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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 장령(徐掌令)의 묘석기(墓石記) -미수기언(眉?記言) 허목(許穆)-

천하한량 2007. 6. 15. 00:27

고려 서 장령(徐掌令)의 묘석기(墓石記)

 

 

고려(高麗) 때 장령을 지낸 서견(徐甄)은 이천인(利川人)으로 고려 말엽에 국운이 위태함을 보고도 떠나지를 않았다. 공양왕(恭讓王) 4년에 장령이 되어 성헌(省憲) 김진양(金震陽)ㆍ이확(李擴), 그리고 여러 간관(諫官)들과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의 죄상을 밝혔는데, 익양군(益陽君 정몽주)이 죽임을 당하자 당인으로 지목되어 당시 법을 논하던 사람들과 함께 귀양을 갔다. 그해에 공양왕이 원주(原州)로 추방되어 고려가 망하자 금양(衿陽)에 살면서 북녘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으며, 종신토록 한양성(漢陽城)을 대하지 않았고 자연에 의탁하여 시를 읊으면서 혼자 슬퍼하였다. 법관들이 그가 혼란을 꾀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서 처벌해야 한다고 하자, 태종(太宗), ‘서견은 고려의 신하로서 고국을 잊지 않고 있으니 서견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은 무리인데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하고 불문에 붙였다. , 나라가 망하고 왕씨(王氏)의 대통이 끊겼는데도 끝까지 마음을 변하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눈물겹다. 《고려사(高麗史)》 충절전(忠節傳)에서 찬()하기를,

 

“고려가 망하자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ㆍ김진양(金震陽)ㆍ이종학(李種學)ㆍ길재(吉再)ㆍ서견(徐甄) 등 몇몇 군자들이 죽은 이도 있고 죽지 않은 이도 있으나 지조를 지킨 것은 같았다.

라고 하였다. 금천(衿川) 번당(燔塘)에 서 장령(徐掌令)의 묘가 있는데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재상 윤근수(尹根壽)가 임금께 아뢰어 충신의 무덤으로 봉하였으며, 인조(仁祖) 9년에는 사당을 세워서 강 태사(姜太師 강감찬(姜邯贊))ㆍ이 상국(李相國 이원익(李元翼))을 함께 제사하고, 삼현사(三賢祠)라고 하였는데 삼현사기가 있다.

 

금상(今上) 8 4월 상완(上浣) 경진.

 

묘 앞에 묘갈(墓碣)을 세운 이는 서견의 외가 후손인 감찰 김형중(金衡重)이다.

 

[D-001]금상(今上) 8 : 연보(年譜)에는 숙종 7년인 신유년 조에 ‘고려 서 장령 묘기’를 지었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