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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復泉) 강공(姜公)의 묘명(墓銘) -미수기언(眉?記言) 허목(許穆 -

천하한량 2007. 6. 15. 00:34

복천(復泉) 강공(姜公)의 묘명(墓銘)

 

 

복천(復泉) 강자구(姜子久) 선생의 휘()는 학년(鶴年)인데, 그 선대는 본디 진양(晉陽) 사람으로 대사헌 강첨(?)의 아들이요, 부제학 신담(申湛)의 외손이다.

자구는 젊어서 《소학(小學), 《심경(心經)》을 읽어 일찍부터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현명한 공자 덕신정(德信正)과 상종하여 《대학》과 《역경》의 건괘(乾卦), 곤괘(坤卦), 문언(文言)의 뜻을 배웠고, 이대순(李大淳) 선생에게서 《중용》을 읽었다. 만력(萬曆) 37(1609, 광해군1)에 국자감 생원이 되었으나 병이 많아 나아가지 않고, 성인(聖人)의 학문에 침잠(沈潛)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울 때, 아버지가 졸하고 신 부인(申夫人)이 늙었으므로 회천(懷川)에 숨어 살면서 농사지어 봉양했다. 인조 초기에 유학(儒學)하는 사람을 불러 쓰게 되자, 자구를 특별히 연기 현감(燕岐縣監)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 상이 남쪽으로 순행했는데, 자구가 행재소에 나아갔다. 진천 현감(鎭川縣監)을 제수했으나 두어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또 이듬해 사어(司禦)를 제수하자, 상소하여 임금의 덕에 관한 것을 말하니 상이 지당한 논의라고 말했다.

7년에 흑한(黑漢)이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를 잇달아 짓밟았는데, 이때 자구가 신녕 현감(新寧縣監)이 되었다가 이미 조정에서 물러났으나, 조정(朝廷)이 화의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궐하(闕下)에 이르러 상소하여 놈들과는 화의할 수 없음을 말했다. 그해에 신 부인이 세상을 뜨자 삼년상을 지내고 잇달아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익위(翊衛)가 되었는데, 때마침 인목태후(仁穆太后)의 상을 당하자 바로 들어가 사직하고 졸곡이 지나자 돌아갔다. 이어 성균관 사업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수년 동안 두 번이나 지평이 되고, 또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4년에 다시 지평으로 장령(掌令)에 승진하자, 상소하기를,

 

“세상에 백이(伯夷)가 있으면 반드시 역포(易暴)라는 기롱이 있게 된다.

하였는데, 권세 부리는 자가 몹시 불경하니 마땅히 용서할 수 없다고 논하여 중한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했는데. 지평 유진(柳袗)이 아뢰기를,

 

“초야의 소박하고 현실에 어두운 사람을 법으로 논죄함은 옳지 않다.

했고, 수찬 유영(柳穎)은 상소하기를,

 

“그 말은 임금을 사랑하여 상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국조(國朝) 2백 년 이래 한 사람도 말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하자, 유진은 배척하여 몰아내고, 유영은 관작을 삭탈했다. 자구는 거의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상이 특별히 관용하여 은진(恩津)에 부처(付處 형벌의 한 가지. 어느 곳에 머물게 함)되었다가 1년 만에 석방되었고, 10년 뒤에 졸하니, 나이 63세였다.

자구는 경()에 밝고 몸가짐이 결백하였으며, 말이 구차하지 않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자기의 뜻을 굽혀 남을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궁액을 당하여도 번민하고 원망하지 않았으니, 옛날의 이른바 ‘덕을 높이고 의리를 즐겨서 남들이 알아주어도 만족하여 바라는 것이 없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만족하여 바라는 것이 없다.’는 사람이다.

한때의 청렴한 선비들이 그를 많이 찾아왔는데,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즐겼고, 남을 사랑하고 이롭게 해 주는 마음을 가져 그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진천(鎭川)이나 신녕(新寧)에 있은 것이 잘해야 겨우 반년인데, 백성들이 빗돌을 세워 추모하였다. 내가 듣건대 ‘군자의 집은 후함이 쌓여 교훈이 이루어진다.’ 하였다. 조부(祖父) 강운상(姜雲詳)은 선을 행하였으되 숨어 살며 나오지 않았으며, 예의를 좋아하여 몸을 닦거나 남을 가르칠 때 속이지 않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는데, 인조 때 효자로 표창하여 정문하였다. 대헌공(大憲公)은 올바른 도리를 지킴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는데, 오리(梧里)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말하기를,

 

“광해군이 동궁 시절에 상을 두려워하여 감히 방종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말이 들렸으나, 이 사람만 유독 그를 근심하였으니, 이것은 군자의 선견(先見)이다.

하였다. 현명하도다. 자구의 현명함이여. 그 현명함은 내력이 있도다.

한산 이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인 현감 이덕기(李德沂)의 딸이다. 아들 강호(姜鎬)를 낳아, 현종 때에 귀해져 관동 관찰사(關東觀察使)가 되었다가 자구가 죽은 지 22년 만에 특은(特恩)으로 대사헌(大司憲)에 추증했다. 사위 심창징(沈昌徵)은 내가 잘 알고 지내는 홍문관 응교 심대부 신숙(沈大孚信叔 신숙은 자임)의 아들인데, 재주가 뛰어났으나 일찍 죽었다. 서자(庶子) 다섯을 두었는데, 강전(姜銓), 강석(姜錫), 강옥(姜鈺), 강용(姜鏞), 강일(姜鎰)인데, 강옥은 의영고 주부이다. 두 사위는 이명빈(李明彬), 신상현(申尙顯)인데, 이명빈은 박천 군수(博川郡守)이다. 강호가 강세봉(姜世鳳), 강세린(姜世麟), 강세귀(姜世龜)를 낳았는데, 강세귀는 홍주 목사이고, 사위 목임유(睦林儒)는 해주 목사이다. 심창징이 심희도(沈羲圖)를 낳았고, 사위는 권각(權慤)인데, 내외 자손이 3대에 40여 인이나 된다. 분묘는 온양군 서봉(棲鳳) 남향의 언덕에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곧으면서도 온화하고 / 直而溫

단순하면서도 조리가 있으니 / 簡而理

방정한 표본이로다 / 方正之表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같이 곧았고 / 邦無道如矢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같이 곧았다 / 邦有道如矢

 

 

[D-001]역포(易暴) : 악한 것으로 악한 것을 바꾼다는 말인데, 무왕(武王)이 주()를 쳐 은() 나라를 멸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주() 나라 녹을 먹지 않으려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한다. “악한 것으로 악한 것을 바꾸면서도 그것이 그른 줄을 모른다. ……” 《史記 卷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