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해동의 증자(曾子) 의자왕, 왕위에 오르다

천하한량 2007. 7. 10. 17:17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02편>

해동의 증자(曾子) 의자왕, 왕위에 오르다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0.1(일) 00:05-01:00

 

* 나오는 사람들 

무왕         백승철

대신1        박영재

우소, 풍장   장민혁 

신하(신라)   이병용

선덕왕(여)   오인실

대신2, 수령  남도형    

당태종       차진욱

귀족1        이지환

귀족2        심승한

귀족3        방우호

귀족4        정형석

의자왕       유호한

당사신       김석환 

 

 

*시그널 + 타이틀

무왕    궁궐 남쪽에 못을 만들라 일렀거늘, 어찌하여 이리 소식이 없느냐? 내년 춘삼월에는 그 못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할 수 있겠느냐?

대신1   대왕마마, 지금 인부들을 징발하여 공사를 하고 있사오나 못에 채울 물이 없는 관계로…

무왕    무어라? 물이 없어? 네 놈이 감히 짐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20리 밖이든 천리 밖이든 물을 끌어다가 궁남지를 채우라! 그리고 궁궐 뜨락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겠다 했거늘 준비가 됐느냐?

대신1    예, 준비가 다 돼 있사옵니다.

무왕     그래, 허허허, 가자. 대소 신료들은 술을 마시고, 악사들은 거문고를 타고, 무희들은 춤을 추고…이것이 바로 태평성대가 아니겠느냐, 하하하하…

<해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대부분의 백제 왕들이 상대적으로 그 재위기간이 짧았던 반면에 무왕은 40년을 넘게 왕위에 있었습니다. 무왕은 서동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신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군사적 압박으로 빼앗긴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했으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성공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드라마로 꾸며서 선보였습니다만, 말기에 들어서면서, 정확하게는 재위 35년째 이후부터는 열락에 빠져서 국사를 소홀히 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상징적인 것 중의 하나가 궁의 남쪽에 조성했다는 못, 즉 궁남지를 들 수 있겠지요. 부여의 백제 사적지를 돌아본 사람이라면 궁남지를 구경했을 텐데요, 그러나 그 연못이 백제 무왕이 조성했다는 그 궁남지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계명대 노중국 교수의 설명입니다.

*인서트-1. 테입<112>  노중국

   (1:03:10 현재 부여에 가면 궁남지라고 복원을 해 놓은 게 있습니다. 그게 정확하게 그 자리다 하는 견해도 있고요 그 자리가 아니다 하는 견해도 있어서 확정짓긴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이십여 리에서 물을 끌어 와 가지고 못을 파고 물을 끌어 와서 거기다 물 채우고 다시 배수도 해야 되고 그러는데. 이십여 리 물길도 현재는 아직까지 확인은 안 돼 있습니다. 다만 궁남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방장선산을 만들었다고 하는 도가적인 그런 사상을. 1:03:52)

<해설>  궁남지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서 인공으로 조성된 최초의 조원(造苑)으로서, 경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안압지를 만들 때 그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궁성의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 리에서 끌어 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는데 이는 방장선산을 모방한 것이다.

<해설>  방장선산(方丈仙山)은 도교에서 ‘신선이 노니는 산’을 일컫는데, 이 보다 조금 앞 시기에 만들어진 금동대향로에도 도가적인 성격의 상징물들이 보이고 있어서, 궁남지 한가운데 방장선산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백제의 종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문헌기록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전주교육대 김주성 교수는, 이 궁남지 조성을 무왕의 방탕과 향락의 상징으로만 볼 게 아니라, 국왕권 강화의 근거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2. 테입<110>  김주성

     (1:22:23 의자왕을 태자로 삼는다든가 이와 같은 대왕포에서 연회를 즐겼다든가 또 하나 대단히 주목할 수 있는 게 궁남지를 건설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宮南池는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는 의미가 되는데요, 근데 이와 같은 궁남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강에서 물을 끌어들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이 물을 끌어들여서 궁남지를 만들었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게 국왕권의 강화를 의미해준다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1:23:03)

<해설>  자, 그러면 이번에는 무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자주 연희를 대왕포 로 가보기로 할까요?

<효과>  (강변, 물새 우는)

무왕    즐기기 않고 뭣들 하느냐? 자, 자, 마음껏 마시고 즐기도록 하라. 바야흐로 춘삼월이라 햇볕은 따사롭고 강 언덕에 색색의 꽃들이 다투어 피고, 좋은 시설이 아니더냐. 악동들은 풍악을 울리라.

<음악>  (거문고 등 어우러진 흥겨운 음악)UP & BG

무왕    (취한)무엇들 하느냐. 자, 모두들 일어나서 춤을 추어라. 아니 되겠다. 풍악을 멈추라. 짐이 직접 거문고를 탈 것이다. 거문고를 대령하렷다!

대신1   예, 대왕마마.

무왕    허허허허, 짐이 거문고를 탈 것이니 너희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라!

<음악>  (거문고 타는)

낭독자  무왕 37년 3월에 왕은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泗?河)의 북쪽 갯가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다. 양쪽 언덕에 기이한 바위와 괴이한 돌이 뒤섞여 있고, 그 사이에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들이 있어 마치 그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즐거움이 극도에 달하여 거문고를 타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니 아랫사람들은 번갈아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곳을 대왕포라 하였다.

<해설>  지난 시간에 무왕의 익산 천도설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해 드린 적 있지요? 계명대 노중국 교수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준비를 했으나 결국 천도를 실천하지는 못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인데요, 그는 무왕이 말기에 음주가무를 일삼는 등 열락에 빠진 것은 익산천도 계획의 좌절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인서트-3. 테입<112>  노중국

    (1:02:04 이게 왕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정치적인 타격입니다. 좌절이 되는 거고. 신하들에게 발목을 잡힌 게 되고, 이러니까 심리적인 충격도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천도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한 데 대한 심리적인 충격이죠. 그게 어떤 형태로 결국 현실로 표출이 되느냐 하면 정무에 힘쓰기보다는 즐기는 노는 쪽, 좀 잊어버리려고. 술 먹고 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런 심리적인 충격에서 좀 벗어나려고.1:02:52)

<음악>  (브릿지)

 

<해설>  서기 636년, 이 때는 무왕 37년인데, 무왕은 자신의 재위 중 마지막으로 신라 공격을 명합니다. 

무왕     장군 우소는 듣거라.

우소    예, 대왕마마.

무왕    신라 정벌에 나설 정예병사들을 소집하여 준비하라 일렀거늘 어찌 되었느냐?

우소    예,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5백 명을 이미 선발하여 출정준비를 마쳤 사옵니다.

무왕    좋다. 이번 우리의 공격 목표는 신라의 독산성이다. 지혜와 용맹을 발휘하여 기필코 독산성을 함락시키고 돌아오라. 알겠느냐?

우소    예, 대왕마마. 자, 가자!

<효과>  (군사들 달려나가는)

<해설>  무왕의 명을 받은 백제장수 우소는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5백 명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히 출정을 하는데, 그러나 선제공격을 하겠다고  출정한 군사답지 않게 백제군사는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패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관련기록이 이렇습니다.

낭독자  장군 우소는 옥문곡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안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했는데, 신라 장군 알천이 군사를 거느리고 몰래 와서 무찌르므로, 우소는 큰 돌 위에 올라 활을 쏘며 막아 싸웠으나 화살이 다 떨어져 전사했다.

<해설>  그러니까 독산성을 치겠다고 나섰는데 정작 독산성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옥문곡이라는 계곡에서 신라의 기습공격을 받아 무력하게 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무왕이 백제장수 우소를 보내 치도록 명한 독산성은 어디이며 우소가 기습공격을 당한 것으로 돼 있는 옥문곡은 또 어디쯤 있었을까요?

이 전투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신라의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깁니다.

낭독자  선덕여왕은 나라를 다스린지 16년 동안에 미리 알아맞힌 일이 세가지나 있었다.

<해설>  신라의 선덕여왕은 신기할 정도로 예지능력을 타고나서 자신이 죽을 날짜도 정확히 예언하였고, 씨앗을 보고 그 꽃에 향기가 있을지 없을지를 알아맞혔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 한 가지가 바로 백제 장수 우소가 군사를 이끌고 출격한 옥문곡 전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효과>  (개구리들 요란하게 우는)

신하    마마, 대궐 서쪽에 있는 영묘사의 옥문지 연못에서 겨울철인데도 개구리들이 모여서 사나흘 동안이나 울고 있사옵니다. 어인 영문인지 모르겠사옵니다.

낭독자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여왕에게 물었더니 여왕이 말하였다.

선덕왕  장수 알천과 필탄은 듣거라! 정예병사 2천 명을 뽑아 한시바삐 서쪽 교외로 나가도록 하라! 그 곳에 가면 여근곡이 있을 터, 그 여근곡에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터이니 그들을 습격하여 죽이고 돌아오라!

낭독자  두 명의 각간이 명령을 받은 후 각각 군사 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군사 5백 명이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한꺼번에 잡아 죽였다. 백제장군 우소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윗돌 위에 숨어 있는 것을 에워싸고 쏘아 죽였다. 또 지원하기 위하여 온 군사 1,200명도 역시 습격하여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해설>  삼국시기에는 옥문곡이라고 나오는데 삼국유사에는 여근곡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구리가 울었다는 연못 이름이 옥문지라고 돼 있습니다. 선덕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기 때문에 재위 기간중, 장차 일어날 세 가지 일을 알아맞혔다고 하여 대단한 능력을로 권위를 높일 필요가 있었겠지요. 무엇보다 삼국유사에는 이 여근곡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의 바로 인근에 있는 것으로 설정돼 있는데, 당시 백제와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으로 볼 때 백제 장수 우소가 경주 코앞까지 군사를 몰고 들어갔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얘기라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노중국, 김주성 두 사람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볼까요?

*인서트-4. 테입<112>  노중국

    (1:08:59 삼국유사에서는 경주 바로 가까운 바로 지척에 있는 건천의 여근곡에서 백제 군을 물리쳤다고 돼 있고, 삼국사기에는 백제 군사가 독산성을 공격하고 다시 옥문곡 에서 신라군하고 맞닥뜨려 가지고 백제군이 패배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삼국유사대로 따르면 여근곡 = 옥문곡이 되고 경주 아주 가까운 곳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여근곡이 너무 경주 가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1:09:42)

*인서트-5. 테입<110>  김주성

    (1:25:28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바로 경주의 문턱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경주시 건천읍을 여근곡이라고도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경북 성주와 합천 사이를 여근곡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마 이 우소가 침공했다라고 하는 곳은 바로 경주의 바로 근처인 건천읍이라고 보기는 너무나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걸로 봐서 아마 경북 성주하고 합천 사이 어느 지점이라고 비정하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봅니다. 1:26:09)

<해설>  애당초 백제의 우소가 공격목표로 삼았던 독산성의 위치도 논란거 립니다. 독산성은 삼국사기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오산 쪽에 독산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경상북도 포항시 신광면에 독산성으로 비정할만한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포항이라면 백제군이 신라에 너무 깊숙이 들어간 셈이 되고 경기도 안성은 이 이 전투기록과는 좀 동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 무왕조에 나오는 옥문곡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노중국 교수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등장하는 옥문곡의 경우를 근거로 삼아 다음과 같이 주장입니다.

*인서트-6. 테입<112>  노중국

     (1:10:48 신라 장군 김유신이 대량성 밖에,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입니다. 합천에서  백제군을 유인해 가지고 옥문곡에 복병을 숨겨 두었다가 백제군을 쳐서 크게 이겼다.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대량성, 그러니까 합천에 있죠. 합천 밖에서 백제군을 유인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옥문곡까지 유인을 했죠. 그런데 만약 이 옥문곡을 지금 건 천의 여근곡으로 보면 합천에서 건천까지 유인했다는 건데 이건 사실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우소가 독산성을 쳤다고 할 때 독산성은 성주의 독용산성이 있습니다.1:11:33)

<해설>  성주에 있는 이 독용산성이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독산성일 것이고, 실제로 지금 성주와 합천 사이에 옥문곡이라는 지명이 있기 때문에 그 곳이 당시 백제군과 신라군이 전투를 벌였던 공간일 것이다, 이런 분석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앞에서 무왕이 대왕포라는 곳에서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무왕이 연회를 즐겼다는 기록은 이후로 두 번 더 등장합니다.

낭독자  무왕 37년 가을 8월, 왕이 신하들에게 망해루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39년 봄 3월, 왕은 궁녀들과 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해설>  글쎄요, 국왕으로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궁녀를 대동하여 뱃놀이를 한 정도는 다른 임금들도 늘 해왔던 자연스런 여흥 수준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삼국사기에 그와 관련된 내용을 자주 기록한 것은, 무왕이 말년에 타락상을 보였다는 쪽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어떤 의도가 깔려 있는 건 아닐까요?

무왕의 입장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면 이런 항변을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꺼낸 얘깁니다.

자,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백제의 유학(儒學) 얘기를 잠시 해보기로 할까요?

*인서트-7. 테입<112>  노중국

    (1:15:29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가 왜에 오경박사를 파견해 가지고 왜에 유학을 전해준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 백제는 필요하면 중국으로부터 학자를 초빙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성왕 때 보면 모시 박사를 초빙하기도 하고 강례박사 육후를 초빙하기도 하고 그렇게 한 것이죠. 초빙해서 인재들을 기르고 유학에 대한 교육을 강화시키기도 했습니다.1:16:11)

<해설>  백제에서 유학이 성했을 뿐 아니라 그 수준도 상당해서 바다 건너 왜국에서는 오경박사 등을 통해 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대신에 백제에 군사지원을 해주기도 했다는 내용을 수 차례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했다는 내용이 바로 무왕 말기에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낭독자  무왕 41년 봄 2월에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어 국학에 입학하기를 청했다.

<해설>  이 때가 서기로는 640년인데, 똑같은 시기에 신라본기에도 왕실의 자제를 당나라에 유학보냈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낭독자  선덕왕은 자제들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국학에 입학하기를 청하였다. 당 태종은 천하의 명유(名儒)들을 학관(學官)으로 삼고 국자감에 행차하여 그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케 하고 학생으로서 능히 대경(大經) 이상을 밝게 통달한 사람은 모두 관리에 등용할 수 있도록 만드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이 때에 고구려 백제 토번 등도 또한 자제를 파견하여 국학에 입학시켰다.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순수하게 학문을 하기 위해서 유학을 보내기도 했겠지만, 정치 외교적인 이미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그런 얘깁니다.

대신2   대왕마마, 고구려 신라 뿐 아니라 토번까지도 당나라 국학에 왕실자 제들을 입학시키기 위해서 학생들을 보내고 있다 하옵니다.

무왕    우리는 이미 중국에서 오경에 능통한 박사들을 초빙하여 경전을 가르쳐 오지 않았느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오경박사들이 바다 건너 왜국에 정기적으로 파견되어서 유학을 가르쳐 오지 않았느냐?

대신1   당나라 태종이 직접 나서서 학덕이 높은 학자들을 교관으로 삼고 학교 건물도 크게 지어서 장려하고 있는 터에, 국학에 인재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것이 어찌 학문연찬에만 그 목적이 있겠사옵니까.

무왕    흐음, 당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대국이고 그 나라 황제가 국학을 장려하고 나섰다 하니 우리 백제도 국학 입학생들을 선발하여 입학시키는 것이 도리겠구나. 특별히 왕실 자제들로 국학에 유학할 학생들          을 선발하도록 하라!

<해설>  유학에서 강조하는 충과 효가 국가 통치이념으로서 중요하니까 배           울 필요도 있었고, 강대국인 당나라의 황제가 나서서 장려한 일이           기 때문에 외교차원에서 왕실 자녀를 보낸 것이다, 이런 해석입니           다. 참고로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낸 나라들 이름 중에서 토번(吐             藩)은 오늘날의 티벳 지역에 있던 왕국을 일컫는 말입니다.

<음악>  (브릿지)

 

신하들  (죽음-비통하게)“대왕마마…”

<해설>  서기 641년 봄 3월, 백제의 제30대 임금 무왕이 재위 42년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납니다. 백제사신이 당나라에 가서 소복을 입고 글을 올려 무왕의 죽음을 알리자, 당태종은 국서를 보내 이렇게 말한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당태종  (에코)먼 지방 사람을 생각하는 도리는 총명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죽은 사람을 표창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도 막힘이 없는 버이오. 백제왕 부여 장이 별안간 세상을 떠나니 매우 슬프오. 마땅히 보통의 예우보다 더하여 영광을 표시해야 되겠소.

<해설>  그렇다면 백제사에서 무왕은 어떤 군주였을까요?

*인서트-8. 테입<112>  노중국

    (1:24:59 저의 견해대로 한다면 사실 몰락 왕족으로서 어렵게 살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건 자력으로 된 게 아니고 당시 정치적인 역학 관계 속에서 옹립이 되었는데 옹립되고 난 다음에 어떤 왕이 될 거냐 하는 건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꼭두각시 왕이 되는 방법이 있고, 하나는 왕으로서의 체통을 확립해 나가는 길도 하나 있는데, 무왕은 후자 쪽입니다. 왕으로서의 체통을 완전히 세우게 되었습니다. 1:25:42)

<해설>  비록 옹립된 왕이었지만 귀족세력의 전횡에 끌려가지 않고 당당하 게 왕권을 확립한 군주였다, 노중국 교수의 견해가 그렇습니다. 김주성 교수는 그의 왕호가 무력을 나타내는 굳셀 무(武)자라는 점에서 영토확장을 위한 지속적인 군사행동을 주된 업적으로 꼽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9. 테입<110>  김주성

    (1:54:09 武자를 붙여준 왕은 영토를 많이 넓혔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무왕은 끊임없이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공을 해서 영토를 넓혀갔었고요, 또 북방으로 영토를 계속적으로 넓혀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 무왕의 칭호에서 느껴지듯이 우선 영토를 많이 넓힌 왕이다, 라고 하는 것이고, 영토를 많이 넓히기 위해서는 그만큼 군사력을 강화시켰다고 하는 것인데 결국 그런 군사력의 강화는 귀족들의 세력권에 있었던 군사 지휘권을 국왕의 권한으로 일률화 시켰다는 것으 보여주는 것입니다. 1:54:55)

<해설> 그러나, 절터의 규모로 보아서 동양최대의 사찰이라고 할 만한 미륵사의 창건, 그리고 천도가 이뤄졌는지 준비만 해놓고 무산됐는지는 확정할 수 없으나 어쨌든 익산에 조성한 거대한 왕궁, 거기다 왕흥사 건립과 궁남지 조성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백제의 국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인서트-10. 테입<112>  노중국

    (:26:54 왕궁리 왕궁과 같은 이 거대한 토목 건축 사업, 오랜 장기간에 걸쳐서 많은 재정과 인력이 드는 이런 거대한 토목 건축 사업을 한 게 무왕 자신으로서는 왕실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보이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그게 결과적으로는 재정 낭비, 민력을 크게 피폐시킬 수도 있었다고 하는 것. 이게 의자왕 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보다는 역작용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게 아니냐.1:27:41)

<음악>  (브릿지)

 

<해설>  자, 이제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제31대 의자왕 시기의 백제 역사를 탐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낭독자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33년 만에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는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었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고 일컬었다. 무왕이 돌아가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해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의자왕의 즉위기사가 앞에서 소개한 바와 샅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즉위기사만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는 무왕의 맏아들인데도 왜 그렇게 늦게 태자에 책봉됐을까, 부모에게 효도했다는데 그렇다면 그의 친어머니는 누구일까?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어서 해동의 증자라는 찬사를 들었다 했는데 그것이 그의 타고난 성품인가, 아니면 정략적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인가? 그는 도대체 몇 살에 왕위에 올랐을까?

자, 이제부터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을 둘러싼 이 의문들을 함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우선 백제 의자왕의 모계가 어떻게 될까요? 다시 말해서 의자왕의 어머니는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무난한 대답을 찾자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신라의 선화공주다’ 가 됩니다. 삼국유사의 이른바 서동설화를 그대로 믿자면 그렇다는 얘기죠. 무왕이 총각인 서동시절에 선화공주를 만나 결혼했고 그런 다음에 왕위에 올랐다면, 무왕의 맏아들은 당연히 의자왕이 되겠지요.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는, 다른 문헌근거가 없는 이상, 무왕이 선화공주와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물론 당시의 양국관계로 볼 때 두 나라 왕실간에 결혼이 이루어질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반론이 대세이긴 한데,

*인서트-11. 테입<113>  이도학

    (08:40 그러나 동성왕의 경우도 신라 왕녀를 아내로 삼은 적이 있었고요. 그리고 한강유역을 신라의 배신 행위로 인해서 성왕이 빼앗겨 버렸지만 신라 진흥왕이 딸을 보내줘서 작은 왕비로 삼은 적도 있는 것입니다. 험악한 관계 속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죠. 무왕의 경우 신라를 뒤에 공격하긴 했습니다마는 무왕의 즉위 기반 이라고 하는 것이 튼튼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신라 왕실하고의 혼인 관계를 통해서 백제 내에서의 자신의 기반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그런 의도 속에서 일종의 결혼 동맹을 외적으로 체결해 가지고 백제 안의 여타 귀족 세력들을 일단 제압할 필요가 있었고,09:29)

<해설>  동성왕 경우에 비춰보더라도 백제와 신라 두 나라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을 때에도 왕실간에 혼인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니다.

그러나 상당수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남역사문화원 강종원 연구원은 무왕의 부인이 선화공주라는 삼국유사는 믿기 어렵다, 따라서 신라 출신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2. 테입<114>  강종원

    (06:25 선화공주가 신라의 공주라고 보기는 상당히 어렵고 또 무왕의 몰락한 왕족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데. 실제 무왕이 즉위한 이후에 신라에 대한 공격이라든지 대규모 토목공사, 이런 것들로 봤을 때 결코 그렇게 왕권이 약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걸로 봐서는 무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무왕의 어머니와 또 비와 관련된 세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당시 상황으로는 합당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랬을 경우 무왕의 비는 익산의 재지세력이 딸이 아닌가. 07:10)

<해설>  따라서 강종원 연구원은 무왕의 비, 즉 의자왕의 어머니는 무왕이 총각시절에 서동으로 지냈던 익산의 어떤 집안 딸이 아니었겠느냐, 이렇게 추정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 다음, 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무려 33년이나 지나서야 의자 왕자를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미리 얘기를 하자면 의자왕 자신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4년 만에 왕자 융(隆)을 태자로 책봉합니다. 그것이 정상이지요. 그런데 무왕은 어찌하여 맏아들인 의자 왕자를 33년간이나 묵혀 두었다가 뒤늦게 태자 책봉을 했을까요? 왕자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물론 무왕에게는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을 것이고, 의자왕의 경쟁자가 될만한 왕자 또한, 일단 여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강종원 연구원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인서트-13. 테입<114>  강종원

   (09:33 태자를 둘러싸고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이라든지 이런 현상들이 많이 벌어졌을 것으로 생각이 되고, 특히 백제의 경우에는 왕도가 부여 사비에 있다가 익산으로 무왕 때 옮겨 가는, 정치의 중심이 옮겨 갔다고 보아집니다. 그랬을 경우 사비 세력과 익산 세력 간의 정치적 알력,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고요. 결국 어느 정치 세력이 미는 인물이 태자가 되느냐에 따라서 결국은 그 다음 대에서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가가 판가름이 날 텐데, 그런 의미에서 정치 세력 간의 갈등 관계. 10:19)

귀족1  수도를 금마저로 옮기겠다는 대왕마마의 뜻을 우리는 결단코 받들수가 없소이다.

귀족2  금마저 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대부분이 이 곳 사비성의 토호들입니다 그려. 우리는 사비성의 사씨들이 의자왕자의 태자책봉도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이다!

귀족1  장자가 태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시오! 대왕마마께는 의자왕자 외에도 여러 명의 왕자가 있소이다. 그 중에서 적임자를 찾아야 할 것이오! 

귀족2   그러지 말고, 금마저 천도를 반대하는 당신들은 어느 왕자를 태자로 받들 생각인지 그 속내를 밝히시오! 마땅히 의자왕자를 태자로 삼으려는 대왕마마의 뜻을 끝내 거역한다면 우리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귀족1   협박을 하는 것이오? 백제국의 장래를 위해서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을 군주로 삼아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을 반역으로 매도하려는 것이오?

귀족2   의자 왕자는 일찍이 해동의 증자로 칭송받은 인물이오!

귀족2   우리는 의자왕자의 태자 책봉을 찬성할 수 없소!

<해설>  강종원 연구원은, 의자왕의 태자책봉을 두고 귀족세력간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상하면서, 금마저, 즉 익산으로 천도하는 데에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들간의 다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도학 교수의 진단은 다릅니다. 그는 삼국유사에 실린 서 동설화를 일단 사실로 받아들이고, 의자 왕자의 태자 책봉이 늦어진 것은, 그가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를 어머니로 둔 핸디캡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인서트-14. 테입<113>  이도학

    (09:37 의자왕이 무왕 33년에 와서야 태자가 됐어요. 이런 경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가운데 예를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왜 이 사람이 해동증자라는 명성까지 얻은 사람인데 늦게 태자가 되느냐. 국정의 제2인자가 되고 후계자가 되는 태자 자리에 너무나 늦게 책봉되었던 것이죠. 이것도 정상적인 결혼 관계, 무왕이 백제 지역의 귀족의 딸하고 결혼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기 어려운 것이죠. 신라하고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런 상황에서 무왕이 신라 왕녀를 아내로 삼게 되다 보니까 그의 아들인 소생인 의자 왕자가 태자가 되는 과정이 결단코 순조롭지 않았다, 힘들었다. 10:23)

<해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귀족3  대왕마마, 어찌하여 태자 책봉을 늦추시는 것이옵니까?

무왕  태자 책봉을 언제 짐이 늦추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경들이 책봉을 반대해서 이리 늦어진 것이 아니던가!

귀족4  그것은 대왕마마께서 태자를 잘못 간택하였기 때문이옵니다.

무왕   무엇이라? 자고로 임금의 장자가 태자가 되는 것이 순리이거늘 경들은 어찌하여 의자 왕자를 태자로 세우겠다는 짐의 뜻을 한사코 꺾으려 하는 것인가!

귀족3   의자 왕자는 아니 되옵니다.

무왕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의자가 어찌하여 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귀족4   의자 왕자는 외가가 신라 왕실이옵니다.

무왕    외가가 신라여서 어떻다는 것인가?

귀족3   대왕마마, 우리 백제가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신라에게 한성 땅을 비롯한 영토를 대거 빼앗겼기 때문이옵니다. 따라서 대왕마마는 물론이고 후대 임금께서도 고토회복을 위해서는 신라와 부단히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온데, 신라왕실을 외가로 두고 있는 의자 왕자께서 왕위에 오른다면 그것이 쉽겠사옵니까?

<해설>  이런 이유 때문에, 도덕적으로 아무런 결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자 왕자가 태자가 되는 길이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의자왕의 어머니가 적대국인 신라 왕실 출신의 선화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그 얘깁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일본서기에 나타난 풍장(豊章)에 대한 기록입니다.

낭독자  서명(舒明) 3년 초하루, 백제왕 의자가 왕자 풍장을 들여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해설>  일본에 볼모로 갔다는 왕자 풍장을 두고,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일본에 건너갔다는 때가 서기 631년이면 백제 무왕 때이기 때문에 무왕의 아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무왕의 아들이라면 의자 왕자와는 왕위 계승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했던 이복형제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죠. 강종원 연구원의 얘기 들어보시죠.

*인서트-15. 테입<114> 강종원

    (12:14 의자왕과는 배 다른 형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거죠. 백제 멸망 이후에 주로 활동한 이런 상황과 연계시켜 봤을 때 의자왕의 아들일 가능성도 사실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의자왕의 경우에는 태자 융이라든지 효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기록상에서요. 아마 무왕의 아들일 가능성도 높지 않나. 이런 추정을 해 봅니다. 다만 그가 일본에 가서 있었고 거기서 또 활동을 했던 것은 의자왕의 태자 책봉, 이것과 전 후해서 혹시 태자 책봉 이전에 일본으로 보낸 그런 것과 관련 있지 않나.13:01)

무왕    풍장은 들어오너라.

풍장    (들어와 무릎 꿇고)예, 대왕마마.

무왕   네가 이 나라의 왕자로서 태자에 뜻을 두어 왔다는 걸 애비는 잘 알고 있느니라. 허나, 애비는 백제의 국왕으로서 너희 형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니라. 서운하겠지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니라.

풍장   분부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아바마마.

무왕   당연히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그리 하여야 할 것이다. 허나, 너를 태자로 세우겠다고 나섰던 일부 귀족세력까지 너처럼 그리 흔쾌하게 아비의 결정에 승복하겠느냐?

풍장   걱정 안 하셔도 될 것이옵니다, 아바마마.

무왕    나는 걱정을 아니 할 수 없구나. 그래서 말인데, 네가 잠시 떠나 있어야 할 것 같구나.

풍장    예? 어디로 떠나라는 말씀이옵니까?

무왕    바다 건너 왜국에 가서 지내다 와야겠다. 떠날 채비를 하거라.

풍장    (비통하게)예, 대왕마마.

<해설>  왕자 풍장은 이런 연유로 해서 왜국에 볼모로 건너갔을 것이다, 이런 얘기지요. 풍장이 왜국에 갔던 때가 서명천황 3년, 서기로 631년인데, 무왕이 왕자 의자를 태자로 책봉한 때가 632년이니까, 풍장을 왜국으로 보내서 경쟁자를 없앤 다음에 의자 왕자를 태자로 책봉했다면 그 시기가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의자왕의 품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서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해동의 증자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증자란 중국 춘추시대의 노나라 사람인데, 공자의 직계 제자로서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높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의자 왕자가 무왕 33년에야 뒤늦게 태자로 책봉된 것과 그가 둘도 없는 효자였다는 사실을 연관지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자 의자는 태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을 만큼 여건이 불리했다는 얘기지요.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딱 엎드려서 아버지이자 임금인 무왕에게 고분고분 충성을 다하고, 배다른 형제들과도 우애롭게 지내서 책잡힐 행동을 안 했을 것이다, 이렇게 추리해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아버지인 무왕이 말년에는 음주가무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자왕   지금 당나라는 고구려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고, 신라는 당나라와 화통하여 우리 백제를 압박하고 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백제 백성들은 계속되는 전쟁과 노역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사 옵니다. 안팎으로 이러한 때에 어찌하여 대왕마마께서는 가까이 있는 간신들과 어울려서 열락에 빠져 지내시옵니까!

<해설>  만일 의자왕이 불효를 무릅쓰고 무왕에게 이렇게 대했더라면 그가 다음 왕위 계승권자로 점지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효성스럽고 우애롭다고 표현된 의자왕의 성품이 어느 정도는 정략적인 처신이 아니었을까, 이런 의문입니다. 강종원 연구원은 충분히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인서트-16. 테입<114>   강종원

    (14:08 태자로 책봉 받기 위해서는 상당히 근신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고. 결국은 그런 과정 속에서 의자가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를 보임으로써 태자로서 책봉 받을 수 있는 자격 조건을 갖춤으로 해서. 또 그와 반대되는 정치 세력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들 세력을 무마시키는 그런 측면에서 행동을 보인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의자왕의 그런 행위들을 가식적이라든지 계산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봤을때. 14:59)

<해설>  그러나 이도학 교수는, 타고난 품성이 아니라면, 왕자로 지내는 그 장구한 세월동안 지극한 효자와 우애로운 형제로 평가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인서트-17. 테입<113>  이도학

     (14:33 왜 그런 품성을 가지게 됐는가. 초인적인 자기 절제에서 나온 거란 말입니다. 정략적인 측면, 어머니가 신라 왕녀 출신이고 하기 때문에 태자가 되고 하기 위해서는 납작 엎드려 있어야 되고 고분고분해야 하고 효자처럼 살아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한계가 있는 거죠. 의자왕자가 태자로 즉위하게 될 때가 사십 대 후반이에요. 이 장구한 기간, 사십 대 후반이면 예전 같으면 지금의 육십 나이에 해당하는 연령이란 말입니다. 그 좋은 황금 같은 기간을 세월을 다 보내면서 자기희생, 절제해야 되는 그런 생활을 하기는 어려운 것이죠.15:21-21.)

<해설>  물론 태자로 책봉되는 과정이 험난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의자 왕자는 자신의 입지가 대단히 불리하였고, 따라서 반대파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닌 긴 세월 동안 타고난 성품을 숨기고 이중적인 행동을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살펴볼까요?

기록에는 사람들이 왕자시절의 의자를 일컬어 ‘해동의 증자’라고 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증자가 공자의 제자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단히 유교적인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의자왕이 단순히 효자였다는 사실을 넘어서, 유교적인 이념을 통치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인서트-18. 테입<113>  이도학

    (16:34 의자왕의 이름이 의로울 義 자에다 자애로울 慈 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유교의 사상하고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의자라는 이름은 아버지인 무왕이 지어 준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마는 왕이 뒤에 또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지을 수도 있는 거예요. 의자라고 하는 이름을 통해서 이 사람의 유교적인 덕목을 강조하고 유교적인 이상적인 정치를 자신이 구현해 봐야겠다고 하는 열망과 의지가 일단 이름에 들어 있는 것이고, 그리고 또 이 사람이 즉위 초기에 보면 인덕 정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죄수들을 방면해 주고 감싸 주고 하는 포용력이랄까, 용서해 주는 그런 관대한 통치자 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포용해 가는. 17:22 )  

<해설>  의자왕의 이름으로 쓰인 글자인 의로울 의(義) 자체가 유교의 덕목 중의 하나이고, 자애롭다는 의미의 사랑할 자(慈)자 역시 유교이념과 통한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강종원 연구원은 백제가 본래 유교가 강성한 국가였는데 특별히 의자왕 시기에 와서 그것이 더욱 강조되었다고 보는 것은 확대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인서트-19. 테입<114>  강종원

    (17:09 그 부분은 부정할 수는 없겠고요. 그러나 백제의 경우에는 유교가 상당히 일찍 중국으로부터 수입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성왕 때도 중국에서 강례 박사를 초청을 한 다든지 하는 것을 봤을 때 적극적으로 유교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귀족이라든지 왕족들은 유교 경서가 하나의 필독서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런 걸로 봐서 유학 사상은 기본적으로 뿌리를 잡고 있다고 볼 수가 있고 그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유교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가 있죠. 17:51)

<음악>  (브릿지)

 

당사신  백제국 대왕마마, 소인은 당나라 태종황제의 명을 받고 찾아온 사신 이옵니다.

의자왕  허허허허, 먼 길 오느라 수고하였소. 그래 당나라 황제가 전하는 얘기는 무엇이었는고? 

당사신  저희 황제께서는 의자대왕의 즉위를 축하하시면서 대왕마마를 대방 군왕 백제왕으로 삼으셨사옵니다.

의자왕  알겠느니라, 짐도 사신을 보내서 당나라에 선물을 전하도록 하겠다.

<해설>  의자왕이 즉위하자마자 당태종이 먼저 사신을 보내서 축하하고, 의자왕을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책봉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 쪽에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당나라에서 먼저 책봉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만 보더라도 책봉이란 그저 의례적인 외교상의 관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의자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주변의 국제정세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본 다음에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로 할까요?

*인서트-20. 테입<114>  강종원

    (18:45 고구려의 경우는 중국과 계속 전쟁을 하는 상황이었고 이 과정에서 백제는 잃어버린 한강 유역의 회복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위해 노력을 하고, 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그런 침략에 맞서서 자국을 지켜 내기 위한 그런 노력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활용된 것이 특히 중국 세력이 아닌가 생각이 되고, 당나라가 그 정점에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는 수나라를 대치해서 당나라가 들어서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계속적인 전쟁, 이런 것들이 이어지고.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에 맞서서 당에 고구려의 외형적으로는 침략을 계속 요청을 하게 됩니다.19:40)

*인서트-21. 테입<113>  이도학

    (7:58 당태종은 통일 제국인 당나라의 두 번째의 황제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의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를 반드시 무릎 꿇려야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와의 적대 관계랄까 이런 것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백제하고는 오랜 원수 지간이 됐던 것이죠. 무왕도 처가의 나라이긴 하지만 신라를 계속 공격해 가면서 압박을 했고, 신라와 백제는 계속 공방전을 벌이는 이런 상황이 됐던 것입니다. 왜의 경우, 바다 건너에 있는 왜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백제와 친선 관계를 맺고 있는.18:42)

<해설>  백제와 고구려와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가 무왕 시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나라와 고구려는 군사적인 공방을 주고받고 있고, 백제는 당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주문했으면서도 내막적으로는 고구려와 화친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신라에 대한 백제의 군사적 압박은 의자왕 때에도 계속되는 상황이었으며, 다급해진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바람에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가 한 걸음 더 더가서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의자왕  짐이 왕위에 올랐으니 모름지기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백성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마땅한 선물이 없겠느냐?

대신1   대왕마마께서 지혜로운 군주가 되어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펼치는 것만큼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의자왕  허허허허,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치기를 원치 않는 구주가 어디 있겠느냐. 짐 또한 그러할 것인 즉, 당분간 지방의 주와 군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두루 살펴봐야겠구나.

<해설>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주와 군을 순무(巡撫), 즉 백성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기 위해서 지방 시찰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자왕  음, 옥에 갇힌 저 죄수들은 무슨 죄를 지었는고?

수령   예, 대왕마마, 저들은 남의 것을 탐하여 도둑질을 하거나 폭력을 휘둘러 남에게 해를 입힌 자들이옵니다.

의자왕  저들이 지은 죄를 반성하고 있다면 모두 풀어주도록 하라!

수령    예, 대왕마마. 하오면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라는 분부시옵니까?

의자왕  죄목을 잘 살펴서 죽을죄를 지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죄를 어명으로 용서하겠느니라.  알겠느냐?

수령    예, 대왕마마.

낭독자 왕이 주와 군을 순무하여 죄수들의 정상을 기록하고, 죽을죄를 진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를 용서하였다.

<해설>  대체로 고대국가의 왕들은, 나라에 경사가 있는 때에는 죄수들의 죄를 용서하여 방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새로운 임금이 즉위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의자왕의 지방순무는 의례적일 수도 잇지만, 나름대로의 정치적 계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큐멘타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후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03편>

   격변하는 동아시아와 의자왕의 선택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0.8(일) 00:05-01:00

 

                    나오는 사람들

낭독     이승주

조문사   백승철

의자왕   유호한

대신1    차진욱

대신2    이병용

윤충     박영재

장수     김석환

김춘추   방우호

개소문   장민혁

선덕왕   오인실

당태종   심승한

신라사신 정형석

현장     남도형

대신3    이지환

 

 

*시그널 + 타이틀

<해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의자왕의 출생과, 뒤늦게 태자로 책봉된 경위, 그리고 즉위과정을 다각도로 탐색해 봤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의자왕 치세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짚어 보기 위해서 출발을 해야 할 순서인데, 출발단계에서부터 우리를 방해하는 문헌사료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만을 근거로 하자면,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태자시절에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어질 만큼 극진한 효자였고, 서기 641년에 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지방의 주와 군을 순시하면서 죄 지은 자들을 사면해서 풀어 주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새로 임금이 된 의자왕은 인자한 성군의 모습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런데, 의자왕 즉위 직후인 서기 642년의 일본서기 황극천황 원년기록에는, 백제에 관한 심상치 않은 내용이 수록돼 있습니다. 왜국의 서명천황이 죽자, 백제에서 왜에 조문사절을 파견했는데 그 조문사가 왜국 조정에 이렇게 전달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조문사  백제의 대왕마마께서 저희들에게 이르시기를, 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을 하므로 돌아오는 길에 사신에 딸려 보내주기를 청하더라도 일본 조정에서 허락지 마시라고 하셨사옵니다.

<해설>  여기 나오는 ‘새상’이라는 인물은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의자왕의 동생인 새성(塞城)이라는 사람과 동일인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의자왕이 조문사절을 보낼 때 이런 명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의자왕  너희들이 우리 백제의 조문사절단으로 왜국에 건너가면 지금 왜국에 머무르고 있는 내 의붓동생 ‘새상’이 너희 사절단을 따라서 백제로 돌아오기를 청할 것이다.

조문사  그러면 어찌해야 하옵니까, 대왕마마.

의자왕  절대로 그를 데리고 돌아와서는 아니 될 것이다. 새상은 나쁜 짓을 일삼는 백해무익한 인물이니 왜국 조정에 얘기해서 계속 거기에 머무르게 하라.

<해설>  앞뒤 정황으로 보아 새상이라는 인물은 의자왕의 즉위과정에서 갈등을 빚었던 배다른 형제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이 기록이야 크게 놀랄 만한 내용은 아닌데, 왜국에 건너간 백제 조문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조문사  금년 정월에 우리 백제 대왕마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대왕께서는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그 외에 높은 관직에 있던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 하였사옵니다.

<해설>  그러니까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선왕인 무왕의 왕비이자 실권을 쥐고 있던 계모가 세상을 뜬 것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런 내용이 됩니다. 충남역사문화원 강종원 연구원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인서트-1. 테입<114>  강종원

    (22:27 의자왕의 친위정변으로 이해를 하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 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고 있는데요. 첫째는 그 연대를 그대로 믿어서 642년으로 보는 경우가 있고. 또 이것을 의자왕 15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자왕 전기와 후기의 정치 행태의 변화, 이런 부분들을 나누는 데 있어서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를 하기도 하죠. 그러나 어쨌든 의자왕의 입장에서는 이 정변을 기회로  해서 반대 정치 세력들을 축출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로 작용을 했다. 23:11)

<해설>  의자왕에 의해서 해도(海島)로 추방되고 숙청된 왕실 관계자와 실권 귀족들의 규모로 봐서 가히 혁명적인 정변이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언제 발생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일본 서기에는 서기 642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니까, 의자왕이 즉위한지 1년도 채 안 되는 시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정황으로 미루어볼때, 의자왕이 즉위하자마자 이런 잔혹한 숙청작업을 단행했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겠느냐,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의 의견이 그렇습니다.

*인서트-2. 테입<113> 이도학

   (20:57 정황을 놓고 보더라도 의자왕이 즉위하고 나서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그걸 기화로 해서 정변을 일으켜서 왕족들을 섬으로 추방도 시키고 하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는 모습이죠. 왕의 친족들이 전부 숙청당하고 있어요. 이건 해동증자 이미 지하고는 전혀 안 맞는 거죠. 물론 사람은 열 번 변한다는 말이 있긴 합니다만 즉위하고 나서 얼마 안 돼 가지고 완전히 표변해 가지고 때려잡는 식으로 해서 쫓아내고 했다.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과연 해동증자라고 하는 기록이 나올 수 있겠는가. 물론 해동증자는 왕이 되기 전까지만 해동증자고 그 이후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21:41)

<해설>  지난 시간에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증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 사람으로서 공자의 제자인데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자 시절의 의자왕은 ‘해동의 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지극하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의자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변을 일으켜 한바탕 숙청을 단행했다면 그런 호칭이 붙었겠느냐, 이런 지적이지요. 뿐만 아니라 어느 왕이든 즉위 초반에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위해서 반대세력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 관례이고, 무력을 행사하더라도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임으로써 내부의 단결력을 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의자왕이 즉위하자마자 그런 친위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엄연히 일본서기에 의자왕2년에 해당하는 서기 642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정황상 그랬을 리가 없다고 무시해버린다면 그 역시 옳은 자세가 아니겠지요. 백제 연구자들이 그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가 642년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일본서기 자체가 안고 있는 기술상의 문제점 때문입니다.

*인서트-3. 테입<113>  이도학

   (19:35 일본서기 황극 원년조, 642년이 됩니다. 642년에 들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재검토가 필요해요. 황극천황은 여자 천황이거든요. 642년에 천황의 자리에 있다가 물러났어요. 물러났다가 655년에 다시 천황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때 시호는 제명천황 이죠. 한 명의 천황이 두 번 천황 자리에 올랐던 거예요. 이런 경우는 복벽이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나라도 고려 말에 그런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황극 원년조에 있는 기사, 제명원년조에 있는 기사, 같은 사람의 역사예요. 이것이 혼란을 일으켜 가지고 제명원년조에 있는 기사가 황극원년조로 잘못 가게 된 겁니다.20:24)

<해설>  그러니까 한 인물이 천황자리에 두 번 올랐는데, 백제 의자왕의 정변은 두 번째 천황자리에 오르던 해에 벌어졌던 것을, 처음 천황에 즉위했을 때 일어난 것처럼, 일본서기 편집과정에서 잘 못 기재 되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황극천황이 물러났다가 제명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즉위했던 때가 언제냐, 서기 655년, 의자왕15년이 됩니다. 이때부터 의자왕은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게 되는데, 앞서 소개했던 그런 숙청사건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고 봐야 옳다, 그런 얘깁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견해를 더 소개하죠.

낭독자  영류왕 25년, 왕은 서부대인 개소문에게 명하여 장성(長城)의 역사를 감독하게 했다.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개소문은 장(藏)을 내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해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다음, 보장왕을 왕으로 내세우게 된 과정을 기록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때가 바로 서기 642년입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기로 한다면, 의자왕이 숙청을 단행한 연도와 정확하게 일치하게 되는 것이죠.

*인서트-4. 테입<114>  강종원

    (20:16 고구려의 경우에는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영유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거든요. 그것이 642년, 공교롭게도 의자왕이 친위 정변을 일으키는 그 시기 와도 같이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동병상련이라고 할까요, 같이 쿠데타를 일으킨 측면에서 두 나라가 갑자기 가까워진 것이 아닐까, 이렇게 추정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외부적인 상황들이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화해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으로 전개 된 것으로 생각이 되고요.20:55)

<해설>  의자왕과 연개소문이 같은 해에 정변을 일으킨 인연 때문에 그 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협력관계로 돌아선 것이 아니냐, 일부에서 그런 설을 제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음악>  (브릿지)

 

대신1  대왕마마께서 지방의 주와 군을 순무하시고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여 풀어 주시니, 그 은혜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칠 것이옵니다.

대신2  이제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대왕마마께서 국사의 선후를 정하여 명하시면 충실히 받들 것이옵니다. 

의자왕  지도를 가져오라.

대신1   예, 대왕마마. (지도 펼치고)여기 대령하였사옵니다.

의자왕  선왕께서 재위 중에 부단히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에 빼앗긴 고토를 많이 회복하였으나, 아직 모자람이 많다. 신라를 정벌할 것인데 어디로 나아갔으면 좋겠는가?

대신2   미후성 쪽으로 진격하는 게 좋을 듯 하옵니다.

의자왕  짐의 생각도 그러하다. 미후성을 비롯한 동쪽 변경의 신라 성들을 공격하여 빼앗을 것이다.

윤충   명령만 내리시옵소서 대왕마마.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신라로 통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성들을 모조리 함락시키겠사옵니다.

의자왕  짐이 군사를 지휘할 것이니라.

대신1   대왕마마께서 친정(親征)을 하시겠사옵니까.

의자왕  그렇다. 짐이 즉위하고 처음 나서는 출정이니 이번 전투는 짐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갈 것이니라. 군사들에게 진군 명령을 하달하라!

<효과>  (북 치는)

        (병사들 행진하는)

<해설>  의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지휘하였고,

의자왕  궁사들은 활을 쏘라!

<효과>  (화살 빗발치듯 날아가는)

의자왕  성문을 부수고 돌진하라!

<효과>  (함성 지르며 달려가는)

        (성문 부수고 돌진하는)

<해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직접 나선 이 전쟁에서 ‘신라의 미후성 등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40여 개의 성 중에서 미후성 하나만 성 이름이 올라 있는데다, 그 미후성 마저 지금의 지명으로 어느 곳을 지칭하는지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이 첫 전투에서 빼앗았다는 지역은 대개 어느 지역일까요? 이도학, 강종원 두 전문가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시죠.

*인서트-5. 테입<113>  이도학

    (27:45 미후성의 위치는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여 개 성, 대략 그 범위라는 것이 신라를 공격하면서 나오고 있는데, 서부 경남 지역이 40여 개 성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백제 군대가 신라 지역으로 진출할 때 어떤 교통로를 따라서 내려갔다고 생각이 될 때, 대구 화원에서 전라북도 쪽으로 빠지는 88고속도로라든지 그 주변 지역을 석권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추측을 해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28:15)

*인서트-6. 테입<114>  강종원

    (25:47 낙동강 서안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일대가 옛 가야 지역입니다. 가야는 성왕 때라든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와 상당히 가까운 그런 나라였죠. 신라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서 백제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했던 그런 국가였는데, 따라서 이 지역에서 백제는 상당히 일찍부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를 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신라에 의해서 신라 진흥왕 때 가야 세려들이 모두 신라에 병합이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백제는 이 지역에 대해서 어떤 연고권이랄까.26:30)

<해설>  이전 왕이었던 무왕이 그랬듯이 의자왕 역시 백제의 동쪽변경, 그러니까 옛 가야세력이 위치했던 신라의 서부지역을 집요하게 공격 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의자왕은, 부모에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로운 해동의 증자로 소문이 자자했던 것으로 보아서, 인자하고 섬약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 아닌가 이런 선입견을 갖기 쉬운데, 즉위하자마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공격에 나서는 것을 보니 놀랍지 않습니까.

*인서트-7. 테입<113>  이도학

   (28:54 해동증자라 할 때 유약한 이미지를 연상하면 안 됩니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외적인 정책, 국가의 존망과 관련된 대외 정책에 대해서 느슨하다든지 실기한다든지 이러면 아주 무능한 사람이죠. 삼국사기에 보면 용감하고 담대하며 결단력 있었다고 하는 의자왕의 품성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정치 지도자로서는 제일 좋은 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 거죠. 부모에게 효성도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도 있고 그리고 결단력 있게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그러니까 의자왕은 사실은 의자왕 당대에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의자왕은 백제 역사상 걸출한 인물로서 추앙 받을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29:39)

<해설>  무능, 방탕, 사치 등으로 일관하다 나라를 망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의자왕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인식에 비춰볼 때 이도학 교수의 인물평은 다소 의외로 들리지 않습니까. 의자왕의 정체(正體)를 탐색하는 작업은 앞으로 계속해 나가기로 하죠.

<음악>  (브릿지)

 

<해설>  의자왕 2년 8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대단히 중요한 일전이 벌어집니다. 바로 대야성 전투가 그것인데요, 이 전쟁의 결과가, 어찌 보면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의자왕  우리는 신라로 향하는 동쪽 변경의 성을 40여 군데나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대로 만족 할 수는 없다. 신라의 서라벌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확보해야만 할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어딘지 아는가?

신하들  “예, 대야성이옵니다” “대야성이옵니다, 대왕마마”

의자왕  그렇다. (지도 두드리며)이 대야성을 쳐서 우리 백제군이 차지할 수 있다면 정차 신라 조정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장수 윤충은 들으라!

윤충    예, 대왕마마.

의자왕  만 명의 군사를 줄 터이니 대야성을 공격하여 반드시 그 땅이 우리 백제의 수중에 들어오게 하라. 지금 출정하라!

윤충    예, 이기고 돌아오겠사옵니다, 대왕마마.

<효과>  (북소리)

        (군사들 행진)

*인서트-8. 테입<114>  강종원

    (27:23 대야성은 신라 왕도로 경주로 진격하는 데 있어서 길목에 해당이 됩니다. 그리고 옛 가야 지역에 해당이 되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일대는 물론 백제가 다시 회복해야 될 그런 영역으로 생각도 했지만, 또 궁극적으로는 신라 경주로 진격하는 데 있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그런 측면에서 볼 때에 대야성 함락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 이 부근은 후백제 견훤이 경주로 침공해 들어가는 데 있어서 대야성에서 두 번에 걸쳐서 국운을 건 그런 전쟁을 벌이고 있기도 합니다.28:10)

<해설>  대야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지역입니다. 백제가 이 곳을 차지할 수 있다면 경주로 진격하는 든든한 통로를 확보한 셈이 되는 셈이죠. 마찬가지로 신라로서도 대야성은 백제로 통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수    (말 타고 달려와서)장군, 우리 백제 군사가 대야성을 포위한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윤충   저들이 지금은 성문을 닫아걸고 겁에 질려 있으나 신라조정에서 구원병을 파견하는 날이면 전세가 달라질 것이다.

장수   성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였습니다. 저들은 우리 백제군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전 준비가 미약하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윤충    신라에서 구원병을 보내기 전에 성을 함락시켜야 할 것이다. 자, 궁사들은 성안으로 불화살을 쏘아라!

<효과>  (화살들 날아가고)

        (건물 불타는)

윤충   군사들은 공성(攻城) 무기를 갖추고 성문을 파괴하라!

<효과>  (군사들 함성 지르며 몰려가고)

         (서문 부수는)

장수    장군! 성루에 백기가 올랐습니다. 저들이 항복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윤충    공격을 멈추라! 저들이 항복하였다! 우리가 승리하였다!

<효과>  (군사들 환성지르는)

        (성문 열리는)

장수    (포로 끌고 다가와서)장군,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처자와 함께 항복을 청하여 끌고 왔습니다. 적장 이찬(伊?)과 죽죽(竹竹) 용석(龍石)도 함께 잡아왔습니다.

윤충    저놈들 모두 목을 베어라! 그 목을 조정으로 보낼 것이니라!

장수    예, 장군. (칼 빼드는)

<해설>  윤충은 대야성 성주 김품석을 비롯한 신라장수들의 목을 베어 백제의 서울로 보냅니다. 그리고,

윤충   사로잡은 신라백성 남녀 만명은 서쪽의 주와 현으로 나누어서 거주 하게 할 것이다. 우리 백제 군사의 일부를 남겨 이 대야성을 지키게 할 것이다. 자, 나머지 병사들은 나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대왕마마께 승전보를 전해 올리자!

<효과>  (군사들, 환성 지르며 달려가는)

<해설>  의자왕은 전공을 세운 장수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어서 포상을 합니다.

한편 신라로서도, 전쟁에서 지고 이기는 것이야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이니, 그저 백제와의 전투에서 한 번 패배했다 생각하고 넘어 갈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642년의 대야성 전투에서의 패배 만은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대야성을 내주게 됨으로써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이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 장수 윤충에 의해 목이 잘려나간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인서트-9. 테입<113>  이도학

   (31:13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대야성을 점령해야만 하는 거예요. 이 대야성은 비중이 높은 전략적 거점이 되기 때문에 이 대야성의 성주는 아무나 했던 것이 아니고, 당시 신라 조정의 실권자인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가 우두머리로 있었고 그의 딸인 고타소랑이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신라가 대야성을 지키는 데 무게를 엄청 실어 줬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대야성이 백제의 윤충 장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던 것이죠. 이것은 신라 조정에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고 말았습니다.31:54)

<해설>  함락당한 대야성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에다, 신라조정의 실력자였던 김춘추의 사위이자 대야성 성주였던 김품석이 그 전투에서 목이 잘렸고, 김춘추의 딸이었던 ‘고타소랑’도 함께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신라 조정을 분노와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것 같습니다.

*인서트-10. 테입<114>  강종원

     (28:39 그 당시 김춘추가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 사위와 딸이 이 전투에서 죽게 되죠. 물론 백제 입장에서는 그들의 죽음이 크게 의미를 갖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 입장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지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의하면 김춘추가 이 소식을 듣고 기둥을 부여잡고서 한나절을 울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도 분간도 할 수 없고. 그러니까 김춘추 입장에 서는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받은 것이죠. 결국 이로 인해서 김춘추가 당시 적국이었던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러 가고. 29:25)

<해설>  그럼 우선 딸과 사위를 대야성 전투에서 잃은 김춘추의 충격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한 대목을 읽어볼까요?

낭독자  백제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성이 함락되었는데 이 싸움에 도독 김품석이 죽고 품석의 아내도 죽음을 당하였다. 품석의 아내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다. 김춘추는 이 비보를 듣고 기둥에 의지하여 선 채로 종일토록 눈도 깜박하지 않고 사람들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해설>  백제에 대한 원한에 사무쳤던 김춘추는 선덕여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김춘추  신의 소원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여  백제의 원수를 갚는 것이옵니다. 고구려에 구원병을 청하려 하오니 허락해 주시옵소서!

<해설>  김춘추는 그 길로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는데,

김춘추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큰 뱀처럼 잔악하고 큰 돼지처럼 욕심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강토를 침략하므로, 우리 신라 임금은 대국의 구원병을 얻어 가지고 그 치욕을 씻으려 합니다.

<해설>  글쎄요, 뱀이 간사한 동물로, 그리고 돼지가 욕심 많은 동물의 상징으로 회자된 역사가 대단히 장구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데요, 그것이야 여담이고, 그렇다면 고구려는 김춘추의 구원 요청에 대해서 뭐라고 응답을 했을까요? 삼국사기에는 감춘추가 고구려의 보장왕을 만나 백제공격에 대한 지원문제를 요청한 것으로 돼 있으나, 당시 고구려의 사정으로 미루어 김춘추의 상대자는 실권자인 연개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개소문  백제를 응징해야겠으니 우리 고구려에 지원군을 내달라, 이런 청을 하러 왔다는 말인가?

김춘추  그렇소이다.

개소문  좋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김춘추  말씀해 보시지요.

개소문  죽령은 본시 우리 고구려의 땅이니 그대들이 만일 죽령 서북지방을 돌려보낸다면 우리 고구려도 가히 군사를 내어 신라를 도울 것이다.

<해설>  말하자면 한강유역의 땅을 고구려에 돌려준다면 도와주겠다는 얘기지요. 결국 김춘추는 영토문제는 자신의 소관사항이 아니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러자 연개소문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개소문  김춘추 저 자를 별관에 가두도록 하라!

*인서트-11. 테입<114> 강종원

    (30:10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 온달이 결국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서 출정을 했다가 결국 거기에서 신라와의 전쟁에서 죽거든요. 그렇게 되면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한강 유역에 대한 회복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김춘추가 갔을 때 연개소문이 한강 유역을 내놔라. 한강 유역을 내 놓으면 도와주겠다. 이렇게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결국은 고구려에서도 김춘추가 범상한 인물이 아닌 것을 알고 결국은 억류를 시키는데. 30:51)

<음악>  (브릿지)

 

<해설>  우여곡절 끝에 김춘추는 고구려를 빠져나오는데, 그렇게 되자 신라는 당나라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게 됩니다. 선덕여왕이 당태종에게 보낸 국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덕왕   (에코)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수십 개의 성이 그들의 침략을 당하였습니다. 두 나라가 군사를 연합하여 기어코 우리 신라를 공취하려 하고, 9월에는 그들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사직을 보전하지 못 할 것 같으므로 삼가 사신을 파견하여 대국의 군사를 청원하오니 구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당태종  나는 실로 그대의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침해되는 것을 슬퍼하며, 번번히 사자를 보내어 그대들 삼국이 서로 화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서면 번복하여 그대의 나라를 삼키려고 하니 그대 나라에서는 어떠한 묘책으로 그들의 침해를 모면하려 하는가?

신사신  우리 신라의 대왕마마께서는 사세가 궁박하고 계책이 다 하였으므로 오직 위급함을 대국에 알려서 구원을 받음으로써 나라를 보전할까 할 따름이옵니다.

당태종  으음, 짐이 변방에 있는 거란과 말갈의 군사를 내어 요동으로 쳐들어가면, 그대 나라의 위급은 스스로 풀어져서 가히 1년쯤은 주위의 환난을 완화할 수 있겠으나…

<해설>  이쯤에서는 이미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 중에서 신라편향으로 기울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인서트-12. 테입<113> 이도학

    (6:48 당나라 입장에서는 백제하고 신라가 힘의 균형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바라고 있었어요. 균형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나 깨나 당태종이라든지 이런 당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고구려의 멸망이었던 겁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 급한 거고, 그런 가운데서 이상하게 역학 관계의 구도가 망가지는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어요. 고구려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싶은데 고구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경계를 했던 거예요. 지금 상태에서 그대로 스톱 하고 있으면 고구려는 신라를 끌어들여서 몰락시켜야 되겠다, 이런 생각에 전략을 세워 두고 있는. 37:30)

<해설>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있어 신라를 원군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당나라의 전략이었다, 그런 얘기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의자왕 3년 12월-.

대신1  대왕마마, 군사를 정비하여 출동준비를 시켰사옵니다. 헌데, 어느 곳으로 출정을 할 것이옵니까?

의자왕  신라가 거듭 당나라 조정에 드나들면서, 당나라가 우리 백제의 군사활동을 간섭하려 드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신라와 당나라의 접촉을 끊어놓아야 할 것이다.

대신2  하오나, 두 나라의 화친을 무슨 수로 막겠사옵니까?

의자왕  신라가 당나라 조정에 입조하는 것 자체를 봉쇄하면 될 것 아니겠느냐?

대신1  예에? 그러면 신라 사신이 당나라에 가는 길을 아예 끊어놓자는 말씀 아니옵니까?

의자왕  그렇다. 그러게 하자면 어느 곳을 침공해야 하겠느냐?

대신2   당연히 당항성을 쳐야 할 것이옵니다.

대신1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하오나 당항성은 북쪽으로 거리도 만만치 않은 데다 바다를 끼고 있어서 공격하기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옵니다. 

의자왕  걱정할 것 없느니라. 고구려와 함께 칠 것이다.

*인서트-13. 테입<114>  강종원

    (3:06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중국과 직접 통교할 수 있는 길을 확보했고 그 요충지가 바로 당항성이 되겠습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당항성을 통해서 당과 직접 교역을 하고 또 고구려 백제의 군사적 압력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가 당과 연계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당항성을 공략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당항성은. 삼국의 역학관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33:55)

<해설>  당항성의 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당시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신라가 당나라와 왕래할 때 주로 이용하던 포구였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단독으로 당항성 침공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합동으로 침공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적대관계로 지내왔던 백제와 고구려가 이 시기에 와서 군사적 연합을 이룰 만큼 밀접한 관계로 돌아선 것일까요?

 

*인서트-14.  테입<114>  강종원

    (34:14 기록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화약을 맺었다든지 하는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까워지게 된 계기를 642년의 정변,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의자왕의 친위정변, 이런 속에서 찾으려는 그런 노력들도 일부 있는데 거기에서 볼 수 있듯이 기록을 통해서는 그게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 고구려가 처한 국제적 상황, 또 백제가 처한 상황, 이런 것들이 결국 고구려와 백제로 하여금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게 한 것이 아닌가.34:56)

  <해설>  자, 그렇다면 의자왕은 신라와 당나라의 교섭통로였던 당항성을 공격했을까요? 삼국사기에는 싱겁게도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의자왕 3년 겨울 11월, 왕이 고구려와 화친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에서 당나라에 입조하는 길을 막고자 하여 드디어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했으나-.

장수    (말 타고 달려와서)대왕마마, 신라 선덕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옵니다.

의자왕  어허, 그렇다면 큰일이 아니더냐. 아니 되겠다. 군사를 철수시키도록 하라!

낭독자  신라 선덕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의자왕은 곧 군사를 철수 시켰다.

<해설>  당항성을 공격하려고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는 말만 듣고 서둘러 군사를 철수시킨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인서트-15. 테입<114>  강종원

   (36:15 신라가 당에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그 전쟁을 그쳤다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들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있는데. 그러다보니까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실제 고구려와 연합해서 신라와 대응을 하지만 실제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도 결코 언제까지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세력은 아닌 거죠. 그렇다면 결국 고구려의 관계, 이것도 그들이 확신하지 못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으로. 36:58)

<해설>  강종원 연구원의 얘기는 비록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 공격에 나섰으나,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데다, 고구려가 언제 돌변하여 백제에 적대적 관계로 돌아설지 몰라서 군사를 물린 것이다, 이런 의견입니다. 

그러나 이도학 교수는 기록에 올라 있는 내용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서트-16. 테입<113>  이도학

    (35:44 의자왕이 볼 때 신라를 압박하게 되면 당나라가 한반도의 정치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준다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점령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당나라 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빌미가 되는 거예요. 구태여 혹을 만들 이유는 없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기 때문에 전략적인 후퇴를 했다, 이렇게 봐야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당나라는 백제하고 큰 원수 관계가 아니에요. 당나라의 타겟은 고구려가 되는 것이지, 백제는 괜히 당나라하고 원수 관계를 져야 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신축성 있게 외교 관계를 처리해 나간 의자왕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36:28)

<음악>  (브릿지)

 

<해설>  신라 선덕왕의 구원요청을 받은 당나라 태종은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국서를 주어서 고구려와 백제를 설득하라고 파견합니다. 당태종이 상리현장에게 보낸 국서의 내용은,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깝습니다.

당태종  (에코)신라는 우리 당나라에게 인질을 보낸 나라이며, 조공을 계속하는 나라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군사를 철수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들을 칠 것이다!

<해설>  자, 그러면 이러한 협박조의 국서를 지참하고 상리현장이 파견됐을때 우선 고구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낭독자  상리현장이 고구려의 국경으로 들어갔을 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점령하였다. 보장왕이 사자를 보내서 소환하자 연개소문이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개소문에게 신라를 침공하지 말 것을 권유하였다.

현장   이것은 우리 당나라 황제폐하의 뜻이다. 신라를 침공하지 말라!

개소문  무슨 소리냐? 우리와 신라는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지 오래 되었다. 지난날 수나라가 침입하였을 때, 신라는 기회를 노려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고, 그 성읍을 모두 점거하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우리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현장   지난 일을 어찌 재론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중국의 군현이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따지지 않고 있는데 어찌 고구려만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개소문  (칼 뽑으며)그런 소리 집어치우고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낭독자  막리지 개소문이 결국 따르지 않으므로 현장은 귀국하여 이러한 실정을 모두 당 태종에게 보고하였다.

<해설>  그렇다면 바로 그 상리현장의 방문을 받은 백제의 의자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당나라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신라를 침공하지 말도록 타이르므로 왕이 글을 올려 이유를 말하고 사죄하였다. 

<해설>  고구려의 연개소문과는 달리 의자왕은 일단 당태종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당나라에게 일단 순응하는 자세를 보이고 나서, 돌아서서는 다시 신라를 치는 백제의 이중적인 외교는, 이전의 임금이었던 무왕 때 부터 백제가 즐겨 사용해오던 전략이었습니다. 백제가 이런 전략을 쓰게 된 것은 비단 외교적 실리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정 내부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강종원 연구원은 분석합니다.

*인서트-17. 테입<114>  강종원

     (38:08 각각의 국가 내부적인 정치 상황도 상당히 민감한 시기였거든요. 의자왕 때는 의자왕, 백제 내부의 정치 세력간의 갈등도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고구려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런 상황에서 당의 어떤 요구나 이런 것들은 하나의 어떤 명분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제에서 현재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 세력, 또 그와 반대되고 있는 정치 세력, 이런 것들이 당의 어떤 말을 빌미 삼아서 이슈화 해서 자신들의 정권 탈환의 빌미로 삼을 소지도 있거든요. 38:55)

<해설>  당시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당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고, 당나라의 요구를 두고 백제 조정 내부에서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서로 갈등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얘깁니다. 따라서 의자왕이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신라를 치지 말라는 당태종의 의견에 순응하는 듯한 자세를 보인 것 역시 조정 내부의 파워게임과 관련해서 분석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서기 644년, 의자왕은 내부 정사를 집행함에 있어서 한 가지 인상 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의자왕  대소신료들은 들으라! 왕자 융을 태자로 삼을 것이니 경들은 장차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짐을 대하듯 하라, 알겠는가?

신하들  “예, 대왕마마!”

<해설>  이 때가 의자왕이 즉위한지 4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의자왕 자신은 아버지 무왕이 즉위하고 나서도 무려 33년이 지나서야 어렵사리 태자로 책봉되었었는데, 거기 비하면 대단히 이른 시기에 왕자 융을 태자로 내세운 셈이죠.

*인서트-18. 테입<114>  강종원

    (40:38 일단은 의자왕의 나이가 많았다 하는 것도 하나의 요인일 겁니다. 사십 세가 넘었으니까요. 그 정도라면 상당히 많은, 당시로서는, 나이가 되겠고. 결국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정치적인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죠. 그런 의미에서 후계 구도를 안정화시키면서 결국은 대내적인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고. 이런 부분들은 대내적인 정치 안정이 이루어져야만 또 대외적인 군사 활동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41:21)

<해설>  의자왕이 재위 4년만에 태자를 세운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무왕이 재위 30년이 지나서야 의자왕자를 태자로 삼은 것이 비정상이었던 것이죠.

<음악>  (브릿지)

 

장수    (말 타고 달려와서)대왕마마! 큰일났사옵니다.

의자왕  무슨 일이냐?

장수    신라장수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일곱 개의 성을 빼앗았사옵니다.

의자왕  신라가 먼저 우리 백제를 공격해서 변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는 말이냐? 흐음, 알겠느니라.

<해설>  백제와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김유신이 등장한 것이 바로 이 때였습니다. 신라본기를 보면 조금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낭독자  선덕왕 13년 9월,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를 정벌하게 하니, 그는 백제로 쳐들어가서 크게 승리하고, 일곱 개의 성을 공취(攻取)하였다.

<해설>   신라본기에는 이 때 신라가 빼앗았다는 일곱 개의 성 중에서 성열성, 동화성, 석토성 등의 이름을 적어놓고 있으나 이들 성들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김유신이 백제를 처음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데 일정부분 의미를 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백제는 어떻게 했을까요?

서기 645년-.

당태종  당나라 군사는 들으라. 우리는 드디어 고구려 원정에 나설 것이니라! 형부상서 장량(張亮)은 군사 4만 명과 전선 5백 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라! 또한 영국공 이적(李勣)은 장군 장사귀와 함께 보병과 기병 6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진격하라! 짐은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출정할 것이니라!

<효과>  (북소리)

<해설>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원정이 닻을 올린 것입니다. 물론 이 정보는 백제에게도 전해졌겠지요.

대신3   대왕마마, 당나라 태종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고 하옵니다.

의자왕  알고 있느니라. 헌데 당태종이 신라군은 징발하지 않는다더냐?

대신3  당태종이 신라에게도 군사 출병을 요구하였고, 신라는 군사 3만을 내어서 출정하였다 하옵니다.

의자왕  잘 되었다. 우리 백제도 군사를 움직일 것이다.

대신3   그러면 고구려를 도와 전쟁에 참여해야 하옵니까?

의자왕  아니다. 신라군이 당나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치는 사이에 우리는 신라를 공격할 것이니라! 출정하라!

<효과>  (군사들 몰려나가는)

낭독자  의자왕 5년 여름 5월, 당나라 태종이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의 군사를 징발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는 김유신을 보내어 침범해왔다.

*인서트-19. 테입<114>   강종원

     (45:56 공교롭게도 그 일 년 전에는 김유신에게 7성을 빼앗겼고, 다시 7성을 일곱개의 성을 되찾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위치는 나오지 않고, 다만 김유신전을 보면 이때 매리포성 등으로 7성 중의 하나가 기록이 되어 있는데, 중복해서 나온다든지 하면 그 지역으로 봐도 되겠는데 공교롭게도 중복되는 성 명칭은 나오지 않고 또 한개의 성밖에는 기록되지 않다 보니까 그 지역인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일 년 뒤에 다시 7성을 빼앗는 것으로 봐서 그 전년도에 빼앗겼던 성을 되찾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이 됩니다.46:43)

<해설>  백제의 신라공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의자왕  장군 의직은 기병 3천을 이끌고 나가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진을 치고 있다가 군사를 나누어서 감물성과 동잠성을 공격하라!

<효과>  (군사들, 달려나가는)

*인서트-20. 테입<113>  이도학

    (49:51 옆구리를 찌르는 거죠. 신라의 군사력이 북방 지역으로 몰려 있는 상황에서 옆구리를 팍 찔러 가지고 허를 찔러 가지고 빼앗는 거죠. 각 성에 분산되어 있는 병력들을 차출해 가지고 출동을 시키는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비죠, 후방이. 그 틈을 백제가 노리는 거죠. 그러니까 동북아시아의 정치 정세는 다섯 개 나라가 서로 맞물리는 상황 입니다. 계속 쳐다보고 있는 거죠. 허점만 보이면 파고들어가는 그런 상황이라고 봐야 되겠습니다.50:26)

<해설>  그러니까, 신라가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에 군사를 내어준 상황이었고 그 틈을 이용하여 백제가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는 형국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의 결과는 결코 백제에게 유리하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신라 장수 김유신 때문이었습니다.

낭독자  의자왕 7년 겨울 10월, 장군 의직이 기병 3천명을 이끌고 나아가 신라의 무산성에 진을 치고 공격하였다. 신라중군 김유신은 몸소 사졸을 격려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백제군을 크게 쳐부수니 의직은 한 필의 말만 타고서 돌아왔다. 

*인서트-21. 테입<114>  강종원

    (47:01 일단 무산성에 진을 치고 두 성을 공격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무산성은 신라의 경계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일단 무산성은 무주의 무풍면으로, 무주 근처로 비정이 되고 있습니다. 감물성은 금능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동잠성은 또 미상이고요, 위치를 정확하게 두 성의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군대가 진을 쳤던 무산성이 무주 일대기 때문에 그 주변에 위치한 성으로. 47:43)

<해설>  성의 위치가 어찌 되었든, 백제장수 의직은 기병을 동원하여 초반에 기세를 올렸으나 나중에 신라 장수 김유신이 나타나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바람에 백제군이 거의 전멸해버렸다고 적혀 있는데, 그 다음 해에 벌어진 전투 역시 마찬가집니다.

낭독자  의자왕 8년 봄 3월, 백제 장수 의직이 신라의 변방인 ‘요거’ 등 10여 성을 습격해서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옥문곡으로 진군하니 신라장군 김유신이 이를 맞아 두 번이나 싸워 백제를 패배시켰다.

<해설>  그 뒤로도 백제군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가 싶다가도 김유신만 나 나타면 막판에 신라에 패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김유신은 백제와의 여러 차례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한 기록이 없습니다.

일찍이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이들 기록을 보고, 신라의 우상이 돼버린 김유신의 능력을 떠받들기 위해서 삼국사기 편찬자가 뭔가 상징조작을 한 게 아닌가, 이런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인서트-22. 테입<113>  이도학

   (42:34 김부식이가 삼국사기 편찬할 때 김유신 같은 사람은 정말 본받아야 될 사람이고 귀감이 될 사람이고 생애를 보면 충과 효와 신으로 뭉쳐져 있는 사람이니까 김유신처 럼 살라고 하는 그런 의도에서 김유신을 크게 부각시킨 측면이 많이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전쟁에서 항시 사람이 이기는 것만은 아니죠. 또 그게 능사는 아닙니다.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에요.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게 더 중요한 거죠. 그런데 김유신 장군의 경우에는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어요. 그 비밀에 대해서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 내용을 감추고 있다, 속이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43:22)

<해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이면 백제군사를 중심에 두고 기술해야 할 텐데 김유신이 등장하는 전투 기록은 신라장수 김유신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느냐를 중심으로 서술돼 있습니다.

삼국의 역사를 망라한 삼국사기 전체 권수가 50권인데 김유신이라는 한 개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무려 3권이나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의 윤색이나 가필은 있었겠으나, 그렇다고 구체적인 전투의 내용까지 뒤바꿔서 기록하기야 했겠느냐, 강종원 연구원의 얘기가 그렇습니다. 김유신이 워낙 출중한 장수였기 때문에 그가 참여한 전투마다 승리로 이끌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겠지요.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후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04편>

     의자왕의 방탕과 성충의 눈물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0.15(일) 00:05-01:00

 

나오는 사람들

 

의자왕     유호한

장수1      차진욱

진덕여왕   강유경

사신       이병용

당고종     이지환

김법민     심승한

장수2      방우호

전령       김석환

왕비       홍선영

성충       박영재

예장수     백승철

대신       정형석

 

*시그널 + 타이틀

의자왕  좌장 은상은 듣거라. 정예병 7천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의 서쪽 변방에 있는 거점들을 쳐부수고 돌아오라!

<효과>  (말타고 달려나가는)

낭독자  의자왕 9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 강한 군대 7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의 석토성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다.

<효과>  (말 한 필 달려와서서 멈추고)

장수1   (내리고)대왕마마, 우리 군대가 신라변방의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사온데 신라에서는 김유신과, 진춘, 천존, 죽지 등의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라고 몰려왔사옵니다.

의자왕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장수1   도살성 밑에 진을 친 적군을 우리 군사가 무찔렀사오나 김유신 등이 흩어진 군사를 규합하여 반격하는 바람에 우리 군사가 두 번 싸워서 모두 패하고 말았사옵니다.

의자왕  이런, 이런! 아니 되겠다. 용맹스런 기병들을 뽑아서 동쪽 전선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효과>  (군사들 정렬하는-말 울음소리 등)

<해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신라와 접하고 있는 동쪽 변경을 침공한 이후에, 끊임없이 신라를 향해 선제공격을 가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백제의 군사들이 선제공격을 가하여 ‘어느 어느 성을 빼앗았다’, 그런 기록 다음에는 ‘신라의 김유신이 출동하는 바람에 백제군사가 패하였다’ 라는 내용이 여러 차례 이어지는데, 그렇다고 백제가 빼앗은 성을 김유신이 매번 다시 빼앗아갔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성(城)은 백제가 빼앗아서 점령하고 있는데 ‘김유신이 출동하여 백제가 패하였다’고 기록돼 있는 부분들은 아무래도 김유신의 용맹성을 강조하기 위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의도가 작용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갖게 합니다. 만일 백제가 제아무리 공격을 해온다 하더라도,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김유신이 출전할 때마다 연전연승을 거두었다면 신라의 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부랴부랴 이런 국서를 보내지는 않았겠지요.

진덕왕  (에코)황제 폐하, 고구려와 백제가 여러 차례 번갈아가면서 저희 신라를 공습하여 수십 개의 성을 잃었사옵니다. 이제 두 나라 군대가 신의 사직(社稷)을 없애려 합니다. 삼가 사신을 보내어 대국에 보고를 드리오니 약간의 군사라도 보내서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인서트-1. 테입<113>  이도학

   (56:55 신라가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상당히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라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한테 가서 하소연하는 거죠. 너무나 힘들다, 괴롭다. 얻어터지는 상황을 말하고 있어요. 당나라에 매달리는 거죠. 우리를 치지 않도록 백제 왕에게 타일러 달라는 절박한 심정을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당나라 황제의 경우는 동아시아 패자로서 군림하는 것처럼 행세를 하면서 타이르는 것처럼 백제 왕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거죠. 마치 애들 싸움하는 것을 어른이 중재하는 것처럼 황제로서의 위세랄까를 과시하고. 56:42)

<해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백제에게 회유 반 협박 반으로 신라침공을 그만둘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백제는 그 때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서 다시 신라를 공격합니다.  백제의 신라공격을 당나라에서 자꾸 간섭을 하자,  한 동안 백제는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중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당서 동이열전 백제전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정관(貞觀) 22년 백제는 당나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또 신라의 성(城) 10여 군데를 빼앗고 수년 동안 마침내 조공이 끊기고 말았다.  <음악> (브릿지)

 

사신    황제폐하, 백제국 대왕마마의 명을 받고 찾아온 사신이옵니다.

당고종  어흠, 그간 백제로부터 소식이 없어 궁금하던 차에 잘 찾아왔구나.

사신    백제국 대왕마마의 국서를 가지고 왔사옵니다.

당고종  알겠느니라. 객관에 가서 편히 쉬도록 하라.

<해설>  의자왕이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때는 정관, 즉 당태종 이세민이 죽고 당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서기 651년이었습니다. 이 때는 이미 신라에서 김춘추의 아들이자 훗날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이 당나라에 찾아가 백제의 당나라 침공을 막아달라고 지원요청을 하고 간 뒤였습니다. 당 고종은 돌아가는 백제 사신 편에 의자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전했는데, 이 국서의 내용을 잘 음미해보면 머지않아 벌어지게 될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당서 동이열전과 삼국사기 벡제본기에 함께 실려 있는 그 국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당고종  (에코)해동의 세 나라가 개국한지 오래 되어서  모두 국경을 설치하니, 땅이 실로 개의 어금니처럼 들쑥날쑥 맞닿아 있는 형국이오. 그런데 근년 이후로 마침내 틈이 생겨서 전쟁을 번갈아 일으키는 바람에 조금도 평안한 세월이 없게 되었소.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천자로서 이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소.

<해설>  당나라의 황제는 천자로서, 하늘을 대신해서 주변국들을 다스려야 할 의무가 있는데 너희들 싸우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다, 이른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중심사상에 취해 있는 모습을 여기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서트-2. 테입<114>   강종원

     (55:09 하늘의 권위를 자기가 받아 가지고서 천하를 통치하는데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든지 하게 되면 무력으로 응징을 하게 되는 그런 질서가 있었던 것이죠. 그것은 중국 당나라의 어떤 통치 이념과 연계시켜서 이해할 수도 있고. 또 역시 그런 측면에서 주변 국가들을 평화롭게 통치해야 되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런 처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응징을 하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가 있죠.55:48)

<해설>  충남역사문화원 강종원 연구원의 설명이었습니다. 당 고종이 의자 왕에게 보낸 국서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당고종  (에코)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모두 와서 조회(朝會)하였기에 짐은 이제 원수를 풀고 다시 화목할 것을 명령하였소. 이 때에 신라 사신 김법민이 짐에게 말하였소.

김법민  (에코)황제폐하, 고구려와 백제는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신라를 침범하였사옵니다. 이제 큰 성(城)과 큰 진(鎭)이 모두 백제에 병합되어 강토는 날로 줄어들었사옵니다. 백제에게 명령하시어 침략한 성을 돌려주도록 하시되, 만일 당나라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지 않거든 즉시 군사를 일으켜 빼앗아 주시옵소서. 다만 신라는 옛 땅만 찾으면 즉시 화친하겠사옵니다.

당고종  (에코)짐은 신라 김법민의 그 말이 도리에 맞는 말이기에 그러하겠노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니 백제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주어야 할 것이며, 또한 신라에서 잡아간 백제의 포로들 또한 왕에게 돌려주라 할 것이오. 만일에 왕이 이 처분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김법민의 청한 바에 따라 그들이 백제왕과 결전을 하도록 할 것이오. 또한 고구려에게도 명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오. 고구려가 만일 이를 어기고 백제를 구원하려 하면 즉시 거란과 여러 번국(蕃國)들에게 명하여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략하도록 할 것이니,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복을 구하고 좋은 계책을 도모하여 후회를 끼치지 말도록 하시오!

<해설>  당나라의 당면목표는 동북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를 침공하여 굴복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고구려의 배후에 있는 백제와 신라가 당나라의 편이 되어주거나 적어도 고구려와 연합하는 것을 막아야 하겠지요. 특히 백제가 신라를 자주 공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의 협력을 얻어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백제에 대해서 이런 경고성 메시지를 계속 전하게 됐다는 분석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서기 654년, 신라에서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김춘추가 즉위 하여 태종무열왕이 됩니다. 그런데 김춘추는 서기 642년에 백제군이 지금의 합천지역에 해당하는 대야성을 공격했을 때, 그 전투에서 딸과 사위를 잃었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적개심이 누구보다 사무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김춘추가 왕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공교로운 것은, 바로 이 시기를 전환점으로 해서 의자왕의 통치행태가 크게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인서트-3. 테입<115>  강종원

    (04:42 의자왕 15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이 되는데. 전기는 전제군주로서의 아주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던 그런 시기로 이해가 되고 15년 이후는 전제 군주로서 독단에 빠져서 전횡을 한다든지 또 이런 음란과 향락에 빠진 측면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거든요. 기록에서도 그렇고 또 뭐 백제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그 멸망 원인을 의자왕 말기의 이와 같은 방탕한 생활에서 그 요인을 찾기도 합니다.05:26)

<해설>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20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재위 15년째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탁월한 통치를 보여 왔던 반면에, 그 이후부터는 정사를 팽개치고 방탕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때부터는 삼국사기도 의자왕을 부정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합니다

의자왕  태자가 거처할 공간이 이토록 누추하고 협소해서야 어디 태자의 권위가 서겠느냐! 태자궁을 더 넓고 화려하게 수축하도록 하라!

낭독자  의자왕 15년 봄 2월,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 하였다.

<해설>  그런데, 사치를 하려면 임금 자신이 거처할 왕궁을 화려하게 꾸며야 할 것인데, 그게 아니고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축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낭독자  의자왕 4년, 왕이 아들 융(隆)을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해설>  의자왕이 재위 4년째에 아들 융을 태자로 책봉했으니 재위15년째에 이르면 태자의 나이가 어림잡아 서른쯤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해설>  그러니까 이 때쯤 되면 태자가 나름대로 상당한 권력을 형성하여 왕실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의 한 축이 되지 않았을까, 강종원 연구원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의자왕이 재위 4년째에 태자로 책봉했던 인물은 ‘융’이라는 왕자였는데, 백제가 멸망할 때의 태자는 ‘효(孝)’라는 왕자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태자가 바뀌었다는 얘기가 되지요. 차기에 왕권을 이어받을 사람이 태자인데, 그 태자가 도중에 바뀐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정변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도학 교수는 바로 이 지점, 즉 의자왕 재위 15년에 백제의 조정을 뒤흔드는 한바탕 정변이 발생했을 것 이라고 얘기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일본서기 황극(皇極) 원년, 서기로는 642년 2월의 기록을 다시 한번 소개하도록 하죠.

낭독자  백제의 조문사가 일본에 당도하였는데, 그 해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과 누이동생 4명, 내좌평,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다고 말했다.

<해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사기 642년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돼 있으나 사실은 서기 655년의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소개한 바 있지요?  바로 그 655년이 의자왕이 태자궁을 호화롭게 수축하도록 명령한 의자왕 15년에 해당합니다. 상황을 꾸며보자면 이렇습니다.

대신들  (곡하며)“태후마마…”

낭독자  의자왕 15년, 선왕인 무왕의 왕비이자 그 동안 실권을 휘둘러왔던 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의자왕에게는 계모였다. 의자왕은 태후의 사망 이후 실권을 회복하고 한바탕 숙청을 벌였다.

의자왕  그 동안 태후의 측근세력으로 나라의 권력을 농단한 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태후의 아들 교기를 잡아들이고, 그 누이동생 네명도 함께 잡아들이라!

병사들  “예, 대왕마마”

<효과>  (무장한 군사들 달려 나간다)

의자왕  그 동안 호가호위 해온 태후의 친정세력도 이 기회에 조정에 발붙이지 못 하게 할 것이다. 내좌평 기미를 잡아들이라!

<효과>  (군사들 달려나간다)

낭독자  의자왕은 이들을 죽이거나 그들 중 40여 명을 대거 섬으로 귀양 보내는 등 한바탕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정변의 결과로 왕실의 권력구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태자의 교체가 그 증거다.

 

*인서트-4. 테입<113.  이도학

   (58:06 이러한 정변을 의자왕이 혼자 단행한 것이 아니고 의자왕을 후원하고 밀어 줬던 세력이 있었습니다. 백제를 망치게 한 장본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은고라고 하는 여인으로 대표되는 세력이 되겠습니다. 이 세력이 의자왕을 도와서 의자왕이 친위 독재 권력을 구축할 수 있는 그런 체제를 구축해 줬어요. 그런 가운데서 부여융에서 은고의 아들인 부여효로 태자가 바뀌게 됩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처음에는 부여융이 태자로 돼 있었는데 백제가 멸망할 때 보면 부여효라는 사람이 태자로 나와요. 이것은 바로 15년에 정변을 거치면서 태자 자리도 당연히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58:53)

<해설>  의자왕의 왕비 중에 은고(恩古)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요인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바로 이 은고라는 왕비의 전횡 또한 그 중 하나였습니다. 

낭독자  혹은 말하기를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군대부인(君大夫人) 요녀(妖女)가 무도하여 국병(國柄)을 제 마음대로 빼앗아 현량(賢良)을 주살한 까닭에 이 화(禍)를 부른 것이다.

<해설>  군대부인, 즉 요사스러운 왕비가 나라의 권력을 거머쥐고 충신을 죽인 것이 망국의 한을 불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입니다.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명문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됩니다.

낭독자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를 믿으니, 형벌이 미치는 것은 오직 충량(忠良)에 있으며, 총애와 신임이 더해지는 쪽은 반드시 아첨꾼들이었다.

<해설>  여기서 요부 혹은 요녀로 기록된 장본인이 바로 은고라는 이름을 가진 왕비였을 것이다, 대체로 이렇게 추정합니다. 의자왕 15년에  한바탕 숙청작업을 할 때, 바로 이 은고라는 왕비의 세력이 의자왕을 적극 후원하였을 것이고, 정변이 끝나 다음, 의자왕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의자왕  짐은 융(隆)을 태자에서 폐할 것이다! 대신에 왕자 효(孝)를 태자로 삼을 것이니 대소 신료들은 새로이 책봉된 태자에게 충성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태자궁은 너무 누추하고 협소하니 보도 넓고 화려하게 태자궁을 수축하도록 하라!

<해설>  그 동안 태자자리에 있던 융은 다시 평범한 왕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은고라는 왕비의 아들 효가 태자에 책봉된 것입니다. 태자궁을 수리했다는 기록에 뒤이어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망해정(望海亭)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정자, 죽 바닷가에 세워진 정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부여, 즉 당시 사비 왕궁의 남쪽 어디에 바다가 있어서 그 곳에 정자를 세웠다는 얘길까요? 이도학 교수는 망해정이 실제 바닷가에 세워진 게 아니라 아마도 궁남지 쪽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인서트-5. 테입<113>  이도학

   (59:47 무왕 때 만든 궁남지, 궁궐 남쪽에 큰 못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배를 띄우고 무왕이 왕비하고 비빈들과 더불어서 술 마시고 논 적이 있었어요. 이 바다라고 하는 것은 궁남지를 가리킨다고 봐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섬이 있고, 인공 섬을 만들고 기와패초라든지 그리고 신선들이 노닌다는 방장선산을 모방해서 꾸며 놨다고 돼 있어요. 망해정은 궁남지 섬 안에 있던 정자가 아니겠는가. 경주도 가면 안압지 있지 않습니까. 태자가 거처했던 동궁이 있던 곳인데 임해전이라 했어요, 임해전. 바다에 임해 있는 궁전이다. 1:00:31)

<해설>  신라 사람들이 안압지라는 못가에 동궁을 세워 넣고 임해전이라고 했듯이 백제에서도 궁남지 저수지 쪽에다 정자를 지어놓고 그 곳이 마치 바다인 것처럼 기분을 내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것이란 얘깁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의자왕 재위15년의 기록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낭독자  여름 5월에 붉은 말 한 마리가 북악의 오함사(烏含寺)로 들어가 울면서 돌아다니다 며칠 후에 죽었다.

<해설>  붉은 말이 절에 들어가서 며칠 동안 울며 돌아다니다 죽었다는 얘긴데 뭘 나타내려고 이런 구절을 이 대목에 배치했는지 삼국사기 편찬자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의자왕이 재위 15년째 부터 향락과 방탕을 일삼은 것으로 돼 있으나 그렇다고 국사를 아주 돌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요. 의자왕 15년 7월에는, 지금 그 위치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마천성을 수리하도록 명을 내렸고,

의자왕  신라를 칠 것이라 하였는데 출전채비를 갖추었느냐?

장수2   예, 대왕마마, 기병과 보병 중 용맹이 뛰어난 군사들을 선발하여 출정에 대비하고 있사옵니다. 대왕마마께서 명령만 내리시옵소서.

의자왕  기다리도록 하라. 우군에게 파발을 보냈으니 연락이 닿는 대로 방향을 정해서 공격에 나설 것이다.

장수2   대왕마마, 우군과 함께 신라를 공격한다 하시면 어느 나라 군대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의자왕  고구려군과 말갈군과 더불어서 신라를 칠 것이다!

<효과>  (말 한 필 달려와 멈추고)

전령    대왕마마, 고구려군이 말갈군과 함께 남하하여 신라 국경에 이르렀다 하옵니다.

의자왕  어허, 그래? 좋다, 우리도 공격에 나설 것이다. 출정하라!

<효과>  (북 소리)

        (병사들 행진하는)

<해설>  여기 나오는 말갈군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던 한반도 동북 지방의 예족(穢族)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그 동안에는 주로 신라가 당나라에 보낸 국서를 통해서 ‘백제가 고구려와 내통했다’  거나,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서 신라를 침공했다’는 내용이 전부 였는데, 삼국사기와 구당서에 백제, 고구려 말갈이 합동작전을 벌인 것으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때에 이르러 드디어 백제가 고구려와의 구원(舊怨), 즉 오랜 원수관계를 청산하고 실질적으로 군사연합을 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 때의 합동작전으로 신라는 30여 개나 되는 성을 다시 빼앗겼고, 그러자 무열왕 김춘추는 부랴부랴 당나라에 사신을 보냅니다. 구당서 백제전의 관련 기록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신라왕 김춘추가 또 표문을 올려서, 백제가 고구려 및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공하여 벌써 30여 개의 성이나 함락되었다고 말했다.

<해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 때 빼앗긴 성이 정확히 33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두 달 뒤인 3월, 당나라 고종은 드디어 고구려 정벌을 명합니다. 

당고종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라!

<효과>  (군사들, 몰려나가는)

<해설>  그러나 구당서에 의하면 이들이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간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 때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대군을 동원한 전면전이라기보다는 고종이 당나라 황제로 즉위하고나서 고구려의 전력을 탐색하는 차원에서 출정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소정방 등이 이끄는 군대는 고구려에 패하고 돌아갑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의자왕 16년, 서기로는 656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왕이 궁인 들과 더불어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탁월한 정치 군사적 통치력을 과시하던 의자왕이 왜 이 시기에 와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됐을까요?

*인서트-6. 테입<115>   강종원

    (05:38  너무 자만심에 빠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되고. 또 그와 함께, 잘 알려져 있습니다마는 왕비의 전횡. 그러니까 결국은 의자왕 말기에 오면서 내부적으로는 정치세력들 간의 갈등. 특히 앞에서 태자궁을 15년에 화려하게 수축했다, 이런 내용들이 있는데 결국은 태자의 존재가 상당히 부각되는 그런 측면들을 또 우리가 살펴 볼 수 있고 그를 둘러싼 정치세력 간의 갈등, 이 속에서 현실 정치에 회의를 의자왕이 가진 게 아닌가. 06:19)

<해설>  이 때쯤이면 나이도 예순을 넘어 지치기도 한데다, 태자를 비롯하여 왕비를 둘러싼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껴서 향락에 빠진 것이 아니겠느냐, 충남역사문화원 강종원 연구원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는, 의자왕의 변화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7. 테입<113>  이도학

   (1:02:44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자왕은 의자왕 15년 될 때까지 계모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긴장된 생활을 해 왔습니다. 해동증자라는 명성, 명성은 좋습니다마는 초인적인 자기 절제, 그리고 부모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 드리고 하루 세 번씩 자신을 성찰 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이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가 되고 그러니까 남들이 못하는 행위니까 존경을 받게 되는 거죠. 이것도 하루 이틀이죠. 의자왕 15년 이후의 의자왕은 환갑을 넘겼습니다. 지쳐 있었던 겁니다. 초인적인 극기 생활을 해 왔던 사람이죠. 그런 가운데서 정변을 통해서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어요.1:03:31)

<해설>  한바탕의 숙청으로 이미 이 때에는 의자왕을 넘보거나 견제할 만한 어떠한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해동의 증자’라는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자시절부터 인내와 금욕생활을 해 왔었는데, 막상 절대왕권을 손에 쥐고 보니 이제 좀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구가 셍겨났고, 바로 그 틈새를 은고라는 여인이 파고듭니다.

왕비    대왕마마, 궁남지의 망해정에 연회를 준비하라 일러두었사옵니다.

의자왕  음, 챙겨야 할 국사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날마다 음주가무를 즐겨서야 백성들이 짐을 보고 무어라 하겠소?

왕비   대왕마마, 이 나라의 주인은 대왕마마이시옵니다. 왕자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시라도 나라 일을 손에서 놓아보신 적이 있으시옵니까. 이제부터는 소첩이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서 처리할 것이오니 대왕마마께서는 근심을 놓아두시고 신하들과 함께 마음껏 즐기시옵소서.

의자왕  그리하여도 되겠소?

왕비   소첩과 태자를 도와주는 충신들이 많이 있사오니 대왕마마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옵소서. 여봐라, 대왕마마를 망해정 연회장으로 모시도록 하라! 

*인서트-8. 테입<113>  이도학

   (1:04:23 인간으로서는 사실은 그런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지쳐 있단 말입니다. 이 사람은 성자이기 전에 성인과 같은 행동을 하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거죠. 또 나이가 들고 하면 옛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과거에 살아 왔을 때 내가 바보처럼 살아 온 게 아니 겠는가. 성취감을 맛보는 상황에서 이제는 조금 인간답게 사십시오, 편하게 사십시오, 이런 이야기들도 주변에서 할 수가 있고, 그런 가운데서 인간 선언을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제는 통제를 할 수가 없게 됐고 왕권이 절대적인 기반 위에 딱 들어섰기 때문에 이제는 눈치 볼 세력도 없어졌습니다. 이게 바로 의자왕이 술 마시고 荒淫無道했다는.1:05:08)

<해설>  정치적 반대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나자 이제는 감히 왕에게 직언을 간할 사람이 없었고, 그럴수록 왕은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눈과 귀가 멀어졌겠지요. 그러나 어느 시기에나 충신은 있는 법, 주색에 빠져 지내는 의자왕에게 직언을 고하는 신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좌평 성충이었습니다.

<음악>  (거문고 등-연회장)BG

의자왕  (약간 취한)좋은 시절이 아니더냐, 허허허…(술 들이켜고) 자, 술을 들라! 무엇들 하느냐. 마시라 하지 않느냐?

대신들  “예, 대왕마마”

의자왕  허허허허, 해가 지고 날이 저무는 것이 대수겠느냐. 달이 뜨면 달을 벗 삼아 마시고 놀면 될 것이니라. 달이 없으면 술잔에 별을 담아서 마시면 될 것이고…아니 그러하냐? 

대신들  “그러하옵니다,  대왕마마.”

의자왕  자, 풍악을 더 크게 울리라! (위 음악 UP). 허허허, 짐은 무희들과 더불어 춤을 출 것이니라. 경들도 모두 일어서서 춤을 추라! 뭣들 하고 있느냐. 춤을 추라고 하지 않느냐, 허허허…

성충   (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대왕마마! 신 성충이 아뢰옵니다!

의자왕  오, 그대는 좌평 성충이 아니던가? 허허허허…어찌하여 그 아래에 꿇어앉아 있느냐? 올라와서 술 마시고 짐과 더불어 춤을 추지 않고.성충    대왕마마, 지금 나라가 백척간두에 있사온데 어찌하여 대왕마마께서는 정사를 마다하시고 날마다 여흥을 즐기시기에 시간을 탕진하시옵니까!

의자왕  좌평 성충은 지금 뭐라 하였느냐? 세월이 이처럼 태평성대인데 너는 어찌하여 나라 운명이 백척간두라 하는 것이냐?

성충   조만간 신라가 당나라의 군사를 얻어 우리 백제를 침공해올 것이옵니다. 만백성이 대왕마마만을 바라보고 있사옵니다. 국란이 닥칠 위기에 처해 있사온데 어찌하여 대왕마마께옵서는 간신들에 둘러싸여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시옵니까!

의자왕  어허! 이런 고얀 놈을 봤나. 성충 저 자의 관작을 삭탈할 것이니라. 저놈을 당장 옥에 가두라! 뭣들하고 있느냐!

<효과>  (병사들 달려나가 끌고간다)

성충    (끌려가며)대왕마마! 간신들을 물리시고 국란에 대비하시옵소서!

<해설>  삼국사기에는 성충이 좌평 벼슬을 지냈고 주색에 빠진 의자왕에게 직언을 했다가 옥에 갇혀서 결국 옥사한 것으로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에는 성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신채호가 ‘해상잡록’이라는 책에서 성충에 대한 기록을 따서 조성상고사에 실었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으나 해상잡록이라는 책 자체가 전하 지 않으니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을 신채호가 꾸며서 쓴 것은 아니겠지요. 조선 상고사에 실린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음악>  (브릿지)짧게

낭독자  성충은 어릴 때부터 지모가 뛰어나서 일찍이 동예의 군사가 침략해 오자 고향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가 산중턱에 웅거하고 지켰는데, 늘 기묘한 계교로써 많은 적을 죽였다. 한번은 동예의 장수가 사신에게 궤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장수  그대들의 나라를 위하는 충절을 깊이 흠모하여 약간의 음식을 보내 드리니 맛있게 잡수도록 하시오.

낭독자  사람들이 궤를 열어보려 하였으나 성충이 이를 굳이 못하게 말리고서 불 속에다 넣었다. 그 속에 든 것은 벌과 독충들이었다. 이튿날 동예의 장수가 또 하나의 궤를 보냈는데 모두 그것 역시 불에 넣으려 했으나 성충이 열어보게 하였더니 그 속에서 화약과 염초 따위가 나왔다. 사흘째 되는 날 적은 또 하나의 궤를 보내왔는데 성충은 그것을 톱으로 켜게 하였다. 그러자 피가 흘렀다. 칼을 품은 병사 하나가 허리가 끊어져서 죽었다.

<해설> 의자왕도 성충의 어린 시절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던 터라 왕위에 오르자 그를 불러서 신라와의 전쟁에 대한 조언을 구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의자왕  신라가 우리 백제를 침범해온다면 어느 쪽으로 올 것 같은가?

성충    선왕이신 무왕께서 가잠성 동쪽 지역을 차지하시니, 신라가 그것을 원통해한 지가 오래되었사옵니다. 때문에 반드시 신라는 가잠성을 공격해올 것이옵니다.

의자왕  그렇다면 가잠성의 수비를 증강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성충   대왕마마, 가잠성의 성주 계백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장수로서 비록 신라가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포위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깨뜨리지 못 할 것이오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또한 급히 나서서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 병가의 상책이니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공격해오거든 우리는 가잠성을 구원한다 일컫고 군사를 내어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의자왕  오호, 그래? 그렇다면 겉으로는 가잠성을 구원한다고 선포하고 실제로는 어디를 공격하는 것이 좋겠는가?

성충   신이 들으니 신라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을 아내로 맞아 그 권세를 믿고 군사와 백성을 학대하고 음탕과 사치를 일삼아서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한지 이미 오래라고 하옵니다. 우리 군사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공격하면 온 신라가 크게 소란해질 것이니, 이 때 군사를 동원하면 신라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의자왕  허허허, 그대와 같은 지략가는 고금에도 드물 것이다, 허허허…

낭독자  이리하여 의자왕은 성충을 상좌평에 임명하고 성충의 동생 윤충에게 군사를 주어 대야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윤충은 김품석에게 아내를 뺏긴 신라비장 금일을 이용하여 대야성 내부를 교란시켜 무너뜨리고 그 주변의 40여 성을 함께 얻었다.

<해설>  조선 상고사에는 성충이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성충이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달래 동맹 조약이 거의 맺어지게 되었는데, 연개소문이 갑자기 성충을 멀리하여 여러 날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성충이 의심이 나서 탐지해보니, 신라 사신 김춘추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막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성충은 곧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성충   (에코)만일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우지 않을 것이라면 모르지만 당과 싸우고자 한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오. 왜냐하면 당이 고구려를 칠 때 번번이 양식 운반의 불편으로 패하지 않았소? 만일에 우리 백제가 당과 연합한다면, 당나라는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노할 뿐 아니라 배로 군사를 운반하여 백제로 들어와서 우리 백제의 쌀을 먹어가며 남쪽에서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고구려는 남과 북 양면으로 협공을 당할 터인데  그 위험이 어떠하겠소?

<해설>  결국 연개소문은 성충의 논리에 설득되어서 신라사신 김춘추를 감금시키고 백제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런 내용입니다. 신채호가 어떤 사료를 근거로 해서 성충에 관련된 내용을 조선상고사에 수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성충은 언변과 논리가 뛰어나고 정세를 파악하는 데에 탁월한 안목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 같습니다.

<음악>  (브릿지)짧게

 

<해설>  성충이 의자왕에게 바른 소리를 했다가 옥에 갇혀버리자 이제 더 이상 임금에게 충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충은 음식을 못먹어서 몸이 야위어 옥중에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이런 글을 올립니다.

성충    (에코) (기진맥진)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아니하오니 한 말씀 드리고 죽을까 하옵니다. 소인이 늘 시세의 변화를 살펴왔는데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옵니다. 대개 군사를 부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지형지세를 잘 가려야 되는 것이니, 상류에 머물러서 적병을 대적하면 능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에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병을 막아야만 할 것이옵니다.

<해설>  성충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서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해상공격과 육상공격의 경우 방어 해야 할 요충지를 정확하게 짚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해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이 숨을 거두면서 했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당나라의 침공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당과 신라가 연합해서 쳐들어오더라도 능히 무찌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요?

*인서트-9. 테입<113>  이도학

   (1:07:24 의자왕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 나라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는 SOS, 비상 나팔, 이런 것이 성충의 입을 통해서 들려오고 있어요. 위험하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자꾸 경보가 울리고 있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이 그걸 무시하게 된 것은 백제의 국력이 굉장히 강성한 것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령 백제가 멸망 할 때의 인구가 고구려 인구보다 더 많아요. 인구는 국력의 바로미터가 되지 않습니까.1:08:03)

<해설>  거기다가 아마도 당나라 군사라 감히 백제까지 쳐들어오겠느냐, 이렇게 방심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대신    대왕마마, 당나라 군사가 침략해올 경우를 대비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의자왕  그런 소리 말라. 수양제와 당태종이 백만이 넘는 군사를 동원하고도 고구려한테 패한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대신    하지만 그것은 육상을 통한 공격이었사옵니다. 당나라가 우리 백제를 침공한다면 필시 수군을 동원해서 쳐들어올 것이온데…

의자왕  육상으로 침공했는데도 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감히 이 먼 곳까지 배를 타고 쳐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냐? 설령 먼 길을 항해하여 우리나라 바닷가에 당도한들 우리 수비군이 능히 무찔러 전멸 시키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당나라에 결코 원수진 일이 없거늘 저들이 무슨 사무친 원한이 있어 이 먼 곳까지 침략해온단 말이더냐? 그러니 걱정 말라.

*인서트-10. 테입<113>  이도학

   (1:08:05 당나라, 고종 이전의 당 태종, 고구려하고 싸워서 졌어요. 그 전의 수나라 양제, 고구려하고 싸워서 졌어요. 육지로 서로 연결된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하고 서로 육지로 연결됐지만 이기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나라가 백제를 치려면 서해라고 하는 큰 바다를 건너와야 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선단이 필요하고 이건 또 태평양처럼 여길 수 있는 서해를 가로질러서 오게 된다면 일단 병력이 지치죠. 뭍에 상륙하게 되면요. 그리고 또 특별히 의자왕이 당나라에게 잘못한 게 없어요.1:08:45)

<해설>  거기다가 당시 신라는 백제에게 계속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자왕은 신라의 공격을 위협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의자왕 17년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내용 한 줄이 올라 있습니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의자왕 17년 봄 정월, 왕은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 게 각각 식읍을 내려 주었다.

<해설>  당시 임금의 부인, 즉 왕비가 여러 명이었으니 서자가 41명이나 되었다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 모두에게 일시에 좌평벼슬을 주었다는 내용이지요. 본래 좌평은 정해진 인원이 있었습니다.

*인서트-11. 테잎16<115>  강종원

   (13:29 원래 좌평은 육좌평을 설치한 데서 비롯이 됩니다. 관직에서 비롯이 돼서 관등으로 변화를 한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어쨌든 좌평은 6명 내지는 5명, 또 대좌평이 있고 나머지는 5명. 그래서 정원이 있었습니다. 또 달솔은 예를 들어서 30명으로 정원이 있었고요. 그렇다면 좌평도 정원이 있었을 텐데 의자왕이 17년에 41명을 좌평에 임명을 하고 또 식읍을 내려 주거든요.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했을 경우는 의자왕이 전횡을 행사를 했다. 14:10)

<해설>  그 다음, 여기 나오는 ‘서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왕비의 경우도 중전과 후궁으로 구분해서 차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라서, 제1부인과 제2 혹은 제3부인에 대한 신분차별이 별로 없었으며, 거기서 태어난 왕자들도 조선시대처럼 적자와 서자를 두어 차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이 좌평으로 임명했다는 41명을 일컬어 왜 서자라고 했을까요? 이에 대한 강종원, 이도학 두 전문가의 견해를 차례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서트-12. 테입<115>  강종원

   (14:43 서얼로서의 서자라는 의미와 또 여러 명이라는 의미의 서 자로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이때 서자가 모두 왕자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요. 대개 왕자를 포함해서 왕족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제 많다는, 많은, 다수의 인원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고. 어쨌든 41명을 좌평에 임명했다는 것 자체는 의자왕이 어떤 귀족 세력들의 어떤 반대나 이런 것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뿌리치고 이렇게 했다는 것은.  독재 군주의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15:27)

*인서트-13. 테입<113>  이도학

   (1:10:56 본 왕비에서 낳은 자식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닌, 본래의 왕비한테서 나지 않은 소생들이 잔뜩 들어 있다고 봐야 돼요. 마흔 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정비가 다 낳았다고 볼 수는 없는 거니까요. 이건 아마 서자할 때 庶 자, 무리 庶 자, 무리 衆 자 해서 많은 아들, 여러 아들,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어떤 해석을 하든 간에 마흔 한 명이나 되는 많은 아들들이 좌평이 되었다. 이게 가능했다는 거죠, 명예직이라 하더라도요. 이건 의자왕이 절대 권력을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이런 생각을 이런 발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자체가. 1:10:38)

<해설> 아마 이 프로그램을 들으시는 청취자 여러분 중에서도 ‘의자왕의 서자 41명’이라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삼천궁녀’를 연상한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자왕이 거느린 궁녀가 무릇 3천 명이나 되었다는데 거기서 태어난 자녀의 수는 또 얼마나 많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요, 그러나 백제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한결같이 삼천궁녀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야말로 의자왕에 대해서 가장 잘못 알려진 부분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인서트-14. 테입<113>  이도학

   (1:11:22 의자왕이 술 마신 기록이 단 한 번 나와요. 무왕의 경우는 한 두어 차례 술 마신 기록이 나옵니다. 무왕이 술 마시면 괜찮고 의자왕이 술 마시면 나라의 멸망하고 관련된다. 바로 의자왕이 백제가 망할 때 왕이 되다 보니까 술, 술이 문제로다 하는 술 이야기, 그 다음에 여자 이야기가 들어가는 거죠. 여자도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있어  가지고 무질서하게 살았던 사람, 그러니까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이미지랄까 이런 것이 가세한 것으로 볼 수 있고요. 또 하나는 삼천궁녀 이야기는 15세기 때 詩 에서 처음 등장해요. 1:12:06)

<해설>  백제가 멸망할 때 과연 궁녀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 장소가 낙화암 이었는지, 그리고 3천궁녀란 말은 언제 어떻게 생겨나서 전해지게 되었는지,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상세히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의자왕 19년은 서기로 659년으로서, 백제가 멸망하기 일년 전에 해당하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 해 벽두부터 심상치 않은 일들이 줄줄이 일어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음악>  (음산, 괴기스러운) UP & BG…

낭독자  -봄 2월에 많은 여우들이 궁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는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여름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했다.

        -5월에 사비도성의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나 되었다.

        -가을 8월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열여덟 자나 되었다.

        -9월에 궁중의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고,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해설>  백제 멸망의 전조(前兆)에 해당하는 이런 괴이한 일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났을 리는 없겠지요. 우선, 앞에서 소개한 내용들 중에서 여우, 암탉, 그리고 키가 열여덟 자나 되었다는 여자시체 등 여성을 상징하는 것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습니다만 백제를 멸망으로 몰아간 장본인 중의 한 명으로 문헌기록에 ‘대부인’으로 표현되고 있는 은고라는 왕비를 지칭하는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런 내용과 관련이 있는 듯 보입니다.

*인서트-15. 테입<115>  강종원

   (23:21 대부인은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팔찌의 명문을 통해서 봤을 때 왕비를 얘기하거든요. 그렇다고 본다면 왕비 은고로 표현되어 있는 왕비가 상당히 전권을 행사한, 그러면서 충신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서 아첨하는 무리들을 측근에 두었다. 이런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런 정치적 실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이런 내용들을 서술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전권을 행사하는 왕비의 행태, 이런 것들이 일반 백성들에게도.24:08)

<해설>  왕비가 실권을 잡고서 충신들을 주살하고 아첨하는 무리들만을 측근에 두어서 조정이 혼란스러웠던 것이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다면 백성들 사이에서 그 왕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떠돌았을 것이고, 그것이 여우니 암탉이니 여자시체 따위에 얽힌 얘기들로 기록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설>  이런 심상치 않은 일들은 백제가 멸망한 서기 660년에도 계속 일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05편>

18만 나당연합군, 백제를 치다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8.22(일) 00:05-01:00

 

 

* 나오는 사람들 

낭독              이승주

여자1, 2          박희은, 전진아

의자왕            유호한

대신1             차진욱

무당              남도형

당고종            이지환

소정방, 조미곤, 병사2  김석환

김춘추           방우호

김법민, 병사1    이병용

대신2           심승한

임자, 부여효    백승철

김유신, 부여태  정형석

의직, 계백      장민혁

흥수           박영재

 

*시그널 + 타이틀

<효과>  (두레박으로 물 길어 올리다가)

여자1   (두레박 팽개치고) (비명)

여자2  (달려오며)물 긷다가 갑자기 왜 그래?

여자1  물이 아니라 피, 피, 핏물이야!

여자2  (비명 지르며)세상에 이런 일이! 도성 앞을 흐르는 사비 강물도 핏빛으로 변했다던데…

낭독자  의자왕 20년 봄, 도성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 바다에서 조그만 물고기들이 뭍으로 나왔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효과>  (두꺼비들 울음소리)

낭독자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효과>  (사람들 비명 지르며 달려가는)

낭독자  도성의 백성들이 까닭도 없이 놀라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효과>  (폭풍 몰아치는)

        (벼락 연달아 떨어지는)

낭독자  5월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떨어졌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講堂)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마치 두 마리의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는 듯 하였다. 왕흥사에서 마치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승려들 모두가 목격하였다.

<효과>  (개 한 마리 짖는)

낭독자  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해 짖더니 잠시 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효과>  (개 여러 마리 한꺼번에 짖는)

낭독자  사비도성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음악>  (음산한)

<해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얘기들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정사(正史)를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의자왕 재위 마지막 해 였던 서기 660년의 기록인데요, 어떻습니까, 앞에서 열거한 그런 괴이한 일들이 실제로 연달아서 일어난다면, 도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 모두가 공포에 질릴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백제 패망의 불길한 징후들을 나열해놓은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요. 삼국사기 특유의 역사 서술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백제 패망을 앞두고는 유난스럽게 이런 괴이한 변고들이 줄줄이 일어난 것으로 돼 있습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의 얘기 들어보시죠.

*인서트-1. 테입<113>  이도학

   (1:17:18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런 조짐들이 있었어요. 하늘의 조짐이라든지. 그때는 몰랐죠, 나중에 와서 아 그랬었구나 하거든요. 그런데 백제의 경우는 굉장히 많아요. 고구려는 없단 말입니다. 백제의 멸망, 백제가 무너지려고 하니까 천재지변, 이상한 현상들. 이게 바로 민심이 흉흉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냥 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자꾸 사인을 보내고 있는 거죠. 비상 나팔이 울려 퍼지고 있어요. 망한다 망한다 하는. 그런 거대한 나라의 몰락과 관련해서 자꾸 예고편을 보여 주고 있는 거죠. 살짝 살짝 보여 주고 있는데, 위정자, 최고 통수권자인 의자왕이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1:18:04)

<해설>  그러니까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사비도성의 백성들이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거리로 몰려나와서 달려가다 백 명씩이나 사망을 하고…이런 일들이 실제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질문이 되겠지요. 그 이야기들 속에서 당시 백제 사회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또 왜 그런 내용의 기사들을 백제패망 직전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는지를 탐색해보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충남역사문화원 강종원 연구원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서트-2. 테입<115>  강종원

   (20:21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멸망 요인, 이런 것들을 서술할 필요성이 있는데. 의자왕의 황음, 향락 생활, 사치 생활, 이런 것과 함께 또 사회적으로 그것을 알려 주는 그런 변고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결국 의자왕의 실정을 부각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사료비판적 측면에서 봤을 때 그렇고. 실제 또 설화나 전설에 의하면 어떤 국가적 변고라든지 이런 때는 많은 이상 징후들이 보입니다. 그것은 과학 문명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도 사실 그런 가십의 내용들이 많이 떠돌아다니거든요.21:08)

<해설>  그런 변괴(變怪)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 하나가 역시 삼국사기에 올라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의자왕  (문 열고) (궁궐 마당으로 나오며)뭐라고 하였느냐? 대궐에 귀신이 들어왔다고 했느냐?

대신1   예, 대왕마마.

의자왕  그래, 그 귀신이 지금 어디 있느냐?

대신1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귀신이 대궐에 들어오더니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땅속으로 들어갔사옵니다.

의자왕  그 말이 사실이렷다?

대신1   예, 대소 신료들이 모두 목격하였사옵니다.

의자왕  그 귀신이 대궐 마당의 땅속으로 들어갔다? 으음, 괴이한 일이로구나. 여봐라, 당장 사람을 불러 귀신이 들어간 땅을 파도록 하라!

<해설>  그렇게 해서 인부들이 귀신이 들어갔다는 지점을 파기 시작했는데 한참 동안 파내려가자 땅속에 거북이 한 마리가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북이 등에 여덟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의자왕  거북이 등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했느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어디 읽어보아라.

대신1  예, 대왕마마. 적혀 있는 글자는 이렇사옵니다. ‘백제동월륜(百濟同月輪) 신라여월신(新羅如月新)’, 이상이옵니다.

의자왕  백제동월륜이면…우리 백제가 바퀴처럼 둥그런 보름달과 같다는 얘기고, 신라여월신이면…신라는 이제 막 생겨난 초승달과 같다는 말인데 이게 무슨 뜻인고?

대신1   신들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의자왕  무당 어디 있느냐? 무당을 데려오너라!

무당    (앞으로 나오며)대왕마마, 부르셨사옵니까?

의자왕  저 글자가 무슨 뜻인지 풀이를 해보도록 하라. 백제는 둥근 달처럼 큰 나라이고 신라는 초승달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다, 그런 뜻이 아니겠느냐? 

무당    그런 뜻이 아니오라…으음…

의자왕  뭘 하고 있는 게냐. 저 거북이 등에 적힌 글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질 않느냐!

무당   대왕마마, 황송하옵니다. 우리 백제가 둥근 달 같다고 했는데, 둥글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뜻이니 이제 기울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반면에 신라는 초승달 같다고 했는데 초승달은 아직 덜 찼다는 뜻이니 앞으로 점점 채우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이옵니다.

의자왕  (버럭 화내는)무어라? 네놈 말대로라면 우리 백제는 머지않아 망하고 그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얘기가 아니냐. 네 놈이 그 따위 엉터리로 뜻풀이를 하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더냐! (칼 뽑으며)이노옴!

무당   대, 대왕마마…

의자왕  에잇! (칼 내려치는) (비명 지르며 쓰러지는)

의자왕  누가 뜻풀이를 제대로 해볼 사람이 없느냐?

대신1  제가 해보겠사옵니다. 거북이 등에 적힌 이 글자의 뜻을 곰곰 생각해 보니…둥근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이옵니다. 생각건대 우리 백제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간다는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의자왕  그래, 그래. 맞는 말이다. 그게 맞는 말이야, 허허허허…

<해설>  백제의 패망과 신라의 융성이 숙명이고 당위이며 하늘의 뜻임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설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황당한 설화투의 기록이긴 하지만 이도학 교수는 이 설화에 등장하는 짐승이 하필 거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3. 테입<113>  이도학

   (1:19:08 백제가 멸망할 때 이 거북이가 나타나고 있고 거북이 등가죽에 멸망을 암시하는 글자가 들어 있었던 것이죠. 오래된 나라, 7백 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내력을 가진 나라. 중국의 나라들은 수명이 길지 않아요. 15년 짜리도 있고, 2백 년, 길어야 3백 년. 7백 년이 되는 연륜을 가진 나라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권위와 영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나라인 것이죠. 그러한 장수, 유구함을 상징하는 거북이 등가죽에 멸망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백제의 시작으로 거북이, 동명왕이 강을 건널 때 거북이가도와 줬고.1:19:57)

<해설>  백제는 그 시작이 부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부여의 동명왕을 사당에 모시고 시조로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부여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동명왕이 엄리대수라는 큰 강가에 이르렀을 때, 물속에서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는 바람에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멸망할 때에도 같은 거북이과에 속하는 자라라는 짐승이 그 징후를 알려주는 역할로 등장합니다. 부여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됐다는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음악>  (브릿지)

 

<해설>  드디어 서기 660년 3월,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청을 받아들여 군사 들에게 백제침공을 명합니다.

당고종  (에코)짐은 이제 백제국을 칠 것이다.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을 것이니, 좌효 위장군 유백영과 함께 13만 대군을 출병할 것이니 백제를 정벌하고 돌아오라!

<효과>  (북소리)

        (대규모 군사 출정하는)

당고종  (에코)아울러 신라와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을 것이니,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당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치도록 하라!

소정방  황제폐하, 승전보를 안고 돌아오겠사옵니다. 자, 군사들은 모두 함선에 승선하라!

<효과>  (군사들 물가에서 첨벙거리며 달려가 배에 오르는)

<해설>  중국사서에는 이 때 출병한 소정방의 군사가 13만 대군이라고만 돼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12만2천7백1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 군사를 해로로 수송하기 위해서 동원된 함선만도 1,900척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나라는 무슨 계산을 하고서, 먼 바닷길을 항해하여 그처럼 많은 군사를 백제로 진격시켜서, 신라와 연합하여 전쟁을 하겠다고 나섰을까요?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인서트-4. 테입<116> 김영관

   (08:48 수나라, 당나라는 건국 이후 끊임없이 고구려와 싸우고 전쟁을 치렀습니다. 물론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우는 동안에  백제하고 신라가 또 거의 100년에 가깝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100년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659년에 신라와 당나라간에 모종의 밀약이 맺어졌는데 그것이 인제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을 해서 먼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그 다음에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하는 겁니다. 그 전략에 따라서 나당군이 움직였는데. 09:29)

<효과>  (배들, 파도 헤치고 나아가는)

<해설>  어쨌든 소정방이 거느린 군사는 지금의 산동반도에 해당하는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서해바다로 진격했는데 신라본기는 ‘그 전선의 선단이 늘어선 길이가 천리에 뻗쳤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신라의 움직임은 어떠했을까요?

김춘추  장수 김유신, 진주(眞珠), 천존(天存)은 짐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진군할 것이니 출정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해설>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해당하는 남천정(南川停)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6월 중순, 김춘추  당나라 군사가 출정을 했으니 우리 신라에서 영접을 하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 태자 법민은 전선 백 척을 이끌고 지금 당장 덕물도로 출발하여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맞이하도록 하라!

<해설>  김춘추는 태자 김법민을 덕물도, 즉 지금의 덕적도로 보내서 소정방을 만나게 합니다.

소정방  나, 소정방은 우리 당나라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항해하여 백제의 남쪽 바다에 도착한 다음 신라군과 합세하여 의자왕의 사비도성을 격파할 것이다.

김법민  우리 신라의 대왕마마께서도 지금 당나라 대군이 오는 것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터이므로 대장군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급히 서둘러 달려올 것입니다.

소정방  허허허허, 알겠다. 그대는 신라로 돌아가서 신속하게 병마를 징발하도록 하라. 지금부터 스무 날 뒤인 7월10일에 백제의 남쪽 바다에서 양국의 군대가 만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김법민  알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해설>  자, 이렇게 신라와 당나라군이 백제를 침공하기 위하여 합동작전을 척척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백제조정에서는 이 때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었을까요?

의자왕  당나라와 고구려의 싸움은 지금 어찌 돼가고 있느냐?

대신2   예, 대왕마마, 당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난 뒤부터는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의 전투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 듯하옵니다. 헌데, 요즘 들어 당나라와 신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의자왕  심상치 않다니, 무슨 얘기냐?

대신2   신라의 김춘추가 군사를 이끌고 도성을 떠나 멀리 남천정까지 올라 갔다하옵니다. 

의자왕  그렇다면 신라가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 아니겠느냐?

대신2  그런 것으로 보이옵니다. 더구나 2천을 헤아리는 당나라의 전함들이 내주를 출발하여 서해바다의 덕물도에 이르렀다고 하옵니다.

의자왕  음, 필시 당군과 신라군이 합세하여 고구려를 치는 모양이구나.

<해설>  물론 이 상황은 우리가 임의로 설정하여 드라마로 꾸며본 내용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제사 연구자들 역시 당나라군이 서해의 덕적도에 당도했을 때까지도, 백제조정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입을 모읍니다. 더군다나 신라의 김춘추가 군사를 이끌고 경기도 이천지역까지 북상하는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그것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한 출병으로 오해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와 공주대학교 양종국 교수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도록 하죠.

*인서트-5. 테입<113>  이도학

   (1:20:40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이끄는 부대가 북상을 했어요. 쭉 올라와서 어디까지 올라왔냐 하면 상주, 금돌성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상주. 이것은 백제의 전선에 있는 군대에선 다 포착하고 있었죠. 뜻하지 않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데 신라왕이 이끄는 대병력이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어요. 한강 유역으로 올라가고 있어요. 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가고 있습니다. 아, 고구려하고 일전을 벌이려고 생각하는가 보구나. 이렇게 판단한 것이죠. 안심 뚝 했던 거죠. 우리하고 관계없다. 팔짱을 끼게 된 거죠. 그리고 이 부대가 덕물도, 인천 쪽에서 사람을 보내서 소정방 군대와 만났어요. 1:21:22)

*인서트-6. 테입<117>  양종국

    (0:14 소정방 13만 군대가 인천 부근에 상륙했을 시점까지도 제가 볼 때는 아마 자신들이 공격당하리라는 사실을 백제 쪽에서는 잘 몰랐으리라고 생각이 되고요, 그 뒤에 백제쪽으로 기벌포 근방 쪽으로 군대가 이동을 해오고 신라군대도  오늘날 경기도 이천 지역까지 올라갔다가 속리산 쪽으로 해서 황산벌쪽으로 이동하는 과정, 그런 과정쯤에 가서 백제도 자신들이 공격받고 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라고 하는 사실을 아마 알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백제 입장에서 볼 땐 상당히 기습적인 공격으로 볼 수가 있고.       31:00)

<해설>  또한 이 무렵에는 동아시아의 각국이 주변세력의 정세를 염탐하기 위하여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물론 백제 역시 신라 내부에 첩자를 심어두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시기의 첩보전에서는 신라가 우세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백제에서 좌평벼슬은 제1관등의 고위직인데, 그 좌평 중에 신라의 첩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임자(任子)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도학 교수는 소정방 군대가 덕물도에 도착했을 때까지 백제 조정에서는 그들이 백제로 진격해올 것이라는 걸 몰랐을 가능성이 있고, 그것은 바로 그 임자라는 첩자의 연막전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진단합니다. 

*인서트-7. 테입<113> 이도학

   (1:22:39 몰랐을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당나라의 숙적은 고구려란 말입니다. 또 신라 군대가 북쪽으로 올라가니까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공략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우리하고는 관계 없다 하면서 경계 태세가 아주 느슨해질 수 있었고요. 또 하나는 백제 조정 안에 신라 간첩이 있었죠, 임자라고 하는. 그것도 벼슬이 높아요. 좌평 벼슬입니다. 이 사람이 전부 다 이제 백제 조정안에 있는 동태를 김유신에게 일러바치고 알려 주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오히려 임자 같은 사람이 거짓말로 이건 고구려하고 전쟁을 벌이기 위해 간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경계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1:23:21)

임자    대왕마마, 신이 듣기에는 당나라의 대규모 선단이 내주를 출발하여 덕물도에 이른 것은 그 곳을 전진기지 삼아서 고구려를 치기 위한 것이옵니다. 신라 왕이 군사를 이끌고 남천정으로 간 것 역시 고구려와 한판 전쟁을 치르기 위한 것이옵니다. 우리 백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것이옵니다. 이제 농번기가 다가오니 장병들에게 휴가를 주어서 집으로 돌아가 일손을 보태게 하시옵소서.

<해설>  신라 첩자 임자가 백제조정에서 이렇게 연막작전을 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좌평이라는 높은 직책에 있던 임자라는 사람은 어떻게 신라의 첩자가 되었을까요? 삼국사기 열전편 김유신전에는 신라 간첩 조미곤(租未坤)에 대한 얘기가 수록돼 있습니다. 간추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조미곤은 본시 신라사람으로서 천산 현령(天山 縣令)으로 있었는데 백제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좌평 임자의 가노(家奴), 즉 집안일을 맡아하는 노비로 배정 되었다. 조미곤은 부지런히 힘써서 임자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바깥출입도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신라로 몰래 들어가 김유신에게 백제의 사정을 보고하였다. 김유신이 조미곤에게 말했다.

김유신  백제의 국사를 죄지우지 하는 자가 임자라고 들었다. 기회가 닿으면 그 임자라는 사람을 우리 신라편으로 끌어들여 백제를 넘어뜨리려고 생각했으나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너는 우리 신라를 위하여 임자에게 내 뜻을 전하도록 하라.

낭독자  임무를 받은 조미곤은 백제로 돌아와 임자에게 말했다.

조미곤  좌평 나으리, 사실은 소인이 이번에 신라에 다녀왔사옵니다. 김유신 장군이 저를 은밀히 불러 좌평 나으리께 이렇게 전하라 하였사옵니다.

김유신  (에코)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을 누가 감히 알 수 있겠는가. 만약 백제가 먼저 망한다면 좌평은 우리 신라에 의지하고, 신라가 먼저 망하면 내가 백제에 의지함이 어떠하겠는가?

<해설>  결국 좌평 임자는 김유신의 회유에 넘어가서 백제의 국내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조미곤을 통해 신라에 알리는 첩자노릇을 해왔던 것 입니다.

<음악>  (브릿지)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 멈추고)

대신2   (내리고)대왕마마, 큰 일 났사옵니다!

의자왕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대신2   덕물도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의 소정방 군대가 우리 백제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다 하옵니다.

의자왕  무어라? 그게 사실이냐?

대신2   그러하옵니다.

대신1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김유신, 품일 등의 장수가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우리 백제를 향해 출정했다 하옵니다.

의자왕  허허, 이런 낭패가 있나? 고구려 정벌에 나선 줄 알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 아니냐!

<해설>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의 백제침공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이 언제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당군과 신라군이 상당히 근접해 오고 있는 상황에서 뒤늦게 깨달은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어쨌든 급박한 상황을 전해들은 백제조정에서는 그 대비책을 놓고 격론이 벌어집니다.

의자왕  당나라 대군과 신라군이 우리 백제를 협공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 막아야 할 적이 둘인데 그 대비를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의견을 말해보라! 

의직   대왕마마,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수전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를 타고 오느라 지쳐있을 것이옵니다. 그들이 육지에 내려서 기력을 회복하기 전에 급히 치면 뜻대로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신라군사는 큰 나라의 원조만 믿은 나머지 우리를 가벼이 보는 마음이 있을 것이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우리 백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움에 떨 것이옵니다. 그러니 먼저 당나라 군사와 일전을 벌이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상영    아니되옵니다. 좌평 의직의 전략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의자왕  그렇다면 달솔 상영(常永)의 생각은 어떠한지 말해보라! 

상영    예, 대왕마마. 당나라 군사는 먼곳에서 왔으므로 속히 싸우려 할 것 이오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우리가 감당키 어려울 것이옵니다. 반면에 신라군사는 우리에게 여러 번 패했기 때문에 우리의 군세를 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아서 그 군사가 지칠 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먼저 다른 부대의 군사를 보내서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후에 상황을 보아 합세하여 싸운다면 군사를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의직    달솔 상영의 말은 틀렸사옵니다.

상영    좌평 의직은 지금 큰일날 소리를 하고 있사옵니다.

의자왕  (탁자 치고)시끄러우니 그만들 하라! 좌평 흥수는 어디 있느냐?

대신1   대왕마마, 좌평 흥수는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귀양가 있다는 것을 잊으시었사옵니까?

의자왕  흠, 그렇구나 그렇구나. 여봐라, 지금 당장 고마미지현으로 가서 흥수에게 이 사태를 어찌했으면 좋은지 그 의견을 가지고 오도록 하라! 무엇하고 있느냐, 빨리 출발하라!

<효과>  (말 한 마리 달려가는)

<해설>  고마미지현이면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 땅입니다. 의자왕이 그 먼 곳에 귀양 가 있는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구하고 있으니 백제 조정의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흥수가 임금에게 올린 의견은 이렇습니다.

흥수    (에코)당나라 군사는 그 수가 많고 군율이 엄격하고 명백합니다. 하물며 신라와 서로 협공을 펴려고 모의하고 있으니 만약 드넓은 들판에서 대진한다면 우리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백강과 탄현은 우리나라의 요충이옵니다. 한 사람이 창 한 자루만 잡고 있더라도 만명을 당해낼 수 있사오니 마땅히 날랜 군사를 뽑아보내 지키게하여 당나라 군사는 백강을 들어오지 못 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지나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방비를 하면서 대왕 마마께서는 성문을 닫고 지키다가 그들이 양식이 떨어져 사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분격(奮擊)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해설>  흥수의 의견은, 의자왕에게 바른 소리를 했다가 옥중에서 죽었던 성충의 견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기벌포라고도 불리는 백강에서 당군을 막고, 침현, 혹은 탄현이라고 불리는 육지의 요충지에서 신라 군사를 방어해야 한다는 전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흥수의 조언은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임자    대왕마마 흥수의 말을 어찌 믿으려 하시옵니까. 흥수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를 한지 오래되었으니 대왕마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할 것이고 그가 한 말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닐 것 이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아와서 강의 흐름을 타고 오게 하되 배들이 나란히 타고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 역시 탄현을 통해서 좁을 길을 내려오게 하되 말을 나란히 타고오지 못하게 하여, 일시에 군사를 놓아서 적군을 친다면 닭장에 든 닭과 그물레 걸린 고기처럼 될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해설>  흥수의 전술을 두고 백제 조정에서 또 한 차례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군이든 당나라군이든 어느 한 쪽을 상대로 하여 물리칠 수 있다면 두 나라가 연합작전을 펴는 것을 차단 할 수 있었겠지요. 강종원 연구원의 얘깁니다.

*인서트-8. 테입<115>   강종원

   (29:53 당에서는 백제에 의해서 신라가 평정이 되든 고구려에 의해서 평정이 되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죠. 다만 당의 입장에서는 세 나라를 모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 두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백제 입장에서는 신라군과 당군의 연합 작전을 할 수 있는 것만 차단하면 당군은 목숨 걸고 백제와 자기 독자적으로 싸울 명분이 크지 않은 거죠. 그래서 신라군만 무찔러서 이 신라군을 붕괴시킴으로 해서 당군과 연합작전, 이것들을 차단하게 되면 당군은 스스로 물러갈 가능성도 있는 겁니다.      30:38)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 멈추고)

병사1  (내리고) 대왕마마, 당나라 군사가 이미 백강을 지나왔사옵니다. 

<효과>  (말 또 한 마리 달려와 멈추고)

병사2  (내리고)대왕마마, 신라군사가 이미 탄현을 지났다 하옵니다.

의자왕  그렇다면 크, 큰일이 아니냐. 여봐라, 기병 보병을 가릴 것 없이 전군에 동원령를 내려 모든 군사를 출동시키도록 하라!

<해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13만여 명에 이르고 거기에 신라군 5만을 더하면 무려 18만의 군사를 대적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의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되었을까요? 전문가들은 당시 백제의 상비군 규모가 4만에서 5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도학 강종원 두 사람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 볼까요?

*인서트-9. 테입<113>  이도학

    (1:27:53 백제 군대 기본 병력이 한 5만은 됩니다. 상비군이 5만 정도는 되는데, 금강 하구를 탁 막고 있어야 되는데 그게 뚫렸어요. 제대로 방어를 하지 않아 가지고요. 또 탄현도 못 막았고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고 병력수가 많은 군대에게 밀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정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궁전, 어전 회의에서 나옵니다만 여기를 막자, 저기를 막자, 우왕좌왕하다가 실기해 가지고 백제가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1:28:29)

*인서트-10. 테입<115> 강종원

    (28:07 백제에서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했던 적이 무왕 때라든지 근초고왕 때 이런때 보면 3만에서 4만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상비군, 항상 준비하고 있는 군사력은 중앙군이 대략 한 4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그렇다고 본다면 이런 위급 상황에서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이라고 한다면 상비군에 지방군이 있거든요. 지방군을 그에 동원하면 상당한 수는 될 겁니다. 다만 당시 정치 상황으로 봤을 때 지방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는 시간적인 상황은 안됐던 것 같고요.28:56)

<해설>  18만 명의 나당연합군이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일찍 입수를 했더라면 전국 각지에 동원령을 내려서 보다 많은 군사를 징발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의자왕은 당나라 대군이 덕적도에 이를 때까지도 설마 그들이 백제를 침공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 4만 혹은 5만여 명의 상비군만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신라군의 백제침공 루트를 살펴보기로 하죠.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백제를 속이기 위해서 고구려를 치는 것처럼 군사를 이끌고 멀리 경기도 이천지방까지 올라갔다는 얘기를 앞에서 했었지요? 그러나 신라군이 모두 그 쪽으로 갔던 것은 아니고, 나머지 군사들은 백제 공격하기 좋은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의자왕  지금 당나라 전선들이 어디쯤 왔다 하였느냐? 우리 수군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대신1  예, 2천여 척에 이르는 당나라 선단을 방어하고 있사오나 중과부적 이옵니다. 

의자왕  신라군은 어찌 되었느냐?

대신2  신라의 김춘추가 금돌성에 본부를 두고 장수 김유신에게 명하여 우리 사비도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옵니다.

의자왕  그들이 도성을 향해 오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다는 말이냐!

대신1   대왕마마, 달솔 계백이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로 나아가 진을 치고 있사옵니다.

<해설>  여기서 그 유명한,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투를 소개해야겠는데, 기록에 의하면 계백은 김유신 군대가 오기 전에 미리 황산벌에 3영, 즉 세 군대의 영(營)을 설치해놓고 방어태세를 갖춘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가 황산벌이라고 부르는 곳이 어느 지역을 일컫는지 강종원 연구원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죠.

*인서트-11. 테입<115>  강종원

    (39:52 논산 연산 지역은 북부에서 남쪽으로 가는 데 있어서 길목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호남선이 지나가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황산벌은 연산에 위치하는데 그 북변으로는 산악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 황산벌 전투의 상황을 보면 계백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삼영을 설치를 하게 되죠. 세 개의 영을 먼저 설치합니다. 이게 현재의 황령산성, 황령 고개라고 고개가 하나 있는데 상당히 높은 고개입니다. 그 위에 산성이 하나 있고. 또 산직리 산성이라고 있습니다. 또 청동리산성. 40:38)

<해설>  이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의 5천 결사대를 진두지휘했던 계백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요? 삼국사기 열전편을 보면 계백에 관한 얘기가 짤막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낭독자  계백은 백제 사람으로 그 벼슬이 달솔에 이르렀다. 의자왕 20년에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벌하였다. 이 때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용사(決死勇士) 5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그들을 막았다.

<해설>  자, 바로 그 다음 대목이 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숱한 얘깃거리를 제공한 계백장군의 유명한 일화지요. 

계백    나는 백제국의 백성으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으니 장차 국가의 존망을 알지 못하겠소. 내 처자가 적들에게 잡혀서 노비가 되어 그들에게 욕을 당하는 것은 차라리 쾌히 죽는 것만 같지 못 할 것이오. 나는 전투에 나가기 앞서 사랑하는 내 가족을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효과>  (칼 빼드는)

        (아내, 자식들 운다)

낭독자  계백은 가족을 손수 죽였다.

계백    자, 백제의 결사대는 나를 따르라!

<효과>  (군사들 달려 나가는)

낭독자  계백은 군사를 이끌고 황산의 들에 이르러서 3 영(營)을 설치하고 신라 군사들에 맞서 싸웠다. 

<해설>  그런데, 계백이 전투에 나서기에 앞서서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인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조선시대의 선비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유교적 도리로 볼 때 아무리 자신의 처자식 이지만 가족의 목숨을 임의로 거두어버린 행위는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계백이 전투에 임하기 전에 처자를 죽인 것은 이미 그 전쟁에 승산이 없다, 이제 백제는 패망할 것이다, 이런 결과를 예견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해설> 그런데 공주대 양종국 교수는 ‘백제멸망의 진실’이라는 저서에서 계백이 처자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 자체가 왜곡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인서트-12. 테입<117>  양종국

   (02:46 삼국사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백제말기 기록을 상당히 많이 왜곡해놓은 그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계백장군에 대한 것도 결국은 왜곡이 그 속에 섞여 있을 가능성성이 굉장히 크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용상으로 보면은 사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계백장군이 처자식을 죽일 만큼 그렇게 긴박했고, 또 계백장군이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었나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  그 짧은 기록이긴 하지만 계백장군 열전 그 자체에도 보면은 중국 고사를 얘기하면서 월(越)나란가요 그 고사를 얘기하면서.03:25)

<해설>  월(越)나라의 고사를 인용했다는 대목은, 계백이 전투에 임하는 백제병사들에게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행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효과>  (군사들 집결-말 울음소리 등)

계백    백제의 결사용사들은 들으라! 옛날에 월나라의 구천(句踐)은 5천 명의 군사로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모든 백제의 장병들은 각각 분발하여 승리를 결단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자, 목숨을 걸고 나가 싸우자!

<효과>  (함성 지르며 내달리는)

         (양쪽 군사들 병장기 부딪치며 싸우는)

<해설>  이렇듯 계백이 병사들을 향해 전투에서의 승리를 다짐하는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미리 처자식을 죽였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자들이 ‘백제는 이미 망하게 돼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왜곡 기술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지적입니다. 양종국 교수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계백의 처와 자식들이,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을 했거나, 아니면 나중에 신라군에 붙잡혀 살해당했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니겠느냐, 이런 의견을 피력합니다. 그렇다면 계백이 백제의 무장(武將)으로서 발휘한 능력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계백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대적한 상대는 5만 대군을 거느린 신라의 김유신이었습니다.

<효과>  (전투 중인)

계백    적군이 퇴각하고 있다. 추격하라!

<효과>  (기병들 달려가는)

낭독자  계백이 군사를 이끌고 물밀 듯이 쳐들어가니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내는 기세여서 신라군은 드디어 퇴각하였다.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은 신라군과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은 전사하였다.

<해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막강한 5만 대군과 싸워 네 번씩이나 승전 했다는 것은 대단한 전과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서트-13. 테입<115>  강종원

   (41:01 초전에는 네 번 싸워서 네 번 다 승리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비록 계백은 5천 군사밖에 되지 않지만 바로 그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초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죠. 그렇다면 전투에 있어서 지리적인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김유신도 5만 군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하게 되고 결국 그 과정에서 젊은 화랑들을 내세워서 그들의 죽음을 통해 또 사기를 충전시켜 가지고 결국은 5천 군사를 무찌르는 그런 상황들을 봤을 때 신라로서도 상당히 어려움을 겪은 전투가 되겠죠.41:50)

<해설>  신라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하는 계백의 백제 군사를 결국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관창 등 젊은 화랑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나중에 신라사를 탐색할 때 더 깊이 알아보기로 하죠.

<음악>  (브릿지)

 

의자왕  황산벌 싸움에서 우리 군사가 결국 패했단 말이냐?

대신1   예, 대왕마마.

의자왕  달솔 계백이 끝내 전사를 하였구나. 그러면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은 지금 어디로 갔느냐?

대신1  당나라의 소정방군과 합류하기 위해 기벌포로 떠났사옵니다.

의자왕  허허, 결국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합세해서 우리 도성을 노리게 됐구나. 황산벌에서 퇴각한 나머지 군사들을 기벌포로 보내서 적군을 방어하도록 하라!

<해설>  나당연합군과 백제군의 최후의 대결전이 벌어진 곳은 지금의 금강 하구에 있는 충청남도 장항에 해당하는 기벌포였습니다. 그런데 황산벌 전투를 힘겹게 치러내고 도착한 신라군과 당나라군 사이에 마찰이 생겼습니다.

낭독자  김유신 등이 백제군사를 격파하고 당나라의 병영에 이르니, 소정방은 김유신이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 하여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을 참형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말했다.

김유신  소정방 대장군은 황산벌의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찌하여 단지 늦은 것만을 죄로 삼으려고 하는가? 굳이 그렇게 하겠다면 우리 신라군은 당나라군과 먼저 결전을 한 다음에 백제를 격파할 것이다!

낭독자  그러자 소정방은 김문영의 죄를 묻지 않고 풀어 주었다.

<해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이 내용만 보더라도 김유신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군사들을 맞아 얼마나 힘겨운 전투를 치러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효과>  (대규모 군사들 이동하는)

<해설>  나당연합군은 의자왕이 웅거하고 있는 사비도성을 공격하기 위해 지금의 부여읍에 해당하는 소부리 들판에 집결합니다. 그런데, 신라군이 백제에 대한 사무친 원한으로 전의에 불타 있었던 반면에, 당나라의 소정방은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삼국사기에 묘사돼 있습니다.

낭독자  나당연합군이 의자왕의 도성을 포위하려고 소부리 들판에 집결하였는데 소정방이 자꾸 머뭇거리며 전진하려 하지 않자, 김유신은 그를 달래어 양군이 네 군데로 나누어 나란히 쳐들어갔다.

의자왕  지금 나당 연합군이 어디만큼 오고 있느냐?

대신2   대왕마마, 우리 백제군사가 웅진의 어귀를 막고 강가에 둔을 치고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으나, 소정방 군사가 웅진강의 왼쪽 강가로 나가서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사옵니다.

의자왕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여 막으라 하지 않았느냐?

대신1   당나라 군사가 조수를 이용하여 많은 배들이 서로 잇달아 나아가면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데 그 수가 워낙 많아서 우리 백제 군사가 대적하기 어렵사옵니다.

병사1   (말타고 달려와서) (내리고) 대왕마마, 소정방 군대가 사비도성으로 쳐들어와서 있는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막았으나 만 명이 넘는 우리 군사가 목숨을 잃었사옵니다. 이제 곧 성이 포위될 것이옵니다.

<해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의자왕은 이렇게 탄식을 한 것으로 기록 돼 있습니다.

의자왕  허허, 성충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성충의 말을 귀하게 여겨 그대로 시행했어야 하는데…이 지경에 와서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해설>  서기 660년 7월 12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없는 내용이 신라본 기에 수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김유신 등이 군사를 몰고 사면으로 쳐들어가니 백제 왕자는 상좌평으로 하여금 많은 음식을 갖추어 보내왔으나 소정방은 이를 거절하여 물리쳤고, 또 의자왕의 서자 궁(躬)은 좌평 6명과 더불어 나와서 죄를 빌었으나 이를 또한 물리쳤다.

<해설>  그리고 7월 13일-.

부여효  대왕마마, 이곳 사비도성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더 이상 지탱해내기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의자왕  내 생각도 그러하다. 야음을 틈타 웅진성으로 피신해야겠으니 태자는 앞장서도록 하라.

부여효  예, 아바마마. 어서 어가에 오르시옵소서.

<효과>  (어가에 오르고)

부여효  이럇!

<효과>  (수레 굴러가는)

<해설>  7월 13일 밤, 의자왕은 결국 사비성을 빠져나가 웅진성으로 피신 합니다. 그런데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옮겨간 것을 신라본기는 물론 백제본기에서도 ‘의자왕이 태자 효와 좌우 신하들과 함께 야밤에 웅진으로 도주하였다’라고,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이 사바도성을 빠져나가버리자 남아 있던 왕족들간에 한 바탕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집니다.

부여태  대왕마마와 태자 효가 측근신료들과 백성들을 버리고 도성을 빠져 나가버렸다. 그러나 비상한 때를 맞이하여 한 시라도 왕위를 비워둘 수 없으니 지금부터는 내가 백제국왕으로서 국사를 지휘할 것이다!

<해설>  이렇게 왕을 자처하고 나선 사람은 의자왕의 둘째아들 부여태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김영관 연구관과 양종국 교수는, 의자왕이 웅진으로 간 것은 사비성보다는 방어하기에 용이한 웅진성을 선택 해서, 그러니까 나당연합군에 맞서서 보다 효율적인 방어를 하기 위해 옮겨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인서트-14. 테입<116>  김영관

   (03:57 의자왕이 부소산성, 그 사비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피난을 간 것은 당나라군에게 대항을 하려고 피난을 갔던 겁니다. 웅진성은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도읍지였던 지금의 서울에 한성을 공격했을 때도 피난처로 사용했던 곳이고 그리고 60여년간 백제 수도로서 기능을 하였던 곳입니다, 그리고 사비시대에도 역시 백제의 副都로서 역할을 하였던 곳이고 방어에 유리하고 공격하는 데 굉장히 어려운 그런 지형을 갖춘 곳입니다, 지금의 공주의 공산성이 웅진성이라고 보는데요. 04:37)

*인서트-15. 테입<117>  양종관

   (10:00 의자왕이 겁을 먹고 도망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그 당시 방어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것이 백제가 택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의자왕은 나이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의자왕의 적장자로 볼 수 있는 부여 융이 615년에 태어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의자왕이 만약에 열다 섯 살에 부여융을 낳았다고 하면 660년이면 의자왕이 60세 이상이 됐을 땝니다.10:37)

<해설>  오히려 백제의 왕통을 보전하기 위해서 연로한 의자왕이 보다 안전한 웅진성으로 방어기지를 옮긴 것이라는 얘기지요.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