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6년 8월 선조 29년 병신년 (충무공 이순신 52세)

천하한량 2007. 5. 5. 18:49

 

 

 

 

8월1일[병신/8월24일]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저녁 나절에 파지도권관 송세응이 돌아갔다. 오후에 활터로 가서 말을 달리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부산에 갔던 곽언수가 돌아와서 통신사의 회답 편지를 전했다.
8월2일[정유/8월25일] 비가 몹시 왔다.
8월3일[무술/8월26일] 맑다가 이따금 비가 뿌렸다. 조방장·우후·충청우후가 와서 보기에 그대로 나가 활을 쏘았다.
8월4일[기해/8월27일]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들 회·면, 조타 완 등이 나갔다. 정선도 나갔다. 정사립이 휴가를 받아서 갔다.
8월5일[경자/8월28일] 맑다.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자 않았다. 가리포첨사가 와서 봤다.
8월6일[신축/8월29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아침에 조방장 김완, 충청우후·경상우후 등이 문병을 왔다. 당포만호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와서 알렸다. 경상수사 및 우수사가 와서 봤다. 조방장 배흥립이 들어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8월7일[임인/8월30일] 비오다가 저녁 나절에 개었다.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서울에 편지를 썼다. 이 날 밤 땀이 위 아래 두 옷을 적셨다.
8월8일[계묘/8월31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강희로가 이곳에 와서 남해현령의 병이 차츰 나아진다고 했다. 그와 함께 밤이 되도록 이야기했다. 중 의능이 날삼[生麻] 백 스무 근을 가져와서 바쳤다.
8월9일[갑진/9월1일] 흐리다. 아침에 중 수인에게서 날삼[生麻] 삼백 서른 근을 받아들였다. 마량첨사 김응황이 직무평가에서 하등점[居下]을 맞고 나갔다. 저녁 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8월10일[을사/9월2일] 맑다. 아침에 충청우후가 문병을 왔다가 그대로 조방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몸이 몹시 볼편하여 한참 동안이나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저녁 나절에 두 조방장 및 충청우후를 불러다가 상화떡을 같이 맛보았다. 어두워지니 달빛은 비단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 갈래여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8월11일[병오/9월3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다. 조방장 배흥립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그와 같이 활터 정자에 가서 말달리는 것을 구경하고서 영으로 돌아왔다. 초저녁에 거제현령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왜적선 한 척이 등산(登山 : 마산시 합포구 진동면)에서 송미포(거제군 장목면 송진포)로 들어온다”고 했다. 밤 열 시쯤에 또 보고하기를, “아자포(阿自逋)로 옮겨 대었다”고 했다. 배를 정하여 내어 보낼 즈음에 또 보고하기를, “견내량을 넘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복병장에게 잡으라고 명령했다.
8월12일[정미/9월4일]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어 동쪽으로 가는 배는 도저히 오갈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안부를 알지를 못했으니 몹시도 답답하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8월13일[무신/9월5일] 맑다가 흐리며 샛바람이 세게 불다. 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날 밤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8월14일[기유/9월6일] 흐리다. 샛바람이 계속 불어 벼가 상했다고 한다. 주방장 배흥립과 충청우후와 같이 이야기 했다.
8월15일[경술/9월7일] 새벽에 비오다. 저녁 나절에 우수사·경상수사 및 두 조방장과 충청우후, 경상우후, 가리포첨사, 평산포만호 등 열 아홉 명의 여러 장수들이 모여 이야기했다.
8월16일[신해/9월8일] 맑다.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강희로가 남해로 돌아갔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 신음했다. 저녁에 체찰사가 진주성에 왔다는 공문이 왔다.
8월17일[임자/9월9일] 맑다. 경상수사, 충청우후, 거제현령이 와서 봤다. 체찰사 앞으로 사람을 찾으러 내 보내었다.
8월18일[계축/9월10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한밤 자정에 죄인에게 특사를 내리는 조칙문을 가지고 온 차사원 구례현감(이원춘)이 들어왔다. 땀을 흘리는게 예사 일이 아니다.
8월19일[갑인/9월11일] 흐렸다 맑았다 하다. 새벽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죄인에게 특사내리는 조칙문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들과 같이 아침사를 했다. 구례현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송의련이 본영에게 아들 울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다행이다.
8월20일[을묘/9월12일] 샛바람이 세게 불다. 새벽에 전선(戰船)을 만들 재목을 끌어내리는 일로 우도 군사 삼백 명, 경상도 군사 백 명, 충청도 군사 삼백 명, 전라좌도 군사 삼백 아흔 명을 송희립이 거느리고 갔다. 늦은 아침에 조카 봉.해와 아들 회.면, 조카 완과 최대성, 윤덕종, 정선 등이 들어왔다.
8월21일[병진/9월13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앉아 아들들에게 화살 쏘는 연습과 말달리며 활을 쏘는 것을 시켰다. 조방장 배흥립, 조방장 김완과 충청우후가 아울러 왔다. 같이 점심을 먹고 저물어서 돌어갔다.
8월22일[정사/9월14일] 맑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8월23일[무오/9월15일] 맑다. 활터에 가 보았다.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보았다.
8월24일[기미/9월16일] 맑다.
8월25일[경신/9월17일] 맑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8월26일[신유/9월18일]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천항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충청우후와 함께 종일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8월27일[임술/9월19일] 맑다. 일찍 출항하여 사천현에 이르렀다. 오후에 그대로 진주성으로 가서 체찰사(이원익)를 뵙고 종일 의논했다. 김응서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저물 무렵에 진주목사(나정언)의 처소로 돌아와서 잤다.
8월28일[계해/9월20일] 맑다. 이른 아침에 체찰사 앞으로 가서 종일 여쭙고 의논하여 결정하고, 초저녁이 지나서 진주목사의 처소로 돌아왔다. 진주목사와 함께 밤들도록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8월29일[갑자/9월21일] 맑다. 일찍 떠나 사천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은 뒤에 그대로 가서 선소리(사천군 용현면 선진리)에 이르렀다. 고성현령(조응도)도 왔다. 삼천포권관과 이곤변이 뒤따라 도착했다. 밤들도록 이야기하고, 구라량(仇羅梁)에서 잤다.
윤8월1일[을축/9월22일] 맑다. 일식(日飾)을 했다. 이른 아침에 비망(飛望) 나루에 이르러 이곤변 등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서로 헤어졌다. 저물어서 진중에 이르니, 우수사·경상수사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수사와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했다.
윤8월2일[병인/9월23일] 맑다. 여러 장수들이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우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윤8월3일[정묘/9월24일] 맑다.
윤8월4일[무진/9월25일] 비오다. 이 날 밤 열 시쯤에 땀을 흘렸다.
윤8월5일[기사/9월26일] 맑다. 활터 마루에 가서 아이들(아들들을 말함)이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했다. 하천수가 체찰사 앞으로 갔다.
윤8월6일[경오/9월27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경상수사 및 우수사와 함께 활터 마루로 가서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방답첨사가 진에 이르렀다.
윤8월7일[신미/9월28일] 맑다. 아산의 종놈 상시(尙是)가 들어왔다.
윤8월8일[임신/9월29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마루로 가서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했다. 광양현감, 고성현령이 시험관으로서 들어왔다. 하천수가 진주에서 왔다.
윤8월9일[계유/9월30일] 맑다. 아침에 광양현감이 교서에 숙배했다. 조카 봉, 아들 회 및 김대복이 교서에 숙배하고서 그대로 이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에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 했다.
윤8월10일[갑술/10월1일] 맑다. 우수사·경상수사, 조방장 배흥립이 같이 와서 밤 열 시쯤에 헤어져 돌아갔다.
윤8월11일[을해/10월2일] 맑다. 체찰사를 기다릴 일로 출항하여 당포에 이르니, 초저녁에 체찰사에게 문안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14일에 떠난다”고 하였다.
윤8월12일[병자/10월3일] 맑다.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열 시쯤에 어머니 앞에 이르니, 흰 머리카락이 에부수수하신데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어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도록 위로하며 기쁘게 해 드렸다.
윤8월13일[정축/10월4일] 맑다. 아침식사를 곁에서 모시고 드시게 하니 대단히 기뻐하시는 빛이다. 저녁 나절에 하직인사를 여쭙고 본영으로 왔다. 오후 여섯 시쯤 작은 배를 타고 밤새도록 노를바삐 저었다.
윤8월14일[무인/10월5일] 맑다. 새벽에 두치(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니, 체찰사와 부찰사가 어제 벌써 도착하여 잤다고 했다. 뒤미처 점검하는 곳으로 가서 소촌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현에 이르렀다. 지나온 지역이 하나같이 쑥대밭이 다 되어 그 참상을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임시로나마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피로를 풀어 주어야겠다.
윤8월15일[기묘/10월6일] 맑다. 일찍 떠나 순천에 이르니 “체찰사 일행이 순천부 청사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사준의 집에서 묵었다. 순찰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윤8월16일[경진/10월7일] 맑다. 이 날은 그대로 머물렀다.
윤8월17일[신사/10월8일] 맑다. 저녁 나절에 낙안군으로 가는데, “이호문·이지남 등이 와서 보고 고치기 어려운 폐단이 오로지 수군에 있다”고 진술했다.
윤8월18일[임오/10월9일] 맑다. 종사관 김용(金涌)이 서울로 갔다.1) 일찍 떠나 양강역(陽江驛)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나서 산성으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며 각 포구와 여러 섬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그 길로 홍양(고흥읍)으로 향했다. 저물 무렵에 홍양현에 이르러 향소청(鄕所廳)에서 잤다. 어두워서 이지화가 와서 봤다.
윤8월19일[계미/10월10일] 맑다. 떠나서 녹도(고흥군 도양면 녹두)로 향하여 가는 길에 도양(도덕면 도덕리)의 둔전을 살펴 보았다. 체찰사는 매우 기뻐하는 빛이 많았다. 녹도에 이르러 잤다.
윤8월20일[갑신/10월11일] 일찍 떠나 배를 타고 체찰사와 부찰사와 함께 같이 앉아 종일 군사일을 이야기했다. 저녁 나절에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그 길로 장흥부에 이르렀다. 나는 관청의 동헌에서 잤다. 김응남이 와서 봤다.
윤8월21일[을유/10월12일] 맑다. 그대로 머물러 자는데 정경달이 와서 봤다.
윤8월22일[병술/10월13일] 맑다. 저녁 나절에 병영(해남군 고군면 병영)에 이르렀다. 병사와 서로 만나 보았다. 병사(兵馬節度使)는 원균이다.
윤8월23일[정해/10월14일] 맑다. 그대로 병영에 머물렀다.2)
윤8월24일[무자/10월15일] 나는 부찰사(한효순)와 같이 가리포(완도군 와도읍 군내리)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도 먼저 와 있었다. 남쪽 망대로 같이 올라가니 좌우의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 도[一道]의 요충지이다. 그러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하는수없이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겨 합치기로 했다.
윤8월25일[기축/10월16일] 일찍 떠나 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곧 해남으로 갔다. 도중에 김경록이 술을 차고 와서 봤다. 어느 결에 날이 저물어 횃불을 밝히고 가니, 밤 열 시께에야 해남현에 이르렀다.
윤8월26일[경인/10월17일] 맑다. 일찍 떠나 우수영(해남군 문내면]에 이르렀다. 나는 곧 태평정(太平亭)에서 자고서 우후와 함께 이야기했다.
윤8월27일[신묘/10월18일] 맑다. 체찰사가 진도에서 영(우수영)으로 들어왔다.
윤8월28일[임진/10월19일] 비가 조금 내렸다. 우수영에서 머물렀다.
윤8월29일[계사/10월20일] 비가 조금 내렸다. 이른 아침에 남리역(해남군 황산면 남이리)에 이르렀다. 오후에 해남현에 이르렀다. 소국진을 본영으로 보냈다.

1) 이 내용은 초서본 『난중일기』에는 없음.
2) 초서본 『난중일기』의 이 날짜에는 날씨 '晴(맑다)'만 적혀있고, '仍留兵營' 즉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병영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