 테입<119> 노중국
(30:31 이 두량윤성 전투는 신라군이 공격을 합니다. 웅진강구 전투 쪽은 당군하고 주로 싸운 거고요 두량윤선 전투는 신라군하고 싸우는데 약 한 달 10일인가 이렇게 싸우다가 신라군이 대패를 합니다. 나중에 보면은 무열왕이 깜짝 놀라가지고 그렇게 패배를 해가지고 급히 지원군 보내고 그 다음에 뒤에 돌아오자 패배한 자들에 대해서 죄를 주는 일등이 나오고 그러면서 다시는 군대를 일으킬 생각을 할지 못했다 하는 그럴 표현이 나올 정도로 대패를 입었습니다. 31:15)
<해설> 신라군의 패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낭독자 4월 19일에 군사를 물렸는데, 고부의 빈골양에 이르렀을 때 백제군을 만나 서로 싸웠으나 패하였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구와 군량 등을 잃은 것은 심히 많았다. 무열왕은 군사들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 등을 파견하여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무열왕은 장수들이 패배한 죄를 논하여 벌을 주었다.
<해설>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둠으로써 백제 부흥군의 기세는 한층 고조됐겠지요. 백제 유민들과 부흥군들에게는 나당 점령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든 승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효과> (말 대여섯마리 달려와 멈추고)
장수4 대장군, 우리는 남쪽 지역에서 성을 다스리고 있는 성주들이옵니다. 장군의 용맹에 감동하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을 대장군께 바치려고 찾아왔습니다.
복신 그래? 허허허…. 고맙소이다. 우리 다 함께 힘을 모아서 점령군을 무찌르고 백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웁시다!
<해설> 지금껏 나당 점령군의 기세에 눌려 있던 타 지역 세력들이 속속 부흥군에게 합류하기 시작하여 남쪽 지방의 200여 성이 복신에게로 귀속해왔습니다.
반면에 서기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신라군으로서는 이들 전투에서의 패배가 안겨준 충격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장수들에게 전쟁패배의 책임을 물어 죄를 내렸다는 이례적인 기록이 있을 정도로 전쟁으로 인한 손실이 컸을 텐데, 그럼에도 삼국사기에는 아니 불(不)자에 이길 극(克)자를 써서 ‘불극’, 즉 ‘이기지 못 하였다’라고만 쓰고 있습니다. 신라군의 패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 해 6월에 신라에서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세상을 떠나고 그이 아들 김법민이 즉위하여 문무왕이 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또 하나의 전투를 소개하겠습니다. 서기 661년, 그러니까 신라 문무왕 즉위 원년이 되겠습니다. 그 동안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이 신라조정에 나타납니다.
김인문 대왕마마, 당나라 황제가 이미 소정방을 파견하여 수군과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신라의 대왕마마께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호응하라고 하옵니다.
문무왕 다시금 두 나라가 연합해서 이번에는 고구려를 치자는 것인데, 이 전쟁을 피할 방법은 없겠느냐?
김인문 비록 지금 대왕마마께서 선왕의 상을 치르는 중이오나 당나라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문무왕 음, 하는 수 없지. 들으시오!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에 우리도 출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장수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김인문과 진주, 그리고 흠돌을 대당장군으로 삼을 것이며, 천존과 죽지, 품일 등을 상주총관으로 삼을 것이며…
<해설> 그리고 8월, 문무왕은 신라의 모든 장병들을 거느리고 사이곡정이라는 곳에 이르렀으며, 한편 웅진성의 유인원도 군대를 거느리고 사비성에서 배를 타고 혜포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옹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부흥군이 신라군의 진로를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김유신은 방어체계가 잘 갖춰진 옹산성을 바로 공격하면 많은 희생자가 날 것을 두려워 하여 옹산성을 지키는 장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 신을 보냅니다.
김유신 (에코)외로운 성을 홀로 지키는 것은 항복하는 것만 못 할 것이다. 항복을 하면 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알아서 선택하도록 하라.
<해설> 그러나 옹산성을 지키고 있던 부흥군의 장군이 이런 답신을 보냅니다.
장수1 (에코)허허허, 이 성은 비록 그 규모가 작으나 군사와 먹을 것이 모두 풍족하고 사졸들 또한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우다 죽을 지언정 살아서 항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하하하.
<해설> 이렇게 되자 문무왕은 각부대의 총관과 장수들을 모아놓고 작전회를 열었는데,
문무왕 우리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옹산성을 격파하고 당군을 지원하기 위해 북진해야 할 것이다. 모두 진격하여 옹산성을 함락하라!
<효과> (군사들 몰려나가는)
<해설> 신라의 대병력이 옹산성을 포위하고 파상공격을 퍼부었지만 백제 부흥군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라군을 번번이 물리칩니다. 그러자 신라의 문무왕이 눈물로 독려하는 바람에 군사들을 감동시켜 결국 옹산성을 함락시킵니다. 그런데, 옹산성을 함락시킨 신라군을 향해 인근의 우술성에 주둔해 있던 부흥군이 공격을 가해옵니다. 우술성은 회덕의 계족산성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비록 우술성 역시 신라 문무왕이 거느린 대규모 군사의 공격에 함락되지만 백제 부흥군의 저항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 전쟁이었습니다.
<해설> 결국 신라가 당나라의 군량을 조달하는 통로를 백제 부흥군이 방해하고 저지함으로써 당나라군의 소정방이 고구려 공격을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게 하는 데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시그널 + 클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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