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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각(晩覺) 이 선생(李先生)의 묘명(墓銘) -미수기언(眉?記言) 허목(許穆 -

천하한량 2007. 6. 15. 00:31

만각(晩覺) 이 선생(李先生)의 묘명(墓銘)

 

 

이 선생(李先生)은 휘는 정호(挺豪), 자는 영언(英彦)으로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이었던 이색(李穡) 6세손이다. 고조부 이계정(李季町)은 사헌부 집의였고 증조부 이균(李均)은 홍문관 부제학이었으며, 조부 이선복(李善福)은 일찍 작고하였다. 아버지 이습(李習)은 충무위 부사과였고, 어머니는 영가 권씨(永嘉權氏)로 선무랑(宣務郞) 권몽익(權夢翼)의 딸이다.

선생은 만력(萬曆) 6(1578, 선조11) 8월 계묘에 태어나서 열다섯 살에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 선생을 따라 수업하였고, 28세에는 상상(上庠)에 들어갔으나 상사(庠舍)에서 알아주는 이가 없었고, 오직 동년 생원(同年生員) 최명길(崔鳴吉)만이 마음속으로 그를 공경하였다. 그 다음해 2월에 어머니 권 부인이 돌아가셨고, 그 뒤 4년에 아버지 사과공(司果公)이 돌아가셨다. 부모가 모두 연로하여 오래 병을 앓아 여러 해 동안 일어나지 못하므로 선생은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였으며, 띠를 풀지 않은 지가 10년이었다. 그의 거상(居喪)하는 절차와 거처하고 곡읍(哭泣)하는 것을 군자가 지극한 품행으로 여겼다.

선생은 나이 40세에 덕신공자(德信公子)를 따라 《대학(大學)》의 경전(經傳)을 강론(講論)하고, 또한 《주역(周易)》의 건곤(乾坤)과 문언(文言)의 뜻을 배웠다. 그때에 광해(光海)가 무도하여 날마다 여러 공자(公子)를 죽였으며,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고 직간(直諫)하는 자들은 모두 쫓아 버렸다. 선생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인륜의 도()가 없어졌으니, 오래지 않아서 큰 난()이 있을 것이다.

하고, 장단(長湍)의 적운(積雲)으로 돌아가서 세상을 피해 숨어 버렸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6(1626, 인조4) 선왕(先王)이 큰 난을 다스린 지 4년 만에 재주와 학식 있는 사람을 불러 등용할 때, 선생이 처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가 1년 만에 나라에 또 난이 있어서 그 직위에서 물러났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임) 2(1629, 인조7)에 다시 교관이 되어서 제자에게 곡례(曲禮)와 소의(少儀)와 제자직(弟子職)으로 법을 삼아,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을 학문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그때에 설공(雪公 허미수의 종형(從兄) 허후(許厚))이 무덤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을 시묘하고 돌아왔다. 이때에 대상(大祥)을 지내고 나서 반혼(返魂)한 변례문답(變禮問答)이 있었다. 그 반혼례는 대상 전일에 술과 포를 놓고 곡하여 무덤을 하직하고 집에 이르러 문에 들어오면서 곡하고, 장부(丈夫)와 부인(婦人)이 차례로 서서 헌작(獻酌)하고 철상(撤床)한 뒤에 신주를 사당에 모신 뒤 조문(吊問)하지 못했던 사람이 와서 조문하는데,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곡하기를 초상과 같이 하는 것이었다.

5(1632, 인조10)에 통례원 인의로 옮겨 얼마 있다가 공조 좌랑이 되었다. 6년 여름에 황간 현감(黃澗縣監)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파직(罷職)되어 한산(韓山)의 산정리(山井里)에 돌아온 지 3년 만에 남한산성의 사변이 있었다. 선생이 전에 사심(師心)이라고 자호(自號)를 지었다가 이에 이르러서 만각(晩覺)이라고 바꾼 것은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산정리에 산 지 7년 만에 선생이 돌아가시니, 12(1639, 인조17) 12 16일이요, 향년(享年) 62세였다. 생질(甥姪) 이조 판서 민응협(閔應協)이 동궁 필선(東宮弼善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있으면서 심양(瀋陽)에서 한성(韓城 한산(韓山))에 와서 고향인 적운(積雲)으로 귀장(歸葬)하였다.

선생은 믿음이 독실하고 옛 도를 좋아하였으며, 해진 옷과 거친 음식 먹는 것을 일반 사람은 그 어려움을 견뎌 내지 못하는데, 선생은 언제나 기쁜 표정이었다. 평생을 충신(忠信)스러운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고, 독실하고 공경스럽지 않은 것이면 행하지 않았다. 그 행하는 일이 인륜과 일상생활의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겸손하고 간략함을 낙으로 삼으면서 언제나 부족한 것같이 하고, 스스로 삼가서 오직 엄숙하였으나, 남과 사귈 적에는 늘 여유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었으며 한없이 선()을 좋아하였다. 그 음성과 안색에 나타나는 것이 온화하면서도 엄숙하고 깨끗하면서도 막힘이 없어 사람이 우러러볼 때 사랑할 만하고 공경할 만하여, 순수한 성덕군자(盛德君子)가 되었다.

의인(宜人) 신씨(申氏)는 본관이 평산(平山)으로, 진사 신홍제(申弘濟)의 딸이다. 1남을 두었는데, 이대희(李大喜)이고, 측실(側室) 2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익희(李益喜), 이장희(李長喜)인데, 이익희는 일찍 죽었고, 딸은 유세웅(劉世雄)에게 시집갔고, 이대희가 1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석(李碩)이고, 두 사위는 이진원(李晉元), 이회(?)이다. 또 서자(庶子)가 있는데, 이립(李砬), 이굉(?), 이작(?)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높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음은 / 不高不奇

군자의 평탄함이요 / 君子之平也

자랑하지도 않고 다투지도 않음은 / 不伐不爭

군자의 덕을 이룸이요 / 君子之成也

예가 공순하여 덕이 온전함은 / 禮恭德全

군자의 순수함이요 / 君子之醇也

견문이 많아 알맞게 절충함은 / 多聞折衷

군자의 문채로다 / 君子之文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