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성지(城池),관방(關防),진(鎭)ㆍ보(堡) -변어전고(邊圉典故)-

천하한량 2007. 7. 10. 19:26
성지(城池)

우리나라 사람은 가장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아니하여 축성(築城)에도 전혀 뜻이 없었다. 다만 산세를 따라 구불구불 모양을 만들며 되도록 광활한 것으로 위주 삼아 클수록 더욱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옛날의 성(城) 제도는 50타(垜 살[失]받이터)에 1치(雉) 곧 지금의 곡성(曲城) 를 두되, 타의 높고 낮음은 성의 3분의 1이 되게 하였다. 성의 높이가 3장(丈)이면 타는 1길이다. 높이가 이같으므로 사람이 마음놓고 꼿꼿이 선 채 화살과 돌을 피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여장(女墻 성 위의 얕은 담)은 겨우 두어 자 밖에 안 되어 사람이 엎드려 다녀도, 적의 탄환을 면하지 못하니, 이것이 좋지 못한 점의 첫 번째이다. 타와 타 사이는 좁은 것이 좋으니, 겨우 화살을 쏘고 바라볼 수만 있으면 그만이고 적으로 하여금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되는데, 우리나라 여장은 중간에 몇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니 이것이 좋지 못한 점의 두 번째이다. 옹성(甕城 큰 성문 밖의 작은 성)도 역시 매우 드물게 설치하여 아무리 도성과 같은 큰 성도 동문(東門) 밖에 단 하나의 옹성이 있을 뿐이니, 치(雉)가 없는 성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이것이 좋지 못한 점의 세 번째이다. 《징비록(懲毖錄)》
○ 옛사람이 성제(城制)를 말할 때에 모두 치(雉)를 일컬었으니, 이른바 천치(千雉), 백치(百雉)라는 것이 그것이며, ‘치’란 바로 지금 말하는 곡성(曲城)ㆍ옹성(甕城)이다. 대개 성에 곡성ㆍ옹성이 없으면 비록 사람이 타(垜)를 지키고 타 사이에 방패를 세워 밖의 화살과 돌을 막는다 하더라도 성 아래에 와서 붙는 적을 발견하여 방어할 수가 없다.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50타마다 1치를 두고, 밖으로 2, 장(丈) 나가며, 두치 사이의 거리가 50타이고, 1치는 각각 25타의 땅을 차지해야 화살과 돌이 한창 퍼부어질 때에도 좌우를 돌아볼 수 있어 활쏘기에 편리하니, 적이 성 아래에 와서 붙을 수가 없다.” 하였다. 《징비록》
수양성(睢陽城) 안에 사는 사람이 수만 호(戶)였고,즉묵성(卽墨城) 안에서 소 천여 마리를 준비하였으니, 3년이나 포위되어 군색한 뒤에도 오히려 소 천여 마리를 준비했다니, 평상시 성안에 사는 사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장순(張巡)ㆍ전단(田單)일지라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고을의 성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대부분 백성을 수용하여 거주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하고도 어찌 사람에게 책임지워 지키게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성지(城池)는 반드시 규제(規制)를 정하여 마을을 수용해야 된다. 《반계수록(磻溪隨錄)》
○ 무릇 성의 높이는 반드시 5장 이상이어야 하고, 성의 높이는 모두 타(垜)를 제하고 말한다. 주척(周尺)으로 10척(尺)이 1장이다. 타의 높이는 1장이며, 성저(城底)는 4장이다. 밖에 호(壕)를 설치하되 호의 넓이는 반드시 4장, 깊이는 2장 이상이라야 하며, 호안(壕岸)은 또한 반드시 전석(磚石)으로 쌓아야 된다. 무릇 성은 아래로부터 2장은 비스듬히 기대어 쌓고, 2장 이상은 곧게 올려 쌓는다. 치와 옹성과 우마장(牛馬墻)은 모두 《기효신서》의 법에 의한다. 《반계수록》

[주D-001]기효신서(紀效新書) : 명 나라 장수 척계광이 남방에서 왜병을 방어할 때에 체험한 전술을 기록한 책이다.
[주D-002]수양성……수만 호였고 : 당 나라 안록산(安祿山)의 난리 때에 장순이 수양성을 지켰는데, 장순이 성안에 사는 백성 수만 호의 명부를 한 번 보고 모두 외웠다 한다.
[주D-003]즉묵성 …… 준비하였으니 : 전국 시대에 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를 쳐서 점령하였는데, 전단(田單)이 즉묵성을 지키다가 밤 중에 소 1천여 마리를 내어 소의 몸에다 붉은 비단 옷을 입히고 뿔에는 칼을 잡아 매고 꼬리에는 갈대를 묶어 달고 기름을 쳐서 불을 질러 성 밖으로 몰아내어 제 나라 군중(軍中)으로 달리게 하니, 제 나라 군사가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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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關防) 진관(鎭管)ㆍ변진(邊鎭)ㆍ번곤(藩閫)의 통칭

상진(尙震)이, 늘 의주(義州)의 경계가 이(夷)와 한(漢)에 연달아 있으면서 방위할 지형이 트이고 넓은 것을 근심하였다. 옛날부터 중국에 난리가 있으면 우리나라도 반드시 그 해를 함께 받기 마련이었으니, 멀리는 위만(衛滿), 가깝게는 홍건적(紅巾賊)의 난리에서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이에 대비하여 일경(一境)에 거진(巨鎭) 서너 곳을 설치하여 방비하였으니, 인주(麟州)ㆍ포주(抱州)ㆍ의주(義州)가 그곳이다. 지금은 다만 의주만 두어 방어가 허약하고 또 성참(城塹)이 없어지기도 하였으니, 만약 철기(鐵騎)로 얼음을 타고 오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에서 장성(長城)을 설치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다. 상진이 전곶(箭串)에 성을 쌓은 것은 강변의 방위 때문에 시작한 것인데, 뜻은 있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스럽다. 《청강쇄설(淸江瑣說)
○ 관서(關西)에 세 길이 있는데 오직 박천(博川)ㆍ태천(泰川) 간의 한 길이 가장 중요한 관문이니, 대개 이 길이 강변 여러 진(鎭)의 안위에 관계된다. 만약 적이 이 길로 나올 줄 모르고 정주(定州)로부터 오고 아군(我軍)이 구성(龜城)ㆍ박천으로 해서 정강(定江)과 청천(淸川) 사이로 나가면 적의 귀로(歸路)는 끊기고 만다. 만일 희천(熙川) 길이 끊어지면 지세가 험하여 적병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이므로, 지금 적에 대비하자면 박천이 가장 긴요하고 정주 길이 그 다음이며 희천 길이 또 그 다음이다. 만약 정주와 구성에 각각 한 장수를 두어 군력을 장악하고 방어하게 하여 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취하면 한 도(道)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서애집(西厓集)》
○ “조정에서 본래 자산(慈山)ㆍ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감사가 방어할 신지(信地)로 삼았지만, 평양(平壤)은 바로 한 도의 요충인데 서로(西路)에서 산성에 전력하면서부터 평양을 버리고 다시 수비할 의논을 하지 않으니, 적이 직로(直路)로 들어올 때에는 실로 막을 수 없습니다. 평양성이 비록 넓고 크지만 만약 나누어 자모성(子母城)으로 만들고 높이를 10장에 이르게 하면 믿어 요해처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주(義州)는 나라의 문호(門戶)이니 방어사(防禦使)에게 산성을 지키게 해서는 안 되며, 창성(昌城)과 삭주(朔州)는 다 적이 오는 길이니, 청컨대, 두 비어사(備禦使)를 더 두어 창성ㆍ삭주ㆍ의주를 나누어 지키게 하여 다 함께 변방의 수비를 하게 하고, 부원수(副元帥)는 정주와 곽산 사이에 진주하게 하면 두 길을 절제하기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 홍명구(洪命耈)의 장계
○ “적이 의주의 큰 길로 해서 온다면 선천(宣川)의 좌현(左峴)과 가산(嘉山)의 효성령(曉星嶺) 및 안주(安州)와 평양이 관문 수비의 중요 지점이 되며, 적이 창성으로 해서 온다면 완항령(緩項嶺)의 당아성(當峩城)이 관문 수비의 지점이 될 것입니다. 해변산성(海邊山城) 중에 가장 긴요한 곳으로는 용강(龍岡)의 황룡(黃龍)과 용천(龍川)의 용골(龍骨)에 불과합니다. 황룡산성은 삼면이 험준하고 일면이 적을 맞게 되어 있으니 진실로 반드시 수비해야 할 곳이며, 세 고을 인민을 수용해 보호할 수 있으나 군량이 부족하니 의당 생각해야 합니다. 용골은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세이지만 물이 모자랄 뿐 아니라 또 좁으니 뒤로 물려 외성(外城)을 쌓으면 실로 편리할 것입니다. 성의 터전은 2천 3백 보(步)에 불과하고 산에 돌이 많으니 쌓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므로, 4백 석의 쌀과 수천 냥의 돈만 얻으면 변통되겠습니다.산읍(山邑)으로 말씀드리면, 창성의 완항령은 산이 막히지 않았고 골짜기도 넓으며 화전(火田)이 서로 이어져 있어 수목이 드무니, 그 험준함이 소문과는 다릅니다. 아마 천 명에 가까운 정병(精兵)이 아니면 지켜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구성(舊城)이 영(嶺)의 남쪽 큰 길 곁에 있으며 험준하기가 한 도에서 제일이니, 백성의 소원을 좇아 다시 수축하면 기껏 한 달 가량이 걸리는 역사일 뿐입니다. 관서(關西)의 방비 시설에서 가장 한스러운 것은 각 산성을 큰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하여 다만 숨고 피하려는 계책만 도모하면 적병에게 직로(直路)를 허용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평양ㆍ안주(安州) 두 성은 신속히 완공하여 관찰사와 병사(兵使)의 신지로 하여 철옹(鐵瓮)의 자성(慈城)과 서로 공격할 수 있는 형세를 취하면 위급할 때에 거의 의지가 될 것입니다. 효성령은 가산 군수(嘉山郡守)가 이미 겸영장(兼營將)이 되었으니 고개 위에 나무를 심고 돌을 모으는 것은 그만 두어서는 안 될 것 같고, 좌현(左峴) 곁으로 두어 줄기 통행로가 있으니 비록 이 고개를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요새로 삼아 험준한 곳에 군사를 잠복시키면 도음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천 부사(宣川府使)는 반드시 수군(水軍)만 전적으로 관할할 것이 아니라, 바다에 이상이 없는 날에 갑자기 적의 몇몇 기병이 동으로 쳐들어 오면 휘하 병력을 이끌고 좌현을 의지하여 지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 권성(權)의 장계
○ 옛날 제도에 강계(江界)의 만포 첨사(滿浦僉使)를 좌계원장(左繼援將)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영변의 철옹성을 들어가 구원하게 하였고, 창성의 창주 첨사(昌洲僉使)를 우계원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구원하게 하였다. 강 가에 잇단 상하 수백 리 땅에 비록 군사를 성대하게 증가시켜 수비하더라도 오히려 방어하기 어려운데 이제 그것을 덮어 버리고 작은 군사를 이끌고 두어 군데 험한 곳을 뒤에 두고 깊숙이 5, 6일 길이나 되는 곳에 들어와서 두 성을 구원하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니다.만포는 건주(建州)와 벽동(碧潼)ㆍ창주(昌洲) 사이에 이웃하여 곧 애양(靉陽)ㆍ관전(寬奠)과 상대해 있으며, 삭주는 당 나라 장수 곡승은(曲承恩)이 일찍이 주둔했던 곳이고, 구성은 고려 박서(朴犀)가 일찍이 지키던 곳이니, 이들은 모두 백전(百戰)의 요해처여서 마땅히 중병(重兵)을 주둔시켜야 할 지역이다. 지금은 두 진의 계원(繼援)이란 호칭을 바꾸어 만포를 강변 좌영으로 삼아 강계와 속오군(束伍軍)을 분할하여 그 군사에 첨가시키고, 위원(渭原)ㆍ이산(理山)두 고을 및 고산리(高山里) 이하 여러 진보(鎭堡)에서 이산 지경 이상에 있는 것은 모두 부속시켜 상강(上江)을 방위케 하고,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강변 우영으로 삼아 벽동ㆍ삭주 두 고을과 창주 이하 여러 진보에서 벽동 경계 이하에 있는 것은 모두 부속시켜 하강(下江)을 방위케 하고, 다른 진에 위급함이 있으면 각기 그 영장이 또한 휘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케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식암집(息庵集)》
○ “해서(海西)의 연안(延安)과 해주(海州)는 연변(沿邊) 지방의 요지이며, 평산(平山)과 봉산(鳳山)은 육로의 요지이니, 봉산을 지키지 못하면 해서를 잃고 평산을 지키지 못하면 송도(松都)를 잃습니다. 장연(長淵)과 풍천(豐川), 강령(康翎)과 옹진(瓮津)에 이르러서는 모두 마땅히 합해서 한 진으로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양성(梁誠)의 주문(奏文)
○ 황해도에서 형승(形勝)이 중요한 곳은 강음(江陰)이다. 지나간 해에 왜적이 서쪽으로 내려올 때, 흥의역(興義驛)과 강음에 진을 쳐서 형세로 삼았다. 대개 흥의는 바로 탈미곡(脫彌谷)과 오조천(吾助川) 두 길이 모이는 곳에 해당되고, 강음은 또 풍천ㆍ배천(白川)ㆍ연안ㆍ해주의 요충지이니 군사를 주둔시켜 방수(防守)하여 적군의 엄습을 막게 할 것이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병영을 연결시켜 멀리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한 도의 형세가 대개 이와 같다. 《서애집(西厓集)》
○ 해서의 형승은 황주(黃州)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제일 요해처로 삼으며, 동선령(洞仙嶺)ㆍ자비령(慈悲嶺)ㆍ저탄(猪灘)이 그 다음이다. 북로(北路)는 황주의 동리보(東里堡)를, 남로(南路)는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모두 제일 요해처로 삼으며, 강음의 자로포(慈老浦)가 그 다음이다. 이태수(李泰壽)
○ 숙종 무오년(1678)에 황해 감사 권수(權脩)가 관방(關防)의 이해에 대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두루 도내의 산성을 보니, 해주의 수양(首陽), 문화(文化)의 구월(九月), 재령(載寧)의 장수(長壽), 서흥(瑞興)의 대현(大峴)은 험하고 좁으면서 골짜기가 치우쳐 있으니, 바로 이른바 산중에 피난처이지 결코 적을 막을 요충지는 진실로 아닙니다. 오직 정방 산성은 오른쪽으로 동선(洞仙) 재[嶺]와 연해 있고 왼쪽으로 극성(棘城)의 길을 베고 있어 가장 형승의 편리함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서로 해서 본도로 통하는 길이 여섯 갈래가 있으니, 동선이 직로(直路)가 되고 남쪽으로 극성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자비령(慈悲嶺)ㆍ판적원(板籍院)ㆍ색장(塞墻)ㆍ한남(寒南) 등 좁은 목이 있습니다. 동선은 좁고 험준해서 만약 수천 명의 정병(精兵)을 그 안에 둔다면 적의 십만 군사일지라도 그 무리를 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과연 능히 이곳을 지킬 수 있다면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그 형세가 반드시 극성으로 향할 것입니다.정방산록(正方山麓)이 비스듬히 잇달아 평강(平岡)이 되고 남으로 달려 해창(海倉) 갯가로 접어 들어서 5리(里) 가량은 옛사람이 성을 쌓아 방어하던 곳입니다. 또 황주에서 동북으로 수십 리를 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니, 이어연(鯉魚淵)을 거쳐 자비령을 넘어 서흥에 이르는 것이 한 갈래이고, 판적원을 거쳐 수안(遂安)으로 가는 것이 또 한 갈래입니다. 자비령은 이제 수목이 막히고 험난해서 인마(人馬)가 다니기 어려우며, 판적원은 길 어귀가 조금 넓고 또 가로막은 영(嶺)이 없으니 반드시 보루를 쌓고 목책(木柵)을 세워 그 좁은 목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이 수십 리의 산골짜기 무인지경을 가다가 돌연 견고한 성을 만나면 감히 오래 지체하여 우러러보며 공격하지 못할 것은 명백합니다. 색장(塞墻)은 삼등(三登)과 상원(祥原) 경계에 있는데, 양쪽이 깎아지른 듯한 바위로 차 있어 30리를 반드시 바위굴 속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 지키기는 쉬워도 통과하기는 어렵습니다.한남(寒南)은 양덕(陽德) 경계에 있는데, 특히 위태하고 험난하여 약한 군사 수백 명으로써 지킨다면 비록 등애(鄧艾)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또한 쉽게 군사를 통과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밖에는 오직 설한령(薛罕嶺)을 넘어 함경 지경으로 들어갈 따름인데, 그 중에 극성은 지형이 평평하고 막힘이 없으며 넓어서 지키기 어려우니, 반드시 성을 높이 쌓고 참호(塹壕)를 깊이 하여 험준하게 만든 뒤라야 적이 배후로 나올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관서는 길이 매우 잡다해서 적이 여러 갈래로 올 수 있고, 금천(金川) 청석골[靑石谷]은 비록 천연적으로 험한 땅이라 일컬어지지만 북으로 돌아 동으로 가서 토산(兔山) 경계로 돌아 들어가면 큰 길, 작은 길을 모두 다 지켜낼 수 없습니다. 이제 관문을 지키고 적을 막을 계책을 세우기에는 동선령 일대보다 나은 곳이 없고, 두루 방비하기에 힘들여야 할 곳은 역시 극성 한 길보다 중한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 임술년(1682)에 산산(蒜山)ㆍ흑교(黑橋) 두 진(鎭)을 합하여 한 진으로 만들었으며, 극성을 옮겨 설치하여 승진시켜 산산 첨사(蒜山僉使)로 삼았으며, 황주(黃州)ㆍ봉산(鳳山)에 각각 밭 2백 결(結)을 주어 경비로 쓰게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송도(松都)의 청석동(靑石洞)을 가로로 끊어 성을 쌓아 용도(甬道)의 모양과 같이 하였는데, 길이는 그 지형을 따르고 넓이는 양변의 거리가 겨우 20명이 열을 지을 정도였다. 길을 질러 관(關)을 설치하기를 함곡관(函谷關)과 산해관(山海關)처럼 하면 공역(功役)이 많이 들지 않아도 외진 곳의 산성보다 나았다. 북로(北路)의 마운(摩雲)ㆍ마천(摩天)ㆍ철령(鐵嶺)과, 영동의 대관(大關)ㆍ추지(楸地)와, 영남의 조령(鳥嶺)ㆍ죽령(竹嶺)ㆍ추풍령(秋風嶺)ㆍ괘궁령(掛弓嶺)과, 호남의 팔량령(八良嶺)ㆍ만마동(萬馬洞)ㆍ대소노령(大小蘆嶺)과, 해서(海西)의 청석동ㆍ동선령 등지는 모두 청석동의 예(例)에 따라 용도를 쌓아야 될 것이다. 《관방집록(關防集錄)》
○ 송도는 옛 도읍지로서 하나의 큰 도회(都會)이다. 더구나 대흥(大興)은 양장(羊腸)과 효산관(崤山關)ㆍ함곡관과 같이 험준하며, 청석은 마릉(馬陵)ㆍ정경(井陘)과 같이 길목이 좁으니, 만일 2만 군사로 하나의 큰 진(鎭)을 만들어 서로 왼발과 오른발의 형세가 되게 한다면, 적이 반드시 감히 우족(右足)을 엿보지 못할 것이니 앉아서 적의 사명(死命)을 좌우할 수 있을 것이다. 신완(申琓)
○ 자비령(慈悲嶺)은 서흥부(瑞興府)의 서쪽으로 60리가 되는 곳에 있으니, 일명 파령(岊嶺)이라고 하며, 평양에서 서울로 통하는 옛길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원(元) 나라 때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하였으며, 파령책(岊嶺柵)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홍건적이(紅巾賊)이 침입해 오자 왕이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을 보내 목책을 세우고 방어하게 했다. 세조(世祖) 때에 호랑이의 해가 많고 또 중국 사신이 모두 극성(棘城)을 거쳐 다녔으므로 그 길이 드디어 폐지되었다. 이장용(李藏用)의 시(詩)에 이르기를,

자비령 길 구불구불 열 여덟 구비/慈悲嶺路十八折
한 칼 비껴들면 일만 군사 막겠구나/ 一劒橫當萬戈絶
오늘날 온 누리가 스스로 태평하니/如今四海自昇平
공연히 두견새만 지는 달에 울어대네/空有杜鵑啼落月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이천(伊川) 주음동(周音洞) 방장(防墻)은 고을 북쪽으로 1백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북으로 안변(安邊) 영풍현(永豐縣)과 통하고, 서쪽으로 대천(大川)에 임하여 동쪽으로 대산(大山)을 제압하여 한 사람이 목[關]을 막아 서면 1만 군사를 막을 수 있다. 옛사람이 담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는데,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여지승람》
○ 부산(釜山)이 기대어 형세로 삼을 곳은 다만 우수영(右水營)이 있을 뿐이다. 우수영은 마도(馬島)와 함께 향배(向背)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에 바람의 순역(順逆)이 역시 때에 따라 다르니, 적이 순풍을 타고 부산으로 향하면, 수영(水營)에서는 반대로 역풍이 된다. 또 더구나 몰운대(沒雲臺)와 해운대(海雲臺) 두 대 아래에는 큰 파도가 거칠게 일어 배가 다니기에 불편하며, 갑자기 위급을 당하면 서로 구원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지금 적의 계책이 엉성하고 산만하여 노략질하려는 데 뜻이 있어 산발적으로 출몰한다면 호남(湖南)이 염려할 만하게 되고, 만일 대군을 거느리고 큰길을 따라 침공한다면 공격하여 함락시키려는 데 뜻이 있는 만큼 영남이 적의 침입을 받는 문호가 될 것이니, 마땅히 수군대장(水軍大將)을 부산에 두고 남은 군사를 나누어 주어 견내(見乃) 어귀를 지키게 하고, 고금도(古今島)에 웅거하게 하면 바야흐로 장책(長策)이 될 것이다. 《백사집(白沙集)》
○ 지금 왜(倭)에 대한 방어책을 논하는 사람들이 한갓 육전(陸戰)만 알고 바다 가운데서 역격(逆擊)할 것은 생각하지 않으니, 만약 샹륙한다면 제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좌수사가 매양 3월에 부산에 입방(入防)하는데 이를 ‘풍화(風和)’ 라 한다. 8월 이후는 ‘풍고(風高)’ 라 하여 방비를 파한다. 통영(統營)에서 부산으로 가는 거리는 사흘 길인데, 적이 만약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린다면 이것이 우리 배에는 역풍이 된다. 칠포(七浦)가 전에는 부산에 관할되었는데 지금은 사포(四浦)가 수영으로 편입되어 부산이 날로 허술하게 되니, 만일 국가에 남쪽에 대한 걱정이 없다면 몰라도 만약 위급이 생긴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의논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통영의 선척(船隻)을 마땅히 모두 부산에서 입방하게 해야 한다.” 고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일본의 살마주(薩摩州)가 바로 우리 전라 지방과 맞닿아 있는데, 옛사람이 진을 설치하는 본의는 대장이 전라ㆍ경상 두 도 사이에 있으면서 하삼도(下三道) 수군을 겸하여 통솔하여 전라ㆍ충청에 변이 있으면 경상도를 독려하여 좌수군(左水軍)으로써 나아가 싸우게 하고, 경상좌도에 변이 있으면 전라도를 독려하여 우수군(右水君)으로써 나아가 싸우게 하려는 데 있었다.이제 모두 부산으로 옮긴다면 적이 다른 길로부터 나올 때에는 누가 막겠는가. 적이 동래(東萊)로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몰운대(沒雲臺)와 초량목[草梁項]을 경유할 것이고, 진주(晉州)ㆍ순천(順天)ㆍ흥양(興陽) 등지로 나오려면 반드시 가덕(加德) 앞 바다를 거쳐서 올 것이다. 가덕ㆍ다대포(多大浦)는 부산에서 하루 길이고 통영에서 이틀 길이니, 이제 계책을 세우기를, 통영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가덕에 입방하게 하여 만약 부산에 위급이 생기면 하룻만에 달려갈 수 있고, 만약 진주 이남에 적이 쳐들어 오면 바다 가운데서 공격할 수 있으니, 통사(統使)와 병사(兵使)가 서로 앞뒤, 아래 위로 도와 싸울 수 있는 형세를 만들어, 통사는 바다에서 싸우고 병사는 해안에서 싸워 적이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거의 조금은 괜찮을 것이다. 김세렴(金世濂)의 기(記)
○ 부산 이북에는 직로(直路)로 밀양부(密陽府)가 있고, 빙 돌아 동쪽 해변에 울산군(蔚山郡) 및 절도사의 진영(鎭營)이 있으며, 빙 돌아 서쪽으로는 김해부(金海府)가 있다. 이 세 길은 모두 요충지에 해당하니 꼭 지켜야 할 곳이다. 세 곳만 견고하게 지키면 적이 비록 다른 길로 흩어져 나오더라도 견고한 성이 뒤에 있고 강한 군사가 앞에 있어서, 견제되어 감히 내지(內地)를 가벼이 범하지 못할 것이다. 《서애집》
○ 의령현(宜寧縣)은 낙동강(洛東江) 하류에 있으며, 한 갈래는 진주의 단성(丹城)으로 이르는데 이름이 ‘거름강[岐江]’ 이고, 그 위로 15리에 정암나루[鼎津]가 있는데 제일 요충지이다. 경상ㆍ전라ㆍ충청의 접경에 이르러서는 구례(求禮)의 두치진(豆耻津), 함양(咸陽)의 팔량현(八良峴), 안음(安陰)의 육십고개[六十峴], 지례(知禮)의 우두현(牛頭峴), 김산(金山)의 추풍령(秋風嶺), 문경(聞慶)의 조령(鳥嶺), 선산(善山)의 낙동강(洛東江), 풍기(豐其)의 죽령(竹嶺)은 가장 산천이 험한 곳이니 웅거하여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방비할 줄을 모른다면 옆으로 난 작은 길들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서애집》
○ “죽령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어 백이(百二)의 험함이 있으니 참으로 나라의 문호입니다. 지금 고개 아래의 몇몇 고을이 땅이 좁고 백성들이 피폐하여 그 힘으로는 도저히 요충을 지키지 못하니, 마땅히 순흥부(順興府)를 복구하여 풍기를 예속시키고, 단양(丹陽)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ㆍ청풍(淸風) 네 고을을 합하여 대진(大鎭)으로 삼아서 끼고 지키게 하면 영로(嶺路)를 굳게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유운룡(柳蕓龍)의 상소,《서애집》

[주D-001]등애(鄧艾) : 삼국 시대에 진(晉) 나라 장수 등애(鄧艾)가 촉(蜀) 나라를 칠 때 험한 산을 넘으면서 군사들과 함께 몸에 담요를 감고 벼랑으로 굴러 내려가 들어갔다.
[주D-002]백이(百二) : 진(秦) 나라 함곡관(函谷關)은 험하여 군사 두 사람이 지키면 백 사람을 당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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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鎭)ㆍ보(堡) 폐지된 진ㆍ보를 붙임

경기도 한성부(漢城府) 장한진(長漢鎭)한강 상류에 있다. 신라 때의 중진(重鎭) 후에 고구려한테 점령당했다.
○ 인천 영종포영(永宗浦營) 옛날에는 남양(南陽)에 속하였으며, 부(府)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있었다. 첨사(僉使) 지금은 본부(本府)에 있다
화량진(花梁鎭)옛날에는 남양에 속하였으며, 부(府)의 남쪽 30리에 있고, 첨사 영(僉使營)이다. 첨사 지금은 본부에 있다
덕적진(德積鎭)덕적도(德積島)는 옛날에는 남양에 속하였는데, 성종 17년(1486)에 인천에 이속시켰다. 첨사 부의 서쪽 1백 20리에 있다. 목장(牧場)이 있다.
○ 강화(江華) 주문도(注文島)부의 서쪽에 있는 매도(煤島)의 서쪽 7리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
월곶진(月串鎭)옛날에는 교동(喬桐)에 속하였으며, 현(縣)의 남쪽 16리에 있다. 첨사 지금은 본부에 있다
여현진(礪峴鎭)빠짐 첨사
제물량영(濟物梁營) 옛날에는 인천에 속하였으며, 부의 서쪽 19리에 있다. 만호(萬戶)
인화보(寅化堡)《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인화석진(寅化石鎭)이라고 하였는데, 부의 서쪽 33리에 있다. 만호
용진(龍津)빠짐 만호
덕진보(德鎭堡)빠짐 만호
정포폐영(井浦廢營) 부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옛날에 만호가 있었다.
○ 통진(通津) 덕포진(德峯鎭)빠짐 첨사
○ 교동(喬桐) 장봉도(長峯島)본래 강화에 속하였고, 진강현(鎭江縣)에 있으며, 주위 15리쯤에 목장이 있다. 만호
○ 안산(安山) 초지량영(草芝梁營) 군(郡)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만호
○ 파주(坡州) 임진도(臨津島)부의 서쪽 17리에 있다.
충청도 태안(泰安) 안흥진(安興鎭)군(郡)의 서쪽 34리에 있다. 옛날에는 안흥량수(安興梁戍)라 불렀으며, 소근 첨사(所斤僉使)가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였다. 옛 이름은 난행량(難行梁)이라 하였는데, 바닷물이 험하여 세미선(稅米船)이 이곳에 이르러 여러 번 뒤집혔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첨사
소근포진(所斤浦鎭)후근이포(朽斤伊浦)라고도 하는데, 군의 서쪽 33리에 있다. 첨사 중종 갑술년(1514)에 석성(石城)을 쌓았다.
○ 서산(瑞山) 평신진(平薪鎭)빠짐 첨사
파지도영(波知島營) 군의 북쪽 33리에 있는데, 중종 병자년(1516)에 석성(石城)을 쌓았다.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고파지도수(古波知島戍) 군의 북쪽 바다 가운데의 파지도에 있는데, 만호가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
요아량수(要兒梁戍) 군의 남쪽 1백 43리에 있는데, 수사가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
○ 비인(庇仁) 마량진(馬梁鎭)옛날에는 남포(藍浦)에 속하였는데, 현(縣)의 서쪽 33리에 있다. 중종 경자년(1540)에 성을 쌓았다. 첨사 지금은 본현(本縣)에 있다.
도두음곶수(都豆音串戍)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우도첨절사(右道僉節使)가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
○ 서천(舒川) 서천포영(舒川浦營) 군의 남쪽 26리에 있는데, 중종 갑술년(1514)에 석성(石城)을 쌓았다. 고려 때에는 장암진(長岩鎭)이라 하였다. 만호
○ 당진(唐津) 당진포 폐영(唐津浦廢營) 현의 서쪽 35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중종 갑술년에 석성을 쌓았다.
난지도수(難知島戍) 현의 북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당진포(唐津浦)의 만호가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
경상도 경주(慶州) 감포 폐영(甘浦廢營) 부(府)의 동쪽 72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 울산(蔚山) 서생포진(西生浦鎭)군의 남쪽 53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 영(萬戶營)이었다. 첨사
염포 폐영(鹽浦廢營) 군의 동쪽 23리에 있는데 석성이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 옛날에는 왜(倭)가 항상 거주하고 있었는데, 정덕(正德) 경오년(1510)에 제포(薺浦)의 변란을 듣고 모두 대도(大島)로 들어갔다.
포항 별장(浦項別將) 빠짐
유포석보(柳浦石堡)세조 때에 쌓았고, 절도사가 군사를 나누어 지켰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 동래(東萊) 부산포진(釜山浦鎭)현의 남쪽 21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첨사 동평현(東平縣)에 있는데, 산의 형세가 마치 솥 모양과 같다.
다대포진(多大浦鎭)현의 남쪽 44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 영이었다. 첨사
해운포영(海雲浦營) 현의 동쪽 9리에 있는데, 정덕 갑술년(1514)에 석성을 쌓았으며, 만호 1명이 있다.
축포보(丑浦堡)빠짐 만호
개운포보(開雲浦堡)빠짐 만호
서평포보(西平浦堡)빠짐 만호
포이포보(包伊浦堡)옛날에는 장기(長鬐)에 속하였으며, 현의 북쪽 70리에 있다. 만호
축산포보(丑山浦堡)옛날에는 영해(寧海)에 속하였으며, 부의 동쪽 14리에 있다. 만호
○ 기장(機張) 두모포영(豆毛浦營) 현의 동쪽 7리에 있는데, 정덕 경오년(1510)에 석성을 쌓았다. 만호
○ 영덕(盈德) 오포 폐영(烏浦廢營) 현의 남쪽 17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 진주(晉州) 적량진(赤梁鎭)주(州)의 남쪽 13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첨사
삼천진(三千鎭)주의 남쪽 74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지금은 고성(固城)에 속해 있다.
구라량 폐영(仇羅梁廢營) 각산(角山)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지금은 고성 사량(固城蛇梁)으로 옮겼다.
○ 남해(南海) 미조항진(彌助項鎭)현의 동쪽 87리에 있는데, 성화(成化) 병오년(1486)에 진을 설치하였다가 후에 폐하였다. 가정(嘉靖) 임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는데, 석성이다. 첨사
평산포보(平山浦堡)현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상주포영(尙州浦營) 현의 남쪽 60리에 있는데, 석축(石築)이다. 권관(權管)
곡포 폐보(曲浦廢堡) 현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가정 임오년(1522)에 폐하여 우고개보(牛古介堡)로 옮겼으며, 권관을 두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성고개 폐보(城古介廢堡) 현의 남쪽 22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권관을 두었다.
우고개 폐보(牛古介廢堡) 현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권관을 두었다.
○ 김해(金海) 금단곶 폐포(金丹串廢堡) 부의 남쪽 53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권관을 두었다.
신문 별장(新門別將)
청천 별장(晴川別將)
○ 거제(巨濟) 조라포보(助羅浦堡)빠짐 만호
지세포보(知世浦堡)현의 동쪽 29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일본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람이 이곳에서 바람을 기다렸다.
영등포보(永登浦堡)현의 북쪽 49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가배량보(加背梁堡)옛날에는 고성에 속하였으며, 권관을 두었다. 만호 옛날에는 도만호(都萬戶)가 있었는데, 뒤에 옥포(玉浦)로 옮겼다. 성종 2년에 다시 석성을 쌓았다.
옥포보(玉浦堡)현의 동쪽 19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소비포보(所非浦堡)빠짐 권관
율포보(栗浦堡)현의 동쪽 33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권관
○ 고성(固城) 사량영(蛇梁營) 현의 남쪽 바다 속의 물길로 70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만호
당포보(唐浦堡)현의 남쪽 67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삼천포보(三千浦堡)옛날에는 진주(晉州)에 속하였는데, 남쪽 74리에 있었으며 석성이다. 권관
장목포 별장(長木浦別將)
남촌 별장(南村別將)
구소비포 별장(舊所非浦別將) 구소을비포수(舊所乙非浦戍)라고도 하는데, 현의 서쪽 47리에 있으며, 석성이 있다. 권관을 두었다.
섬진 별장(蟾津別將)
좌신포(佐申浦)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혜질이곶(惠叱伊串)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모두 척후병(斥候兵)을 두어 순라(巡邏)하는 곳이다.
○ 웅천(熊川) 가덕진(加德鎭)가덕도(加德島)는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둘레가 75리이다. 첨사
천성보(天成堡)빠짐 만호
제포보(薺浦堡)옛날에는 첨사 진(僉使鎭)이었으며,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안골포영(安骨浦營) 현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풍덕포 별장(豐德浦別將)
○ 칠원(漆原) 구산진(龜山鎭)구산현(龜山縣)은 칠원현의 동남쪽 41리에 있고, 구산포는 구산의 동남쪽 3리에 있다. 첨사
전라도 부안(扶安) 위도진(蝟島鎭)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다. 첨사
검모포영(黔毛浦營)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만호
격포 별장(格浦別將)
○ 옥구(沃溝) 고군산진(古群山鎭)옛날에는 군산포영(群山浦營)이었다. 북쪽 22리에 있으며, 만호가 있다. 첨사
군산포진(群山浦鎭)빠짐 첨사
○ 영암(靈巖) 어란포진(於蘭浦鎭)빠짐 만호
이진보(梨津堡)빠짐 만호
달량 폐영(達梁廢營) 군의 남쪽 90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정덕(正德) 임오년(1522)에 폐하여 가리포(加里浦)로 옮겼다.
○ 영광(靈光) 임자도진(荏子島鎭)빠짐 첨사
법성포진(法聖浦鎭)군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정덕 갑술년(1514)에 석성을 쌓았다. 첨사
다경포보(多慶浦堡)군의 남쪽 1백 50리에 있는데, 정덕 을해년(1515)에 석성을 쌓았다. 만호
○ 함평(咸平) 임치진(臨淄鎭)현의 서쪽 77리에 있는데, 영광(靈光)과 임치도(臨淄島)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 첨사
○ 무안(務安) 목포영(木浦營) 현의 남쪽 68리에 있으며, 나주(羅州)ㆍ목포(木浦)가 이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곳을 목포라고 통칭한다. 만호
○ 장흥(長興) 회령포영(會寧浦營) 부의 남쪽 72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 진도(珍島) 금갑도영(金甲島營)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만호
남도포영(南桃浦營) 군의 서쪽 47리에 있다. 만호
○ 강진(康津) 가리포진(加里浦鎭)완도(莞島)라고도 하는데, 강진현의 남쪽 60리의 바다 가운데 있다. 첨사
마도영(馬島營) 현의 남쪽 64리에 있는데, 옛날의 탐진(耽津)이다. 만호
고금도진(古今島鎭)빠짐 첨사
신지도보(薪知島堡)빠짐 만호
청해진(淸海鎭)완도(莞島)에 있는데, 신라 때에 청해진 대사(大使)를 두었었다.
○ 해남(海南) 어란도 폐영(於蘭島廢營) 현의 남쪽 34리에 있는데, 만호가 있었다.
○ 남원(南原) 석주진(石柱鎭)유곡(楡谷)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남북으로 모두 큰 산이 있는데 그 가운데로 큰 강이 흐른다. 고려 말에 진을 설치하여 왜(倭)를 막았다.
○ 순천(順天) 방답진(防踏鎭)부의 동쪽 170리에 있다. 첨사
고돌산 별장(古突山別將) 옛날 돌산포영(突山浦營)인데, 순천부의 동쪽 79리에 있으며 만호가 있었는데, 중종조에 폐하여 권관을 두었다.
여수석보(麗水石堡)
○ 구례(求禮) 석주진(石柱鎭)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또 남원을 보라.
○ 흥양(興陽) 사도진(蛇島鎭)현의 동쪽 43리에 있다. 첨사
여도영(呂島營) 현의 북쪽 59리에 있다. 만호
녹도영(鹿島營) 현의 서쪽 45리에 있다. 만호
발포영(鉢浦營)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만호
나로도보(羅老島堡)빠짐 만호
율현구보(栗峴舊堡)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권관을 두었다.
○ 나주(羅州) 지도보(智島堡)빠짐 만호
흑산도 별장(黑山島別將) 물길로 9백 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흑산현(黑山縣)의 유지(遺址)라고 일컬어졌다.
○ 정의(旌義) 수산보(水産堡)옛 대수방호소(大水防護所)인데,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만호
○ 대정(大靜) 차귀보(遮歸堡)현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옛 방호소(防護所)이다. 만호
○ 황해도 황주(黃海道黃州) 산산진(蒜山鎭)
고극성진(古棘城鎭)주(州)의 남쪽 25리에 있다.
○ 서흥(瑞興) 선적진(善積鎭)빠짐 첨사
소이보(所已堡)빠짐 만호
○ 봉산(鳳山) 동리진(東里鎭)빠짐 첨사
○ 수안(遂安) 방원진(防垣鎭)군의 북쪽 24리에 있는데, 동서로 돌로 쌓은 행성(行城)이 있으며, 본군과 우봉(牛峯)ㆍ신계(新溪)ㆍ서흥(瑞興)의 네 고을이 윤번으로 지키었다.
문산보(文山堡)빠짐 만호
위라보(位羅堡)옛날의 위라역(位羅驛)인데,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만호
○ 곡산(谷山) 문성진(文城鎭)빠짐 첨사
말귀원 폐보(末龜院廢堡)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하남산(下南山) 거비천 폐보(居比遷廢堡) 군의 남쪽 33리에 있다.
다호천 폐보(多呼遷廢堡) 군의 남북쪽 45리에 있다.
○ 장련(長連) 대진관(大津關)현의 북쪽 10리에 있는데, 가정 계미년(1523)에 설치하였다. 본도(本道)사람으로 권관을 삼아 수군(水軍)을 주어 상선(商船)이 중국과 사통(私通)하는 것을 금하였다.
○ 해주(海州) 용매진(龍媒鎭)주의 동쪽 60리에 있는데, 옛날의 용매량영(龍媒梁營)이며, 만호가 있었다. 첨사
○ 풍천(豐川) 허사포진(許沙浦鎭)부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 영이었다. 첨사
초도진(椒島鎭)부의 북쪽 40리의 바다 가운데 있다. 첨사
비파곶(琵琶串)부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가정 계미년에 설치하였다. 허사포 만호(許沙浦萬戶)가 이곳을 관할하여 상선이 중국과 잠통(潛通)하는 것을 금하였다.
○ 옹진(瓮津) 소강진(所江津)현의 서쪽 60리에 있는데, 본래는 소강진(蘇江鎭)이라고 하였다.
관량수(館梁戍) 현의 서쪽 8리에 있는데, 옛날에 수어군(戍禦軍)이 있었다.
○ 은율(殷栗) 광암량 폐영(廣巖梁廢營) 현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옛날에 만호가 있었다.
○ 강음(江陰) 탈미곡군영(脫彌谷軍營) 현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금교(金郊)에서 흥의(興義)에 이르기까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도적이 모여서 대낮에도 살인과 약탈을 하므로 나그네가 통과하지 못하자 정덕 경오년에 군영을 설치하여 지켰다.
○ 금천(金川) 백치진(白峙鎭)빠짐 첨사
○ 강령(康翎) 등산진(登山鎭)등산곶(登山串)은 현의 남쪽 60리에 있는데, 백사정(白沙汀)이다. 첨사
갈포폐영(茄乙浦廢營)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옛날에 만호가 있었다.
○ 장연(長淵) 백령진(白翎鎭)백령도는 현의 남쪽 30리 바다 가운데에 있는 대청도(大靑島)의 서쪽에 있는데, 본래는 고구려의 곡도(鵠道)이다. 고려 때에 백령진이라 칭하고 진장(鎭將)을 설치하였다. 공민왕 때에 물길이 험난하여 진장이 육지로 나와서 문화(文化) 동촌(東村) 가을산(加乙山)에 살았다. 얼마 있다가 땅이 좁아서 진장을 폐하고 문화(文化)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에 영강(永康)과 백령(白翎)을 합하여 강령현(康翎縣)이라 하였다. 본도(本島)는 장연현에 속해 있다. 첨사
오차포진(吾叉浦鎭)현의 서쪽 45리에 있는데, 옛날에 만호가 있었다. 첨사
조니포진(助泥浦鎭)현의 서쪽 60리에 있다. 만호
대곶량(大串梁)현의 남쪽 63리에 있는데, 오차포(吾叉浦)의 옛날 영이다.
웅침리 목책(熊沈里木柵)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아랑포 폐영(阿郞浦廢營) 현의 서쪽 45리에 있는데, 옛날에 만호가 있었다.
강원도 강릉(江陵) 안인포 폐영(安仁浦廢營) 부의 동남쪽 25리에 있는데, 옛날에 만호가 있었다.
연곡포(連谷浦)ㆍ오진(梧津)ㆍ주문진(注文津)이상의 삼포(三浦)에는 모두 척후병(斥候兵)이 있었다.
○ 삼척(三陟) 삼척포 폐진(三陟浦廢鎭) 부의 동쪽 8리에 있는데, 옛날에 첨사가 있었다.
○ 양양(襄陽) 대포영(大浦營) 부의 동쪽 12리에 있는데, 성종조에 안인포(安仁浦)로부터 이곳으로 옮겼고 만호가 있다. 정덕 경진년(1520)에 석성을 쌓았다.
○ 평해(平海) 월송포영(越松浦營)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만호
구며포(九㫆浦)ㆍ정명포(正明浦)ㆍ후리포(厚里浦)이상 삼포(三浦)에는 척후병이 있었다.
○ 고성(高城) 고성포 폐영(高城浦廢營) 군의 동쪽 7리에 있는데, 만호가 있다.
○ 울진(蔚珍) 울진포 폐영(蔚珍浦廢營) 옛날에 만호가 있었고, 정덕 임오년(1522)에 석축(石築)을 쌓았다.
함경도 함흥(咸興) 선덕진(宣德鎭)부의 남쪽 45리에 있는데, 성터가 있다.
장진 별장(長津別將) 지금은 장진부(長津府)로 승격하였다.
중령 별장(中嶺別將)
부전령 별장(赴戰嶺別將) 부의 북쪽 1백 40리에 있다.
○ 영흥(永興) 평주진(平州鎭)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정변진(靜邊鎭)부의 동쪽 60리에 있으며, 석성의 옛터가 있다.
영인진(寧仁鎭)부의 동쪽 61리에 있는데, 청원(淸源)이라고 한다. 태조 6년(1397)에 성을 쌓았다.
장평진(長平鎭)부의 동쪽 45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고질달(古叱達)이라고 불렀다.
요덕진(耀德鎭)부의 서쪽 1백 20리에 있는데, 본래는 현덕진(縣德鎭)이다.
○ 정평(定平) 안도포 폐영(安道浦廢營) 부의 서쪽 52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으며, 중종조에 폐하였다.
고원흥진(古元興鎭)부의 남쪽 50리에 있는데, 토성(土城)이다.
○ 고원(高原) 애수진(隘守鎭)군의 서쪽 7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이병(梨柄)이라고 불렀다.
○ 안변(安邊) 낭성포 폐영(浪城浦廢營) 군의 북쪽 25리에 있는데, 옛날에 만호가 있었다. 중종 4년(1509)에 폐하였다.
염융수(厭戎戍) 빠짐
향등수(香燈戍)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철원수(鐵原戍) 부의 동쪽 파천사(派川社)에 있다.
○ 덕원(德源) 진명포(鎭溟浦)고려 때에 병선(兵船)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낭성포(浪城浦)로 옮겼다.
○ 문천(文川) 조지포(漕至浦)군의 북쪽 50리의 영흥 고원(永興高原)에 있는데, 선졸(船卒)들이 지켰다. 성종조에 폐하였다.
○ 단천(端川) 이동보(梨洞堡)군의 북쪽 61리에 있다. 만호
호타보(豪打堡)옛날에는 호타리 봉수(胡打里烽燧)라고 불렀는데, 단천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만호
쌍청보(雙靑堡)군의 서쪽 1백 6리에 있었고, 석축이었는데 지금은 구보(舊堡)에서 서쪽으로 90리에 있고 석축이다. 권관 연산군 임술년(1502)에 설치하였다가 바로 폐하였다.
황토기이보(黃土岐伊堡)황토령(黃土嶺)이라고도 하며, 군의 서쪽 2백 50리에 있는데, 갑산(甲山)과 경계를 이룬다. 권관
오을족 폐보(吾乙足廢堡) 군의 북쪽 1백 5리에 있었는데, 석축이었다. 또 구보(舊堡)에서 북쪽으로 60리 옮겨 석축을 쌓았다. 중종 때에 만호를 두었다가 곧 폐하였다.
증산 폐보(甑山廢堡)군의 서쪽 1백 10리에 있는데, 옛날에 권관을 두었다. 중종조 때에 설치하였다.
○ 갑산(甲山) 혜산진(惠山鎭)부의 북쪽 9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첨사
운총보(雲寵堡)부의 북쪽 □십 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진동보(鎭東堡)부의 동쪽 12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권관을 두었다. 만호
동인보(同仁堡)부의 북쪽 36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중종 7년(1512)에 권관을 두었다. 권관
후주진(厚州鎭)빠짐 첨사(僉使)
가오정 폐보(加吾丁廢堡) 가정천(加丁川)에 있는데, 옛날에는 벽돌로 쌓은 성이었다. 가정천은 부의 북쪽 2리에 있는데, 혜산진의 동쪽으로 흐른다. 세조조 때에 폐하고 혜산진의 동쪽으로 옮겼다.
영파 폐보(寧坡廢堡)세종조 때에 폐하였다. 세조조 때에 설치한 운총보의 옛터로 오랑캐 땅에 있다.
진지달 폐보(榛遲達廢堡) 벽돌로 쌓은 성이었다. 세조조 때에 폐하여 혜산진에 합쳤는데, 오랑캐 땅에 있다.
안정보(安定堡)세조조 때에 폐하였다.
유원보(柔遠堡)세조조 때에 폐하였는데, 옛터는 오랑캐 땅에 있다.
○ 삼수(三水) 별해진(別害鎭)군의 남쪽 4백 30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첨사
갈파지진(茄乙波知鎭)옛날의 갈파지보로 권관이 있었다. 군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첨사
어면보(魚面堡)군의 서쪽 □리의 어면강(魚面江) 변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인차외보(仁遮外堡)군의 동쪽 8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갑산(甲山)에 예속되었는데, 연산조 때에 삼수로 옮겨 예속시켰다.ㆍ만호
신방구비 농보(神方仇非農堡) 군의 남쪽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나난보(羅暖堡)군의 동쪽 42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예전에는 상나란(上那闌)ㆍ하나란(下那闌)이라 불렀다.
소농보(小農堡)군의 동쪽 22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자작구비보(自作仇非堡)빠짐 권관
묘파보(廟坡堡)빠짐 권관
구 갈파지보(舊加乙波知堡) 군의 서쪽 14리에 있는데, 벽돌로 성을 쌓았다. 권관
강구보(江口堡)빠짐 권관
감파농 폐보(甘坡農廢堡) 군의 남쪽 1백 14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전원경 폐보(田元京廢堡) 빠짐
○ 경성(鏡城) 어유간진(魚游澗鎭)부의 북쪽 35리에 있는데, 예전에는 만호 보였다. 석축이다. 첨사
주을온보(朱乙溫堡)부의 남쪽 32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삼삼파보(森森坡堡)부의 남쪽 1백 2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보로지보(甫老知堡)예전에는 목책(木柵)을 세우고 어유간진의 군사를 나누어 이곳을 지켰다. 부의 남쪽 43리에 있다. 권관
보화보(寶化堡)옛날에는 보화(甫化)라고도 하였다. 부의 남쪽 54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옛날에는 보화덕책(甫化德柵)이 있어서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
오촌보(吾寸堡)부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근동 폐보(芹洞廢堡) 부의 북쪽 67리에 있는데, 토축(土築)이다.
진파 폐보(榛坡廢堡) 부의 서쪽 1백 10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보이덕 폐보(甫伊德廢堡) 부의 서쪽 1백 20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증산(甑山)부의 남쪽 87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 길주(吉州) 성진진(城津鎭)빠짐 첨사
서북진(西北鎭)현의 서쪽 67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 보였으며. 석축이다. 첨사
사하북 폐진(斜下北廢鎭) 현의 서쪽 45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성종조 때에 만호를 폐하고 권관을 두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덕만동소보(德萬洞小堡)현의 서쪽 91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이동소보(梨洞小堡)현의 북쪽 62리에 있는데, 판성(板城)이다.
장군파보(將軍坡堡)주의 북쪽 66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중종조 때에 이동보(梨洞堡)를 폐하고 여기에다 만호를 두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고선화진(古宣化鎭)빠짐
○ 명천(明川) 사료동 폐보(斜了洞廢堡) 현의 북쪽 32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중종조 때에 만호를 폐하고 권관을 두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대사동보(大寺洞堡)현의 서쪽 29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재덕보(在德堡)빠짐 만호
소사정동보(小斜丁洞堡)현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벽돌로 쌓은 성이다.
○ 경원(慶源) 훈융진(訓戎鎭)부의 북쪽 28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첨사
건원보(乾原堡)부의 남쪽 4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권관
안원보(安原堡)부의 동쪽 29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예전에는 폐했었다. 권관
고아산 폐보(古阿山廢堡) 부의 동쪽 59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진북 폐보(鎭北廢堡) 부의 동쪽 14리에 있는데, 토축(土築)이다.
건원 폐보(乾元廢堡) 부의 동쪽 4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권관이 있었다.
오농초 폐보(吾弄草廢堡) 부의 남쪽 45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유신 폐보(有信廢堡) 부의 남쪽 87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 회령(會寧) 고령진(高嶺鎭)부의 북쪽 21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첨사
볼하진(甫乙下鎭)부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첨사 정덕 기사년(1509)에 설치하였다.
고풍산보(古豐山堡)부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공험진(公嶮鎭)빠짐
원산 폐보(圓山廢堡) 부의 서쪽 3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영북 폐보(寧北廢堡)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옹희 폐보(雍熙廢堡) 부의 북쪽 31리에 있다.
이풍 폐보(利豐廢堡) 부의 남쪽 □리에 있다.
○ 종성(鍾城) 동관진(潼關鎭)부의 북쪽 18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첨사
풍산보(豐山堡)빠짐 만호
방원보(防垣堡)부의 남쪽 22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세천 폐보(細川廢堡) 부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동풍 폐보(東豐廢堡) 부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서풍 폐보(西豐廢堡) 부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응곡 폐보(鷹谷廢堡) 부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 온성(穩城) 유원진(柔遠鎭)부의 서쪽 18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첨사
미전진(美錢鎭)부의 동쪽 26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첨사 성종조 때에 설치하였다.
영달보(永達堡)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영건(永建)이라고 불렀다. 만호
황척파보(黃拓坡堡)부의 동쪽 27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가정 계미년(1523)에 설치하였다.
주원 폐보(周原廢堡) 부의 동쪽 3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시건 폐보(時建廢堡) 부의 서쪽 23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낙토 폐보(樂土廢堡) 부의 남쪽 45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풍천 폐보(豐川廢堡) 부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폐하여 미전(美錢)으로 옮겼다.
고영건보(古永建堡)부의 남쪽 16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 경흥(慶興) 무이보(撫夷堡)부의 북쪽 26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아오지보(阿吾地堡)부의 서쪽 37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성종조 때에 경원(慶原) 아오지보를 폐하고 여기에다 이설(移設)하면서 옛 칭호를 그대로 썼다.
조산포영(造山浦營) 부의 동쪽 3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아산보(阿山堡)옛날에는 경원에 속하였었는데, 석축이다. 만호
서수라보(西水羅堡)부의 남쪽 57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서수라(西修羅)라고 불렀다. 권관
녹둔도 농보(鹿屯島農堡) 사흠마도(沙欠磨島)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56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회동 폐보(檜洞廢堡)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진변 폐보(鎭邊廢堡) 서수라곶(西水羅串)에 있다.
○ 부령(富寧) 폐무산보(廢茂山堡)옛날에는 무산보(茂山堡)라고도 불렀는데, 석축이다.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만호 옛날에는 부의 북쪽 18리에 있었는데, 토지가 자갈이 많고 또 적의 국경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정덕 기사년(1509)에 이설(移設)하였다.
양영만동보(梁永萬洞堡)부의 북쪽 5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옥련 폐보(玉蓮廢堡) 부의 남쪽 6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평안도 삼화(三和) 광량진(廣梁鎭)현의 서쪽 52리에 있다. 첨사
○ 안주(安州) 노강진(老江鎭)주의 서남쪽 65리에 있는데, 청천강 어귀에 있다. 첨사
안융진(安戎鎭)안융을 혹은 안인(安仁)이라고도 하며, 주의 서쪽 65리의 해변에 있는데, 토축이다.
○ 영유(永柔) 덕지동 별장(德池洞別將)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유원진(柔遠鎭)현의 북쪽 35리에 있는데, 본래는 고려 때의 평로진(平虜鎭)이다.
○ 의주(義州) 인산진(麟山鎭)주의 서남쪽 38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첨사 바로 옛날의 인주(麟州)인데, 고려의 영제현(靈蹄縣)이다.
청성진(淸城鎭)빠짐 첨사
옥강보(玉江堡)주의 동북쪽 50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옛날에는 권관이 있었다.
양하보(楊下堡)빠짐 만호
청수보(靑水堡)주의 동북쪽 9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수구보(水口堡)주의 동쪽 28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방산보(方山堡)주의 동북쪽 61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첨사 진영(僉使鎭營)이었다.
건천보(乾川堡)빠짐
소곶 폐보(所串廢堡) 주의 동남쪽 35리에 있는데, 보통 대모성(大母城)이라고 부른다. 겨울이면 조방장(助防將)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봄과 여름에는 파한다.
고미성보(姑未城堡)주의 동북쪽 87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권관을 두었다.
광평보(廣平堡)주의 동쪽 1백 1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권관을 두었다.
송산보(松山堡)주의 동쪽 12리에 있는데, 벽돌로 성을 쌓았다. 옛날에는 권관이 있었는데, 가정 병술년(1526)에 보내(堡內)의 실화(失火)로 인하여 민가와 성이 다 타버렸으므로 병사(兵使) 정윤겸(鄭允謙)이 목책(木柵)으로 개설하였다..
성고개 폐보(城古介廢堡) 주의 동쪽 60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겨울이면 병사가 조방장(助防將)을 보내 지켰다. 위의 네 보와 옥강보(玉江堡)는 홍치(弘治) 경신년(1500)에 국경에 소란이 있었으므로 이극균(李克均)을 보내 설치하였다.
정주진(靜州鎭)주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세종조 때에 석성을 쌓았다.
위원진(威遠鎭)주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흥화진(興化鎭)바로 옛날의 영주(靈州)인데, 주의 남쪽 55리에 있다.
영덕진(寧德鎭)주의 동남쪽 40리에 있는데, 토성이다.
영삭진(寧朔鎭)주의 동쪽 1백 20리에 있다.
정융진(定戎鎭)주의 동쪽 80리에 있다.
고동보(庫同堡)빠짐
삼기보(三岐堡)주의 북쪽에 있다.
검동보(黔同堡)바로 검동도(黔同島)인데, 주의 서쪽 15리에 있다.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이 통과하는 길이다.
암림보(暗林堡)빠짐
미륵당보(彌勒堂堡)주의 서남쪽 40리에 있다.
○ 철산(鐵山) 선사포진(宣沙浦鎭)옛날에는 갑산(甲山)에 속하였다. 첨사
영삭 폐영(寧朔廢營) 군의 동쪽 4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만호가 있었다.
○ 용천(龍川) 미곶진(彌串鎭)빠짐 첨사
○ 창성(昌城) 창주진(昌洲鎭)부의 북쪽 4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첨사
시채진(恃寨鎭)빠짐 첨사
묘동보(廟東堡)빠짐 권관
갑암천보(甲巖川堡)부의 남쪽 1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운두리산보(雲頭里山堡)부의 서쪽 13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태천(泰川)과 운산(雲山)의 경계이다. 권관
어정탄보(於汀灘堡)부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압록강의 지류인데 옛날에는 어정(於丁)이라고 하였다. 권관
대길호리보(大吉號里堡)부의 북쪽 53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길호령(吉號嶺)은 옛날에는 실호령(失號嶺)이었다. 벽동(碧潼)의 서쪽 71리에 있으며 창주(昌洲)와의 경계인데 가장 높고 험하다. 권관
소길호리보(小吉號里堡)옛날에는 벽동(碧潼)에 속하였으며, 소실호리(小失號里)라고도 불렀다. 석축이다.
전자동 폐보(田子洞廢堡) 부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권관을 보내 지켰다.
우구리책(牛仇里柵) 부의 동쪽 42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권관을 보냈다.
○ 삭주(朔州) 천마진(天麻鎭)천마산(天摩山)은 부의 서남쪽 80리에 있는데, 의주(義州)구성산(龜城山)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는 운산(雲山) 땅이다. 첨사
구녕보(仇寧堡)부의 북쪽 35리에 있는데, 본래는 의주땅으로 석축이다. 세종조 때에 귀속되어 왔다. 만호
막령보(幕嶺堡)빠짐 만호
○ 구성(龜城) 안의진(安義鎭)부의 남쪽 1백 70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수주(隋州)에 속했었다. 세조조 때에 귀속되어 왔다. 첨사
식송보(植松堡)빠짐 만호
○ 선천(宣川) 청강진(淸江鎭)군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그 근원의 하나는 향산(香山)에서, 하나는 보제산(菩提山)에서 나왔다.
수청 폐진(水淸廢鎭)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 운산(雲山) 위곡진(委曲鎭)빠짐 첨사
○ 박천(博川) 고성진(古城鎭)빠짐 첨사
○ 양덕(陽德) 면성진(免城鎭)빠짐 첨사
○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부의 서쪽 1백 28리에 있는데, 석성이며 또한 행성(行城)이 있다. 첨사
신광진(神光鎭)빠짐 첨사
상토진(上土鎭)부의 북쪽 1백 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옛날에는 만호 보였다. 첨사
고산리진(高山里鎭)부의 서쪽 1백 25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첨사
추파보(楸坡堡)부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만호
평남보(平南堡)빠짐 만호
벌등포보(伐登浦堡)부의 서쪽 1백 13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권관이 있었다. 만호
종포보(從浦堡)부의 북쪽 25리에 있는데,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욋괴보(外叱怪堡) 옛날에는 외괴보(外怪堡)라고 하였다. 부의 서쪽 1백 23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호
마마해보(馬馬海堡)옛날에는 마마해(麽麽海)라고 하였는데, 석성이다. 권관
이동(梨洞)지금은 폐하였다.
등공구비보(登公仇非堡)부의 북쪽 78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권관이 있었다.
고합 폐보(古哈廢堡) 부의 남쪽 90리에 있는데, 정덕 무인년(1518)에 목책을 설치하였다.
황청 폐보(黃靑廢堡) 부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목책을 설치하였다.
○ 고무(古茂) 창후주보(昌厚州堡)군의 동쪽 1백 33리에 있다.
보산보(甫山堡)군의 동쪽 82리에 있다.
가사동보(家舍洞堡)군의 서쪽 □리에 있다.
시개보(時介堡)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봉포보(奉浦堡)군의 서쪽 38리에 있다.
○ 고려(古閭) 연훈두보(延薰豆堡)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성파보(城坡堡)부의 남쪽 □리에 있다.
하무로보(下無路堡)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 고우(古虞) 예유파보(芮楡坡堡)군의 동쪽 □리에 있다.
조명천보(趙明千堡)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소우예보(小虞芮堡)군의 서쪽 □리에 있다.
태일보(泰日堡)군의 서쪽 □리에 있다.
○ 위원(渭源) 오로량보(吾老梁堡)빠짐 만호
갈헌보(加乙軒堡) 옛날에는 갈한동보(加乙罕洞堡)라 불렀으며, 석축이다. 군의 서쪽 24리에 있다. 권관
직질동보(直叱洞堡)옛날에는 직동성(直洞城)이라고 하였는데, 군의 서쪽 40리에 있다. 권관
남파보 목책(南坡堡木柵) 군의 서쪽 25리에 있다.
돌한 폐보(都乙漢廢堡)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 초산(楚山) 아이진(阿耳鎭)옛날에는 만호 보였으며, 석축이다. 군의 서쪽 55리에 있다. 첨사
우현진(牛峴鎭)빠짐 첨사
차령진(車嶺鎭)빠짐 첨사
산양회보(山羊會堡)군의 서쪽 23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옛날에는 권관이 있었다. 만호
금사동 폐보(金士洞廢堡) 군의 서쪽 75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권관이 있었다.
앙토리 목책(央土里木柵)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 벽동(碧潼) 벽단진(碧團鎭)군의 서쪽 51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첨사
대파아보(大坡兒堡)군의 북쪽 2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소파아보(小坡兒堡)혹은 판막(板幕)이라고도 하는데, 군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석축이다. 권관
추구비보(楸仇非堡)군의 서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광평보(廣坪堡)군의 북쪽 55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권관
임토 별장(林土別將) 빠짐
마전동 폐보(麻田洞廢堡) 군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신성보(新城堡)군의 남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오음회 목책(吾音會木柵) 군의 동쪽 80리에 있다.
궁농괴 목책(弓農怪木柵) 빠짐
다대동 목책(多大洞木柵)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비아리보(非兒里堡)군의 북쪽 72리에 있는데, 석축이다.
○ 영변(寧邊) 천수진(天水鎭)빠짐 첨사
영성진(寧城鎭)빠짐 첨사
○ 희천(熙川) 유원진(柔院鎭)빠짐 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