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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온동(良?洞)의 고적기(古蹟記) -미수기언(眉?記言) 허목(許穆 -

천하한량 2007. 6. 15. 00:29

양온동(?)의 고적기(古蹟記)

 

 

《여지승람(輿地勝覽)》 개경고적(開京古蹟),

 

“태사(太師) 강감찬(姜邯贊), 중찬(中贊) 안유(安裕), 시중(侍中) 이색(李穡), 상당(上黨) 한수(韓脩)의 고택(古宅)이 모두 양온동에 있으니, 지금의 태평관(太平館) 서쪽이요, 옛날 국자감(國子監) 아래다.

하였다. 《여지승람》에는 단지 “양온동에 있다.” 하였고, 전해 오는 말에는 “태평관 서쪽이 곧 양온동이다.” 하였다. 나는 일찍이 고사를 상고하고 부로(父老)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여 대강 그 일을 기록한 적이 있었는데, 사인(士人) 한덕량(韓德亮)이 목은(牧隱)과 유항(柳巷) 목은은 이 시중(李侍中)의 호()이고, 유항(柳巷)은 한상당(韓上黨)의 호이다 의 시()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었으므로, 나는 다행히도 이 시를 얻고서 그 일을 목은과 유항의 연집(宴集)에서 자못 자세히 상고할 수 있었고 시는 더욱 볼만하였다.

이 시중이 사는 동산(東山)의 서북은 옛날 박 만호(朴萬戶)의 원중(園中)의 소구(小丘)로써 가장 좋은 곳이고, 그 소구에서 곧장 남으로 조금 내려오면 권 길창(權吉昌)의 원림(園林)이고, 그 서쪽이 옛날 유 재상(柳宰相)의 고택(古宅)이며, 또 그 남쪽은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의 고택이고, 권 길창의 임정(林亭) 옆은 한 상당의 누각이다. 목은이 ‘유항의 누각 위에서 염동정(廉東亭 염흥방(廉興邦))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라는 시를 지었다. 그 동쪽이 이 시중의 집인데, 유항의 시에 ‘목로(牧老)가 같은 이웃에 집을 샀다.’는 말이 있고, 또 두 분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시에 각각 동리(東里)니 서린(西隣)이니 하였다. 지금 3백 년이나 된 옛날 일들이 역력히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데, 다만 강 태사와 안 중찬의 옛날 터전이 있던 곳을 알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고려사(高麗史)》 권씨전(權氏傳),

 

“권씨는 귀족이어서 권준(權準)ㆍ권적(權適)의 부자(父子)가 모두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고, ()이 관청에 명하여 6백 금() 《고려사》에는 은() 50()으로 되어 있는데, 50근이면 꼭 6백 냥()이 된다 을 인출(引出)하여 안유(安裕)의 집을 사서 준()에게 주었다.

하였는데, 그때에는 안씨의 옛집이 권 길창에게 하사(下賜)된 지가 바야흐로 2대가 되었다. 역옹(?翁 이제현(李齊賢))과 빙옹(氷翁) 두 분이 살던 곳도 또한 목은이 남긴 책에 기록된 바와 같이 모두 이곳에 있었으나, 정확히 알 수 없다. 한씨(韓氏)의 보첩(譜牒),

 

“상당공(上黨公)은 권 길창의 사위 보첩에는 “권준(權準)의 아들은 적()이요 적의 사위가 한수(韓脩).” 하였으며 또 《목은집(牧隱集)》에는 “길창과 상당이 모두 서린(西隣)에 산다.” 했으니, 대개 유항(柳巷)이 권씨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길창의 집 근처에 살게 된 것이다. 이다.

하였다. 상당의 후손은 더욱 귀하게 되어 청성(淸城)으로 고쳐 봉하여졌으니, 지금 한생(韓生)은 청성의 9세손()이다.

 

원년(元年) 5월 상순에 공암 허목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