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10편>
부여풍, 주류성에서 왕위에 오르다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1.26(일) 00:05-01:00
나오는 사람들
낭 독 이승주
문무왕 차진욱
복신 김대중
도침 박영재
일장수 심승한
부여풍 진 웅
장수1 이지환
장수2 이병용
에치노 방우호
김수 정형석
*시그널 + 타이틀
문무왕 (편지글 낭독-에코)당나라 대군이 본국으로 귀환한 후에 복신이 서쪽 강에서 들고 일어나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성을 포위하고 달려들어 모든 군수물자를 탈취한 다음 다시 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짐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포위를 풀고 사면의 적들을 격파하여 위험에서 구한 다음, 다시 양식을 운반하여, 드디어는 당나라병사 1만 명을 위난에서 모면하게 하고, 굶주린 사비성의 군사들에게도 군량을 공급하였다. 복신 도당들은 점점 많아져서 강동의 땅을 침략하여 빼앗으므로 웅진에 와 있던 당나라군 1천명이 나아가서 적도들을 치다가 도리어 적에게 대패하여 한명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렇게 패한 다음에는 남쪽 지방의 성에서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 붙게 되었다. 복신은 그 기세를 몰아 다시 성을 포위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사비에서 웅진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고 된장 같은 부식들도 떨어졌으므로 힘센 자들을 모집하여 소금으로 가지고 길을 빠져나가게 하여 겨우 궁핍과 가난을 구하였는데…
<해설>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앞에서 소개해 드린 내용은, 서기 671년에,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신라의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서, 문무왕이 답신으로 적어 보낸 내용 중 일부입니다. 당나라의 소정방은 고구려 정벌을 위해 출정하면서 신라에게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신라의 문무왕은 김유신 등에게 2천여 대의 수레에 쌀 4천 석과 조 2만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합니다. 신라의 군량 수송부대는 도중에 폭설과 한파를 만나 인마가 동사하고 고구려군과 사투를 벌이는 등 악전고투 끝에 당군에게 군량을 보냈는데 소정방군은 신라의 군량을 얻자마자 당으로 철군해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에 진을 치고 있던 당나라군 역시 백제 부흥운동군에 포위되어서 군수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신라에게 군량보급을 청하게 됩니다. 유인궤가 거느린 당군과 신라군이 합세하여, 웅진강구 전투에서 도침이 거느린 백제 부흥군을 격파했고, 그 바람에 일시적으로 포위가 뚫리자 간신히 군량보급이 이뤄져서 굶어죽을 상황을 모면합니다. 한편 신라는 부흥운동군의 거점인 두량윤성을 공격했다가 복신의 군대에게 크게 패하게 되고, 그 소식을 듣고 남쪽 지방의 성들이 대거 복신 휘하로 복속되는 등 부흥군은 그 세를 넓혀 갑니다. 앞에서 소개해 드린 문무왕의 편지글 속에, 당시 웅진과 사비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군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했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더불어서, 백제를 멸망시킨 전쟁의 승전국이면서도,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한 채, 당나라의 군량 공급 요구를 거역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웅진으로 양식을 운반해야 하는 신라의 괴로운 처지 역시 그 편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두량윤성 전투가 끝났을 때 복신과 도침의 위상은 자못 달라져 있었습니다. 도침이 나당군과 싸워서 1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군사를 잃고 임존성으로 후퇴해 있는 동안, 복신은 두량윤성에서 신라군에 대승을 거두는 전과를 거두었고, 그러자 남쪽지방의 성주들이 속속 복신 휘하로 모여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함께 출정을 했다가 도침은 대패를 당한 패장 신세가 되었고, 복신은 전승장군으로서 기세가 올라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터에, 복신은 웅진성의 유인궤에게 사신을 보내 이렇게 말합니다.
복신 (에코)당나라가 신라와 서약하여, 백제 사람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 다음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준다고 들었소. 사실이 그러한데, 우리 백제 사람들이 죽음을 당할 바에 어찌 싸우다 죽는 쪽을 택하지 않을 수 있겠소?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군사를 모아 싸우는 이유인 것이오.
<해설> 그렇다면, 복신이 편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실제로 백제인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든지, 혹은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두 나라 사이에 서약이 이뤄졌다는 등의 얘기가 당나라 쪽에서 흘러나온 말이었을 까요? 공주대 양종국 교수는, 중국의 전통적인 점령지 지배 정책으로 볼 때 당나라 쪽에서 그런 방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 테입<117> 양종국
(1:39:53 중국에서 직접적으로 남녀노소 모두 죽이고 신라에게 넘겨준다 이런 표현은 나오기 힘든 표현인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그리고 이 당시에는 중국이 이런 태도를 보여주지도 않고 있는 이런 상황이었고 오히려 백제를 다시 새롭게 안정시켜서 무마하고 새로운 백제를 궁구하려고 하는 이런 것이 지배정책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어떤 정책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중국입장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보다는 신라 쪽에서는 이런 얘길 할 수가 있거든요. 그 당시 부흥운동을 진압하려 했던 세력이 당나라하고 신란데. 1:40:36
<해설> 어쨌든 복신의 편지를 받은 웅진도독부의 유인궤는 백제 부흥군쪽 사신을 설득해서 돌려보낸 다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사신을 통해 부흥군 쪽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그 사신을 복신이 아닌 도침이 맞이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도침 네놈이 유인궤가 보낸 사신이란 말이냐? 나는 일국의 대장군인데, 사신의 관직이 나무 낮구나. 이런 천한 관직을 가진 사신을 보내서 우리 일에 참견하려 하다니 부당한 일이다! 편지 따위는 볼 필요도 없으니 그냥 가져가거라! 썩 물러가지 못할까!
<해설> 구당서 백제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유인궤는 편지를 작성하여 화복(禍福)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자를 보내어서 설득하였다. 그러나 도침 등은 자기들의 무리가 많은 것만 믿고 교만이 생겨서, 유인궤의 사자를 외관에 머무르게 하고, 자신은 일국의 대장인데 사자의 관직이 낮다하여 답장을 써주지 않고 돌려보냈다.
*인서트-2. 테입<119> 노중국
(26:13 도침이 이제 유인궤가 보낸 사자에 대해서 '나는 일국의 대장인데 지위가 니가 너무 낮다, 상대가 안 된다' 그건 거꾸로 얘기를 하면은 유인궤 쪽은 부흥국을 그냥 하나의 남은 도적, 도적놈들, 이런 식으로 아주 낮추어서 인식을 아주 지위가 낮은 자를 보낸 것 같고요, 그러니 이제 도침이나 복신은 자기들은 그리 생각 안 한 거죠. 여기도 왕국이고 난 여기 대장인데 격이 안 맞다 말이야, 그럼으로써 이제 자기 자존을 자존심을 높이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고 이거는 부흥국 군사들 한테도 상당히 자부심이 될 수 있는 거지요. 27:00)
<해설> 계명대 노중국 교수의 분석처럼, 도침의 이런 자세가 부흥군의 체면과 자존심을 살리는 데는 도움을 줬을지 몰라도, 웅진강구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마당에, 복신이 보낸 편지의 답신을 가지고 왔던 유인궤의 사신을 일방적으로 쫓아버린 이 사건은, 복신으로 하여금 도침을 크게 불신하게 만든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이제 복신과 도침이 어떤 절차를 거쳐서 끊어졌던 백제의 왕조를 부흥시키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서에는 부여풍이 언제 왜국으로부터 백제 땅으로 돌아왔는지를 알수 있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서기에 풍왕의 귀국에 관련된 기사가 올라 있긴 한데,
낭독자 천지(天智) 원년 5월, 대금중(大錦中) '아츠미노히라부노 무라치' 등이 수군 170 척을 거느려서 풍장 등을 백제국에 보내고 칙(勅)하여 풍장에게 백제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하였다. 또 금책(金策)을 복신에게 주고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칭찬하고 작록(爵祿)을 주었다.
<해설> 이 기록에 따르자면, 천지천황 원년 5월이므로 서기 662년 5월에 귀국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같은 일본서기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661년 9월에 환국했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낭독자 9월에 황태자가 장진궁(長津宮)에서 베로 짠 관(冠)을 백제 왕자 풍장에게 주고, 장수 두 명에게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으로 호위하여 보내주었다.
<해설> 부여풍이 왜국에서 돌아온 때가 언제이든, 그가 백제의 왕통을 계승했을 때, 그 도읍지가 주류성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여풍이 왜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미 복신 등이 예산에 있던 임존성을 떠나서 새로운 도읍지가 될 주류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주류성을 도읍지로 정하여 옮기게 된 과정을 먼저 탐색한 다음에 부여풍의 귀국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복신 이제 곧 우리 부여풍 왕자가 귀국하여 군주로 즉위함으로써 백제국의 왕통을 계승할 것이오. 헌데, 이 곳 임존성을 도읍으로 정할 수는 없지 않겠소?
도침 아니, 이 곳 임존성은 천험의 군사요새가 아니오? 우리가 이 곳 임존성에서 소정방의 당나라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방어하기에 유리한 이 곳의 지형지세 때문이 아니요? 이 곳을 도읍으로 삼아도 될 터인데 어찌하여 옮기자 하는 게요?
복신 임존성이 나당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는 유리하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적의 침공을 막는 데만 급급해서야 어찌 침략자들을 우리 땅에서 몰아낼 수 있겠소?
도침 우리가 나당 점령군을 공격하기에는 임존성이 취약하다, 이런 말씀이오?
복신 그렇지요. 우리가 언젠가 되찾아야 할 사비성을 공격하기에는 이 곳 임존성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장기전에 대비하자면 식량 확보가 용이해야 하는데 이 곳은 그렇지 못합니다. 또 하나, 앞으로 우리가 침략군을 격퇴하고 나라를 온전하게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바다 건너 왜의 지원이 절실한데…
도침 아니, 임존성에 거점을 두고 있으면 왜가 지원을 거절이라도 할 것이란 말씀이오?
복신 그게 아니지요.
도침 그럼 무어요?
*인서트-3. 테입<119> 노중국
(14:23 부흥군의 입장에서 보면 왜의 지원이 상당히 절실합니다. 고구려 쪽은 상당히 소극적인데 왜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와 주기 때문에 왜의 지원이 절실한데 이 지원받는 왜군의 물자나 왜군이 만약에 임존성에 있게 되면은 어디로 지나야 되냐면 금강하구를 타고 올라가야 됩니다. 그리 되면은 금강 하구 쪽을 장악하고 있는 나당군의 공격을 받기가 상당히 쉽다는 겁니다, 그럴 위험성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왜하고의 긴밀한 관계도 쉽게 맺을 수 있고. 15:14)
도침 으음, 그렇다면 적의 군사공격을 방어하는 데도 유리하고, 식량 확보도 용이하며, 왜국과 해상으로 통교하기도 쉬운 곳을 어디서 찾는단 말이오?
복신 흐음, 내가 사람을 시켜서 좋은 곳을 물색해보라 하였는데, 마침 괜찮은 곳을 찾아내었소.
도침 그 곳이 어디요?
복신 주류성이오.
도침 주류성?
복신 같이 가서 한번 살펴보시겠소?
도침 좋소이다. 가봅시다.
<효과> (말 두 마리 달려가는)
<해설> 복신과 도침이 부여풍을 왜국으로부터 왕으로 모셔오기 전에,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옮겨갔다는 얘긴데, 문제는 그 주류성이 지금의 어느 지역이냐 하는 것입니다. 금성판 국어대사전에서 '주류성'을 찾아보면,
낭독자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서 백제가 망한 뒤 복신, 도침 등 백제의 유신(遺臣)이 근거지로 삼아 나당연합군에 항전한 마지막 전쟁터이다.
<해설> 이렇게 소개하고 있고 삼성출판사의 새우리말큰사전에서도 주류성을 '충청남도 한산에 있었던 백제의 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는데, 일본인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 등이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이 주류성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래 이병도박사가 그 학설을 지지하면서 교과서는 물론 사전에까지도 그렇게 올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부안의 위금암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충청남도 홍성이나 연기 지역이 주류성이 있던 자리라는 학설도 제기됐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인서트-4. 테입<116> 김영관
(1:15:05 지금 크게 압축이 된 것이 충남 한산의 건지산성, 그리고 전북부안의 위금암 산성입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이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 토지가 자갈이 많고 척박해가지고 농사짓기에 불리하고 오랫동안 항전을 하기가 어려운 지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주류성과 관련해서 나중에 기사가 나오는데 풍왕이 귀국을 해서 피성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요, 그 천도한 거리가 주류성과 피성의 거리가 멀지 않게 생각이 됩니다. 1:15:53)
<해설> 풍왕이 즉위한 이후에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그 피성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지역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피성이 주류성에서 가까운 곳으로 설정돼 있어서, 결국 주류성은 부안의 위금암산성이 가장 유력하다, 학자들 사이에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사전에 주류성이 있던 지역으로 올라 있는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의 경우, 충남역사문화원에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고려시대의 성으로 밝혀졌습니다. 자, 그럼 일단 변산반도, 즉 전라북도 부안의 위금암산성에 주류성이 존재했다고 간주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일장수 나는 왜국의 무라치 장군이오. 백제국의 풍장 왕자를 호위하여 5천명의 군사와 함께 이 곳 주류성에 도착한 것이오!
복신 먼 길에 수고가 많았소. 풍 왕자님께서는 신들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소인은 귀실복신이옵니다.
도침 신은 도침이라 하옵니다.
부여풍 그 동안 백성들을 모아 나당점령군과 싸우느라 고생이 많았소.
도침 어서 옥좌에 오르시옵소서.
부여풍 그러면, 훼손당한 백제의 종묘사직을 다시 세우고, 백제의 왕통을 이어달라는 백성들의 뜻을 받아들이겠소.
<효과> (걸어가서 옥좌에 앉는다)
복신 이제 그 동안 신들이 맡아온 나라의 정사 일체를 대왕마마께서 맡아주시옵소서. 대왕마마!
신하들 "대왕마마!"
부여풍 우리 백제는, 우리의 원수인 나당군의 침략으로 도성을 빼앗기고, 선왕이신 의자대왕께서 침략군의 포로가 되어 이국으로 끌려가 승하하시는 참혹한 일을 겪었다! 오늘 짐이 왕위에 올랐으니, 백성들의 뜻을 한 데 모아 우리 땅에서 침략군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선조들이 일구었던 번영과 영광을 다시금 누리고야 말 것이다. 나는 백제의 대왕이니라!
<효과> (신하들, 함성)
<해설> 부여풍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백제 왕조는 상당기간의 공위(空位) 상태를 벗어나 드디어 군주를 옹립하게 됩니다. 이 때의 백제왕조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백제 연구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부여풍이 왕위에 올라 성립된 이 왕조를 부활한 백제국, 즉 '부흥 백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계명대 노중국 교수의 얘기를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인서트-5. 테입<119> 노중국
(16:29 부흥 백제국은 백제국이되 아직까지 옛 땅을 다 찾아야 되는 과제를 짊어진 왕조입니다. 왕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옛 백제 땅에는 나당 점령군이 엄연히 있는거고 또 그 지배에 들어가 있는 옛 백제지역들도 적지 않게 있는 거고, 이네들을 쫓아 내야만이 이제 병실상부하게 완전히 회복된 완전히 부활한 백제국이 되는데 지금 풍왕이 왕이 돼가지고 백제국 왕조가 성립은 됐지만 그러나 나당군을 퇴출시켜야 되는. 17:16)
<해설> 백제가 '백제국'으로서 부활한 것은 틀림없으되, 장차 점령군을 몰아내고 잃었던 영토와 백성들을 모두 회복해야 할 사명을 지닌 왕조가 바로 '풍왕의 백제'였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이 부분을 백제의 역사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김영관 연구관의 얘깁니다.
*인서트-6. 테입<116> 김영관
(1:17:39 결과적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제 풍왕을 왕으로 인정 안 하려고 하고 왕으로 인정 아 하다 보니까 백제가 660년에 멸망했다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입니다. 그렇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학계에서는 663년, 또는 664년까지 백제를 연표에 그려놓습니다. 우리하고 중국이나 일본학계에서는 백제멸망의 시점을 바라보는 관점이 또 다른 거죠. 그 관점의 차이는 풍을 왕으로 인정을 하느냐 안 하느냐 그 차입니다.1:18:24)
<해설> 물론 전승국이었던 당나라나 신라는 부활한 백제를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백제 부흥군을 여적, 혼은 반란군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백제왕 풍장'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풍왕이 당나라에 의해서 임명된 괴뢰국의 꼭두각시 임금이 아니라, 의자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백성들에 의해 옹립된 군주였다는 점에서 풍왕의 재위시기 역시 백제의 역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풍왕이 즉위했을 그 무렵에 백제의 상황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할까요?
부여풍 지금 우리 백제 백성들 중에서 당나라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오?
복신 예, 대왕마마. 도성을 함락한 직후에 당군은 우리 백제 땅을 다섯 조각으로 나누어서 각각 도독을 임명했사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듭하면서 당군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우리에게 복속되기를 희망하는 지역이 늘고 있사옵니다. (지도 펴고)여기 지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비도성과 웅진성만 확실하게 저들이 지배하고 있을 뿐이옵니다.
도침 그 동안 군주가 없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한 데 모으는 데 애로가 있었사오나 이제 명실공히 대왕마마께서 즉위하셨으니 백제의 모든 백성들이 대왕마마의 백성들이 될 것이옵니다.
*인서트-7. 테입<116> 김영관
(1:21:52 전체를 신라와 당나라군이 초토화시킨 것이 아니고 금강입구를 들어선 당나라와 신라연합군 그리고 탄현을 넘어선 신라군이 곧바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으로 직공을 해서 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을 항복시킨 게 이게 전쟁의 시작과 끝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지역에는 백제의 지배체제가 온존했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에 보면은 백제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200 성이 200개의 성이 호응을 했다. 1:22:36)
<해설> 김영관 연구관의 지적처럼 비록 나당군이 백제를 함락시키고 항복을 받아냈다고는 하나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사비도성과 웅진성으로 곧바로 들어왔기 때문에, 백제의 다른 지역들은 나당군의 침략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복신과 도침이 제아무리 통솔력이 출중했다 해도 임금이라는 구심점이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세금을 걷어서 군수품을 조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여풍이 즉위하면서 통치체제를 새롭게 다잡을 필요가 있었겠지요.
*인서트-8. 테입<119> 노중국
(18:33 풍이 왕이 됨으로써 그 다음에 부흥군의 장군들이 정식 왕조의 직책을 맡은 장군들이 되는 거죠. 이리 되면서 풍과 복신 도침은 체제정비에 상당히 노력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네들이 그 때 체제를 새롭게 만들기 보다는 백제 당시에 사용했던 그 체제를 재활용을 해나가는 가죠. 그러니까 관등도 별도로 만든 게 아니고 좌평이니 달솔이니 은솔이니 하는 그 관등을 지위에 맞게 맞춰가지고 수여를 하는 겁니다. 19:20)
<해설> 그렇다면 부여풍이 왕이 되고난 다음에 복신의 관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본서기에는 '좌평복신이라고 돼있습니다. 풍왕이 즉위하고 나서 새롭게 좌평 벼슬을 복신에게 주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문제는 군수물자의 확보인데, 복신과 도침, 그리고 풍왕이 각각 자신의 출신배경을 군수물자 조달의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양종국교수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인서트-9. 테입<117> 양종국
(1:35:54 복신은 아무래도 백제지역에 있던 일반 백성들 중에서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이 복신의 세력을 형성했을 것 같고 도침 같은 경우는 승병, 백제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인 것 같고 부여풍 같은 경우는 백제에는 기반이 별로 없고 일본에서 넘어온 자신을 호위하는 병사들하고 일본의 지지가 큰 힘이 됐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아마 군수물자나 이런 것 충당하는 건 아직 백제의 지방은 그렇게 크게 전란 때문에 중앙만큼 큰 타격은 입지 않았을 수 있으니까. 1:36:42)
<음악> (브릿지)
<해설> 백제 부흥군의 활동을 수록한 내용 중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대목일 것입니다.
낭독자 얼마 아니 되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합병하니 부여풍은 다만 제사나 주관할 뿐이었다.
<해설> 구당서 백제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복신과 도침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복신이 도침을 왜 죽였는지에 대한 전후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의 배경을 우리가 추리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김영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지요.
*인서트-10. 테입<116> 김영관
(1:26:22 복신과 도침은 부흥운동 초기부터 부흥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는데요, 복신은 왕족으로서 그리고 도침은 승려로서 부흥운동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복신과 도침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그런데 이 풍왕의 귀국과 관련해가지고 내분이 복신과 도침 사이에서는 갈등이 조장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풍왕을 옹립을 해서 국광으로 삼고 그 2인자가 누가 될 것인가, 이걸 가지고 다투는 와중에 도침이 복신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1:27:06)
<해설> 이전에는 두 사람이 쌍두체제로 부흥군을 지휘했으나 풍왕이 즉위한 뒤에 2인자 자리를 두고 다투다가 결국 사건이 터졌다는 얘깁니다. 양종국 교수의 견해는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복신이 앞장서서 왜국에서 부여풍을 데려다 왕으로 옹립했을 것이고, 풍왕 즉위 후에는 부흥운동의 노선 차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얘기지요.
*인서트-11. 테입<117> 양종국
(:42:02 기반이 다르다 보니까 성격이 다른 세력들이 모이면은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충돌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더구나 이 경우에는 또 이런 부분이 나타나고 있으니까. 그러한 어떤 출신배경이나 세력기반의 차이, 이런 것으로 인해서 권력 다툼이 내부에 서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이와 같은 현상을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 그렇게도 볼 수 있고, 또는 이게 부여풍을 일단 왕으로 추대한 다음에 이런 움직임이 벌어진 걸 보면은 부여풍에 대한, 부흥운동의 노선을 과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걸 가지고 복신이 중심이 돼서 부여풍을 데려온 것 같아요 느낌이. 1:42:45)
<해설> 복신은 부여풍을 중심으로 해서 세력을 키우려고 했고 도침은 거기에 반기를 들었을 것이고 그것이 죽고 죽이는 사건으로 연결됐다는 얘깁니다.
노중국 교수는 보다 더 복합적인 배경을 제시합니다. 노 교수에 따르면 우선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두량윤성 전투가 끝나고 나서입니다.
<해설> 웅진강구 전투의 지휘자로 나섰던 도침은 만 명이나 되는 많은 군사를 잃고 대패를 당한 뒤에 임존성으로 물러나고 맙니다. 반면에 복신은 두량윤성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여기서 도침의 군사지휘 능력에 대해서 복신이 불신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복신이 유인궤에게 편지를 보낸 데 대한 답신을 유인궤의 사신이 가지고 왔는데, 도침이 사신의 격을 문제 삼아서 쫓아 버린 사건 역시 복신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겠지요.
복신 웅진강구에서 군사를 만 명이나 잃었다고요?
도침 예, 그렇게 됐습니다.
복신 우리가 나당점령군에 대항할 군사를 처음 모집할 때 수백에 불과했고, 변변한 무기도 없어서 막대기를 들고 싸웠소. 그런데 그 소중한 군사를 한번 싸움에서 만 명이나 잃었단 말이오?
도침 (화내며)한두 번 실패는 병가(兵家)에서는 늘 있는 일이라고 했소. 내가 모집한 군사였으니 내가 다시 채우면 될 것 아니오!
복신 좋소. 그 문제는 넘어갑시다. 내가 없는 동안에 유인궤의 사신이 다녀갔다는데 사신이 가지고 온 서신을 어떻게 했소? 보여주시오.
도침 서신은 없소.
복신 서신을 안 가져왔다는 말이오?
도침 저쪽에서 격에 맞지 않게 벼슬이 낮은 관리를 사자로 보내왔기에 그 자리에서 쫓아 보내버렸소. 우리를 도적떼 정도로 보는 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할 것 아니오!
복신 이것도 엄연히 외교관계인데 그렇다고 가지고 온 서신을 접수조차 하지 않고 쫓아 보내는 법이 어디 있소!
도침 유인궤는 우리와 화친을 도모할 사이가 아니라, 칼로 목을 베어 죽여야 할 대상이오! 경우에 맞지 않으면 그렇게 내쫓아버림으로써 우리 장졸들에게 백제국의 체면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한 일인데 어찌 그리 외교 관례만 찾고 있는 것이오!
복신 그 사신은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을 가지고 온 사신이었소!
<해설> 이런 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지요. 그 다음, 양종국 교수의 분석처럼, 노중국 교수 역시, 왜국에서 부여풍을 모셔다가 왕으로 옹립한 것은 전적으로 복신이 주축이 돼서 추진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풍왕 즉위 후에 왜국의 지원을 받는 문제를 두고도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었겠지요.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습니다만 일본서기는 백제부흥군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도침이 백제부흥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유독 그의 이름은 단 한 번도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 자체에 반기를 들다가 살해됐기 때문에 일부러 뺀 게 아니겠느냐, 이런 추정을 해볼 수 있겠지요.
*인서트-12. 테입<119> 노중국
(32:21 일본사기에 보면은 도침 얘기 전혀 없습니다. 죽 복신 얘기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도침하고 복신이 왜에 대해서 갖는 對倭 입장에 차이가 있었던 게 아니겠느냐.
복신은 적극적으로 왜를 끌어들이는 이런 입장을 하고 도침은 전혀 기록이 없는 걸 봤을 때 왜하고는 상당히 거리를 두려고 하는, 그런 것, 이것도 양자 사시의 갈등에 계기가 된 게 아니겠느냐. 이게 점점 커져 가지고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게되자.33:07)
복신 지금 사비에 웅거하고 있는 당군은 만 명에 불과하나, 전세가 불리하면 또 언제 십만이 넘는 대군을 움직여 쳐들어올지 모르오. 게다가 신라군 역시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실정이오.
도침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오?
복신 무슨 수를 써서든지 왜국의 지원을 보다 많이 받아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도침 아니, 왜국은 아무런 계산 없이 그저 도와줄 줄 아시오?
복신 그들이 무슨 계산을 하든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오.
도침 나는 왜국의 지원에 기대는 데에 반대요!
복신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오? 지금의 우리 군사만으로 저들을 우리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도침 일당백으로 싸우면 못 할 것도 없지요.
복신 일당백의 각오로 싸운 사람이 한 번 전투에서 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목을 적군에게 바쳤단 말이오?
도침 뭐라고?
복신 백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에 도침 당신은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이야. (칼 빼며)내 손에 죽어줘야겠다.
<해설> 우리의 추리가 맞았든 빗나갔든 관계없이 어쨌든 도침이 복신의 칼에 맞아 살해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합병했다'는 구당서의 기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 같은 백제 부흥군이었지만 복신은 자신이 거느리는 군대가 따로 있었고, 도침은 승병을 비롯한 또 다른 무리의 군대를 별도로 거느렸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도침이 갑자기 죽자 그의 휘하에 있던 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겠지요.
<효과> (병사들, 왔다갔다 웅성대는)
복신 장졸들은 들으라! 너희들이 따르던 도침 장군은 세상을 떠났다. 너희들은 도침장군 개인의 사졸들이 아니라, 우리 백제국의 용사들이요, 대왕마마의 군사들이니라. 이제부터 이 좌평 복신이 너희들을 통합해서 지휘할 것이다. 내 지휘에 따르지 않는 장졸들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해설> 이렇게 해서 복신은 명실상부하게 백제부흥군의 총사령관이 된 것입니다. 군권이 모두 복신의 손아귀에 장악됐으니 풍왕은 그야말로 실권이 없는 상징만의 임금 노릇에 만족해야 했겠지요. 구당서 백제전에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통합하니 부여풍은 다만 제사나 주관할 뿐이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조직의 내분은 외침을 부르는 법이지요. 복신과 도침의 알력으로 인해 빚어진 부흥운동군의 내분은 나당연 합군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더군다나 662년 3월을 끝으로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일시 중단되었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더 이상 고구려 원정에 동원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말은 신라군이 백제 부흥군 진압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는 얘기지요.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줄곧 부흥운동군에게 밀리던 나당군이 공세로 돌아선 때가 바로 서기 662년 중반부터인데, 이 때가 바로 복신이 도침을 살해한 직후였습니다.
도침의 군사까지를 합병하여 지휘하게 된 복신은, 양곡 운송통로가 끊겨 고립된 유인원에게 사신을 보내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복신 (에코)유인원 대사(大使), 그대들은 어느 때 서쪽으로 돌아갈 것입니까. 내가 마땅히 전송을 해야겠습니다, 허허허허.
<해설> 이 때까지만 해도 당군의 총 책임자인 유인원에게 철군을 종용하는 조롱조의 서신을 보낼 정도로 백제 부흥군의 기세가 올라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나라 조정에서는 당군이 웅진성에서 백제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나 당으로 철군을 해도 좋다고 했을 정도로 당시 백제에 와 있던 당나라군의 처지가 열악했습니다.
부여풍 지금 웅진도독부의 움직임은 어떠하오?
복신 예, 대왕마마. 웅진도독부로 양곡을 운송하는 통로를 우리 백제군이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그 교통로를 뚫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고 있사오나 우리 군사가 잘 방어하고 있사옵니다.
부여풍 들리는 바로는 유인원과 유인궤가 그 교통로 확보를 위해서 이미 군사를 움직였다고 하는데 우리의 대책이 무엇이오?
복신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대왕마마. 소장 휘하에 있는 용맹스런 우리 군사가 그들을 거뜬히 물리칠 것이옵니다.
부여풍 산성을 지키고 있는 우리 병사들에게 군수품은 제대로 보급이 되고 있는 것이오?
복신 허허허허, 그런 문제는 소장이 다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대왕마마께서는 걱정 마시고 백성들의 마음이나 쓰다듬어 주시옵소서. 그럼 소장은 출정하여 당군을 격퇴하고 돌아오겠사옵니다. 자, 가자!
<효과> (군사들 달려나가는)
<해설> 당시 부흥운동군은 웅진의 동쪽 지역의 산성에 진을 치고 웅진으로 통하는 길, 즉 웅진도를 막고 있었는데, 김영관 연구관이 '백제 부흥운동 연구'라는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지금의 대전광역시의 동쪽에 있는 계족산 과 식장산 등의 산악지대에 산성을 구축해 두고 백제부흥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지금도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그런데, 662년 7월,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서 멈추고)
장수1 (내리고)좌평 나리! 지금 당나라의 유인원 군대와 유인궤 군대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복신 걱정할 것 없다. 자, 장군은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우인원 군대를 맞아 싸우라!
장수2 (바삐 들어오며)좌평나리, 신라군이 우리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 지라성 쪽으로 진군해오고 있다 합니다.
복신 그러면 군사를 나눠서 방어하면 될 것 아니겠느냐. 나는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신라군을 격퇴시키도록 하라! 자, 출정하라!
<효과> (군사들 몰려나가는)
<해설> 그러나 부흥운동군은 유인원과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맙니다. 웅진 동쪽의 주요거점이었던 지라성(支羅城)과 사정책(沙井柵)을 상실함으로써 웅진도독부의 당군과 신라군이 연결될 수 있는 통로를 내주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지라성과 사정책 모두 현재의 대전 지역에 있던 방어시설로 추정됩니다. 그와 더불어서 웅진도독부와 사비성 인근에 있던 백제 부흥군의 윤성(尹城)과 대산책(大山柵)마저도 당군에게 차례로 함락당했고, 또 다른 요충지 였던 진현성(眞峴城)마저 나당연합군의 기습 공격에 밀려 내주고 맙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낭독자 유인원, 유인궤 등이 복신의 남은 군사를 웅진의 동쪽에서 크게 쳐부수고 사로잡은 군사가 매우 많았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을 굽어보며 높고 험해서 요충지에 있으므로 군사를 더 보내서 이를지키게 했는데 유인궤는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접근한 다음, 날 샐 무렵에 성에 들어가서 8백여 명의 목을 베어죽이고 드디어 신라의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열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서기 662년 12월, 풍왕과 좌평 복신, 그리고 풍왕을 호위하고 왔던 왜군 장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적인 중대사가 논의됩니다. 다름아닌 천도 문제였습니다. 부흥백제국의 도읍을 주류성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얘기지요.
부여풍 이곳 주유성은 적군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좋아서 싸울 만한 곳이긴 하나,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지 않은 땅이오. 여기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소.
복신 그러하시다면 대왕마마께옵서 마땅한 도읍지를 보아두셨사옵니까?
부여풍 피성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신하들 (웅성대며) "피성 말씀이옵니까?" "피성으로?" "피성이라…"
부여풍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물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집니다. 나무에서 꽃과 열매가 만발하니 거기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오. 비록 평지라고는 하지만 어찌 옮겨볼 만하지 않겠소?
<해설> 여기서 백제부흥군이 주류성을 버리고 피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 배경을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으로부터 들어보지요.
*인서트-13. 테입<116> 김영관
(1:34:24 지금의 변산반도 그 부안이라는 지역이 가보시면 알겠지만 첩첩산중입니다. 전라북도 지역에서도 유명한 산골입니다. 소백산백이 아니고 바다 쪽에 있으면서도. 농사를 짓기가 어렵고 그러다보니까 군량미를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부흥운동군들이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경에 유리하고 군수물자를 확보하기에 유리한 지역으로 진출을 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그런 지역은 또 방어에 불리합니다. 1:35:06)
<해설> 여기서 새로운 도읍지로 거론되고 있는 피성(避城)은 전라북도 김제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피성천도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는 문헌이 일본서기인데, 일본서기의 전후 문맥으로 보아서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은 풍왕이 적극적으로 추진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인서트-14. 테입<116> 김영관
(1:35:40 일본에 가 있다가 돌아와서 왕이 됐는데 왕이 왕의 권리를 행사를 못하게 됩니다. 당연히 복신과 권력을 가지고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이런 군수 물자 조달 문제를 가지고 피성으로 천도를 해야 되느냐 마느냐 해가지고 의견대립이 있을 때 그래도 당시 왕이었던 풍왕은 피성으로 지금의 김제로 보고 있습니다, 김제 평야는 지금도 곡창지대로 유명한 지경 아닙니까. 그 지역으로 옮겨서 충분히 양식도 확보하고 물자도 확보하려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1:36:26)
<해설> 그렇다면 풍왕이 피성천도를 역설했을 때 반대하는 의견은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부여풍이 왜국에서 귀국할 때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풍왕을 호위하고 왔던 박시전내율(朴市田來律), 일본 발음으로는 '에치노 다쿠쓰'가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의 반대 이유는 이렇습니다.
에치노 대왕마마, 피성으로 옮겨간다 하면,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불과 하룻밤이면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이옵니다. 서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옵니다.
부여풍 예기치 못할 일이라니,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에치노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군이 함부로 오지 못하는 것은 이 곳 주류성이 산이 험한 곳에 있어서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옵니다. 만약 낮은 평지에 머문다면 어찌 굳건히 지키겠으며 지금처럼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피성 천도는 아니 되옵니다.
부여풍 전쟁에 불리하다고 해서 백성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대소 신료들은 피성으로 옮겨갈 일을 서둘러 추진하도록 하라!
<해설> 왜국에서 온 장수 '에치노 다쿠쓰'로서는 무장(武將)으로서 군사 전략적인 이유를 들어 풍왕의 피성천도에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최고 실권자였던 복신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문헌에 기록된 바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아마 내심으로는 풍왕의 피성천도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을까, 앞뒤 정황으로 보아 그런 추정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풍왕이 도읍을 피성으로 옮기자고 한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의도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노중국 교수의 견해가 그렇습니다.
*인서트-15. 테입<119> 노중국
(37:25 경제적인 어떤 어려움 이걸 타개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지만 거기에는 한편 정치적인 복선도 있지 않느냐, 주류성은 풍왕이 오기 전에 복신하고 도침이 이미 자리 잡았던 곳입니다. 여기에 이제 풍왕은 모셔다가 왕이 되어진 떠받들려 있는 상황, 이런데 이제 자기가 주도해서 수도를 옮기게 되어지면은 자기중심으로 한 번 뭐랄까 지배세력을 정비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정치적인 복선도 내부적으로는 깔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8:08)
<해설> 부흥백제국의 당면목표가 점령군과의 전투였는데,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가 거느렸던 군대까지 수중에 넣었으니 정치적 실권도 복신에게 넘어갔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니까 복신과 도침이 세력균형을 이룬 상황에서 자신의 위상을 유지해왔던 풍왕으로서는 그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피성으로 천도를 함으로써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한편 복신의 경우, 풍왕의 계산을 훤히 알고 있었음에도 천도 추진을 반대하지 못한 것은, 백제 부흥군과 나당 점령군과의 전쟁은 해를 넘기고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는데, 주류성에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물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효과> (수레, 말 등 행렬지어 이동하는)
부여풍 어서 가자! 백성 모두가 배불리 먹고 지낼 수 있는 피성으로 가자! 뭣들 하느냐, 수레를 빨리 몰아라!
장수1 이럇!
<효과> (수레 달리는)
<음악> (브릿지)
부여풍 이제 기름진 땅이 드넓게 펼쳐지는 이 곳 피성으로 옮겨왔으니 백성들에게는 농사를 장려하고, 장졸들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어 시설을 철저히 갖추도록 하라!
<해설> 백제부흥군이 피성이 가지는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천도를 강행한 것은, 부흥운동군에 나당군에 대해 갖고 있었던 군사적인 우월감도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비록 백제 부흥군이 웅진 동쪽의 성들을 상실해서 당군과 신라군이 통할 수 있는 통로를 내주긴 했지만, 그러나 아직도 남쪽의 거점들은 부흥군의 지배아래 복속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는데-.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서 멈추고)
장수1 대왕마마, 신라군이 우리 백제의 거열성을 공격하여 7백여 명을 참살하였다 하옵니다.
부여풍 무어라? 거열성이 신라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이냐?
장수1 뿐만 아니라 사평성도 이미 신라군의 수중에 넘어 갔으며, 거물성과 내사지성(內斯只城)도 적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하옵니다.
부여풍 우리 군사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장수1 남쪽 해안에서부터 신라군이 워낙 파상적으로 진격해 올라오고 있는지라…
낭독자 문무왕 3년 2월,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을 공격하여 7백 여 명을 죽였으며 거물성,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덕안성을 공격하여 1천70명을 참살하였다.
<해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실린 신라군의 백제 부흥군 공격에 대한 기록 입니다. 여기서 거열성은 경상남도 거창, 거물성은 전라북도 남원부근, 그리고 사평성은 전라남도 순천, 내사지성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으로 추정됩니다. 신라군에 의해 부흥운동군의 주요 세력근거지였던 옛 백제의 동쪽과 남쪽지역에 속속 신라군에게 점령당함으로써 부흥운동군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여풍 달솔 김수(金受)는 들라!
김수 (들어와서)대왕마마, 부르셨사옵니까?
부여풍 지금 당장 사절단을 꾸려서 왜국에 다녀오도록 하라!
김수 예, 대왕마마.
부여풍 우리 백제의 남쪽 주요 지역들이 신라군에게 초략(抄略)당하였으니 하루빨리 지원병을 보내달라 전하라!
김수 알겠사옵니다, 대왕마마.
장수2 (급히 들어오며)대왕마마, 적군이 이곳 피성에서 지척에 있는 덕안성까지 진격해왔사옵니다.
부여풍 뭐라하였느냐? 덕안성까지?
<해설> 덕안성은 지금의 논산시 은진면에 소재한 성이었습니다. 김제에서 볼 때 논산까지 진격해왔다면 바로 코앞까지 쳐들어온 것이지요.
복신 대왕마마,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모두가 죽기를 바라시옵니까. 쥬류 성으로 다시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부여풍 알겠소. (대신들 향해)다시 주류성으로 돌아갈 것이니 채비를 서둘러라!
*인서트-16. 테입<119> 노중국
(38:33 신라가 이제 이 쪽 거창지역 부흥군 격파하고 그 다음에 논산까지 오게 됩니다. 이렇게 오게 되니까 이제 피성하고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워져버렸습니다. 피성은 방어 하기는, 평야지대라 경제력은 좋지만 방어하기는 어려운데 신라군이 논산까지 와버리게 되니까 굉장히 위협을 느끼게 되어집니다. 쉽게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취약점 때문에.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다시 주류성으로 옮기게 되어진 것이죠, 이리 보면은 풍왕의 피성천도 계획은 일단은 실패한. 39:30)
<해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11편>
불타는 백촌강-동아시아 4개국의 국제해전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2.3(일) 00:05-01:00
나오는 사람들
낭독 이승주
장수1 이지환
부여풍 진 웅
장수2, 왜장군 이병용
김수, 김유신 정형석
복신 김대중
왜국왕 남도형
신하1, 2 박영재, 심승한
덕집득, 이호하 김석환
유인원, 가미쓰 백승철
문무왕 차진욱
손인사 장민혁
유인궤 방우호
*시그널 + 타이틀
<효과> (말 타고 달려와서)
장수1 대왕마마, 신라 장수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백제의 거열성을 공격하여 7백여 명의 우리 군사를 참살하였다 하옵니다.
부여풍 무어라? 우리 군사가 신라군에게 7백 명이나 참살 당했단 말이냐?
장수1 뿐만 아니오라 거물성과 사평성이 적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미 함락되었다 하옵니다.
부여풍 허허, 우리 백제의 남쪽 땅이 신라군의 공격에 하나 둘 무너져간다는 얘기가 아니더냐?
<효과> (말 또 한 마리 달려와 멎고)
장수2 대왕마마, 나당연합군이 덕안성을 공격하여 천 명이 넘는 우리 군사가 희생되었다 하옵니다.
부여풍 적군이 덕안성까지? 덕안성이면 이곳 피성과는 지척이 아니냐? 허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여봐라, 달솔 김수(金受)는 들라!
김수 (들어와서)대왕마마, 부르셨사옵니까?
부여풍 지금 당장 사절단을 꾸려서 왜국에 다녀오도록 하라!
김수 예, 대왕마마.
부여풍 우리 백제의 남쪽 주요 지역들이 신라군에게 초략(抄略)당하였으니 하루빨리 지원병을 보내달라 전하라!
김수 알겠사옵니다, 대왕마마.
<해설>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부흥군이 지금의 부안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류성에서 김제 지역의 피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가 서기 662년 12월이었습니다. 주류성이 험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방어하기에는 용이했으나, 농업 생산물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평야지대인 피성으로 옮겨갔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무렵에 백제 부흥군에 대한 나당군의 공격이 다방면에 걸쳐 펼쳐집니다. 앞에서 소개해 드린 내용 중에 신라군이 덕안성까지 침공해왔다고 했는데 덕안성은 지금의 논산시 은진면 지역입니다. 피성이 있던 김제 지역과는 지척간이지요. 풍왕은 부랴부랴 왜국에 사신을 보내 지원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왜국의 지원을 마냥 기다리고 있기에는 부흥군의 사정이 너무 위태로웠습니다.
복신 대왕마마 이제 결단을 내리시지요.
부여풍 좌평 복신은 짐이 어떤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시오?
복신 대왕마마께서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 곳 피성으로 천도를 하지 않았사옵니까. 헌데, 지금 적군의 창끝이 성벽을 넘어오고 있사옵니다. 주류성으로 돌아가시겠사옵니까, 여기 앉아서 죽음을 맞이하시겠사옵니까.
부여풍 으음…(맥빠진)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야겠소. (신하들 향해)주류성으로 환도할 것이니 대소신료들은 준비를 서두르라!
<해설> 피성에서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된 때가 서기 663년 2월입니다. 피성으로 옮긴 지 불과 석 달 만에 되돌아온 셈이지요.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의 얘깁니다.
*인서트-1. 테입<116> 김영관
(1:36:55 반대를 무릅쓰고 피성으로 풍왕이 천도를 합니다. 그런데 불과 석 달만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석 달만에 돌아올 수박에 없었던 것은 부흥운동군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역시 신라군도 부흥 운동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병력을 보내고 전투를 각지에서 벌이고 있었습니다. 들판에 위치한 피성에서는 신라군의 공격을 받기 쉽고 그리고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풍왕도 다시 방어에 유리한 주류성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1:37:33)
<해설> 백제 부흥군이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일본서기는 이렇게 설명해놓고 있습니다.
낭독자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 주(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덕안성 등의 주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이 적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류성으로 돌아왔으니…
<해설> 평화시기라면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피성이 좋은 도읍지일 수 있었겠지만 나당연합군, 특히 신라군이 전방위에서 압박을 해오고 있는 상황이 닥치자, 어쩔 수 없이 방어에 용이한 주류성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죠.
<효과> (수레 굴러가고 짐 옮기는 등 북적)
복신 군사들은 서두르라! 주류성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방어태세를 갖춰야 할 것이니라!
<해설> 그런데, 부흥군이 그 근거지를 피성에서 주류성으로 다시 옮겼다는 얘기는, 부흥군내부의 역학관계 측면에서 볼 때, 복신의 권력이 다시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풍왕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계명대 노중국 교수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인서트-2. 테입<119> 노중국
(40:01 도침을 죽이고 난 다음에는 이제 도침 군대까지 다 장악을 해버렸거든요. 이러면서 사실은 실세는 실권은 복신이 잡고 있는 게 맞습니다. 도침이 제거되고 난 다음에 풍왕은 다만 제사만 주관할 뿐이다, 이런 표현이 나오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실권은 복신이 갖고 있는 거라. 여기에 대해서 뭔가 좀 풍왕이 자기 나름의 운신의 폭을 좀 마련해 보기 위해 가지고 피성으로 천도 계획을 했다가 그 천도를 하기는 했습니다. 했지마는 불과 얼마 안 있어 가지고 또 밀려서 신라의 압박에 의해가지고 다시 인제.40:47)
<해설> 자, 피성 천도가 실패로 돌아가 왕으로서의 위신이 실추된 풍왕과 자신의 권력기반을 더욱 강화한 실권자 복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럼 잠시 시선을 돌려서 바다 건너 왜국에서는 백제부흥군의 구원요청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살펴보기로 할까요?
김수 백제국 대왕마마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온 달솔 김수입니다.
왜국왕 먼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헌데, 사절단 일행 중에 당나라 사람이 포함됐다고 했는가?
김수 그렇사옵니다. 대왕마마께서 특별히 당나라 포로 속수언(續守言)을 선물로 보내셨사옵니다.
왜국왕 음, 포로로 잡혀온 저 자는 관등이 무엇이었는고?
<해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달솔 김수가 사신으로 건너갈 때 속수언이라는 포로를 데리고 가서 왜왕에게 바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측에서는 무슨 목적으로 그를 딸려 보냈을까요?
부여풍이 백제로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뒤, 왜국에서는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한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으나 가장 결정적인 지원이라 할 수 있는 군대파견이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인서트-3. 테입<119> 노중국
(51:16 군선도 만들어야 되고 군대도 다시 이제 징발도 해야 되고 그 과정에서 왜 내에서의 어떤 반대, 반대세력, 반대하는 여론 이것도 무마도 해야 되고 이런 거죠. 일본쪽 자료를 보면 이마향 같은 지명설화가 나오는데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가 결국은 하지 못했다 이런 얘기, 배를 건조했는데 이게 머리하고, 고물과 이물이 뒤바뀌어지고 불이 나고 이랬는데 그거는 패망할 징조를 나타냈다, 뭐 이런 얘기들이. 51:59)
<해설> 일본서기에 실린 해당기록 몇 줄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신라를 정벌하려고 배를 만들어 끌어왔는데 밤중에 까닭 없이 배의 이물과 고물이 흔들렸다. 뭇 사람들이 전쟁에서 패할 것을 알았다. 파리떼가 서쪽으로 향해서 날아갔는데 그 크기가 열 아름쯤 되고 높이는 하늘까지 닿았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군이 패배할 징조임을 알았다.
<해설> 일본서기에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는 것은 왜 조정 내에서 백제 부흥군에 대한 지원군 파견을 반대하는 여론이 상당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당나라군 포로 중에서 고위인물이었던 속수언을 달솔 김수가 왜 조정에 바쳤다는 것은, 군사지원이 화급하다는 것을 재인식 시키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나 판단됩니다.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왜국 조정이 백제 사신 김수가 사신으로 도착하고 나서 바로 군대를 파견한 것으로 나옵니다.
낭독자 천지천황 2년 3월, 전 장군(前 將軍) 가미쓰게누노기미와카코(上毛野君稚) 등 2만 7천 명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였다.
<해설> 천지2년이면 서기 663년인데, 공주대 양종국 교수는 이 때 이미 신라군이 백제 남부지역에서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펴며 북상하고 있었고, 그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해서 왜군 2만7천 명이 건너와서 싸운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서트-4. 테입<117> 양종국
(1:52:10 부여풍하고 복신군대를 전라남도 쪽으로 해서 계속 죽 점령해 올라와요. 논산 부근까지. 그런 군사활동을 벌이거든요. 벌이는 과정에서 663년 3월에 2만7천 명이 건너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아마 제가 지금 현재 제 지식으로 느끼기에는 그 무렵에 본격적인 그러한 부흥군에 대한 정벌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신라군에 의한 단독활동이든 당나라 손을 잡고든. 그게 벌어지면서 전라남도 쪽부터 죽 거슬러 올라오는데 곳곳을 정복을 하면서 신라군이. 그런 과저에 일본군 2만7천 명 넘어온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 보니까.1:52:56)
<해설> 그런데 노중국 교수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이 때 파견된 것으로 기록된 2만7천 명의 왜군은 3월에 건너온 게 아니라 이보다 늦은 8월에 출동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쨌든 왜국이 이 시기에 백제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서 지원군을 파견했거나, 혹은 대대적인 군사 파견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런데 이 대목에서, 부흥백제국의 임금인 풍왕과 실권자였던 복신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집니다.
낭독자 이 때 복신은 벌써 병권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과 점점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고 있었다.
<해설> 구당서 백제전에 이렇게만 적혀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갈등요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짚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흥백제 국의 최대의 당면목표가 나당군과 싸워서 백제왕조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것인 바에, 군사를 지휘하는 병권을 복신이 거머쥐고 있었으니 풍왕으로서는 왕의 권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부여풍 좌평 복신을 들어오라고 명했거늘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이냐?
신하1 예, 대왕마마. 연락을 했사온데 군사출동 준비가 화급해서 올 수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부여풍 이래봬도 짐이 일국의 군주이거늘, 왕명을 거역한단 말이냐? 병권을 손아귀에 쥐었으니 임금은 물러나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는 말 아니더냐?
신하1 아무래도 좌평 복신에 대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심이 옳을 듯 하옵니다만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지라…
부여풍 으음, 아니 되겠다. 예전에 도침이 거느리던 군사를 비롯해서 복신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장수들을 은밀히 만나서 짐의 뜻을 전하도록 하라.
신하1 그리하겠사옵니다, 대왕마마.
<해설> 이처럼 풍왕은 복신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할 궁리를 했겠지요. 그렇다면 복신의 처지에서 당시 상황을 진단하자면 어떠했을까요?
<효과> (기병, 보병들 모여서 웅성거리는)
복신 기병들은 사비성에서 진격해오는 당나라군의 퇴로를 차단할 것이며, 남쪽에서 올라오는 신라군은 보병이 담당할 것이다. 내일 아침에 출정할 것이니 각자 병영으로 돌아가서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라!
<효과> (병사들 해산하는)
신하2 (말 타고 와서)좌평나리, 당나라군과 신라군에 대한 방어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있는지 보고하라는 대왕마마의 명이십니다.
복신 군사는 나 복신이 부릴 것이니 대왕께서는 가만히 지켜보시는 것이 돕는 것이라 누차 얘기했거늘!
신하2 이번에는 대왕마마의 심기가 편치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복신 심기가 편치 않으면? 또 피성으로 도읍 옮기자는 소리나 하겠다는 것이야 뭐야? 차라리 이럴 바에는…
신하2 (은밀하게)좌평 나리, 그렇잖아도 몇몇 장수들끼리 나리를 모시고 마음 속에 품은 얘기들을 털어놓았으면 합니다만…
복신 그래? 잘 됐구나. 오늘밤에 불러 모으도록 하라.
<해설> 복신으로서는 자신도 엄연히 왕족인 바에, 부여풍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자신이 왕이 되어 나당연합군과 일사불란하게 결전을 치르는편이 나라를 위해서도 더 낫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서트-5. 테입<119> 노중국
(43:36 한쪽은 견제를 하려고 하고 한 쪽은 이게 도리어 나당군하고 싸우는데 방해적인 측면이 된다, 이렇게 될 때는 사이가 좀 틀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복신 쪽에서는 차라리 이럴 바에는 내가 그냥 치고 왕의 자리까지 차지해가지고 나당군하고 싸우는 게 더 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걸 이제 謀叛心叛心이 있다는 표현으로 자료에 나타난 게 아니냐 이렇게 봅니다. 44:20)
<해설> 일본서기에 의하면 ‘풍왕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 즉 반심(叛心)을 가졌다고 의심하고…’ 이렇게 적고 있어서 실제로 복신은 모반하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풍왕이 오해했을 수도 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당서 백제전을 보면 복신이 명백히 거사를 꾸민 것으로 돼 있습니다.
신하2 (들어와서)좌평나리, 대왕마마께서 또 사람을 보내셨사옵니다.
복신 으흠, 나는 저 쪽 굴방에 들어가 있을 터이니 대왕께는 몸이 아파 드러누워서 꼼짝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전하라고 하라.
신하2 알겠사옵니다. 헌데, 만일 대왕마마께서 병문안을 하겠다고 굴방으로 오시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복신 그럼 잘 된 것이지. 좁은 굴방에 대왕이 홀로 들어오면 내가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거사를 이행할 것이다. 알겠느냐?
신하2 예, 알겠사옵니다.
낭독자 부여풍과 사이가 나빠진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방에 누워서 부여풍이 문병오기를 기다렸다가 덮쳐 죽일 것을 꾀하였다.
<해설> 신당서 백제전에 올라 있는 기록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지금 백제 연구자들 다수의 견해를 좇아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위금암 산성을 백제부흥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주류성으로 설정하고 얘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곳을 주류성으로 비정하는 데에는, 이 곳에 있는 굴방, 혹은 굴실의 이름도 한 가지 근거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위금암산성의 울금바위에는 3개의 굴방이 있는데, 이 곳 부안 주민들에 의해서 이들 굴방이 각각 원효굴, 베틀굴, 복신굴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원효굴은 서기 676년에 원효대사가 나라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주민들을 위무하고자 머물렀다는 굴이고, 베틀굴은 부흥운동 당시 병정들의 옷을 지어주기 위해서 아녀자들이 베를 짰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복신굴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해온 것처럼 복신이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병이 걸렸다는 핑계를 대고 우거하던 문제의 굴방입니다. 그건, 그렇고, 복신이 먼저 풍왕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 배경을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으로부터 들어보기로 하죠.
*인서트-6. 테입<116> 김영관
(1:38:25 피성천도와 다시 주류성으로의 천도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복신은 풍왕이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없는 그런 인물이라는 것을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하에 풍왕을 제거하려고 하는 어떤 모종의 제스처를 취했을 거고 그 제스처는 복신이 단독으로 계획한 것이라기보다는 풍왕을 따르는 세력과 복신을 따르는 세력간에 권력다툼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봅니다, 그 권력다툼의 과정에서. 1:39:10)
<해설> 그렇다면 복신의 거사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음악> (브릿지)
신하1 (급히 들어오며)대왕마마, 큰일났사옵니다.
부여풍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신하1 좌평 복신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시옵니까?
부여풍 병이 나서 몸져누웠다지 않느냐. 그래서 짐이 문병을 가려던 참이었느니라.
신하1 대왕마마, 지금 복신이 어마어마한 음모를 꾸미고 있사옵니다.
부여풍 음모라니? 아픈 사람이 무슨 음모란 말이냐?
신하1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좁은 굴방에 은거해 있다가 대왕마마께서 홀로 문병을 하시면 그 때를 기다려 대왕마마의 옥체를 시해하고…
부여풍 뭐,뭐라고 하였느냐? 네가 정녕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렷다?
신하1 옛 도침 대장군의 수하 장수가 화급히 역모를 알려온 것이옵니다.
부여풍 으음, 복신, 너 이 놈이….
<해설> 복신의 풍왕 시해 음모에 대한 정보가 사전에 노출되어서 풍왕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풍왕이 반격을 할 차례인데….
<효과> (풍왕 일행 갑옷입고 걸어가는)
신하2 대왕마마,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옵니까?
부여풍 좌평 복신이 병이 나서 몸져누워 있다는데 짐이 모른 체 할 수 없지 않느냐? 문병을 하러 왔으니 안내하도록 하라.
신하2 예, 대왕마마. 하오나 좌평나리가 누워 있는 굴방은 워낙 협소한지라 주변을 물리시고 대왕마마 혼자서 들어가시는 것이…
부여풍 무엄하구나! 이 나라의 국왕이 찾아왔는데도 나와서 맞이하지 못하고 컴컴한 굴방에 누워 있을 정도라면 송장이나 다름없는 중병이 아니겠느냐? 여봐라, 들어가서 병자를 끌고 오너라!
신하1 (군사들 달려들어가며)예, 대왕마마.
부여풍 (칼 빼들고)너희놈들 중에서 반항하는 놈은 모조리 목을 벨 것이다!
<해설> 이렇게 해서 복신의 거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졸지에 부흥백제국의 최고 실권자에서, 반역을 획책한 죄수 신분으로 포박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이 때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기 어려워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부여풍 복신의 죄가 짐이 말한 바와 같다. 이 죄인의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낭독자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나서서 말했다.
덕집득 대왕마마,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복신 네 이노옴! (침 “퉤” 뱉고) 이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어찌 네놈이 그 따위 언사를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이냐!
부여풍 죄인의 목을 베어라!
신하1 예, 대왕마마.
<효과> (칼 빼드는)
<해설> 일본서기에는 복신에 대한 참수형과 관련해서 그 표현이 다음과 같이 살벌하게 돼 있습니다.
낭독자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복신의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해설>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풍왕이 복신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복신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풍왕을 지지하는 세력 역시 어느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풍왕을 지지했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규해(?解)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규해는 처음에는 왜국에 있었으나 복신의 요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풍왕은 왜국에서 귀국한 그를 석성(石城)이라는 성에 머물게 하는데,
낭독자 사신 이누가미노기미(犬上君)가 석성에서 규해를 보았는데 규해가 복신의 죄를 말하였다.
<해설> 일본서기에 이렇게 올라 있는 것으로 봐서 평소에 규해는 군사권을 거머쥔 복신의 전횡을 못 마땅하게 여겼고, 풍왕이 복신을 제거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정됩니다.
그러나 사서들에는 복신을 일컬어 어질 량(良)자를 써서 ‘훌륭한 장수’ 즉 양장(良將)이라 기록돼 있습니다. 풍왕이 그를 사로잡고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몰라 망설였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군심과 민심의 이반과 동요가 염려스러웠기 때문이겠지요.
*인서트-7. 테입<119> 노중국
(47:18 쉽게 죽일 결심을 못 내려요. 죽여야 될 거냐 말아야 할 거냐 굉장히 주저주저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도 왜 그랬겠느냐, 복신을 죽였을 때 오는 여파를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결국은 德執得이라는 사람이 주장해서 죽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죽인 복신에 대해서 양장이다, 훌륭한 장수다, 이런 평이 나오는 것을 보면은 복신의 죽음은 부흥군의 軍心, 이걸 확 흐트려놓은 거지요. 이걸 이제 나당 쪽에서 탐지를 안 할 수 없는 거지요. 때는 이 때라는 겁니다. 48:00)
<해설> 어쨌든 의자왕의 당나라에 대한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백제 부흥을 위해 나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왔던 복신의 생애가 이렇게 막을 내렸고, 이제 부흥 백제국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당시에 당나라군과 신라군의 움직임은 어떠했을까요?
복신이 풍왕에 의해 살해되기 이전에 유인원은 당나라 조정에 추가 지원군을 요청합니다.
유인원 황제페하, 우리 당나라군이 신라군과 함께 야음을 틈타 진현성을 공격하여 적군 8백여 명의 머리를 베고 이제 겨우 신라에서 군량을 수송할 수 있는 통로를 열었사옵니다. 그러나 웅진성에 주둔하고 있는 1만 명의 군사만으로는 백제의 잔적을 상대하기 어려우니 구원군을 보내주시옵소서.
<해설> 그러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군사 7천 명을 징발하여 좌위위(左威衛)장군 손인사(孫仁師)로 하여금 바다 건너 백제로 인솔해 가도록 명합니다. 김영관 연구관은 이미 이 당시부터 당나라군에 대한 전략을 둘러싸고 풍왕과 복신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인서트-8. 테입<116> 김영관
(1:40:43 그 7천명이라는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그게 정예병력일 경우에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겁니다, 더군다나 신라군과 다시 연합을 하게 되고 그리고 그 무렵에는 당나라군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잠깐 멈추는 시기입니다.그러기 때문에 당나라군을 정예병력을 백제에 보낼 수가 있었고 그리고 그 정예병력이 손인사의 정예병력이 백제의 웅진도독부로 다시 들어오자 복신과 풍왕은 거기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의견충돌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이 됩니다. 1:41:32)
<해설> 손인사가 이끄는 당나라 정예군 7천 명은 덕물도, 즉 지금의 덕적도를 거쳐서 웅진성에 도착한 다음 유인궤 등이 이끌고 있던 기존의 군사와 합류하게 됩니다. 한편 신라 역시 이 무렵에 덕안성을 이미 점령하고 백제에 대한 압박작전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때 마침 부흥백제국 내부에서 심각한 내분이 발생한 것입니다.
문무왕 무엇이라? 복신이 반역을 꾀하다 발각 되어서 부여풍에 의해 참수 되었단 말이오? 허허허. 백제의 여적을 이끌던 장수가 사라졌으니 이제야말로 그들을 소탕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김유신 그러하옵니다. 더구나 당나라 조정에서 장수 손인사에게 정예병 칠천을 보내왔으니 나당연합군의 이번 전투는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 옵니다.
문무왕 이번 전투에는 신라의 모든 장수들과 함께 짐이 직접 전장에 나설것이니 출정채비를 갖추도록 하라!
<해설> 문무왕은 김유신, 김인문, 천존, 죽지 등의 고위 장군을 거느리고 웅진부성을 향해 출정했는데 기록에 따라서 문무왕과 함께 출정한 장군의 수를 28명이라고도 하고 38명이라고도 적고 있습니다. 백제 멸망 이후 신라가 이처럼 많은 수의 장군들을 대거 출동시킨 사례가 없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부흥백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백제에서는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었을까요?
부여풍 왜국으로부터는 어찌하여 지원군이 아직 오지 않고 있는 것이냐? 그리고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간 사신은 또 어찌 되었느냐?
신하1 대왕마마, 왜국으로부터는 머지않아 군사를 보내올 것이옵니다. 하오나 고구려로부터는 좋은 대답을 얻지 못한 모양이옵니다.
<해설> 그런데, 의자왕 시기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고구려가 백제를 지원했다는 기록이 없는데, 부흥운동 기간 중에도 고구려가 백제에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나당군에 의해서 백제 부흥군마저 무너지고 나면 주변정세가 고구려에게 절대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될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고구려는 왜 군사적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요?
*인서트-9. 테입<119> 노중국
(22:54 당이 백제를 공격을 할 때 거기에만 그친 게 아니라 고구려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서북쪽에서 계속 긴장을 조성시켜 놓았다는 겁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못 하도록. 이 점을 하나 들 수가 있고요, (아마 그게 인제 제일 큰 요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신하는데-삭제) 당의 작전에 고구려가 적절하게 대응을 하지 못했다 하는 그 점이죠. 그 다음에 이 시기에 인제 고구려 자체가 내부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워. 귀족간에 내분도 있고 또 자료에 보면은 군신들이 사치에 빠져 있다든가 이런 내용들이 이제 종종 보입니다. 23:53)
<해설> 비록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은 중단한 체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고구려 서북쪽 변경에 소규모 공세를 지속적으로 벌여서 긴장을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섣불리 군사를 빼내서 백제를 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중국 교수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신하1 대왕마마, 지금 손인사가 추가 지원병 7천을 이끌고 웅진에 도착했고, 신라 역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웅진에 합류하였다 하옵니다. 머지않아 저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터인데 방비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부여풍 으음…장수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거점 성들을 이탈하지 말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철저히 갖추도록 하라!
<해설> 나당연합군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장수들이 한데 모여 어느 때보다 주도면밀하게 공격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백제의 경우 그동안 부흥군을 진두 지휘해온 복신이 사라지고 군사 지휘 경험이 없는 풍왕이 그 지휘권을 대신하게 됐으니 군사들이나 백성들의 사기가 예전과 같지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해설> 백전노장을 잃은 백제 부흥군은 나당연합군의 파상공세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백제 부흥군을 구원하러 온 왜군의 행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계명대 노중국 교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풍왕이 복신을 살해했을 당시에는 왜국으로부터 지원군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상황으로 설정했습니다만, 고려대 김현구 교수팀은 ‘일본서기 한국관계 기사 연구’에서 일본서기에 나타난 대로 왜국이 2만7천 명의 군대를 663년 3월에 이미 백제에 파견한 것을 기정사실로 해석합니다. 우선 노중국 교수가 ‘백제부흥운동 이야기’에서 주장한 내용 일부를 들여다보기로 하죠.
낭독자 왜군 2만7천 명이 3월에 파견되어 한반도에서 군사활동을 했다면 당연히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삼국사기나 중국측의 어느 사서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3월에서 6월까지 활동한 것으로 나오는 2만7천 명의 왜군은 이보다 늦은 8월에 출동한 것으로 봐야 타당할 것이다.
<해설> 일본서기에는 2만7천명의 왜군이 3월에 바다를 건너오자마자 ‘신라를 공격했다’고만 나와 있고 그 이후 몇 달 동안의 기록이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실제로는 8월에 파견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주장입니다. 이번에는 김현구 교수팀의 분석을 소개하기로 하죠.
낭독자 3월에 바다를 건너온 왜국의 백제 구원군이 복신이 풍왕에 의해 살해된 뒤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왜국의 지원군이 백제 부흥군 내부의 대립과 연계돼 있음을 시사한다. 3월에 도착한 본대가 하루빨리 주류성에 입성하여 웅진성과 사비성을 공격하지 않고 8월까지 대기만 하고 있었던 것은, 왜국의 지원군이 주류성에 합류했을때 그 주도권을 놓칠 것을 우려한 복신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로소 8월에 백촌강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신라의 북상을 견제하면서 복신이 제거되기를 기다린 셈이 된다.
<해설> 복신이 제거되자 왜국 구원군 본대는 바로 주류성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는 이미 당나라에서 손인사의 군사가 웅진성에 입성해버린 뒤였기 때문에 왜군은 외곽에서 기다리다가 웅진성과 사비성 공격의 기회를 놓쳤다는 얘기가 됩니다.
3월에 건너왔든 8월에 왔든 왜국으로부터 2만7천 명의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현해탄을 건너온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백제와 왜가 화친관계를 가져온 것이 수백년에 이르지만 2만7천에 이르는 대군을 지원군으로 파견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 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을 태우고 출정한 일본의 전선이 천 척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백제에 대한 지원군 파견은 여자천황인 제명천황 시기부터 그의 아들인 중대형(中大兄), 즉 나카노오에 황태자가 중심이 돼서 추진을 해왔는데, 왜가 이처럼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게 된 배경을 노중국 양종국 두 교수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인서트-10. 테입<119> 노중국
(52:44 중대형 황태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내부적으로 그런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백제가 망함으로써 미치게 될 나당의 압력을 사전에라도 차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라는 게 부흥군을 살려놓는 것, 부흥군이 있음으로써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방파제가 된다 보고 그래서 상당히 어려운 결단입니다. 사실 2만7천의 군대라는 건 적잖은 군대 인데요 거기다 군량까지 하게 되면은 큰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파병을 단행한 게 아니겠느냐. 53:34)
*인서트-11. 테입<117> 양종국
(:54:10 만약에 그렇게 전쟁에서 자기들이 승리를 해서 백제가 진짜 부흥이 됐다, 그러면 백제 지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질 것 아녜요.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테고 또 그 동안의 부흥운동과 얽혀서 계속 군사 주고받고 구호물자보내고 그러다보니까 이미 신라하고 당나라하고 일본과의 관계는 나빠진 상태지요. 나빠진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백제를 부흥시키는 게 자기들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것이고, 그런 경우에 얻을 수 있는 열매도 가장 크고 그런 부분이 하나 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내부적인 불안, 백제가 망하는 경우에 다음에 공격당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라고 하는. 1:54:50)
<해설> 이제 백제 부흥군과 왜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과의 일대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음악> (브릿지)
<효과> (병영, 군사들 달려다니는 등 북적거리는)
<해설> 여기는 웅진부성(熊津府城)-. 유인궤가 이끄는 기존의 당나라 군사에다 손인사가 당나라에서 지원군으로 끌고 온 군사,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과 28명의 장수들이 이끌고 온 군사들로 하여 웅진부성 일대는 나당군으로 온통 들끓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나당 수뇌들의 작전회의가 열리는데-.
손인사 내가 우리 당나라군 7천을 거느리고 드디어 이 곳 웅진부성에 당도 하였는데 우리 당나라 군사만으로 적군을 능이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유인궤 군사 규모로는 적군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웅진부에 남아 있던 기존의 당나라군이 만 명이었는데 이태전의 전투에서 천 명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9천만 남았습니다. 우리 당군의 전력을 다 합해봐야 만육천 명에 불과합니다.
손인사 적군의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유인궤 부여풍의 명을 따르는 무리들에다 왜국에서 2만7천의 군사가 천여척의 함선을 타고 건너와 있습니다. 우리 당군이 군사의 수만으로는 저들을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손인사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군이 있지 않소? 신라군 말입니다.
김유신 허허허, 이번 싸움은 당나라 혼자 치르는 전쟁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의자왕을 굴복시킨 3년 전의 전쟁에 이어서 이번에도 나당군이 연합작전을 펴야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유인궤 그렇다면 신라에서 출동한 군사는 그 수가 얼마나 됩니까?
<해설> 이 전투에 나선 신라의 군사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무왕이 직접 김유신, 천존, 죽지 등 28명의 장군들과 함께 친정(親征)에 나선 것을 감안할 때,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서기 660년 백제 정벌당시의 전력인 5만 명 정도의 대규모 군사가 동원됐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당연합군을 통틀어 모두 6만6천 명 가량이 동원됐을 것이다, 김영관 연구관이 ‘백제부흥운동연구’라는 논문에서 산출한 군사 규모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당연합군의 수뇌부 쪽에서 군사잔적을 어떻게 세우는지 살펴보기로 할까요?
김유신 적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사전에 가림성을 공략하여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손인사 가림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김유신 주류성으로 나아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수륙 요충지로서 이 성이 우리의 가장 큰 장애물이오. 따라서 이 성을 무너뜨린 다음에 주류성으로 진군하지 않으면 적군으로부터 배후를 역습당할 수가 있어요.
손인사 가림성의 방어시설은 어떻습니까?
김유신 문제는 가림성이 지세가 험해서 공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해설> 지금 나당연합군 수뇌부에서 가림성 공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데요, 가림성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에 있는 성흥산성을 일컫습니다. 이 곳은 부흥군의 주요 거점 중의 하나로서 동성왕대 이래로 사비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요충지였습니다. 사비도성과 웅진성에서 금강입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에 버티고 있는데 그 성을 백제 부흥군이 차지하고 있으니 나당연합군에게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웅진도독부의 군사책임을 맡고 있는 유인궤가 상식을 뛰어넘는 전술을 제안합니다.
유인궤 가림성은 지세가 험하고 견고해서 좀처럼 무너뜨리기 어려운 곳입니다. 백제 부흥군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지키기만 한다 해도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우리 연합군의 손실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유신 그렇다고 가림성을 지나쳐서 바로 주류성으로 군사를 몰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유인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류성은 방비가 허술하지만 부여풍 일당의 심장부입니다. 그 곳이 무너진다면 다른 곳들은 자연히 항복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손인사 음, 듣고보니 그것이 좋을 듯합니다. 헌데 그것이 어디 나오는 무슨 전법이오?
유인궤 허허허, 지금 내가 만든 것이오. ‘피실격허’라고 할 수 있지요.
<해설> 유인궤가 주류성을 먼저 공격할 것을 제의하면서 했다는 말 가운데 ‘피실격허’라는 말이 사료에 올라 있는데, 피할 피(避), 열매 실(實), 칠 격(擊), 빌 허(虛)를 쓰는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실한 곳은 피하고 빈 곳을 친다’는 뜻으로서, 방비가 충실한 가림성은 비켜가고 상대적으로 허술한 주류성을 바로 치자는 의미였습니다. 나당연 합군은 구체적인 공격계획을 세우고 진군루트를 결정합니다.
*인서트-12. 테입<119> 노중국
(58:17 나당연합군 수뇌부들이 웅진에서 만나가지고 작전을 짜가지고 두 편으로 나눕니다. 수군은 주로 당군이 거느리고 군량선까지 하고 육군은 문무왕을 비롯한 신라군이 이끌고 가서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함께 주류성에 도착해서 합동작전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수군은 백강을 따라 내려갔고 육군은 말 그대로 신라군이 꾸린 육군은 육지로 해가지고 주류성 쪽 부안쪽으로 갔는데 수군이 내려가다가 왜군하고 한판 붙은 게 그게 백강전투입니다.59:01
<음악> (브릿지)
<해설> 그렇다면 백제 부흥군쪽에서는 어떤 전략을 짜고 있었을까요?
이번에는 풍왕이 주요 거점 성들의 장수들과 전략을 숙의하는 모습을 잠시 살펴볼까요?
장수1 대왕마마, 이제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떠나 곧 출정할 것으로 보이옵니다.
장수2 저들은 필시 가림성을 먼저 공격해올 것이옵니다.
부여풍 내 생각도 그러하다. 적들은 가림성를 비롯한 외곽을 친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 곳 주류성을 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장수들은 자신이 맡은 거점성에서 이탈하지 말고 적의 공격을 철저히 막아내도록하라!
신하1 (들어와서)대왕마마, 왜국의 구원군 본대가 나당군을 격퇴하기 위해서 곧 백강에 도착할 것이라 하옵니다.
부여풍 잘 되었다. 이 곳 주류성은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우리도 백강으로 가자!
<효과> (군사들 몰려가는)
<해설> 풍왕은 결국 도읍지인 주류성에는 적은 수의 수비군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백강으로 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인궤의 ‘피실격허’ 전략에 허를 찔리게 되는 셈이죠. 뿐만 아니라 풍왕이 본거지인 주류성에 머물러서 방비를 하지 않고 왜의 구원군을 맞이하기 위해서 백강으로 나간 데에서 우리는, 풍왕이 자신의 세력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왜군에 의지하고자 하는 심사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백제와, 왜, 그리고 신라와 당나라가 모두 참가하는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해전이 백강 입구, 즉 백강구에서 벌어지는데 우선 이 백강구 혹은 백강에 대한 정리부터 하고 넘어 가기로 하죠.
낭독자 손인사, 유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 등은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함께 주류성으로 진군하였다. 유인궤가 백강구에서 부여풍의 군사를 만나서…
<해설> 앞에서 소개한 내용은 구당서 백제전에 실려 있는 이른바 백강구 전투의 시작부분에 해당하는 대목입니다. 삼국사기도 마찬가지로 그 해전이 벌어졌던 곳을 백강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백강이라 하지 않고 백촌강을 칭해서 백촌강 전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금강을 웅진강이 아닌 백강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보입니다. 그렇다면 전투가 벌어진곳 역시 금강입구를 일컫는 말일까요? 양종국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3. 테입<117> 양종국
(1:56:47 금강 연안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중국에서 사료로 정리한다고 그럴 때 지금까지 써온 명칭으로 보면은 백강으로 쓰면 안 되고 웅진강으로 써야 돼요. 웅진강전투 이런 식으로 써야 되거든요, 그렇게 계속 써왔으니까. 그런데 백강이라고 거기서만 쓰거든요. 그 전까지는 웅진강으로 금강을 (칭)하다가. 백강이라고 중국이 쓴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제에서 금강을 백강이라 해서 같은 백강이고 그러니까 금강을 봐야 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걸 백촌강이라고 했고 그러니까 제가 느끼기에는 중국 역사가가 그 부분을 기록하는데 어떤 사료를 활용했는지 그 저본은 지금 나와 있지 않으니까 모르지마는. 1:57:34)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손인사 유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이 수군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갔다’고 했는데, 만일 백강 역시 웅진강과 같은 금강을 나타내는 말이라면 같은 문장에서 한 번은 웅진강으로 적고 또 한 번은 백강으로 적을 수 있겠느냐, 이런 얘깁니다. 물론 당시에는 같은 금강 줄기라 하더라도 지역마다 이름이 달랐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 백강구 혹은 백촌강을 지금의 금강하구, 동진강 하류, 군산포, 줄포, 내포, 혹은 아산만의 남쪽 지역 등 여러 곳으로 비정하는 견해들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한반도 서해안의 동진강 하구 일대로 보는 견해가 다수입니다.
이호하 대왕마마, 소장은 백제구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발대러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 ‘이호하라노기미오미’(虜原君臣)이옵니다.
부여풍 허허허허, 나는 백제국의 국왕이니라. 그대가 이 많은 선단을 이끌고 이 곳 백촌강에 찾아왔으니 당나라 수군쯤은 문제 없이 격퇴하수 있을 것이다. 먼길 오느라 노고가 많았을 터이니 짐이 왜국 장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겠노라, 허허허.
이호하 감사하옵니다, 대왕마마.
<해설> 간단한 환영연회가 끝나고 당나라 수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싸움에 동원된 당나라 전선은 170척이었습니다.
이호하 자, 당나라 수군을 향하여 돌격하라!
<효과> (배들 돌격하여 부딪치는 등)
(화살 날아오는)
이호하 적군이 활을 쏘지 않느냐? 궁사들은 무얼 하느냐? 활을 쏘아라!
<효과> (화살 날아가는)
왜장군 장군, 당나라 수군이 워낙 굳세게 진을 치고 있어서 이대로 공격을 계속해봤자 우리만 손해입니다. 군사를 물려야 합니다.
이호하 안 되겠다. 후퇴하라! 배를 돌려라!
낭독자 당나라의 군장이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에 늘어섰다. 왜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당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왜가 불리하여 물러났다.
<해설> 이 때 벌어진 일차 해전에서 왜군은 승세를 잡지 못하고 물러났고 당나라군도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춘 체로 진지를 정비하는 데에 치중합니다. 당나라군으로서는 왜군의 병선이 많은데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기습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겠지요. 말하자면 왜군 선발대와 당군이 맞붙은 1차 해전은 일종의 탐색전이었습니다. 이 때가 서기 663년 8월 27일이었습니다. 다음 날인 8월 28일-.
가미쓰 대왕마마, 소장은 ‘가미쓰케누노기미와카코’이옵니다. 지원군 본대 1만7천을 이끌고 백제를 돕기 위해 왔사옵니다.
부여풍 잘 왔소. 이제 왜군의 군선이 천 척이나 되고 군사가 2만7천에 이르니 우리 백제의 수군과 힘을 합하면 당나라 수군 따위가 무어 두렵겠는가, 하하하하.
가미쓰 그러하옵니다. 두려울 게 없사옵니다. 당장 선발대와 합류하여 당나라 수군을 요절내겠사옵니다. 노를 저어라! 전진하라!
<효과> (북소리 울리는)
<해설> 그러나 왜군 백제 연합군은 당나라 수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대패를 당하고 맙니다.
*인서트-14. 테입<117> 양종국
(1:58:41 전투 내용을 보면은 전투내용에 일본 배가 불타니까 4백 척이 그러면서 海水가 빨개졌다, 바닷물이 빨개졌다, 그러니까 전투는 바다에서 일어난 게 분명하고 기록대로 보면은 웅진강을 나와 가지고 바다를 통해서 백강이라고 하는 백촌강 그리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는 과정에 그 입구 바다에서 싸움이 벌어진 거죠. 그와 같이 본다고 그러면은 결국 거기에서 전투장소는 제가 볼 때는 동진강 하구가 될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전투가 벌어진 걸로 봐야 될 것 같아요 동진강 하구에서. 1:59:19
<효과> (해상 전투-(불타고) (활쏘고) (물에 빠지는 등) (아우성)
신하1 대왕마마, 이제 승산이 없사옵니다.
부여풍 주류성은 어떻게 됐다 하느냐?
신하1 주류성도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하옵니다. 빨리 피신하시옵소서.
부여풍 그래, 그래. 배를 띄워라. 헌데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고구려로 가자.
<해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12편>
끝내 이루지 못한 부흥의 꿈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2.10(일) 00:05-01:00
나오는 사람들
장수1, 김부식 이지환
장수2, 유민 2 이병용
문무왕, 왜장수 차진욱
여충승 김석환
여충지, 김유신 정형석
병사1, 손인사 장민혁
장수3, 유민 1 남도형
유인궤 방우호
지수신 심승한
병사2 박영재
유인원 백승철
시 낭독 백승철
낭독 이승주
*시그널 + 타이틀
<효과> (해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배들 물결 헤치고 나아가는)
장수1 북을 울려라!
<효과> (북소리 울리고)
장수2 더 힘차게 노를 저어라! 전진으로 돌진하라!
<효과> (화살 날아오는)
(물에 빠져 죽는 등)
장수1 겁내지 말고 계속 돌진하라!
<효과> (배 나아가서 상대편 배와 부딪치는)
장수2 밧줄을 던지고 적선으로 건너가서 적들을 토멸하라!
<효과> (병사들 우르르 건너가고)
(양쪽 군사 칼 부딪치며 싸우는) 일부 BG
<해설>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서기 663년 8월말, 변산반도의 동진강 하구로 추정되는 백촌강, 혹은 백강구(白江口)에서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을 맞아 격돌을 벌이는, 그 때까지도 유례가 없던 국제 해상전투가 벌어집니다.
낭독자 당나라의 군장(軍將)이 적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에 진을 치고 늘어서 있었다.
<해설> 일본서기에는 그 170척의 배가 모두 당나라 병선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백강구 전투에 동원된 선단에는 신라의 배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연구관이 ‘백제 부흥운동 연구’에서 산출한 바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당의 수군이 보유한 전함의 크기는 서기 660년에 백제원정 당시를 참고하면 전함 한 척당 약 65명이 탈 수 있는 규모였다. 그렇다면 손인사가 거느리고 온 7천 명의 증원군이 타고 온 전함의 수는 약100여 척으로 추산할 수 있는데, 백강구 전투에 170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수군이 왜의 수군과 전투를 벌였다면 나머지 70척은 신라 수군의 전함으로 볼 수 있다.
<해설> 뿐만 아니라 나당연합군과 맞싸운 백제와 왜의 연합군의 경우 왜군 전함 1천 척이 주축이긴 했으나, 부흥백제국의 임금이었던 풍왕이 그 전투에 합류하였기 때문에 모름지기 그 전투를 동아시아 4개국의 국제해상전쟁으로 불러도 무리가 없겠지요.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 전투에 자신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에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김영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인서트-1. 테입<116> 김영관
(1:46:11 이 백강구 전투는 일본이 국제적인 전쟁에 처음 나서는, 그리고 전쟁의 주도권을 왜군이 쥐고 있다고 얘기하는 첫 번째 전투입니다. 그래서 왜가 변방의 섬나라에서 동아시의 역사무대에 주역으로 등장한 ‘사건’으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은 백강구 전투를 굉장히 중요시하게 됐고 그 중요시하게 된 이유 때문에 지금 중국의 학자들이라든지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학자들도 백강구 전투를 굉장히 중시하고 있습니다. 1:46:54)
<해설> 사실 백제 부흥 운동군을 중심으로 보자면,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둘러싼 전투가, 왜군과 당군이 주축이 된 백강구 전투보다 더 중요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일본역사학자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백강구 전투에서 실상, 왜군이 보인 활약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 전투의 내용은 일본서기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일본의 장수들이 백제의 풍왕과 더불어 날씨를 살피지 않고,
왜장수 백제국 대왕, 우리가 선두를 다투어 나아가서 싸운다면 당나라 선박 170척 따위는 문제 없사옵니다.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분들, 바닷물 조수가 어떠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나가 싸웁시다. 돌격하라!
낭독자 그렇게 말하고 대오가 어지러운 가운데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그러나 당의 선박들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 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왜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편 당나라 진영에서는,
손인사 허허허허, 왜군 함선이 겁도 없이 좌우를 살피지 않고 진격해오고 있다. 바람을 등지고 있으니 우리가 절대 유리하다. 적선을 행해 불화살을 쏘아라!
<효과> (화살들 날아가는)
(선박들 불타는)
(병사들 아우성치며 바다에 빠지는)
낭독자 그리하여 왜 함선 4백 척이 불탔다.
왜장수 으음, 분하다! 내, 이대로는 죽지 않겠다. (칼 빼들고)자 ,덤벼라!
<효과> (칼 부딪치며 싸우는)
낭독자 장군 에치노다쿠쓰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적군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해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에치노다쿠쓰는 풍왕이 왜국에서 왕이 되기 위해 백제로 귀국할 때 군사 5천을 이끌고 풍왕을 호위해온 왜군의 장수였습니다. 중국측 사서에는 이 해상전투가 벌어진 전쟁터의 실상을 ‘연염장천(煙焰張天)’ ‘해수개적(海水皆赤)’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그득하고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그런 뜻이지요. 어쨌든 왜군은 함선이 무려 1천 척에 달했는데, 당나라가 주축이 된 170척의 수군에 의해 무참하게 패한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왜군은 나당연합군과의 네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패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왜군은 천(千)척이나 되는 압도적인 선단을 보유했으면서도 170척의 나당군에게 참패를 당했을까요?
*인서트-2. 테입<119> 노중국
(57:20 해전을 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 이런 대규모의 군대를 태우고 싸워야 될 전함도 수준이 좀 낮고 그 다음에 군사도 제대로 훈련된 군대가 적고, 또 싸운 경험도 상대적으로 적은 이런 수군하고는 당의 수군하고 비교할 때 수의 차이는 있지마는, 왜가 천 척이고 당군이 170척, 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질의 문제에 있어가지고는 당이 훨씬 더 높은 수준에 있지 않았느냐. 58:03)
<해설> 함선의 수로는 왜국 수군의 함선이 월등히 많았지만 배의 크기나 구조에서 차이가 컸을 것이다, 노중국 교수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김영관 연구관은, 해상전투의 경험 측면에서 왜군은 당나라 수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인서트-3. 테입<116> 김영관
(1:47:39 당나라의 수군과 왜의 수군의 전투력을 비교를 해야 됩니다. 왜의 수군이라는 것은 전투에 처음 나서는 겁니다, 국제적인 전투에. 당나라 수군은 고구려와의 수많은 전투를 치릅니다, 더군다나 당시 동북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 그리고 고구려와 거의 막상막하의 국력을 가지고 있던 백제를 제압할 만큼 강한 당군과 왜에서 온 왜군과의 전투는 이건 어린아이하고 어른들의 싸움이라고 봐야 될 겁니다. 1:48:23)
<해설> 당나라 수군이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던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던 반면에, 왜군의 경우 해전다운 해전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출전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타고 온 선박 역시 해상전투를 하기에 걸맞게 건조된 배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쨌든 백강구 전투에서 왜군이 주축이 된 수군은 나당연합군에게 여지없이 대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런데, 백강구 전투 혹은 백촌강 전투에 출정한 나당연합군의 장수 중에는, 본디 백제 왕족 출신의 인물이 하나 끼여 있었습니다. 구당서에는 나당연합군의 출진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유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와 부여 융은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류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진군하였다.
<해설> 여기 등장하는 부여융이 누굴까요? 서기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도성이 함락될 때 의자왕과 함께 당군에게 붙잡혀서 당나라로 끌려갔던 백제의 태자였습니다. 그렇게 끌려갔던 그가 백제 부흥군을 정벌하려고 출정한 당나라군의 향도가 되어 공격을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인서트-4. 테입<120> 양종국
(01:54 부여븅과 관련되어서 남아 있는 자료들을 보면은 그 자료들이 거의가 다 부여융이 어떻게 하면 중국에 잘 보일까, 중국 황제의 신임을 얻을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부여융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그래서 다 자기를 멸망시킨 그런 정복자에게 아첨하고 저럴 수가 있냐,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부여융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고 그렇게 해서 그 힘을 이용해 야만이 옛날 잃어버린 걸 찾을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한 것 같아요. 내용을 보면은. 중국으로 끌려간 지 실제로 한 2년에서 3년 사이에 뭐 엄청난 실리를 얻고.02:39)
<해설> 공주대 양종국 교수는 부여융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부여융이 당나라로 끌려간 뒤에 당나라 고종에게 충성을 다한 것도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해서 언젠가 잃었던 백제를 다시 찾으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데요, 우선, 훗날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명의 일부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죠.
낭독자 황제의 군대가 백제를 정벌하니 공은 멀리 천인(天人)을 거울로 삼아 순종의 길을 깊이 깨달았다. 훌륭한 학덕을 받들어 신명을 바쳤고, 오랑캐의 풍속을 버리고 어진 데로 돌아갔다. 공의 정성이 천자에 계속 다다르자 포상이 거듭 내려졌으니 마침내 지위가 경(卿)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해설> 이렇게 철저히 당나라 황제의 신하로서 충성을 바쳐 인정을 받게 된 부여융은, 드디어 당나라군의 선두에 서서 백제 부흥군을 정벌하는 데에 앞장서게 됩니다.
낭독자 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개미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여 일어나자 황제는 크게 노하여 공을 웅진도독으로 삼고 백제군공에 봉하였으며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로 삼았다. 공은 신의와 용감성을 일찍부터 길러왔고 위엄과 포용력이 본디부터 충만하였으니 읍락들을 불러 회유하고 간악한 무리를 섬멸하였다.
<해설> 이 묘지명에 등장하는 ‘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나, 부여융이 섬멸하였다는 ‘간악한 무리’는 백제의 부흥군을 일컫습니다. 당나라에 항복한 뒤 포로로 끌려갔던 백제의 옛 태자가, 무너져버린 백제를 다시 세우겠다고 들고 일어난 부흥군을 물리치는 데에 앞장섰다면, 백제의 처지에서 보자면 용서받지 못할 배신행위가 되겠지요. 그러나 순전히 부여융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태자였던 자신이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가 있는 사이에, 왜국에서 부여풍이 건너와서 백제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상황을 용납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인서트-5. 테입<120> 양종국
(03:56 부여웅 입장에서 볼 때 백제에서 일어나는 부여풍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이라는 게 자기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개인적인 입장이나 자기가 다시 회복하려고 하는 백제의 미래의 모습으로 볼 때는 어떻게 보면 위협세력이죠. 그래서 백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똑같이 둘 다 한 거지만 근본적인 목적에서는 완전히 서로 다른 세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까 결국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직접적인 충돌이 제가 볼 때는 백강구, 백촌강구 전투고. 백촌강구에서 부여융이 유인 궤하고 같이 웅진으로 왔다가 웅진에서 배를 타고. 03:37)
<해설> 부여융이 나당연합군에 합세하여 백제 부흥군 정벌에 나선 것을 ‘나름대로 백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이다’라는 양종국 교수의 해석은 글쎄요, 부여융을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해석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였던 주류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주류성은 백제의 왕자인 부여충승과 부여충지가 군사를 지휘하여 방어하고 있었는데,
<효과> (성밖에서 군사들 달려다니고)
(화살들 빗발치듯 날아오는)
여충승 겁먹지 말고 우리도 성밖에 진을 치고 있는 나당군을 향해 활을 쏘아라!
<효과> (궁사들 활쏘는)
병사1 장군, 적군이 성벽을 기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여충지 무엇들 하느냐? 돌을 굴려라!
<효과> (돌, 성벽타고 굴러 내리는)
장수3 (달려와서)(비통하게)장군, 장군, 큰일났습니다.
여충승 큰일이라니? 백촌강에서 무슨 전갈을 가지고 온 것이냐?
장수3 예, 장군. 하온데…백촌강 하구에서 왜군 수군이 나당군의 수군과 결전을 벌였사온데…
여충지 그런데 어찌 됐다는 것이냐?
장수3 4백 척이 넘는 병선이 불타고 크게 패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그 군사가 주류성을 에워싸고 있는 나당군에 합류하기 위해서 이 곳으로 오고 있다 하옵니다.
여충승 이런 낭패가 있나? 그 많은 왜국의 수군들을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이냐?
여충지 일부 군사를 이끌고 백촌강으로 가신 대왕마마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장수3 대왕마마께서는 적군의 포위망이 좁혀져오자 간신히 옥체를 빼내어 고구려로 망명하였사옵니다.
여충승 뭐라고?
야충지 대왕마마께서 고구려로 망명을 해버리셨단 말이냐? (허탈하게)허허허…. 이제 우리는 어쩌면 좋단 말이냐?
<해설> 사실 풍왕이 주류성을 비워놓고 백강구로 달려 나간 것은,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건너온 왜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을 뿐 아니라, 풍왕 자신의 심정적인 지지기반이자 지원세력이 왜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서트-6. 테입<116> 김영관
(1:49:05 심리적으로 왜군에게 일정정도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일거에 백강구 전투에서 무너지니까 주류성에 있던 군대, 백제 부흥운동군들은 심대한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풍왕이 백강구 전투에 참여를 합니다. 왜에 오랫동안 가 있던 풍왕은 그 세력기반으로서 왜에서 파견된 왜군을 상당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또 부흥운동군의 지도자인 복신은 풍왕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였습니다. 1:49:53)
<해설> 복신이 살아 있어서 주류성 전투를 지휘했다면 양상이 달라졌을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이미 이 때는 백강구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대승을 거둔 데다가 부흥군의 정신적 지주였던 부여풍마저 고구려로 달아나버린 뒤였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뒤였습니다.
<효과> (성 밖에서 활 쏘는 등 아우성)
여충지 믿었던 왜의 수군도 나당군에게 패퇴하였고 대왕께서도 국경너머 고구려로 망명길에 올라버렸으니 이제 더 버티기도 어렵게 되지 않았습니까.
여충승 알았느니라. (군사들 향해) 공격을 멈추어라! 성루에 백기를 꽂고 성문을 열도록 하라!
<해설> 서기 663년 9월 1일, 백제왕자 부여충승과 부여충지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고 맙니다.
손인사 (말 타고 달려와서)장군, 주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웅진 북쪽의 여러 성들이 줄줄이 투항을 해왔소이다.
유인궤 허허허, 내 뭐라 하였소? 저들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무너뜨리고 나면 나머지 성들은 손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소, 허허허.
<해설> 당나라 장군 유인궤가 예측한대로 일단 주류성이 무너지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망명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두량윤성을 비롯한 나머지 성들이 큰 저항 없이 항복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성들이 모두 항복을 하고도 한 달이 넘도록 굴복하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을 했던 성이 한 군데 있었습니다.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위치한 임존성이었습니다.
김유신 (멀리서)모든 반란세력이 항복하였으며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이제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라! 그러면 용서해 줄 것이다!
지수신 (큰소리로)나는 백제국의 장수 지수신이다! 반란세력은 네놈들이 아니더냐! 우리는 최후의 일인까지 백제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울 것이다! 자, 덤벼라!
<효과> (화살 날아오는)
<해설> 저항군을 이끌고 임존성에 남아 최후까지 싸웠던 백제장수는 그 이름이 지수신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인서트-7. 테입<116> 김영관
(1:50:52 돌로 쌓은 아주 견고한 석성입니다. 그리고 지금 임존성 지역은 내포평야를 끼고 있어서 군량미라든지 군수품 지원에도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 흥운동 초기에도 거점이 될 수 있었고 백제 말기에도 백제의 서쪽 지방의 중심지 역할 을 했던 지역입니다. 지수신이 끝까지 버티고 부흥운동군을 이끄는데 지수신도 역시 도침의 휘하에 있었던 장수가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주류성을 근거로 하고 있던 별도로. 1:51:40)
<해설> 지수신에 대한 기록에 이 대목에서 처음 나오기 때문에 그의 출신 성분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주류성이 함락당한 것과는 상관없이 최후까지 격렬한 저항을 벌인 것으로 미루어 부여풍과는 관계가 소원한, 도침이나 복신 휘하의 장수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정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임존성 공격은 신라군이 주축을 이뤄 감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유신 등 쟁쟁한 장수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문무왕이 직접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문무왕 장군, 백제 잔당들이 모두 항복을 했는데 임존성 하나 때문에 군사를 여기에 묶어둘 수는 없지 않소?
김유신 그러하옵니다, 대왕마마. 하오나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소장이 장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곧 임존성을 함락시키겠사옵니다. 자, 가자!
<효과> (병사들 함성 지르며 내달리는)
<해설> 그러나 신라군은 지수신이 이끄는 부흥군에게 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보면 그 대목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오직 임존성만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굳고 또한 양식이 넉넉한 까닭으로 30일 동안이나 이를 공격했으나 능히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사들은 피곤하여 싸움에 염증을 일으켰다. 문무왕이 말했다.
문무왕 지금 비록 이 한 군데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이 밖의 모든성은 다 항복을 받았으니 이 것으로도 가히 공이 없었다고는 하지 못랄 것이다. 자, 군사의 대오를 정비하여 그만 신라로 돌아가도록 하자.
<해설> 그런데 신라쪽 장수인 김유신 열전에 이렇게 표현돼 있는 걸 보면 신라군이 적어도 임존성 전투에서만은 지수신의 부흥군에게 패한 것이다, 노중국 교수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인서트-8. 테입<119> 노중국
(1:01:27 초기에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였던 임존성에 자리잡고 있었던 사람이 지수신입니다. 지수신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는 겁니다. 신라 군대가 가서 쳐보니까 깨져버렸어, 신라군이 대패. 문무왕 스스로 가서 싸웠습니다. 독려했지마는 패배를 하자 그 다음에 인제 문무왕은 철군을, 회군을 합니다. 회군을 하면서 이제 변명은 이겁니다. ‘우리가 비록 임존성은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마는 그 동안에 거둔 전과도 적지는 않다’ 이렇게 스스로 자위하면서 물러나게 되는데 사실은 깨져서 더 이상 함락시킬 수 없다고 하는 그런 판단을 하고서 돌아간 거지요.1:02:15)
<해설> 신라 문무왕은 그 길로 경주로 돌아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김유신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다른 장병들에게도 포상을 하는 등 논공행 상을 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임존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한 채로 신라군이 경주로 철군을 해버렸다는 사실이 조금은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렇다면 그 후로 임존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음악> (브릿지)
<해설> 신라군은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체로 일단 경주로 돌아갔는데, 이 다음부터는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임무 교대하여 임존성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라군이 30일 동안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성을 당나라군이라고 쉽게 함락시킬 뾰족한 방법을 갖고 있을까요? 당연히 그런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인 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이이제이 수법이 그것이었습니다.
지수신 신라군이 우리에게 굴복하고 물러가더니 이번엔 당나라군이 우리 임존성을 무너뜨리겠다고 오고 있단 말이냐? 어리석은 놈들, 자, 방어진지를 단단히 구축하라!
병사들 “예, 장군!”
<효과> (병사들 제 위치로 달려가는 등)
<해설> 임존성은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그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축조한 산성으로서 방어하기에 유리한 요새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병사2 (말 타고 달려와서)장군, 큰일났습니다.
지수신 무슨 일이냐?
병사2 당나라군을 이끌고 우리 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장수 두 명이 우리 백제출신이 장수입니다!
지수신 백제출신 장수라니? 그게 누구란 말이냐?
병사2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입니다.
지수신 뭐야?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당나라군의 앞잡이가 되어서 우리를 치려고 오고 있다는 말이냐? 으음, 이런, 이런…
<해설> 추측이긴 하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부흥운동 초기에 임존성에서 전투를 벌일 때 지수신 휘하에 있던 장수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쨌든 임존성의 구조와 백제 부흥군의 내막을 훤히 꿰뚫고 있는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임존성으로 쳐들어온다면 부흥군에게는 치명적이었겠지요.
지수신 흑치상지하고 사타상여, 네 이놈들! 조국을 배반하고 오랑캐 진영으로 투항한 것도 모자라서, 어찌 동지들에게 창칼을 겨눌 수 있단 말이냐! 어냐, 내가 네 놈들의 목을 베어 줄 것이니라. 덤벼라!
<해설> 이렇게 분기탱천해서 타오르는 적개심으로 전투에 임할 수도 있었겠지만, 왕도 고구려로 달아난 마당에 부흥군의 장수였던 사람이 둘씩이나 적군 진영으로 넘어가버렸으니 더 싸워서 뭘 하겠느냐, 이렇게 의기소침해져버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백제 부흥군의 용맹스런 장수였던 흑치상지는 어떤 경로로 당나라에 투항했을까요? 삼국사기의 흑치상지 열전 편에는 부흥운동 초기의 흑치상지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자 흑치상지의 부하들은 항복하였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소정방이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사방으로 내어 크게 침략하므로 흑치상지는 좌우추장 10여 명과 함께 도망하여 무리를 불러모아 임존산성에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10여 일이 못 되어 그에게 모여드는 무리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소정방은 군사를 거느리고 임존산성으로 쳐들어가서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흑치상지는 드디어 2백여 성(城)을 회복하였다.
<해설> 그런데 당나라 고종은 은밀하게 흑치상지에게 사신을 보내서 그를 회유합니다. 그러자 흑치상지는 유인궤를 찾아가서 투항을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흑치상지가 투항한 시기가 언제냐 하는 문제를 놓고, 아예 부흥운동 초기에 당나라 편에 넘어가버렸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나당연합군에게 주류성이 함락되고 나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됐을 때 투항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당나라 황제까지 나서서 회유를 했기로, 백제부흥을 위해서 빛나는 투쟁을 했던 그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적군에게 포섭돼버릴 수 있었을까요? 양종국 교수는 흑치상지의 당나라 투항에 부여융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인서트-9. 테입<120> 양종국
(05:50 흑치상지도 결국 왜 투항을 했냐, 할 때 어떤 자기의 이익이나 그런 것보다도 백제부흥을 위하는 입장에서는 아마 흑치상지도 똑같았던 것 같아요. 과연 그런데 부흥운동을 어느 쪽의 부흥운동이 자기가 봤을 때 정당한가라고 했을 때는 그 동안 상황이 이 쪽은 많이 바뀌었고 복신이 도침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고 이런 상황 있었지만 부여융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이미 의자왕 때부터 백제 입장에서 볼 때는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서 설득을 하니까 투항을 해왔다 그랬는데 그러면 누가 사신으로 갔겠느냐 그것도 생각을 해봐야 되거든요.06:40)
<해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서 흑치상지를 회유할 때, 당나라에서 무슨 무슨 벼슬을 주고 장래를 어떻게 보장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고, 그것을 이미 당나라에 넘어가 있던 부여융이 보증을 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이런 분석입니다.
<효과> (작전 회의-웅성)
유인궤 임존성이 그 지세가 험준하고, 성 안에 군량에 넉넉해서 좀처럼 함락시킬 수 없으니 부득이 사정을 잘 아는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군사를 주어 그들을 물리치게 해야겠소.
손인사 장군, 아니 될 말씀이오. 그들에게 군사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유인궤 무슨 얘기요?
손인사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야심이 있는 자들입니다. 야심이 있는 자들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만약 갑옷과 군사와 양식을 가지게 된다면 도적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유인궤 내가 보건대,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충성스러우면서도 꾀가 있어, 기회를 타서 공을 세우려 할 것이니 무엇을 의심하겠소!
<해설> 유인궤는 손인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군사를 내주었고, 두 사람은 유인궤의 바람대로 신라군과 당군도 어쩌지 못했던 임존성을 함락시킵니다.
<효과> (성문 열리고)
(양쪽 군사 부딪쳐 싸우는)
병사2 장군, 성문이 부서지고 적군이 성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지수신 으음, 분하구나. 이럇!
<효과> (말 달리는)
<해설> 마지막까지 임존성을 지키고 저항했던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도망칩니다. 부흥백제군이 부흥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좌절하는 순간입니다. 이후로도 백제유민들이 나당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한 번 더 나옵니다.
낭독자 664년 3월, 백제 유민들이 사비산성에 의거하여 모반하므로 웅진도 독이 군사를 내어 이를 격파하였다.
<해설> 이 기록을 끝으로 백제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서기 665년, 웅진의 취리산에서는 유인원의 주관으로 색다른 행사 가 열립니다.
유인원 자, 신라왕과 새로이 웅진도독으로 제수 받은 부여융은 여기 나란히 앉으라. 흰 말 한 마리를 잡았으니 먼저 천지신먕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에는 말의 피를 입술에 찍어 바름으로써 화친을 맹약하도록 하라!
<해설> 이어서 유인원은 유인궤가 지은 맹약문을 당나라 황제의 명의로 낭독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유인원 지난날에 백제의 선왕은 반역과 순종의 도리에 어두워서 이웃나라에 우호를 돈독히 하지 아니하고, 인척과도 화목하게 지내지 않고,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며, 잔폭(殘暴)하게도 함께 신라를 침공하여 성읍을 약탈하므로 평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중국의 천자는 죄 없는 백성을 불쌍하게 여겨 번번이 사자를 파견하여 화친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험한 지리와 중국과의 거리가 먼 것을 믿고 말을 듣지 않으므로 황제가 노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정벌 하게 되었는데, 깃발이 이르는 곳마다 한 번 싸우면 곧 평정되었다. 이에 백제대사가정경(百濟大司稼正卿)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선조의 제사를 받들어 그 옛 땅을 보전하게 하니, 신라와 서로 의지 하여 오래도록 벗이 되어 각각 지난날의 원한을 풀고 우호를 맺고 서로 화친하며, 각각 조명(詔命)을 받들고 영원히 번병(藩屛)이 될 것이라. 또한 사자 우위위장군 유인원을 파견하여 친히 권유하는 뜻을 선포하는 것이니, 이를 굳게 맹세하는 뜻을, 희생된 백마의 피를 서로 입에 찍어 바름으로써 맹약하니 함께 의리를 잘 지켜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이 맹약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그 사직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제사조차 끊어져서 그 남겨지는 것이 없게 할 것이다. (이하 BG) 이 문서를 금서철권(金書鐵券)으로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고…
*인서트-10. 테입<116> 김영관
(1:55:32 백제국 왕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국왕이면서 당나라의 계림도독부 도독인문무왕과의 사이에 평화협정을 맞은 겁니다. 그리고 그 평화협정의 협정문을 누가 썼느냐면 유인궤입니다. 유인궤는 나중에 당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사관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웅진도독부에서도 문서를 만들어가지고 전과를 당나라 황제인 고종에게 보고할 때도 다 유인궤가 그걸 씁니다. 1:56:15)
<해설> 문제는 신라의 경우 전승국이면서도 백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갖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두 나라가 변경을 침입하는 일이 있으면 종묘와 사직을 단절시키겠다’는 맹세문의 내용은 백제의 옛 땅을 신라가 넘봐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겠지요.
*인서트-11. 테입<119> 노중국
(1:04:09 당에서는 백제 유민들이 저렇게 저항을 강하게 하니까 유민들의 저항을 완화시키는 방법이 왕자 융을 태자 융을 도독으로 삼아가지고 유민들을 안정시키는 이런 정책을 취한 건데 그래서 웅진도독이 되는데 사실 웅진도독군은 이거는 당나라의 한 기구입니다. 다만 우두머리를 융으로 삼는데 이 융은 이거는 당나라의 한 관료입니다. 그로 하여금 신라하고 맹세하게 함으로써 어떤 효과가 나오냐 하면은 신라로 하여금 ‘이 백제 故地는 백제 옛 땅은 신라 너희가 다스려서는 안 되고 이거는 융이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융은 결국은 당의 관료거든요.1:04:02)
<해설> 그렇다면, 예전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이 당나라에 의해서 웅진도독으로 임명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백제의 역사가 여기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여웅이 웅진 도독이 됐으니 다른 형태로 백제의 역사가 계속되는 걸로 봐야 할까요?
*인서트-12. 테입<120> 양종국
(11:45 부여융 입장에서 볼 때는 겉으로는 표현 안 해도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지을 수 있는 부분이 내가 노력을 해서 이렇게 하기를 원했는데 다 들어줬거든요, 당나라가. 그래서 이 취리산 맹약문에도 보면은 여기서 백제가, 어떤 백제의 재건이나 백제의 위상을 당나라가 그대로 다 인정을 해주거든요. 신라와 똑같이 영토도 똑같이 보전하면서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도 신라나 백제나 똑같은 관계를 맺어서 영원히 번병으로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백제의 존재를 인정을 해준다. 그런 것이 이 맹약문 안에 그대로 들어가 있고 그런 면에서 보면은 부여웅 입장에서는 성공을 한 거지요. 12:26)
<해설> 양종국 교수는 부여융이 웅진도독이 된 것은 그의 노력에 따라서 당나라로부터 얻어낸 것이며, 신라와 마찬가지로 백제 역시 당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백제를 재건하기 위해서 무력투쟁을 했던 부흥군과는 달리 부여융은 나름의 방식으로 당나라를 설득하여 웅진도독이 됨으로써 백제를 재건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러나 김영관 연구관은 부여융을 도독으로 임명한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정복지에 대한 지배방식일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3. 테입<116> 김영관
(1:52:38 당나라가 취한 이이제이 정책은 당의 원래 정복지에 대한 지배방식의 기본입니다. 직접 지배보다는 기미지배라고 그래서 점령지의 추장을 당의 공식 벼슬을 줘가지고 그 지역을 지배를 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 쪽 정복지역에서는 세금이나 노역을 징발하는 그런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대 당나라 제국의 지방통치 방식입니다. 1:53:25)
<해설> 뿐만 아니라 노중국 교수는, 부여융이 웅진도독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이 총독부 관리가 된 거나 진배없기 때문에 백제의 독립성이나 백제사의 연속성을 논할 가치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인서트-14. 테입<119> 노중국
(1:05:15 일부 논자에 따라서는 부여융이 도독이고 웅진도독부의 근무하는 백제유민 관료들이 있습니다. 이 관료들의 활동도 전부 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거는 잘못입니다. 웅진 도독부 이거는 당나라의 기구입니다. 그리고 부여 융도, 도독도 지가, 자기 스스로 도독이 된 게 아녜요. 당나라가 임명한 도독입니다, 그런데 그걸 부흥군의 연장선상으로 본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일제 총독부 때 일제 때 총독부에 근무한 한국인 관료들을 전부 독립 운동한 것으로 보는 것하고 똑 같은 현상이 되는 거지요.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요. 1:05:57)
<해설> 따라서 백제는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에게 패했던 서기 663년에 멸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러면 백제부흥운동과 관련 있는 인물들의 이후의 행적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흔히 백제 부흥운동 하면 가장 먼저 흑치상지를 떠올리고 그를 부흥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서트-15. 테입<116> 김영관
(1:28:25 백제부흥운동과 관련된 정확한 사료상에 나타난 인물이 많지가 않습니다. 복신과 도침과 흑치상지 그 정돈데 그 흑치상지는 당나라 장군이 됐다가 당나라에서 또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의 구당서나 신당서의 열전에 입전이 되게 됩니다. 그 열전의 내용은 대개의 경우가 백제에서의 흔적은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그러고 당나라에 가서 군사적인 공을 세운 그런 내용들이 죽 나타나 있습니다.1:29:09)
<해설> 부흥운동에 몸 바쳤던 다른 인물들의 경우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데 반하여 흑치상지는 열전으로도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훗날 묘지명까지 발견되어서 당나라에서의 활약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겠지요.
*인서트-16. 테입<119> 노중국
(1:05:59 백제 부흥군의 입장에서 보면 흑치상지는 한때는 부흥군의 장군이나 마지막은 배반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도 굉장히 신랄하게 비판을 해놨습니다. 왕조를 배반한 인물. 그 다음에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상당히 높은 벼슬을 하는데요 한편에서는 백제계 사람이 당에 가서 크게 성공을 했다고 하는 사례는 될 수 있는데 그 때의 흑치상지 활동은 백제인으로 활동한 건 아니지요. 당나라 관료로서 활동을 한 거다. 1:06:43)
<해설>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가서 군사활동을 이끌어서 제아무리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해도 그것은 백제의 역사가 아니라 당나라의 역사겠지요.
<음악> (브릿지)짧게
<해설>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자 부랴부랴 고구려로 달아났던 풍왕 부여풍은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 군사에게 붙잡혔다가 유배지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여기서 단재 신채호가 풍왕과 흑치상지를 비판한 대목을 잠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아, 백제 중흥의 대업을 이같이 창피하게 만들어버린 자는 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이니, 풍은 곧 중흥의 백제를 멸한 제일의 죄인이다. 풍이 비록 죄인이나 풍을 싫어한 까닭에 백제를 배반하여 당의 노예가 된 흑치상지는 곧 백제를 멸망시킨 제2의 죄인이다.
<해설> 그렇다면 당나라 조정에 의해 웅진도독에 임명되었던 부여융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인원 등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백제의 옛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까 겁이 난 부여융은 당나라 서울로 돌아가서 다시는 옛 백제 땅을 밟지 못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 다음,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게 패퇴하고, 주류성마저 함락 당하자, 줄줄이 망명길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바다 건너 왜국으로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인서트-17. 테입<116> 김영관
(1:59:53 주류성이 함락된 이후에 당나라와 신라군에게 남아 있으면은 그 뒤의 일들은 자명한 것 아닙니까. 당나라군과 신라군에게 핍박을 당하고 목숨을 잃고 그리고 자칫 하면은 경주로 끌려가고 중국의 장안으로 끌려갈 그런 어려운 사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류성이 함락되기 직전부터 탈출을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지역까지 이동을 해서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일부는 고구려로 또 달아납니다. 2:00:34)
<해설> 일본서기의 관련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백제의 주류성이 비로소 당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나라사람들이 서로 이렇게 말했다.
유민1 (웅성거리는 중에)주류성이 항복했으니 이제는 일을 어찌할 수 없게 되버렸습니다.
유민2 그렇습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어지게 되었어요.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유민1 앞으로 어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유민2 하는 수 없지요. 배를 얻어 타고 왜국으로 가는 길밖에…
<해설> 백제의 유민들은 불타고 남은 왜국 함선이 귀국할 때 그 선편을 얻어 타고 바다를 건너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 백제인들이 바로 일본의 고대국가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지요.
*인서트-18. 테입<116> 김영관
(2:00:50 당시 일본은 고대국가 체제를 갖췄다고 보기에는 조금 국가적인 성숙도가 떨어졌졌습니다. 일단 뭐 국가를 다스리는 규범인 법률, 율령리라고 하는 율령제가 완전히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법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 그런 국가 단계까지는 완전하게 진입을 못했던 단계였었는데 백제에서 간 사람들이 그런 고대국가, 율령국가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백제 왕족이었던 부여자신, 여자신으로 일본사서에 기록이 나오는데 법관대보라는 지금의 법무부장관 역할을 하는 그런 관리. 2:01:38)
<해설> 이 무렵에 많은 백제 유민들이 왜국으로 건너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들이 이어집니다.
낭독자 -왜국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와 백성들이 배를 띄워 왜로 향했다.
-백제국의 관위(官位)와 계급을 대조하였다.
-다시 백제의 백성 남녀 400여 인을 근강국(近江國) 신전군(神前郡)에서 살게 하였다.
-백제의 남녀 2천여 명이 동국에 살았는데 승려와 속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3년 동안 관식을 주었다.
<해설> 이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에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떤 문화를 어떻게 전해주었는지는 다음에 기회를 마련하여 탐색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삼국사기의 저자였던 김부식은 백제멸망을 어떻게 보았는지 살펴보기로 할까요?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맨 끝에다다음과 같은 논평을 해놨습니다.
김부식 (에코)백제의 말기에 와서는 그들은 행하는 일이 도리에 어긋남이 많았고,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범했다. 이익에 따라 기회를 틈타서 신라의 큰 성과 큰 진을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는 이른바 어진 사람과 친하고 이웃 나라와 잘 지냄으로써 나라의 보배로 삼는 일이 아니었다. 이에 당나라 천자께서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그 원수를 풀도록 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어겨서 대국 당나라에게 죄를 지었으니 그 나라가 멸망한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해설> 신라 역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백제나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에 대해서만 이익을 좇는 것으로 논평한 것은 그의 신라중심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요구를 듣지 않은 것을 대국에 죄를 지은 것으로 단정하고,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백제가 망한 것이 당연하다, 이런 내용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덧붙여 놓은 것은 김 부식의 사대적인 의식을 드러낸 것이겠지요.
그건 그렇고, 백제의 옛 땅을 신라가 복속해 가는 과정은 백제의 역사가 아니라 신라의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조선후기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백제의 수도가 있던 부여지역을 답사하면서 ‘부여회고’ 라는 한시(漢詩)를 남겼습니다. 민족문 화추진회에서 번역한 내용대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음악> (쓸쓸하고 허허로운)BG
낭독자 천척이라 전선이 바다어귀 들어올 제 / 육궁의 주옥 보석 모두가 눈물자국 / 청아(靑蛾) 물에 떨어지자 풍류가 그치었고 / 백마 못에 잠겨들자 안개가 캄캄했지 / 그 당시의 공명은 새긴 돌에 남아 있고 / 오늘날도 백제유민 항복 깃발 통곡하네 / 처량할사 반월성 그 것으로 통하는 길 / 벼 기장 들쑥날쑥 두세 마을 있을 따름 / 부소산속 궁궐이 어우러져 드높은데 / 꽃같이 고운 궁녀 그 즐거움 어땠으랴 / 십제의 신기로운 맥은 개로에서 끝나고 / 삼한의 제왕기운 신라로 모이었네 / 강기슭을 가로막은 철옹성만 보았기에 / 많은 전선 바다 물결 건너올 건 안 믿었지 / 술잔 들어 계백에게 제사를 올리 고픈데 / 안개 낀 낡은 사당 덩굴풀이 우거졌네 / 관청 전각 쓸쓸히 초목 속에 서 있는데 / 시골사람 전하는 말 의자왕의 궁이라나 / 서리 내린 묵은 정원 무잎이 새파랗고 / 맑은 날 담장에 담쟁이 넝쿨 붉었네 / 지금 북부 몇 고을이 복신을 기억할꼬 / 높 낮은 산속이라 부여풍 찾을 길 없네 / 오함(烏含) 이미 옛 왕조 절간으로 흔적 없어 / 석양바람 향하여 나그네 말 슬피 우네.
<음악> (위 음악) UP & OFF
<해설> 청취자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제의 역사를 통사로 소개하는 순서는 여기서 모두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부터는 백제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문화재, 도성, 고분 등을 주제로 삼아 서 백제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변함없는 관심과 청취를 바랍니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후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13편>
풍납토성-사성(蛇城)인가 왕성인가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2.17(일) 00:05-01:00
나오는 사람들
신하 방우호
온조왕 이지환
이병도 심승한
김원룡 차진욱
이형구 박영재
학생1 남도형
학생2 장민혁
경비원 정형석
조교 이병용
학생들(대학)
낭독 이승주
*시그널 + 타이틀
<해설>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서기 475년,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서 아차산에서 차형당하자,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남쪽으로 피신하여 그해 10월에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 ‘웅진백제’의 시대를 열어나갑니다.
백제의 두 번째 도성이었던 이 웅진성은 지금의 공주시에 있는 공산성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음악> (브릿지) 짧게
<해설> 그리고 서기 538년-.
낭독자 성왕 16년 봄에 왕은 서울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다.
<해설> 백제의 26대 임금이었던 성왕은 60여년의 웅진도읍시대를 마감하고 도읍을 사비로 옮깁니다. 의자왕이 당나라군에게 항복할 때까지 백제의 수도로 그 역할을 다 했던 사비성은, 지금의 부여에 있는 부소산성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시조로 기록돼 있는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한 이래, 문주왕이 고구려군에 밀려 남쪽으로 피신하여 웅진에 도읍을 정하기 이전까지 무려 500여 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1990년대에 풍납토성이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이 어디 있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풍납토성이 몽촌토성과 더불어서 한성시대 백제의 임금들이 정사를 보았던 왕성이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이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의 지위를 얻기까지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학자가 있습니다. 선문대학교 이형구 교수가 그 사람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 동안 한성 백제의 왕성을 둘러싼 논쟁과, 풍납토성이 백제 도성(都城)의 지위를 얻기까지의 내력을, 선문대 이형구 교수, 그리고 충남대 고고학과 박순발 교수와 함께 탐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낭독자 비류와 온조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신하 이 곳 하남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 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낭독자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으며…
<해설> 삼국사기의 백제건국신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기록의 의하면 온조가 처음부터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의 내용을 보면 온조왕은 기원전 6년 2월에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온조왕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변경을 자주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었다. 더군다나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났으며, 나라의 형세가 몹시 불안하다. 그러니 도읍을 옮겨야겠다. 짐이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매우 비옥하였다. 그러니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야겠다.
<해설> 그리고 바로 궁궐을 조성하는 공사에 착수하여 3년만인 온조왕 17년 정월에 ‘소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새 궁실을 지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국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처음부터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게 아니라, 온조가 서울지역에 도착하여 17년 동안은 하북, 그러니까 한강 이북의 어딘가에서 임시로 거처하다가 기원전 4년에 이르러 하남 위례성에 궁실을 짓고 명실상부한 도읍으로 삼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남 위례성으로 옮겨오기 이전에 임시 수도로 삼았던 지역이 어디 였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학자들 간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됩니다.
*인서트-1. 테입<121> 이형구
(28:51 내 생각은 지금의 서울, 청계천을 끼고 있는 중랑천, 청계천을 끼고 있는 지금의 수도 위치가 아닌가, 고려시대 때도 남경은 바로 그 한양부라는 데가 바로 지금의 도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옛날 도성이었던 데서 계속 성장 발전했다고 생각되지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돼요. 지금 부아악이라는 것도 북악산이라고 한다면 청와대 뒷산인데 바로 그 지역이 아니었는가 하북위례성이. 거기에서 강남쪽으로. 29:36)
<해설> 지금의 서울 사대문안 어딘가에 있다가 하남위례성에 궁궐을 짓고 옮겨갔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의견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남위례성으로 옮기 이전의 임시 수도를 하북위례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그 위치를 두고는 삼각산 동쪽 기슭이라는 설과,
세검정 계곡 일대였을 것이라는 설, 혹은 중랑천 일대였을 것이라는 주장 등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거야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고, 그렇다면 백제가 처음으로 궁궐을 짓고 도읍으로 삼았다는 하남 위례성은 어디 있었을까요? 그 위치 문제를 두고 실로 장구한 세월 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이게 관하여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었습니다.
낭독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잡고 열 명의 신하의 보좌를 받아서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으며…
<해설> 백제의 건국과정을 설명한 삼국유사의 기록 역시 삼국사기와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일연은, 할주(割註)를 달아서 보충설명을 하면서, ‘여기에 등장하는 위례성은 직산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직산이라면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의 직산읍을 말합니다. 현재 그 곳에는 위례성이라고 불리는 성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인서트-2. 테입<121> 이형구
(39:02 삼국유사는 지금 천안의 직산으로 봤고 삼국사기는 지금 한수 이남으로 봐서 지금 말하는 한강유역으로 보고 있는데 그러면 한강유역에서 어디냐? 이병도 선생님은 춘궁리, 남한산성 뒤에 있는 춘궁리로 보셨어요, 춘궁리는 그러나 도성으로의 입지가 적합지가 않아요. 산골이 많고 협곡이고 거기 남아 있는 일부 유적들도 보면 대부분 고려 때 것이고 초기유적은 안 보이고 또 어떤 분은 남한선성 안에 있다고 보고 있었고 그러나 대체적으로 춘궁리를 많이 봤어요. 이병도 선생님 말씀대로. 39:55)
<해설> 우리 역사학계에서 그 영향력이 막대했던 이병도는 경기도 광주군의 춘궁리가 하남위례성이 있던 곳이라는 견해를, 그냥 견해 차원을 넘어서 고집스러울 만큼 완고하게 주장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춘궁리라는 마을이름에 궁궐을 의미하는 궁(宮)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도, 하남 위례성의 춘궁리설을 뒷받침하는 한 요소가 됐겠지요. 그런데 춘궁리에 하남위례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처음 내놓은 사람들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이병도가 그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죠. 박순발 교수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인서트-3. 테입<123> 박순발
(13:44 중요한 것은 어디가 중심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시대는. 춘궁리 일대가 주목돼 온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 이래로 죽 생각해왔던 그런 거였거든요 조선후기에. 그렇다고 한다면 역시 그 입장에서 본다면 풍납토성은 외곽이 되는 셈이죠. 그런데 그러한 춘궁리의 실체가 밝혀지게 된 것은 우리가 지금 하남시 인접을 지나가고 있는 뭡니까, 구리-판교 교속도로, 이 도로 공사하는 시점에 오랫동안 우리가 후보지로 여겼던 지역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때 조사해보니까 그런 것이 전혀 흔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14:23)
<해설> 춘궁리에서 백제도성의 존재를 뒷받침할 아무런 고고학적 유물도 발견되지 않음으로써 춘궁리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으나, 그건 최근의 일이고, 춘궁리가 하남위례성이 있던 지역으로 비정돼 오는 동안, 정녕 가장 유력한 후보지였던 풍납토성은 그만큼 천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음악> (브릿지)
<효과> (천둥소리, 폭우 쏟아지고)
(홍수-거칠게 물 흘러가는)
<해설> 여러분은 ‘을축년 대홍수’를 들어보셨습니까? 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 7월, 서울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을 휩쓴 물난리였는데, 사흘에 걸친 집중호우로 한강이 범람하고 서울의 마포, 용산, 잠실, 송파 일대가 물에 잠기는 등 전국적으로 4만6천 채의 가옥이 침수되고 647명이 숨진 대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안겨 주었던 을축년의 물난리가, 풍납토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박순발, 이형구 교수의 얘기를 치례로 들어보시죠.
*인서트-4. 테입<123> 박순발
(09:41 풍납토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일제시대 맞지요. 일제시대에 소위 서울 주변에 마땅히 하이킹을 한다든지 서울주변에 어떤 古都 볼거리 이런 것들을 소개하는 책자 속에서 들어있지요. 그런 정도로 해서 풍납토성이 이해돼 왔으나 풍납토성이 성격의 일단이 드러나게 된 것은 깊게 땅속에 묻혀 있던 그런 층이 노출되는 그런 때였는데 그것이 바로 인제 우리가 지금도 알고 있는 1925년도로 이렇게 얘기를 하고있지요. 을축년에 큰 홍수가 한 번 났다는 것이죠. 그 큰 홍수에서 아마 상당부분 대개 한강에 면한 서쪽 성벽 같은 것이 유실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0:25)
*인서트-5. 테입<121> 이형구
(1:05:17 기록을 보면 그 때 큰 홍수가 졌던 모양이에요 아무튼 엄청난 홍수였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뭐 강이 바뀌고 신천이 생기고, 신천동이라고 하는 거 지금 롯데월드 그 쪽에 석촌호수로 메꿔져 있지만 그 때 워커힐 건너편 지금 천호동 쪽에 뚝방같이 이렇게 돼 있는 성곽의 서쪽벽 한강으로 임한 벽이지요. 그 벽이 유실된 것 같아요. 유실되고 범람해버리고 많이 범람하고. 유실되면서 그 쪽에, 거기에서 그 초두라고하는. 1:06:03)
<해설> 홍수가 한강을 휩쓸면서 풍납토성의 서쪽 성벽 일부가 허물어졌는데, 그 곳에서 항아리 한 개가 불거져 나왔고 그 항아리 안에는 청동 초두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초두(?斗)란 긴 자루가 달린 작은 솥 종류로서 제사 때 술을 데우는 용도로 쓰인 제기(祭器)의 일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리구슬을 비롯한 다른 유물들도 함께 확인되었습니다. 커다란 토성의 성벽만이 노출돼 있던 풍납 토성이, 홍수를 만나서 은밀하게 간직하고 있던 백제의 속살 일부를 살짝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풍납토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는 초두가 출토된 곳에다 나무 표식을 세워두기도 했습니다. 1934년에 일본학자 아유카이(鮎貝房之進)는 출토된 유물들을 근거로 풍납토성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하남위례성이라고 지목합니다. 풍납토성은 그 중요성이 인정 되어서 1936년에 고적으로 지정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우리 사학계에서는 당시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초두 등의 유물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였을까요? 지금도 일부에서 한국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 이병도박사는 1939년에 진단학보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서 풍납토성이 백제의 하남위례성이라는 일본학자 아유카이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이병도 풍납토성에서 초두를 비롯한 일련의 유물들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해서 그 곳이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본디 유물이란 이 곳 저 곳으로 유동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도성 여부를 논할 거리는 되지 못합니다. 풍납토성은 백제가 초기에 고구려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사성’이었어요.
<해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유명한 ‘이병도의 사성설’입니다. 그렇다면 뱀 사(蛇)자를 쓰는 이 ‘사성’이란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낭독자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이 백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해설> 백제의 제9대 임금이었던 책계왕 시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 일부를 소개해 드렸는데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해서 아차성과 함께 쌓았다는 뱀 사(蛇)자의 ‘사성’이 바로 풍납토성이다, 이병도의 주장이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병도는 무슨 근거로 풍납토성을 사성이라고 했을까요?
*인서트-6. 테입<123> 박순발
(12:07 사성이라고 비정하게 된 것은 결국은 이병도 선생이 처음인데 그 사성리라고 하는 자체는 풍납동 토성 자체를 도성으로 보시지 않은 것이죠. 그러나 개로왕대 기사 보면 사성에서 죽 제방을 쌓아서 연결시켜서 말하자면 일종의 도성지역을 보호하는 그러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그런 기사를 인용해서 책계왕조가 되겠습니다만, 그래서 사성은 防守하는 즉 군사적인 성격을 가진 그런 성이라고 비정을 하셨는데 그것이 마침 인제 풍납이라는 것이 배암 바람들이, 배암 사성 뱀 蛇자니까 배암들이 이렇게 해서 보시게 된 것이지요. 12:52)
*인서트-7. 테입<121> 이형구
(1:12:47 風納, 바람을 들인다, 해서 풍납은 바람들이다, 그래서 그게 바람들인데 그거를 배암돌이다, 배암들이다, 배암에는 뱀하고 바람과 뱀을 음운학으로 그렇게 저는 무리라고 봐요. 그렇게 바람을 배암으로 좀 지나치게 견강부회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 설이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해방후에도 국립대학에서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그 수많은 제자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아주 고정관념처럼. 1:13:34)
<해설> 이병도는 일찌감치 경기도 광주의 춘궁리를 백제의 하남위례성이 있던 곳이라고 천명해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결코 하남위례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무리하게 차용한 이론이 바로 풍납토성과 사성의 우리말 발음을 음운학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풍납동이 바람 풍(風)자와 들일 납(納)자를 쓰니까 ‘바람드리’가 되고 뱀 사(蛇)자의 사성은 ‘배암드리’가 되니까 그 음이 유사하다는 데서 풍납동과 사성을 같은 성으로 본 것이지요. 풍납토성이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해서 수리한 사성이라면, 군사상 방어 목적으로 수축된 조그만 군사진지 같은 것이지, 임금이 살았던 왕성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병도가, 지역의 이름과 문헌상의 이름을 발음으로 연결시켜서 해석한 사례는 또 있습니다.
낭독자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해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에서 백제의 영역을 설명한 기사인데, 이병도는 여기 나오는 웅천을 경기도 안성의 안성천으로 비정 했습니다. 안성천에 가면 ‘고무다리’라고 불리는 다리가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웅천은 곰 웅(熊)자이다, 따라서 곰, 과 고무다리는 발음상 서로 연결된다, 이런 논리지요. 박순발 교수의 얘기를 들어 보시죠.
*인서트-8. 테입<123> 박순발
(15:25 현재 지명과 문헌사료에 나오는 지명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했던 건 역시 다산 정약용입니다. 위례라고 하는 것이 울타리, 울과 같다, 라고 그렇게 보신 그런 관점이라든지. 그런 연장선 속에서 대체로 1930년대, 40년대 이 때에 있어서 역사적인 어떤 추론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언어학적, 음운적인 그런 측면을 하나의 증거로 삼아왔던 그런 시대분위기가 사실은 있었지요. 그러나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 지명 자체가 언제 그것이 붙여졌느냐 하는 문제가 대전제가 되는 것인데 그런 것 없이 접근한다는 것은 학문의 엄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처음부터 커다란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죠. 16:10)
<해설> 문제는, 사학계에서 이병도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풍납토성은 사성이다’라는 이병도의 대전제를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후학들이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1963년, 천호동 일대가 행정구역상 서울시로 편입이 되면서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풍납토성 역시 서울시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풍납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됩니다. 이 시기에 풍납토성 일대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당시 대학생으로서 그 곳을 자주 왕래했었다는 이형구 교수로부터 들어보기로 하지요.
*인서트-9. 테입<121> 이형구
(1:22:37 구이동이나 이 쪽 워커힐에서 광진교가 옛날 있었는데 광진교를 건너오는 건데요 광진교를 건너와서 북쪽 벽은 살아 있었어요. 동쪽 벽도 살아 있었어요. 서벽만 을축년 때 없어졌고, 기역자로 남아 있었어요. 우리가 팔을 벌리면은 오른팔이 북쪽 벽이고 왼팔이 이 쪽 그 이화벽돌공장인데 그 당시, 그 벽돌공장으로 이렇게 이어지는 아주 그러니까 큰 엄청나게 큰 성이 와 닿는 거지요. 1:23:18)
<해설> 이 때는 성 안쪽에도 주택들이 거의 들어서지 않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풍납토성을 사적으로 지정할 때 울타리라고 할 수 있는 성곽만 지정했지 그 내부는 지정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그 일대는 옛 왕실 재산이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소유로 이어받았다가 어느 단계에서 민간에 불하가 된 땅이었습니다. 만일 국가에서 성곽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땅까지 모두 사적으로 지정을 했더라면 백제의 왕성을 발굴 복원하기가 한결 수월했겠지요.
*인서트-10. 테입<123> 박순발
(25:15 성에 대한 중요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하남위례성이라는 그런 견해를 포함해서 유적에 대한 인식은 있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요즘 와서 보면 정말 불행하게도 성벽 만을 보호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은 로마도 마찬가지고 중국에 있는 장안성 다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성곽이 둘러져서 그 곳이 도시로 되는 경우에 그 속에 사람들이 집주하게 마련입니다. 성벽을 전체로 성벽 내를 다 비워놓고 거기를 가지고 하나의 성으로 보존하는 사례는 사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거지요.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은 그 당시에 인구가 밀집되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지금 생각을 해보면은 그 내부까지를 보존 보호했으면 더욱 좋겠지만.26:03)
<해설> 당시에는 그 곳이 백제의 왕성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잘 해야 군사적 성격의 사성이 있던 자리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성곽이나마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1964년 무렵-.
<효과> (대학생들 수십 명 떠들며 걸어가고)
<해설> 삽과 곡괭이를 멘 일단의 대학생들이 풍납토성 일대에 나타납니다.
김원룡 자, 제1조는 이 쪽으로 파내려가도록 하고, 제2조!
학생들 “예!”
김원룡 제2조는 연장을 챙겨들고 나를 따라오도록 해!
해설 그 대학생들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3학년 학생들이었고, 인솔 교수는 서울대학에 고고인류학과를 창설한 김원룡 교수였습니다. 당시이 학과 3학년 과목 중에 고고학 야외실습이라는 게 있었는데, 실습 장소로 택한 곳이 바로 풍납동 토성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요즘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은 발굴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인 몇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구덩이 몇 개를 파고는 어떤 유물이 나오는지 확인하는, 고고학적 용어로는 이른바 ‘비트조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는 상당히 이른 단계의 토기들이 출토되는 등 발굴 성과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인서트-11. 테입<121> 이형구
(1:27:52 지하 2미터 3미터에서 대단한 유물이 나옵니다 유적이. 그건 뭐냐면은 백제 초기 기원 전후 시기의 토기가 이미 나오고 있고 그 토기와 기와가 나옵니다. 그 여덟개 지점인지 몇 개 지점이 전부 다 나오고 있어요 기와가. 그런데 발굴하셨던 김원룡 선생님은 그 기와를 낙랑계 기와라고 했어요. 낙랑계 기와다. 그래서 이 기와들은 백제 초기의 기와이다. 건국 얘기하고 초기의 기와다, 초기 유물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풍납리 토기라고 하는 풍납리식 토기, 지금은 중도식 토기라고도 하는데, 기원전후 시기에 기원전 1세기 2세기 그 시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그런 토기들이 나오고. 1:28:40)
<해설> 이 시범발굴에 대한 보고서는 1967년에 서울대박물관 학술총서 제3권으로 나왔는데 김교수의 주요 의견은 이렇습니다.
김원룡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과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기원 후 1세기에 축조되어서 한성백제가 멸망한 5세기경까지 사용되었던 성입니다. 이 풍납토성의 발굴 결과로 미루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해설> 이만만 해도 풍납토성 시범 발굴에 대한 김원룡의 결론은 충격적이라 할 만 했습니다.
*인서트-12. 테입<123> 박순발
(21:21 적어도 풍납토성에 대한 인식, 나아가서 백제사에 대한 인식을 근본덕으로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던 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돼 그러냐면 그 조사기록을 가지고서, 기왕에 백제가 삼국시기에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었다 이렇게 돼 있었지만 실제 어떤 고고학적 실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전부 3세기대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이왕 대 이후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해서 아예 삼국사기 초기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은 신빙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였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김원룡 교수께서는 나름대로 판단해서, 그 당시 나름대로 판단해서 이런 시기 것이 나오니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건국했다는 것이 그리 허망한 것은 아니다.22:07)
<해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드러납니다. 풍납토성을 기원후 1세기경에 축조되었다고 판단했으면서도 풍납토성이 사성이라는 이병도의 견해를 반박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사성에 대한 기록은 두 군데에 등장합니다. 서기 286년에 해당하는 책계왕원년의 기록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쌓았다” 는 기록은 앞에서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그 다음, 개로왕 21년, 서기로는 475년의 기록에도 사성이 등장합니다.
낭독자 하천의 물을 따라서 제방을 세워 사성 동쪽에서부터 숭산 북쪽에까지 이르게 하니 이로써 창고가 텅 비고 인민은 곤궁에 빠진지라…
<해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사성은 3세기말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기원후 1세기쯤으로 본다면 결국 풍납토성은 사성이 될 수 없는 셈이지요. 이형구 교수도 그 대목을 못내 아쉬워 합니다.
*인서트-13. 테입<121> 이형구
(1:35:01 지금까지도 뭐 거의 60년 이상을 이병도 선생님이 주장하신 게 정설화 돼 있는데 그 정설을 그 사성설을 절대적으로 고고학으로 반증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고고학의 본령을 이병도 선생의 사성설에 양보한 거예요. 왜냐면 그건 같은 학교에 계셔서 인지상정으로 그러신 건지 왜 양보했는가, 고고학의 본령을 왜 잊으셨는가, 난 그게 아쉬운 거요. 고고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고대사는 고고학으로 증명해야 되고, 고대사학자들이 잘 못 된 건 고고학으로 그럴 바로잡아야 되는 게 고고학의 본령인데.1:35:49)
<해설> 그런데 박순발교수는 당시 김원룡이 논문의 결론에서 풍납토성을
사성이 맞다고 못 박아 얘기하지는 않았고, 당시의 미미한 발굴 성과로 보아서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다’라고 단정할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4. 테입 <123> 박순발
(3:36 김원룡 교수께서 그것이 하남 위례성이다, 라고 비정하시기 위해서 거기를 발굴 조사한 건 아니었고 결론에서 생각하는 행간을 읽어 보면은 단순한 사성이다 이렇게 보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행간을 읽어 보면은 단순한 사성이다 이렇게 보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남위례성이다 이렇게 단정할만한 그런 고고학적 자료는 나오지 않았지만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백제의 도성지가 하남위례성이다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딱히 그분이 그런 걸 했다 안 했다 하는 점을 들어서 그것을 방향을 오도했다든지 혹은 그런 것을 몰각했다라고 하는 그런 의도성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24:17)
<해설> 그러나 당시 고고학계의 선구자였던 김원룡이, 풍남토성이 백제의 왕성이었을 가능성을 천명했다면 풍납토성의 발굴과 보존이 보다 일찍 이뤄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서울이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면서, 그러니까, 이른바 올림픽 바람을 타고 각광을 받은 유적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몽촌토성이었습니다. 1983년에 처음으로 성격파악을 위한 기초조사 이뤄졌고, 84년부터는 여러 대학들이 연합 발굴 형식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몽촌토성 발굴 작업 역시 서울대 김원룡 교수가 주축이 되어 진행했습니다.
*인서트-15. 테입<123> 박순발
(27:35 이 몽촌토성은 잘 아시다시피 그 무렵 83년도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1986년도의 소위 아시아 경기대회 그리고 곧 이어서 서울올림픽 그러한 시설들을 어느 곳에 두면 적당할까 그런 판단, 그 일대가 결국 올림픽 공원으로 조성이 됩니다만, 그런 차원에서 장비가 이뤄진 것입니다. 유적을 위한 정비라기보다는 그런 것과 아울러서 그 일대가 정비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정비 과정에서 이 성의 중요성이라는 것이 인식이 돼서 풍납토성보다 빨리 아, 이것이 백제의 중요한 성이구나 하는 그런 인식이 심어지게 된 것이죠. 28:17)
<해설> 83년이후 87년까지 서울대 박물관이 주도한 6차례의 연차발굴이 이뤄지면서 몽촌토성은 가장 유력한 하남위례성 후보지로 떠오릅니다. 1991년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풍납토성은 독립된 항목으로 올라 있지 않은 대신 몽촌토성에 대한 설명은 비교적 자세히 올라 있는데, 여기서도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몽촌토성은 서울 강동구 이동에 있는 백제초기의 토성지이다. 이 성은 대부분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일부 필요에 따라 흙을 쌓거나 경사면을 급하게 깎는 등 인공을 가하였기 때문에 그 형태가 불규칙 하다. 이 성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에 아차산성과 풍납동 토성, 서쪽에 삼성동 토성, 남쪽에 이성산성이 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 전기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백제시대 초기의 건국지로 알려져 있는 위례성으로 추정되고 있어 주목되는 성지(城址)이다.
<해설> 이렇듯 몽촌토성이 위례성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면서도 89년에 나온 몽촌토성에 대한 마지막 보고서에서는 또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그간의 조사성과에 의하여 몽촌토성의 역사적 성격의 일단이 드러나면서, 이 성을 한성시대의 중심적인 거성(居城) 또는 도성(都城)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도성으로 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궁궐지나 관청지 등의 내부 시설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어 몽촌토성의 성격규명에 장애가 되고 있다.
<해설> 몽촌토성을 백제 왕성으로 추정하면서도 기실 그 고고학적 증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실토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형구 교수는. 우선 몽촌토성을 토성으로 볼 것이 아니라 산성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서트-16. 테입<121> 이형구
(1:45:03 몽촌토성이라는 건 바꿔야 돼요 명칭을. 산을 거긴 산입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오는 산의 끝자락이에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계곡을 중심으로 이렇게 성이 둘러 싸여 있는데 산성을 이용하고 협곡에, 계곡 구릉지에 낙타 등에 일부 흙으로 쌓았어요. 흙으로 쌓고 대개 동서남북의 문지라든가 이런 데는 흙으로 쌓고 나머지는 다 산성이에요. 산 능선을 돌아가는 산성입니다. 그걸 자꾸 왜 토성이라고 그래요 산성이에요. 1:45:47)
<해설> 타당한 지적이긴 하나 오래 전부터 토성으로 불리어왔으니 우리도 일단 몽촌토성이라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몽촌토성의 북쪽에서 둑을 막아 만든 못이 발견되었는데, 이형구 교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근거로 해서 몽촌토성이 왕성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낭독자 진사왕 7년 봄 정월에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이상한 짐승과 화초를 길렀다.
<해설>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다면 궁궐이 평지에 있었다는 증거다, 하남 위례성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성이었다면, 궁실에 산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맞지 않고, 계곡을 막으면 호수가 생기는데 일삼아 못을 팠다는 얘기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얘깁니다.
그 다음, 고구려 군사가 도성을 공격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 역시 몽촌토성과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낭독자 개로왕 21년 가을 9월,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도성을 에워싸므로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바람결을 따라 불을 놓아서 성문을 태우니…
<해설> 만일 산성이라면 네 길로 나누어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 나타난 조건에 부합하자면 백제의 왕성은 평지성이어야 하고, 따라서 풍납토성이 왕성이라는 얘기죠. 바람결을 따라 불을 놓아서 성문을 태웠다는 내용 역시, 서해안의 바람을 쉽게 받아들여서 글자 그대로 ‘바람들이’인 풍납토성이어야 맞아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몽촌토성이 발굴작업을 거치면서 정비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풍납토성은 보호대책에서 제외되어 대규모 건물과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개발이 진행됩니다. 풍납토성이 다시 평가받을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고고학자인 이형구 교수였습니다. 그는 83년부터 96년 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강유역 일대의 초기백제 유적 보존운동을 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올림픽을 앞두고 88올림픽대교 설계 발표가 있었는데, 그 다리가 풍납토성을 비켜가도록 건의해서 관철한 사람 역시 이형구 교수였습니다.
*인서트-17. 테입<122> 이형구
(09:43 지금 현장교라고 해서 구이동에서 풍납토성 넘어오는 다리, 그게 삐딱하게 ㄷ자형으로 휘었습니다. 원래는 직통으로 풍납토성을 자르게 돼 있었어요. 잘라서 램프가 달 설치돼서 풍납토성이 산산이 없어지게 돼 있었어요. 설계가. 그걸 또 바로잡는다고 청와대나 언론을 통해서 그걸 해서 수정을 했지요. 노대통령이. 노태우 대통령땐데 그거는 수정이 돼서 92년에 개통이 됐지요. 88올림픽 때 개통이 돼야 할 다리가 설계수정부터 다시 들어가 가지고 지금 아산병원하고 그 사이로 휘어서 저 쪽 하남으로 빠져나가는 그런 도로가 됐지요. 10:34)
<해설> 이형구 교수는 94년도에 풍납토성이 백제의 초기 도성이었던 하남 위례성이 틀림없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해에 서울시에서는 정도(定都) 600년 행사를 기획해서 대대적으로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0월28일 시민의 날에 기념식을 개최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행사를 저지하기 위해서 나선 사람이 바로 당시 정신문화연구원에 있던 이형구 교수였습니다. 그는 자비를 들여서 광화문의 한글회관에서 세미나를 열었는데,
이형구 (에코) 그 동안 개성에 있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때가 1394년이었으니까 1994년이면 600년이 된다, 그래서 개최하는 행사가 정도 600년 행사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유구한 서울의 역사를 모욕하는 행사입니다. 서울은 이미 500여 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습니다. 로마와 맞먹는 서울의 역사를 무시하고 조선시대에 도읍이 된 것을 기념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해설> 그러나 이형구의 이런 주장은 그 울림이 미미했고, 정도 600년 행사 당일인 10월28일은 다가오고 있었는데, D-데이를 엿새 앞둔 10월 23일,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참사가 발생합니다.
*인서트-18. 테입<122> 이형구
(16:58 성수대교는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오는 다리여. 그렇지 않습니까 그걸 연결하는 다리라. 근데 그 역사적인 숙명인데 그걸 무너지는 순간에 많은 역사가 새로 바뀌어지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때 나는 어디 있었냐면 중국의 집안의 고구려 유적이 있는 국내성에 있었어요. 거기서 여관에서 텔레비전 해외뉴스에 성수대교 무너지는 걸 거기서 봤어요. 17:39)
<해설> 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서울시장이 사퇴하였고, 그 바람에 정도 600년 행사 역시 취소되었던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1995년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옮겨간 이형구는 풍납토성의 실측조사를 위한 프로젝트를 유치해서 학생들을 데리고 현장조사를 벌이게 됩니다.
*인서트-19. 테입<122> 이형구
(22:24 실태조사 현황조사지요. 파괴가 어떻게 돼 있는가 무허가 건물도 서 있고 무허가 건물이 어떻고 성벽이 어떻게 파괴되고 거기에 농작물 경작을 어떻게 했는가 또 내부 도시계획이 어떻게 돼 있는가 또 측량, 세부측량을, 왜냐하면 그 때까지 제원이 잘안 알려졌어요. 3킬로인지 2.8킬로인지 제원이 잘 안 알려져 있어서 제원을 밝혀야 되겠다. 그리고 남아 있는 곳, 을축년 때 쓸려 나간 곳, 이런 것들이 제대로 안 밝혀져서 측량도 세부측량도 폭이 얼만지 높이도 잘 모르고 그래서 그걸 측량을 여름방학 때도 하고. 23:10)
<해설> 1997년 1월 1일-.
<효과> (겨울 찬바람 부는)
이형구 자, 측량조는 저 건너편으로 가서 성벽의 길이하고 폭을 측량하고…
학생1 (학생들 웅성)교수님, 오늘이 1월 1일, 새해 첫날인데, 떡국도 못 먹었어요.
학생2 맞아요. 교수님 우리 떡국 먹고 해요.
이형구 알았다, 식당에 가서 떡국 사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아니, 그런데, 저 쪽에서는 무슨 공사를 하는데 저렇게 펜스를 높이 쳐서 가려놨지?
<해설> 그 곳은 지금의 풍납1동이었는데 이미 현대아파트 두 동이 들어서 있었고 추가로 7개 동을 짓기 위해서 터파기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600여 평을 파서 그 흙을 이미 트럭으로 실어낸 상태였는데,
이형구 (걸어가서)경비원 아저씨, 추운데 수고하십니다.
경비원 어디서 오셨습니까?
이형구 아, 예, 저는 대학에서 지질학을 가르치는 사람인데요, 토질조사를 좀 해야겠는데 마침 여기 땅을 파헤쳐 놔서…잠깐 들어가서 구경좀 합시다.
경비원 안 됩니다. 사장님이 문화재 조사 그런 것 하는 사람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어요.
이형구 허허허, 문화재 조사요? 어이구 저는 문화재 그런 건 까막눈입니다. 흙 만져보고 지질 조사하는 사람이에요. 잠깐 좀 들어갔다 나올게요.
*인서트-20. 테입<122> 이형구
(26:44 터파기 한 밑에층까지 들어갔는데 위에서 한 5미터쯤 팠어요. 깊이 팠어요. 그런데 한 5미터 4미터 그 사이에서 목탄층, 재가 탄 목탄층이 보이고 그 부근에서 토기편이 막 널려 있어요. 기와편도 있고. 그걸 주머니에 있는 대로 집어넣었어요. 경비는날 들여보내고 잠깐 한눈 파는 사이에 그걸 주머니 있는 데마다 내 눈짐작으로, 요 층에서 난 거는 아래 주머니에다 위층에서 난 거는 윗주머니에다 넣고 이렇게 해서 있는 대로 다 주머니에 넣고 부랴부랴 소형카메라로 사진 찍고 그러고 급히 나왔지요. 27:28)
<효과> (주머니에서 돌덩이, 기와파편 등 꺼내서 책상위에 쏟아놓는)
이형구 이봐 조교!
조교 (다가와서)예, 교수님.
이형구 이거 보라구. (조각 집어들고)이게 바로 전에 김원룡 선생이 발굴한 풍납동식 무문토기 조각이고, (놓고 다른 것 집으며)이 조각에는 무늬 있지? 이건 낙랑계열의 탄일무늬 토기야. 이것들이 풍납토성공사현장에서 나왔다니까.
조교 그럼 풍납토성의 성격이 달라집니까?
이형구 이건 역사적인 순간이야. 내가 뭐랬어? 풍납토성이 백제초기 왕성 하남위례성이 틀림없다고 그랬지?
조교 교수님, 그러면 어떻게 하죠?
이형구 그렇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효과> (전화기 송수화기 들고 거는)
이형구 여보세요, 문화재 관리국이죠? 지금 풍납1동 현대아파트 공사 말입니다, 그 공사 당장 중지시켜야 합니다. 거기 왕경유물이 묻혀 있다구요!
*인서트-21. 테입<122> 이형구
(28:29 흥분이 아니라 이거는 어디 산에 올라가서 진공상태에서 귀가 먹먹한 진공상태에서 붕 뜬 그런 기분을 내 느꼈어요. 그래서 그거를 야, 이거 흥분도 되고 조사한 것 사진 찍고 가라앉히고 내 가까운 사람들한테 알렸어요, 문화재청에. 그 당시 문화재관리국이지 관리국이나 문화재 연구소 몇몇 사람한테 알리면서 이거는 중지시켜라 중지 시켜야 된다, 이건 백제 왕성유적이다, 나는 계속 첨부터 왕성유적이다 그랬거든. 29:09)
<해설> 아파트 건축공사는 중단되었고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팀을 꾸려서 발굴을 하게 됩니다. 이 발굴은 9개월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이 때 긴급하게 꾸려진 발굴팀의 일원으로서 충남대 고고학과 박순발 교수도 투입됐습니다.
*인서트-22. 테입<123> 박순발
(0:25 97년도 조사된 그 지점에서는 풍납토성 성벽 이전에 있었던 환호시설, 환호라면 마을 주위를 둘러서 성벽을 쌓는 것은 아니고 도랑을 파서 일정한 경계를 짓는 그런 시설입니다만 그것이 세 겹 짜리, 그래서 우리가 가칭 3중환호라고 학계에서 부릅니다만 그러한 환호를 두른 그런 유적이 마을의 일부분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이건 분명 지금의 성보다 앞선 단계에 거기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래서 나아가서 그 삼중환호 시점이 언제였는가를 판단할 수 있으므로 해서 풍납동 토성의 성벽이 과연 언제 쌓였는가까지도 알 수 있는 그런 단서를 제공하게 된 것이죠. 31:13)
<해설> 그러나 발굴이 진행하면서 아파트 건축공사를 강제로 중지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재건축을 시행하려던 주택조합의 조합원들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현대아파트 7개 동의 공사만 아예 무효로 하고 보상을 해주려면 2천억이라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습니다. 1960년대 초에 조사를 했던 학자들이 그 곳이 왕성유적일 가능성 크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더라면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에 별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발굴과 보존이 이뤄졌겠지요. 공사를 영 중단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발굴을 한 다음에 아파트 신축공사는 계속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아파트 공사현장의 발굴을 계기로 서울시에서는 풍납토성 성곽에 있던 무허가 주택을 정비하는 등 관심을 보였으나 이미 너무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고, 또 건축 공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문화재연구소에서는 풍납토성의 성벽 일부를 조사해보기로 하고 발굴에 들어갔는데,
*인서트-23. 테입<122> 이형구
(42:54 황토흙, 약간 모래 섞인 흙, 이런 것들을 석어서 다져서 쌓았는데 이런 것들을 한 켜 한 켜 다져서 쌓았는데 수십 켜를 쌓았는데 그 높이가 자그마치 15미터 폭이 40미터, 둘레가 3.5키로를 쌓는다면 엄청난 양이다. 이걸 3년내에 삼국사기 기록은 3년내에 축조한다고 기록이 나왔다고 그랬지 않았어요. 만일 3년내에 쌓았다면 전제국가 아니면 이런 인력동원 할 수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성벽 안에. 밤만한 녹두만한 돌멩이 하나 없어요. 채로 쳤다고 난 봐. 43:38)
<해설> 높이가 15미터에 이르고 성곽의 폭이 40미터나 되는 성을 3.5 킬로미터나 축조했다, 더군다나 외부에서 파온 흙을 일일이 곱게 쳐서 사용했다, 이 정도의 토목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상당한 규모를 갖춘 전제국가였을 것이다, 이형구 교수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수는 삼국사기 온조왕대의 초기 기록을 그대로 믿고, 이런 거대한 성이 삼국사기에 적힌 대로 기원전후 시기에 축조됐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말하자면 그 시기에 온조 세력은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그런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일 만큼 강력한 왕권국가를 이뤘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박순발 교수는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를 3세기 후반으로 보고, 백제가 그 때에 이르러서야 국가수준의 사회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인서트-24. 테입<123> 박순발
(41:19 풍납토성이 기원전 1세기대에 등장하여야 삼국사기 기록이 맞고 3세기 후반대에 등장하면은 최기록이 맞지 않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3세기후반대에 그것이 국가사회가 성립됐다는 얘기지 온조라고 하는 그러한 백제의 원 말하자면 건국주도 세력이라고 그럴까요? 그 집단이 3세기에 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문헌사료와 고고학 자료를 적절히 합리적으로 종합 해석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 특정한 관점에 빠져서 연대론을 주장한다든지 무리하게 방사선 탄소연대를 들고 나온다든지 이것은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거든요. 42:06)
<해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는, 시조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참 뒷 시기에 있었던 일들을 끌어다 수록해 놓았다는 얘기는 백제의 건국과정을 탐색할 때 소개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풍납토성의 축성이 온조왕대에 이뤄졌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뒷시기에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건 둘째 문제고, 어쨌든 94년부터 진행된 발굴을 통해서 백제의 초기왕성인 하남위례성이 풍납토성이었다는 인식이 통설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현대아파트가 99년에 완공되자 인근에 있던 경당연립, 미래마을, 외환은행 연수원 등 3군데 주택조합에서 재건축을 추진하는데, 조합원들은 현대아파트처럼 일단 발굴을 한 다음에 건축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래서 경당 연립주택 부지에 대한 발굴이 진행됐습니다.
*인서트-25. 테입<122> 이형구
(49:24 유물은 뭐 한 20트럭 나왔다든가 뭐 그보다 더 나왔다고 그러고 건물지가 나오고. 도로를 깐 건물지가 나오고 건물이 16미터나 되는. 그럼 우리가 경복궁 근정전 같은 거 그것도 보면 십육칠미터 밖에 안 돼요. 폭이, 그런 건물지가 나온 거야. 우리가 제일 크다는 각황전, 화엄사 각황전도 20여미터밖에 안 되거든. 16미터니까 폭이, 얼마나 큰 건물이겠어요. 그건 왕궁 아니면 아니지. 거기서 기와가 나오고. 기와가 몇 트럭씩 나오고 그러면 이거는 왕궁일 것이다. 50:12)
<해설> 길이가 16미터나 되는 건물이 있던 자리라면 필시 궁궐이 있던 자리였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이 곳에서 확인된 일반 주거지의 경우집이 있던 자리가 20여기에 달하는데 극심한 파괴로 인해서 대부분이 부뚜막 시설과 바닥면 일부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됐습니다.
이 곳에서는 한성시기 백제의 토기들이 모두 출토됐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됐습니다. 특히 다량의 와편, 즉 기와 조각들이 출토됐는데, 이형구 교수는 고대의 유물 중에서 기와조각이 출토됐다면 그 곳은 왕궁유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얘기합니다. 따라서 60년대초의 발굴 당시 기와조각이 나왔을 ,때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두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서트-26. 테입<121> 이형구
(1:29:44 지금도 기와는 아무나 안 쓰잖아요. 하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만 봐도 신라, 고신라, 신라통일 전의, 그 때 보면 진골은 기와를 못 올리고 성골만 올렸다 그랬어요. 성골이 기와를 올린다면 성골은 왕이지요. 왕궁에만 기와를 올리고 그들 이외에는 기와를 못 올렸다 그랬거든요. 그렇다면은 삼국시대에 백제에 기와를 기와집이 나왔다면은 그건 왕궁일 텐데 당시 그 기와를 고찰할 때 낙랑식 기와가 나왔다, 그렇다면 그걸 왜 왕궁이라고 생각 못 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1:30:28)
<해설> 풍납토성은 전체 3.5킬로미터 중 현재 2.3 킬로미터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한성백제의 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이 이만큼이라도 발굴,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일찍이 그 곳이 백제의 왕성이었음을 주장하고 보전운동에 앞장섰던 한 고고학자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시그널 + 클로징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114편>
마한의 역사를 찾아서
기획 성대경
연출 이미희
극본 이상락
방송 : 12.24(일) 00:05-01:00
나오는 사람들
낭독 이승주
최치원 (박영재)
예(禮) (방우호)
조선왕 (심승한)
마한왕 (차진욱)
온조왕 (이지환)
대신, 사신 (이병용)
장수 (백승철)
일관, 대방왕 (정형석)
신하 (장민혁)
책계왕 (남도형)
*시그널 +타이틀
<해설>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우리는 지금 백제의 역사를 통사로 소개하는 순서를 마치고, 백제사를 보다 다각적으로 조망해보기 위해서, 분야별로 주제를 정해서 탐색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해서 7세기말에 멸망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물론 대륙백제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한반도를 기준으로 보자면 오늘날의 서울 경기 지방에 터전을 잡기 시작해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으로 그 영역을 넓혔다가 멸망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서울 경기 지역과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 지역의 700년 역사를 모두 망라 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백제 말고도 마한이 있었습니다.
낭독자 비류와 온조는 열 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마침내 한산에 이르렀다.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십제라 하였다.
<해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 중에서 백제의 건국세력인 온조 일행이 처음으로 지금의 서울지역에 흘러 들어와서 나라를 세울 터전을 잡는 대목입니다. 온조 일행이 부여에서 내려왔을 때, 발붙일 곳 없는 그들에게 1백 리의 땅을 떼어준 세력은, 백제 건국 이전부터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었던 마한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한은 대체로 3세기 말쯤에 이르러서 백제에 병탄되었다는 것이 학계 일반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수백 년 동안 존재했던 마한의 역사를 모른 체하고 지나가버린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결손 된 채로 흘려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음악> (브릿지)
<해설> 그 다음, 또 하나의 역사가 있습니다.
낭독자 ‘옹관고분’의 공간적 분포 범위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서부지역에 걸쳐 있고, 그 시간적 범위는 3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약 300여 년 동안 존속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옹관고분은 그 규모나 부장 유물로 비추어 볼 때, 타지역의 일반적인 옹관묘와는 질적으로 다른, 영산강 유역 특유의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옹관고분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는 곧 3세기 중반부터 약 300여 년 동안에 영산강유역의 세력집단이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이를 유지해온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해설> 목포대학교 강봉룡 교수가 쓴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의 형성과 전개’라는 논문의 한 대목을 들려드렸는데요,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가야가 신라의 영역으로 복속되기 이전까지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유지돼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제가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대해가는 중에도, 영산강 유역 즉 전라남도 지역은 백제에 복속되지 않고 나름으로 독자적인 정치 문화권을 유지해오다가, 나중에야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런 얘깁니다. 이런 주장은 ‘대형옹관고분’이라는 특이한 유물이 그 지역에서만 발견됨으로써 고고학적으로도 일정부분 뒷받침 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을 인정하기로 한다면, 영산강 유역의 사람들은, 백제의 역사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역사를 만들면서 수백년 동안 살아 왔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부분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에서는 마한과 영산강 유역 세력의 역사를 2회에 걸쳐서 탐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럼 우선 마한의 역사를 더듬어보겠는데요, 우선 옛 문헌에 등장하는 ‘마한’이라는 이름이 막연하게 지역범위를 나타내는 말인지, 아니면 일정한 틀을 갖춘 정치체(政治體)의 이름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또한 마한이 지칭하는 지역이나 세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도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목포대 강봉룡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1. 테입<124> 강봉룡
(00:22 마한이라고 하는 용어는 중국 측 기록에 주로 나오고 우리 측 기록에는 최치원이 쓴 기록에 마한이 나오는데 중국 측의 기록과 우리측의 기록이 틀려요. 최치원은 마한을 고구려로 비정을 했고요, 그 다음에 견훤 같은 경우는 마한을 백제로 비정을 하고 그래서 고구려로 마한을 비정하는 것까지 있어서 그런데 그게 가장 우리 측 기록에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고 신빙성 있는 기록이거든요. 최치원의 글에 있기 때문에. 01:08)
<해설> 삼국사기 열전편의 최치원전을 보면, 최치원은 이렇게 얘기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최치원 (에코)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입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어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이하 BG)연나라, 제나라 노나라를 위협하여서…
<해설> 최치원은 신라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문헌에 ‘마한’을 기록한 사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최치원은 ‘마한이 곧 고구려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한의 영역하고는 다르지요? 이번에는 중국사서인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한’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여기서 ‘한’은 ‘대한민국’ 할 때 쓰는 그 한(韓)입니다.
낭독자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쯤 된다.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해설> 삼한 중에서 마한이 서쪽에 위치했다 하였고, 조선시대의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마한이 역사 ? 지리적 관점에서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에 걸쳐 있었다고 했으니 일단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마한의 역사는 얼마나 지속되었을까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마한의 상한(上限), 즉 마한사의 시작을 언제로 봐야 하는지를 따져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마한이 어느 시기에 어느 지역에서 존재했는지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해보자면 ‘이것이 마한의 독특한 문화다’라고 할 수 있는 마한의 문화적인 정체성이 있어야 하는데, 강봉룡 교수는 그것을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2, 테입<124> 강봉룡
(02:25 마한의 문화적 실체, 이게 어떻게 됐는지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거든요. 어떤 전형적인 형태가 마한이라면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아, 이건 마한의 유물이고 유적이니까 이것을 언제까지 올려볼 수 있다, 편년을 해보면 나오는데 그게 마한의 문화라고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할까요 이런 게 없는 마당에서 그것을 마한의 기원을 올려보기는 상당히 어렵다. 03:02)
<해설> 충남대 박순발 교수 역시 마한시대 유물의 전형을 짚어내기는 어려우나, 가령 점토대 토기 같은 유물들이 한(韓) 사회에서 쓰였던 것 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3. 테입<123> 박순발
(48:29 土器로 말하면 우리가 구연부에 두툼한 흙띠가 둘러져 있는, 우리가 고고학에서는 그거 점토대 토기 점토 띠 토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쓰이고 있고 청동기로 본다면 세형동검, 그리고 우리가 한국 청동기 문화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울 중에서 꼭지가 두 개 보통 달립니다만 다뉴라고 말하지요, 紐가 두 개 있다고 해서. 다뉴 세문경이라고 하는. 그라고 여러 가지 청동의기라고 우리가 통칭합니다만 방울류라든지 여러 가지, 그 당시 정확한 쓰임새를 알 수 없지만 아주 정성들여 만든 그런 청동기들이 다량으로 나오는 때입니다. 적어도 그러한 청동기를 만들어서 지배자들이 그런 걸 쓰고 하는 그런 사회들이 있었고 그 사회를 바로 韓 사회라고 불렀다 하는 점입니다. 49:10)
<해설> 박 교수는 이 점토대 토기가 고조선이 있을 당시에 중국의 동북지 방인 오늘날의 요령성과 길림성 일대에 분포했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점토대 토기가 어떻게 해서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것일까요?
*인서트-4. 테입<123> 박순발
(50:03 큰 사건 중의 하나가 고조선과 전국 연나라의 무력충돌입니다. 그것이 기원전 300년의 일입니다. 기원전 300년에 그러한 어떤 국제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기록은 이제 문헌사료에 남아 있지요. 가령 서쪽 한 2,000여 리를 뺏겼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한 일련의 파동과 더불어서 점토대 토기는 그 영향권에 들어 있기 때문에 상당부분 한반도 내에 유입되게 된 것이죠. 따져보낸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원전 2세기 무렵의 토기 韓 이라고 지칭했던 그 시대의 고고학적 실체는 점토대 토기야. 점토대 토기는 저 북쪽, 말하자면 길림 요령 이런 지역에서 그런 300년경에 일어났던 정치적인 사건과 더불어서 한반도내에 들어온다는 것이죠. 50:49)
<해설> 박순발 교수가 거론한 고조선과 연나라의 무력 충돌 사건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한(韓)조에, 위략(魏略)을 인용한 기사로 나타나 있습니다. ‘위략’은 중국 삼국시대 어환이 지은 것으로 삼국지보다 앞서 저술된 책입니다.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의 제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서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자신도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으로 공격(逆擊)하여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했다. 그러나,
예(禮) 아니되옵니다. 연나라를 선제공격해서 이로울 것이 없사옵니다.
조선왕 그러면 앉아서 연나라의 공격을 당하고만 있자는 얘기요?
예신이 연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싸움을 멈추도록 설득하겠사옵니다.
조선왕 으음, 그러면 그리 하시오.
<낭독> 조선왕은 자신의 대부(大夫)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자손(子孫)이 점점 교만해지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
<해설> 고조선과 연나라의 이 무력충돌이 벌어진 때가 기원전 300년경의 일인데, 이런 파동을 겪으면서 중국의 점토대 토기가 한반도에 유입되어서, 고인돌과 무문토기를 사용해오던 종래의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런 분석입니다. 위서동이전에 수록된 그 다음 얘기를 더 살펴보도록 하죠.
낭독자 조선왕 부(否)가 죽고 그의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한나라 때 이르러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와서 준왕에게 항복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백리의 땅을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위만은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차 많아지자 드디어 돌아서서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준왕은 가까운 신하들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해설> 이 때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건너와서 스스로 한의 왕을 칭했다 했는데 곧 마한의 왕을 지칭하는 것이고, 그가 내려와서 터전을 잡았던 곳이 오늘날의 금강유역일 것이다, 박순발 교수의 분석이 그렇습니다.
*인서트-5. 테입<123> 박순발
(52:04 고조선의 준왕이 내려와서 거주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일찍부터 문헌사료를 근거로 한 연구나 고고학에서도 오늘날 금강유역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한지역이 되는 셈이죠. 구체적으로 익산일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견해도 있어왔습니다만 최근 고고학 자료에 의해서 등장하는 것들 보면 바로 금강유역이 일찍부터 그런 점토대 토기 문화가 집중돼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많은 청동의기들이 나오고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염두에 둔다면 한 사회는 시작은 300년이고 그 한 사회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마한이었다. 그 이후에 아마 분화가 돼 나가면서 마한 진한 변한 같은 건 그 보다 좀 뒷시기, 낙랑이 성립한 이후의 어떤 토착사회에 대한 구분명이 생기면서 등장 하지 않았느냐. 52:53)
<해설> 이렇게 볼 때 마한의 역사는 그 시작을, 다소 막연하기는 하지만,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이런 얘깁니다.
<음악> (브릿지)
<효과> (사람들 이동-수레 굴러가고 사람들 걸어가는)
<해설> 이렇게 시작된 마한의 역사는 기원전 18년에 백제의 건국세력이 남하하여 지금의 서울지방에 당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마한왕 (위 행렬 멈추고)그대들이 강을 건너 남쪽으로 왔으나 마땅히 거처 할 곳이 없다 하니 짐이 1백 리의 땅을 내어줄 것이다. 그 땅을 터전으로 삼아 편히 지내도록 하라.
온조왕 허허허. 고맙소이다.
<해설> 삼국사기에는 마한의 왕이 온조 일행에게 동북쪽으로 1백 리의 땅을 내어주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서트-6. 테입<123> 박순발
(54:04 백제 건국세력이 자리 잡았던 곳은 지금의 서울 강남지역, 송파구 일대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을 마한의 동북변방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 온조 세력들은 점차 정치적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사회통합을 같이 이뤄나가면서 3세기 후반대에 이르러서는 늦어도 250년에서 300년 그 사이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어엿한 국가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백제의 국가단계로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국가의 속성은 부단한 성장입니다. 그 성장에 수반되는 것은 필히 영토의 확대이지요.54:46)
<해설> 백제가 영토를 확대해간다는 것은 거꾸로 마한세력이 위축돼간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백제 건국세력이 서울 경기 지역을 본거지로 삼아 세 확장을 꾀하고 있을 당시, 마한으로 통칭되는 세력의 범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50여 개가 넘는 소국의 이름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낭독자 마한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 마한의 나라들로는 원양국,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 백제국, 속로불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람국, 월지국, 자리모로국, (이하 BG)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해설> 이 소국들 이름 중에서 백제국과 월지국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54개에 이르는 소국들을 나열하면서 그 속에 백제국을 포함시켰다는 것은, 초기에 백제 역시 그 세력이 아주 미약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리고 소국들 중에서 달 월(月)자의 월지국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눈 목(目) 자의 목지국(目支國)을 잘 못 쓴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목지국이 54개에 이르는 소국들의 맹주국이었습니다.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이 어디에 위치했었는지는 잠시 후에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중국사서에 마한을 구성하는 소국들로 소개되고 있는 이 54개의 작은 세력들은 정치 군사적으로 어떤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을까요?
*인서트-7. 테입<124> 강봉룡
(04:13 마한지역이라고 하는 지리적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그 마한지역의 54개국가가 분포돼 있었다, 그런데 그 54개 국가가 하나의 정치적 동질성을 확보한 정치연맹체냐 아니면 적어도 문화적 동질성을 확보하고 있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볼 수 있느냐 이런것을 판단을 해야 되는데 그 지리적 권역과 문화권과 정치권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개념이 다르지요. 그런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따져보지 못하고. 04:56)
<해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54개의 소국들이 마한의 제국(諸國) 즉, 마한의 여러 나라로 올라 있다고 해서, 이 소국들이 어떤 정치 군사적인 연합체로 결성돼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강봉룡 교수의 주장이 그렇습니다. 박순발 교수 역시 엇비슷한 의견을 피력 합니다.
*인서트-8. 테입<123> 박순발
(1:00:04 우선 마한이라고 하는 명칭이 하나의 정치체 내적으로 어떤 위계가 있고 통합된 정치체 이름인가 아니면 광역한 지역에 대한 범칭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찍이 한 사회, 韓이라고 불렀던 것은 한 땅이라고 불렀던 것은 대체로 고고학적으로 점토대 토기가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런 지역입니다. 청동기 같은 게 나오고. 그랬을 때 그 때의 지칭은 분명 하나의 지역 명칭이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지 위지동이전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그 자료에서도 마한지역, 변, 진한 이렇게 세 개의 한으로 나눴지마는 마한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한 전반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1:00:53)
<해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는 한을 셋으로 나눠서 마한 변한 진한으로 소개하고 있고, 여기 등장하는 54개 소국들은 마한의 여러 나라라고 돼 있긴 하지만, 실상은 진한과 변한 등 다른 지역의 작은 세력들을 모두 열거해 놓은 것이다, 이런 얘깁니다. 그렇다면 사서에 나오는 ‘마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서트-9. 테입<124> 강봉룡
(07:01 마한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지역적 개념, 54개국이 산재해 있는 지역, 바운더리라고 하는 그런 개념으로 중국 측에서 썼던 그런 마한이 있고 또 실제 초기 기사, 삼국사기 초기 기사에 나오는 마한은 정치적 실체를 가진 마한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정치적 실체를 가진 마한은 뭐냐, 라고 하는 것이 인제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은 충청도 대체적으로 충청도 지역에 분포했던 소국들에 대한 연맹체고 그 연맹체의 구심체가 바로 목지국이었다. 07:45)
<해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실린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기로 하죠.
낭독자 나라마다 장수(將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하였다. 마한의 50여개 국 중에서 큰 나라는 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로서 총 10여만호이다.
<해설> 호당 가족 수를 몇 명으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10여만 호라면 그 인구 규모가 적은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등장 하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낭독자 진왕(辰王)은 목지국을 통치한다.
<해설> 목지국이 마한의 맹주국이라 했는데 그 목지국을 다스리는 사람이 진왕이라 했습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진왕이 목지국만 다스린다고 했으나 후한서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이 함께 세운 왕이 진왕이라고 했습니다. 이 진왕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도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문제입니다.
*인서트-10. 테입<123> 박순발
(1:01:33 진왕이 과연 삼한지역을 통괄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총괄할 수 있는 총왕의 개념인가 아니면은 상호 독립성이 상당히 있지만 나름대로 대외적 관계 대개는 중국 군현과의 관계나 혹은 중국의 그 당시 진입니다, 진서 마한조에 보면 그런 마한 主 이런 것으로 나오는데 그런 대외관계에 의해서 뭔가 그 대표라고 할까요? 이 때도 대표라고 할 때 그 그야말로 자기가 최고고 밑에는 편재된 이런 대표라기보다는 그 중에 내가 그 맏이, 내가 그래도 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소위 집단지도체제라고 할까요. 1:02:19)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마한의 맹주국인 목지국이 과연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학자들은 여러 가지 논거를 들면서 나름대로 목지국의 위치를 비정해 왔는데요,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해당하는 금마 지역에다 목지국을 세웠다,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충청남도 예산 지역이라고 주장한 학자도 있었고, 천안시 직산읍 지역을 목지국의 본거지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낭독자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해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미추홀은 인주요,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이다.
<해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오는 백제 건국 관련 기록입니다. 온조가 도읍으로 정한 위례성이 충청도의 직산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마한 목지국의 도읍지가 직산인 것을 잘 못 기재한 것 아니겠느냐, 이런 추측입니다.
<해설> 목지국이 직산 지방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현재로서는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니 일단 그렇게 믿기로 하죠.
<음악> (브릿지)
<해설> 이제부터는 백제가 서울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점차 세를 확장해 나가면서 ‘목지국’으로 대표되는 마한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죠.
온조왕 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우리 국경을 침범하니 편한 날이 없으니 장차 도읍을 옮겨야겠소. 지난 날 한수 남쪽을 돌아다녀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 곳으로 도읍을 해서 영원히 편안하게 살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소.
대신 하지만 도읍을 옮기는 것은 나라의 중대사인데 마땅히 마한에 알려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온조왕 짐도 그리 생각하고 있소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마한의 왕에게 사신을 보내게 되면 우리 백제의 국경을 정하는 문제도 의논해야 할 것이오.
낭독자 온조왕 13년 8월에 사신을 마한으로 보내서 도읍 옮길 일을 알리고 마침내 국경을 그어서 정했는데, 북쪽은 패하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에, 서쪽은 큰 바다에 접하고 동쪽은 주양에 이르렀다.
<해설> 이때만 해도 백제는 마한의 왕, 즉 마한의 맹주국인 목지국의 왕에게 도읍을 옮기는 일도 보고하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도 일일이 결재를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효과> (양쪽 군사 뒤엉켜 싸우는)
온조왕 말갈놈들을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수 (말 타고 달려와서)대왕마마, 적군 우두머리를 비롯해서 도둑 무리를 사로잡아 왔사옵니다.
온조왕 허허허, 수고하였다. 사로잡은 적군 추장은 마한의 왕에게 선물로 보낼 것이다.
장수 나머지 포로들은 어찌했으면 좋겠사옵니까?
온조왕 구덩이를 파고 모두 묻어버려라!
<해설> 온조왕은 백제를 침략한 말갈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사로잡은 말갈 추장을 목지국의 왕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온조왕 24년 가을, 백제는 남쪽 경계인 웅천에 목책을 세우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마한의 왕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서 이렇게 꾸짖습니다.
마한왕 (에코)그대가 처음 강을 건너와서 발붙일 곳이 없다 하기에 짐이 동북쪽 1백 리의 땅을 내주어 편히 살게 하지 않았는가? 나는 백제왕을 그처럼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그대는 마땅히 이를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튼튼해지고 백성들이 모여들어,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성책을 크게 설치하다니, 우리 마한의 땅을 침범하려는 것인가? 어찌 그것이 의리 있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해설> 마한왕의 이런 꾸지람을 들은 온조왕은 어떻게 했을까요?
낭독자 왕은 부끄러워서 마침내 웅천의 목책을 모두 헐어버렸다.
<해설> 그러니까 온조왕이 마한과의 경계에 목책을 세운 것은 마한왕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시도였던 셈이죠.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25년의 기록을 보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봄 2월에 왕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으며,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었다. 점치는 자가 말하였다.
일관 대왕마마, 우물이 갑자기 넘치는 것은 대왕마마께서 크게 일어날 징조입니다. 또한 머리 하나에 몸은 두 개 달린 소가 태어난 것은 대왕마마께서 이웃나라를 병합할 징조이옵니다.
온조왕 허허허허, 그러한가? 그렇다면 이제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합해야 겠구나.
<해설> 다음해인 온조왕 26년 가을 7월,
온조왕 마한이 점차 쇠약해져서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마음이 맞지 않아 배반하니 그 형세가 오래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다가 혹 다른 나라에 병합돼 버리면, 그것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가운 것과 같으니, 그 때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서 장래에 닥칠 고생을 미리 막아야 할 것이다.
<해설> 온조왕은 마한을 백제의 수중에 넣으려는 결심을 굳힙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10월, 온조왕은 군사를 몰고 나갑니다.
마한왕 뭐라고? 백제왕이 군사를 일으켜 이 쪽으로 오고 있단 말이냐?
신하 걱정할 것 없사옵니다.
마한왕 어찌 걱정을 아니 할 수가 있겠느냐?
신하 대왕마마, 백제의 온조왕은 우리 마한을 치려고 군사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사냥을 나섰다 하옵니다.
마한왕 어허, 그래? 괜한 걱정을 하였구나.
낭독자 온조왕은 군사를 내어 사냥을 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고,
온조왕 성을 쳐부숴라!
<효과> (함성 지르며 돌하는)
낭독자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국읍을 병합하였는데, 오직 원산과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해설> 그러나 이듬해 4월,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원산과 금현 두 성도 결국 항복을 합니다.
낭독자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해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마한이 백제에 의해서 멸망했다고 기록한 연대가 온조왕 27년, 서기로는 기원 후 9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7년 뒤인 온조왕 34년,
장수 대왕마마, 반란이 일어났사옵니다.
온조왕 무엇이라? 누가 무슨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이냐?
장수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라는 자이옵니다.
온조왕 으음, 그 곳이 어디냐?
장수 우곡성이라 하옵니다.
온조왕 알겠느니라, 짐이 직접 출동하여 반역 무리를 쳐부술 것이니라. 자, 가자!
<효과> (군사들 달려나가는)
낭독자 왕이 친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우곡성으로 가서 치니,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으므로,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들도 베어 죽였다.
<해설> 그리고 2년 뒤, 온조왕은 원산, 금현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새로 쌓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조왕 27년, 서기로는 기원후 9년에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으로 돼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대로 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죠.
*인서트-11. 테입<123> 박순발
(1:05:21 온조왕 때 등장하는 그러한 스토리 역사 전개되는 모습을 보면은 거기에는 마한의 우두머리 격으로 목지국이 나오는 것이죠. 그 목지국이 말하자면 함락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력에 동조하는 세력은 일부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마한 잔여세력이라 그럴까요? 그 세력들이 나중에 간단하게 저항하는, 반란으로 표현돼서 그런 게 나옵니다. 문제는 그것이 온조왕조 기록에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온조왕 때 그 때냐 하는 것은 면밀하게 검토를 해봐야 되고 사료비판을 해야 되는 사실이지만 지명 비정하고도 맞물리는 것이죠. 원산 금현이라고 하는 두 개의 소위 저항하는 성이 어디냐, 그것을 비정하는 문제하고, 백제 전체의 어떤 영역 확대과정에서 어느 시점인가 하고 맞물려 들어가는 것인데. 1:06:13)
<해설> 우리가 백제 초기 온조왕 시기의 역사를 소개할 때, 시조인 온조왕의 업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한참 뒤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온조왕의 업적인 양 끌어올려서 기록해 놓았다는 점을 거론한 적 있지요? 그렇다면, 실제로 백제가 마한의 목지국을 굴복시키고 그 지역을 백제 영역으로 병탄시킨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였을까요? 목포대 강봉룡 교수는 ‘백제의 마한 병탄에 대한 신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백제가 마한을 병탄시킨 시점이 백제의 제9대 임금이었던 책계왕 때였다고 주장합니다.
*인서트-12. 테입<124> 강봉룡
(09:08 저는 마한이 병탄한 시점을 3세기말경으로 보는데 그 때가 바로 책계왕 때입니다. 백제의 책계왕 때인데 마한을 병탄한 기사는 온조왕대에 있습니다만 책계왕대 기사를 온조왕 시조왕에게 기사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큰데 책계왕의 기록을 보면 책계왕 1년, 2년, 바로 그 때는 대방군, 말하자면 중국 군현과 굉장히 친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대방군 태수의 딸과 결혼을 책계왕이 하고요. 09:53)
<해설> 충남대 박순발 교수 역시 목지국이 백제에 의해 무너진 시기가 4세 기초쯤일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책계왕이 3세기말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으니 그 시기가 엇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봉룡 교수는 무슨 근거로 백제의 마한 병탄이 하필이면 책계왕 때 이뤄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음악> (브릿지)
<해설> 우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려 있는 책계왕 시기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낭독자 고이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들인 책계왕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대방의 딸 보과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사신 (말 타고 달려와서)백제국 대왕마마, 소인은 대방에서 온 사신이옵니다.
책계왕 대방에서 왔다고 하였느냐. 무슨 일이냐?
사신 지금 고구려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 대방을 공격하고 있사옵니다. 하여, 구원을 요청하러 왔사옵니다.
책계왕 흐음, 대방과 우리나라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이니 그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짐이 군사를 내어 대방을 구원할 것이니라.
낭독자 책계왕은 드디어 군사를 내어 대방을 구원해 주었다. 고구려가 그 일을 원망하므로 책계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해설> 이상이 책계왕 즉위 원년, 서기로 치면 286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다음 내용은 책계왕 즉위 2년째에 동명왕 사당을 참배했다는 기사가 올라 있고, 이후 무려 1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런 기록도 없습니다. 그리고 책계왕 13년의 기사가 마지막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왕의 사망기사입니다.
낭독자 책계왕 13년 가을 9월에 한나라가 맥인과 함께 침범해오므로 왕은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 살해되어 세상을 떠났다.
<해설> 물론 여기서 책계왕을 살해한 것으로 나오는 ‘한나라’는 한군현, 즉 대방군을 일컫는 말이지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조의 기록을 되짚어보면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책계왕은 즉위 원년에 대방왕, 즉 대방군 태수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대방과 화친관계를 맺었다. 고구려가 대방을 침략하자 고 구려의 보복을 감수해가면서까지 군사를 보내서 대방을 구원해 주었다. 그런데 12년 뒤인 재위 13년에 바로 그 대방군의 침략을 받아 사망하였다.’
즉위 원년에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었는데 13년째에 그 장인나라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왜 삼국사기 책계왕의 기록은 즉위기사와 사망기사만 남아 있고 11년 동안의 기록기 텅 비어 있을까요? 강봉룡 교수는, 바로 그 빈 공간에 백제의 마한병탄에 관한 내용이 수록돼 있었는데, 그 기록을 통째로 시조인 온조왕의 업적으로 빼가버렸다, 이렇게 분석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럼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업적으로 올라 있는 백제의 마한 병탄에 대한 기록을, 본래의 주인인 책계왕조의 자리에 옮겨놓고 사건의 진행과정을 짚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낭독자 부종사(部從事)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한 부분이 있어서,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岐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막았는데 준은 전사하고…
<해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 유명한 마한의 기리영 공격사건입니다.
*인서트-13. 테입<124> 강봉룡
(10:47 마한목지국이 중심이 돼가지고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거기 그 낙랑 대방군이 군대가 연합해 가지고 마한군대와 대전투를 벌이고 처음에는 마한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가도 했습니다만 결국은 중국 군현의 군대에 참패를 당하고 말았던 사건 이게 바로 기리영 공격사건이거든요. 사사건건 마한과 중국 군현과는 그런 갈등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그런 국면에 었었는데. 11:33)
<해설> 삼국지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연도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앞뒤 정황으로 보아 3세기말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어쨌든 낙랑, 대방 등 한군현과 마한은 이처럼 무력충돌을 하는 등 원수지간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한군현으로서는 어떻게든 마한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방왕 (에코)대방왕이 백제국 임금께 아뢰오. 나에게 과년한 딸이 있는데 만일 백제국 왕께서 아내로 맞이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해설> 대방태수는 마한을 견제하기 위해서 백제와 화친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막 즉위한 책계왕과 장인 사위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 바로 삼국사기 책계왕조 원년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책계왕은 책계왕대로 대방태수와 화친관계를 맺은 것을 발판으로 삼아서 마한을 백제 영역으로 병탄해야겠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웅진에 목책을 세워서 마한의 반응을 타진해 보았다가 마한이 격렬하게 반발하자 다시 허물기도 했고,
책계왕 (에코)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위아래에서 민심이 이반하니 그 세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혹시 다른 세력이 이를 차지하면 우리까지 위태로워질 것 아니겠는가! 남보다 먼저 마한을 취하여 후환을 면하는 것이 좋겠다. 목지국을 칠 것이다. 백제 군사는 나를 따르라!
<효과> (군사들 함성 지르며 달려나가는)
<해설> 드디어 마한을 백제 영토로 병탄하기 위해서 목지국으로 쳐들어간 임금은 백제시조인 온조왕이 아니라 실제로는 제 9대 임금 책계왕 이었습니다. 앞에서 혹시 다른 세력이 마한을 먼저 차지해버릴까 염려되어서 마한을 치겠다고 했는데, 바로 한군현이 마한을 차지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지요.
결국 책계왕은 목지국을 평정하고 마한을 백제의 영역으로 병탄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인서트-14. 테입<124> 강봉룡
(11:59 책계왕의 의중에는 마한을 병탄해야겠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중국군현과 책계왕의 제휴는 동상이몽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마한을 병탄해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 백제는. 그 다음에 중국 군현은 마한을 백제를 통해서 견제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제휴를 했는데 갑자기 백제가 마한을 병탄을 해버리니까 중국군현의 입장에서는 백제가 더욱 더 위험한 세력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죠. 그래서 백제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고. 12:39)
<해설> 자, 이렇게 되었으니 대방 태수로서는, 마한을 견제하기 위해서 백제와 사돈관계를 맺었던 것인데, 백제가 마한을 굴복시키고 병탄해 버리는 바람에, 반대로 더욱 막강한 적을 키운 꼴이 돼버렸던 것입니다.
대방왕 음, 그 동안 원수지간으로 지내던 마한을 견제하려고 백제국 왕에게 내 딸을 시집보냈던 것인데, 백제가 마한을 병탄하여 강국이 되려고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자, 백제를 치러 가자!
<효과> (군사들 출동하고)
(양쪽 군사 엉켜 싸우는)
<해설> 한군현은 백제 침공에 나섰고,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몰고 나왔던 책계왕은 그만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책계왕의 뒤를 이어 분서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낭독자 분서왕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인자했으며 의표(儀表)가 영특했다. 왕은 그를 사랑하여 옆을 떠나지 않게 했는데, 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해설> 그러나 이렇게 왕위에 오른 분서왕 역시 아버지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낭독자 분서왕 7년 봄 2월에, 군사를 몰래 보내서 낙랑의 서쪽 고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어 세상을 떠났다.
<해설> 책계왕이 마한을 백제의 영역으로 병탄한 뒤 한군현과의 전투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그의 아들인 분서왕 역시 그 여파로 한군현이 보낸 자객의 칼에 목숨을 잃은 것이지요. 그러나 어찌되었든 백제는 목지국을 무찌르고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강봉룡 교수의 견해를 따르자면 책계왕 시기에 백제가 목지국을 무너뜨리고 그 영역을 병탄함으로써 마한은 멸망했다,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물론 목지국으로 상징되는 정치체로서의 마한이 이 시기에 끝났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사서에 수록돼 있는 ‘마한 54국’의 전지역을 백제가 차지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 지역들이 어느 시기에 백제의 영역으로 들어오는가, 하는 문제는 반대로 백제가 영토를 단계별로 어떻게 넓혀나가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박순발 교수의 얘기 들어보시죠.
*인서트-15. 테입<123> 박순발
(57:14 웅진으로 내려오기 되면 북방에 있는 많은 영토를 상실했기 제로서는 부단히 남쪽으로의 영역확대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전부터 백제와의 관계에서 영향권에는 있었으나 이제 직접 그 지역을 백제의 영토로 편입할 그럴 필요가 있게 된 것이죠. 그 일단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백제는 부단히 오늘날 전라북도 동부지역 가야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 소백산맥을 경계로 해서 그 쪽 지역의 진출을 부단히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문헌사료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라든지. 그래서 그 결과 섬진강 하류에 있는 하동 광양 이런 쪽까지 이제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을 하게 되는 것이죠.58:00)
<해설> 백제가 개로왕 때 고구려 침략을 받아 부랴부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적어도 그 당시에 충청도 공주까지는 백제가 자신의 영토로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수도로 삼지 않았겠느냐, 이런 얘깁니다.
앞에서 목지국이 백제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마한의 역사도 거기서 끝났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렇게 보지 않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 서울대 최몽룡 교수가 대표적인데, 그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낭독자 마한의 종속 시기는 백제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강성해져서 그 영경이 확대됨에 따라 마한의 영역은 축소되면서 그 중심지가 남쪽으로 이동되었던 것이다. 즉 한성시대의 마한의 영역은 천안 용원리, 청당동 및 평택? 성환? 직산을 포함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의 공주천도 이후에는 마한의 중심지가 익산 일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여천도 이후에는 나주 반남면 일대가 마한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해설> 그러니까 천안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마한의 목지국이 백제의 공격을 받자 전라북도 익산으로, 그리고 다시 전라남도 나주로 그 중심지를 옮겨갔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강봉룡 교수는 백제의 공격을 받은 목지국이 마치 수도를 옮겨가듯이 그 중심지를 남쪽으로 옮겨갔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고 반박합니다.
*인서트-16. 테입<124> 강봉룡
(21:24 마한이 언제부터 기원을 잡기도 어렵고 그 마한의 바운더리를 경기도에서 전라남도까지 설정을 해놓고 경기도에서 전라남도까지 하나의 마한 왕조가 기원전 2-3세기부터 시작해가지고 AD 6세기까지 말하자면 백제왕조나 신라왕조처럼 그렇게 존속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난센스라고 생각이 되거든요.그러니까 그런 구도 속에서 마한의 수도가 말하자면 목지국에서 전라남도의 반남으로 천도를 했다 라고하는 그 개념을 상당히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직접 천도라는 개념은 쓰지 않습니다마는. 22:10)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단 서울 경기 지방에서 충청도를 거쳐 전라남도 일대까지가 마한의 영역이었다고 설정하고, 천안에서 익산으로 거기서 다시 나주의 반남으로 수도를 옮기듯 그 중심지를 옮겼다고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무엇보다 영산강 유역, 즉 전라남도 지역을 마한의 잔여세력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 강 교수는 영산강 유역은 독자적안 문화를 가진 세력이 상당한 독립성을 가지고 존재했기 때문에, 마한의 잔여세력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7. 테입<124> 강봉룡
(15:13 원래 영산강 유역에는 영산강 유역 나름의 하나의 문화가 있었고 정치체가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마한이 병탄되고 그 중심지가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하는 생각이지요. 근데 영산강 유역에는 원래 하나의 나름대로의 문화가 있었고 그 문화적 실체에 대한 것을 좀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 어떤 시도가 필요하다. 15:56)
<해설>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 즉 전라남도 지역에는 어떤 문화를 가진 어떤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일까요? 그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이며, 그렇다면 그 지역은 언제쯤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됐을까요? 그 부분은 다음 이 시간에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산강 유역까지 마한의 잔여세력으로 보는 연구자들은 마한의 역사를 700년 혹은 800년 역사라고 얘기합니다. 반대로 3세기말이나 4세기초에 목지국이 백제에 병탄됨으로써 마한의 역사도 끝났다고 보는 견해에 따르자면 500여년이나 그 이상이 되기도 합니다.
낭독자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 알며, 길쌈을 하고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척이나 된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아 무덤 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부분에 있다. 금, 보화, 비단, 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소와 말을 타지 않으며,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서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하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싱에게 제사를 지내는데…(이하 BG) 밤낮으로 술자리를 베풀고 무리지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해설> 후한서 동이열전에 실린 마한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우리의 먼 선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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