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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평(李持平)의 묘명(墓銘) -미수기언(眉?記言) 허목(許穆 -

천하한량 2007. 6. 15. 00:32

이 지평(李持平)의 묘명(墓銘)

 

 

공은 이름은 성원(性源)이요, ()는 복초(復初)이며, 성은 이씨(李氏)인데, 그의 선조는 본디 한산(韓山) 사람이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색(李穡) 10세손이요, 조선 성종(成宗) 때의 공신 한성군(韓城君) 이훈(李塤)의 증손이며,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의 아들이요, 좌찬성(左贊成) 이덕형(李德泂)의 조카이고, 어머니는 상당 한씨(上黨韓氏) 전첨(典籤) 아무[]의 딸이다.

명 나라 만력(萬曆) 4(1576) 4 12(을해)에 공이 태어났는데, 6세 때에 한 부인이 죽자 외할머니 최씨(崔氏)가 애처롭게 여겨 끼니마다 눈물을 흘리며 고기를 권하였으나, 그가 슬퍼하느라 넘기지를 못하자, 보는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학문을 하면서는 반드시 전현(前賢)들의 말과 선철(先哲)들의 행적을 구하여 스스로 연마해 가며, 선생과 장자를 좇아 배우기를 좋아했다. 계부(季父) 찬선공이 그를 어질게 여겨 ‘우리 가문에 훌륭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광해(光海) 2년에 성균관 유생이 되고, 12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3년 만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여 같은 방에 합격한 선비를 재시험하게 되자, 공이 처음에는 응하지 않다가 아버지의 명으로 시험에 나아가 을과(乙科)에서 첫째로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의 별칭)에 뽑혀 들어가 박사(博士)에 이르자 태상(太常)을 겸임하였다. 뒤에 기성 좌랑(騎省佐郞 병조 좌랑)으로서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이 되어 나갔는데, 이때 북로(北路)에 벼슬한 자가 무인(武人)이 많아 간혹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므로, 명망 있는 사람을 뽑아 보낸 것이나 실제로는 좌천된 것이다.

한흥군이 나이가 많은 데다 멀리 떨어져 있게 되자 꿈에 놀란 일이 있어 곧 달려가 보니 과연 병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모두들 모두 ‘효자라 영감을 받은 것이다.’ 했다. 공이 상소하여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사정을 말하니, ()이 감동하여 다시 병조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로부터 연달아 양사(兩司)에 있었다. 병인년(1626, 인조4)에 별시를 보여 선비를 모집했는데, 뽑힌 자 중에 고시관의 자제가 많았으므로 공이 지평(持平)으로서 힘껏 논박하여 합격했던 전원을 모두 파방시켰다. 정묘년(1627, 인조5)에 시강 문학(侍講文學)을 거쳐 경기 도사(京畿都事)가 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평이 되었는데, 세태가 날로 변함을 보고 조정에 있기를 싫어하여 애써 외직을 구하였다. 그러나 실권을 쥔 자가 비록 공을 미워하였지만 내쫓았다는 말을 들을까 하여 곧 지방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한흥군이 병들어 오래 낫지 않았는데, 공이 날마다 병시중을 하면서도 게으른 빛이 없었고 밥을 배부르게 먹지 않았으며 파리하여 병이 들더니, 수년 동안에 더욱 심해지자 한탄하며,

 

“내가 불초하여 정성이 신명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로다. 내 차마 늙으신 어버이가 자식 죽는 것을 보게 할 수 없다.

하고 자제를 시켜 관사로 옮겼는데, 이틀 만에 죽으니, 천계(天啓) 9(1630, 인조8) 5 5일이요, 나이 54세였다. 모월 모일에 고양(高陽)의 궐산(蕨山)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한흥군이 장수했으므로 공은 늙어서도 매우 힘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아버지 봉양을 어린아이 보호하듯 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으므로 늙은 누님 섬기기를 어머니처럼 하였고, 친척 중에 누군가의 상을 당하면 거처와 입고 먹기를 모두 예절에 따랐으며, 안정하기를 좋아하고 권세나 이익에 더욱 담담하였다. 남 대하기는 지성과 사랑으로 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며, 맡은 직무를 삼가서 하였고, 아랫사람에게는 꼭 가르침을 우선으로 하고 벌주는 일은 미루었다. 말할 일을 당하거나 이해(利害)관계가 있는 일에 임해서는 과격하지도 변동하지도 않아 확연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정경세(鄭經世) 공이 칭찬하기를,

 

“무리 중에 뛰어난 기상과 공평 정대한 의논을 세운 사람으로는 지금 세상에서 이 지평 한 사람을 보았다.

하였다.

숙인(淑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별제(別提) 아무[]의 딸로 가정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고, 자손을 가르치는데도 꼭 안빈(安貧)하여 분수를 지키는 것으로 표준을 삼았으니, 또한 부인 중에 어진 이였다. 부인은 공보다 2세 위였으며, 16년 동안 과부로 살다가 71세에 죽어 숭정(崇禎) 17 2 8일 궐산(蕨山)에 합장했다.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장남 이제항(李齊沆)은 내시학 교관(內侍學敎官)으로 일찍 죽었고, 차남 이경항(李景沆)은 토산 현감(?山縣監)이고, 딸은 선비 오도원(吳道原)에게 출가했다. 이제항은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이정(?), 이완(李浣), 이순(李洵), 이홍(李泓), 이명(李溟) 인데, 이정은 요절하여 자식이 없다. 이경항은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준(李濬), 이관(李灌), 이한(李漢)이요, 딸은 선비 홍만원(洪萬源)에게 출가했다. 이준은 일찍 죽었으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지성으로 공경하고 사랑을 도타이 하며 / 忠敬篤愛

곧으면서 과격하지 않았으니 / 直而不激

효제가 쌓여서이네 / 孝弟之積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