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판 국어대사전에서 '주류성'을 찾아보면,
낭독자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서 백제가 망한 뒤 복신, 도침 등 백제의 유신(遺臣)이 근거지로 삼아 나당연합군에 항전한 마지막 전쟁터이다.
삼성출판사의 새우리말큰사전에서도 주류성을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는데, 일본인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 등이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이 주류성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래
이병도박사가 그 학설을 지지하면서 교과서는 물론 사전에까지도 그렇게 올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부안의 위금암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충청남도 홍성이나 연기 지역이 주류성이 있던 자리라는 학설도 제기됐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지금 크게 압축이 된 것이 충남 한산의 건지산성, 그리고 전북부안의 위금암 산성입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 토지가 자갈이 많고 척박해가지고 농사짓기에 불리하고 오랫동안 항전을 하기가 어려운 지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주류성과 관련해서 나중에 기사가 나오는데 풍왕이 귀국을 해서 피성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요, 그 천도한 거리가 주류성과 피성의 거리가 멀지 않게 생각이 됩니다.
풍왕이 즉위한 이후에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그 피성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지역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피성이 주류성에서 가까운 곳으로 설정돼 있어서, 결국 주류성은 부안의 위금암산성이 가장 유력하다, 학자들 사이에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사전에 주류성이 있던 지역으로 올라 있는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의 경우, 충남역사문화원에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고려시대의 성으로 밝혀졌습니다
*******************
○ 의자왕(義慈王) 의자(義慈) 무왕의 태자 는 어렸을 때 해동 증자(海東曾子)라 칭하였다. 정관 신축년에 즉위하여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경신(660)에 당 나라에 멸망당하니, 재위 20년이다. 그해에 돌아가니, 금자광록대부위경(金紫光祿大夫衛卿)을 추증하고, 망산(芒山)의 손호(孫皓)ㆍ진숙보(陳叔寶)의 묘 왼쪽에 장사지내도록 명하였다.
○ 용삭(龍朔) 2년(662)에 백제 종실 복신(福信)이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여 옛 왕의 아들 부여 풍(扶餘豐)을 맞아 들여 왕으로 삼았다. 이에 백제의 유민들이 모두 호응하여 유인원을 웅진성(熊津城)에서 포위하니, 당 나라에서 낭자 유인궤(劉仁軌)의 죄를 용서하고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에 임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인궤가 신라 군사와 함께 진군하여 합동하여 백제군을 공격해 크게 격파시키니, 복신 등이 임존성(任存城)으로 물러나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칭하고 무리를 불러 모아 신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 나라에서는 조서로 장군 손인사(孫仁師)를 웅주도 행군총관(熊州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치청(淄靑)ㆍ내해(萊海)의 군사 7천 명을 징발하여 구원하러 가도록 하였다.
○ 용삭 3년에 손인사의 군사가 주류성을 함락시키니, 부여 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그때 왜병의 배 4백 척이 와서 백제를 구원하였으나, 당 나라와 신라 군사가 협공(夾攻)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백제의 왕자는 왜병을 따라 일본으로 달아났으니, 바로 이른바 임정태자(臨政太子)이다. 위의 왜국 조에 보인다.
○ 인덕(麟德) 원년(664)에 당 나라에서 의자(義慈)의 아들 사가경(司稼卿) 부여융(扶餘隆)을 세워 웅진 도독으로 삼고 그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2년 8월 유인원이 융 및 신라 왕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동맹을 맺고, 인궤는 바다로 해서 당 나라에 돌아갔는데 융도 따라 가니, 당 나라에서는 얼마 후에 융을 대방주(帶方主)로 삼아 돌려보냈으나, 융은 신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옛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부쳐 있다가 죽었다. 백제가 드디어 망하였다. 이상은 모두 《동문광고(同文廣攷)》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7권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가(加) 자를 가(嘉) 자로 고쳤으며, 고려 성종(成宗) 때에 임주 자사(林州刺史)를 두었고, 현종(顯宗) 때에 가림현(嘉林縣)으로 고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원 나라 평장사(平章事) 아패해(阿孛海)의 아내 조씨(趙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림주사(知林州事)로 승격되었으며, 본조 태조(太祖) 3년에 명 나라 조정으로 들어간 환자(宦者) 진한룡(陳漢龍)의 청으로 부(府)로 승격되었다. 태종(太宗) 원년에 환원되었다가, 3년에 또 명 나라 조정으로 들어간 환자 주윤단(朱允端)의 청으로 부(府)로 승격하였으나, 다음 해에 환원되었으며,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다.
【형승】 수륙의 요충지이다 당(唐) 나라 유인원(劉仁願)이 손인사(孫仁師)와 함께 부여풍(扶餘豐)을 공격할 때 여러 장수들과 공격할 방향을 의논하매, 어느 장수가 말하기를, “가림성(加林城)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마땅히 먼저 이를 공격하여야 한다.” 하니, 유인궤(劉仁軌)가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실(實)한 곳을 피하고, 허(虛)한 곳을 치라고 하였다. 가림성(加林城)은 험준하고 견고하니, 이를 치려면 군사의 손상을 볼 것이요, 대치하고 있으려면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주류성(周留城)으로 달려갔다. 땅이 남해(南海)의 가이다 하륜(河崙)의 기문에 있다.
【산천】 성흥산(聖興山) 군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건지산(乾止山) 군 서쪽 2리에 있다. 성주산(聖住山) 군 서쪽 12리에 있다. 보광산(普光山) 군 서쪽 10리에 있다. 주성산(周城山) 군 북쪽 10리에 있다. 칠성산(七星山) 군 남쪽 10리에 있다. 널찍한 평야에 일곱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형상이 칠성(七星)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봉황산(鳳凰山) 군 남쪽 10리에 있다. 구랑산(仇郞山) 군 동쪽 25리에 있다. 화산(花山) 군 남쪽 5리에 있다. 승달령(升達嶺) 군 서쪽 10리에 있다. 유현(楡峴) 군 북쪽 10리에 있다. 발현(發峴) 군 서쪽 10리에 있다. 백암(白巖) 군 동쪽 20리에 있다. 가림수(嘉林藪) 군 동쪽 1리에 있다. 구랑포(仇郞浦) 군 북쪽 15리에 있다. 홍산현(鴻山縣)에서 발원하여 장암강(場巖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장암강(場巖江) 군 북쪽 15리에 있다. 고다진(古多津) 군 동쪽 29리에 있는데, 수세(水勢)가 험악하다. 강경진(江景津)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은진현(恩津縣) 경계이다. 청포진(菁浦津) 군 남쪽 22리에 있다. 남당진(南堂津) 일명 용연포(龍淵浦)라고도 한다. 군 남쪽 14리에 있으니, 고다진(古多津)의 하류이다. 언덕 북쪽에 사인암(舍人巖)이 있다. 상지포진(上之浦津) 군 남쪽 30리에 있다. ○ 이상 여섯 나루는 모두 공주 웅진(熊津)의 하류로서 한산군(韓山郡)으로 들어가서는 진포(鎭浦)가 된다.
【불우】 서부도암(西浮圖菴) 성주산(聖住山)에 있다. 서자복사(西資福寺) 건지산(乾止山)에 있으며, 절 남쪽에 석장(石檣)이 있다. 동자복사(東資福寺) 성흥산에 있다. 절 남쪽에 석장이 있다. 용연사(龍淵寺) 남당진(南堂津) 북쪽 기슭 위에 있다. 향림사(香林寺)ㆍ향덕사(香德寺) 모두 천등산(天燈山)에 있다.
【제영】 용연현관미연월(龍淵絃管迷煙月) 이색(李穡)의 시에, “용연의 관현은 연월에 아득하고, 압야(鴨野)의 호미ㆍ따비[鋤犂] 비바람을 따르네.” 하였다. 마읍군봉접지음(馬邑群峯接地陰)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들으니 당 나라 군사 일찍이 이곳에 주둔했을 때, 어찌하여 신라 장수 침범해 괴롭혔나. 웅진강 한 줄기는 하늘과 함께 맑은데, 마을의 못 봉우리 땅에 연해 그늘졌네.” 하였다.
【진도】 장암진(場巖津) 동북쪽 16리에 있는데, 부여(扶餘)로 통한다. 고다진(古多津) 동쪽 29리에 있는데, 조수가 빠르다. 서안(西岸)에 고암(鼓巖)이 있고 석성(石城)으로 통한다. 낭청진(浪淸津)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은진(恩津)ㆍ강경리(江景里)로 통한다. 청포진(菁浦津) 동남쪽 22리에 있는데, 용안(龍安)으로 통한다. 남당진(南塘津) 남쪽 15리에 있는데, 북안에는 사인암(舍人巖)과 용연사(龍淵寺)가 있다. 조수가 빠르며 함열(咸悅)로 통한다. 상지포진(上之浦津) 서남쪽 30리에 있는데, 한산(韓山)으로 통한다.
폐지된 산성 |
경기도 개성부(開城府)의 난산고성(卵山古城) 부(府)의 서쪽 23리에 있다. 토축(土築)
○ 광주(廣州) 일장산성(日長山城) 신라 때의 화장성(畫長城)이며, 안에 6개의 우물과 시내가 있다. 석축(石築)
○ 여주(驪州) 고장성(古長城) 주(州)의 북쪽 53리에 있다. 석축
○ 이천(利川) 설봉산성(雪峯山城) 부의 서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석축
○ 양근(楊根) 함공성(咸公城)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석축 고려 때에 고을 사람들이 몽고병을 피하였다.
○ 죽산(竹山) 죽주 고성(竹州古城) 부의 북쪽 2리에 있다. 석축
○ 부평(富平) 계양산 고성(桂陽山古城) 부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남양(南陽) 고당성(古唐城) 지금은 과수원이 되었다.
○ 양천(陽川) 성산 고성(城山古城) 진산이다. 석축
○ 용인(龍仁) 처인성(處仁城) 현(縣)의 남쪽 25리에 있다. 토축(土築) 군창(軍倉)이 있다.
○ 금천(衿川) 영랑성(永郞城) 삼성산(三聖山)에 있으니, 바로 현의 동쪽 10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석축
○ 통진(通津) 동성산 고성(童城山古城)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석축
○ 양주(楊州) 대관산성(大毌山城) 주의 서쪽 5리에 있다. 석축
○ 영평(永平) 고석성(古石城) 하나는 현의 동쪽 12리에 있고, 하나는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 포천(抱川) 성산 고성(城山古城)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석축
○ 적성(積城) 토잠 고성(吐蠶古城) 일명 성산(城山)이라고도 하며,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석축
○ 교하(交河) 조도성 산성(鳥島城 山城) 현의 서쪽 7리에 있다. 석축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여기서 만난다.
○ 강화(江華) 고궁성(古宮城) 부의 동쪽 10리 송악리(松嶽里)에 있다. 토축
충청도 충주(忠州)
○ 단양(丹陽) 가은암산성(加隱巖山城)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석축 샘이 3개 있고, 험준하다. 고려 말에 왜구를 피했다.
○ 영춘(永春) 성산고성(城山古城) 현의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이다. 산 아래에 석굴이 있는데, 높이가 1장 남짓이고, 넓이가 10여 척쯤이며, 깊이는 끝이 없고, 물이 솟아 나와 무릎 위까지 빠지며 맑고 차기가 얼음 같다. 고을 사람들이 횃불 10개를 가지고 들어갔으나 굴 속 끝까지 가지 못한 채 횃불이 떨어져서 돌아왔다.
○ 청주(淸州) 부모성(父母城) 주의 서쪽 15리에 있다.
미륵산성(彌勒山城) 주의 동쪽 60리에 있는데, 청천현(靑川縣)에 있다. 석축
구라산성(謳羅山城) 주의 동쪽 41리에 있다. 석축
상령산성(上嶺山城) 주의 동쪽 15리에 있다. 석축 안에 큰 우물이 있는데, 크게 가물 때 빌면 영험이 있다.
○ 천안(天安) 왕자산성(王字山城) 군의 동북쪽 12리에 있다. 고려 태조가 군사를 여기에 주둔시키니, 윤계방(尹繼芳)이 아뢰기를,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라 하였다. 인하여 보루를 쌓고 군사를 점검했으며, ‘왕자성’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 옥천(沃川) 마니산성(摩尼山城) 군의 남쪽 50리에 있다. 석축 또 영동(永同)에도 속한다.
○ 문의(文義) 양성산성(壤成山城)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석축 안에 크고 둥근 못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돌로 담을 이루고 있으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 직산(稷山) 위례성(慰禮城) 현의 동쪽 21리에 있는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토축
○ 회인(懷仁) 호점산성(虎岾山城) 현의 남쪽 9리에 있다. 석축
○ 보은(報恩) 오정산성(烏頂山城)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석축 바로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유성산성(儒城山城) 유성현 동쪽 5리에 있다. 석축
덕진산성(德鎭山城) 덕진현 남쪽 1리에 있다. 석축
○ 임천(林川) 성흥산성(聖興山城) 군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한산(韓山) 건지산성(乾至山城)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토축
○ 전의(全義) 고산산성(高山山城) 현의 동쪽 8리에 있다. 석축
○ 이성(李城) 운주산(雲住山) 북봉(北峯)에 있으며, 석축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탁(李棹)의 고거(故居)라.” 한다. 안에 우물이 하나 있다.
○ 정산(定山) 계봉산성(鷄鳳山城) 백곡산(白谷山)이라고도 하는데, 현의 동쪽 9리에 있다. 석축
○ 은진(恩津) 마야산 고성(摩耶山古城) 현의 남쪽 24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회덕(懷德) 계족산성(鷄足山城) 현의 동쪽 3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연산(連山) 북산성(北山城)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석축
○ 이성(尼城) 노산성(魯山城) 현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부여(扶餘) 반월성(半月城) 현의 북쪽 3리에 있는 부소산(扶蘇山)에 있는데, 산을 안고 쌓았으며 두 머리가 백마강(白馬江)에 다달아 모양이 반달 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한다. 석축
○ 연기(燕岐) 성산성(城山城) 현의 동쪽 1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홍주(洪州) 여양산성(驪陽山城) 주의 남쪽 37리에 있는 여양현에 있다. 석축
○ 서산(瑞山) 북산성(北山城) 빠짐 석축
○ 태안(泰安) 백화산성(白華山城)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석축
○ 면천(沔川) 몽산성(蒙山城) 군의 북쪽 4리에 있다. 석축
○ 온양(溫陽) 배방산성(排方山城) 군의 동쪽 8리에 있는 산꼭대기에 네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어 참으로 기이하다. 세상에서 과안봉(過雁峯)이라 칭한다. 석축
○ 청양(靑陽) 우산성(牛山城) 군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대흥(大興) 임존성(任存城)현의 서쪽 13리에 있다. 석축
○ 결성(結城) 신금성(神衿城)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토축
○ 보령(保寧) 당산성(唐山城) 현의 동북쪽 4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신성산성(薪城山城) 현의 서쪽 5리에 있는데, 산꼭대기에 고성(古城)이 두 개가 이어져 있다. 그 북성은 석축이고, 그 남성은 토축이다. 옛날 평택(平澤) 사람이 피난하여 살았으므로 평택성이라 부른다.
○ 신창(新昌) 성산성(城山城) 현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예산(禮山) 무한산성(無限山城) 현의 서쪽 9리에 있다. 석축
○ 해미(海美) 성산성(城山城) 석축
금성(金城)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토축 혁거세(赫居世) 때 쌓았다.
월성(月城)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토축 형태가 반달 같다.
만월성(滿月城) 월성의 북쪽에 있다. 토축
명활성(明活城) 월성의 동쪽에 있다. 석축
남산성(南山城) 월성의 남쪽에 있다. 토축
관문성(關門城)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석축
○ 울산(蔚山) 신학성(神鶴城) 바로 수변성(戍邊城)인데,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 영천(永川) 영주성(永州城) 남정원(南井院) 서쪽에 있다.
○ 안동(安東) 청량산성(淸涼山城) 부의 동쪽 75리인 아산현(牙山縣) 서쪽에 있다. 석축
○ 영해(寧海) 영양산성(英陽山城) 지금은 영양현(英陽縣)이 되었다.
○ 청송(靑松) 주방산성(周房山城)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석축 삼면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험지이고 안에 두 시내가 있다.
○ 예천(醴泉) 덕봉산성(德峯山城) 군의 서쪽 3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위에 흑응성(黑鷹城)이 있다. 석축
○ 풍기(豐基) 등강성(登降城) 군의 서쪽 5리에 있다.
○ 의흥(義興) 황산성(黃山城) 군의 동쪽 50리에 있으며, 산중에는 뽕나무가 많다. 석축 동남북이 모두 절벽이다.
○ 예안(禮安) 북산성(北山城) 진산이다. 석축
○ 용궁(龍宮) 용비산성(龍飛山城)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석축
○ 대구(大丘) 달성(達城)부의 서쪽 4리에 있다. 석축
○ 밀양(密陽) 추화산고성(推火山古城)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석축
○ 청도(靑道) 폐성(吠城)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 오혜산성(烏惠山城) 군의 동남쪽 31리에 있다. 석축
○ 경산(慶山) 고포성(古浦城) 현의 서쪽 7리에 있다. 석축
○ 현풍(玄風) 서산성(西山城)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석축
○ 의흥산성(義興山城) 토축
○ 상주(尙州) 사벌국 고성(沙伐國古城) 병풍산(屛風山) 아래에 있다.
○ 지례(知禮) 구산성(龜山城)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석축
○ 진주(晉州) 송대산성(松臺山城) 주의 동쪽 42리에 있다. 토축
○ 남해(南海) 고현산성(古縣山城) 현의 북쪽 17리에 있다. 석축
○ 사천(泗川) 성황산성(城隍山城) 석축
○ 산음(山陰) 고산성(古山城)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석축
○ 단성(丹城) 동산성(東山城)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두 면이 절벽이고 주위는 2천 7백 95척이며 동남이 1백여 척이다. 석성(石城)으로 보충하여 지었으며, 그 안에 샘 하나와 못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 김해(金海) 분산성(盆山城) 부의 북쪽 3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석축
○ 창원(昌原) 염산 고성(簾山古城) 부의 동쪽 23리에 있다. 석축
○ 함안(咸安) 방어산성(防禦山城)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석축
○ 거제(巨濟) 둔덕기성(屯德岐城) 현의 서쪽 37리에 있다. 석축
○ 칠원산성(漆原山城)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석축
○ 웅천(熊川) 고산성(高山城) 황포현(荒浦縣)의 북쪽 5리에 있는데, 본현에서 45리의 거리에 있다. 석축
전라도 전주(全州) 고덕산성(高德山城) 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는데, 고달(高達)이라고도 한다. 석축
○ 익산(益山) 용화산성(龍華山城)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미륵산(彌勒山)이라고도 한다. 기준성(箕準城)이라 부르며, 석축이다.
○ 나주(羅州) 금성산성(錦城山城) 위에 나왔다.
○ 광주(光州) 고내상성(古內廂城)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석축
망점산성(望岾山城)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석축
○ 무장(茂長) 고산성(高山城) 현의 동쪽 25리에 있는데, 위에 용지(龍池)가 있어 가물면 비가 오기를 빌었다. 석축
○ 무안(務安) 남산성(南山城)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석축
○ 진도(珍島) 용장성(龍藏城)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석축
○ 강진(康津) 수인산성(修因山城) 위에 나왔다.
○ 해남(海南) 흑산 고성(黑山古城)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석축
고다 산성(高多山城)
○ 남원(南原) 유곡성(楡谷城) 유곡부곡(楡谷部曲)부의 남쪽 69리에 있다. 석축
○ 용담(龍潭) 고산성(古山城) 현의 동쪽 13리에 있다. 석축
○ 장수(長水) 성적산성(聖迹山城) 현의 서남쪽 15리에 있는데, 성수(聖壽)라고도 한다. 석축
○ 보성(寶城) 조양 폐현성(兆陽廉縣城) 석축
○ 흥양(興陽) 남양현 산성(南陽縣山城)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석축
○ 동복(同福) 옹성산성(甕城山城)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석축이며, 성 위에 백여 척이나 되는 석대(石臺)가 있으며, 그 위에 또 석주(石柱)와 석궐(石闕)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한전(羅漢殿)의 유지(遺址)라고 한다. 또 위의 산성조에 나왔다.
황해도 황주(黃州) 발산행성(鉢山行城)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석축
덕월산성(德月山城) 주의 동쪽 2리에 있다. 석축
월라산성(月羅山城) 주의 남쪽 50리에 있다. 석축
○ 평산(平山) 성황산성(城隍山城)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석축
○ 안악(安岳) 양산 고성(楊山古城) 군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토축
○ 곡산(谷山) 달보산 고성(達寶山古城) 군의 북쪽 35리에 있는데, 달운(達雲)이라고도 한다. 석축
○ 우봉(牛峯) 백계현 고성(白界峴古城)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석축
○ 해주(海州) 지성산 고성(池城山古城) 주의 동쪽 20리에 있으며 정상에 폭포가 있는데 3백여 척이나 날아 흐른다. 석축
○ 연안(延安) 봉세산성(鳳勢山城) 부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일명 비봉(飛鳳)이라고도 한다. 석축
○ 풍천(豐川) 고행성(古行城) 부의 서쪽 해변에 있다. 벽돌과 흙으로 교축(交築)하였다.
○ 송화(松禾) 신점 고성(新岵古城)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돌과 흙으로 교축하였다.
○ 장연(長淵) 두견산 고성(杜鵑山古城)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토축
강원도강릉(江陵) 예국 고성(濊國古城) 읍성(邑城) 동쪽에 있다. 토축
○ 삼척(三陟) 두타산성(頭陁山城) 부의 서쪽 45리에 있는데, 산 허리에 석정(石井)이 50개 있다. 석축
○ 평해(平海) 백암산 고성(白巖山古城) 군의 서쪽 29리에 있다. 석축
○ 간성(杆城) 남산성(南山城) 석축
양진역(養眞驛) 북석성(北石城) 군의 북쪽 27리에 있다.
대강역(大康驛) 서토성(西土城) 군의 남쪽 23리에 있다.
○ 통천(通川) 금란산성(金幱山城) 군의 동쪽 12리에 있다. 석축
○ 원주(原州) 영원성(鴒原城) 치악산(雉岳山) 남쪽 산등에 있다. 석축
○ 정선 고성(旌善古城)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석축
○ 영월(寧越) 정양산성(正陽山城) 군의 동쪽 12리에 있다. 석축
○ 인제(麟蹄) 한계산 고성(寒溪山古城) 현의 동쪽 50리에 있다. 석축 냇물이 성안에서 흘러나와 폭포를 이룬다.
○ 횡성(橫城) 덕고산성(德高山城) 현에서 동쪽으로 82리인 강릉 경계에 있다. 석축
○ 홍천(洪川) 대미산 고성(大彌山古城)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석축
○ 회양(淮陽) 문등현(文登縣) 남산성(南山城) 부의 동쪽 40리요, 문등현 남쪽 10리에 있다. 석축
장양현(長楊縣) 고산성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석축
의관령 고성(義館嶺古城) 부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천보산 산성(天寶山古城)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석축
○ 철원(鐵原) 고석성(孤石城) 부의 동남쪽으로 30리인 고석정(孤石亭) 곁에 있다. 석축
○ 금성(金城) 통사동 고성(桶寺洞古城) 현의 남쪽 8리에 있다. 석축
○ 양구(楊口) 비봉산성(飛鳳山城)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낭천(狼川) 용화산성(龍華山城) 현의 남쪽 22리에 있다. 석축
○ 이천(伊川) 고성산 석성(古城山石城)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안협(安峽) 만경산성(萬景山城)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퇴조 고성(退潮古城)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석축
중봉 고성(中峯古城) 부의 서쪽 27리에 있다. 석축
한당 고성(閑堂古城)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토축
오로촌 고성(吾老村古城)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석축
○ 영흥(永興) 성력산성(聖歷山城) 부의 서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정평(定平) 고장주성(古長州城) 부의 서남쪽 55리에 있다. 석축
세류 고성(細柳古城)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토축
봉대 고성(蓬臺古城)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석축
○ 삼수(三水) 압록강 행성(鴨綠江行城)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석축
○ 경성(鏡城) 남산성(南山城) 부의 서남쪽 5리에 있다. 석축
태신 고성(泰神古城)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석축
○ 명천(明川) 영평산성(永平山城) 고참(古站) 북쪽에 층산(層山)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석성이 있다.
○ 종성 행성(鍾城行城) 석축이 6만 2천 4백 8척이며, 토축이 8만 5천 6백 척이고, 목책이 3천 5백 82척이다.
○ 경흥(慶興) 적지 고성(赤池古城)
평안도 평양대성(平壤大城) 석축
○ 용강(龍岡) 안시성(安市城) 현에서 5리쯤 되는 북쪽에 있는데, 진산이다. 험고(險固)하기가 이를 데 없다. 석축
○ 함종산성(咸從山城) 석축
○ 안주(安州) 고석성(古石城) 주의 동쪽 6리에 있다.
○ 정주(定州) 고정주성(古定州城) 주의 동쪽 30리에 있다. 흙과 돌이 반반이다.
○ 숙천 고행성(肅川古行城) 부의 서쪽 30리 되는 해변에 있으며, 1만 8천 8백 17척이다.
○ 의주(義州) 고연평성(古延平城) 주의 동남쪽 80리에 있다. 토축
가미성(嘉彌城) 주의 북쪽 백리에 있다. 석축
장성(長城) 고려 덕종(德宗)이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경 관방(北京關防)을 설치했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홍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색(淸塞)ㆍ평로(平盧)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개에 걸쳐 있고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이르러 동으로 바다에 다달았으니, 그 길이가 1천여 리이며, 돌로 성을 쌓았다. 세상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부른다.
○ 철산(鐵山) 철산성(鐵山城) 부의 남쪽 9리에 있는데 산 위에 쌓았다. 석축 태종이 쌓아서 군성(郡城)으로 삼았는데, 세조조에 고을 사람들이 높고 험한 것을 싫어하므로 평지로 옮겼다.
○ 창성 고성(昌城古城) 부의 동쪽 1백 50리에 있다.
행성(行城)
○ 삭주(朔州) 대삭주성(大朔州城) 주의 남쪽 65리에 있다. 석축
○ 구성(龜城) 편월성(片月城) 부의 서쪽 78리에 있다. 토축
○ 선천(宣川) 동림성(東林城) 군의 북쪽 62리에 있다. 서북은 토축, 동남은 석축
○ 운산(雲山) 백벽산성(白碧山城)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석축
○ 박천(博川) 고박능성(古博陵城)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 태천 고성(泰川古城) 현의 동쪽 50리에 있다.
○ 덕천(德川) 금성(金城) 군의 동쪽 20리 되는 금성산에 있다. 석축
○ 개천(价川) 조양 진성(朝陽鎭城) 군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토축
○ 자산(慈山) 이성(泥城)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토축
○ 순천(順川) 고읍성(古邑城) 군의 동쪽 1백 5리에 있다. 토축
○ 양덕(陽德) 역암성(暘巖城)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석축
○ 맹산(孟山) 철옹성(鐵甕城) 지금은 영흥(永興)에 속한다.
○ 강동(江東) 고읍성(古邑城) 서강(西江) 동쪽 언덕에 있다. 토축
○ 은산(殷山) 고읍성 토축
○ 위원(渭原) 직동성(直洞城) 군의 서쪽 40리에 있다.
산성(山城) 군의 남쪽 1백 80리에 있다. 석축
○ 벽동 행성(碧潼行城) 하나는 군의 북쪽에 있는데 1백 90척이고, 하나는 군의 서쪽에 있는데 1만 3천 30척이며, 하나는 대소파아(大小坡兒) 사이에 있는데 2만 4천 25척이다. 세곳이 모두 석축이다.
--변어전고(邊圉典故)--
산성(山城) |
경기도 한성부(漢城府) 북한산성(北漢山城)양주(楊州)에 속한다. 은 경성(京城)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동북으로 양주와의 거리가 30리이다. 숙종(肅宗) 신묘년(1711)에 석성(石城)을 쌓았다.
중흥동 석성(重興洞石城)은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있으며, 주위가 9천 4백 17척(尺)이고, 성중에는 산이 있는데 노적가리 같다 하여 노적산(露積山)이라고 일컫는다. 《여지승람》
○ 개성부(開城府) 대흥산성(大興山城)은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두 산 사이에 있으며, 성거산은 옛날에는 우봉현(牛峯縣)에 속하였고, 아래에 박연폭포(朴淵瀑布)가 있다. 숙종 2년 병진(1676)에 석성을 쌓았다.
○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성에서 동남으로 40리 되는 한수(漢水) 남쪽에 있으며, 북으로 광주 옛 고을과 5리보다 조금 먼 거리이다. 동쪽은 백제(百濟) 옛 도읍이니, 온조왕(溫祚王) 13년(B.C.6)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여기에 도읍을 옮기고 성곽과 궁궐을 세웠으며, 위례성 민호(民戶)를 옮겨와서 12세 3백 80여 년을 지냈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191)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지금의 서울 으로 옮겼다. 초고왕이 옮긴 뒤부터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 동안의 성의 흥폐(興廢)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으며, 이조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이 성에 뜻을 많이 두었으나 당국(當國)한 사람이 건의하지 못하고 말았다. 《계곡집(谿谷集)》,《남한성기략(南漢城記略)》
○ 광해(光海) 신유년(1621)에 보장(保障)으로 정하였다.
○ 인조(仁祖)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난 후에 여러 사람이 서울 가까운 곳에 마땅히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이 성을 보수하기를 건의하니, 처음에 심기원(沈器遠)에게 명하여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얼마 있다 심기원이 상(喪)을 당하여 갔으므로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대신 맡았고, 목사 문희성(文希聖)과 별장 이일원(李一元) 등이 감독하였다. 갑자년(1624) 가을에 시작하여 병인년(1626) 가을에 공사를 끝내 마침내 고을의 감영을 옮기니, 비축한 물자와 백성들이 은연히 하나의 웅진(雄鎭)이 되었다. 《남한성기략》
○ 이서가 도첩(度牒)을 발행하여 승도(僧徒)를 통제하여 구역을 나누어 맡아 공사를 책임지게 하였다.
○ 병자년(1636) 3월에 남한산성에 온조묘(溫祚廟 )를 세웠다.
○ 수원(水原) 독성산성(禿城山城)은 옛 감영의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석축(石築)이다.
○ 강화(江華) 정족산성(鼎足山城)은 옛날에는 삼랑성(三郞城)이라 일컬었으며, 단군조(檀君條)에 상세하다. 선원각(璿源閣) 사각(史閣)이 그 안에 있다. 영조 무오년(1738)에 성을 개축하였다.
○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은 부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숙종 계유년(1693)에 후릉(厚陵)에 거동할 때에 이 산을 바라보고 승전(承傳)을 보내 형세를 그려서 들이게 하고, 강도(江都) 나룻길에 중요한 곳이라 하여 갑술년(1694) 봄에 비로소 석축(石築)을 쌓으라고 하였다.
○ 충청도 청주(淸州)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은 율봉역(栗峯驛) 북산에 있는데, 석축이다. 안에 12개 우물이 있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지금은 병사(兵使)와 우후(虞侯)가 머물러 있다.
○ 공주(公州) 쌍수산성(雙樹山城)은 공산성(公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주의 북쪽 2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다. 안에 우물 셋과 연못 하나가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백제 때의 옛 성이며, 신라 김헌창(金憲昌)이 웅거하던 곳이라 한다. 《여지승람》
○ 갑자년 이괄의 난 때에 인조가 머물렀던 행궁(行宮)이 있으며, 지금은 충청 중군(中軍)이 거처한다.
○ 경상도 칠곡(漆谷) 가산산성(架山山城)칠곡ㆍ의홍(義興)ㆍ신녕(新寧)ㆍ군위(軍威)ㆍ하양(河陽)에 속하며, 칠곡은 본래 성주(星州) 아래 팔거(八莒)의 속현(屬縣)이다.
○ 인조 기묘년(1639)에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비로소 가산산성을 쌓았으니, 주위가 3천 8백 30보(步), 1천 7백 52첩(堞)이다. 처음에는 근방 몇몇 군(郡) 지역을 떼어 한 읍(邑)을 설치하고 병영을 옮겨 진소(鎭所)로 할 작정이었으나, 조정에서 다만 성주(星州) 1현만 떼어 칠곡부를 설치하였다. 이윽고 시기하는 자들이 백성들을 부역시킨다고 탄핵하였으며, 이로부터 산성의 일은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였다. 뒤에 임담(林墰)이 감사가 되어 형승(形勝)을 임금께 갖추어 올려 이명웅에게 추후로 포상하기를 청하니, 이명웅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선산(善山) 금오산성(金烏山城)선산ㆍ금산(金山)ㆍ개녕(開寧)ㆍ지례(智禮)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別將)을 두었다.
○ 금오산은 고려 때 남숭산(南嵩山)이라 일컬어 해주(海州) 북숭산(北嵩山)과 짝하였다. 산성은 석축이며, 주위가 7천 6백 44척이고 높이가 7척인데, 석벽을 이용하여 성으로 한 것이 반이나 된다. 높고 험준하고 기이하고 가파르며 안에는 연못 셋과 시내 하나가 있으며, 고려 말에 백성이 왜(倭)를 피해 들어가 살았다. 군사를 나누어 지키고 있다. 《여지승람》
○ 성주(星州) 독용산성(禿用山城) 성주ㆍ고령(高靈)에 속한다.
○ 주의 서쪽 33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1만 3천 64척인데, 그 안에 시내 셋과 샘이 하나 있다. 《여지승람》
○ 문경(聞慶) 조령산성(鳥嶺山城) 문경ㆍ함창(咸昌)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을 두고 있다.
○ 조령은 현의 서쪽 27리 되는 연풍현(延豐縣) 경계에 있는데, 세상에서 초점(草帖)이라 부른다. 《여지승람》
○ 문경의 북쪽 조령 동쪽에 한 산성이 있는데, ‘어류(御留)’라 부른다. 혹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잠깐 머무른 곳이라고 하며, 그 안의 넓이는 남한산성에 비교하여 10분의 9가 되고, 형세의 험고(險固)함은 남한산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동남쪽은 절벽이 만 길이나 되어 새와 짐승도 넘지 못하며, 북쪽은 동남쪽에 비해 조금 낮지만 또 인력(人力)으로는 도저히 통과 할 수 없어 성첩(城堞)을 약간만 설치하면 안심할 만하다.그 서쪽에도 통과할 만한 길은 있지만 남한산성의 가장 험한 곳과 비교해 보아도 몇 곱절이나 된다. 성을 쌓은 곳은 5~6백 파(把)에 불과하고, 성안에는 샘이며 수목이 무진장이다. 자연적인 험함은 실로 동남 지방의 제일이라 4~5만 병갑(兵甲)을 수용할 만하니, 만전(萬全)한 곳은 이를 두고는 없을 것이다. 성 북쪽의 월암(月巖)과 그 동쪽의 작성(鵲城)ㆍ순흥(順興)과 그 서쪽의 조령ㆍ희양성(曦暘城)과 그 남쪽의 고모(姑母)ㆍ토천(兎遷)이 혹은 그지없이 험한 산성이요, 혹은 사닥다리 길이어서 관(關)을 설치하여 약간의 군사를 포치하여 머룰러 둔다면 성원(聲援)이 서로 닿고 호령(號令)을 서로 통할 수 있으니, 호령(湖嶺) 삼도(三道)와 동북 기전(畿甸)을 또한 진정(鎭定)시킬 수 있어서 서북에 일이 생기면 파천하여 머물 곳이 될 것이고 남방에 위급이 있으면 방어할 곳이 될 것이다. 백강집(百江集)
○ 진주(晉州) 촉석산성(矗石山城) 진주에 속한다
○ 주의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4천 3백 59척이며, 높이가 15척인데,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세 개씩 있다.
○ 대구(大丘)의 공산성(公山城), 인동(仁同)의 천생성(天生城), 의령(宜寧)의 정진(鼎津), 삼가(三嘉)의 산성, 합천(陜川)의 야로산성(冶爐山城), 성주(星州)의 가야산성(伽倻山城)은 모두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니, 마땅히 차례로 수축하여 곡식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켜 굳게 지키면서 움직이지 않고 청야(淸野)하여 적을 기다리면, 적이 앞으로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뒤로는 꺼리는 바가 없을 것이니, 나라를 보호하고 도적을 막는 방도에 실로 편리할 것이다. 《서애집(西厓集)》
○ 전라도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笠巖山城)장성ㆍ태인(泰仁)ㆍ고창(高敞)ㆍ정읍(井邑)ㆍ흥덕(興德)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과 승장(僧將)이 있다. 입암산(笠巖山) 옛 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2천 28척이며,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평평하며 안에 시내가 하나 있다. 《여지승람》 정읍(井邑)
○ 정읍 입암산성은 산세가 험하고 높으며 꼭대기는 움푹 파였고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평평하다. 성이 그 지형 관계로 모양이 말 구유 같으며 각(閣)이 비계[棚] 위에 있다. 밖에서 쳐다보면 은은하고 엄연해서 그 안을 헤아릴 수 없다. 성중에서는 사방으로 눈을 가리는 것이 없으며 샘과 못이 넉넉하여 1만 마리의 말을 물 먹일 수 있다. 험하고 견고하기가 금성(金城)에는 미치지 못하나 형세는 훨씬 낫다. 동ㆍ남ㆍ북 세 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고, 입암(笠巖) 한면(一面)은 위령(葦嶺)의 큰길을 굽어 보며 제압하니, 지세가 더욱 기기하고 장대하다. 《백사집(白沙集)》의 체찰사(體察使) 때의 장계
○ 담양(潭陽) 금성산성(金城山城) 담양ㆍ순창(淳昌)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이 있다.
○ 부의 북쪽 15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1천 8백 4척이며, 안에 시내 하나와 샘 아홉 개가 있다. 《여지승람》
○ 담양의 금성은 어느 때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상고하면, “고려 말에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장차 광주(光州) 금성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겠다고 소리쳤다.”고 기록되었는데, 주(註)에는 지금 담양부에 있다고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 태조가 남원(南原)에서부터 운봉(雲峯)을 넘어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함을 듣고 제장(諸將)과 함께 꾀하기를 “만일에 차질이 있으면 물러가 금성을 보전하자.”고 했다고 하니, 이 금성이 그 금성인지 알 수 없다. 동ㆍ서ㆍ남 세 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며, 담양에서부터 올라오는 데는 길이 산등으로 나서 한 줄기가 백 번이나 꼬불꼬불하여 6, 리를 돌아야 비로소 남문에 도달한다.남문 밖 양 곁은 모두 깊은 구렁이며 동문 밖 6, 0보(步)는 돌이 옆으로 서서 성중의 한 면을 노려보고 있으며 화살이 올 수 있는 거리이니 가장 꺼리는 곳이다. 지금 만약 양마성(羊馬城)을 뒤로 물려 쌓는다면 먼저 점거당할 우려에 대비하게 될 것이며, 서문의 양 곁은 산이 모두 높게 솟아 적이 오면 구멍 가운데 든 것 같아서 감히 함부로 곧장 충돌하지 못할 것이다. 샘이 증암(甑巖) 밑에서 솟아 시내를 이루어 흘러내리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또 9개 우물이 있다. 동북과 정남에는 벽이 천 길 높이로 서 있으며, 성 모양이 기이하고 장대하며 넓다. 사변이 높고 가운데가 꺼졌으며 밖에는 큰 봉우리가 없어서 안을 엿보기가 어렵고, 성 밖의 사면은 길이 여러 갈래로 퍼져있으니 참으로 형세가 좋은 곳이다. 《백사집》
○ 정유란(丁酉亂)에 왜군이 호남의 여러 성을 보고 그 허술함을 비웃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담양의 금성을 보고서는 말하기를, “조선이 이 성을 굳게 지켰다면 우리 군사가 어떻게 함락시켰는가.” 하였다. 《서애집》의 체찰사 때의 장계
○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은 안에 사고(史庫)가 있다. 그래서 무주 부사가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고 있다.
○ 상산(裳山)은 현의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민간에서 치마성[裳城]이라 부른다. 사면이 절벽이며 층층이 높아서 마치 사람의 치마 같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옛사람이 험준함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으며 겨우 두 길이 통할 뿐인데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개울물이 사방에서 흐르니 정말 하늘이 만든 험지이다. 글안(契丹)과 왜구의 난 때는 근처 수십 군민이 모두 이 성에 의지하여 안전하였으며, 고려 때 최영(崔瑩)이 산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자고 청했었다. 우리 세종조에 체찰사 최윤덕(崔潤德)이 고을을 돌아보다가 이에 이르러, 마침 운무(雲霧)가 자욱하여 두루 돌아보지 못하고서 성을 쌓고 창고 설치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하여 일이 결국 중단되었다. 《여지승람》 장빈호찬(長貧胡撰)
○ 상산 고성(古城)은 석축으로 주위가 2만 6천 9백 20이다.
○ 남원(南原) 교룡산성(蛟龍山城)
○ 부의 서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북쪽에는 밀덕(密德)ㆍ복덕(福德)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산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5천 7백 17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조그만 시내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여지승람》 산이 조종(祖宗)이 없이 들 가운데 우뚝 솟았으며, 두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은 밀덕이고 남쪽은 복덕이다. 산을 둘러 성을 쌓았는데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으며, 성은 모두 석축이고 8개 우물이 있다.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일찍이 이 성에 올라 지맥(地脈)을 좇아 우물을 파자 간간이 물이 나오니 유정이 말하기를, “성이 크면서 펀펀하니 인력을 반드시 들여야 하겠다.” 하였다. 성 밖 서ㆍ남ㆍ북 삼면에는 안을 들여다 볼 만한 높은 봉우리가 없고, 밀덕과 복덕 두 줄기는 동으로 뻗쳐 내렸는데, 마치 두 마리 이무기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는 세 동(洞)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운데가 적암(赤巖)이고, 북쪽이 우암(牛巖)이며, 남쪽이 빙암(氷巖)이다.두 봉우리는 머리가 되고 두 줄기는 등이 되며 세 동(洞)은 배가 되어 폐부(肺腑)가 겹쳐 가리고 남ㆍ북이 막히어 수미(首尾)가 서로 통하지 않고, 가슴과 등이 서로 관통되지 않아서 혹시라도 급할 때를 당하면 쇠와 북[金鼓]의 호령으로 지휘할 수 없다. 동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인데, 문 밖에 큰 길이 있어 소와 말이 모두 통하며, 길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 보면 개미 새끼까지 헤아릴 수 있다. 문에서 수백 보 되는 거리에 높은 언덕이 있는데, 화살이 미칠 수 없는 곳이며, 뒤쪽이 평평하여 적이 오면 군사를 감출 만하다. 우리 태조가 일찍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가 적과 싸워 쳐부셨다. 《백사집》
○ 전주(全州) 위봉산성(威鳳山城)은 별장이 있다.
○ 동복(同福) 옹성산(甕城山)은 세 바위가 있는데, 모양이 독[甕]과 같으므로 옹성이라 이름하였다. 성의 남ㆍ북에 두 문이 있는데, 다만 이곳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다. 구불구불한 돌 길은 겨우 인적(人跡)이 통하며, 길이 벼랑 아래에 나고 성은 벼랑 위에 있어 성 위에 왕래하는 사람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한 사람이 돌을 굴리면 천 사람이 지나가지 못한다.동성(東城) 아래 10여 보 되는 곳에 뾰죽한 봉우리가 마주 서 있고 사이에 좁은 길이 있는데, 두 사람이 나란히 설 수 없으며, 남에서 서쪽으로 뻗치고 북에서 동쪽까지는 모두 온 돌[全石]이 벽을 깎아질러서 만 길이나 되니, 원숭이조차 지나가지 못할 그야말로 천험(天險)이다. 성안에 7개의 우물이 있으나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으며, 서봉(西峯) 아래로 가만히 적벽(赤壁)을 통하여 새끼줄을 드리워 큰 시내에서 물을 길을 수 있는데, 깎아지른 석벽이 공중에 달려 있어 적병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옛 터가 많이 퇴폐했었는데, 황진(黃進)이 현감으로 있을 때, 옆으로 동북면의 한 구석을 가로질러 내성(內城)을 쌓았다. 《백사집》
○ 나주(羅州) 금성산성(錦城山城)은 서ㆍ남ㆍ북 세 면은 지세가 험준하고, 동문 밖의 한 면은 평평하여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다. 성중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동문 큰 골의 2개의 우물이 가장 크다. 또 네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은 정녕(定寧), 남쪽은 다복(多福), 서쪽은 오도(悟道), 동쪽은 노적(露積)인데, 정녕이 주봉(主峯)이고, 동ㆍ서ㆍ남 세 봉우리는 앞에서 손을 맞잡고 읍하는 것 같아 손짓에 서로 응하고 언어를 서로 통할 수 있다. 동ㆍ북 두 봉우리의 갈래는 고리처럼 둘러서서 골을 이루어 군사를 감출 만하며, 혹은 샘이 부족하다 말하나 성 쌓을 때에 부역하는 사람 5천 명이 동문의 샘 한 곳에서 물을 마셔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산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므로 성의 형세가 옆으로 기울어졌다.동문 밖 산등성은 수백 보로 이어져 가다가 장원봉(壯元峯)에 이르렀고, 산등성을 좇아 성안을 우러러 볼 수 있으며, 철환(鐵丸)이 미치는 거리다. 서ㆍ남 두 면은 성이 산허리를 둘러서 내외로 구분되어 첩(堞)을 지키는 사람은 몸이 산 밖에 있되, 동ㆍ남의 이면(裏面)과는 지척간이지만 서로 돌아볼 수 없으니, 이것이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바다. 역대 연표(歷代年表)를 상고하건대,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에 웅거하다가 전라도로 침범해 오니 군(郡)ㆍ현(縣)이 모두 항복했는데, 상호장(上戶長) 정여(鄭呂)가 성을 지키기를 주창하여 여러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금성을 보전하기로 하고, 가시나무를 심어 책(柵)을 삼고 무기를 들고 사수(死守)하니 적이 7일 밤낮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글안(契丹)이 침노해 오자, 현종이 남쪽으로 파천하여 군사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니, 글안이 패하여 물러났으므로 현종이 이 주(州)를 승격시켜 목(牧)으로 했다고 한다. 《백사집》
○ 강진(康津) 수인산성(修因山城)은 병영(兵營) 동쪽에 있다. 본영에서 남문에 이르자면 좁은 길을 돌고 돌아 문 밖에 닿으며, 지세가 비좁아서 사람이 나란히 서질 못한다. 북문은 더욱 험준하며, 다만 동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고, 문밖에 골이 있는데 수덕(修德)이라 한다. 산세가 높았다 낮았다 하여 성의 안과 밖이 서로 환히 보이며, 화살이 모두 미친다. 동문에서 남쪽으로는 별도로 소동문(小東門)이 있으며, 문밖 백 수십 보 되는 곳에 한 봉우리가 우뚝 막아 섰는데, 물희봉(勿喜峯)이라 부른다. 적이 만약 먼저 점거하면 성중 한 면은 감히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선적봉(仙跡峯)은 성 밖에 또 깎아지른 뫼가 있는데 수십 보를 돌출했으며, 네 구석이 깎아질러 쉽게 오를 수 없다. 노적(露積)이 주봉(主峯)인데, 서ㆍ남ㆍ북 세 면은 매우 험한 곳이지만 사이에 언덕이 있어 적이 의지할 만하고, 물희봉은 더욱 크게 해를 받을 곳이며, 동문 안팎은 장애가 없으니 장점이 단점을 가리지 못한다. 옛날에는 샘을 걱정했으나 동문 밖 수십 보 되는 곳에 여러 골짜기의 샘이 합해 시내를 이루었으며, 지금은 구성(舊城) 밖에 별도로 자성(子城)을 쌓으면서 시내를 에워싸 시내가 성안에 들어갔다. 주위가 7백여 척 가량 된다. 《백사집》
○ 황해도 황주(黃州) 정방산성(正方山城)은 별장이 있다.
○ 정방산은 주의 남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지승람》
○ 해주(海州) 수양산성(首陽山城)은 별장이 있다.
○ 수양산은 고을의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꼭대기에 대(臺)가 있고,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2만 8백 56척이고, 높이가 18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안함(安咸)ㆍ원로(元老)ㆍ동중(蕫仲) 세 사람이 처음 터를 잡아 쌓았으며, 산중에 또 고죽군(孤竹郡)의 옛 터가 있다 한다. 《여지승람》
○ 은율(殷栗) 구월산성(九月山城)은 별장이 있다.
○ 구월산은 현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허리에 물이 있는데, 고요연(高腰淵)이라 부른다. 모양이 가마솥 같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속세에서 말하기를 용이 있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바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4천 3백 86척이고, 높이가 15척이다. 성 모양이 큰 배와 같으며, 남ㆍ북은 길이 없고 동ㆍ서에는 다만 잔도(棧道)가 있을 뿐이다. 성안은 나무가 다발로 묶어놓은 것 같으며, 물이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시내 하나를 이루고, 성의 서쪽에 이르러서는 양 곁에 우뚝 솟은 산이 문처럼 서 있는데, 물이 문밖으로 흘러 나가 폭포가 되었다. 성중에 좌우 두 창고가 있는데, 문화(文化)ㆍ신천(信川)ㆍ안악(安岳)의 창고는 왼쪽에 속하고, 은율(殷栗)ㆍ풍천(豐川)ㆍ송화(松禾)ㆍ장연(長淵)ㆍ장련(長連)의 창고는 오른쪽에 속한다. 《여지승람》
○ 평산(平山) 태백산성(太白山城)
○ 서흥(瑞興) 대현산성(大峴山城)은 별장이 있다.
○ 대현산은 부의 북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2만 2백 38척이고, 높이가 23척이며, 안에 2개의 샘과 1개의 못이 있다. 서흥ㆍ수안(遂安)ㆍ곡산(谷山)ㆍ신계(新溪)ㆍ우봉(牛蜂)ㆍ토산(兔山)ㆍ황주(黃州)ㆍ봉산(鳳山) 등에 군창(軍倉)이 있다. 《여지승람》
○ 재령(載寧) 장수산성(長壽山城)은 별장이 있다.
○ 장수산은 군(郡)의 북쪽 5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고을의 진산이며,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8천 9백 15척이고, 높이가 9척이다. 암석이 험준하게 막혔고, 안에 7개의 샘이 있으며, 군창이 있다.
○ 평안도 자산(慈山)의 자모산성(慈母山城)자산ㆍ성천(成川)ㆍ영유(永柔)에 속한다. 은 별장이 있다.
○ 자모산은 군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2천 7백 3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다. 성안 골짜기마다 샘이 솟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99개의 샘이 있다고 한다. 군창이 있다. 《여지승람》
○ 용강(龍岡) 황룡산성(黃龍山城)은 별장이 있다.
○ 선천(宣川) 검산산성(劍山山城)
○ 검산은 군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고, 봉우리가 험준하여 칼날 같다. 《여지승람》
○ 선천 동림산성(東林山城)은 군의 북쪽 62리 되는 곳에 있으며, 바로 옛날의 선주성(宣州城)이다. 서ㆍ북은 토축(土築)이고, 동ㆍ남은 석축이며, 주위가 1만 7천 5백 62척이고, 안에 샘 5개가 있다. 《여지승람》
○ 창성(昌城) 당아산성(當峨山城) 《여지승람》에는 당아리산(堂阿里山)이라 하였다.
○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은 주의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백룡마(白龍馬)가 나와 놀아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 영변(寧邊) 철옹산성(鐵甕山城)
○ 약산(藥山)은 부의 서쪽 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산이다. 고기(古記)에, “약산의 험준함은 동방에서 제일이다.” 하였으며, 봉우리들이 층층 겹겹으로 서로 둘러 서서 모양이 마치 철옹(鐵甕) 같다. 《여지승람》
○ 세종조에 평안도 도체찰사 황희(黃喜)가 약산 성터를 정하여 영변부(寧邊府)를 설치해서 도절제사 영(都節制使營)으로 삼았다. 이때에 북쪽 오랑캐가 누차 변방을 침입하므로 중요한 곳에 성을 쌓아서 막으라고 명하였다. 판관 이정(李禎 퇴계 이황의 증조)이 감독하였다. 《서애집》
○ 용천(龍川) 용골산성(龍骨山城)
○ 용골산은 일명 용호산(龍虎山)이라고 하며, 군의 동쪽 8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
○ 철산(鐵山) 운암산성(雲暗山城)
○ 웅골산(熊骨山)은 군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며, 운엄사(雲嚴寺)가 있다. 《여지승람》
○ 곽산(郭山) 능한산성(凌漢山城)
○ 능한산은 웅화산(熊花山)이라고도 하며, 군의 동북쪽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6천 9백 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안에 23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
○ 평양(平壤) 보산산성(保山山城)
○ 압록강(鴨綠江) 이남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각 읍에는 모두 산성이 있으니, 의주(義州)의 백마(白馬), 용천의 용골, 철산의 운암, 선천의 검산, 곽산ㆍ정주의 능한, 가산(嘉山)의 효성(曉星)이 모두 험준한 곳을 택하여 요해지(要害地)에 웅거한 것이니,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식암집(息菴集)》
○ 구성(龜城)이 가장 요해지인데, 예전엔 산성이 있어 형세가 매우 좋았다. 지금은 편의에 따라 수축해서 적의 침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곽산의 능한산성과 창성(昌城)의 청산산성(靑山山城)은 예전에는 창고가 있었으니, 지금 또한 마땅히 수축해야 한다.
○ 여러 곳의 산성이 자못 읍내와 서로 멀어 위급에 임해서야 비로소 고을에 사는 백성들을 거두어 산성에 들어가게 하니, 적이 멀리 있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험하고 먼 것을 꺼려 성에 들어가 보호받기를 싫어하고, 적이 가까이 있으면 산과 들로 숨어 명령을 좇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이웃 고을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전라도 한 도로 말하면 담양부(潭湯府)를 마땅히 금성(金城)에 설치하여 근처 몇 고을을 떼어서 더해주고, 정읍과 장성을 입암(笠巖)에 옮겨서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영남의 모든 산성도 모두 그 고을의 감영이 되게 하여 주둔 군사가 서로 바라볼 수 있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루게 하면 나라가 저절로 견고해 질 것이다.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 성은 본래 고을을 보호하는 것이니, 사람의 집에 울타리가 있어 보호하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는 고을은 빈약하고 산이 많으므로 산성과 고을의 구별이 생겼으니, 본말을 알지 못함이 심하다. 대개 성을 다른 곳에 쌓고서 위급에 임해서야 비로소 고을 백성들을 거두어 들이니, 백성들이 들어가려 하지 않아 마침내 빈 성이 되어 모든 일이 어긋나며, 들어간 사람도 마음을 붙히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도망치니, 장차 누구와 함께 성을 지키겠는가. 평시의 살던 집과 부고(府庫)와 백성을 이용하여 더불어 함께 지켜 사람마다 부모ㆍ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서로 전혀 다르다. 가령 산성을 고수하고 읍에 있는 창고와 백성과 가축을 모두 버려 적에게 준다면 산꼭대기만 지킨들 끝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반계수록》
○ 우리나라 사람은 의레 산성을 말하지만, 지난 번 금주성(金州城)은 평지인데도 포위된 지 3년 동안 싸워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만약 외로운 산성에 갑자기 투입했다면 몇 달이 되지 않아서 식량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흩어져서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해를 넘기며 지탱하기를 바라겠는가. 그 이해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반계수록》
**********************8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홍주목(洪州牧)
【성지】 읍성(邑城) 옛 주류성(周留城)인데 둘레가 5천 8백 50척이고 샘이 셋, 문이 네 개, 곡성(曲城)이 여덟 개다. 월산고성(月山古城) 고려 태조(太祖) 11년에 운주(運州)와 옥산(玉山)에 성을 쌓고 수졸(戍卒)을 두었는데 둘레가 9천 7백척이요, 우물이 하나이다. 여양고성(驪陽古城) 둘레가 6천 40척, 샘이 둘. 고구고성(高邱古城) 지금 성산(城山)이라 하는데 옛터가 있다. 흥양고성(興陽古城) 옛터가 있다. 합덕고성(合德古城) 옛터가 있다.
【영아】 전영(前營) 인조(仁祖) 조에 세웠다. ○ 전영장(前營長) 한 사람. ○ 속읍으로 홍주(洪州)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ㆍ보령(保寧)ㆍ한산(韓山)ㆍ청양(靑陽)ㆍ정산(定山)ㆍ홍산(鴻山)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
【사원】 노은서원(魯恩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워졌고, 임신년에 사액되었다.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모두 과천(果川)에 보임.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로 세조 병자년에 대신들과 같이 순직하였다. 벼슬은 도총관(都摠管)이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 한산의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산면 마을 유래 (0) | 2007.08.29 |
---|---|
성지(城池),관방(關防),진(鎭)ㆍ보(堡) -변어전고(邊圉典故)- (0) | 2007.07.10 |
주류성의 지리적 고찰 -부안- (0) | 2007.07.10 |
해동의 증자(曾子) 의자왕, 왕위에 오르다 (0) | 2007.07.10 |
‘백제멸망, 낙화암, 삼천궁녀’의 진실 (0) | 2007.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