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주류성의 지리적 고찰 -부안-

천하한량 2007. 7. 10. 18:39

 

 

 

[! 주류성] 나뭇개 마을의 '배맷돌

 

| 2005·02·14 23:51 |

 

나뭇개 마을의 '배맷돌'

부안에서 개암사 가는 길에 '나뭇개'라는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상서면 고잔리 목포(木浦)-, 지명에서 느껴지듯이 이곳은 1900년대 초까지만해도 중선배가 드나들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나뭇개 부근은 부안에서도 간척이 꽤 일찍 시작되었던 것 같다. 1770년대에 간척이 시작됐고, 1910년과 1934년에는 일인들에 의해 삼간리, 청서리까지 간척이 이루어져 두포천이 완전히 농토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대에 시작된 계화도간척공사로 인해 해안선은 예전에 섬이었던 계화도까지 멀리 후퇴해 있다. 계화도간척공사 이전만 해도 지금의 큰다리 부근과 궁안리 일대가 염전이었고, 창북리는 계화도를 드나들던 포구마을이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행안들판을 지나 주산의 배메산 밑까지 바닷물이 들고나는 만을 이루고 있었다. 또 지금의 청호저수지, 큰다리, 나뭇개, 사산저수지로 이어지는 갯골(두포천)은 유정재 밑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구암리, 용서리, 지석리 일대의 고인돌이 세워질 무렵에는 그 일대 모두가 바닷가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행안면 진동리 고인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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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이곳을 지나며, 이곳이 예전에 바다였다는 흔적이 뭐 없을까? �O던 중에 효산스님으로부터 배를 매었던 '배맷돌' 이 나뭇개 마을 어디엔가 있노라는 말씀을 듣고 문화관광과 노성일과 �O아 나섰다. 마침 마을 안길 포장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이 있어서 가봤더니, 1.5m 정도의 높이에 지름 4050cm 정도의 돌기둥이 현장 한 켠에 있었다. 포크레인 기사 말에 의하면 마을 안길 땅 속에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부안문화원 채규병 국장에게서 고증을 얻고, 상서농민회 회원들의 도움으로 1998 12 24, 마을 입구 모정에서 서쪽으로 300m 지점, 두포천 수문 옆에 배맷돌을 세워 놓았다. 마을 분들의 말에 의하면 논 가운데 깊숙한 곳에 한 기가 더 있다고 한다. 그까짓 돌기둥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곳이 바로 663년 백제멸망을 가져 온 주류성·백강전투지로 비정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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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자 의자왕은 소정방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백제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의 대열에서 튀쳐나온 흑치상지가 항전의 횃불을 올리자 곳곳에서 백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복신, 도침 등은 일본에 가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고, 이후 3년동안 주류성을 왕성으로 삼아 백제부흥을 꾀했다. 그 후 두량이성 싸움의 승리로 기세를 떨치며 백제부흥도 목전에 두는 듯 했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등, 내란으로 인해 그 세력이 쇠하여 가던 중, 663년 소정방은 덕적도를 떠나 고군산에 대 부대를 주둔시키고, 금강하구로 가 설진하고 있던 김법민과 주류성 공격작전을 세운 다음 백강으로 침입하여 왔다. 일본 원정군과 백제 부흥군의 주력부대는 지금의 상서면 가오리에 진을 치고 나당연합군을 맞아 싸웠으나, 663 9 7일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주류성은 무너지고 백제는 망하고 말았다. 이 무너진 주류성·백강 전투에서 살아 남은 백제인들은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다 하였으니 어찌 능히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으리요. 데례성으로 가서 일본군장과 만나서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할 수 밖에 없도다.,라고 한탄하며 보트피플 신세가 되어 일본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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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백제, 일본, 신라, 당 등, 동아시아 4국이 운명의 일전을 벌인 국제전이었음에도, 주류성 백강전투지는 전국 도처에 있는 형편이다. 망한 백제는 역사를 남기지 못했고, 역사가들은 '구당서'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만 의존하다 보니 홍성설, 한산설, 연기설, 심지어는 경기도 광주설까지도 주장하는 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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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 사적기나 연혁에 의하면 634년에 묘연대사가 개암사와 묘암사를 창건하였고, 645년에는 의자왕이 백제의 별궁인 주류성을 둘러보고 갔다고 한다. 676년에는 원효대사가 나라 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이곳 주민들을 위무하고자 원효방에 와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1199년 이규보가 이곳을 둘러 본 후 쓴 '남행월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487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부안 산천조 우진암 란에서도 재확인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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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우연히 발견된 개암사중건사적기 "별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원효방의 상량문에 이르기를 이 절은 묘연이 지었는데 도침이 무왕의 조카 복신과 더불어 사람을 모아 솔병하여 이 산의 주류성을 근거지로 왕자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받들었다. 왜병 수만과 400척의 전함이 와서 풍을 도우니 그 세력이 크게 떨쳤다. 왜병은 백강의 오른쪽 언덕에 산을 뒤에 두고 설진하였는 바, 신라왕 김법민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보내고, 당나라의 수군과 함께 친히 전장에 왔다. 유인궤, 두상과 부여융(의자왕의 아들로 당나라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은 수군과 군량을 싣고 와 뱃머리를 왼쪽으로 돌려, 즉 동쪽을 향해 백강에 들이닥쳐 뭍의 김유신 등과 합쳐 주류성을 치고, 백강의 입구에 있던 지벌포에서 4회에 걸쳐 싸운 결과, 왜선 400척이 불타고 바닷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하략." 이 글을 쓴 밀영은 정유재란 후 개암사를 재건, 중수하고 개암사중수기를 쓴 4명 중의 한 사람으로 개암사 근처에 주류성이 있음을 엄연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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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771년 안정복이 청양의 정산설, 1861년에 김정호가 홍주(홍성)설을 들고 나와 이설이 시작되었으나, 타당성이 없어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1928년 일본의 今西龍은 백제사 연구에서 주류성 부안설을 발표하였고, 1930년 안재홍이 조선상고사에 주류성 부안설을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논란이 그쳤어야 할 터인데, 느닷없이 단재 신채호가 충남 연기설을 주장하고는 학설은 내놓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이병도는 '주류성은 한산 부근에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 말 한 마디가 발전되어 역사책에까지 오르게 되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실족사고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1996 11 2526 양일간, 이병도의 후학 3인이 부안의 향토사학자들과 함께 한산의 건지산성을 답사하는 자리에서 '스승(이병도)이 이 곳에 한 번만 와 봤어도 이런 엄청난 과오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

'
한산설' '연기설' '홍성설' 등 이설을 주장한 역사가들이 단 한번이라도 이곳에 와 봤더라면, 그리고 삼국시대 이곳의 해안선 지도를 그려봤더라면 그런 엄청난 오기를 남길 수 있었을까? 허허벌판에 서 있는 이 자그마한 '배맷돌'이 주류성·백강 전적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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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류성의 지리적 고찰
>
동으로는 전영래 교수가 주장하는 백강인 동진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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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강 밖으로는 김제 피성과 벽골제, 고부(고사비성) 금사동산성과 고부만과 눌제가 있고
,
안으로는 반곡리산성(동진 안성리), 구지리토성(동진 구지리), 용화동토성(계화 창북리), 염창산성(계화 창북리), 수문산토성(계화 창북리), 상소산성(부안읍성), 백산성, 사산리 토성(주산 두량이성으로 비정), 소산리산성(주산)이 있으며
,
남으로는 일본의 금서룡이 백강이라 주장하는 줄포만이

또 노도양 교수가 백강이라 주장하는 두포천이 사산저수지, 나뭇개, 큰다리, 청호지를 거쳐 바다로 흐른다.
부여와의 거리는 120km, 군산은 해로 30km, 김제 20km, 고부 20km, 덕적도에서 지벌포까지는 93해리 지점으로 변인석 교수가 백강이라 주장한 동진강하구에서 지벌포 하구까지 약 20km 해안이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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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강의 지리적 고찰
>
백강은 주류성의 방어만이 아니고, 백제권 전방에 영향을 미치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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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설이나 금강하구설 등은 당군이 공주와 부여를 점령한 후 계속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강이라고 볼 수가 없다
.
부안에는 동진강, 줄포만, 두포천 등, 세 곳의 강이 백강이라 주장되고 있으며, 변인석 교수는 부안 앞 해안 일대를 백강이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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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은 덕적도를 떠나 고군산에 대 부대를 주둔시키고, 금강하구로 가 김법민과 만나 주류성 공격계획을 세운 후 지벌포에 상륙, 동승안인 상소산에 올라 백제 주력부대가 있는 상서면 가오리 대진터의 전황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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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일본군 주력 주둔지인 대진터(상서면 가오리)는 두량이성과 대공리산성, 호치산성, 동림산성이 연결되어 있었다. 4차례에 걸친 대진터 장패평 결전에서 승리한 나당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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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전영래<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 강성채<주류성과 백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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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www.puan.pe.kr 허정균의 작은 한반도 변산반도-'주류성 가는 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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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 01 20 17 08 24    조회 :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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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義慈)는 태자로 있을 적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었으며, 즉위하여는 죄수를 염려하며 죄를 용서하여 주었으니, 그 정치가 조금은 볼 만하였다. 그러나 큰 사리에는 어두워서 심원한 지혜와 계략이 없어 신라와는 순치(唇齒)의 형세임을 모르고 경망하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병탄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금년에 성() 하나를 빼앗고 명년에 또 성 하나를 빼앗아, 연승의 위세를 의지하여 교만한 기색이 갑자기 넘치어, 신라를 낭중(囊中)의 물건으로 보아 그를 취하려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조서를 어기고 분란을 풀려는 마음도 없이 고구려와 결탁하여 중국에의 조공길을 끊었다. 그러고도 음란하여 놀기를 좋아하며 충간(忠諫)을 끊으니, 위에서 하늘이 노하여 재이(災異)를 여러 번 보여 간곡히 알려 주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태연스레 방자하였다. 그리하여 탄현(炭峴)백강(白江)의 요새도 보지(保持)하지 못하고, 당나라 군사가 이르매 사직(社稷)이 폐허가 되어 부여(扶餘)씨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동사강목 백제 전세도(百濟傳世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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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落花岩)

 


김흔(金訢)

부여의 왕기가 날로 쇠미해지니 / 扶餘王氣日衰替
달도 차면 기우는 것 애꿎은 점장이만 죽였구나 / 月滿當虧枉黷筮
은은한 고각 소리 탄현을 뒤흔들고 / 鼓角聲殷炭峴動
누선 그림자가 백마강을 덮었네 / 樓船影壓
白江
약석 같은 충신의 말이 처음은 입에 써서 / 藥石忠言口初苦
호강만 누리더니 끝내는 후회막급 / 宴安鴆毒臍終噬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겨 / 三千歌舞委沙塵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 / 紅殘玉碎隨水逝
“우여, 우여, 어찌하리. 항왕이 울었고 / 虞姬可奈泣項王
옥노가 언제 제 나라 임금을 저버렸던고 / 玉奴何曾負齊帝
물결에 던진 나말 아득히 어디멘고 / 凌波羅襪渺何許
지금토록 구름과 비가 바위 가에 머무르네 / 只今雲雨棲岩際
향혼이 한 번 가고 다시 안 돌아오니 / 香魂一去不復返
예 와 노니는 사람 길이 눈물 뿌리네 / 長使遊人空洒涕
강물은 이엄이엄 밤낮으로 흐르고 / 江水袞袞日夜流
바위는 우뚝우뚝 백 길이나 뾰죽하건만 / 岩石兀兀千尺銳
이 한은 강과 바위와 함께 그칠 때가 없으니 / 此恨與之無盡期
천년토록 길이 후세를 징계하리 / 留與千年監後世
제발 강물이 띠처럼 줄고 바위가 숫돌처럼 닳지 말게 하소 / 莫遣江水如帶石若礪

[D-001]달도 …… 죽였구나 :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때에 땅에서 거북[] 한 마리를 파 냈는데, 거북 등에, “백제는 동월륜(同月輪)이요, 신라는 신월(新月)이다.”고 씌여 있었다. 임금이 점쟁이에게 물으니, “동월륜은 만(滿)이니 즉 시들어진다”고 풀어 임금이 노하여 점쟁이를 죽였다. 《三國史》
[D-002]약석(藥石) 같은 충신 :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옥사(獄死) 전에 소()를 올렸으나 의자왕이 무시했다가 도성(都城)이 함락될 때에야 비로소 후회하였다. 《三國史》
[D-003]()여 …… 어찌하리 : ()는 항우(項羽)의 애희(愛姬) 우희(虞姬)인데, 항우가 애희와 마지막으로 이별하며 부른 노래이다.
[D-004]옥노(玉奴) : 옥노는 남재(南齋) 동혼후(東昏侯)의 비() 반씨(潘氏)의 소자(小子)이다. 그녀에게 혹하여 나라가 망했으나 그녀는 순절(殉節)했다.

- 속동문선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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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3상갑술 신라 소지왕(炤智王) 16,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3, 백제 동성왕(東城王) 16년부터, 무신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 2,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7, 백제 의자왕(義慈王) 8년까지 155년간 임오년 신라 지증왕 3, 고구려 문자왕 11, 백제 무령왕 2(북위 선무제 경명 3, () 무제(武帝) 천감(天監) 원년, 502)


춘정월백제의 백가가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무령왕(武寧王)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이를 죽였다.

백가가 가림성(加林城)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우두성(牛頭城)에 이르매 무령왕이 한솔() 해명(解明)을 시켜 토벌하게 하니, 백가가 항복하였다. 왕은 그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에 던졌다. 김씨는 이르기를,

“신하로서는 역모할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백가의 큰 죄를 즉결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 뒤에야 죽인 것은 이미 늦은 일이다.

하였고, 권씨는,

“백가가 이미 왕을 시해하고 온 성()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 세력이 막강하였다. 무령왕이 즉위 한 지 얼마 안되어 능히 장수들을 거느리고 백가를 잡아서 죽였으니, 이것은 반도를 토벌하는 대의를 다한 것이다.

하였다.

2계림이 비로소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전에는 왕이 훙()하였을 때 남녀 다섯 사람씩을 순장(殉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를 금하였다. 최씨는,

“장사에 옛법을 따르지 않고,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순장하다가 그 폐단이 순장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어질지 못함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으랴! 신라의 법에 왕이 죽으면 반드시 순장하는 관습이 상례가 되어 수십대를 지나오도록 이를 개혁하는 자가 없더니, 왕이 이를 금하였다. () 목공(穆公)의 순장하라는 온당치 못한 명령에 따라 강공(康公)이 억지로 사람을 협박하여 무덤 속에 넣은 것과 비교하여 보면 어찌 현명하지 않다 할 수 있으랴!

하였다.

○ 계림이 주군(州郡)에 명령하여 농사를 권장하고, 처음으로 백성에게 우경(牛耕)을 가르쳤다.
10고구려에 지진이 있었다.
11
백제가 장수를 보내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엄습하였다.
○ 이해에 양()이 제()를 찬탈하고, 고구려ㆍ백제의 왕을 책봉하였다.

고구려 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백제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삼았다. 《남사(南史)》에서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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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4상기유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 3, 고구려 왕 장() 8, 백제 왕 의자(義慈) 9-을사 신라 경덕왕(景德王) 24 107년간

계해년 신라 문무왕 3, 고구려 왕 장 22, 백제 왕 풍 3년 ○ 이해에 백제는 망하여 두 나라가 되었다(당 고종 용삭 3, 663)

 

 


춘정월신라가 장창(長倉)을 남산 신성(南山新城)에 지었으며 부산성(富山城) 지금의 경주부 서쪽 32리에 있다 을 쌓았다.
2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4성을 빼앗았다.

신라가 장군 흠순과 천존 등을 보내어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지지(地志)》에는 진주가 백제의 거열성이라 하였고, 또 거창(居昌)이 거열성이 된다 하였는데 아마도 그 땅이 아니고 별도로 다른 성이 있는 듯하다. 을 공격하여 취하고 7백여 급을 베었으며, 또 거물(居勿)ㆍ사평(沙平)지금의 홍주(洪州) 신평현(新平縣)이며, 거물은 미상 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항복받았으며,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여 급을 베었다.

4당이 신라를 계림주대도독부(鷄林州大都督府)로 삼고 왕으로 하여금 통령(統領)하게 하였다.
5
신라 영묘사(靈妙寺)의 문이 진동(震動)하였다.
9당의 유인궤ㆍ손인사 및 신라 왕이, 백제 및 왜의 구원병을
백강(白江)에서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주류성(周留城)을 빼앗았다. 백제 왕 풍()이 고구려로 도망가니, 백제가 드디어 망하였다.

인사(仁師)가 와서 인원(仁願)과 합세하니, 사기가 크게 떨쳤다. 신라 왕이 김유신 등 28()을 거느리고 와서 전봉(前鋒)이 되었다. 여러 장수가. 가림성은 수륙(水陸)의 요충(要衝)이라 하여 먼저 공격하려 하니, 인궤가 말하였다.

“병법(兵法)에 실()을 피하고 허()를 공격한다 하였으니,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면 사졸이 상하게 되고 지키면 날짜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巢窟)이니 여기서 이긴다면 여러 성은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이에 인사ㆍ인원 및 신라 왕은 육지로 따라 나가고, 인궤와 별장 두상(杜爽) 및 부여융(扶餘隆)은 주사(舟師)와 양선(糧船)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들어가 서로 모여 함께 주류성으로 나아가다가 왜병(倭兵)백강 입구에서 만났으며, 백제의 정기(精騎)도 언덕 위에 열지어 있었다. 신라의 군사가 힘써 싸워 4(合 싸우는 횟수를 말한다)을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되었다. 이긴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언덕 위의 군사를 깨뜨렸다. 이렇게 되자 두릉(豆陵)ㆍ윤성(尹城)ㆍ주류(周留) 등의 성이 모두 두려워 항복하였다. 마침내 풍()은 고구려로 달아나니 그의 보검(寶劍)을 노획했으며, 왕자인 충승(忠勝)ㆍ충지(忠志) 등은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倭人)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였다. 왕이 왜인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너의 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강화(講和)하고 빙문(聘問)하여 한번도 불화(不和)한 일이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오늘날 이런 짓을 했는가? 내가 차마 너희들을 죽이지 못하겠으니 돌아가 너희 왕에게 말하라.

하고, 드디어 놓아 보냈고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쳐서 항복받았다. 백제는 모두 32 6 81년 만에 망하였다. 김씨는 이렇게 적었다.

“신라가 스스로 소호 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라 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신라 국자 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의 비()에 보인다 고구려 또한 고신씨(高辛氏)의 후예라 하여 성을 고씨라 하였다. 《진서(晉書)》에 보인다.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백제와 고구려는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 하였고, 또 ‘진()ㆍ한()의 난리 때에 중국 사람들이 많이 해동(海東)으로 망명해 왔다.’ 하였다. 그렇다면 세 나라의 선조(先祖)는 아마도 옛 성인의 후손들인가? 어찌 나라를 누린 것이 이토록 오래되었는가? 백제의 말기에 이르러 올바르지 못한 소행(所行)이 많았고,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손을 잡고 침략하였으니, 이른바 ‘어진 이를 친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도리를 알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신라와 화해하라.’고 하였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고 속으로는 어겨 마침내 대국에 죄를 얻었으니 망한 것이 당연하다.

11백제 장군 지수신(遲受信)이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고 신라에 항거하였다.

백제가 망하자 모든 성이 항복하였으나,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였는데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저장해 둔 양식이 또한 많아서 신라 사람이 한 달을 공격하였어도 함락되지 않았다.

○ 백제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당에 항복하였다. 그리고는 임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수장(守將)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백제가 망하였는데도 상지(常之)가 험지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제가 사자를 보내어 초유(招諭)하니, 상지가 사타 상여(相如)와 함께 인궤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인궤가 성심으로 그를 대접하고 그들로 하여금 성을 취하여 스스로 공효를 세우게 하고 양곡과 병기를 대주니, 손인사가 말하기를,

“야심(野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병기와 양곡을 대어 주었다가 그들이 배반한다면 도적을 도와 주는 것이 됩니다.

하니, 인궤가 말하기를,

“두 사람을 보건대 충성스럽고도 지모가 있습니다. 단지 지난날에는 못된 사람에게 의탁하였기 때문이요, 지금은 매우 감격하여 공을 세우려 하니 의심할 것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이들이 임존성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수신(受信)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남은 무리들은 모두 평정되었다. 상지는 당에 들어가 정벌(征伐)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서 벼슬이 연연도 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이르렀다. 무후(武后) 때에 마침내 무함(誣陷)을 입어 옥에서 죽었다. 상지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데 인정이 있었다. 어느 때 자기가 타는 말을 사졸이 매질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죄 주라고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개인의 말[] 때문에 나라의 병사를 때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전후에 상으로 하사받은 것을 남김없이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그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하였다.

○ 당이, 유인궤를 백제에 머물러 진수하게 하고 유인원을 소환하였다.

이때에 백제는 전쟁을 치른 나머지, 집들이 허물어지고 시체가 들에 깔렸었다. 인궤는 비로소 해골을 거두어 묻게 하고, 호적을 만들어 촌락을 정리하고, 관장(官長)을 임명하여 도로를 통하며, 교량(橋梁)을 세우고 제방을 보수하며, 방죽을 복구시키고 농잠(農蠶)을 장려하며, 가난을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며, 당의 사직(社稷)을 세우고 정삭(正朔) 및 묘휘(廟諱)를 반포하여 백성들이 모두 생업에 편안히 종사케 한 뒤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양곡을 저장하고 사졸을 훈련시켜 고구려를 도모하려 하였다. 유인궤가 있던 고성(古城)은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에 있으며 정전(井田)하던 터도 있다.

○ 신라가 진수하고 있는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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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양진이 서로 상대하여 승부를 다툴 때에도 오히려 하루도 지키는 데가 없어서는 안 되었다. 마치,

“백마진(白馬津)을 지키고 비호구(飛狐口)에 웅거하여 성고(成皐)의 험한 데를 막아 천하 형세를 보이리니, 세 곳이 견고해진 뒤에는 천하의 형세가 초()에 있지 않고 한()에 있을 것입니다.

한 것과 같으니, 나라를 지키는 급선무는 더욱 이 요새 지키는 데 있다. 이른바 소위 우()의 하양(下陽), ()의 동관(潼關), ()의 검문(劍門), 백제(百濟)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은가. 그곳을 잃어서는 어떻게 되었으며 얻어서는 어떻게 되었는가.
옛일을 살펴 오늘날을 비추어 보니 한심스럽다. 만약 이 밖에 따로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기발한 계책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하늘로 오르거나 땅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주역(周易)》 감괘(坎卦),

“왕공(王公)이 험함을 설치하여 나라를 지킨다.

라 하였고,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여기에 성을 쌓고 여기에 못을 파서 백성과 함께 목숨을 바치면서 지켜서 백성이 떠나지 않는다면, 이는 할 만한 일이다.

라 하였으니, 성현의 가르침은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
, 양을 잃고 우리를 고치며 말을 잃고 마구간을 수리하니 지난 일은 말할 필요가 없고, 앞으로의 일은 잘 하려는 것이다. 지금 말 잘하는 선비가 많으니, 이 늙은 사람이 한 가지 아는 것으로 그 사이에 입을 놀릴 수 없지만, 나라를 위한 간절한 정성 때문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마침 한두 가지를 기록하여 말하였다. 뒤에 반드시 내 말을 옳게 여길 자가 있을 것이요, 지금의 군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 슬프다.

[D-001]석거(石車) : 돌의 포거(砲車)로서 돌을 발사하여 적을 공격하는 기계이다.
[D-002]백마진(白馬津)을 …… 것입니다 : ()과 초()가 형양(滎陽)에서 싸울 때 역이기(酈食其)가 한 고조(漢高祖)에게 한 말이다. 《史記 卷97 酈食其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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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제14

 

 문부 11 ○ 찬()

대령산신찬(大嶺山神贊) 병서

 


계묘년(1603, 선조36)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에게 물으니, 수리가 이렇게 말하였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新羅) 대장군(大將軍) 김공 유신(金公庾信)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山神)이 검술(劍術)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鑄造)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런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와 향화(香花)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 부사(溟州府司)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갖은 놀이[雜戲]로 신()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이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風災)나 한재(旱災)가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 날에 가서 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내 생각건대,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공()을 세워 삼국 통일의 성업(盛業)을 완성하였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이 백성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기에 드디어 다음과 같이 찬()한다.

갸륵하다 귀족(貴族)의 후손이여 / 猗紫纓裔
씩씩하고도 우람스럽도다 / 趫趫桓桓
나라의 용장되어 / 爲國虎臣
북채 들고 단에 오르도다 / 提抱登壇
무장하고 군문에 나서니 / 杖鉞轅門
기상이 고구려 백제를 삼킬 듯 / 氣呑麗濟
비호 같은 장수들을 채찍질하며 / 鞭笞虎貔
용감한 정예부대 몰고 가네 / 驅駕勇銳
오구를 차고 가니 / 佩以吳鉤
곤오산(昆吾山)의 쇠로세 / 出自昆吾
시뻘겋고도 아름다워 / 紅光

붉은 불꽃 뿜어낼 듯 / 紫焰呵噓
웅진에서 말을 베고 / 熊津斬馬
당 나라 배 만 척이 와서 도왔네 / 萬艘來壓
백마강에서 기약에 뒤지자 /
白江後期
백제 삼군은 겁에 질렸건만 / 三軍氣懾
공의 수염이 분노에 뻗쳐 / 公鬚蝟磔
칼을 어루만지며 고함 지르니 / 按劍而咆
붉은 용이 번득이는 듯 / 赤龍閃躍
놀라운 번개가 칼집을 에워싸니 / 驚電

왕사 드디어 힘을 어울러 / 王師遂協
능히 백제를 멸망시켰네 / 克剗扶蘇
꿈틀대는 고구려족 / 蠢爾高孼
서녘 모퉁이서 날뛰네 / 陸梁西隅
군졸을 풀어 가서 치니 / 發卒徂征
황제의 위엄 우레인 양 떨치네 / 皇威霆震
동쪽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 東師一萬
북을 치며 앞장서서 / 鼓而先進
긴 창 모아 굳세게 무찌르니 /
鏖剄
멧부리 쪼개지고 연못은 치솟을 듯 / 嶽坼淵騰
갑옷 쌓아 두고 창 던지니 / 積甲投戈
소라바다에 썩은 시체 답쌓여라 /

이적(李勣)이 웃음 지으니 / 英公爲笑
칠부(七部) 군졸 땅에 무릎꿇고 / 七部泥膝
이웃 발악 제거하매 /
迄除
나라의 걱정거리 없어졌네 / 國已去疾
해와 달도 툭 트여 해맑고 / 日月開朗
천지도 다시 빛나네 / 天地昭蘇
삼한의 우리를 에워 / 環三韓境
모조리 판도 안에 넣으니 / 盡歸版圖
큰 공훈 정이와 기상에 새기고 / 鼎彝旂常
사책(史策)에 실어 영원히 빛나도록 / 丹靑帶礪
동해의 동녘에서 / 東海之東
그 공 미칠 이 없네 / 功無與逮
웅장한 풍도에 영특한 기개 / 雄風英烈
이제 수천 년이 되었건만 / 今數千年
대령산 꼭대기에서 / 乃享廟食
아직도 제사 받아 / 于關之顚
해마다 드리는 분향 / 歲時芬苾
누구라서 감히 소홀히 하랴 / 疇敢以慢
공의 넋은 어둡지 않거니 / 公靈不昧
복 내림도 큼도 커라 / 降福簡簡
구름 타고 바람결에 / 雲馬風車
살포시 오네 / 颯然而來
오곡은 무르익어 풍년 들었고 / 穀登歲熟
백성에겐 재앙 없어 / 民不

동해바다는 넘실넘실 / 溟漲洋洋
오대산은 굽이굽이 들쭉날쭉 / 五臺
齾齾
천추 만대에 / 千秋萬歲
향화 어이 그치리오 / 香火罔缺
이 몸 또한 공과 같은 겨레요 / 余忝同族
또한 같은 강릉 백성이기에 / 亦惟溟氓
내 이제 송 지어 / 刊頌以揚
우리 신명 찬양하노라 / 惟我神明


 

[D-001]오구(吳鉤) : 도검(刀劍)의 이름. 칼이 갈고리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다.
[주D-002]이적(李勣) : () 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영국공(英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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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현(扶餘縣)


동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24,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37,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으로는 정산현(定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 9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 사자(泗泚)라고도 한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웅천(熊川)으로부터 여기에 와서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 이름하였다. 의자왕(義慈王) 때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가고 나서는 신라에서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문무왕(文武王) 12년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으로 만들었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
【군명】 소부리(所夫里)ㆍ남부여(南扶餘)ㆍ반월(半月)ㆍ사자(泗泚) ()는 혹 비()로도 쓴다. 여주(餘州)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와 있다.
【성씨】 본현()ㆍ이()ㆍ서()ㆍ전()ㆍ형()ㆍ조()ㆍ고()ㆍ표()가 있으며 백() 속성(續姓)이다.
【형승】 탄현(炭峴)백강(白江) 성충(成忠)이 의자왕을 간()한 글에 있으며, 인물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산천】 부소산(扶蘇山) 현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 작은 봉에 비스듬히 올라간 곳을 영월대(迎月臺)라 부르고, 서쪽 봉을 송월대(送月臺)라 이른다. 탄현(炭峴) 현 동쪽 14리에 있는데 공주와의 경계이다. 부산(浮山) 고성진(古省津)의 북쪽 언덕에 있다. 망월산(望月山) 현 동쪽 15리에 있으며, 또 석성현(石城縣) 편에도 나와 있다. 취령산(鷲靈山) 현 서쪽 20리에 있다. 오산(烏山) 현 남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 현 서쪽 30리에 있다. 백마강(白馬江) 현 서쪽 5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및 금강천(金剛川)이 공주의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이 강이 된 것인데, 임천군(林川郡) 경계로 들어가서는 고다진(古多津)이 된다. 고성진(古省津) 바로 사자하(泗泚河)인데, 부소산 아래에 있다. ○ 백제의 의자왕 때 물고기가 죽어 물 위에 떴는데, 그 길이가 3()이나 되었다. 이를 먹은 자는 죽었고, 또 물빛이 붉게 변하여 핏빛과 같았다. 대왕포(大王浦) 현 남쪽 7리에 있는데, 오산(烏山) 서쪽에서 발원하여 백마강(白馬江)으로 들어간다. ○ 백제의 무왕(武王)이 매양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자하(泗泚河) 북쪽 물가에서 놀면서, 술마시며 즐기고 술이 취해서는 반드시 거문고를 뜯으면서 스스로 노래하고, 시종하는 자들을 일어나 춤추게 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대왕포(大王浦)’라 일컬었다 한다. 광지포(光之浦) 현 동북쪽 7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현 서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에서 발원한다. 금강천(金剛川) 현 북쪽 23리에 있다.
석탄(石灘) 현 동쪽 12리에 있으며, 백마강의 상류이다. ○ 고려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신돈(辛旽)을 탄핵하였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이곳에 살면서 여울 위에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시를 읊으면서 그 몸을 마쳤는데, 일찍이 시를 짓기를, “백제 옛 나라 장강(長江) 굽이에, 석탄(石灘)의 풍월이 주인 없는 지 몇 해이런가. 들불이 언덕을 사르니 평탄하기 손바닥 같은데, 때때로 소가 묵은 밭을 가네. 내가 와 정자 짓고 승경(勝景)을 더듬으니, 온갖 경치 아름답게 앞으로 몰려드네. 구름과 연기는 교사(蛟蛇)의 굴에 끼었다간 사라지고, 산 아지랑이 아물거리며 먼 하늘에 떠 있다. 흰 모래 언덕 뚝 끊기매 갯물이 들어오고, 큰 암석이 연달아 물가에 비꼈구나. 조각배 저어 남으로 올효조(兀梟窕)로 돌면, 돌 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물을 굽어본다. 돌부처여, 그대는 의자왕 시대의 일을 목격하였으리라. 오직 들 두루미 와서 참선(參禪)하고 있구나. 상상해 보니 옛날 당 나라 장수가 바다를 건너왔을 때, 웅병(雄兵) 10만에 북소리 둥둥 울렸으리. 도문(都門) 밖 한 번 싸움에 나라 힘을 다했으나, 임금이 두 손 모아 결박을 당하였다. 신물(神物 용())도 빛을 잃고 제자리 못 지켰나. 돌 위에 남긴 자취 아직도 완연하다. 낙화암(落花巖) 아래에는 물결만 출렁대고, 흰 구름 천년 동안 속절없이 유연(悠然)하다.” 하였다.

【인물】 백제 성충(成忠) 의자왕(義慈王)이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하게 연락(宴樂)에 빠져 술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극력 간하였더니, 왕이 노하여 옥()에 가두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병이 나서 죽을 때에 글을 올려 간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오니 원하건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나이다. 신이 시변(時變)을 관찰하오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쓰려면 그 땅을 살펴 선택하여 상류(上流)에 처하여 적군을 맞이한 뒤에야 보전할 것이니, 만약 다른 나라의 군병이 공격해 올 경우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며, 수군(水軍)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라고도 이른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험준하고 막힌 지리(地利)를 점거하여 방어한 뒤에야 가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에 유의하지 아니하였다가 당 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탄현과 백강을 통과한 승세(勝勢)를 타고 도성에 임박하니 왕이 패배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이 지경이 되었음을 후회하노라.” 하였다. 계백(階伯) 계백이 백제에 벼슬하여 달솔(達率)이 되었는데, 당 나라 소정방이 신라의 군사와 합세해 와서 치므로 계백이 장군이 되어 황산(黃山)의 벌판에 이르러 세 영()을 배설하고는 신라 군사를 만나 싸우려 할 즈음에, 군중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월() 나라 구천(句踐) 5천 명의 적은 병력으로 능히 오 ()나라의 70만 대병을 격파한 바 있다. 오늘 마땅히 각기 분발하여 기필코 승리하여 국은(國恩)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무찔러 싸우는데 하나가 천 명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어 신라의 군사가 이에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진퇴(進退)를 거듭하기를 네 번이나 하고 힘이 다 되어 죽었다. 흥수(興首) 의자왕 때에 좌평(佐平)이 되었는데 죄로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으로 유배되었었다. 당 나라 군사가 덕물도(德物島)에 이르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전수(戰守)의 방책을 물으니, 흥수가 말하기를,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한 군사가 단창(單槍)으로 지키고 있으면 만 명도 이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맹있는 군사를 가려서 가서 지키도록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신라 병사로 하여금 탄현을 지나오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단단히 닫고 굳게 지키시면서 그들의 군량이 다하고 병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치면 필연코 적을 멸할 것입니다.” 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흥수가 오랫동안 옥중에 있어 대왕을 원망하였을 것이니 그 말을 쓸 수 없습니다.” 하자, 왕이 그렇게 여겨 흥수의 말을 쓰지 않았다가 드디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복신(福信) 무왕(武王)의 조카이다. 의자왕이 이미 항복하니, 복신이 승려 도침(道琛)과 더불어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여 왕자 부여풍(扶餘)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병졸을 이끌고 당 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도성에 포위하였는데, 유인궤(劉仁軌)와 신라가 합력 공격하여 그 포위를 풀자 복신이 임존성(任存城)으로 물러가 지키면서 자칭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하였는데, 뒤에 부여풍에게 피살되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서부(西部) 사람으로 신장이 7척이 넘었으며, 용력과 지략이 있었다. 의자왕 때에 달솔 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이 되었는데, 소정방이 의자왕을 잡고는 이내 군병을 놓아 크게 노략하니, 상지가 10여 명과 더불어 빠져 나가서 도망한 자를 불러모아 임존성산(任存城山)에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10일이 못 되어 귀의(歸依)하는 자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소정방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마침내 2백여 개의 성()을 회복하고,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相如)와 더불어 복신(福信)과 호응하였는데, 용삭(龍朔) 연간에 당 나라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드디어 유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지수신(遲受信) 유인궤가 백강(白江)에 이르러 부여풍(扶餘)을 구원하는 왜병(倭兵)과 만나 네 번 싸움에 모두 이기니, 부여풍은 몸을 빼 달아나고,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ㆍ충지(忠志) 등은 왜인과 모두 항복하였는데, 유독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였다. 지대가 험하고 성곽이 견고한데다가 저축한 군량이 많아서 30일을 공격하여도 항복하지 않다가 성이 함락하게 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高句麗)로 망명하였다. 【우거】 고려 이존오(李存吾) 석탄(石灘)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