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자료 ▒

마요르 광장과 소피아 왕비 미술센터

천하한량 2007. 8. 7. 19:05

마요르 광장과 소피아 왕비 미술센터

 

페인에는 마요르(Mayor)라고 이름이 붙여진 광장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1619년에 조성된 마드리드 중심의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은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에서 왕궁 방면으로 걸어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에 있다.

광장에서는 국왕의 취임식은 물론 종교 의식과 재판(auto de fe)이 열렸으며,

투우 등 각종 공연장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장은 생각했던 것처럼 사방이 탁! 트인 곳이 아니라 건물로 쌓여진 장방형의 넓은 공간으로

중앙에는 이 광장을 처음 조성한 펠리페 3세의 청동기마상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작은 성곽(城郭)의 안처럼 아늑함이 느껴져야 하나,

이 곳에서 행하여진 크고 작은 역사의 모습을 비추어 생각하니

오히려 온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광장을 자유롭게 나르는 비둘기때와,

시계탑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화(Fresco painting, 회반죽벽에 그려진 일체의 벽화기법)는

처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이 느껴졌다.

그림은 세르반테스를 비롯한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초상으로

최근에 보수되어졌다고 했다.

 

궁 의료기관을 개조하여 만든 ‘소피아 왕비 미술센터(Centro de Arte Reina Sofia)’는

피카소(Picasso, Pablo Ruiz y, 1881~1973)의 ‘게르니카(Guernicd)’를 소장하고 있으며,

20C 미술사에 지대한 역할을 한 후안 미로(Joan Miro, 1893~1983)와

큐비즘(입체주의 미술운동)의 상징인 후안 그리스(Joan Gris) 등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관람객의 최대 관심작인 ‘역시 '게르니카(Guernicd, 1937)’였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로,

1937년 에스파냐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한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

마침, 그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관(館) 벽화제작을 의뢰받고 있던 피카소는

이 조국의 비보를 접하고는 한 달 반 만에 대벽화를 완성하였고,

화제를 ‘게르니카’라고 이름을 붙였다.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반전(反戰)사상과

그의 독특한 예술성이 잘 묘사되어있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있다.

하지만 나는 기대와 달리 큰 감동은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여러 작품을 감상하면서 삶과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자신의 예술적 주관에 대하여 당당했던 정신적 정체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적과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이다."
- Picasso -

 

우리는 흔히 피카소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화'를 떠올리고,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선후기 서화가, 문인, 금석학자) 하면 '추사체'를 먼저 떠올린다.

어쩌면 쉽게 그린 듯한 난해한 그림과, 균형미가 없어 보이는 글씨를 보면서

유명세에 비해 평가절하 해 본 적이 많았을 것이다.

나 또한, 이러한 면에서 게르니카의 작품성에 누를 끼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밖에 소피아 왕비 미술센터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었다면

실제 남여 크기만 한 ‘남녀인체 동상’과 철(鐵)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특히, '남녀인체 동상'의 경우는 눈동자를 얼마나 정교하게 표현하였던지

비록 동상이었지만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기 어려웠을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스페인은 태양을 팔아먹고 산다.”

는 말이 있듯이

스페인 작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풍성한 색감과 색의 선택이 자유로 왔다.

그들의 핏속을 흐르는 붉은 알타미라의 후손답게...

(계속) 

 

 

* 프레스코화

 

* 게르니카

 


* 미술센터 전시안내 팜프렛

 

 

 

* 위의 두 사진은 각각 '마요르 광장'과 '소피아 왕비 미술센터',

  미술센터의 투명한 엘리베이터도 이색적이었다.(사진 EnCyber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