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 제16하
무진년 전폐왕 우 14년(명 태조 홍무 21, 1388)
춘정월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ㆍ도길부(都吉敷)ㆍ이성림(李成林)ㆍ반복해(潘福海) 등 50여 인과 그 친당(親黨) 1천여 인을 죽이고 이인임(李仁任)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安置)하였다.
그때 이인임이 정권을 잡았는데, 영삼사사(領三司事) 임견미, 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이 나란히 정권을 전횡하였다. 마침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조반(趙?)의 백주(白州) 땅을 빼앗았는데, 조반이 애걸하자 염흥방이 그 땅을 돌려 주었다. 이광이 다시 뺏고 능욕하니, 조반이 분을 참지 못하고 수십 명의 기병으로써 그를 베고 그 집을 불지르며, 염흥방에게 고하고자 서울에 달려 들어왔다. 염흥방이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여 조반이 모반한다고 무고하고, 그의 처와 어머니를 잡고, 조반을 순군(巡軍)에서 국문하였다.
염흥방이 그때 상만호(上萬戶)였는데, 만호(萬戶) 도길부ㆍ반복해ㆍ이광보, 위관(委官) 윤진(尹珍)ㆍ강회백(姜淮伯), 대간(臺諫)ㆍ전법(典法)과 더불어 교대로 신문하니, 조반이 말하기를,
“6~7명의 탐욕스런 재상이 종을 사방에 풀어 놓아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니 이것이 큰 도적이다. 이제 이광을 벤 것은 국가를 위하고 백성의 해를 제거하기 위함인데, 어찌 모반이라 하느냐?”
하므로, 염흥방이 승복을 받으려고 국문을 참혹하게 하였으나, 조반이 굽히지 않고 욕하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국적(國賊)을 베고자 한다. 너와 나는 서로 송사(訟事)하는 자인데, 어찌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염흥방이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 입을 마구 치게 하였다.
수일 후에 우가 최영의 집에 가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하였는데, 이날 조반을 풀어 주도록 명하고 의약(醫藥)을 내리고, 마침내 염흥방을 순군(巡軍)에 내리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명철하시다.”
하였다.
우가 조반의 일곱 살 먹은 아이를 불러 그 아버지의 한 바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다만 칼을 빼어 시험하면서 말씀하시기를 ‘탐욕스런 7~8인의 재상을 목 베어 나의 뜻을 시원하게 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자가 반드시 기한(飢寒)에 이르리라.’ 하더이다.”
하였다.
우(禑)가 최영(崔瑩)과 우리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임견미와 찬성사 도길부, 우시중 이성림, 찬성사 반복해, 대사헌 염정수(廉庭秀), 지밀직(知密直) 김영진(金永珍), 밀직부사(密直副使) 임치(林?) 등을 옥에 내려 죽이고, 아울러 그 부자 형제와 족당(族黨) 등 50여 인을 죽이고, 그의 처와 딸은 관비(官婢)로 삼고, 자손으로서 강보에 있는 자는 모두 임진강(臨津江)에 던졌고, 그 가재(家財)는 적몰하였다.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이 백성의 땅을 빼앗은 것을 변핵하여, 안무사(按撫使)를 각 도에 보내서 그의 가신(家臣)과 악한 종을 잡아 죽였는데, 모두 1천여 인이었다.
이존성(李存性)은 이인임의 종손(從孫)인데, 일찍이 서경윤(西京尹)이 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밀직(密直) 임헌(任獻)은 염흥방의 매서(妹?)인데, 집을 적몰하러 가니 쌀 한 섬의 비축도 없는지라 옥관이 면하여 주려 하였으나 최영이 따르지 않고 아울러 베니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이인임은 오랫동안 나라 권세를 도적질하여 그 지당(支黨)이 뿌리가 얽혔는데, 임견미가 그의 심복이 되어 문신(文臣)을 미워해서 내쫓은 자가 매우 많았다. 염흥방도 내쫓기는 중에 있었는데, 후에 임견미가 염흥방이 세가(世家)의 대족(大族)이라 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여서, 임치(林?)는 염흥방의 사위가 되었다.
염흥방의 이부형(異父兄) 이성림(李成林)은 시중(侍中)이 되자, 친당(親黨)이 양부(兩府)에 늘어서서 중외의 요직이 사인(私人) 아닌 사람이 없어 권세를 전횡하기를 마음대로 하여, 관작(官爵)을 팔고 남의 밭을 빼앗고 산야(山野)를 점유하였다. 노비가 천백 인으로 무리를 지어 능침(陵寢)ㆍ궁고(宮庫)ㆍ주현(州縣)ㆍ진역(津驛)의 밭을 점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주인을 배반한 노예와 부역(賦役)을 도피한 백성이 모여들어, 염사(廉使)와 수령(守令)도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사(公私)의 재물이 탕갈되어 중외(中外)가 이를 갈았다.
최영과 우리 태조가 그 소행을 분하게 여겨 동심 협력하여 우(禑)를 인도하여 그들을 없애 버리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임견미ㆍ염흥방이 주살될 때 이인임이 최영을 찾아 갔는데, 최영이 사절하고 만나 보지 않고 우에게 아뢰기를,
“이인임이 모책(謀策)을 결정하여 대국(大國)을 섬겨 국가를 진정시켰으니, 공(功)이 허물을 덮을 만합니다.”
라고 하여, 그 자제까지 모두 함께 용서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직한 최공(崔公)이 사정(私情)으로 늙은 도적을 살렸다.”
하였다.
이인임의 아우 이인민(李仁敏)도 역시 악인에게 당부(黨附)하였기 때문에 계림(鷄林)의 봉졸(烽卒)로 귀양갔다.
최씨는 이렇게 적었다.
임견미ㆍ염흥방의 죄는 탐욕스러움이 법도가 없어 마땅히 죽여야 하나 난적(亂賊)에 비해 보면 조금 차이가 있으니, 그 괴수를 베는 것이 옳다. 최영이 주살을 자행하여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함께 죽고 또 처자를 죽여 집에는 씨가 없게 하였으니, 불인(不仁)이 어찌 그다지 심한가? 최영은 배우지 못하고 지모가 없어 대체(大體)에 어둡고, 거칠고 포악함이 이와 같으니, 취할 것이 무엇이랴?
홍성민(洪聖民)은 이렇게 적었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융성하지 못하고 조정 신하가 서로 모함하였는데, 이인임(李仁任)ㆍ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이 죄의 우두머리였다. 이인임은 우(禑)를 세운 죄로, 임견미와 염흥방은 이인임과 당(黨)을 같이한 죄로 3인이 제거되자마자 우 역시 그들을 따라 뒤에 폐왕이 되었다. 당시 사대부(士大夫)가 시의(時議)와 틀리는 자는 반드시 이 3인으로 구실을 삼아 모함하였다. 이색(李穡)과 우현보(禹玄寶) 부자 같은 이는 왕씨를 심복하였는데도, 우(禑)와 창(昌)을 원조하고 임견미와 염흥방과 같이 당(黨)을 하였다고 죄를 주는 데 이르렀으니, 사씨(史氏)의 말을 모두 다 믿을 수 없다. 책에 의거하여 그 자취를 탐구하고 당시 형세로써 헤아리면 향배가 자연 가리기 어려운 것이 있다. 아, 염흥방의 아버지 염제신(廉悌臣)은 고려조의 어진 재상이었는데, 죽은 뒤 7년 만에 그 가족이, 설령 염흥방이 탐욕 방자하였다 해도 천하에 어찌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안】《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국조(國朝)에 최항(崔恒)ㆍ신숙주(辛叔舟)ㆍ이석형(李石亨) 등이 교지(敎旨)를 받들어 찬주(撰註)하기를, ‘정몽주ㆍ최영은 창해(滄海)에 몸을 맡기고 사생을 돌보지 않은 자이고, 권근(權近)ㆍ이색(李穡)은 중립(中立)하여 사태를 보아 공을 구차하게 꾀하는 자이고, 임견미ㆍ염흥방은 고려의 순신(順臣)이나 국조의 반역인이고, 조준(趙浚)ㆍ조반(趙?)은 국조의 순신이나 고려의 역신(逆臣)이다.’ 하였는데, 저 제공(諸公)들이 고려에서 시대가 멀지 않으니 그 말을 단연코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로써 볼 때 임견미ㆍ염흥방의 악은 반드시 베어야 하고 용서해서는 안 되지만, 탐욕 방종한 죄는 그 몸만 죽이는 데 그쳐야 할 뿐인데, 연좌되어 죽은 자가 어찌 1천여 인이나 되게 많단 말인가!
당시 우리 태조가 왕을 누를 만한 위엄이 있어 공을 시기하는 자가 많아 권세 있는 집안이나 세가(世家)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견미ㆍ염흥방의 화가 조반(趙?)에서 시작하였고, 조반은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었으니, 그 일도 역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최영이 사람을 함부로 벤 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었다. 무성(武成)은 주서(周書)요, 맹자(孟子)는 주(周) 나라 사람인데, 오히려 맹자가 서(書)를 다 믿으면 없느니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세운(世運)이 돌고 인정(人情)이 바뀌는데, 역사를 쓰는 사필(史筆)이 혹 중도에 지나치므로 역사를 읽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 최영(崔瑩)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이색(李穡)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우현보(禹玄寶)ㆍ윤진(尹珍)ㆍ안종원(安宗源)을 찬성사(贊成事)로 삼았다.
○ 사신을 명에 보내어 조빙하였으나 요동에 이르러 받아들이지 않아 되돌아왔다.
밀직사사(密直司使) 조림(趙琳)을 보내어 임견미ㆍ염흥방을 베었음을 고하고 조빙(朝聘)할 것을 청하였다.
2월 안씨(安氏)를 맞아 현비(賢妃)로 삼고, 기생 소매향(小梅香)ㆍ연쌍비(燕雙飛)를 아울러 옹주(翁主)로 삼았다.
비(妃)는 정비(定妃)의 형으로 판서(判書) 안숙로(安淑老)의 딸이다. 납비(納妃)할 때 폐포(幣布)가 7천 5백 필, 백금(白金) 1천 5백 냥이고 다른 물건들도 이에 준하였다.
○ 한양(漢陽)의 중흥성(重興城)을 수리하였다.
우(禑)가 최영과 더불어 요(遼)를 치고자 모의하고 경성(京城)의 방리군(坊里郡)을 내어 수리하였는데, 아들 창(昌)과 여러 비(妃)를 옮기고자 하였다.
○ 황제가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자 조서를 내리니,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변무(辨誣)하였다.
황제가 호부(戶部)에 명하여 이자(移咨)하기를,
“철령 이북ㆍ이서(以西)ㆍ이동(以東)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 속하니, 소관 군인(軍人)과 한인(漢人)ㆍ여진(女眞)ㆍ달달(達達)ㆍ고려도 따라서 요동도(遼東道)에 속한다.”
하므로, 드디어 박의중을 보내어 표청(表請)하기를,
“철령 이북은 문주(文州 문천(文川))ㆍ고주(高州 고원(高原))ㆍ화주(和州 영흥(永興))ㆍ정주(定州 정평(定平))ㆍ함주(咸州 함흥(咸興))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鎭)에 이르기까지는 예부터 본국(本國)의 땅이 되어 있었는데, 요(遼) 건통(乾統) 7년(1107)에 이르러 동여진(東女眞) 등이 난을 일으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점거하자, 예왕(睿王 예종(睿宗))이 요에 고하여 그들을 쳐 회복하기를 청하고, 함주와 공험진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원(元) 무오년 고종 45년(1258)에 이르러 본국 반민(叛民) 조휘(趙暉) 등이 화주(和州) 이북 땅을 가지고 원에 항복하였는데, 이들이 금(金)의 요동 함주로(咸州路) 《성경지(盛京志)》에는, 지금의 철령현(鐵嶺縣)으로 요(遼)의 함주(咸州)경계라 하였다. 부근의 심주(瀋州) 요금(遼金)의 심주(瀋州), 즉 지금의 봉천부(奉天府)이다. 쌍성현(雙城縣)이 요(遼)의 쌍주(雙州)의 쌍성현, 지금의 철령현 서남에 있다. 있음을 듣고, 본국의 함주 근처 화주(和州)에 옛날에 쌓은 작은 성 두 곳이 있음으로 인하여 흐리멍텅하게 주청(奏請)하여 드디어 화주를 쌍성(雙城)이라 가칭하고, 조휘를 쌍성총관(雙城摠管)으로 삼았습니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16년(공민왕 5 1356)에 원에 신달(申達)하여 화주 이북은 본국에 귀속시켰습니다.
이제 철령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로에 속하니 소관(所管) 군민(軍民)도 따라 요동에 그대로 속할 것이라는 말씀을 받잡컨대, 철령이 왕경(王京)에서 겨우 3백 리 떨어졌으며 공험진을 변계(邊界)로 한정함이 1~2년이 아니오니, 바라옵건대 몇몇 주의 땅을 그대로 저희 나라에 속하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안】 명 태조가 북쪽의 호(胡)를 평정하고서는 땅을 넓히고자 조회하는 소국(小國)을 침탈하니, 너무나 옳지 못하다.
우리 동방은 단군ㆍ기자가 개국한 이래로 역대로 통서를 전하여, 여러 오랑캐들의 부락이 무시로 취산하는 것과는 다르니, 중국으로서는 회유의 도로써 베풀 뿐 멀리까지 정벌하여 인심을 잃을 필요가 없다. 한 나라가 사군(四郡)을 설치하고 당 나라가 고구려ㆍ백제를 멸망시키고 얼마 있다 곧 지키지 못하자 다만 오랑캐의 웃음거리만 되었을 뿐이지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
명 태조가 일마다 옛 법도를 따르면서 철령에 위(衛)를 세우는 일은, 성왕(聖王)이 덕(德)을 힘쓰지 영토에는 힘쓰지 않는다는 뜻과 어찌 그렇게도 비슷하지 않았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때 우리 태조께서 높은 덕이 날로 성하여 공을 시기하는 자가 모함하려고 중국을 부추겨 고의로 우리 나라에 일이 벌어지게 하였다.”
하는데, 후일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일을 보면 그런 것 같다. 명 태조가 곧 그만둔 것으로 보아 또한 그의 본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지(盛京志)》를 상고하건대, 철령옛성이 지금 주치(州治)의 남쪽 5백 리 되는 고려와의 경계에 있는데, 홍무 21년(1388)에 그곳에 위(衛)를 세웠고, 26년에 지금 땅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심양 북쪽 철령현이다.
철령(鐵嶺)이란 이름은 우리 나라의 철령이란 지명으로써 따라 붙인 것이다.
처음을 말하면 요하(遼河) 이동, 오라(烏喇) 이남은 본래 우리 땅인데, 고려 이후 처음으로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으로써 절대적인 한계를 삼았던 것이니, 경계(經界)는 밝히기 어렵지 않다.
3월 호관(壺串)에 행행하였다.
처음에 우(禑)가 호관에 누(樓)를 세웠는데, 누선(樓船)을 극히 사치스럽게 만들어 기린선(麒麟船)ㆍ봉천선(奉天船)이라 명명하고, 노상 여러 폐행(嬖幸)들과 같이 배를 타고 물놀이를 하였다. 일찍이 연쌍비(燕雙飛)와 함께 용을 수놓은 옷을 같이 입고, 활을 차고 적(笛)을 불며 고삐를 나란히 하고 나갔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그때 우가 누선에 있으면서 마음대로 잡희(雜戱)를 하며, 칼을 잡고 사람을 물리쳤다. 취하여서는 칼을 뽑아 좌우를 찌르려 하니 좌우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뱃사공 두 사람만 있었는데, 우가 찌르려 하였으나 칼이 땅에 떨어져 찌르지 못하였다.
그런 뒤 반복해(潘福海)의 준마를 빼앗아 타니, 판서 송빈(宋贇)이,
“반복해도 타기 어려운 바입니다.”
하자, 우가 노하여 송빈을 죽였다.
일찍이 혼자 앉아 자지 않고 말하기를,
“부왕(父王)이 밤에 자다가 피살되었는데, 내가 매우 경계한다.”
하였다. 그 미친 것이 이와 같았다.
○ 최씨(崔氏)를 맞아 영비(寧妃)로 삼고 신씨(申氏)를 정비(正妃)로 봉하였다.
최씨는 최영(崔瑩)의 딸인데, 우가 맞아들이고자 하니, 최영이 울며 거절하였으나 불가능하였다. 드디어 영비로 책봉하고 부(府)를 영혜(寧惠)라 하였다. 신씨는 신아(申雅)의 딸이다. 이전에 이미 맞아들였었는데, 이때 와서 정비로 봉하였다.
이 근비(李謹妃) 이하 최 영비(崔寧妃)ㆍ노 의비(盧毅妃)ㆍ최 숙비(崔淑妃)ㆍ강 안비(姜安妃)ㆍ신 정비(申正妃)ㆍ조 덕비(趙德妃)ㆍ왕 선비(王善妃)ㆍ안 현비(安賢妃) 및 소매향(小梅香)ㆍ연쌍비(燕雙飛)ㆍ칠점선(七點仙)의 세 옹주(翁主), 여러 전(殿)의 공상(供上)이 너무 번다하여 상만고(常滿庫)의 포가 한 달에 3천 9백 필을 쓰게 되어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고, 3년 분의 공물을 미리 거두어도 부족하여 징렴(徵斂)을 더하였다.
이때 전라도 경상도는 왜의 소굴이 되고, 서북방은 땅이 분할될까 걱정이고, 경기(京畿)ㆍ교주(交州)ㆍ양광(楊廣) 세 도는 수성(修城)에 피곤하고, 서방의 서해ㆍ평양은 사냥을 맞이하게 되어, 팔도가 소연하였고, 백성은 농업을 잃어 중외의 원망이 임견미ㆍ염흥방때보다 더 심하였다.
○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을 죽였다.
이자송이 최영에게 가서 최영이 요동을 치자고 역설한 잘못을 극력 말하자, 최영이 그가 임견미에게 당부(黨附)하였다고 칭탁하여 장류(杖流)한 뒤 얼마 있다가 죽였다. 이자송은 청렴하여 나라 사람들이 재상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죽게 되자 슬프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요동에서 사신을 보내 철령위를 세운다고 고하자 우가 제도(諸道)의 군사를 징집하고, 드디어 서해도(西海道)로 갔다.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指揮) 2인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으로 강계(江界)에 이르러 철령위를 세우고 진무(鎭撫) 등의 관(官)을 설치하였다. 요동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70참을 두고, 각참(各站)에 백호(百戶)를 두었다. 우가 듣고 울며 말하기를,
“여러 신하가 나의 요동 공벌 계획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되게 했다.”
하였다.
요동에서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어 위(衛)를 세운다고 고하였으나, 우는 보지 않고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고, 신하들에게 모두 원의 관복(冠服)을 착용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성중(城中)에 편발(編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은 자가 이미 많았다.
경내(境內)를 사유(赦宥)하고 서해도에 갔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를 한양산성(漢陽山城)에 옮기고, 우 현보(禹玄寶)에게 명하여 경성(京城)을 유수(留守)하게 하였다.
오부(五部)의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군사로 삼아 명목은 서쪽으로 해주(海州) 백사정(白沙亭)에 사냥간다 하였으나, 실은 요동을 치고자 함이었다. 얼마 안 있어 왜의 침구가 점점 심하므로 아들 창(昌) 등은 개경(開京)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하4월 평양에 행행하였다.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우리 태조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여러 군대를 이끌고 요동(遼東)을 침공하였다.
초하루(을사)에 우(禑)가 봉성(鳳城) 지금의 봉산(風山) 에 행행하여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말하기를,
“과인이 요양(遼陽)을 치고자 하니, 경등은 마땅히 진력하라.”
하니, 태조가 네 가지 불가함을 들어 아뢰기를,
“소국이 대국을 거역함이 그 하나요, 여름에 군대를 출동하는 것이 그 하나요, 온 나라가 원정을 할 때 왜가 그 허를 틈타는 것이 그 하나요, 때가 바야흐로 덥고 비가 와 활의 아교가 녹고 대군(大軍)이 전염병에 걸림이 그 하나입니다.”
하자, 우도 그렇게 여겼다. 최영이 다른 말은 받아들이지 말도록 계(啓)하니, 우가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이미 군대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 없다.”
하매, 태조가 아뢰기를,
“반드시 계책을 이루시려 한다면 가을을 기다려 출병해야 합니다. 곡식이 들판 가득 무르익을 때라야 북을 치며 행군할 수 있습니다. 이제 출병함은 때가 적기가 아닙니다. 비록 요동을 공략해도 곧 비가 올 것이므로 군사가 전진하지 못하여 시일이 오래되면 군사가 피로하고 식량이 떨어져 다만 화를 부를 뿐입니다.”
하였으나, 우가 듣지 않고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李子松)을 보지 못하였느냐?”
하매, 태조가 아뢰기를,
“이자송은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는데, 신등은 살아 있으나 이미 계책을 잃었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물러나와 울며 말하기를,
“생민(生民)의 화가 여기서 시작된다.”
하였다.
3일(정미)에 우가 평양에 행행하여, 징병(徵兵)을 독려하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고 또 승려를 징발하여 군대로 삼았다. 최영에게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를 더하고, 조민수가 좌군(左軍)을 거느리는데, 심덕부(沈德符)ㆍ이무(李茂)ㆍ왕안덕(王安德)ㆍ이승원(李承源)ㆍ박위(朴?)ㆍ최운해(崔雲海)ㆍ경의(慶儀)ㆍ최단(崔鄲)ㆍ최공철(崔公哲)ㆍ조희고(趙希古)ㆍ안(安慶)ㆍ왕빈(王賓) 등 12원수(元帥)가 소속되었고, 우리 태조는 우군(右軍)을 거느리는데, 정지(鄭地)ㆍ지용기(池湧奇)ㆍ황보림(皇甫琳)ㆍ이빈(李彬)ㆍ구성로(具成老)ㆍ윤호(尹虎)ㆍ배극렴(裵克廉)ㆍ박영충(朴永忠)ㆍ이화(李和)ㆍ이두란(李豆蘭)ㆍ김상(金賞)ㆍ윤사덕(尹師德)ㆍ경보(慶輔)ㆍ이원계(李元桂)ㆍ이을진(李乙珍)ㆍ김천장(金天莊) 등 16원수가 소속되었다. 좌우군 모두 3만 8천 8백 30인, 겸인(?人) 1만 1천 6백 34인, 말 2만 1천 6백 82필이었는데, 군대 수를 10만이라 불렀다.
18일(임술)에 평양을 떠났다. 최영이 가서 독려하기를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경이 가면 과인은 누구와 같이 있느냐?”
하고, 최영과 더불어 평양에 머물고, 멀리서 절제(節制)하게 하였다. 우가 밤낮으로 대동강에서 놀이를 즐기고, 호악(胡樂)을 부벽루에서 베풀고, 스스로 호적(胡笛)을 불었다. 최영이 군사를 이끌고 출입하면서 적을 부니, 군신이 황음하고 백성이 원망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에서 와 말하기를,
“요동 병사가 호(胡)를 치러 모두 떠나고, 성중에는 다만 한 사람의 지휘(指揮)만 있으니, 대군(大軍)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최영이 기뻐하며 크게 상을 내렸다.
【안】《송도잡기(松都雜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조자의(曹子義)는 조민수(曹敏修)의 종인(宗人)으로 지론(持論)을 잘하였는데, 요동을 치는 잘못에 분이 나서 한여름에 나무를 쌓아 불을 질러 알몸으로 구우며 말하기를 ‘최영의 머리를 구워 나라 사람과 함께 먹어야겠다.’ 하고 이어 곡을 하였다. 그러나 요동을 친 것은 최영의 진의가 아니라 한다.
심광세(沈光世)는 이렇게 적었다.
고려는 원종(元宗)이 원을 섬긴 이래 대대로 구생(舅甥 장인과 사위)의 친분을 맺었는데, 명(明)이 처음 일어나자 공민왕이 비록 의주(義主)로써 섬겼으나, 당시 북원(北元)과 경솔히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하는 자가 많아, 명을 섬기자고 주장하는 이와 원을 섬기자고 주장하는 이가 서로 비방 배척하게 되었다. 최영이 나라를 맡게 되어서는 마침 철령위(鐵嶺衛)의 일로 인하여 드디어 원을 섬기고 요동을 치자는 의논을 창도하여, 결국 역명(易命)에 이르렀다. 내가 선정(先正)으로부터 여러 비사(秘史)를 들었는데, 당시 우리 태조가 공명(功名)이 날로 성하고, 또 이씨가 왕이 된다는 설이 있어, 최영이 실로 시기하였으나 죄를 줄 구실이 없어, 요동을 치게 하여서 중국에 죄를 얻도록 하여 제거하려고 이 계책을 만들었다 한다. 슬프다. 나라를 비워 두고 군대를 주어, 남을 위태롭게 하고 스스로 편안하고자 하고도 화를 당하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최영이 늙어 노망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안】 고려 말의 사서(史書)가 많기는 하나 기휘(忌諱)하고 감추어서 자세하지 않다. 사건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하면, 최영이 요동을 정벌한 것이나 목은(牧隱)이 창(昌)에게 명(明)에 친조(親朝)할 것을 독촉한 것 등의 이런 일이 그만둘 수 없었던 일인가? 뒤에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일도 매우 의심할 만하다. 윤이는 윤유린(尹有麟)의 종제이다. 이때 김종연(金宗衍)은 도망가고 윤유린은 자살하였으니,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태조가 위명(威名)이 날로 성하여 나라의 힘으로는 억제하지 못하여 얽어 모의(謀議)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슬프다, 천명(天命)이 돌아오는 데에야 어찌하랴.
○ 홍무(洪武) 연호를 정지하고, 호복(胡服)을 다시 입었다.
○ 왜가 초도(椒島)에 침구하였다.
그때 경성(京城)의 정장(丁壯)이 모두 종군하고 남은 사람은 늙고 약한지라, 매일 저녁 봉화가 여러 번 오르자 경성이 텅 비고 인정(人情)이 겁에 질려 조석(朝夕)을 보존할 수 없었다.
○ 이 달에 명에서 남옥(藍玉)을 보내어 북원(北元)을 쳐 멸망시켰다.
원주(元主)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가 패주하다가 야속질아(也速迭兒)에게 살해되었다. 그 부속(部屬)들이 달아나 흩어지고 후예들은 이로써 쇠미해졌다.
○ 태백성(太白)이 주현(晝見)하였다.
5월 초하루(갑술)에 일식이 있었다.
○ 좌우군(左右軍)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진을 쳤다.
7일(경진)에 좌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진을 쳤다. 지금의 의주부(義州府)에서 7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압록강 가운데 있고 주위가 40리이다.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연이었다. 우가 관원들로 하여금 이를 베도록 하였으나 금하지 못하였다.
11일(갑신)에 이성원수(泥城元帥) 홍인계(洪仁桂), 강계원수(江界元帥) 이의(李?)가 먼저 요동 경계에 들어가 살인 약탈하고 돌아왔다.
○ 대동강(大東江) 물이 붉은 색으로 흐렸다.
○ 좌우군 도통사(左右軍都統使)가 반사(班師)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좌우군 도통사가 상서(上書)하기를,
“신등은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앞에는 큰 내가 있고 비로 강물이 불어 강 가운데 섬에 주둔하여 군량만 소비하고 있고, 여기부터 요동까지는 큰 내가 많아 쉽게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박의중(朴宜中)이 표(表)를 받들어 계품(啓?)한 것은 계책이 매우 잘된 것인데, 이제 명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였으니, 종사(宗社)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무더운 장마철이라 병사와 말이 모두 피곤하여, 달려가서 견고한 성에 이르러 싸운다 해도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군량이 보급되지 않아 진퇴유곡이 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반사하소서.”
하였으나, 우가 듣지 않았다.
최영이 진군을 독촉하였다. 그때 망한 원의 남은 후예들이 사막으로 도피하여 숨어서 다만 빈껍데기로 원이라 하였는데, 최영이 배후(裵厚)를 보내어 서로 도와 요동을 협공할 것을 약속하니, 그 일을 생각하는 소략함이 이와 같았다.
○ 우리 태조가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위화도에서 돌아왔다.
22일(을미)에 군중에 와언(訛言)이 나돌기를,
“태조가 휘하를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 향하였다.”
하매, 군중이 흉흉하였다. 조민수가 태조의 진영에 달려와 울며 말하기를,
“공이 가면 우리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니,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유시하기를,
“만약 중국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으면 화가 곧 오리니, 어찌 임금 곁의 악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직의 안위(安危)가 공의 일신에 달려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좇지 않으리요.”
하였다.
이리하여 회군(回軍)하여 압록강을 건너는데, 태조가 백마를 타고 동궁(?弓)과 백우전(白羽箭)을 차고 언덕에 서서 늦은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렸다. 군중이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고금내세(古今來世)에 어찌 우리 공과 같은 사람이 있으리요.”
하였다. 이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되어도 물이 불지 않더니, 군사가 막 건너자 큰물이 갑자기 닥쳐 섬 전체가 매몰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이보다 앞서 동요(童謠)에 ‘이원수가 창생을 구제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동요에 “서경문(西京門) 밖에는 불빛이요, 안주성(安州城) 밖에는 연기빛인데 그 사이를 왕래하는 이원수(李元帥)여, 원컨대 창생을 구제하소서”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이 변이 있었다. 또 목자(木子 즉 ‘李’를 말한다)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군중이 모두 노래하였다.
24일(정유)에 우리 정종(定宗)이 형 방우(芳雨)와 함께 우(禑)의 행재소(行在所)로부터 군전(軍前)으로 달려왔다. 그때 신의 왕후(神懿王后)와 신덕 왕후(神德王后)가 포천(抱川)의 시골 집에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서울에서 변을 듣고 말을 달려 포천에 이르니, 노복들은 도망가고 없었다. 태종이 두 왕후를 모시고 동북면으로 갔다. 이때 우가 성천(成川) 온천에 있었는데, 대군(大軍)이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음을 듣고 말을 타고 돌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급박하게 진군할 것을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빨리 가면 반드시 싸우게 되어 사람을 많이 죽일 것이다.”
하고 매양 군사에게 경계하되,
“너희들이 만약 승여(乘輿)를 범하면 내가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백성의 오이 하 나라도 빼앗으면 또한 죄를 받을 것이다.”
하고, 길에서 사냥을 하면서 일부러 군사 행군을 늦추었다.
26일(기해)에 우가 평양에 이르러 화보(貸寶)를 거두어 대동강을 건너, 샛길을 따라 밤낮으로 달려 28일(신축) 새벽에 서울로 돌아와 화원(花園)에 들어가니, 따르는 자가 겨우 50여 인이었다.
서경(西京)에서 경성(京城)까지 우를 따르던 신하와 백성이 끊이지 않고 주장(酒漿)으로 대군을 맞이하였다.
6월 초하루에 우리 태조가 군대를 이끌고 경성에 들어와 시중(侍中) 최영을 잡아 유배하였다.
초하루(계묘)에 제군(諸軍)이 근교에 주둔하며 최영을 목벨 것을 계청(啓請)하니, 2일(갑진)에 우(禑)가 밀직부사 진평중(陳平仲)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명을 받고 국경을 나갔는데 이미 절제(節制)를 어겼으며, 군대를 들어 대궐을 향하여 또 강상(綱常)을 범하였다. 군신의 대의(大義)를 경이 어찌 모르리요? 나라는 조종(祖宗)으로부터 받았으니 어찌 남에게 줄 수 있으리요? 군대를 일으켜 항거할 것을 내가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였다.
최영을 가리켜 말을 하나 최영이 국가를 위하여 노력한 것을 경들도 아는 바다. 교서(敎書)가 도착하는 날에 미혹에 사로잡히지 말며 개과(改過)에 인색하지 말고, 함께 부귀를 보전하라.”
하고, 또 설장수(?長壽)를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술을 내리고 그 뜻을 알고자 하니, 여러 장수들이 도문(都門) 밖에 진둔하였다.
동북면 사람과 여진이 태조가 회군하였다는 것을 듣고 1천여 인이나 달려왔다. 우가 금백(金帛)을 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수십 인을 얻었으나, 모두 창고의 노예였다. 여러 도에 징병하여 들어와 돕게 하니, 모인 수레가 거리에 가득 찼다.
조민수 등의 관작을 삭탈하고 최영과 우현보를 좌우 시중(左右侍中)으로 삼고, 송광미(宋光美)를 찬성사(贊成事)로 삼았다. 저자에 방시(榜示)하기를,
“조민수 등 여러 장수들을 잡는 자는 관노(官奴)ㆍ사노(私奴)를 막론하고 크게 벼슬과 상을 내리리라.”
하였다.
3일(을사)에 태조가 숭인문(崇仁門)으로 들어오고, 좌군은 선의문(宣義門) 송경(松京)의 나성 서문(羅城西門)인데, 세칭 오정문(五正門)이라 한다. 으로 들어왔다. 유만수(柳蔓殊)가 먼저 들어왔다. 태조가 말하기를,
“유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적은 자이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태조가 안장을 풀고 말을 놓았는데, 유만수가 패하여 돌아온 때에 태조는 휘장 안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좌우에서 재삼 사뢰자, 비로소 천천히 일어나 식사를 하고, 마구를 갖추게 하고, 군사를 정돈하여 출발하려 하였다. 이때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1백 보 거리에 있었는데, 태조가 이길 조짐을 점쳐서 사람의 마음을 모으고자 하여 소나무 그루를 쏘았다. 한번에 소나무 그루가 끊어지니, 군사들이 모두 치하하였다. 좌군으로 더불어 앞뒤에서 진군하니, 도인(都人) 남녀가 주장(酒漿)을 가지고 다투듯 와서 위로하고, 수레를 끌어 길을 열어 주었으며, 노약자는 성에 올라 환호하였다. 조민수가 흑대기(黑大旗)를 세우고 영의서(永義署) 다리 송경(松京) 북부 보은동(報恩洞)어귀에 있다. 에 이르니, 최영이 내원당(內願堂) 승려 현기(玄機) 등과 항거하므로, 태조가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 송경 동부에 있다. 로부터 남산(男山) 북부에 있다. 에 오르자,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고 북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평리(評理) 안소(安沼)가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먼저 남산을 점거하고 있다가 기(旗)를 바라보자 패하여 달아나니, 최영이 사세가 궁박함을 알고 화원(花園)으로 도망하였는데, 몹시 분하여 창으로 수문인(守門人)을 뚫고 들어왔다.
태조가 드디어 암방사(巖房寺) 북령(北嶺)에 올라 큰 소라 한 통을 불게 하고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크게 부르짖었다. 정토(征討)할 때마다 태조는 혼자 소라를 썼기 때문에 도인(都人)은 소라 소리를 듣고 모두 태조의 군대가 이미 왔다고 기뻐하였다.
우가 영비(寧妃)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는데, 군사가 담을 무너뜨리고 달려 들어왔다. 곽충보(郭忠輔)가 곧장 팔각전에 들어가 최영을 찾으니, 우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이별하고, 최영은 두 번 절하고 나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요동 공벌의 거사가 비단 대의(大義)를 어기는 것뿐만 아니라 위태롭고 백성이 노고하여 원한이 하늘에 닿았으므로 부득이하였다. 잘 가게, 잘 가게.”
하고 서로 울었다. 드디어 고봉(高峰)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최영이 정벌에 나간 여러 장수들의 처자를 가두려고 하였으나, 사태가 급박하여 행하지 못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판삼사(李判三司)가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다.”
하니, 최영이 듣고 심히 노하였으나 말하지 못하였더니, 이때 이르러 탄식을 하며 말하기를,
“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들어맞았구나.”
하였다.
양 도통사와 36원수가 대궐에 나아가 배사(拜謝)하고 군문 밖에 돌아왔다. 얼마 뒤에 최영을 합포(合浦)로 이배(移配)하였다.
그때, 황제가, 우(禑)가 대국에 순종하는 도를 범하고 대국을 정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친히 태묘(太廟)에서 점을 치고자 하여 바야흐로 치재(致齋)하다가 회군하였음을 듣고 재(齋)를 파하였다 한다.
○ 다시 홍무(洪武) 연호를 쓰고 호복(胡服)을 금하였다.
○ 우리 태조가 우시중(右侍中)이 되고, 조민수가 좌시중(左侍中)이 되고 조준(趙浚)이 첨서밀직 겸대사헌(簽書密直僉大司憲)이 되었다.
태조가 일찍이 조준과 일을 논하고 매우 기뻐하여 옛날 친구처럼 대우하였는데, 회군함에 이르러서는 등용하여 쓰고, 대소의 일을 모두 물었다. 조준도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마음을 기울여 태조를 따랐는데, 조준은 경제(經濟)로 자임(自任)하여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우(禑)가 강화도(江華島)로 물러나고 아들 창(昌)이 즉위(卽位)하였다.
4일(병오)에 제장들이 흥국사(興國寺)에서 회의(會議)하였는데, 전교부령(典校副令) 윤소종(尹紹宗)이 곽광전(?光傳)을 가져와 바치자, 태조가 조인옥(趙仁沃)을 시켜 읽게 하고 들었다. 이날 밤 우가 환수(宦竪) 80여 인과 모두 갑옷을 입고 우리 태조와 조민수ㆍ변 안열(邊安烈)의 집에 달려갔는데, 모두 군문(軍門) 밖에서 주둔하고 집에 있지 않아 해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6일(기유)에 제장들이 궁중의 병장(兵仗)과 안마(鞍馬)를 다 내놓기를 청하였다.
8일(경술)에 또 영비(寧妃)의 출궁(出宮)을 청하니, 우가 듣지 않았다. 이에 제장들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지키며 우에게 강화(江華)로 갈 것을 청하자, 우가 부득이 궁을 나와 채찍을 잡고 안장에 기대어,
“오늘은 날이 이미 저물었다.”
하니, 좌우가 엎드려 울고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영비ㆍ연쌍비와 더불어 회빈문(會賓門)을 나와 강화로 향하였다.
우는 재위 14년이었다. 그 후 1년 만에 죽으니, 나이 25세였다. 백관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어 정비(定妃)의 전(殿)에 두었다. 조민수가 입군(立君)을 의논하니,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말하기를,
“마땅히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하므로, 9일(신해)에 정비(定妃)의 하교(下敎)를 받들어 창(昌)을 왕으로 세우니, 그때 나이 9세였다.
[주D-001]무성(武成) …… 하였으니 : 무성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 내용 중에,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칠 때 목야(牧野) 싸움에서 전쟁이 치열하여 “흐르는 피로 절구공이가 떠내려갔다.” 한 말이 있는데, 주(周)나라 사람인 맹자는 인자 무적(仁者無敵)이란 뜻을 미루어 “포악했던 주(紂)를 정벌하는데 어찌 전쟁이 이처럼 치열했겠는가? 이는 반드시 과장된 말일 것이니, 만일 이 말을 다 믿는다면 차라리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孟子 盡心下》
[주D-002]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일 : 공 양왕(恭讓王) 때 명나라의 힘을 빌어 당시 시중(侍中)으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려고 명 태조(明太祖)에게 “이색(李穡)ㆍ우현보(禹玄寶) 등이 화를 당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다. 이 일로 이초(彛初)의 옥(獄)이 일어났다.
[주D-003]철령위(鐵嶺衛)의 일 : 고려와 명(明)과의 철령 이북 영토권(領土權) 분쟁을 말한다. 원(元)나라가 북으로 쫓기고 명이 서자 명나라는 철령 이북이 본래 원의 영토였으니 요동(遼東)에 귀속시키겠다고 통고하여 왔다. 이에 고려는 철령 이북이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는 철령위 설치를 중지해 달라는 사신을 보냈으나 거절당하자 최영(崔瑩) 등에게 명하여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다.
[주D-004]역명(易命)에 이르렀다 :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들어선 것을 말하는데, 요동 정벌 때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 건국의 기틀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05]목은(牧隱)이 …… 독촉한 것 : 목은은 이색(李穡)의 호. 이때 명나라에서 집정 대신(執政大臣)의 친조(親朝)를 명하였는데 두려워서 가지 못하자, 이색은 “나라가 어지러우니 왕이나 집정 대신이 친조하지 않으면 변명할 길이 없다.” 하고는 창왕에게 갈 것을 권하였으나, 왕은 가지 못하고 자신이 갔다. 《高麗史 卷一百十五 列傳二十八》
[주D-006]김종연(金宗衍) …… 자살하였으니 : 김종연과 윤유린은 모두 이초와 윤이의 당여.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김종연은 도망했다가 잡혀서 처형되고 윤유린은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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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7상
기사년 후폐왕 창(後廢王昌) 즉위년(6월 즉위)
무진 고려 후폐왕창(後廢王昌) 즉위년 6월부터, 임신 고려 공양왕(恭讓王) 4년까지 5년간
○ 폐왕 우(廢王禑)를 높여 상왕(上王)이라 하고, 근비(謹妃) 이씨(李氏)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라 하였다.
우(禑)가 가까이하던 제비(諸妃)ㆍ옹주(翁主)를 다 사제(私第)로 돌려보내어 그 공상(供上)을 끊었고, 제비의 아버지 강인유(姜仁裕)ㆍ최천검(崔天儉)ㆍ조영길(趙英吉)ㆍ신아(申雅)ㆍ왕흥(王興) 등을 유배하였다.
○ 이인임(李仁任)이 졸(卒)하였다.
조민수(曹敏修)가 예장(禮葬)하고 증시(贈諡)할 것을 청하매, 전의부령(典儀副令) 공부(孔俯)가 말하기를,
“내가 광평(廣平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을 지칭하는 말)을 의시(議諡)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하고 ‘황류(荒謬)’라 의시하므로, 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ㆍ강회백(姜淮伯) 등이 꾸짖으니, 공부가 농담이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으며, 그 뒤에 대관(臺官)이 이인임을 추론(追論)하여, 마침내 저택(?宅)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였다.
○ 박의중(朴宜中)이 명(明)에서 돌아오고, 황제(皇帝)가 철령위(鐵嶺衛)를 혁파(革罷)할 것을 허락하였다.
박의중이 받들고 온 제지(帝旨)에 이런 말이 있었다.
왕의 말에 따르면 그 땅은 고려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나, 이세(理勢)로 말하면 전에 원(元)에 통속(統屬)되었었으므로 요동(遼東)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니, 왕의 말을 가벼이 믿을 수 없다. 반드시 상세히 살피고난 뒤에 정할 것이다.
공민왕(恭愍王) 때로부터 조빙(朝聘)하는 자들이 금은(金銀)ㆍ토산(土産)을 많이 가져가서 채백(彩帛)ㆍ경화(輕貨)를 사왔다. 유식한 자일지라도 권귀(權貴)의 부탁에 몰려 사장(私裝)이 공헌(貢獻) 중의 10분의 9가 되니, 중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려 사람은 사대(事大)를 핑계삼아 무역(貿易)을 탐(貪)하러 온다.’ 하였다. 임ㆍ염(林廉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 등을 지칭하는 말)이 용사(用事)하게 되어서는 그 폐단이 더욱 심하였는데, 박의중의 행장(行裝)에는 그런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요동호송진무(遼東護送鎭撫) 서현(徐顯)이 재화(財貨)를 요구하매, 박의중이 전대를 쏟아 보이고서 입었던 저의(苧衣)를 벗어 주었다. 서현이 그 청고(淸高)함에 탄복하여 예부(禮部)에 고(告)하니, 황제가 인견하여 특별하게 대우하였는데, 서현이 나와서 남에게 말하기를,
“설 재상(?宰相) 이하로 내가 본 고려 사신이 많으나, 지존(至尊)의 예대(禮待)가 박 재상과 같은 이는 없었다.”
하였다. 황제가 또 예부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잔치를 베풀되 전 원(元)의 평장원사(平章院使)의 윗자리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드디어 철령(鐵嶺)에 위(衛)를 설립(設立)하는 의논을 거두었다. 박의중이 돌아올 때에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보고가 이르렀으므로, 종자(從者)들이 요동(遼東)에 잡히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중도에서 다 달아나서 박의중이 단기(單騎)로 요동에 이르렀는데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안】 나라의 재화로서는 금은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만약에 군사를 쓰는 일이 있으면 상주고 장려할 때에 이것이 아니고서는 안 되며, 교린(交隣)과 사대(事大)에 쓰는 온갖 것에도 이것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중국 물건을 탐내어 우리 나라의 천백년이 되어도 훼손되지 않는 보화(寶貨)로 상하기 쉬운 채백이나 완호물(玩好物)을 사므로, 이 때문에 국내에 재물이 말라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제용(濟用)할 수 없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어찌 이를 금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조민수(曹敏修)와 우리 태조[我太祖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지칭하는 말]에게 공신호(功臣號)를 내렸다.
추7월 도당(都堂)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폐왕(廢王)에게 의대(衣帶)를 바쳤다.
우(禑)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곧 우를 여흥(驪興)으로 옮겨서 그 고을의 군사로 숙위(宿衛)하고 세(稅)를 거두어서 공봉(供奉)하게 하였다.
○ 왜(倭)가 광주(光州)를 함락시켰다.
○ 원요준(源了俊)이 사자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사로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모두 2백 50인이었다.
○ 명에 사신을 보내어 손위(遜位)를 고하였다.
찬성(贊成) 우인열(禹仁烈), 정당(政堂) 설장수(?長壽)를 보내어 최영(崔瑩)이 요동(遼東)을 공격한 죄도 아울러 아뢰게 하였다.
【안】《명사고(明史藁)》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우(禑)가 아들 창(昌)에게 손위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전에 듣건대, 그 왕이 갇혔다 하니, 이는 반드시 그 나라에 모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기다려서 그 형세가 변해 가는 것을 보라.’ 하였다.
○ 시중(侍中) 조민수(曹敏修)를 창녕(昌寧)에 유배(流配)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이, 조민수가 탐욕하여 사전(私田)의 혁파(革罷)를 저지한다고 탄핵하였으므로, 귀양보냈다가 곧 방귀전리(放歸田里)를 허가하였다.
8월 이색(李穡)을 시중(侍中)으로 우리 태조를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다.
○ 서연(書筵)을 열었다.
이색(李穡)을 영서연사(領書筵事)로, 정몽주(鄭夢周)를 지서연사(知書筵事)로 삼고, 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을 모두 서연관(書筵官)으로 충차(充差)하고, 또 헌부(憲府)ㆍ중방(重房)ㆍ사관(史官) 각 1인이 날마다 번갈아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그 뒤에 창(昌)이 글읽기를 게을리하므로 대사성(大司成) 윤소종(尹紹宗)이 상서(上書)하기를,
“전하께서 《논어(論語)》를 배우신 지 이제 열석 달이 되었는데, 날마다 새로 아시는 것이 서너 자에 불과합니다. 전하께서 근일에 학문을 게을리하는 단서가 밖으로 나타나서, 사부(師傅)가 아직 물러가지 않고 음훈(音訓)을 아직 통하지 못하였는데도 문득 읽다가 문득 일어나고, 이윽고 어선(御膳)이 때를 잃는다 하며 문득 안으로 들어가시니, 성학(聖學)이 어떻게 진취되겠습니까? 상왕(上王)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는 총명(聰明)이 학문으로 향하셨으나, 간신(奸臣)이 나라를 훔칠 계책으로 곧 강연(講筵)을 폐지하여 우리 상왕을 그르쳤으므로 종사(宗社)가 거의 뒤집히게 되었었는데, 전하께서 학문에 게으르시면 종사와 백성을 어찌하시렵니까? 편폐(便嬖)ㆍ근습(近習)은 성덕(聖德)을 해치는 잡초(雜草)요, 어진 사대부(士大夫)는 성덕을 양성(養成)하는 우로(雨露)이니, 모든 궁인(宮人)ㆍ내시(內侍)도 정자(程子)의 연주(筵奏)에 따라 나이 40~50 이상인 온후(溫厚)하고 침중(沈重)한 사람을 가려서 좌우에 갖추고, 젊은 자는 사진(仕進)하지 않게 하여 상(上)을 사사(邪私)로 유도(誘導)하는 근원을 끊으소서. 대내(大內)의 기명(器皿)ㆍ의복(衣服)은, 주(紂)가 옥배(玉盃)ㆍ상저(象箸)를 쓴 것을 경계로 삼고, 우(禹) 임금이 거친 옷을 입은 것을 본받으소서. 정전(正殿)에서 글을 배우실 즈음에 사부가 뵈러 나아가거든 일어나 자리를 비켜서 사부를 존중하는 뜻을 다하소서. 성덕을 양성하는 데에는 이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정도전이 이를 보고서 말하기를,
“의논이 간절하고 주도(周到)하여 임금에게 아뢰는 체모에 매우 부합한다.”
하였다.
신씨(申氏)는 이렇게 적었다.
윤소종이 스스로 간관(諫官)으로서 숨김없이 지적하여 마치 죄를 들추어내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참된 직언(直言)을 하는 자이겠는가! 곡영(谷永)처럼 오로지 임금을 공박(攻駁)해서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어 손발 사이에서 농락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두 임금에게 순종하는 체 하였겠는가?
【안】 이 글에서 상왕이라 한 것은 우(禑)를 가리킨 것이다. 그렇다면 우가 폐위되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상왕이라는 칭호로 존숭(尊崇)될 수 있었던 것이니, 신씨(辛氏)라는 설(說)을 명정(明正)하게 주장해 낼 수 없다면 여전히 왕씨(王氏)이다. 그런데 윤소종의 무리가 제 몸을 위탁하여 신하가 되었으니, 부왕(父王)은 폐위되어 옮겨지고 사군(嗣君)은 어려서 국가에 어려움이 많고 인심이 우위(憂危)하면, 신하가 된 자로서는 마땅히 조심하고 삼가서 진정(鎭定)하기에 힘써서 인심이 붙좇게 해야 함이 옳다. 이때에 창(昌)의 나이가 열 살이니, 열 살 된 아이에게 어찌 과실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과실이 있더라도 덮어 두고 드러내지 말며, 한 가지라도 잘한 일이 있으면 드러내어 보고 듣는 사람을 용동(聳動)하여, 반드시 온 백성의 마음이 이배(離背)되지 않게 하여, 보양(輔養)하는 도리에 있어서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할 뿐이다. 윤소종이 참으로 사부(師傅)ㆍ연신(筵臣)과 사사로이 서로 우탄(憂歎)하다가 나온 말이라면 괜찮겠으나, 글로 아뢰는 데에 써서 그 잘못을 드러내어 온 백성을 서운하게 하였으니, 그 불충(不忠)이 크다. 이 글이 나라를 뒤집으려는 전조(前兆)일는지 어찌 알겠는가? 정도전이 칭찬하였으니, 그 서로 주고 받으며 시킨 자취를 숨길 수 없다.
○ 이광보(李光甫)를 주살(誅殺)하였다.
이광보는 본디 거리의 무뢰한이다. 우(禑)가 동강(東江)에 갔을 때에 바라는 대로 뜻을 맞추었으므로 조석으로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옥(下獄)하여 장살(杖殺)하였다.
○ 전제(田制)를 개정(改定)하였다.
이때 전제가 크게 무너져서 전시과(田柴科)가 퇴폐하여 사전(私田)이 되어, 호강(豪强)이 겸병(兼幷)하고 남의 전토(田土)를 빼앗으매, 태조(太祖)가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사전을 없애고 균전제(均田制)를 복구할 것을 의논하였다. 조준이 동렬(同列)과 함께 상소(上疏)하여 극론(極論)하였다. 대략,
“성조(聖祖 고려 태조를 가리킨다)께서 왕업(王業)을 일으키시어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전제를 정하여 신민(臣民)에게 나누어 주되, 무릇 전토(田土)를 받은 자에게 죄가 있으면 거두어들이니, 사람마다 자중(自重)하여 감히 법을 범하지 않아, 예의(禮義)가 떨치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으며, 또 부위(府衛)의 군병(軍兵)과 주군(州郡)ㆍ진역(津驛)의 이서(吏胥)가 각각 그 전토의 소출을 먹으니, 토착(土着)해서 생업에 안정하여, 나라가 그 때문에 부강(富强)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한인(閑人)ㆍ공음(功蔭)ㆍ투화(投化)ㆍ입진(入鎭)ㆍ가급(加給)ㆍ보급(補給)ㆍ등과(登科)ㆍ별사(別賜) 등 명칭이 대(代)마다 늘어나매, 전토를 맡은 관아(官衙)가 번거로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전토를 수수(授受)하는 법이 점점 해이해졌습니다. 간활(奸猾)한 자가 틈을 타고 속여서, 이미 벼슬하였거나 이미 시집간 자가 오히려 한인전(閑人田)을 먹고, 항오(行伍)에 들지도 않은 자가 법을 어겨서 군전(軍田)을 먹으며, 사사로이 주고 몰래 훔쳐서 이미 역분(役分)을 먹고도 또 한인전을 먹고 또 군전을 먹으므로, 재상(宰相)이 되어 전지 3백여 결(結)을 받아야 할 자도 자생(資生)할 만한 입추의 여지가 없고, 재상이 되어 녹(祿) 3백 60석(碩)을 받아야 할 자가 오히려 20석도 못 받습니다.
국가가 기름진 땅을 갈라서 42도부(都府)의 갑사(甲士) 10여 만 인에게 녹을 주어, 그 의복ㆍ양식ㆍ병기가 다 전토에서 나오며 따로 양병(養兵)의 비용이 없었으니, 이것은 곧 삼대(三代) 때에 군병을 농민(農民)에 붙였던 뜻과 같은 것이었는데, 이제는 군병과 전토가 다 없어져서 갑작스런 사변이 있을 때마다 농민을 구박하여 군병을 보충하므로, 군병이 약해서 적을 불러들이게 되고, 농민의 식량을 갈라서 군병을 공양(供養)하므로 민호(民戶)가 줄어서 고을이 쇠망(衰亡)합니다. 조종(祖宗)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나누어 준 전토를 한 집의 부자(父子)가 사물(私物)로 삼고, 조정(朝廷)에서 벼슬하지 않고 군문(軍門)에 들어가지 않은 자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앉아서 그 이(利)를 누리는데, 비록 개국공신(開國功臣)의 후손이거나 밤낮으로 시위(侍衛)하는 신하이거나 백전(百戰)에 근고(勤苦)한 조사(朝士)일지라도 도리어 한 두둑의 식전(食田)이 없으니, 어떻게 충의(忠義)를 권장하고 사공(事功)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서는 판도사(版圖司)ㆍ전법사(典法司)가, 외방(外方)에서는 수령(守令)ㆍ안렴사(按廉使)가 날마다 전토에 관한 송사(訟事)를 청리(聽理)하게 되어, 송사(訟事)에 관련된 사람이 옥에 가득 차고 여러 달 동안의 문안이 산처럼 쌓여서, 한 두둑의 쟁송(爭訟)이 수십 년 동안을 이어가니, 사전(私田) 때문에 쟁송의 꼬투리를 만들어서 송사가 번거롭습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겸병이 더욱 심해져서 한 주(州)에 걸치고 한 군(郡)을 포함하여 산과 내[川]로 한표(限標)를 삼아, 모두 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토라고 지칭하여 한 두둑의 임자가 대여섯 사람이 넘고, 한 해의 구실로 거두는 것이 열아홉 번까지 되며, 떼를 지어 횡행(橫行)하여 마음대로 포악하게 노략질하니, 억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에 사무칩니다.
신(臣)은 바라건대, 성조(聖祖)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나누어 주신 법을 지키고 후인(後人)이 사사로이 받아서 겸병한 폐단을 고쳐서, 조사가 아니고 군병이 아니고 국역(國役)에 종사하는 자가 아니면 전토를 주지 말고, 종신토록 사사로이 서로 주고 받지 못하도록 엄하게 금법(禁法)을 세워서 백성과 더불어 경신(更新)하소서. 그러면, 사직(社稷)의 기초가 반석(盤石)처럼 튼튼하고 태산(泰山)처럼 씩씩하며, 국가의 위엄이 뇌정(雷霆)처럼 떨치고 염화(炎火)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는데, 구가세족(舊家世族)들이 모두 이를 비방하였고, 이색(李穡)ㆍ홍영통(洪永通)은 말하기를,
“구법(舊法)을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되며, 만약에 고치면 사군자(士君子)의 살길이 날로 줄어들어 공상(工商)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였다. 이림(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변안열(邊安烈) 및 권근(權近)ㆍ유백유(柳伯濡) 등은 이색의 의논에 따르고, 정도전(鄭道傳)ㆍ윤소종(尹紹宗) 등은 조준의 의논에 따랐으며, 정몽주(鄭夢周)는 양편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정하지 않았다. 또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의논한 자 53인 가운데에서 개혁을 바라는 자는 18~19인이었는데, 바라지 않는 자는 다 거실(巨室)의 사람들이었다. 태조가 마침내 조준의 의논을 채용하여 개혁하였다.
【안】 충신(忠臣)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법령(法令)이 내 임금에게서 나오고 신하에게서 나오지 않게 하려 할 것이며, 민심(民心)이 내 임금을 아껴 받들고 다른 사람을 아껴 받들지 않게 하려 할 것이다. 이때 우리 태조가 조야(朝野)의 촉망(囑望)을 받아 정령(政令)을 내리는 일과 백성이 아껴 받드는 바가 다 우리 태조에게 돌아갔으니, 이것이 어찌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ㆍ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호) 제공(諸公)이 바라는 바이었겠는가? 사전을 겸병하는 폐단은 참으로 의심없이 빨리 없애야 할 것인데도 제공이 개혁을 막으려 한 까닭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민심이 이 때문에 점점 태조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저 조준의 무리가 충고하고 힘껏 간하여 반드시 개혁하려 한 것은 고려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태조에게 충성한 것이었다. 그 행적을 가지고 논하자면, 제공이 고려에 대하여 고심(苦心)한 것은 역시 존경할 만하고 본받을 만하다.
조준이 전제를 논하고 나서, 또 동렬과 함께 당시에 힘써야 할 일을 조목으로 나누어 아뢰었다. 대략,
“국초(國初)에 관(官)을 설치할 때에 재상(宰相)을 두어서 육부(六部)를 통괄하고, 감(監)ㆍ시(寺)ㆍ창(倉)ㆍ고(庫)를 두어서 육부를 받들게 하였으니, 육부는 백관(百官)의 근본이요 정사(政事)가 나오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백료(百僚)의 서사(庶事)가 흩어져서 통속(統屬)이 없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육전(六典)의 일을 육부로 돌리고 각사(各司)를 육부에 나누어 붙여서, 재신(宰臣)이 위에서 제강(提綱)하고 육부의 판서(判書)가 낭관(郞官)들과 속사(屬司)를 거느려 아래에서 각각 그 벼슬에 따라 명을 듣되 큰 일은 육부의 낭관이, 작은 일은 육색장(六色掌)이 때에 따라 명을 받아서 행이(行移)하게 하소서. 그러면 간단하여 번잡하지 않고 낮은 자가 높은 자의 명을 따라서, 교령(敎令)이 쉽게 시행되고 정사가 쉽게 거행될 것이니, 임금의 직분은 재상을 논할 뿐입니다.
본조(本朝)의 제도로 말하면, 중서성(中書省)에는 영(令)ㆍ시중(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참지정사(參知政事)ㆍ정당문학(政堂文學)을 두어 하늘의 오성(五星)을 본뜨고, 추밀원(樞密院)의 일곱 벼슬은 하늘의 북두성(北斗星)을 본떠서, 재추(宰樞)가 합좌(合坐)하여 국정(國政)을 의논하였었는데, 원(元)을 섬기기 시작하고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는 도당(都堂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의 별칭이다)에 앉아서 국정에 참여하는 자가 60~70인에 이르니, 이토록 관직이 참람한 일은 예전에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제(經濟)하며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고 자신을 바루어서, 백관을 바루는 자가 아니거나, 청백(淸白)하고 충직(忠直)하며 악한 자를 미워하고 어진 사람을 좋아하며 나라를 위하여 제집을 잊는 자가 아니거나, 싸움에 이기고 적의 땅을 쳐서 빼앗아 용맹이 삼군(三軍)에서 으뜸이 되고 위엄이 타국에 떨친 자가 아니면 양부(兩府)에 들이지 말고, 무릇 긴급하지 않은 관원이나 잡되고 쓸데없는 이서(吏胥)는 모두 사태(沙汰)하여,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회복하소서.
또, 문종(文宗) 38년 동안에 잘 다스려진 것은 등용한 것이 다 노성(老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사대부(士大夫)의 어린 자제를 동반(東班)의 9품 이상의 벼슬에 들이지 못하게 하되 법을 어겨서 받는 자는 그 부형(父兄)을 죄주소서. 규정(糾正)은 백관을 살피는 벼슬인데 관질(官秩)은 낮고 책임은 중하니, 그 관질을 높여서 기강을 떨치소서. 수령(守令)은 백성을 가까이 대하여 다스리는 벼슬이므로 중하게 여기지 않아서는 안 되니, 이제부터는 현질(顯秩)을 지내고 명망이 있는 자가 아니거나, 중외(中外)의 벼슬에 두어 보아 드러난 성적이 있었던 자가 아니면, 감무(監務)ㆍ현령(縣令)을 제수(除授)하지 못하게 하소서. 부사(府史)ㆍ서리(胥吏)가 불학무식한 무리이기 때문에 백성에게 포악하니, 이제부터는 대간(臺諫)ㆍ육조(六曹)가 천거한 재간(才幹)이 있는 자를 보내되 품계(品階)를 참관(參官)으로 높이며, 안집별감(安集別監)들은 일체 폐지하고 부사ㆍ서리에게는 권무(權務)의 벼슬을 제수하소서. 공역서(供驛署)를 폐지하여 군부사(軍簿司)에 붙이고, 모든 말[馬]과 역졸(驛卒)은 도당(都堂)의 문서에 의해서만 보낼 수 있게 하소서. 상승국(尙乘局)을 폐지하여 사복시(司僕寺)에 붙이고, 내시(內侍)를 제수하지 못하게 하소서. 무릇 도감(都監)은 일이 있으면 두고 일이 없으면 폐지하는 것이 관례이니 조성도감(造成都監)을 폐지하여 선공시(繕工寺)에 붙이고, 방어화통도감(防禦火桶都監)을 폐지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붙이소서.
도성(都城)은 근본이 되는 땅이요 풍화(風化)가 먼저 행해질 곳인데, 근래 교양(敎養)에 법도가 없고 역역(力役)이 번중(煩重)하니 도총도감(都摠都監)을 폐지하여 오부(五部)를 개성부(開城府)에 붙이고, 한 이(里)마다 늙고 학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사장(社長)으로 삼아 당서법(黨序法) 에 의하여 자제들을 교양하고, 천인(賤人)과 공상(工商)의 자제들은 각각 제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거리에 떼지어 놀며 경박한 풍속을 조장하지 못하게 하되, 어기는 자는 그 사장과 부형을 죄주소서. 지금 신민(臣民)으로서 아직도 예전대로 호복(胡服)을 입는 자는 일체 규찰(糾察)하여 다스리소서. 권세 있는 집안에 바삐 다니며 제 직무에 충실하지 않는 자는 정직(停職)하고 녹(祿)을 거두어들이소서.
도평의사(都評議使)가 중외(中外)에 공문을 보내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한데, 한낱 녹사(錄事)에게 서명(署名)시키니, 변화에 통하고 간사를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도당(都堂)의 공문에는 반드시 인장(印章)을 찍게 하소서. 구제(舊制)로는 창고(倉庫)ㆍ궁사(宮司)에 왕패(王牌)를 내릴 때에 반드시 인장을 찍어서 신보(信寶)를 행하였는데, 이제는 내시가 홀로 그 이름을 쓰니, 또한 간사를 막는 방법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내용(內用)은 도당으로 하여금 공진(供進)하게 하고 왕패를 내리지 말아서 내시가 훔치는 근원을 막으소서. 송사(訟事)를 맡아서 처결하거나 전곡(錢?)을 출납하는 관사(官司)로서 사사로운 서신을 서로 통하여 시비를 뒤바꾸는 것을 일체 금지하되, 어기는 자는 청탁한 자와 들어준 자를 모두 불렴(不廉)의 죄로 논하소서.
예전에는 백성이 16세가 되면 장정으로서 국역(國役)에 종사하고 60세가 되면 국역을 면하게 하되, 주군(州郡)에서 해마다 인구를 헤아리고 민호(民戶)를 치부하여 안렴사(按廉使)에게 바치고 안렴사는 호부(戶部)에 바쳤으므로, 조정(朝廷)에서 군사 또는 민역(民役)을 징발하는 것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쉬웠는데, 근래로는 법이 무너져서 군사 또는 민역을 징발할 때에 향리(鄕里)에서 속여서, 가멸하고 건장한 자는 면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가 행하게 되니, 이민(吏民)이 유망(流亡)하여 주군이 공허(空虛)해지는 것이 호구가 치부되지 않은 데에서 나온 화환(禍患)입니다. 바라건대, 이제 양전(量田)할 때에 전토(田土)가 많고 적음에 따라 상ㆍ중ㆍ하로 민호를 치부하고 또 민호를 양(良)ㆍ천(賤)으로 나누어서, 징발할 때에 빙거(憑據)할 자료가 되게 하소서.
제도(諸道)의 어염(魚鹽)ㆍ목축(牧畜)의 번식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압록강(鴨綠江) 이남이 대저 다 산이고, 기름진 전토는 바닷가에 있는데, 기름진 들 수천 리가 왜노(倭奴)에게 함몰(陷沒)되어 잡초가 하늘에 닿도록 황폐하니, 국가에서는 이미 어염ㆍ목축의 이익을 잃고 또 옥야(沃野)ㆍ양전(良田)의 수입을 잃었습니다. 바라건대, 한(漢)나라가 백성을 모집하여 변방(邊方)에 옮겨 충실하게 한 옛일#3)# 을 채용하여, 황폐한 땅을 개간한 자에게는 20년 기한으로 그 전토에 과세(課稅)하지 말고, 그 백성은 부역(賦役)시키지 말고 수군만호부(水軍萬戶府)에 전속(專屬)시켜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설립하며, 노약(老弱)을 모여 살게 하며 척후(斥候)를 멀리까지 하고 봉화(烽火)를 삼가며, 무사할 때에는 경운(耕耘)ㆍ어염(魚鹽)ㆍ주야(鑄冶)에 종사하면서 때때로 배를 만들어 두었다가, 왜구(倭寇)가 들어오면 수군으로 치게 하소서. 합포(合浦)부터 의주(義州)까지 다 이렇게 하면, 몇 해 안 가서 유망했던 이민이 죄다 돌아와, 변경(邊境)이 충실해지고 제도(諸島)가 점점 충실해지며, 전함(戰艦)이 많아서 수군이 익숙해지고, 해구(海寇)가 없어서 변군(邊郡)이 편안해지고, 조전(漕轉)이 쉬워서 창름(倉?)이 부실(富實)해질 것입니다. 제도(諸道)의 원수(元帥)로서 능히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전함을 수리하며, 인심을 결속하고 호령(號令)을 시행하여 도적을 토멸하고 변경을 편안하게 한 자에게는 도전(島田)을 내려 대대로 그 수입을 먹고 자손에게 전하게 하며, 한 성보 또는 한 주군을 잃은 자는 군법(軍法)으로 처결하여 가벼이 용서받지 못하게 하여,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을 보이소서.
서북(西北) 방면은 나라의 울타리인데, 전에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나라의 일을 마음대로 결단할 때에 제 사람을 널리 두느라고 원수(元帥)ㆍ만호(萬戶)가 본래의 액수보다 많아졌으니, 이제부터는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위망(威望)이 일찍부터 드러난 자를 가려서 도(道)마다 원수 1인, 상만호(上萬戶)ㆍ부만호(副萬戶) 각 2인을 두고 나머지는 다 폐지하며, 천호(千戶)의 직임은 원수로 하여금 그 위엄과 혜택이 백성에게 신복(信服)받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게 하되 자주 갈지 말게 하소서. 권세있는 집에서 앞을 다투어 무역[互市]하느라고 초피(貂皮)ㆍ송자(松子)ㆍ인삼(人蔘)ㆍ봉밀(蜂蜜)ㆍ황랍(黃蠟)ㆍ미두(米豆) 따위 물건을 무엇이고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억지로 사들이는 자를 일체 금지하되, 어기는 자는 법으로 매우 다스리소서. 화척(禾尺)ㆍ재인(才人)이 농사에 종사하지 않고 산골에 서로 모여 살면서 왜적(倭賊)을 사칭(詐稱)하므로 그 형세가 염려되니, 이제부터는 그들이 사는 주군에서 그 인구를 살펴서 호적을 만들어 옮겨 다니지 못하게 하고, 노는 땅을 주어 농사에 힘쓰게 하여 여느 백성과 같이 하소서.”
하였는데,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려 채용된 것이 많았다.
○ 왜(倭)가 거제(巨濟)에 침구(侵寇)하였다.
왜구가 점점 치열해지므로 최칠석(崔七夕)ㆍ장사길(張思吉) 등을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곧 연산현(連山縣)의 개태사(開泰寺)를 함락시키고 또 청주(淸州)ㆍ유성(儒城)ㆍ낙안(樂安)ㆍ옥주(沃州)ㆍ황간(黃澗) 등의 고을을 침구하였다.
○ 제도(諸道)의 안렴사(按廉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라 고쳤다.
조준(趙浚)이 말하기를,
“지금 방진(方鎭)ㆍ주목(州牧)에 양부(兩府)의 대신(大臣)이 많으므로, 관질(官秩)이 낮은 안렴사가 출척을 엄하게 하지 못하여 기강이 떨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조종(祖宗)께서 양부를 보내신 성헌(成憲)을 본받고, 당(唐)이 대신을 보낸 옛일을 본받아, 전야가 개척되고[田野闢] 호구가 늘고[戶口增] 사송이 간명하고[詞訟簡] 부역이 고르고[賦役均] 학교가 흥작하였는가[學校興]를 가지고 주군(州郡)을 출척하며, 호령이 엄하고[號令嚴] 기계가 정하고[器械精] 병졸이 훈련되고[兵卒鍊] 둔전이 수치되고[屯田修] 해구가 그쳤는가[海寇息]를 가지고 방진을 상벌(賞罰)하소서.”
하매, 그 의논을 따랐다.
○ 조운흘(趙云?)을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로 삼았다.
조운흘이 떠날 때에 상서(上書)하기를,
“우리 나라는 바다로 왜도(倭島)에 가깝고 뭍으로 호지(胡地)에 닿았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의 경계가 서해도(西海道)부터 양광도(楊廣道)ㆍ전라도(全羅道)ㆍ경상도(慶尙道)까지 바닷길로 거의 2천여 리인데, 바다 가운데에 있는 살 만한 땅으로 대청도(大靑島)ㆍ소청도(小靑島)ㆍ교동도(喬桐島)ㆍ강화도(江華島)ㆍ진도(珍島)ㆍ절영도(絶影島)ㆍ남해도(南海島)ㆍ거제도(巨濟島) 등 큰 섬 스물이 있고, 작은 섬은 이루 셀 수 없으며, 여기에는 다 기름진 땅과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으나, 지금은 폐기하여 자생(資生)하지 않으니 한탄스럽습니다. 마땅히 오군(五軍)의 장수와 팔도(八道)의 군관(軍官)에게 각각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주고, 천호(千戶)ㆍ백호(百戶)에게는 패면(牌面)을 주어, 크고 작은 섬들을 그들의 식읍(食邑)으로 삼아서 자손에게 전하게 하면, 장수 한 몸의 부(富)일 뿐 아니라 자손 만세의 의식(衣食)이 넉넉할 것이니, 사람마다 누구인들 각자가 싸움에 힘쓰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각자가 싸움에 힘쓰면, 전함(戰艦)을 스스로 장만하고 군량(軍粮)을 스스로 가져와서 유병(游兵)이 될 것이며, 불의(不意)에 나가서 치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할 것이니, 그래서 부서(富庶)하게 되어 인가가 잇달고 닭소리ㆍ개소리가 서로 들리며, 백성은 어염의 이익을 얻고 나라에는 조전(漕轉)의 염려가 없어져서 조종(祖宗)의 땅을 당장에 다시 보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창(昌)이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렸다. 조운흘이 주군(州郡)을 관찰(觀察)하되, 기강을 바로잡아 떨치며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붙잡아 도우며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니, 관내(管內)가 크게 다스려졌다.
【안】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려 있어, 서쪽으로 중국에 통하고 동남으로 왜(倭)를 근심하니, 해방(海防)의 계책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신라 연해(沿海)의 왜를 방비하던 유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신라 때의 청해진(淸海鎭)은 지금 강진현(康津縣)의 완도(莞島)인데, 중국 사람이 늘 바닷길로 와서 신라 사람을 약탈하여 노비(奴婢)로 만들므로, 장보고(張保皐)가 이곳에 출진(出鎭)하여 순경(巡警)하니, 바다에는 침략하는 자가 없어졌다. 고려는 신해년(충렬왕 7 1281)의 동정(東征) 이후로 합포(合浦)부터 서남 연해까지 다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였으므로 왜인이 감히 서쪽에서 들어와 노략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거울삼을 만한 명확한 옛일인데, 그 말세에는 변방(邊方)의 방비가 해이하여 왜구가 틈을 타매 열군(列郡)이 흙이 무너지듯 함몰하였으나, 선왕(先王)의 정책을 다시 강구하지 않았다.
당시 왜를 방어할 계책을 사람들이 다 말하였으나, 조준(趙浚)ㆍ조운흘(趙云?)의 말이 가장 절실하여, 고금의 이의(異宜)를 논할 것 없이 반드시 시행해야 할 것이었다.
○ 새로 양전(量田)하였다.
○ 전선법(銓選法)을 다시 시행하였다.
구제(舊制)로는, 문관(文官)ㆍ무관(武官)의 전형 주의(銓衡注擬)를 이부(吏部)ㆍ병부(兵部)가 나누어 맡고, 부(府)ㆍ위(衛)에서는 대정(隊正) 이상을, 제사(諸司)에서는 9품 이상 및 부사(府史)ㆍ서도(胥徒)를 다 그 연월(年月)을 쓰고 그 공과(功過)를 적어 올려서 연말(年末)에 승출(陞黜)하고, 이것을 도목정(都目政)이라 했었는데, 권간(權姦)이 나라를 훔치고부터는 관작(官爵)이 사문(私門)에서 나오고 도목정은 오래 폐지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좌사의(左司議) 이행(李行)이 상언(上言)하기를,
“권신(權臣)이 정사(政事)를 마음대로 한 이래로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매, 하인(下人)을 뇌물로 주고 전택(田宅)을 뇌물로 써서, 비교(批敎)가 내리기 전에 ‘아무개가 어느 벼슬을 했다.’고 길거리에 떠들썩하게 퍼져 명분(名分)이 혼란하니, 조종(祖宗)께서 어진이를 숭상하여 관록(官祿)을 후하게 주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근래 관직(官職)이 마치 흙모래처럼 천하니, 이 때문에 조사(朝士)는 제몸을 생각하지 않고 임금이 싫어하더라도 간쟁(諫諍)하는 지절(志節)이 없고, 군병(軍兵)은 의(義)를 따라 죽더라도 지키는 마음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그 공적(功績)을 상고하고 그 덕행(德行)을 살피게 하여 제수(除授)하고, 첨설직(添設職)은 군공(軍功)이 아니면 일체 금지하고, 백관(百官) 중에서 직사(職事)가 없는 자는 일체 태거(汰去)하소서.
의성(義成)ㆍ덕천(德泉) 등 여러 창고(倉庫)는 전곡(錢?)을 두는 곳이니 풍저창(豊儲倉)ㆍ요물고(料物庫)의 예(例)에 따라 사(使)ㆍ부사(副使)ㆍ승(丞)ㆍ주부(主簿)를 다시 두소서. 성부(省府)ㆍ찰원(察院)으로 말하면 신중히 가리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조종의 성규(成規)를 지켜서 일대(一代)의 정치를 새롭게 하소서.”
하였다. 그래서 그 공로를 기록하게 되니, 벼슬하는 자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 우리 태조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삼았다.
○ 삼도도지휘사(三道都指揮使) 정지(鄭地)가 남원(南原)에서 왜(倭)를 쳐서 대파(大破)하였다.
그때 왜가 양광도(楊廣道)ㆍ전라도(全羅道)ㆍ경상도(慶尙道) 등에 침구(侵寇)하여, 여름부터 겨울까지 주군(州郡)을 도륙(屠戮)하고 불살랐으며, 진주 목사(晋州牧使) 이빈(李贇)이 전사(戰死)하였다. 왜가 운봉(雲峰)으로부터 팔라현(八羅峴) 지금 팔량현(八良峴)이라 부르며 운봉현(雲峰縣)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요해지(要害地)라 일컫는다. 을 넘어서 남원 땅에 이르렀는데, 도순문사(都巡問使) 최운해(崔雲海), 부원수(副元帥) 김종연(金宗衍), 조전원수(助戰元帥) 김백흥(金伯興) 등을 독려(督勵)하여 분격(奮擊)해서 대파하니, 적이 밤에 달아났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싸움이 아니었더라면 삼도(三道)의 백성이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 다시 사인(士人)을 현령(縣令)ㆍ감무(監務)로 삼았다.
우(禑) 때에 권간(權姦)이 정권(政權)을 잡아 여러 고을의 안집별감(安集別監)을 다투어 사인(私人)으로 서용(?用)하니 사림(士林)이 모르는 자가 자못 많았고, 아첨하여 승진하며 탐욕하고 잔학하기가 서리(胥吏)보다 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류(士類)를 서용하고 여러 고을의 안집별감을 폐지하였으며, 북사(府史)ㆍ서도(胥徒)에게는 다만 권무직(權務職)을 제수(除授)하였다.
9월 수령궁(壽寧宮) 곧 수창궁(壽昌宮)이다. 에 꿩이 모여들었다.
동10월 시중(侍中) 이색(李穡) 등을 명(明)에 보내어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또 왕관(王官)의 감국(監國)을 청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훙(薨)하고부터 천자(天子)가 매양 집정(執政)이 입조(入朝)하라고 불렀으나 다들 두려워서 감히 가지 못하였는데, 이색이 정승이 되매 스스로 입조하기를 청하니, 사람들이 다 굳이 말렸다. 이색이 말하기를,
“직위가 가장 높은 신하가 되어 늘 죽음으로 보답하고자 하였으니, 길에서 죽어 죽음으로써 사명을 봉행하더라도 국명(國命)을 천자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사는 것과 같다.”
하고, 드디어 첨서밀직(簽書密直)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경사(京師)에 가서 정조를 하례하고, 또 왕관의 감국과 자제(子弟)의 입시(入侍)를 청하였다. 그때 태조(太祖)의 위덕(威德)이 날로 성(盛)하여 중외(中外)의 인심이 태조에게 돌아가므로, 이색이 자기가 다녀오기 전에 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태조에게 함께 가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공(公)이 의리를 들어서 중국을 존중하나, 집정으로서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으면, 공의 충성을 천하에 밝힐 수 없으리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공과 함께 한꺼번에 사신으로 가면 국사(國事)를 누가 맡겠소? 내가 아들 하나를 가려서 공을 딸려 보내면 내가 가는 것과 같으리다.” 권근(權近)의 제릉비문(齊陵碑文)에 있다.
하여, 드디어 우리 태종(太宗)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이색이 금릉(金陵)에 이르니, 황제가 평소에 이색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매우 후하게 예대(禮待)하고 말하기를,
“원(元)의 조정(朝廷)을 섬겼으니 한어(漢語)를 알 것이다.”
하매, 이색이 한어로 곧 응대하기를,
“친조(親朝 고려왕의 친조를 뜻한다)를 청합니다.”
하니,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네 한어가 바로 납합출(納哈出)과 닮았다.”
하였다. 이색이 돌아와서 남에게 말하기를,
“황제는 마음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다. 내가,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으리라고 생각하면 황제가 그것을 묻지 않고, 묻는 것이 다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롱하였다.
【안】 사람들은 목은(牧隱)을 기롱하였으나, 이것은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다. 목은은 고려에 마음을 둔 사람이니, 태조의 위덕이 날로 성하여 인심이 돌아가는 것은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군국(軍國)의 대권(大權)이 이미 돌아갔으니, 저 고려의 유로(遺老)가 구구한 충성이 있더라도 어떻게 그 계책을 성취하겠는가? 임금이 폐위되고 나라가 어지러워졌으니 물러가야 마땅하겠으나, 목은이 하찮은 비평을 피하지 않고 조정에 나아가서 물러나지 않은 것은 그가 자기 한 몸으로 국가의 흥망을 맡은 것이다. 그때에는 철령(鐵嶺)에 위(衛)를 설치하는 일이 이미 미봉(彌縫)되었고,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황제를 격노(激怒)하게 한 일도 사실이 아닌 것이 되었으니, 사기(事機)의 긴절(緊切)한 것은 참으로 친조하는 일 한 가지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목은이 하정사(賀正使)가 되기를 자청하였고, 천자를 만나게 되어서는 친조를 주청(奏請)하고 또 왕관의 감국을 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내가,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으리라 생각하면 황제가 그것을 묻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일이라는 것이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이겠는가? 대개, 천하가 새로 정해지매 황제가 안집(安輯)에 뜻을 두어서, 목은이 바라는 바와는 같지 않은 데가 있으므로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상국(上國)에 의지하여 일을 하고자 한 뜻이 분명하다.
목은이 봉사(奉使)한 지 한 달이 못되어 또 강회백(姜淮伯)을 보내어 친조를 청하였으니, 그 친조를 청한 일이 다 목은의 꾀이다. 천자가 허락하지 않으매 또 사신을 보내어 친조를 청하고 목은이 빨리 친조하러 가도록 재촉하였으니, 그 은밀한 꾀는 대개 정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뒤에 대신(臺臣)이 이숭인(李崇仁)의 죄를 논하여 말하기를 ‘이색의 간사한 계책에 따라 창(昌)의 친조를 독촉하고 신우(辛禑)를 세우려 하였다.’ 하였으니, 그 기미가 이때에 이르러 드러났으며, 사세가 긴절하였다는 것은 이에 의하여 알 수 있다. 하늘이 이미 덕혜(德惠)를 끊었고, 창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창이 어린 것을 민망히 여겨 가는 것을 말렸으니, 이것도 천명(天命)이다. 포은(圃隱)은 일찍이 태조 때문에 발탁되었으므로 겉으로 보이기에는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과 같으나, 이것은 공신(功臣)에 함께 참여하여 형적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다 그때 제공(諸公)의 뜻이었으나, 사책(史冊)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11월 안개가 크게 끼었다.
○ 밀직사(密直使) 강회백(姜淮伯)을 명(明)에 보내어 조현(朝見)을 청하였다.
강회백 등이 명에 이르니, 황제가 분부하기를,
“고려의 신하가 아비를 내치고 그 아들을 세우고서, 그 아들이 와서 조회하고자 청하니, 대개 인륜이 크게 무너진 것이다. 사자(使者)는 돌아가서 동자(童子)는 와서 조회할 것 없으며, 세우는 것도 저희들에게 달려 있고 폐위하는 것도 저희들에게 달렸으니 중국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이르라.”
하였다.
12월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말[馬]과 환관(宦官)을 요구하였다.
○ 전 시중(侍中) 최영(崔瑩)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다시 최영을 잡아서 순군(巡軍)의 옥에 가두고 국문(鞫問)하여 충주(忠州)에 유배(流配)하고, 최영이 친신(親信)하던 송광의(宋光義)ㆍ안소(安沼) 등을 죽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낭사(郞舍) 허응(許應) 등이 상소하기를,
“최영은 국가의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결책(決策)하여 천자에게 죄를 졌으니,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천자에게 비소서.”
하매, 창(昌)이 이에 따라서 드디어 참(斬)하니, 최영의 나이는 73이었다. 최영은 처형에 임해서 사기(辭氣)와 안색(顔色)이 변하지 않았고, 죽는 날에는 도성(都城) 사람들이 저자[市]를 파하였다. 원근(遠近)에서 들은 사람들은 거리의 아이와 아낙네도 다 눈물을 흘렸고, 길가에 있는 주검 옆을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렸으며, 도당(都堂)에서는 부물(賻物)로 쌀ㆍ콩ㆍ베ㆍ종이를 보냈고, 사신을 보내어 명에 가서 최영의 처형을 아뢰게 하였다. 최영의 성품은 강직(剛直)하고 충청(忠淸)하며 힘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났다. 군진(軍陣)에 임하여 적을 대할 때에는 신기(神氣)가 안정되어 시석(矢石)이 좌우에 엇갈려도 두려운 기색이 거의 없고, 군사를 거느리는 것이 엄준하고 필승(必勝)을 기약하여 전사(戰士)가 한 발이라도 물러가면 곧 참하였으므로, 크고 작은 많은 싸움에서 가는 곳마다 공을 세우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최영의 나이 16이었을 때에 아버지 옹(雍)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는 금(金)을 돌과 같이 보아야 한다.”
하였는데, 최영이 종신토록 명심하여 산업(産業)에 종사하지 않고, 사는 집이 매우 좁고 더러웠으나 태연하게 거처하고,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고 여러 번 궁핍하기까지 하였고,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은 자를 보면 개 돼지만도 못하게 여겼다. 자신이 장군ㆍ재상의 우두머리로서 병권(兵權)을 오래 맡았으나 뇌물이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 청렴에 감복하였으며, 대체를 유지하기를 힘쓰고 세리(細理)를 따지지 않았다. 종신토록 군병을 거느렸으나 휘하 사졸 중에 얼굴을 아는 자가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으며, 군진(軍陣)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동안에 이따금 글을 짓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남의 불의(不義)를 보면 반드시 매우 미워하여 몹시 배척하였으며, 매양 도당(都堂)에 나아가서는 안색을 바로잡고 곧은말을 하였다. 일찍이 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국사(國事)에 대하여 한밤부터 아침까지 생각하고서 동렬(同列)의 재상들에게 말하면, 나와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이 없으니 치사(致仕)하고 한가히 사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조금 고지식하고 학문이 없으며 일은 다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사람을 잘 죽여서 위엄을 세웠다. 윤소종(尹紹宗)이 최영을 논하기를,
“공(功)은 한나라를 덮고 죄는 천하에 찼다.”
하였는데 명언(名言)이다. 본조에서 무민(武愍)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안】《용재총화(?齋叢話)》에,
“최영이 처형에 임하여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탐욕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무덤이 이제껏 벌거숭이라 사람들이 적분(赤墳)이라 부른다.”
하였는데, 무덤은 지금 고양군(高陽郡)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는 대자산(大慈山)에 있으며, 변계량(卞季良)의 이런 시(詩)가 있다.
나라를 빛내기에 평생 바치니 / 奮威光國?星星
어린 아이까지도 그 이름 알고 / 學語街童盡識名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아서 / 一片壯心應不死
천년토록 태산과 함께 남으리 / 千秋永與太山橫
[주D-001]곡영(谷永)처럼 …… 공박(攻駁)해서 : 곡영은 한 성제(漢成帝) 때 사람으로 집권자인 대장군 왕봉(王鳳)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상소한 것을 말한다. 이 소(疏)에는 은연중 임금의 잘못을 들추어 왕봉을 두둔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서》 85권 찬(贊)에도 “곡영이 신백(申伯)을 끌어대어 왕봉에게 아부하고, 왕담(王譚)과 왕음(王音)의 사이에 틈이 생기게 하였으니, 진실은 부족하면서 말만 잘하는 자라 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02]당서법(黨序法) : 인구(人口)의 비례에 따라 학교를 설치하여 가르치는 것.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의 교육에는 가(家)에는 숙(塾)을 두고, 당(黨)에는 상(庠)을 두고, 술(術)에는 서(序)를 두고 나라에는 학(學 : 태학)을 둔다.” 하였는데, 그 주에 “25가(家)가 여(閭 가(家)임)이고, 5백 가가 당(黨)이고, 술(術 주(州)임)은 2천 5백 가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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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7상
기사년 후폐왕 창(後廢王昌) 원년 11월 이후는 공양왕(恭讓王)에 속한다.(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22, 1389)
춘정월 다시 사한(史翰)ㆍ전교(典校)로 하여금 궐내(闕內)에 입직(入直)하게 하였다.
구제(舊制)로는, 예문관(藝文館)이 사명(詞命)을 맡고, 춘추관(春秋館)이 기사(記事)를 맡고, 전교시(典校寺)가 사전(祀典)을 맡아서 축문(祝文)을 지으며, 금중(禁中)에 관아(官衙)를 두어 금내(禁內)라 불렀었다. 뒤에 관시(館寺)가 궐외(闕外)로 나가 있게 되매, 본직관(本職官)이 사한에서 2인과 전교에서 1인이 궐내에 입직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관(史館)의 최견(崔?) 등이 또 상서(上書)하기를,
“본조(本朝)에서는 양관(兩館)을 두고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이 있는 8인을 뽑아서 사한을 맡기고 또 겸관(兼官)을 두어 거느리게 하니, 그 직임을 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근래에는 공봉(供奉) 4인만으로 그 일을 감당하니, 인원이 적고 관질(官秩)이 낮으므로 구중(九重)의 일과 묘당(廟堂)의 의논을 갖추 기록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사한 8인이 각각 사초(史草) 2본(本)을 써서, 관질이 차서 천직(遷職)할 때에 한 본은 관(館)에 바치고 한 본은 집에 두어 뒷날의 빙고(憑考)에 대비하게 하고, 겸관은 수찬(修撰) 이하를 충원(充員)하여 각각 견문에 따라 기록하여 사관(史館)에 보내게 하고, 경외(京外)의 크고 작은 아문(衙門)들은 모든 시행한 일을 낱낱이 관에 신보(申報)하여 기록을 빙고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가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여 불살랐다.
박위가 병선(兵船) 1백 수(?)로 공격하여 왜선(倭船) 3백 수와 집을 거의 다 불살랐고, 원수(元帥) 김종연(金宗衍)ㆍ최칠석(崔七夕)ㆍ박자안(朴子安)이 잇달아 이르러 사로잡혔던 1백여 인을 찾아 돌아왔다.
3월 조회(朝會)에 비로소 음악을 썼다.
예조(禮曹)가 청한 것이다. 이에 앞서 조준(趙浚)이 상언(上言)하기를,
“본조(本朝)의 악절(樂節)은, 무릇 빈객(賓客)에게 연향(宴饗)할 때에 반드시 당악(唐樂)을 쓰고 이어서 향악(鄕樂)을 쓰는데, 지금 창기(倡妓)의 가무(歌舞)는 성음(聲音)의 절주(節奏)가 온통 중화(中和)에 맞지 않으니, 예악(禮樂)의 근본을 매우 잃었습니다. 삼가 조정(朝廷)의 의주(儀注)를 상고하건대, 시조(視朝)ㆍ연향에 다만 영인(伶人)을 시켜 음악을 연주하고 창기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이 법을 지켜 궁중에서 연향할 때에는 다만 당악을 연주하고 창기는 어전에 가까이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안】《성호사설》에 이르기를,
“음악은 화담(和淡)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요, 욕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고려의 음악에 헌선도(獻仙桃)ㆍ수연장(壽延長)ㆍ오양선(五羊仙)ㆍ포구락(抛毬樂)ㆍ연화대(蓮花臺)ㆍ무고(舞鼓)의 여섯 가지가 있는데, 다 여악(女樂)이었다.”
하였다. 최승로(崔承老)가 상서(上書)하여, 향악을 보기 좋아하는 것을 광종(光宗)의 실덕(失德)이라 하였고, 또 의종(毅宗)의 성기(聲妓)의 놀이로 말하면 다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 등이 권해서 한 일인데, 사신(史臣)이 써서 경계할 일로 삼았으나, 후왕(後王)이 대개 고치지 못하였다. 이제 조준이 창기는 어전을 가까이하지 말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 말이 정대(正大)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하4월 황제가 양녀(良女)를 요구하였다.
이색(李穡) 등이 돌아올 때에 황제가 선유(宣諭)하기를,
“고려에 근본이 좋은 집의 처녀가 있을 것이니, 데려다가 혼인시키리라.”
하였다.
6월 평리(評理) 윤승순(尹承順), 밀직(密直) 권근(權近)을 명(明)에 보내어 다시 친조(親朝)를 청하고, 또 처녀(處女)의 일을 아뢰게 하였다.
○ 심덕부(沈德符)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안종원(安宗源)을 찬성사(贊成事)로, 정몽주(鄭夢周)를 대제학(大提學)으로 삼았다.
추7월 우리 태조와 심덕부 등이 여흥(驪興)에서 폐왕(廢王)을 연향(宴享)하였다.
우(禑)의 생일이었다.
○ 왜(倭)가 함양(咸陽)에 침구(侵寇)하고, 절제사(節制使) 김상(金賞)은 싸움에 패하여 죽었다.
○ 이색(李穡)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이림(李琳)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이색이 이림을 자기의 후인으로 천거하였다.
○ 왜(倭)가 철주(鐵州)에 침구(侵寇)하였다.
왜가 지주(知州)의 아내를 잡으매 지주의 아내가 물에 몸을 던지니, 왜적이 구원하고는 경탄(驚歎)하여 감히 근접하지 못하고 금(金)으로 속(贖)하기를 요구하매, 지주가 속하여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으나, 또 적에게 빼앗겼는데 금이 없어서 속하지 못하매, 지주의 아내가 굴하지 않고 살해당하였다. 그때 권근(權近)이 사명을 받들고 이곳을 지났는데, 시(詩)를 지어서 애도(哀悼)하였다.
8월 유구국(琉球國)이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조빙(朝聘)하였다.
유구국은 우리 나라의 동남 바다 가운데에 있고 동으로는 일본(日本)에 가까운데, 예전부터 사신을 교통한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나라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우리 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그 신하 옥지(玉之)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바쳐 칭신(稱臣)하고, 왜(倭)에게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돌려보내 오고, 방물(方物)인 유황(琉黃)ㆍ소목(蘇木)ㆍ호초(胡椒)ㆍ갑(甲)을 바쳤다. 사신이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니, 도당(都堂)에서는 전대(前代)에 오지 않았었다 하여 그 접대를 유난(留難)하였으나, 창(昌)이 이르기를,
“먼 나라 사람이 조공(朝貢)하러 왔으니, 입경(入京)하게 하여 위로해서 보내는 것이 옳으리라.”
하고, 드디어 판사(判事) 진의귀(陳義貴)를 영접사(迎接使)로 보냈다. 창이 유구에서 바친 소목ㆍ호초를 궁중에서 쓰려 하매, 판사 유백유(柳伯濡)가 간(諫)하기를,
“예전에 충숙왕(忠肅王)께서 젓항아리[?瓮]를 궁중에 두셨는데, 사신(史臣)이 그것을 써서 전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비로소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정몽주(鄭夢周)ㆍ성석린(成石璘) 등이 건의하여 설치하였는데, 곧 제도(諸道)에서 시행하게 하였다.
○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을 파직(罷職)하였다.
문익점은 젊어서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으로 이름났으며, 일찍이 어머니의 상중(喪中)에 왜구(倭寇)를 당하여, 홀로 산간(山間)에 남아 있어 최질(衰?)을 입고 제사를 올리며 묘소 앞에 엎드려 호곡(號哭)하면서 맹세코 죽어도 떠나지 않으므로, 왜가 감탄하여 가해(加害)하지 않았는데,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旌閭)한 일이 있었다. 이때 현량(賢良)으로서 징소(徵召)되어 좌사의에 제배(除拜)되었는데, 간관(諫官) 이준(李?)이 사전(私田)을 다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상서(上書)하여 간쟁(諫諍)할 때에 문익점이 서명(署名)하지 않으니, 조준(趙浚)이 탄핵(彈劾)하여 전리(田里)로 방귀(放歸)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문익점이 사명을 받들어 원(元)에 들어갔었는데, 그때 목면(木綿)의 씨를 얻어 와서 그 장인[舅]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어서 심으니, 3년 만에 드디어 크게 번식하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목면의 시초이다.
이자(李子)는 이렇게 적었다.
그의 효성(孝誠)은 사생(死生)에 임해서도 빼앗기지 않는 지절(志節)이 있었으니, 혁명(革命)의 시기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알 만하다. 조준이 한 때 숨은 흠을 들추어 한 말이 어찌 그 지절을 더럽히겠는가!
○ 김윤후(金允厚)ㆍ김인용(金仁用) 등을 유구(琉球)에 보내어 보빙(報聘)하게 하였다.
9월 명(明)에 친조(親朝)하러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창(昌)이 친조하려 하매, 이색(李穡)이 아뢰기를,
“요야(遼野)는 매우 추우니 일찍이 떠나셔야 합니다.”
하였다. 그런 뒤에 근비(謹妃) 이씨(李氏)가 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민망히 여겨서, 도당(都堂)에 말하여 가는 것을 멈추게 하였다.
○ 이색(李穡)ㆍ이림(李琳) 및 우리 태조에게 검리상전 찬배불명(劍履上殿贊拜不名) 을 명하였다.
조준(趙浚)ㆍ정몽주(鄭夢周)의 청을 따른 것이다.
○ 장하(張夏)ㆍ성석린(成石璘)을 평리(評理)로, 조운흘(趙云?)ㆍ김사형(金士衡)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삼았다.
○ 청조사(請朝使) 윤승순(尹承順) 등이 명(明)에서 돌아왔다.
윤승순 등이 경사(京師)에 이르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이원명(李源明)이 꾸짖기를,
“네가 국왕(國王)의 명을 받아서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네가 왕에게 고하지 않고서 네 벼슬을 남에게 사사로이 주고 남도 왕명이 없이 네게서 사사로이 받는다면, 국왕이 어찌 죄주지 않겠는가! 네 나라의 왕은 황제의 명을 받아서 왕작(王爵)을 이었는데, 이제 주청(奏請)하지 않고서 그 아들에게 사사로이 주었으니, 이것이 무슨 예(禮)인가?”
하였다. 이 대목은 권근(權近)의 《양촌집(陽村集)》에서 나왔다. 돌아올 때에 황제의 분부를 기록하여 보였는데, 이르기를,
“고려는 나라 안에 일이 많은데, 배신(陪臣)이 된 자 중에 충신(忠臣)과 역신(逆臣)이 뒤섞여서 하는 일이 다 좋은 책모(策謀)가 아니다. 임금의 자리가, 왕씨(王氏)가 시해(弑害)되고부터 후사(後嗣)가 끊어지매, 뒤에 왕씨를 빌어 이성(異姓)을 세웠을지라도 역시 삼한(三韓)이 대대로 지켜온 좋은 책모가 아니니, 동자(童子)는 부경(赴京)할 것 없다. 과연 어질고 슬기로운 배신이 직위에 있어, 위로는 임금과 신하의 분수를 바르게 하고, 나라에 대해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세운다면, 수십 년 동안 조회하러 오지 않은들 무엇이 걱정이겠으며, 해마다 조회하러 온들 무엇이 언짢겠는가?”
하였고, 따라서 처녀(處女)를 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권근(權近)이 오는 도중에 열어 보고, 돌아와서는 이림(李琳)에게 먼저 보인 뒤에야 도당(都堂)에 보냈으므로, 헌관(憲官)이 권근의 죄를 핵론(劾論)하여 사형에 처하고자 하였으나, 태조가 신구(申救)하여 면할 수 있었다.
동10월 안개가 크게 꼈다.
○ 큰 비가 내리고 번개쳤다.
○ 제학(提學) 이숭인(李崇仁), 밀직(密直) 권근(權近)을 유배(流配)하였다.
이숭인은 문장이 간결하고 고고(高古)하여, 이색(李穡)이 나라 안에 견줄 사람이 드물다고 자주 칭찬하므로, 윤소종(尹紹宗)이 꺼려하여, 조준(趙浚)에게 참소(讒訴)해서 죽이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간관(諫官) 구성우(具成佑)ㆍ오사충(吳思忠)ㆍ남재(南在) 등이 탄핵하기를,
“이숭인은 간사하고 탐욕하여, 어미의 상(喪)을 당하여 시관(試官)이 되기를 구하였고, 이색을 따라 부경(赴京)해서는 몸소 물건을 매매하였으니, 비록 일곱 걸음에 시(詩)를 짓고 입으로는 요순(堯舜)의 말을 욀지라도 참으로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소인(小人)입니다.”
하였는데, 권근이 상서(上書)하여 다투기를,
“이숭인의 아비가 늙고 병이 들어 생전에 그 아들이 과시(科試)를 맡아보는 영화를 보고자 하므로, 국가에서 그로 하여금 과시를 맡아보게 하였습니다. 굳이 사양하면, 이는 죽은 어미가 있다는 것은 알되 산 아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므로 이숭인이 억지로 취직하였으니, 이것이 그 사람의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이 어진 줄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 벼슬하는 사람 중에는 혹 부모가 다 죽었는데 3년 안에 화요직(華要職)을 거쳐 헌부(憲府)에 앉아서 남을 형벌에 처하고 죽이되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 사람은 누구를 영화롭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비를 위하여 어미를 잊은 것을 오히려 불효라고 한다면, 자기를 위하여 부모를 잊는 것을 참된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숭인의 재주와 행실을 말하고 매매하였다는 것은 무함이라는 것을 개진(開陳)하였다. 그때 조준이 기복(起復)하여 관직에 있었으므로 권근의 소(疏)가 자기를 논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유감을 품고 간관을 시켜 권근이 이숭인을 편들고 자문(咨文)을 사사로이 누설한 죄를 논핵(論劾)하게 하였다. 이숭인을 경산부(京山府)로 유배하고, 권근을 우봉현(牛峰縣)으로 유배하였다가 곧 영해(寧海)로 이배(移配)하였다. 이색도 불안하여, 전문(箋文)을 올려 퇴직(退職)을 청하고 장단(長湍)으로 돌아갔다.
11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 우레[雨雷]가 있었다.
○ 대호군(大護軍) 김저(金佇) 등이 폐왕 우(廢王禑)를 복위시키려고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하옥(下獄)되었고, 우리 태조가 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정창군 요(定昌君瑤)를 왕으로 세웠다.
대호군 김저와 전 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가 몰래 우(禑)에게 뵈었다. 김저는 최영(崔瑩)의 생질이고, 정득후도 최영의 겨레붙이이다. 우가 울며 말하기를,
“답답하게 여기서 손도 못 쓰고 죽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역사(力士) 한사람을 얻어 이시중(李侍中)을 죽일 수 있다면, 내 뜻을 펼 수 있겠다.”
하고, 검(劒) 하나를 주어 평소에 친한 예의판서(禮儀判書) 곽충보(郭忠輔)에게 보내어 팔관일(八關日)에 거사하게 하고, 일이 성취되면 비(妃)의 동생을 아내로 삼게 하여 부귀(富貴)를 함께 누리자고 하였다. 김저가 와서 곽충보에게 알리니, 곽충보가 겉으로 승낙하고 태조에게 달려가 알렸다.
14일(무인) 팔관소회(八關小會) 때에 태조는 집에 있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매, 김저 등이 밤에 태조의 집으로 갔다가 잡히니, 정득후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김저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국문(鞫問)하니, 전 판서(判書) 조방흥(趙方興) 및 변안열(邊安烈)ㆍ이림(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우홍수(禹洪壽)가 여흥(驪興)의 왕을 맞아들여 내응(內應)할 것을 함께 모의한 것으로 옥사(獄辭)가 관련되었다. 그래서 우(禑)를 강릉(江陵)으로 옮겼다. 태조가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 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政堂文學) 설장수(?長壽), 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趙浚), 판사(判事) 박위(朴?),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鄭道傳)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병위(兵衛)를 크게 벌이고 의논하기를,
“우(禑)와 창(昌)은 본디 왕씨(王氏)의 자손이 아니므로 조종(祖宗)의 제사를 받들 수 없고, 또 천자(天子)의 명이 있으니, 가왕(假王)을 폐하고 진왕(眞王)을 세워야 하오. 정창군 요(定昌君瑤)가 신왕(神王 신종(神宗))의 7세손이요 가장 가까운 족속이니, 이를 세워야 마땅하오.”
하니, 조준은 말하기를,
“정창군은 부귀하게 자라서 재산을 다스릴 줄만 알고, 나라를 다스릴 줄 모릅니다.”
하고, 성석린은 말하기를,
“임금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는 어진이를 가려야 하고, 족속이 가깝고 먼 것을 논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종실(宗室) 몇 사람의 이름을 써서 계명전(啓明殿)으로 가서 탐주(探籌)하니, 다시 요(瑤)의 이름이 나왔다. 15일(기묘) 새벽에 태조가 심덕부 등 8인과 함께 정비궁(定妃宮)에 가서 분부를 받들어 창(昌)을 강화(江華)로 귀양보내고 성을 신씨(辛氏)로 하였다. 신창은 1년 동안 재위(在位)하였고, 죽을 때에 10세였다. 백관(百官)이 요를 맞이하여 세우니 요가 놀라고 두려워서 사양하매, 정비가 손수 보인(寶印)을 주어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게 하니, 이때 나이 45인데 근심으로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의 의식(衣食)과 사령(使令)이 다 넉넉한데, 이제는 짐이 이렇듯 무거워졌으니, 할 바를 모르겠다.”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날 저녁에 왕의 사위인 강회계(姜淮季)의 아버지 시(蓍)가 왕에게 아뢰기를,
“제장(諸將)이 서로 전하를 세운 것은 저희들의 화(禍)를 면하려고 꾀한 것이고 왕씨를 위한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는 삼가서 가까이하여 믿지 마시고 스스로 보전할 방법을 생각하소서.”
하였는데, 윤소종(尹紹宗)이 이 말을 듣고 태조에게 알리니, 태조가 입대(入對)하여 참소(讒訴)한 사람을 죄줄 것은 청하였으나 왕이 답하지 않아서, 드디어 공신(功臣)들과 사이가 벌어졌다. 얼마 뒤에 김저(金佇)가 옥 중에서 갑자기 죽으매 저자[市]에서 참시(斬尸)하고, 그의 무리 정지(鄭地)ㆍ이거인(李居仁)ㆍ유혜손(柳惠孫)ㆍ이을진(李乙珍)ㆍ이유인(李惟仁)ㆍ유번(柳蕃)ㆍ조호(趙瑚)ㆍ안주(安柱) 등 27인을 유배(流配)하고, 조방흥(趙方興)을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안】 신씨(申氏)는 이렇게 적었다.
원천석(元天錫)의 문집(文集)에,
“듣건대 이달 15일에 정창군(定昌君)이 즉위하고, 전왕(前王) 부자는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었다 한다. 그래서 시(詩) 2수(首)를 짓기를,
전왕 부자가 서로 여의니 / 前王父子各分離
머나먼 동쪽 서쪽 하늘가로다 / 萬里東西天一涯
그 몸이야 서인을 만들었으나 / 可使一身爲庶類
마음은 길이길이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태조의 신령께서 하늘에 계셔 / 祖王信誓應乎天
끼친 은택 이백년 흘러왔거니 / 餘澤流傳二百年
진가를 가리기 어이 늦었나 / 分揀眞假何不早
저 하늘은 분명히 살피시리라 / 彼蒼之鑑昭明然
했다.”
하였다.
○ 우(禑)와 창(昌)을 낮추어 서인(庶人)을 만든 지 얼마 안 가서, 간관(諫官) 오사충(吳思忠) 등이 우와 창을 죽일 것을 청하기를,
“《춘추(春秋)》의 의리에 의하면, 난신적자는 누구나 죽일 수 있으며 우선 시행한 뒤에 아뢰고 사사(士師)에게 맡길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상언(上言)하기를,
“이흉(二凶)은 조종의 죄인이므로, 왕씨(王氏)의 신하로서는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니, 하루라도 왕씨의 땅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윤회종은 소종(紹宗)의 아우이며 신하로서 신우ㆍ신창을 섬겼었고 그 직임이 언관(言官)이 아닌데도 상서하여 죽일 것을 청하였으므로, 비평하는 사람이 있었다. 윤회종의 상소에 따라 왕이 재상들에게 두루 물었는데, 태조가 아뢰기를,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미 강릉(江陵)에 안치(安置)하고 조정(朝廷 중국)에 아뢰었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신등(臣等)이 있는데 난을 일으키려 한들 되겠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고서 정당(政堂) 서균형(徐均衡)을 강릉에 보내어 신우를 죽이고, 대제학(大提學) 유순(柳珣)을 강화(江華)에 보내어 신창을 죽였다. 신우의 아내 최씨(崔氏)가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첩(妾)이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아비의 잘못입니다.”
하고, 10여 일 동안 먹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하여 울고, 밤에는 반드시 주검을 안고 자고, 나락을 얻으면 반드시 깨끗하게 쓿어서 제사에 쓰니, 당시 사람들이 가엾이 여겼다. 주서(注書) 길재(吉再)는 채과(菜果)ㆍ염장(鹽醬)을 먹지 않고 3년 동안 방상(方喪)을 입었다.
【안】 이륙(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신우가 처형될 때 영비(寧妃) 최씨(崔氏)가 몸을 날려 달려가 구하려 하매, 읍리(邑吏)가 그 옷자락을 잡아 물러나게 하니, 영비가 큰 소리로 꾸짖기를 ‘늙은 놈이 어찌 감히 그 손으로 나를 더럽히느냐?’ 하고 그 옷자락을 찢어 버리니, 보는 사람들이 오싹해졌다. 근비(謹妃) 이씨(李氏)가 늙어서 개성(開城)의 본제(本第)에 살 때에, 부러진 병풍(屛風) 하나가 있었는데 시비(侍婢)가 고치려 하니, 근비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친히 부러뜨리신 것이니 고쳐서는 안 된다.’ 하였고, 신우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제사하였다. 태조가 두 비(妃)에게 각각 수신전(守信田) 3백 결(結)을 내리고 근비에게는 3백 결을 더 내렸는데, 이것은 대개 포상(褒賞)의 뜻이었다.
○ 신씨(申氏)는 이렇게 적었다.
원천석(元天錫)의 문집(文集)에,
“국가에서 전왕(前王) 부자에게 사사(賜死)하였다. 그래서 시 한 수를 짓기를,
지극한 지위 된 것 임금의 은혜건만 / 位高鍾鼎是君恩
미워하고 앙심 품어 한 집안을 멸했네 / 反目含讐已滅門
한 나라는 어찌 능히 복을 이어 누릴까 / 一國豈能流景祚
저승 가도 깊은 원한 씻기 어려워라 / 九原難可雪幽寃
했다.”
하였다. 또 이렇게 적었다.
신우ㆍ신창의 일은, 원천석이 적은 것을 믿을 만한 사실(史實)로 삼아야 한다. 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원천석의 문집을 보건대, 신우를 옮긴 일, 최영이 처형된 일, 신우ㆍ신창을 폐위하고 사사한 일, 목은이 장단으로 귀양간 일에 대하여 다 시(詩)가 있는데 숨김없이 곧게 썼으니,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에 비하면 해ㆍ별과 무지개 이상의 큰 차이가 있다. 초야(草野)에 이런 동호(董狐)와 같은 직필(直筆)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돌에 눌린 죽순(竹筍)이 비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D-001]검리상전 찬배불명(劍履上殿贊拜不名) : 임금이 공신(功臣)에게 내리는 특별한 은전이다. 검리상전은 임금을 뵐 적에 칼과 신발을 벗지 않는 것을 말하며, 찬배는 임금에게 절할 적에 곁에 돕는 자를 두는 것이고, 불명은 임금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다.
[주D-002]허물을 …… 안다 : 사람의 잘못을 보고서 그의 어짊과 어질지 않음을 안다는 뜻. 《논어》 이인(里仁)에 “사람의 허물은 각각 그 유(類)에 따르는 것이므로 허물을 보면 그의 어짊과 어질지 않음을 안다.” 하였는데, 그 주에 “사람의 허물은 그 유에 따르는 것으로, 군자는 늘 후하게 하노라고 잘못을 범하지만, 소인은 늘 박하게 하노라고 잘못을 범한다.” 하였다.
[주D-003]이백년(二百年) : 이는 오백년(五百年)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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