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6년 7월 선조 29년 병신년 (충무공 이순신 52세)

천하한량 2007. 5. 5. 18:46

 

 

 

 

7월1일[병인/7월25일] 맑다. 나라 제사날(인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우순찰사(서성)가 진에 이르렀으나, 이 날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의 군관 나굉이 그의 장수의 말을 전하러 이곳에 왔다.
7월2일[정묘/7월26일] 맑다. 경상순찰사 영의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새 정자로 올라가 앉았다. 편을 갈라 활을 쏘았다. 경상순찰사가 백 예순 두 획(劃 : 50 X 162 = 8,100발)을 졌다. 종일 몹시 즐거웠다.
7월3일[무진/7월27일] 맑다. 순찰사와 도사(都事)가 이 영에 와서 활을 쏘았다. 순찰사 편이 또 졌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월4일[기사/7월28일] 맑다. 경상도 영으로 가서 순찰사와 서로 만나 이야기했다. 조금 있다가 배로 내려가 같이 타고 포구로 나가니, 여러 배들이 밖으로 줄지어 있었다. 종일 이야기하고 선암(통영군 한산면) 앞바다에 이르러 닻을 걷고 출항하여 나뉘어 가면서 바라보며 서로 읍(대함경례)했다. 그 길로 우수사·경상수사와 함께 같은 배로 들어왔다.
7월5일[경오/7월29일] 맑다. 저녁 나절에 나가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7월6일[신미/7월30일] 맑다. 일찍 나가 공무를 보았다. 거제현령·웅천현감·삼천포권관이 와서 봤다. 이곤변의 편지도 왔다. 그 사연 속에는 입석(立石)의 잘못을 많이 말했다. 우습다.
7월7일[임신/7월31일] 맑다. 경상우수사 및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아울러 와서 활 세 쾌[貫]를 쏘았다.
7월8일[계유/8월1일] 맑다. 충청우후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7월9일[갑술/8월2일] 맑다. 경상수사가 이곳에 와서 통신사가 탈 배에 풍석(風席 " 돛을 만드는 돗자리)을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했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7월10일[을해/8월3일] 맑다. 체찰사의 전령에, "첨지 황신이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정사(正使)가 되고, 권항이 부사(副使)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바다를 건너 갈 것이니, 타고 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부산에다 대어 놓으라"고 했다. 충청우후·사량만호·지세포만호·옥포만호·홍주판관, 전 적도만호 고여우 등이 와서 봤다. 경상수사가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춘원포(통영시 광도면)에 왜선 한척이 도착하여 정박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을 뽑아 보내어 샅샅이 찾아내라고 했다.
7월11일[병자/8월4일] 맑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행정선[通文船]일로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 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바다를 건너갈 격군과 뒤따라 갈 것을 의논하였다.
7월12일[정축/8월5일] 맑다. 바다를 건너갈 격군의 군령 흰쌀 스무 섬, 중미(中米) 마흔 섬을 차사원변익성과 수사 군관 정존극이 받아갔다. 나이가 동갑인 남치온이 왔다.
7월13일[무인/8월6일] 맑다. 명나라 사신을 따라갈 우리나라 사신들이 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떠나 보냈다. 저녁 나절에 활 열 세 순을 쏘았다.
7월14일[기묘/8월7일] 비오다. 저녁에 고성현감 조응도가 와서 이야기했다.
7월15일[경진/8월8일] 비가 뿌렸다. 경상수사·전라우수사가 함께 모여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7월16일[신사/8월9일]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 나절에 개었다. 이 날 충청도 홍주 격군으로 신평에 사는 사사집 종 걸복이 도망하다 붙잡혔으므로 목베어 내다 걸었다. 하동현감·사천현감이 왔다.
7월17일[임오/8월10일] 비가 뿌렸다.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둑들이 일어나서 홍산현감 윤영현이 잡히고, 서천군수 박진국도 잡혀 갔다고 한다. 바깥 도둑도 없애지 못한 이 마당에 나라 안의 도둑들이 이러하니, 참으로 놀랍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남치온 및 고성현령·사천현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7월18일[계미/8월11일] 맑다. 공문을 써 보냈다. 충청우후 및 홍주반자가 충청도 도둑들의 일을 듣고 와서 아뢰었다. 저녁에 투항해 온 왜놈 레나기(戀隱已)·에이(汝耳)·에몬(汝文) 등이 난에몬(南汝文)을 해치려고 흉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였다.
7월19일[갑신/8월12일] 맑다. 난에몬(南汝文)이 레나기(戀隱已)·에이(汝耳)·에몬(汝文) 등을 목베었다.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경상우후 이의득 및 충청우후(원유남), 다경포만호 윤승남이 왔다.
7월20일[을유/8월13일] 맑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니 기쁘고 다행이다. 그 편에 "충청도 토적(이몽학)이 이시발(巡按御使)의 포수에게 총맞아 즉사했다"1)고 했다. 다행이다.
7월21일[병술/8월14일] 맑다. 저녁 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거제현령·나주판관·홍주판관과 옥포만호·웅천현감·당진포만호가 왔다. 통신사가 청하는 표범 가죽을 가지고 오려고 배를 본영으로 보냈다.
7월22일[정해/8월15일] 맑다. 순천 관리의 편지[文狀]에, "충청도 도둑들이 홍산에서 일어난 것을 곧 죽였다고 하는데, 홍주 등 세 고을이 포위를 당했다가 간신히 면했다"고 했다. 참으로 통탄스럽다. 낙안의 교대할 배가 들어왔다.
7월23일[무자/8월16일] 큰비 오다. 홍주판관 박륜이 아뢰고 돌아갔다.
7월24일[기축/8월17일] 맑다. 나라 제사날(문종의 현덕왕후 권씨의 제사)이다. 이 날 우물을 고쳐 파는 데로 갔다. 경상수사도 왔다. 거제현령·금갑도만호·다경포만호가 뒤따라 왔다. 샘줄기가 깊이 들어가 있고 물의 근원도 길다. 오후에 돌아와 활 세 쾌[貫]를 쏘았다.
7월25일[경인/8월18일] 맑다. 표범 가죽 및 꽃돗자리를 통신사에게 보냈다.
7월26일[신묘/8월19일] 맑다. 이전(李筌)이 체찰사에게서 와서 표험(標驗) 세 벌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경상수사에게 보내고, 하나는 전라우수사에게 보냈다. 의금부의 나장이 윤승남(다경포만호)을 잡아 갈 일로 왔다.
7월27일[임진/8월20일] 맑다. 저녁 나절에 활터로 달려가서 길닦는 일을 녹도만호에게 일러 주었다. 다경포만호 윤승남이 잡혀갔다.
7월28일[계사/8월21일] 맑다. 저녁 나절에 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같이 쏘았다.
7월29일[갑오/8월22일] 맑다. 경상수사 및 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도 왔다. 체찰사에게서 과거보는 자리를 설치한다는 공문이 왔다.
7월30일[을미/8월23일] 맑다. 저녁 나절에 조방장이 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임금의 분부가 두 통이 내려오고, 싸움에 쓸 말도 들어왔다.

1) 李夢鶴의 난을 말한것이다. 이 당시에 전국에 기근이 들어 양식을 거두어, 가등청정이 다시 오면 그들을 친다는 핑계로 전쟁에 염증난 군졸들을 모아 '동갑계회'를 결성하여, 김경창, 이귀, 중 눙운, 사사집 종 김팽종 등과 밀회하고 홍산땅 쌍방축에서 600-700명을 모아 난을 일으켜, 병신년 7월 6일 새벽에 현감 윤영현을 잡고, 서천군수 박진국을 잡아 정산·청양·대흥을 함락했다. 7월10일 저녁에 홍주에서 목사 홍가신은 순찰사 종사관 신경행과 의논하고 그 고을의 박명현·임득의 장군과 방어하고, 수사 최호, 남포현감 박동선, 보령현감 황응성도 일어섰다. 병사 이시완은 온양에서 홍주를 거쳐 예산 무한성에 가고, 순안어사 이시발은 유구역에서 진을 쳤다. 그러나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과 임억명 등이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와서 11일에 항복했다. 그러므로 이몽학은 이시발의 포수가 아니고, 자기의 부하에게 총맞아 즉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