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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묘갈명(墓碣銘) -미수기언(眉?記言) 허목(許穆)-

천하한량 2007. 6. 15. 00:38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이공(李公)의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행원(行源), 자는 백초(百初), 한산군(韓山郡) 사람이다. 고려 때의 판문하(判門下)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예(後裔), 증조부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아산군(鵝山君) (?)이고, 조부는 영의정으로 추증된 한안군(韓安君) ()이며, 아버지는 우찬성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덕형(德泂)이다. 어머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로 예조 참판 담()의 딸이다.

인조 16(1638) 공이 36세 때에 공경(公卿)의 자제로서 처음 능침랑(陵寢郞)을 제수받았다. 그해 상이 친히 선비들을 시험 보일 때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보임(補任)되었다. 다음해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바뀌고, 또 다음해 춘방 설서(春坊說書)로 전임(轉任)되었다가 얼마 후 다시 주서가 되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올랐으며,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병조로 옮겨 정랑(正郞)에 승진되었다. 병조의 관례 중에 낭관 한 사람이 군포(軍布)의 출납을 맡게 되었는데, 말폐(末弊)가 되어 마음대로 내주어도 하는 일이 공인지 사인지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도 아니하였다. 공은 내심 이것을 미워하여 이 일을 피하고 관장하지 아니하니, 병조 안에서들 다 착하게 여겼다. 얼마 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바뀌고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

임오년(1642, 인조20)에 경기 도사(都事)가 되었다가 다시 간원에 들어가 정언이 되고 옥당(玉堂)에 뽑히어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찬성공이 졸하매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수찬이 되었다. 공은 평소부터 출세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남과 교제하며 왕래하지도 않아 벼슬살이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인조의 특선으로 북계(北界)를 순찰하며 민정을 조사한 일이 있었는데, 기축년(1649, 인조27)에 효종(孝宗)이 즉위하매 다시 명을 받고 북변에 나가서 절진(節鎭)의 여러 변읍들이 불법을 자행하여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쌓인 폐단을 조목조목 아뢰니 상이 모두 받아들여 시행하였다. 북변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이 거의 끊기게 됨을 안타깝게 여겨, 상께 아뢰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 서적을 나누어 주어 그곳 자제들을 권면하고 자제들 중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은 관()에서 여비를 주어 경시(京試)에 나오도록 하는 일을 법식으로 정하도록 청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1)에 다시 수찬이 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양하고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나갔다. 영암은 남해(南海) 지방의 큰 고을이었지만 서울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온갖 일이 퇴폐하였는데, 그 적폐(積弊) 중 심한 것은 조세(租稅) 포탈한 허위 장부가 무려 7천 건에 달하는 것이었다. 공이 감면하여 줄 것을 힘써 아뢰어 모두 감면시켜 주었다. 얼마 있다가 전임자의 사건에 연루(連累)되어 끝내 심문을 받고서 서해(西海)의 양산(楊山)으로 귀양 가게 되니, 영암의 늙은이들이 나서서 비석에 공적을 새겨 추모(追慕)하기를 마지않았다. 정유년(1657, 효종8)에 서용되어 황해도 도사가 되었고, 기해년(1659, 효종10)에는 울산 군수가 되었지만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신축년(1661, 현종2)에는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로 있다가 통천 군수로 나갔고, 갑진년(1664, 현종5)에 다시 직강이 되었다가 사예(司藝)로 올랐다.

공은 본래 잔병이 많고 경직(京職)에 있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청송 군수(靑松郡守)를 희망해서 나갔다가 정미년(1667, 현종8) 모월 모일에 관직에 있으면서 죽으니, 나이가 65세이다.

공은 항상 청렴 간결하여 관료 생활 30여 년에 한 번도 이해 때문에 자기의 뜻을 바꿔 본 적이 없었고, 또 사사로이 자신을 위하여 조금도 재산을 모은 적도 없었다. 성실과 사랑으로 남을 대하였으니, 어릴 적부터 남의 급한 사정을 보면 있고 없는 것을 보아 도와주었으며, 또 길을 가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자기 일을 제쳐 놓고 몸소 간호하여 살려 내기도 하였다. 찬성공이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이 애는 틀림없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그의 천성이 그러하였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잘하였다. 공의 중형(仲兄) 술초(述初 광원(光源)의 자)는 재주가 있었지만 명()이 없어 45세로 갑자기 병이 들어 죽으니, 공이 평생토록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한 번도 남에게 죽는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숙인(淑人)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정언 응두(應斗)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만경(萬慶)과 수경(壽慶)이다. 만경은 생원이고 수경은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이며, 사위는 세 사람으로 홍기석(洪箕錫)ㆍ권유(權愈)ㆍ남상훈(南尙熏)인데, 권유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지냈다. 친손ㆍ외손이 매우 많았는데, 그중에서 성인(成人)이 된 사람이 여섯이다. 만경의 아들은 생원인 온(?), 수경의 아들은 육(?), 사위 기석의 사위는 정직(?), 권유의 아들은 호(), 상훈의 아들은 적명(迪明)이다.

()은 이러하다.

 

간절하면서 자만하지 않고 / 簡而不誇

곧으면서 굳세며 / 直而剛

일은 분명히 하고 의리는 공정히 하여 / 事明義正

북녘 백성들이 공의 덕이 많다 하니 / 北方之人多公德

그 은혜 더욱 장구하리라 / 惠彌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